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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권씨 스크랩 안동 권씨와 권정
싸리골 추천 0 조회 164 12.06.13 23:01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13 안동 권씨와 권정


600년 한결같은 후대의 칭송
벼슬 버리고 낙향해 자나 깨나 ‘고려 회복’ 생각 … 후손들 ‘대’와 ‘정자’ 세우고 뜻 기려
허시명/ 여행작가 www.travelwriters.co.kr
 

영주시 구성산 암벽에 새겨진 권정을 기리는 각자(刻字)들.

“조상은 후손을 낳고, 후손은 조상을 만든다.”

고려 말 불사이군 충신들의 발자취를 찾아다니면서 실감하는 말이다.

경북 영주시에 갔을 때다. 영주시 한복판 구성공원이 된 구성산 자락에, 조선 제일의 개국공신 정도전의 집터가 있다. 판서(判書)가 3명이나 났다 하여 삼판서 구택터로 알려진 영주2동 431번지다. 예전에 늘씬한 한옥이 자리했다는데 지금은 양옥이 들어서 옛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이성계와 조선의 지분을 반분해도 좋을 혁명가지만, 그가 살았던 옛터에 팻말 하나 없으니 쓸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지금에 이르러 보자면, 구성산의 주인은 정도전이 아니라 그와 동시대에 살면서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권정(權定, 1353~1411)이다. 삼판서 구택터에서 구성산 굽이를 돌아들면 권정을 기리는 봉송대(奉松臺)가 있다. 그 벼랑 밑에 권정의 신도비가 있는데, 신도비 안쪽에 권정의 정신을 기린 ‘不事二君(불사이군)’의 각자(刻字)가 있다. 그곳에서 구성산을 오르면 권정을 배향했던 구호서원(鷗湖書院) 터와, 역시 그를 기리는 반구정(伴鷗亭)이 나온다. 삼판서 구택터에서 반구정까지 400m도 안 되니 아주 가까운 거리다.

이쯤 되면 정도전을 압도하는 권정이 누굴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권정은 안동 사람이다. 그가 살던 동네가 안동시 예안면 기사리(棄仕里)다. 버릴 기(棄)에 벼슬 사(仕)자를 써서 ‘벼슬을 버린 동네’인데, 권정이 벼슬을 버리고 살았대서 붙여진 600년 된 이름이다.

 

호 ‘사복재’는 고려를 돌이켜 생각한다는 뜻

 

권정은 고려 개국공신으로 안동의 태사묘에 배향된 안동 권씨 시조 권행(權幸)의 14세손이다. 그는 지금은 안동댐에 잠긴 안동시 예안면 북계촌에서 태어났다. 야은 길재(吉再)와 동갑인데, 문과 급제도 우왕 12년(1386)에 길재와 함께 했다. 충청도 괴산의 지군사(知郡事)를 역임하고, 내직에 들어 좌사간(左司諫, 중서문하성의 정육품직)을 지냈다. 임금께 올린 보고가 임금의 뜻을 거슬러 외직인 김해부사로 옮겨 앉게 됐다. 김해부사로 있을 때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 땅인 안동부 임하현 옥산동 도목촌 북쪽의 지실어촌(只失於村)에 은거했다. 태조 이성계가 승지 벼슬을 내려 그를 불렀고, 태종 이방원이 대사간과 대사헌을 내려 그를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호를 사복재(思復齋)라 했는데 이는 고려를 돌이켜 생각한다는 뜻이고, 집 앞에 정자를 지어 반구정이라 했는데 이는 옛날로 돌아간다는 반구(返舊)를 차음한 것이다. 또한 대를 지어 봉송대라 했는데 이는 송도(개성)를 받든다는 봉송(奉松)을 차음한 것이다. 자신의 호부터 머문 공간까지 죄다 고려 왕조를 받들고 회복하려는 의지로 가득 채운 것이다. 그가 죽은 뒤 촌로들이 마을 이름을 ‘지실어촌’에서 ‘기사리’로 바꾼 것도 자연스런 호응으로 여겨진다.

그의 묘는 기사리에서 멀지 않은 도목촌 옥산 자락에 있다. 그는 아들 넷과 딸 둘을 두었는데, 아들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면서 오래도록 그의 행적은 물론이고 묘조차 잊혀졌다. 후손들은 그가 죽은 지 194년이 지난 뒤인 1605년에야 비문(碑文)을 찾고, 1785년에 깨진 비석을 찾아 비로소 그의 묘와 행적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권정의 사위인 우홍균(禹洪鈞)의 ‘유사(遺事)’라는 글도 발견됐다. 우씨 집안에 보관되어온 글인데, 우홍균은 장인 권정에 대해 “고려조에서 직간(直諫)하던 고결한 절의의 선비였으며, 명리(明理)의 학문에 뛰어났다”고 기록했다.

 

구성산 거북머리 위에 세워진 봉송대. 봉송대 뒤편으로 구성산과 기와 건물 반구정이 보인다. 안동시 예안면 기사리에 있는 권정의 유허비.(왼쪽부터)

현재 기사리에는 권정의 유허비가 있다. 안동댐이 들어서면서 500m가량 마을 위쪽으로 옮겨진 상태다. 유허비 뒤쪽의 바위에는 ‘忠節(충절)’ ‘奉松(봉송)’ ‘返舊(반구)’ ‘淸風高節(청풍고절)’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제 더는 조상의 유적을 잃어버리지 않고, 조상의 정신을 잊지 않겠다는 후손의 다짐처럼 보인다.

기사리는 예안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5리쯤 떨어져 있는데, 예안면 소재지가 내려다보이는 서쪽 산자락에는 역동(易東) 우탁(禹卓)의 묘소가 있다. 고려 충선왕 때 왕이 옳지 않은 행동을 하자 도끼를 들고 대궐로 들어가 상소했던 인물이다. 상소를 들어주든지, 들어줄 수 없다면 도끼로 자신의 목을 치라는 뜻이었다. 우탁이 벼슬을 버리고 은거했던 곳이 바로 안동 예안현(지금은 수몰된 안동시 와룡면 선양동)이다. 권정이 태어난 북계촌의 다른 이름이 역동 선생의 호를 빌려 쓴 ‘역동(易洞)’이었고, 권정의 사위인 우홍균이 우탁의 고손자였던 점으로 보아, 권정이 우탁의 지조와 결기를 염두에 두고 살았으리라 추정해볼 수 있다.

 

권정 살던 기사리에 ‘유허비’ 남아

 

그런데 권정이 세웠다는 반구정과 봉송대가 안동 예안면에서 자취를 감추고 영주 시내 한복판에 자리 잡게 된 것은 어떤 경위일까? 권정의 네 아들은 출사(出仕)는 했지만, 순탄하게 살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큰아들 조(照)는 문과에 급제해 사재감정(司宰監正)을 지냈지만 말년의 행적을 알 수 없고, 후손조차 끊어졌다. 넷째 아들 시(時)도 후손이 끊겨 자세한 행적을 알 수 없다. 셋째 아들 서(曙)는 울산부사를 지냈고 그 후손들이 성주에 많이 모여 산다. 둘째 아들 요(曜)는 보령현감을 지냈는데 어떤 연유인지 관직을 버리고 처가 동네인 영주에 들어가 살았다. 영주 구성산 주변에 모여 살며 권정의 공간을 마련한 이들이 바로 권요(權曜)의 후손들이다.

구성산의 반구정은 영주에 들어간 권정의 후손들이 번창해 ‘이 땅은 선생이 사시던 곳은 아니지만 기맥(氣)이 모인 곳이니 혼령이 오르내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여기면서 1780년에 마련한 것이다. 거북처럼 생긴 구성산의 거북머리 위에 봉송대가 세워진 것은 훨씬 뒤인 1948년의 일이다.

1958년 영주에 큰 홍수가 나기 전까지 봉송대와 반구정 밑은 죽계천이 휘감아돌아 호수를 이루고, 물새들이 날아다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영주의 옛 사진을 보니 강가에 우뚝 선 봉송대의 자태가 자못 멋들어졌다. 하지만 홍수가 난 뒤로 물길을 직선으로 뽑아낸 통에 호수 자리에 철길이 놓이고 민가가 들어서 옛 정취는 찾을 길이 없게 됐다.

풍광은 달라졌지만 권정을 사모하고 기리는 후손들의 정신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 두터워지는 것 같다. 구성산 바위에 새겨진 ‘不事二君’의 각자가 어제 새긴 듯 선명하다. 권정은 한때 후손들조차 그 행적을 잊을 정도였으니 두문동 72현을 헤아릴 때에 거론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다시 두문동 72현을 꼽는다면 기사리로 명명된 마을에서 사복재로 호를 짓고, 반구정과 봉송대를 세워 고려를 회복하려 했던 권정의 이름을 뺄 수는 없을 것이다.

 

 

 

 

 

14.경주 김씨와 김자수

죽음으로 지켜낸 ‘가문의 절개’
형조판서 벼슬 받으러 가던 중 태재서 자결 … “비석 세우지 말라” 대대손손 강직 이어받아
허시명/ 여행작가 www.travelwriters.co.kr
 

묘비를 세우지 말라 하여 뉘어놓은 신도비. 원래는 땅에 묻어두었는데 근자에 땅 위로 올리고, 새로 비석을 만들어 세워놓았다.

두문동 72현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는 죽음에 이르러 “내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은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않고, 비석을 눕혀두었다. 김자수 묘는 경기도 분당 서현역에서 광주시 오포읍으로 넘어가는 태재마루 근처 오포읍 신현리 상태마을에 있다.

 

고려 향한 충절 목숨 바쳐 실천

 

그가 세상을 떠난 날은 태종 13년(1413) 11월14일이다. 태종으로부터 형조판서로 부임하라는 전갈을 받고, 고향 안동에서 한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아들 근(根)이 초상 치를 준비를 갖추고 뒤를 따랐다. 김자수는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독약을 준비한 상태였다. 벼슬을 받으면 고려를 향한 충절을 저버리는 일이 되고, 벼슬을 받지 않으면 집안이 풍비박산 날 진퇴양난의 처지였다. 그가 추령(秋嶺, 현재의 태재로 추정)에 이르렀을 때 “나는 지금 죽을 것이다. 오직 신하의 절개를 다할 뿐이다. 내가 죽으면 바로 이곳에 묻고, 비석을 세우지 말라”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平生忠孝意 평생토록 지킨 충효
今日有誰知 오늘날 그 누가 알아주겠는가
一死吾休恨 한 번의 죽음 무엇을 한하랴만은
九原應有知 하늘은 마땅히 알아줌이 있으리라.

김자수가 남긴 절명사(絶命詞)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태재에서 맞이한 것은 눈앞으로 한양 땅이 펼쳐지고, 등 뒤로 포은 정몽주(鄭夢周) 묘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 물러설 수 없는 선택의 시간이 온 것이다. 한양이냐, 정몽주냐의 갈림길에서 그는 정몽주의 길을 택한다. 태재에서나, 그가 묻힌 곳에서나 직선거리로 4km 떨어진 곳에 정몽주의 묘가 있다.

有忠有孝難 충이 있으면서 효가 있기는 어렵고
有孝有忠難 효가 있으면서 충이 있기도 어려운데
二者旣云得 이 두 가지를 이미 다 얻었건만
況又殺身難 하물며 살신의 어려움까지야.

그의 죽음을 두고 황희(黃喜)가 지은 만사(輓詞)다. 그는 충신이면서도 지극한 효자였다. ‘삼강행실록’에 효행이 전할 정도로 효자의 표본이었다.

김자수는 고려 충정왕 3년(1351)에 태어났다. 10세 때 아버지를 잃었고, 20세 되던 공민왕 19년(1370) 생원시에 합격, 개성 성균관에 입학한다. 당시 성균관 책임자는 대사성 이색(李穡)이었고, 선생으로 박상충(朴尙衷)·정몽주(鄭夢周)·김구용(金九容)·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이 있었다. 김자수는 성균관에 머문 지 1년이 안 되어, 편찮은 어머니를 봉양하려고 고향 안동으로 내려간다. 한겨울 얼음장 밑에서 잉어를 잡고 눈 덮인 대밭에서 죽순을 캐어 드렸지만 어머니의 수명을 연장시키지는 못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주자가례’에 따라 3년 시묘살이를 한다. 그때의 정경을 문익점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에 있는 김자수의 묘. 산을 넘으면 정몽주의 묘가 있다(왼쪽 사진). 조선 후기 김자수 어머니 묘 앞에 세운 정자, 추원재.

 

始見安東居堊子 처음에 안동에서 악차(堊次·무덤 옆의 뜸집)에 있는 사람 보았는데
剖氷求鯉自恢恢 얼음 깨고 잉어 구하여 무척 기뻐하더구먼.
筍生雪裏誠心厚 눈 속에서 죽순이 난 것은 참으로 효성이 지극함인데
雉下苦前孝烈開 거적자리 앞의 꿩이 내린 것은 효열(孝烈)의 열림이지.

훗날 김자수의 효행과 시묘살이한 묘소 주변을 ‘시묘동(侍墓洞)’이라 부르고, 그가 살던 안동 남문 밖에 ‘孝子高麗道觀察使金自粹之里(효자고려도관찰사김자수지리)’라고 새긴 비석을 세웠다. 이후 비석은 어머니 묘소가 있던 시묘골인 안동 월곡면 노산리로 옮겨졌다가, 월곡면이 안동댐으로 수몰되자 어머니 묘소와 정자 추원재(追遠齋)와 함께 1973년 안동시 안기동 정자골로 이전한다.

 

명필 추사 김정희가 15대孫

 

안기동으로 이전했을 때 앞에 하천이 흐르고 논밭이 있었는데, 지금은 하천이 복개되고 아파트가 들어서 주택가가 되었다. 김자수의 동네라고 칭해준 효자비 비각 안에는 순조 18년(1818)에 김노경(金魯敬)이 짓고 그의 아들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직접 쓴 글을 새긴 현판이 있었는데, 2005년에 누군가가 훔쳐갔다. 김정희는 김자수의 15대손으로 아버지와 선조의 묘를 찾은 것이었다.

안동댐이 생기면서 안동시 안기동으로 옮겨진 김자수의 효자비와 비각.

1374년 김자수는 문과에 장원급제, 사간원 정언(正言) 벼슬을 하다가 여수 돌산도로 귀양 가기도 했지만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형조판서를 지내다 고려가 망하자 안동으로 낙향한다. 그에게 아들 하나와 손자 넷이 있었다. 아들 근(根)은 평양소윤을 끝으로 아버지를 따라 벼슬을 버린 듯하다. 손자 넷은 조선 왕조에 합류, 벼슬길에 올랐는데 넷째 김영유(金永濡)가 대사헌과 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

김자수 고손자인 김세필(金世弼)은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변론하다 유배되었고, 그의 아들 김저(金儲)는 을사사화 때 사사(賜死)되었다. 김자수 무덤에 차마 비석을 세우지 못하고, 비석을 눕혀서 묻어둔 후손은 8대손인 김홍욱(金弘郁)이다. 김홍욱은 황해도관찰사로 있을 때 소현세자 강빈(姜嬪)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해달라는 응지상소(應旨上訴·임금의 요청에 응해 올린 상소)를 올렸다가 효종이 직접 지휘한 심문을 받던 중 매 맞아 죽은 인물이다. 김홍욱은 죽음에 이르러 “언론을 가지고 살인하여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는가?”라고 말할 정도로 대찼다. 김홍욱 자손 중 정승이 8명, 왕비가 1명이 나왔는데, 김정희도 그 자손이다. 추사 또한 지조가 강하고 타협하지 않기로 유명한 인물이다.

이상은 주로 경주 김씨 족보와 신도비에 기록된 행적을 중심으로 기술한 내용이다. ‘조선왕조실록’이나 ‘동국여지승람’에는 그가 조선 왕조에서 벼슬을 받았다고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그가 조선에 들어와 벼슬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는 때로 ‘조선왕조실록’의 진위 논란까지로 확대되는데, 대체로 1665년 영동의 초강서원에 김자수가 배향된 이후에는 가전(家傳)되어 오는 이야기가 우위를 확보한다.

 

 

 

 

 

15.천안 전씨와 전신민

고려 향한 일편단심 눈물과 그리움 한평생
무등산 자락에 정착해 정자 짓고 생활 … 조복 입고 통곡하며 송도 향해 절 올려
허시명/ 여행작가 www.travelwriters.co.kr
 

광주 무등산 자락에서 가장 유서 깊은 동네로 성산계곡을 꼽을 수 있다. 조선시대 정원의 한 전형을 이루는 양산보(梁山甫)의 소쇄원과 임억령(林億齡)의 식영정이 있고 창평, 고읍에 이르면 오이정(吳以井)의 명옥헌, 정철(鄭澈)의 송강정과 송순(宋純)의 면앙정이 있어서 정자 문화가 꽃을 피웠던 곳이다.

이 정자 문화의 원조가 계곡 가장 위쪽에 자리잡은 독수정(獨守亭)이다. 무등산뿐 아니라, 전라남도에서 가장 오래된 산정(山亭)이다. 정자의 주인은 고려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전신민(全新民)이다. 그는 무등산과 특별한 연고가 없었다. 그저 개성으로부터 멀리 떠나와 머문 곳이 무등산 자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관향도 아니고, 그의 부모가 살던 땅도 아니고, 처가 동네도 아니었다. 오가다가 눈여겨봐둔 땅도 아닌 듯하다. 지금도 예전의 풍광을 지니고 있을 만큼 산이 첩첩하고 옹색하다. 소쇄원이나 식영정이나 개울가에서 들판을 내려다보며 넉넉하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공간이라면, 독수정은 첩첩산중에 자리하고 있다. 전신민은 이곳에 숨어살며, 무등산의 고려 때 이름인 서석산(瑞石山)에서 글자를 취하여 호를 서은(瑞隱)이라고 했다.

그가 머문 동네는 소쇄원에서 2km 떨어진 담양군 남면 연천리의 산음동이다. 개울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면 전신민의 신도비가 있고, 그 옆에는 5대(代)에 걸쳐 아홉 효자가 난 전신민의 후손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비석 앞쪽으로 활처럼 휜 길을 따라 오르면 키가 훤칠한 고목들이 산자락을 가릴 정도로 가득하다.

 

공민왕 때 병부상서 지낸 무인

 

이곳이 전라남도 지방기념물 제61호로 지정된 독수정 원림(園林)이다. 원림에는 오래된 회화나무 3그루와 자미나무·매실나무가 있고, 대나무 숲이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다.

원림 안에 또 하나의 비석이 있는데, 이는 전신민의 아들 전오돈(全五惇)을 기리는 기단비(基壇碑)다. 전오돈의 행적을 후손들이 오래도록 잊고 지내다가, 1470년에 작성된 전씨세보(全氏世譜)를 발견하고 그의 행적을 새롭게 확인하면서 세운 비석이다.

전신민은 무인(武人)이었고, 그의 아들 전오돈 역시 무인이었다. 전신민은 공민왕 때 북도안무사 겸 병마원수를 거쳐 병부상서(兵部尙書)까지 지냈다. 전오돈은 정오품 벼슬의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는데, 왜적을 무찌른 공로로 우왕(禑王)으로부터 금 50냥을 하사받은 적이 있었다. 그가 곧바로 금 50냥을 사양하자, 도당(都堂)에서 말하기를 임금께서 내린 것은 사양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자 오돈은 “그러면 이미 내 물건이 되었으니, 청컨대 도당에 올립니다”며 금 50냥을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 일을 두고 많은 이들이 칭송하였다고 ‘고려사’는 기록하고 있다.

 

 

전신민은 독수정에 올라 통곡하며 절을 올렸다. 이태백의 시에서 이름을 따온 독수정(왼쪽). ‘서은실기’에 실려 있는 독수정 14경(오른쪽 위). 전신민은 무등산 산음동에 은거하다가 그곳에 묻혔다.

전신민은 아들 오돈과 함께 무등산에 들어왔다. 처음엔 제계(齊溪)라는 동네에 살다가, 산 하나를 넘어 산음동에 터를 잡았다. 전신민은 재계정(宰溪亭)과 가정(稼亭)을 짓고, 조복(朝服)을 입은 뒤 그 정자에 올라 송도를 향해 통곡하며 절을 했다고 한다. 전신민이 나이 들어 두 정자를 오가는 것이 불편해지자, 전오돈은 아버지를 위해 집 앞에 독수정을 지어드렸다. 독수정은 이태백의 시 ‘夷齊是何人 獨守西山餓’[백이숙제는 누구인가, 서산(수양산)을 외롭게 지키다 굶어죽은 사람이라네]에서 따온 구절이다.

독수정은 북향을 하고 있는데, 이는 송도(개경)를 염두에 둔 것이다. 독수정에서 100m도 안 떨어진 산 안쪽에 전신민이 살고 그 후손들이 대대로 살던 집이 있다. 집은 개축한 일자형 건물이고, 그 옆에 재실을 겸한 연천리 산음동 새마을회관이 새로 들어섰다. 전신민의 묘소는 그 집 뒷산에 자리잡고 있다. 활 한 바탕 거리인데, 누에등처럼 흘러내린 산자락에 자리잡은 묘에는 ‘瑞隱全先生之墓’라고 적힌 비석이 서 있다.

 

스스로 ‘미사둔신’이라 칭해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하고 남은 여자를 미망인(未亡人)이라고 부르듯, 전신민은 스스로를 ‘미사둔신(未死遯臣·죽지 못하고 달아난 신하)’이라 칭했다. 독수정을 지을 무렵에 지은 그의 시가, 독수정을 지키고 있다.

風塵漠漠我思長
자욱이 이는 티끌 시름도 깊어라
何處雲林寄老蒼
어느 구름 숲에 늙은 몸을 숨길-고
千里江湖雙雪
머나먼 천 리 길에 흰 귀밑머리 나부끼고
百年天地一悲凉
한평생 천지간에 슬픔 가득 서늘해라
王孫芳草傷春恨
임은 이미 가셨어도 한 많은 봄풀 돋고
帝子花枝月光
꽃가지 두견새는 달빛에 울음 우네
卽此靑山可埋骨
이 산골 푸름 두르고 백골로 묻힐지라도
誓將獨守結爲堂
두 나라 아니 섬기리 홀로 지킬 집을 짓네

독수정 건물은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 후손들이 개축한 탓에 문화재로는 지정되지 못했다. 하지만 지역민들의 아쉬움이 컸는지, 독수정을 둘러싼 숲을 지방 기념물로 지정해 독수정 공간을 보호하고 있다. 독수정 마루에 앉으니 쓸쓸하고 적막하다. 한낮에도 인적이 드물어, 그 옛날처럼 서은공이 찾아와 한바탕 곡을 하고 갈 것만 같다.

 

전신민의 후예들

전신민의 후손은 300명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무등산 산음동에 들어온 뒤 전씨 집안은 간신히 이어져 내려왔다. 무인 집안이라 아무래도 사람을 여럿 해쳤을 테니 그 때문에 손이 귀한 듯하다고 한 후손은 말했다. 일제강점기에 산음동에 살았던 전규환 씨는 조선 명의로 소문나 전국각지에서 찾아오는 이가 많았다. 현재 문중 일은 전기종 씨가 맡고 있다.

 

 

 

 

 

 

 

16.밀성 박씨와 박익

태조가 내린 벼슬 다섯 차례 거절
판서·좌의정으로 유혹해도 ‘불사이군’ 불변 … 후손들이 뜻 기리는 전시관 건립 추진
허시명/ 여행작가 www.travelwriters.co.kr
 

고려 벽화가 출토된 박익의 묘.

송은(松隱) 박익(朴翊, 1332~1398)을 기리는 사당으로 경남 청도의 용강서원, 밀양 덕남사, 산청 신계서원, 거제도 송령사가 있다. 후손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동네에 그의 사당이 있는데, 독특한 것은 그 사당에 모두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는 점이다. 지금은 박익의 후손인 박대성 화백이 그린 초상화로 통일됐지만, 그 이전에는 비슷하지만 제각기 다른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사당엔 위패만 모셔져 있기 쉬운데 박익의 경우처럼 초상화가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묘사한 화상시(畵像詩)가 전해오기 때문이다.

화상시는 박익과 동시대에 살았던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그리고 변계량(卞季良)이 지었다. 초상화를 보고 정몽주가 먼저 운을 뗐다. “긴 수염 십 척 장신 잘도 그렸네(畵出長髥十尺身)/ 볼수록 두 얼굴이 참으로 똑같네(看來尤得兩容眞)/ 세상 이치가 자취 없다고 말하지 마소(寞言公道無形跡)/ 죽어도 죽지 않은 사람 되겠네(死後猶存不死人).” 정몽주는 박익과 박익의 초상화를 나란히 보고서 이 시를 읊은 것으로 보인다. 그 자리에 길재와 변계량도 함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정몽주의 시를 차운(次韻)하여 시를 지었다. “봉황의 눈, 범의 눈썹, 십 척 장신에(鳳目虎眉十尺身)/ 담홍 반백의 두상이 참으로 똑같네(淡紅半白兩相眞)/ 그림으로 선생 얼굴 살펴보니(畵圖省識先生面)/ 그림 속에도 죽지 않을 정신 그려져 있네(不死精神影裏人).” 이렇게 읊은 길재는 박익보다 21살이 어려서 박익을 선생이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밀양 한 동네 출신으로, 아들의 친구이기도 했던 변계량은 “풍후한 얼굴 덕스러운 몸매(豊厚形容德有身)/ 아무리 보아도 하늘이 내린 분이네(看看優得出天眞)/ 눈 덮은 긴 눈썹, 무릎에 드리운 수염(眉長過目髥垂膝)/ 그림과 사람 마주해도 분별하기 어렵겠네(兩對難分影外人)”라고 묘사했다.

 

정몽주와 학문 교류, 이성계와 전장 누벼

 

초상화를 그리고, 그 초상화를 보고 시를 짓는 흥미로운 풍속도가 고려 말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 정몽주와 길재가 보았던 박익의 초상화는 언제 소실됐는지 알 수 없다. 훗날 박익의 위패를 모시는 서원이 세워질 때마다 이 화상시를 근거로 새로운 초상화가 그려지고, 영정 봉안문(奉安文)까지 마련됐다.

송계마을에서 가까운 후사포리에 있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 박익의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심었고, 이 은행나무에서 한 자씩 따서 밀성 박씨 은산파와 행산파가 생겼다.

박익은 1332년에 태어나 1352년(공민왕 2) 이색(李穡), 박상충(朴尙衷)과 함께 과거에 급제했다. 나이로는 이색보다 네 살 어리고, 이성계(李成桂)보다 세 살, 정몽주보다 다섯 살이 많았다. 박익은 문인이었지만, 이성계와 함께 전장에 나가 남으로 왜구를, 북으로 홍건적과 여진족을 물리치기도 했다. 벼슬은 예문춘추관과 직제학을 지냈으며 고려가 망하던 해에는 예조판서를 역임했다. 박익이 예조판서를 지내기 전, 고향인 밀양 땅 송계마을(현재의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 송악마을)에 은둔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정몽주가 이곳에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 정몽주에게 건넨 시가 있다. “송계마을 숨은 선비 집을 찾아오셨소(來訪松溪隱士家)/ 석양에 문은 닫혀 있고 꽃이 지는데(夕陽門掩落花多)/ 술통 앞에 두고 나의 깊은 마음을 묻는가(樽前問我幽閑意)/ 주렴 밖에 반쯤 보이는 저 청산이 내 마음이라오(簾外靑山半面斜).”

정몽주가 타살되고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열자, 박익은 또다시 송계마을로 내려오고 만다. 뒷산이 송악(松岳)이고, 마을이 송계(松溪)인 것은 송도(松都, 開京)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이성계는 전장에 함께 나섰던 박익에게 공조판서, 형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연달아 내리며 조정으로 불러들이려 했다. 하지만 박익은 눈멀고 귀 멀었다는 핑계를 대며 태조가 내린 교지와 예관을 보지도 않고 거절했다. 마지막에는 좌의정을 내렸으나 역시 나서지 않았다. 다섯 번 불렀어도 한 번도 나서질 않아 ‘오징불기(五徵不起)’라고 하는데, 그는 죽음에 이를 때까지 고려를 향한 충절을 지켰다.

박익의 묘 남쪽 벽에 그려진 벽화.

그는 네 아들에게 남긴 유언에서 “나는 왕씨의 혼령으로 돌아가거니와 너희들은 이씨의 세상에 있다. 이미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었으니 온 힘을 다해 충성을 하라. 선천과 후천으로 부자간에도 시대가 달라졌다”며 조선에 충성할 것을 당부했다. 박익의 후손들은 이 유언 때문에 조선시대에 집안이 무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박익은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화악산 자락에 묻혔다. 묏자리는 경남의 최고 명당으로 꼽힐 만큼 활달하다. 묘는 사각형으로 고려 양식을 띠고 있고, 돌단이 둘러져 있어 웅장하다. 이 때문에 두 차례나 도굴당하는 곤욕을 치렀다. 2000년 9월 두 번째 도굴꾼이 지나간 뒤, 동아대 박물관 주관으로 무덤 발굴 작업이 진행됐다. 이때 고분벽화와 지석, 혼유석 등이 출토돼 세인들을 놀라게 했다.

소산 박대성 화백이 그린 박익의 초상화.

 

 

박익 무덤에서 고분벽화 등 출토

 

고려 말 고분벽화는 존재 자체가 아주 드물다. 천장과 북쪽 그림은 지워지고, 동·서·남쪽 그림은 훼손된 상태지만 빼어난 솜씨를 확인하기에는 충분한 정도로 남아 있었다. 매화와 대나무가 그려진 동쪽 벽에는 머리를 땋아 올린 세 명의 여자가 손에 찻상과 그릇을 든 채 걷고 있고, 역시 나무가 그려진 서쪽 벽에도 네 명의 남녀와 술병을 들고 있는 한 여자의 그림이 있다. 남쪽 벽에는 슬픈 눈망울을 한 말의 고삐를 잡고 있는 두 남자가 있다. 고려시대 생활상을 보여주는 거의 유일한 풍속화인 셈이다. 무덤은 다시 덮여 긴 잠에 들어갔고, 벽화는 2005년 2월에 국가문화재 사적 제459호로 지정됐다.

밀성 박씨 송은공파 문중에서는 미려한 고분벽화가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120자의 입지잠(立志箴)과 168자의 지신잠(持身箴)을 저술한 송은 박익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벽화묘 전시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600년이 지났건만, 두문동 72현으로 꼽히는 송은 박익의 삶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살고 있는 것 같다.

 

 

 

 

 

 

 

 

 

Tips

밀성은 밀양의 옛 이름이다. 밀성 박씨와 밀양 박씨는 같은 이름이지만, 송은공파는 시조 밀성대군의 이름을 좇아 본향을 밀성으로 사용하고 있다.

 

 

밀성 박씨 송은공파 박익의 후예들

박태준(전 국무총리·포스코 명예회장), 박숙현(전 국회의원), 박재규(전 통일부 장관·경남대 총장), 박판제(초대 환경부 장관), 박철언(전 국회의원), 박종구(삼구그룹 회장·고려대 교우회장), 박번(동양강철 회장), 박치현(흥아상사 명예회장), 박영석(전 국사편찬위원장), 박영관(세종병원 원장·이사장), 박성상(전 한국은행 총재), 박대성(화가), 박중훈(영화배우), 박한제(서울대 문리대 교수), 박영진(경남지방경찰청장), 박판현(신라오릉보존회·박씨대종친회 사무총장), 박희학(송은공파 총무), 박종탁(박씨문화원 원장)

 

 

 

 

 

 

17.단양 우씨와 우현보


 

세 아들 ·큰손자 잃고 멸문당할 뻔
유배된 뒤 모진 핍박 … 이방원과의 인연으로 2차 왕자의 난 후 가문 재기
허시명/ 여행작가 www.travelwriters.co.kr
 

우탁의 조부인 우중대의 묘. 등잔형 명당이라 후손들이 이곳에서 멀리 나가 살아야 잘 산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바로 옆에 단양 우씨 시조부터 5세조까지 모신 단이 있다.

파란만장(波瀾萬丈)이란 말을 이럴 때 쓰는 것일까? 양호당(養浩堂) 우현보(禹玄寶, 1333~1400)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살아서 얼마나 환호하고, 얼마나 절망하고, 얼마나 비통하고,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가 세상을 뜬 지 6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가 느꼈을 영욕(榮辱)은 아직 삭혀지지 않았을 것만 같다.

고려 말 최고의 명문가로 한산 이씨와 단양 우씨를 꼽을 수 있다. 한산 이씨는 가정(稼亭) 이곡(李穀)과 목은(牧隱) 이색(李穡) 두 부자(父子)가 중국에서 연달아 급제하면서 문명(文名)을 떨친 집안이다. 단양 우씨는 우탁(禹倬)이 두각을 보였고, 우현보에 이르러 아들 5형제가 모두 급제하면서 고려 말의 막강한 문벌이 됐다.

두문동 72현을 꼽을 때, 구성 인원이 다른 두 개의 명단이 존재한다. 그 하나는 정몽주를, 다른 하나는 우현보를 앞장세운다. 우현보는 이색, 정몽주와 함께 고려 말 삼인(三仁)으로 꼽힌다. 이색, 정몽주, 길재로 구성된 고려 말 삼은(三隱)이 후대의 영향력을 반영한 명단이라면, 삼인은 당대의 세력 구도와 영향력을 반영한 명단이다.

 

선죽교에서 살해된 정몽주의 시신 거둬

 

우현보의 집안에서 크게 이름을 얻은 인물은 시조 우현(禹玄)의 8세손인 역동(易東) 우탁이다. 그는 도끼를 들고 임금에게 상소를 할 만큼 결기 있는 선비였고, 작가가 분명한 우리말 노래 형식을 갖춘 최초의 시조 ‘탄로가’를 지은 시인이었다. 또한 역학(易學)에도 뛰어나 ‘역동(易東)’이라 불린 성리학자였으며, 훗날 퇴계 이황이 안동에 역동서원을 세워 추앙했을 정도로 후대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우탁에게 늦도록 아들이 없어 들인 양자가 우길생(禹吉生)이다. 그는 나라에 공을 세워 삼중대광숭록대부(三重大匡崇祿大夫)에 올랐고 적성군에 봉해졌는데, 특히 정몽주가 일찍이 스승으로 모셨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 우길생의 아들이 우현보다. 우현보가 10세 때에 우탁이 세상을 떠났으니, 우현보는 할아버지를 충분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현보는 1333년에 태어나 1355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최고 권력자인 시중(侍中) 벼슬에 올랐다. 그는 당대에 상례(喪禮)를 삼년상으로 하고 동성동본 혼인 금지, 유학 증진, 의관(衣冠) 제도 확립 등에 힘썼다. 안향에서 우탁으로 이어진 성리학의 기반을 넓히는 데 기여한 셈이다.

우현보에게 가장 큰 자랑거리는 아들 5형제, 홍수(洪壽)·홍부(洪富)·홍강(洪康)·홍득(洪得)·홍명(洪命)이 모두 과거에 급제한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5형제가 정부 요직에 두루 포진했으니, 한 집안에서 국사(國事)를 논할 정도였다. 더욱이 큰손자인 우성범(禹成範)이 공양왕의 부마(사위)가 되면서 왕실과 튼튼한 인연을 맺기도 했다. 이 때문에 우씨 집안은 성리학 정착에 기여한 신진 사대부 집안이면서도 왕실의 외척으로 왕의 비호를 받는 집안이라는 엇갈린 평가를 받게 된다.

 

 

아파트와 송림에 둘러싸인 월곡역사박물관. 문중에서 만든 유일한 박물관이다(왼쪽 사진). 단양 우씨 시조단과 재실 희역당이 있는 단양군 적성면 애곡마을.

비극이 찾아온 것은 1392년 4월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살해되면서부터다. 참살된 정몽주의 시신을 거둬준 이가 바로 우현보였다. 우현보는 계림(경주)으로 유배당하고, 아들 5형제도 뿔뿔이 유배를 당했다. 그해 7월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내쫓기던 날, 우성범은 개성 남문 밖에서 공개 참살되고, 조선 개국이 선포된 뒤에는 유배지에 있던 첫째 홍수, 넷째 홍득, 다섯째 홍명이 장살(杖殺·곤장을 맞고 살해)됐다. 곤장을 많이 맞으면 장독이 올라 죽는 수도 있지만, 사형(死刑)이 따로 있었으니 죽지 않을 만큼 때리는 게 장형(杖刑)이다. 그런데 세 형제가 죽음에 이른 것은 죄다 정도전(鄭道傳)의 사주로 빚어진 일이라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후손들 대구에 시민공원 겸한 박물관 만들어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의 우탁 출생지에 세워진 사적비.

정도전의 어머니가 단양 우씨인데, 어머니의 외할머니가 노비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도전은 벼슬을 받을 때마다 곤혹스런 처지에 놓였었다. 고려시대는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어머니가 천민이면 그 자녀도 천민의 신세였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우씨 집안에서 의도적으로 자신의 출신 성분을 거론하며 음해했다고 여겼던 것이다.

고려와 함께 몰락한 우씨 집안이 극적으로 부활한 것은 이방원이 주도한 제2차 왕자의 난 때였다. 정종 2년(1400년)에 우현보의 문하생인 이래(李來)가 이방원의 바로 위 형인 방간이 방원을 제거하려 한다는 사실을 우현보에게 알렸고, 우현보는 이 사실을 둘째 아들 홍부에게 알려 이방원에게 대응하게 했다. 이방원은 즉시 사병을 움직여 방간의 사병들을 제거했고, 정종으로부터 권력까지 승계할 수 있었다.

고려의 원수이자 집안의 원수인 조선에 우현보가 돌연 협조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왜일까? 이는 우현보와 이방원의 인연 때문이었다. 이방원이 과거에 급제할 때 우현보가 시험관을 맡았다. 당시 급제자들은 자신을 입신시켜 준 시험관을 은문(恩門)이라 칭하며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 그들 사이에서는 스승과 제자보다도 더 강한 인연이 맺어졌다. 이 같은 인연이 이방원에게 결정적인 제보를 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해 홍부와 셋째 아들 홍강은 원종공신이 돼 우씨 집안은 정치적인 재기를 했고 이를 기반으로 조선시대에도 벼슬이 끊이지 않았다.

 

대구시 달서구에 가면 월곡역사박물관이 있다. 아파트 동네에 송림 언덕과 대나무로 울타리를 친 시민공원을 겸한 박물관이다. 우현보의 후손들이 마련한 것으로 한 문중이 세운 우리나라 유일의 박물관이다. 홍명의 후손인 우배선(禹拜善)이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신이 되고, 그 후손이 박물관 동네에 모여 살다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생긴 보상금으로 마련한 것이다. 요사이 도시 외곽에 신도시 개발 바람이 불면서 부자 문중이 많이 생겨나고 있는데 이 자산을 사회로 환원할 줄 아는 것은 나라를 위해서 몸을 아끼지 않은 우현보와 그의 후손 우배선의 정신이 그의 집안에 면면히 내려오기 때문이다.

우현보는 고려가 무너진 뒤 은거하면서 당호를 독락당(獨樂堂)으로 고쳤다. 그는 “지난 것은 모두 꿈이고 진실이 아니니, 앞으로 오는 것도 어떻게 진실임을 보증하겠는가”라고 했다. 파란만장한 삶 끝에 이른 우현보의 심정이 담긴 말이다. 그는 죽음에 이르러서도 “나는 다만 한 사람의 망국(亡國)의 대부다. 나를 선영에 묻지도 말고, 또한 자손들도 이곳에 묻지 말라”고 했다. 그의 무덤은 휴전선 너머 장단 고현(古縣)에 있다.

 

양호당 우현보의 후예들

우승흠(대종회 회장대행), 우영제(대제학공파 회장), 우문식(오파회의 총무), 우종택(예안군파 회장), 우기정(대구컨트리클럽 회장), 우종호(전 외교통상부 대사), 우윤근(국회의원), 우원식(국회의원), 우진명(미성산업 대표), 우대규(한일약품 회장), 우윤근(서울화수회 회장), 우종근(판서공파 회장), 우억기(전 성균관 부관장), 우국일(예비역 장군), 우광택(부장판사)

 

 

 

 

 

18.여주 이씨와 이행



 

부귀권세 버리고 험난한 의리의 길
정몽주 살해한 조영규를 “만세의 흉인”이라 비판 … 조선에 협력 안 해 귀양살이
허시명/ 여행작가 www.travelwriters.co.kr
 

바닷가 소나무에 둘러싸인 월송정.

요즘이야 소 타고 다니는 사람을 보기 어렵지만, 예전에는 말처럼 소도 타고 다녔던가 보다. 조선 초기 청백리로 알려진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은 소를 타고 다니기를 좋아해 그가 재상인 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맹사성보다 여덟 살 연상이자, 두문동 72현으로 꼽히는 이행(李荇, 1352~1432)은 호가 기우자(騎牛子), 즉 소를 타는 사람이다. 당시 말이 귀해서 이행이 소를 탔던 것 같지는 않다. 그의 동갑내기 친구이자 조선 개국공신인 권근(權近, 1352~1409)은 이행의 소 타는 모습을 보고 “무릇 눈으로 만물을 볼 때 바쁘면 정밀하지 못하고 더디게 보아야 그 오묘한 데까지 다 얻을 수 있다. 말은 빠르고 소는 더딘 것이라 소를 타는 것은 곧 더디고자 함이다”라고 논했다. 권근이 20대에 쓴 글이니 이행은 이미 20대에 소를 즐겨 탔음을 알 수 있다.

이행의 자는 주도(周道)다. 자(字)는 성년이 되면 갖게 되는 또 하나의 이름인데, 흔히 본명과 상통하게 붙여진다. 곧 이행의 이름과 자를 풀면 ‘여러 길을 두루 다니라’는 뜻이 된다. 만약 이행이 요즘 세상에 태어났다면 여행가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울진 월송정에 이행의 시 남아

 

이행은 이미 7세 때에 “천리마를 타고 천지간을 주유하겠다(我乘千里馬 周遊天地間)”는 포부를 밝혔다. 그의 시문을 정리한 ‘기우집(騎牛集)’을 봐도 금구(김제시 금구), 금성(나주), 부안, 진보(청송군 진보), 이천(강원도 이천), 청하(영일군 청하), 고창, 우봉(황해도 금천) 등의 지명을 제목에 넣은 시가 눈에 띈다. 그는 또한 물맛을 잘 변별할 줄 알아서 “충청도 달천의 물이 제일이고, 한강 한가운데를 흐르는 우중수(牛重水)가 둘째이며, 속리산의 삼타수(三陀水)의 맛이 셋째”라고 평하기도 했다. 세상을 많이 주유한 뒤라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인 셈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600여년이 지났건만, 행복하게도 그를 기억하고 그를 주인으로 삼는 명소가 있다. 관동팔경 가운데 가장 남단에 위치한 울진 월송정이다. 월송정과 관련해서는 경기체가 ‘관동별곡’을 지은 안축(安軸, 1287~1348)의 시가 있고 숙종의 어제시(御製詩)까지 전해오지만, 이행이 지은 시 ‘평해 월송정’이 바다를 향한 정자의 중앙 상단에 걸려 있다.

“동해의 밝은 달이 소나무에 걸려 있네(滄溟白月半浮松)/ 소를 타고 돌아오니 흥이 더욱 깊구나(叩角歸來興轉濃)/ 시 읊다가 취하여 정자에 누웠더니(吟罷亭中仍醉倒)/ 선계의 신선들이 꿈속에서 반기네(丹丘仙侶夢相逢).”

이 시 현판 옆에는 순찰사로 내왕했던 김종서(金宗瑞, 1390~1453)의 ‘백암거사찬(白巖居士贊)’이 걸려 있다. 김종서는 그 글에서 “해상의 푸른 소나무와 같이, 소나무 위에 걸린 밝은 달과 같이, 선생의 기백과 절의는 천추만세에 이르도록 빛날 것이라”고 했다.

백암은 이행의 또 다른 호다. 월송정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백암온천이 있는데, 백암온천이 기댄 산이 백암산이다. 이행은 백암산 기슭의 날라실(飛良縣)이라는 마을에서 살았다. 월송정에서 10리쯤 떨어진 마을인데, 어머니 평해 황씨의 고향이라 이곳에서 성장기를 보냈고 이후 기회가 될 때마다 내려와 지냈다. 달밤이면 소를 타고 월송정까지 노닐러 가던 곳이기도 하다.

 

 

①밀양 산외면 엄광리 재궁동에 있는 단향비. 이행을 중심으로 그의 조부, 손자의 관직과 이름을 새겼다. ② 밀양강이 내려다보이는 금시당과 백곡서재. ③ 평해 날라실 마을의 성황당. 동제를 지내기 위해 정리를 하고 있다.

그가 소를 타고 노닐던 정경을 당시 고려에 머물던 일본 승려 석수윤(釋守允)이 ‘월하기우도(月下騎牛圖)’에 담아놓았고, 그 그림을 보고 권근과 성석연(1357~1414)은 시를 짓기도 했다. “…소 등에는 시인이 실려 있구나(牛背載詩人)/ 마을은 궁벽하다 청산은 첩첩(村僻山千疊)/ 한 바퀴 달이 둥실 물에 비치니(波明月一輪)/ 흰 갈매기 더불어 마냥 친하니(白鷗相與狎)/ 호탕한 것 누가 있어 길들였더냐(浩蕩有誰馴)”고 권근은 노래했다.

 

후손들, 음력 10월10일마다 제사

 

이행은 17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20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이때 시험관이 이색(李穡, 1328~1396)이어서 평생 사제 관계를 맺게 됐다. 그래서 이색이 탄핵을 받을 때에 그는 이색을 지지했고, 그 때문에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풍류도 있었지만 의리도 있던 사람이었다. 정치·외교적인 능력도 좋아, 제주에 건너가 성주(星主) 고신걸(高信傑)을 설득하고 그 아들을 데리고 와서 비로소 제주를 복속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는 조영규(趙英珪, ?~1395)가 정몽주를 살해하자 “만세(萬世)의 흉인(凶人)”이라고 대놓고 비판했고, 고려가 망하자 “서쪽으로 수양산을 바라보아, 주나라 곡식을 어찌 차마 먹으랴”며 두문동에 들어갔다.

그는 조선에 협력하지 않아 평해 월송정 마을로 귀양 가기도 했는데, 말년은 주로 집안 별장이 있던 황해도 강음 예천동에 칩거했다. 그와 시문을 주고받던 친구였던 권근·성석린·성석연 등은 개국공신으로 조선에 합류했지만, 그는 그들과 원수지간이 되지 않으면서 지조를 지켰다. 아들에게도 “신왕(新王) 또한 성인(聖人)이다. 너는 나와 처지가 다르니 모름지기 잘 섬겨라”고 했는데, 그 말을 좇아 아들 척()은 직제학까지 올랐다. 이행은 천수를 누려 81세까지 살다가 황해도 금천군 설봉산 아래에 묻혔다.

이행의 후손들은 남북이 분단되어 성묘를 할 수 없게 되자 경남 밀양에 이행의 조부부터 손자까지 5대를 함께 모신 단향비(壇享碑)를 마련하고 음력 10월10일이면 제사를 지내고 있다. 밀양은 이행의 고손자인 이사필(李師弼)이 연산군 때에 어지러운 정국을 피해 처가 동네로 내려와 살면서 여주 이씨 집성촌이 된 곳이다.

밀양강 가에는 아름다운 정자가 많은데 월연정은 이행의 6세손인 월연 이태(李)가 주인이고, 금시당은 이행의 7세손인 이광진(李光軫)이 주인이다. 밀양강과, 새로 뚫린 대구-부산 간 고속도로가 내려다보이는 금시당에는 백곡서재가 있다. 백곡서재는 백곡공 이지운(李之運, 1681~1763)을 기려서 지은 건물인데, 이지운은 임진왜란 때 무너진 금시당을 복원하고 ‘철감록(感錄)’을 편찬했다. ‘철감록’에 실린 이행의 글과 자료를 여주 이씨 문중에서 1872년에 따로 편집한 책이 ‘기우집’이다. 기우집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두문동 현인들의 명단을 72명으로 처음 확정했다는 점이다. 덕분에 필자가 지금에 이르러 두문동 72현을 찾아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행의 후예들

이주형(제헌의회 의원), 이우성(퇴계학연구원장), 이운성(시인), 이성림(우성I&C 회장), 이희국(LG전자 사장), 이긍희(전 MBC 사장), 이배영(전 서울 은평구청장), 이완구(한나라당 충남도지사 예비후보), 이성순(영주FM방송 본부장), 이희수(한양대 교수)

 

 

 

 

 

 

19.창녕 성씨와 성사제

“王氏 귀신이 될지언정 李家의 신하는 못 한다”
두문동에 들어가 순절 … 유언 따라 봉분도 만들지 않아
허시명/ 여행작가 www.travelwriters.co.kr
 

물계서원의 봄 향사를 준비하기 위해 회의를 하고 있다.

경남 창녕에 가면 물계서원이 있다. 서원은 조선시대에 학문을 연구하는 사설 교육기관이자 명현(明賢)을 기리는 곳으로, 대체로 지역공동체의 유림이 주체가 돼 건립했다. 그런데 물계서원은 다르다. 한 가문이 주체가 돼 만들어졌다. 1724년 창녕 성씨 가문에 의해서였다.

좌의정까지 지낸 이복원(李福源, 1719~ 1792)은 물계서원에서 조상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것을 두고 “고금에 창녕 성씨 일가뿐이며, 천하에 물계서원 하나뿐이다. 아, 거룩하다”고 평했다. 비록 대원군 때 물계서원은 무너지고 1995년에 다시 세워졌지만, 여전히 국내 유일의 문중 서원이다. 그렇다고 집안사람만 드나드는 것은 아니다. 봄, 가을 제사와 서원 행사는 지역의 타성(他姓) 유림들이 앞장서 치른다.

 

호를 ‘두문자’로 하고 불사이군 뜻 마음에 새겨

 

1809년 물계서원에서 두문동의 역사를 정리한 ‘두문동선생실기(杜門洞先生實記)’가 간행됐다. 성석주(成碩周, 1649~1695)가 그의 직계 선조이자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성사제(成思齊)의 행적을 기록한 것에 두문동 관련 자료를 덧붙여 펴낸 것이다.

성사제의 호는 두문자(杜門子)다. 고려가 망하자 조선의 세상으로 나가지 않고, 두문불출(杜門不出)하겠다는 의지를 호에 새긴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등장하는 ‘공자건두문불출(公子虔杜門不出)’에서 유래한 말로 여겨지는데, 성사제는 자신뿐 아니라 아들의 이름까지도 두문불출의 의미를 담아 두(杜)라고 고쳤다고 한다.

성사제는 신현(申賢, 1298~1377)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신현은 안향과 우탁의 도통(道統)을 이색, 원천석, 정몽주에게 연결시켜준 유학자다. 원천석 감수, 범세동 편찬, 성사제가 증보(增補) 작업에 참여한 ‘화해사전(華海師全)’은 신현의 행적을 중심으로 기술한 책이다. 조선시대 내내 잊혀졌다가 1931년 군산에서 발견된 ‘화해사전’은 비록 위서(僞書)의 논란이 있지만, 고려 말 유학의 계통과 성리학의 이해 수준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사료다.

성사제는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해 문장과 책문(策問)을 만지는 일을 주로 했고, 벼슬은 보문각 직제학(直提學·정사품)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그는 “차라리 왕씨의 귀신이 될지언정 이가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寧爲王氏鬼不作李家臣)”고 말하고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그는 부인에게 “나는 고려의 신하라 신조(新朝·조선)에 벼슬해서 조상을 욕보이지 않을 것이고, 이제 곧 죽을 것”이라며 “아들을 데리고 고향(창녕)으로 돌아가서 선영을 지키라”고 했다.

현재 물계서원에는 21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모두 창녕 성씨 사람들의 것이다. 그중에서 고려 말 충신으로 성여완(成汝完)과 성사제가 있고, 조선 개국공신으로 성석린(成石璘)이 있다. 성여완은 고려가 망하자 경기도 포천 왕방산으로 숨어들어 조선에 협력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큰아들 석린이 조선 개국공신으로 영의정을 지냈고, 둘째 석용(石瑢)과 셋째 석연(石王因)이 대제학 벼슬을 해 두문동 72현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성여완과 성사제는 당숙과 조카 사이고, 성석린과 성사제는 6촌 형제다. 성사제는 조선 왕조에 협력하라는 권유를 많이 받았을 테지만 단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내가 죽더라도 시체를 염하지 말 것이며, 봉분도 만들지 않음이 옳을 것이다”는 말을 남겼고, 결국 두문동에서 순절하고 무덤도 없이 잊혀졌다.

 

① 시조 재실 안의 시조 비와 600년 된 느티나무. ② 성사제를 기리는 망송각 안의 망제단. ③ 망송각 처마의 소박한 문양. ④ 시조 묘 동산에 자리 잡은 시조 재실.

성사제의 존재가 다시 부각된 것은 1796년(정조 20) 유생들에 의해서였다. 그의 행적을 알게 된 유생들이 개성유수에게 알리고, 유수가 임금에게 보고했다. 그 결과 1808년(순조 8) 개성 표절사에 그의 이름이 오르게 됐다. ‘두문동선생실기’가 간행된 것은 그 이듬해의 일이다.

 

정조 때 유생들에 의해 성사제의 행적 부각

 

현재 창녕에 사는 성씨의 9할은 성사제의 후손이다. 부인 성산 이씨와 아들 두는 고향에 내려와 아버지의 유지를 잘 받든 셈이다. 물계서원 건립을 주도한 이들도 물론 성사제의 후손이다.

성사제의 후손은 무덤조차 없는 것을 아쉬워해, 1812년에 창녕읍 조산리의 부인 성산 이씨 묘 옆에 망송각(望松閣)을 짓고 그 안에 망제단(望祭壇)을 마련했다. 망송각 아래쪽에는 신도비(神道碑)도 세웠는데, 신도비는 현재 창녕 성씨 시조 묘가 건너다보이는 대지면 대지초등학교 앞쪽으로 옮겨져 있다.

두문자 성사제가 끝까지 지키려 했던 것은 충(忠)이었고, 효(孝)였다. 나라를 위한 충은 자신이 지켰지만, 선조를 위한 효는 아들에게 맡겼다. 그렇게 충효를 삶의 지표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신도비가 건너다보고 있는 시조 묘의 사연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성사제는 시조 성인보(成仁輔)의 6세손이다. 성인보는 창녕 지역의 호장(戶長)이었는데, 연초에 개경에 임금을 알현하러 갔다가 병을 얻어 숨을 거두었다. 그러자 동행했던 아들 송국(松國)이 자신의 효성이 부족해 아버지가 객지에서 돌아가셨다고 자책하며, 나라에서 제공한 우마차와 장례비를 마다하고 몸소 지게에 아버지의 시신을 지고 천 리 고향 길을 내려왔다. 고향에 이르렀을 때 눈이 내려 하룻밤을 묵게 됐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시신 주변에 호랑이 발자국이 있었다. 시신엔 탈이 없어서, 호랑이 발자국을 따라가 보니 야트막한 언덕에 눈 녹은 양지가 있었다. 송국은 그곳에 아버지를 안장했는데, 호랑이가 잡아준 명당이라 하여 지금도 풍수가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시조 묘에서 가까운 곳에 물계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좋은 터에 조상을 모시고, 그 정신까지 모시고 있는 셈이다. 사육신 성삼문(成三問)과 동국 18현의 한 사람인 우계 성혼(成渾)의 위패도 모시고 있는데, 나라와 운명을 함께한 성사제의 존재가 있기에 더욱 빛나는 공간이다.

안동 권씨와 권정


600년 한결같은 후대의 칭송
벼슬 버리고 낙향해 자나 깨나 ‘고려 회복’ 생각 … 후손들 ‘대’와 ‘정자’ 세우고 뜻 기려
허시명/ 여행작가 www.travelwriters.co.kr
 

영주시 구성산 암벽에 새겨진 권정을 기리는 각자(刻字)들.

“조상은 후손을 낳고, 후손은 조상을 만든다.”

고려 말 불사이군 충신들의 발자취를 찾아다니면서 실감하는 말이다.

경북 영주시에 갔을 때다. 영주시 한복판 구성공원이 된 구성산 자락에, 조선 제일의 개국공신 정도전의 집터가 있다. 판서(判書)가 3명이나 났다 하여 삼판서 구택터로 알려진 영주2동 431번지다. 예전에 늘씬한 한옥이 자리했다는데 지금은 양옥이 들어서 옛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이성계와 조선의 지분을 반분해도 좋을 혁명가지만, 그가 살았던 옛터에 팻말 하나 없으니 쓸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지금에 이르러 보자면, 구성산의 주인은 정도전이 아니라 그와 동시대에 살면서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권정(權定, 1353~1411)이다. 삼판서 구택터에서 구성산 굽이를 돌아들면 권정을 기리는 봉송대(奉松臺)가 있다. 그 벼랑 밑에 권정의 신도비가 있는데, 신도비 안쪽에 권정의 정신을 기린 ‘不事二君(불사이군)’의 각자(刻字)가 있다. 그곳에서 구성산을 오르면 권정을 배향했던 구호서원(鷗湖書院) 터와, 역시 그를 기리는 반구정(伴鷗亭)이 나온다. 삼판서 구택터에서 반구정까지 400m도 안 되니 아주 가까운 거리다.

이쯤 되면 정도전을 압도하는 권정이 누굴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권정은 안동 사람이다. 그가 살던 동네가 안동시 예안면 기사리(棄仕里)다. 버릴 기(棄)에 벼슬 사(仕)자를 써서 ‘벼슬을 버린 동네’인데, 권정이 벼슬을 버리고 살았대서 붙여진 600년 된 이름이다.

 

호 ‘사복재’는 고려를 돌이켜 생각한다는 뜻

 

권정은 고려 개국공신으로 안동의 태사묘에 배향된 안동 권씨 시조 권행(權幸)의 14세손이다. 그는 지금은 안동댐에 잠긴 안동시 예안면 북계촌에서 태어났다. 야은 길재(吉再)와 동갑인데, 문과 급제도 우왕 12년(1386)에 길재와 함께 했다. 충청도 괴산의 지군사(知郡事)를 역임하고, 내직에 들어 좌사간(左司諫, 중서문하성의 정육품직)을 지냈다. 임금께 올린 보고가 임금의 뜻을 거슬러 외직인 김해부사로 옮겨 앉게 됐다. 김해부사로 있을 때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 땅인 안동부 임하현 옥산동 도목촌 북쪽의 지실어촌(只失於村)에 은거했다. 태조 이성계가 승지 벼슬을 내려 그를 불렀고, 태종 이방원이 대사간과 대사헌을 내려 그를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호를 사복재(思復齋)라 했는데 이는 고려를 돌이켜 생각한다는 뜻이고, 집 앞에 정자를 지어 반구정이라 했는데 이는 옛날로 돌아간다는 반구(返舊)를 차음한 것이다. 또한 대를 지어 봉송대라 했는데 이는 송도(개성)를 받든다는 봉송(奉松)을 차음한 것이다. 자신의 호부터 머문 공간까지 죄다 고려 왕조를 받들고 회복하려는 의지로 가득 채운 것이다. 그가 죽은 뒤 촌로들이 마을 이름을 ‘지실어촌’에서 ‘기사리’로 바꾼 것도 자연스런 호응으로 여겨진다.

그의 묘는 기사리에서 멀지 않은 도목촌 옥산 자락에 있다. 그는 아들 넷과 딸 둘을 두었는데, 아들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면서 오래도록 그의 행적은 물론이고 묘조차 잊혀졌다. 후손들은 그가 죽은 지 194년이 지난 뒤인 1605년에야 비문(碑文)을 찾고, 1785년에 깨진 비석을 찾아 비로소 그의 묘와 행적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권정의 사위인 우홍균(禹洪鈞)의 ‘유사(遺事)’라는 글도 발견됐다. 우씨 집안에 보관되어온 글인데, 우홍균은 장인 권정에 대해 “고려조에서 직간(直諫)하던 고결한 절의의 선비였으며, 명리(明理)의 학문에 뛰어났다”고 기록했다.

 

구성산 거북머리 위에 세워진 봉송대. 봉송대 뒤편으로 구성산과 기와 건물 반구정이 보인다. 안동시 예안면 기사리에 있는 권정의 유허비.(왼쪽부터)

현재 기사리에는 권정의 유허비가 있다. 안동댐이 들어서면서 500m가량 마을 위쪽으로 옮겨진 상태다. 유허비 뒤쪽의 바위에는 ‘忠節(충절)’ ‘奉松(봉송)’ ‘返舊(반구)’ ‘淸風高節(청풍고절)’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제 더는 조상의 유적을 잃어버리지 않고, 조상의 정신을 잊지 않겠다는 후손의 다짐처럼 보인다.

기사리는 예안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5리쯤 떨어져 있는데, 예안면 소재지가 내려다보이는 서쪽 산자락에는 역동(易東) 우탁(禹卓)의 묘소가 있다. 고려 충선왕 때 왕이 옳지 않은 행동을 하자 도끼를 들고 대궐로 들어가 상소했던 인물이다. 상소를 들어주든지, 들어줄 수 없다면 도끼로 자신의 목을 치라는 뜻이었다. 우탁이 벼슬을 버리고 은거했던 곳이 바로 안동 예안현(지금은 수몰된 안동시 와룡면 선양동)이다. 권정이 태어난 북계촌의 다른 이름이 역동 선생의 호를 빌려 쓴 ‘역동(易洞)’이었고, 권정의 사위인 우홍균이 우탁의 고손자였던 점으로 보아, 권정이 우탁의 지조와 결기를 염두에 두고 살았으리라 추정해볼 수 있다.

 

권정 살던 기사리에 ‘유허비’ 남아

 

그런데 권정이 세웠다는 반구정과 봉송대가 안동 예안면에서 자취를 감추고 영주 시내 한복판에 자리 잡게 된 것은 어떤 경위일까? 권정의 네 아들은 출사(出仕)는 했지만, 순탄하게 살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큰아들 조(照)는 문과에 급제해 사재감정(司宰監正)을 지냈지만 말년의 행적을 알 수 없고, 후손조차 끊어졌다. 넷째 아들 시(時)도 후손이 끊겨 자세한 행적을 알 수 없다. 셋째 아들 서(曙)는 울산부사를 지냈고 그 후손들이 성주에 많이 모여 산다. 둘째 아들 요(曜)는 보령현감을 지냈는데 어떤 연유인지 관직을 버리고 처가 동네인 영주에 들어가 살았다. 영주 구성산 주변에 모여 살며 권정의 공간을 마련한 이들이 바로 권요(權曜)의 후손들이다.

구성산의 반구정은 영주에 들어간 권정의 후손들이 번창해 ‘이 땅은 선생이 사시던 곳은 아니지만 기맥(氣)이 모인 곳이니 혼령이 오르내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여기면서 1780년에 마련한 것이다. 거북처럼 생긴 구성산의 거북머리 위에 봉송대가 세워진 것은 훨씬 뒤인 1948년의 일이다.

1958년 영주에 큰 홍수가 나기 전까지 봉송대와 반구정 밑은 죽계천이 휘감아돌아 호수를 이루고, 물새들이 날아다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영주의 옛 사진을 보니 강가에 우뚝 선 봉송대의 자태가 자못 멋들어졌다. 하지만 홍수가 난 뒤로 물길을 직선으로 뽑아낸 통에 호수 자리에 철길이 놓이고 민가가 들어서 옛 정취는 찾을 길이 없게 됐다.

풍광은 달라졌지만 권정을 사모하고 기리는 후손들의 정신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 두터워지는 것 같다. 구성산 바위에 새겨진 ‘不事二君’의 각자가 어제 새긴 듯 선명하다. 권정은 한때 후손들조차 그 행적을 잊을 정도였으니 두문동 72현을 헤아릴 때에 거론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다시 두문동 72현을 꼽는다면 기사리로 명명된 마을에서 사복재로 호를 짓고, 반구정과 봉송대를 세워 고려를 회복하려 했던 권정의 이름을 뺄 수는 없을 것이다.

 

 

 

 

 

14.경주 김씨와 김자수

죽음으로 지켜낸 ‘가문의 절개’
형조판서 벼슬 받으러 가던 중 태재서 자결 … “비석 세우지 말라” 대대손손 강직 이어받아
허시명/ 여행작가 www.travelwriters.co.kr
 

묘비를 세우지 말라 하여 뉘어놓은 신도비. 원래는 땅에 묻어두었는데 근자에 땅 위로 올리고, 새로 비석을 만들어 세워놓았다.

두문동 72현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는 죽음에 이르러 “내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은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않고, 비석을 눕혀두었다. 김자수 묘는 경기도 분당 서현역에서 광주시 오포읍으로 넘어가는 태재마루 근처 오포읍 신현리 상태마을에 있다.

 

고려 향한 충절 목숨 바쳐 실천

 

그가 세상을 떠난 날은 태종 13년(1413) 11월14일이다. 태종으로부터 형조판서로 부임하라는 전갈을 받고, 고향 안동에서 한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아들 근(根)이 초상 치를 준비를 갖추고 뒤를 따랐다. 김자수는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독약을 준비한 상태였다. 벼슬을 받으면 고려를 향한 충절을 저버리는 일이 되고, 벼슬을 받지 않으면 집안이 풍비박산 날 진퇴양난의 처지였다. 그가 추령(秋嶺, 현재의 태재로 추정)에 이르렀을 때 “나는 지금 죽을 것이다. 오직 신하의 절개를 다할 뿐이다. 내가 죽으면 바로 이곳에 묻고, 비석을 세우지 말라”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平生忠孝意 평생토록 지킨 충효
今日有誰知 오늘날 그 누가 알아주겠는가
一死吾休恨 한 번의 죽음 무엇을 한하랴만은
九原應有知 하늘은 마땅히 알아줌이 있으리라.

김자수가 남긴 절명사(絶命詞)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태재에서 맞이한 것은 눈앞으로 한양 땅이 펼쳐지고, 등 뒤로 포은 정몽주(鄭夢周) 묘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 물러설 수 없는 선택의 시간이 온 것이다. 한양이냐, 정몽주냐의 갈림길에서 그는 정몽주의 길을 택한다. 태재에서나, 그가 묻힌 곳에서나 직선거리로 4km 떨어진 곳에 정몽주의 묘가 있다.

有忠有孝難 충이 있으면서 효가 있기는 어렵고
有孝有忠難 효가 있으면서 충이 있기도 어려운데
二者旣云得 이 두 가지를 이미 다 얻었건만
況又殺身難 하물며 살신의 어려움까지야.

그의 죽음을 두고 황희(黃喜)가 지은 만사(輓詞)다. 그는 충신이면서도 지극한 효자였다. ‘삼강행실록’에 효행이 전할 정도로 효자의 표본이었다.

김자수는 고려 충정왕 3년(1351)에 태어났다. 10세 때 아버지를 잃었고, 20세 되던 공민왕 19년(1370) 생원시에 합격, 개성 성균관에 입학한다. 당시 성균관 책임자는 대사성 이색(李穡)이었고, 선생으로 박상충(朴尙衷)·정몽주(鄭夢周)·김구용(金九容)·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이 있었다. 김자수는 성균관에 머문 지 1년이 안 되어, 편찮은 어머니를 봉양하려고 고향 안동으로 내려간다. 한겨울 얼음장 밑에서 잉어를 잡고 눈 덮인 대밭에서 죽순을 캐어 드렸지만 어머니의 수명을 연장시키지는 못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주자가례’에 따라 3년 시묘살이를 한다. 그때의 정경을 문익점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에 있는 김자수의 묘. 산을 넘으면 정몽주의 묘가 있다(왼쪽 사진). 조선 후기 김자수 어머니 묘 앞에 세운 정자, 추원재.

 

始見安東居堊子 처음에 안동에서 악차(堊次·무덤 옆의 뜸집)에 있는 사람 보았는데
剖氷求鯉自恢恢 얼음 깨고 잉어 구하여 무척 기뻐하더구먼.
筍生雪裏誠心厚 눈 속에서 죽순이 난 것은 참으로 효성이 지극함인데
雉下苦前孝烈開 거적자리 앞의 꿩이 내린 것은 효열(孝烈)의 열림이지.

훗날 김자수의 효행과 시묘살이한 묘소 주변을 ‘시묘동(侍墓洞)’이라 부르고, 그가 살던 안동 남문 밖에 ‘孝子高麗道觀察使金自粹之里(효자고려도관찰사김자수지리)’라고 새긴 비석을 세웠다. 이후 비석은 어머니 묘소가 있던 시묘골인 안동 월곡면 노산리로 옮겨졌다가, 월곡면이 안동댐으로 수몰되자 어머니 묘소와 정자 추원재(追遠齋)와 함께 1973년 안동시 안기동 정자골로 이전한다.

 

명필 추사 김정희가 15대孫

 

안기동으로 이전했을 때 앞에 하천이 흐르고 논밭이 있었는데, 지금은 하천이 복개되고 아파트가 들어서 주택가가 되었다. 김자수의 동네라고 칭해준 효자비 비각 안에는 순조 18년(1818)에 김노경(金魯敬)이 짓고 그의 아들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직접 쓴 글을 새긴 현판이 있었는데, 2005년에 누군가가 훔쳐갔다. 김정희는 김자수의 15대손으로 아버지와 선조의 묘를 찾은 것이었다.

안동댐이 생기면서 안동시 안기동으로 옮겨진 김자수의 효자비와 비각.

1374년 김자수는 문과에 장원급제, 사간원 정언(正言) 벼슬을 하다가 여수 돌산도로 귀양 가기도 했지만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형조판서를 지내다 고려가 망하자 안동으로 낙향한다. 그에게 아들 하나와 손자 넷이 있었다. 아들 근(根)은 평양소윤을 끝으로 아버지를 따라 벼슬을 버린 듯하다. 손자 넷은 조선 왕조에 합류, 벼슬길에 올랐는데 넷째 김영유(金永濡)가 대사헌과 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

김자수 고손자인 김세필(金世弼)은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변론하다 유배되었고, 그의 아들 김저(金儲)는 을사사화 때 사사(賜死)되었다. 김자수 무덤에 차마 비석을 세우지 못하고, 비석을 눕혀서 묻어둔 후손은 8대손인 김홍욱(金弘郁)이다. 김홍욱은 황해도관찰사로 있을 때 소현세자 강빈(姜嬪)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해달라는 응지상소(應旨上訴·임금의 요청에 응해 올린 상소)를 올렸다가 효종이 직접 지휘한 심문을 받던 중 매 맞아 죽은 인물이다. 김홍욱은 죽음에 이르러 “언론을 가지고 살인하여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는가?”라고 말할 정도로 대찼다. 김홍욱 자손 중 정승이 8명, 왕비가 1명이 나왔는데, 김정희도 그 자손이다. 추사 또한 지조가 강하고 타협하지 않기로 유명한 인물이다.

이상은 주로 경주 김씨 족보와 신도비에 기록된 행적을 중심으로 기술한 내용이다. ‘조선왕조실록’이나 ‘동국여지승람’에는 그가 조선 왕조에서 벼슬을 받았다고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그가 조선에 들어와 벼슬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는 때로 ‘조선왕조실록’의 진위 논란까지로 확대되는데, 대체로 1665년 영동의 초강서원에 김자수가 배향된 이후에는 가전(家傳)되어 오는 이야기가 우위를 확보한다.

 

 

 

 

 

15.천안 전씨와 전신민

고려 향한 일편단심 눈물과 그리움 한평생
무등산 자락에 정착해 정자 짓고 생활 … 조복 입고 통곡하며 송도 향해 절 올려
허시명/ 여행작가 www.travelwriters.co.kr
 

광주 무등산 자락에서 가장 유서 깊은 동네로 성산계곡을 꼽을 수 있다. 조선시대 정원의 한 전형을 이루는 양산보(梁山甫)의 소쇄원과 임억령(林億齡)의 식영정이 있고 창평, 고읍에 이르면 오이정(吳以井)의 명옥헌, 정철(鄭澈)의 송강정과 송순(宋純)의 면앙정이 있어서 정자 문화가 꽃을 피웠던 곳이다.

이 정자 문화의 원조가 계곡 가장 위쪽에 자리잡은 독수정(獨守亭)이다. 무등산뿐 아니라, 전라남도에서 가장 오래된 산정(山亭)이다. 정자의 주인은 고려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전신민(全新民)이다. 그는 무등산과 특별한 연고가 없었다. 그저 개성으로부터 멀리 떠나와 머문 곳이 무등산 자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관향도 아니고, 그의 부모가 살던 땅도 아니고, 처가 동네도 아니었다. 오가다가 눈여겨봐둔 땅도 아닌 듯하다. 지금도 예전의 풍광을 지니고 있을 만큼 산이 첩첩하고 옹색하다. 소쇄원이나 식영정이나 개울가에서 들판을 내려다보며 넉넉하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공간이라면, 독수정은 첩첩산중에 자리하고 있다. 전신민은 이곳에 숨어살며, 무등산의 고려 때 이름인 서석산(瑞石山)에서 글자를 취하여 호를 서은(瑞隱)이라고 했다.

그가 머문 동네는 소쇄원에서 2km 떨어진 담양군 남면 연천리의 산음동이다. 개울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면 전신민의 신도비가 있고, 그 옆에는 5대(代)에 걸쳐 아홉 효자가 난 전신민의 후손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비석 앞쪽으로 활처럼 휜 길을 따라 오르면 키가 훤칠한 고목들이 산자락을 가릴 정도로 가득하다.

 

공민왕 때 병부상서 지낸 무인

 

이곳이 전라남도 지방기념물 제61호로 지정된 독수정 원림(園林)이다. 원림에는 오래된 회화나무 3그루와 자미나무·매실나무가 있고, 대나무 숲이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다.

원림 안에 또 하나의 비석이 있는데, 이는 전신민의 아들 전오돈(全五惇)을 기리는 기단비(基壇碑)다. 전오돈의 행적을 후손들이 오래도록 잊고 지내다가, 1470년에 작성된 전씨세보(全氏世譜)를 발견하고 그의 행적을 새롭게 확인하면서 세운 비석이다.

전신민은 무인(武人)이었고, 그의 아들 전오돈 역시 무인이었다. 전신민은 공민왕 때 북도안무사 겸 병마원수를 거쳐 병부상서(兵部尙書)까지 지냈다. 전오돈은 정오품 벼슬의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는데, 왜적을 무찌른 공로로 우왕(禑王)으로부터 금 50냥을 하사받은 적이 있었다. 그가 곧바로 금 50냥을 사양하자, 도당(都堂)에서 말하기를 임금께서 내린 것은 사양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자 오돈은 “그러면 이미 내 물건이 되었으니, 청컨대 도당에 올립니다”며 금 50냥을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 일을 두고 많은 이들이 칭송하였다고 ‘고려사’는 기록하고 있다.

 

 

전신민은 독수정에 올라 통곡하며 절을 올렸다. 이태백의 시에서 이름을 따온 독수정(왼쪽). ‘서은실기’에 실려 있는 독수정 14경(오른쪽 위). 전신민은 무등산 산음동에 은거하다가 그곳에 묻혔다.

전신민은 아들 오돈과 함께 무등산에 들어왔다. 처음엔 제계(齊溪)라는 동네에 살다가, 산 하나를 넘어 산음동에 터를 잡았다. 전신민은 재계정(宰溪亭)과 가정(稼亭)을 짓고, 조복(朝服)을 입은 뒤 그 정자에 올라 송도를 향해 통곡하며 절을 했다고 한다. 전신민이 나이 들어 두 정자를 오가는 것이 불편해지자, 전오돈은 아버지를 위해 집 앞에 독수정을 지어드렸다. 독수정은 이태백의 시 ‘夷齊是何人 獨守西山餓’[백이숙제는 누구인가, 서산(수양산)을 외롭게 지키다 굶어죽은 사람이라네]에서 따온 구절이다.

독수정은 북향을 하고 있는데, 이는 송도(개경)를 염두에 둔 것이다. 독수정에서 100m도 안 떨어진 산 안쪽에 전신민이 살고 그 후손들이 대대로 살던 집이 있다. 집은 개축한 일자형 건물이고, 그 옆에 재실을 겸한 연천리 산음동 새마을회관이 새로 들어섰다. 전신민의 묘소는 그 집 뒷산에 자리잡고 있다. 활 한 바탕 거리인데, 누에등처럼 흘러내린 산자락에 자리잡은 묘에는 ‘瑞隱全先生之墓’라고 적힌 비석이 서 있다.

 

스스로 ‘미사둔신’이라 칭해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하고 남은 여자를 미망인(未亡人)이라고 부르듯, 전신민은 스스로를 ‘미사둔신(未死遯臣·죽지 못하고 달아난 신하)’이라 칭했다. 독수정을 지을 무렵에 지은 그의 시가, 독수정을 지키고 있다.

風塵漠漠我思長
자욱이 이는 티끌 시름도 깊어라
何處雲林寄老蒼
어느 구름 숲에 늙은 몸을 숨길-고
千里江湖雙雪
머나먼 천 리 길에 흰 귀밑머리 나부끼고
百年天地一悲凉
한평생 천지간에 슬픔 가득 서늘해라
王孫芳草傷春恨
임은 이미 가셨어도 한 많은 봄풀 돋고
帝子花枝月光
꽃가지 두견새는 달빛에 울음 우네
卽此靑山可埋骨
이 산골 푸름 두르고 백골로 묻힐지라도
誓將獨守結爲堂
두 나라 아니 섬기리 홀로 지킬 집을 짓네

독수정 건물은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 후손들이 개축한 탓에 문화재로는 지정되지 못했다. 하지만 지역민들의 아쉬움이 컸는지, 독수정을 둘러싼 숲을 지방 기념물로 지정해 독수정 공간을 보호하고 있다. 독수정 마루에 앉으니 쓸쓸하고 적막하다. 한낮에도 인적이 드물어, 그 옛날처럼 서은공이 찾아와 한바탕 곡을 하고 갈 것만 같다.

 

전신민의 후예들

전신민의 후손은 300명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무등산 산음동에 들어온 뒤 전씨 집안은 간신히 이어져 내려왔다. 무인 집안이라 아무래도 사람을 여럿 해쳤을 테니 그 때문에 손이 귀한 듯하다고 한 후손은 말했다. 일제강점기에 산음동에 살았던 전규환 씨는 조선 명의로 소문나 전국각지에서 찾아오는 이가 많았다. 현재 문중 일은 전기종 씨가 맡고 있다.

 

 

 

 

 

 

 

16.밀성 박씨와 박익

태조가 내린 벼슬 다섯 차례 거절
판서·좌의정으로 유혹해도 ‘불사이군’ 불변 … 후손들이 뜻 기리는 전시관 건립 추진
허시명/ 여행작가 www.travelwriters.co.kr
 

고려 벽화가 출토된 박익의 묘.

송은(松隱) 박익(朴翊, 1332~1398)을 기리는 사당으로 경남 청도의 용강서원, 밀양 덕남사, 산청 신계서원, 거제도 송령사가 있다. 후손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동네에 그의 사당이 있는데, 독특한 것은 그 사당에 모두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는 점이다. 지금은 박익의 후손인 박대성 화백이 그린 초상화로 통일됐지만, 그 이전에는 비슷하지만 제각기 다른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사당엔 위패만 모셔져 있기 쉬운데 박익의 경우처럼 초상화가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묘사한 화상시(畵像詩)가 전해오기 때문이다.

화상시는 박익과 동시대에 살았던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그리고 변계량(卞季良)이 지었다. 초상화를 보고 정몽주가 먼저 운을 뗐다. “긴 수염 십 척 장신 잘도 그렸네(畵出長髥十尺身)/ 볼수록 두 얼굴이 참으로 똑같네(看來尤得兩容眞)/ 세상 이치가 자취 없다고 말하지 마소(寞言公道無形跡)/ 죽어도 죽지 않은 사람 되겠네(死後猶存不死人).” 정몽주는 박익과 박익의 초상화를 나란히 보고서 이 시를 읊은 것으로 보인다. 그 자리에 길재와 변계량도 함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정몽주의 시를 차운(次韻)하여 시를 지었다. “봉황의 눈, 범의 눈썹, 십 척 장신에(鳳目虎眉十尺身)/ 담홍 반백의 두상이 참으로 똑같네(淡紅半白兩相眞)/ 그림으로 선생 얼굴 살펴보니(畵圖省識先生面)/ 그림 속에도 죽지 않을 정신 그려져 있네(不死精神影裏人).” 이렇게 읊은 길재는 박익보다 21살이 어려서 박익을 선생이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밀양 한 동네 출신으로, 아들의 친구이기도 했던 변계량은 “풍후한 얼굴 덕스러운 몸매(豊厚形容德有身)/ 아무리 보아도 하늘이 내린 분이네(看看優得出天眞)/ 눈 덮은 긴 눈썹, 무릎에 드리운 수염(眉長過目髥垂膝)/ 그림과 사람 마주해도 분별하기 어렵겠네(兩對難分影外人)”라고 묘사했다.

 

정몽주와 학문 교류, 이성계와 전장 누벼

 

초상화를 그리고, 그 초상화를 보고 시를 짓는 흥미로운 풍속도가 고려 말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 정몽주와 길재가 보았던 박익의 초상화는 언제 소실됐는지 알 수 없다. 훗날 박익의 위패를 모시는 서원이 세워질 때마다 이 화상시를 근거로 새로운 초상화가 그려지고, 영정 봉안문(奉安文)까지 마련됐다.

송계마을에서 가까운 후사포리에 있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 박익의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심었고, 이 은행나무에서 한 자씩 따서 밀성 박씨 은산파와 행산파가 생겼다.

박익은 1332년에 태어나 1352년(공민왕 2) 이색(李穡), 박상충(朴尙衷)과 함께 과거에 급제했다. 나이로는 이색보다 네 살 어리고, 이성계(李成桂)보다 세 살, 정몽주보다 다섯 살이 많았다. 박익은 문인이었지만, 이성계와 함께 전장에 나가 남으로 왜구를, 북으로 홍건적과 여진족을 물리치기도 했다. 벼슬은 예문춘추관과 직제학을 지냈으며 고려가 망하던 해에는 예조판서를 역임했다. 박익이 예조판서를 지내기 전, 고향인 밀양 땅 송계마을(현재의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 송악마을)에 은둔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정몽주가 이곳에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 정몽주에게 건넨 시가 있다. “송계마을 숨은 선비 집을 찾아오셨소(來訪松溪隱士家)/ 석양에 문은 닫혀 있고 꽃이 지는데(夕陽門掩落花多)/ 술통 앞에 두고 나의 깊은 마음을 묻는가(樽前問我幽閑意)/ 주렴 밖에 반쯤 보이는 저 청산이 내 마음이라오(簾外靑山半面斜).”

정몽주가 타살되고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열자, 박익은 또다시 송계마을로 내려오고 만다. 뒷산이 송악(松岳)이고, 마을이 송계(松溪)인 것은 송도(松都, 開京)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이성계는 전장에 함께 나섰던 박익에게 공조판서, 형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연달아 내리며 조정으로 불러들이려 했다. 하지만 박익은 눈멀고 귀 멀었다는 핑계를 대며 태조가 내린 교지와 예관을 보지도 않고 거절했다. 마지막에는 좌의정을 내렸으나 역시 나서지 않았다. 다섯 번 불렀어도 한 번도 나서질 않아 ‘오징불기(五徵不起)’라고 하는데, 그는 죽음에 이를 때까지 고려를 향한 충절을 지켰다.

박익의 묘 남쪽 벽에 그려진 벽화.

그는 네 아들에게 남긴 유언에서 “나는 왕씨의 혼령으로 돌아가거니와 너희들은 이씨의 세상에 있다. 이미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었으니 온 힘을 다해 충성을 하라. 선천과 후천으로 부자간에도 시대가 달라졌다”며 조선에 충성할 것을 당부했다. 박익의 후손들은 이 유언 때문에 조선시대에 집안이 무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박익은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화악산 자락에 묻혔다. 묏자리는 경남의 최고 명당으로 꼽힐 만큼 활달하다. 묘는 사각형으로 고려 양식을 띠고 있고, 돌단이 둘러져 있어 웅장하다. 이 때문에 두 차례나 도굴당하는 곤욕을 치렀다. 2000년 9월 두 번째 도굴꾼이 지나간 뒤, 동아대 박물관 주관으로 무덤 발굴 작업이 진행됐다. 이때 고분벽화와 지석, 혼유석 등이 출토돼 세인들을 놀라게 했다.

소산 박대성 화백이 그린 박익의 초상화.

 

 

박익 무덤에서 고분벽화 등 출토

 

고려 말 고분벽화는 존재 자체가 아주 드물다. 천장과 북쪽 그림은 지워지고, 동·서·남쪽 그림은 훼손된 상태지만 빼어난 솜씨를 확인하기에는 충분한 정도로 남아 있었다. 매화와 대나무가 그려진 동쪽 벽에는 머리를 땋아 올린 세 명의 여자가 손에 찻상과 그릇을 든 채 걷고 있고, 역시 나무가 그려진 서쪽 벽에도 네 명의 남녀와 술병을 들고 있는 한 여자의 그림이 있다. 남쪽 벽에는 슬픈 눈망울을 한 말의 고삐를 잡고 있는 두 남자가 있다. 고려시대 생활상을 보여주는 거의 유일한 풍속화인 셈이다. 무덤은 다시 덮여 긴 잠에 들어갔고, 벽화는 2005년 2월에 국가문화재 사적 제459호로 지정됐다.

밀성 박씨 송은공파 문중에서는 미려한 고분벽화가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120자의 입지잠(立志箴)과 168자의 지신잠(持身箴)을 저술한 송은 박익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벽화묘 전시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600년이 지났건만, 두문동 72현으로 꼽히는 송은 박익의 삶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살고 있는 것 같다.

 

 

 

 

 

 

 

 

 

Tips

밀성은 밀양의 옛 이름이다. 밀성 박씨와 밀양 박씨는 같은 이름이지만, 송은공파는 시조 밀성대군의 이름을 좇아 본향을 밀성으로 사용하고 있다.

 

 

밀성 박씨 송은공파 박익의 후예들

박태준(전 국무총리·포스코 명예회장), 박숙현(전 국회의원), 박재규(전 통일부 장관·경남대 총장), 박판제(초대 환경부 장관), 박철언(전 국회의원), 박종구(삼구그룹 회장·고려대 교우회장), 박번(동양강철 회장), 박치현(흥아상사 명예회장), 박영석(전 국사편찬위원장), 박영관(세종병원 원장·이사장), 박성상(전 한국은행 총재), 박대성(화가), 박중훈(영화배우), 박한제(서울대 문리대 교수), 박영진(경남지방경찰청장), 박판현(신라오릉보존회·박씨대종친회 사무총장), 박희학(송은공파 총무), 박종탁(박씨문화원 원장)

 

 

 

 

 

 

17.단양 우씨와 우현보


 

세 아들 ·큰손자 잃고 멸문당할 뻔
유배된 뒤 모진 핍박 … 이방원과의 인연으로 2차 왕자의 난 후 가문 재기
허시명/ 여행작가 www.travelwriters.co.kr
 

우탁의 조부인 우중대의 묘. 등잔형 명당이라 후손들이 이곳에서 멀리 나가 살아야 잘 산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바로 옆에 단양 우씨 시조부터 5세조까지 모신 단이 있다.

파란만장(波瀾萬丈)이란 말을 이럴 때 쓰는 것일까? 양호당(養浩堂) 우현보(禹玄寶, 1333~1400)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살아서 얼마나 환호하고, 얼마나 절망하고, 얼마나 비통하고,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가 세상을 뜬 지 6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가 느꼈을 영욕(榮辱)은 아직 삭혀지지 않았을 것만 같다.

고려 말 최고의 명문가로 한산 이씨와 단양 우씨를 꼽을 수 있다. 한산 이씨는 가정(稼亭) 이곡(李穀)과 목은(牧隱) 이색(李穡) 두 부자(父子)가 중국에서 연달아 급제하면서 문명(文名)을 떨친 집안이다. 단양 우씨는 우탁(禹倬)이 두각을 보였고, 우현보에 이르러 아들 5형제가 모두 급제하면서 고려 말의 막강한 문벌이 됐다.

두문동 72현을 꼽을 때, 구성 인원이 다른 두 개의 명단이 존재한다. 그 하나는 정몽주를, 다른 하나는 우현보를 앞장세운다. 우현보는 이색, 정몽주와 함께 고려 말 삼인(三仁)으로 꼽힌다. 이색, 정몽주, 길재로 구성된 고려 말 삼은(三隱)이 후대의 영향력을 반영한 명단이라면, 삼인은 당대의 세력 구도와 영향력을 반영한 명단이다.

 

선죽교에서 살해된 정몽주의 시신 거둬

 

우현보의 집안에서 크게 이름을 얻은 인물은 시조 우현(禹玄)의 8세손인 역동(易東) 우탁이다. 그는 도끼를 들고 임금에게 상소를 할 만큼 결기 있는 선비였고, 작가가 분명한 우리말 노래 형식을 갖춘 최초의 시조 ‘탄로가’를 지은 시인이었다. 또한 역학(易學)에도 뛰어나 ‘역동(易東)’이라 불린 성리학자였으며, 훗날 퇴계 이황이 안동에 역동서원을 세워 추앙했을 정도로 후대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우탁에게 늦도록 아들이 없어 들인 양자가 우길생(禹吉生)이다. 그는 나라에 공을 세워 삼중대광숭록대부(三重大匡崇祿大夫)에 올랐고 적성군에 봉해졌는데, 특히 정몽주가 일찍이 스승으로 모셨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 우길생의 아들이 우현보다. 우현보가 10세 때에 우탁이 세상을 떠났으니, 우현보는 할아버지를 충분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현보는 1333년에 태어나 1355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최고 권력자인 시중(侍中) 벼슬에 올랐다. 그는 당대에 상례(喪禮)를 삼년상으로 하고 동성동본 혼인 금지, 유학 증진, 의관(衣冠) 제도 확립 등에 힘썼다. 안향에서 우탁으로 이어진 성리학의 기반을 넓히는 데 기여한 셈이다.

우현보에게 가장 큰 자랑거리는 아들 5형제, 홍수(洪壽)·홍부(洪富)·홍강(洪康)·홍득(洪得)·홍명(洪命)이 모두 과거에 급제한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5형제가 정부 요직에 두루 포진했으니, 한 집안에서 국사(國事)를 논할 정도였다. 더욱이 큰손자인 우성범(禹成範)이 공양왕의 부마(사위)가 되면서 왕실과 튼튼한 인연을 맺기도 했다. 이 때문에 우씨 집안은 성리학 정착에 기여한 신진 사대부 집안이면서도 왕실의 외척으로 왕의 비호를 받는 집안이라는 엇갈린 평가를 받게 된다.

 

 

아파트와 송림에 둘러싸인 월곡역사박물관. 문중에서 만든 유일한 박물관이다(왼쪽 사진). 단양 우씨 시조단과 재실 희역당이 있는 단양군 적성면 애곡마을.

비극이 찾아온 것은 1392년 4월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살해되면서부터다. 참살된 정몽주의 시신을 거둬준 이가 바로 우현보였다. 우현보는 계림(경주)으로 유배당하고, 아들 5형제도 뿔뿔이 유배를 당했다. 그해 7월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내쫓기던 날, 우성범은 개성 남문 밖에서 공개 참살되고, 조선 개국이 선포된 뒤에는 유배지에 있던 첫째 홍수, 넷째 홍득, 다섯째 홍명이 장살(杖殺·곤장을 맞고 살해)됐다. 곤장을 많이 맞으면 장독이 올라 죽는 수도 있지만, 사형(死刑)이 따로 있었으니 죽지 않을 만큼 때리는 게 장형(杖刑)이다. 그런데 세 형제가 죽음에 이른 것은 죄다 정도전(鄭道傳)의 사주로 빚어진 일이라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후손들 대구에 시민공원 겸한 박물관 만들어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의 우탁 출생지에 세워진 사적비.

정도전의 어머니가 단양 우씨인데, 어머니의 외할머니가 노비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도전은 벼슬을 받을 때마다 곤혹스런 처지에 놓였었다. 고려시대는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어머니가 천민이면 그 자녀도 천민의 신세였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우씨 집안에서 의도적으로 자신의 출신 성분을 거론하며 음해했다고 여겼던 것이다.

고려와 함께 몰락한 우씨 집안이 극적으로 부활한 것은 이방원이 주도한 제2차 왕자의 난 때였다. 정종 2년(1400년)에 우현보의 문하생인 이래(李來)가 이방원의 바로 위 형인 방간이 방원을 제거하려 한다는 사실을 우현보에게 알렸고, 우현보는 이 사실을 둘째 아들 홍부에게 알려 이방원에게 대응하게 했다. 이방원은 즉시 사병을 움직여 방간의 사병들을 제거했고, 정종으로부터 권력까지 승계할 수 있었다.

고려의 원수이자 집안의 원수인 조선에 우현보가 돌연 협조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왜일까? 이는 우현보와 이방원의 인연 때문이었다. 이방원이 과거에 급제할 때 우현보가 시험관을 맡았다. 당시 급제자들은 자신을 입신시켜 준 시험관을 은문(恩門)이라 칭하며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 그들 사이에서는 스승과 제자보다도 더 강한 인연이 맺어졌다. 이 같은 인연이 이방원에게 결정적인 제보를 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해 홍부와 셋째 아들 홍강은 원종공신이 돼 우씨 집안은 정치적인 재기를 했고 이를 기반으로 조선시대에도 벼슬이 끊이지 않았다.

 

대구시 달서구에 가면 월곡역사박물관이 있다. 아파트 동네에 송림 언덕과 대나무로 울타리를 친 시민공원을 겸한 박물관이다. 우현보의 후손들이 마련한 것으로 한 문중이 세운 우리나라 유일의 박물관이다. 홍명의 후손인 우배선(禹拜善)이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신이 되고, 그 후손이 박물관 동네에 모여 살다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생긴 보상금으로 마련한 것이다. 요사이 도시 외곽에 신도시 개발 바람이 불면서 부자 문중이 많이 생겨나고 있는데 이 자산을 사회로 환원할 줄 아는 것은 나라를 위해서 몸을 아끼지 않은 우현보와 그의 후손 우배선의 정신이 그의 집안에 면면히 내려오기 때문이다.

우현보는 고려가 무너진 뒤 은거하면서 당호를 독락당(獨樂堂)으로 고쳤다. 그는 “지난 것은 모두 꿈이고 진실이 아니니, 앞으로 오는 것도 어떻게 진실임을 보증하겠는가”라고 했다. 파란만장한 삶 끝에 이른 우현보의 심정이 담긴 말이다. 그는 죽음에 이르러서도 “나는 다만 한 사람의 망국(亡國)의 대부다. 나를 선영에 묻지도 말고, 또한 자손들도 이곳에 묻지 말라”고 했다. 그의 무덤은 휴전선 너머 장단 고현(古縣)에 있다.

 

양호당 우현보의 후예들

우승흠(대종회 회장대행), 우영제(대제학공파 회장), 우문식(오파회의 총무), 우종택(예안군파 회장), 우기정(대구컨트리클럽 회장), 우종호(전 외교통상부 대사), 우윤근(국회의원), 우원식(국회의원), 우진명(미성산업 대표), 우대규(한일약품 회장), 우윤근(서울화수회 회장), 우종근(판서공파 회장), 우억기(전 성균관 부관장), 우국일(예비역 장군), 우광택(부장판사)

 

 

 

 

 

18.여주 이씨와 이행



 

부귀권세 버리고 험난한 의리의 길
정몽주 살해한 조영규를 “만세의 흉인”이라 비판 … 조선에 협력 안 해 귀양살이
허시명/ 여행작가 www.travelwriters.co.kr
 

바닷가 소나무에 둘러싸인 월송정.

요즘이야 소 타고 다니는 사람을 보기 어렵지만, 예전에는 말처럼 소도 타고 다녔던가 보다. 조선 초기 청백리로 알려진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은 소를 타고 다니기를 좋아해 그가 재상인 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맹사성보다 여덟 살 연상이자, 두문동 72현으로 꼽히는 이행(李荇, 1352~1432)은 호가 기우자(騎牛子), 즉 소를 타는 사람이다. 당시 말이 귀해서 이행이 소를 탔던 것 같지는 않다. 그의 동갑내기 친구이자 조선 개국공신인 권근(權近, 1352~1409)은 이행의 소 타는 모습을 보고 “무릇 눈으로 만물을 볼 때 바쁘면 정밀하지 못하고 더디게 보아야 그 오묘한 데까지 다 얻을 수 있다. 말은 빠르고 소는 더딘 것이라 소를 타는 것은 곧 더디고자 함이다”라고 논했다. 권근이 20대에 쓴 글이니 이행은 이미 20대에 소를 즐겨 탔음을 알 수 있다.

이행의 자는 주도(周道)다. 자(字)는 성년이 되면 갖게 되는 또 하나의 이름인데, 흔히 본명과 상통하게 붙여진다. 곧 이행의 이름과 자를 풀면 ‘여러 길을 두루 다니라’는 뜻이 된다. 만약 이행이 요즘 세상에 태어났다면 여행가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울진 월송정에 이행의 시 남아

 

이행은 이미 7세 때에 “천리마를 타고 천지간을 주유하겠다(我乘千里馬 周遊天地間)”는 포부를 밝혔다. 그의 시문을 정리한 ‘기우집(騎牛集)’을 봐도 금구(김제시 금구), 금성(나주), 부안, 진보(청송군 진보), 이천(강원도 이천), 청하(영일군 청하), 고창, 우봉(황해도 금천) 등의 지명을 제목에 넣은 시가 눈에 띈다. 그는 또한 물맛을 잘 변별할 줄 알아서 “충청도 달천의 물이 제일이고, 한강 한가운데를 흐르는 우중수(牛重水)가 둘째이며, 속리산의 삼타수(三陀水)의 맛이 셋째”라고 평하기도 했다. 세상을 많이 주유한 뒤라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인 셈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600여년이 지났건만, 행복하게도 그를 기억하고 그를 주인으로 삼는 명소가 있다. 관동팔경 가운데 가장 남단에 위치한 울진 월송정이다. 월송정과 관련해서는 경기체가 ‘관동별곡’을 지은 안축(安軸, 1287~1348)의 시가 있고 숙종의 어제시(御製詩)까지 전해오지만, 이행이 지은 시 ‘평해 월송정’이 바다를 향한 정자의 중앙 상단에 걸려 있다.

“동해의 밝은 달이 소나무에 걸려 있네(滄溟白月半浮松)/ 소를 타고 돌아오니 흥이 더욱 깊구나(叩角歸來興轉濃)/ 시 읊다가 취하여 정자에 누웠더니(吟罷亭中仍醉倒)/ 선계의 신선들이 꿈속에서 반기네(丹丘仙侶夢相逢).”

이 시 현판 옆에는 순찰사로 내왕했던 김종서(金宗瑞, 1390~1453)의 ‘백암거사찬(白巖居士贊)’이 걸려 있다. 김종서는 그 글에서 “해상의 푸른 소나무와 같이, 소나무 위에 걸린 밝은 달과 같이, 선생의 기백과 절의는 천추만세에 이르도록 빛날 것이라”고 했다.

백암은 이행의 또 다른 호다. 월송정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백암온천이 있는데, 백암온천이 기댄 산이 백암산이다. 이행은 백암산 기슭의 날라실(飛良縣)이라는 마을에서 살았다. 월송정에서 10리쯤 떨어진 마을인데, 어머니 평해 황씨의 고향이라 이곳에서 성장기를 보냈고 이후 기회가 될 때마다 내려와 지냈다. 달밤이면 소를 타고 월송정까지 노닐러 가던 곳이기도 하다.

 

 

①밀양 산외면 엄광리 재궁동에 있는 단향비. 이행을 중심으로 그의 조부, 손자의 관직과 이름을 새겼다. ② 밀양강이 내려다보이는 금시당과 백곡서재. ③ 평해 날라실 마을의 성황당. 동제를 지내기 위해 정리를 하고 있다.

그가 소를 타고 노닐던 정경을 당시 고려에 머물던 일본 승려 석수윤(釋守允)이 ‘월하기우도(月下騎牛圖)’에 담아놓았고, 그 그림을 보고 권근과 성석연(1357~1414)은 시를 짓기도 했다. “…소 등에는 시인이 실려 있구나(牛背載詩人)/ 마을은 궁벽하다 청산은 첩첩(村僻山千疊)/ 한 바퀴 달이 둥실 물에 비치니(波明月一輪)/ 흰 갈매기 더불어 마냥 친하니(白鷗相與狎)/ 호탕한 것 누가 있어 길들였더냐(浩蕩有誰馴)”고 권근은 노래했다.

 

후손들, 음력 10월10일마다 제사

 

이행은 17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20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이때 시험관이 이색(李穡, 1328~1396)이어서 평생 사제 관계를 맺게 됐다. 그래서 이색이 탄핵을 받을 때에 그는 이색을 지지했고, 그 때문에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풍류도 있었지만 의리도 있던 사람이었다. 정치·외교적인 능력도 좋아, 제주에 건너가 성주(星主) 고신걸(高信傑)을 설득하고 그 아들을 데리고 와서 비로소 제주를 복속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는 조영규(趙英珪, ?~1395)가 정몽주를 살해하자 “만세(萬世)의 흉인(凶人)”이라고 대놓고 비판했고, 고려가 망하자 “서쪽으로 수양산을 바라보아, 주나라 곡식을 어찌 차마 먹으랴”며 두문동에 들어갔다.

그는 조선에 협력하지 않아 평해 월송정 마을로 귀양 가기도 했는데, 말년은 주로 집안 별장이 있던 황해도 강음 예천동에 칩거했다. 그와 시문을 주고받던 친구였던 권근·성석린·성석연 등은 개국공신으로 조선에 합류했지만, 그는 그들과 원수지간이 되지 않으면서 지조를 지켰다. 아들에게도 “신왕(新王) 또한 성인(聖人)이다. 너는 나와 처지가 다르니 모름지기 잘 섬겨라”고 했는데, 그 말을 좇아 아들 척()은 직제학까지 올랐다. 이행은 천수를 누려 81세까지 살다가 황해도 금천군 설봉산 아래에 묻혔다.

이행의 후손들은 남북이 분단되어 성묘를 할 수 없게 되자 경남 밀양에 이행의 조부부터 손자까지 5대를 함께 모신 단향비(壇享碑)를 마련하고 음력 10월10일이면 제사를 지내고 있다. 밀양은 이행의 고손자인 이사필(李師弼)이 연산군 때에 어지러운 정국을 피해 처가 동네로 내려와 살면서 여주 이씨 집성촌이 된 곳이다.

밀양강 가에는 아름다운 정자가 많은데 월연정은 이행의 6세손인 월연 이태(李)가 주인이고, 금시당은 이행의 7세손인 이광진(李光軫)이 주인이다. 밀양강과, 새로 뚫린 대구-부산 간 고속도로가 내려다보이는 금시당에는 백곡서재가 있다. 백곡서재는 백곡공 이지운(李之運, 1681~1763)을 기려서 지은 건물인데, 이지운은 임진왜란 때 무너진 금시당을 복원하고 ‘철감록(感錄)’을 편찬했다. ‘철감록’에 실린 이행의 글과 자료를 여주 이씨 문중에서 1872년에 따로 편집한 책이 ‘기우집’이다. 기우집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두문동 현인들의 명단을 72명으로 처음 확정했다는 점이다. 덕분에 필자가 지금에 이르러 두문동 72현을 찾아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행의 후예들

이주형(제헌의회 의원), 이우성(퇴계학연구원장), 이운성(시인), 이성림(우성I&C 회장), 이희국(LG전자 사장), 이긍희(전 MBC 사장), 이배영(전 서울 은평구청장), 이완구(한나라당 충남도지사 예비후보), 이성순(영주FM방송 본부장), 이희수(한양대 교수)

 

 

 

 

 

 

19.창녕 성씨와 성사제

“王氏 귀신이 될지언정 李家의 신하는 못 한다”
두문동에 들어가 순절 … 유언 따라 봉분도 만들지 않아
허시명/ 여행작가 www.travelwriters.co.kr
 

물계서원의 봄 향사를 준비하기 위해 회의를 하고 있다.

경남 창녕에 가면 물계서원이 있다. 서원은 조선시대에 학문을 연구하는 사설 교육기관이자 명현(明賢)을 기리는 곳으로, 대체로 지역공동체의 유림이 주체가 돼 건립했다. 그런데 물계서원은 다르다. 한 가문이 주체가 돼 만들어졌다. 1724년 창녕 성씨 가문에 의해서였다.

좌의정까지 지낸 이복원(李福源, 1719~ 1792)은 물계서원에서 조상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것을 두고 “고금에 창녕 성씨 일가뿐이며, 천하에 물계서원 하나뿐이다. 아, 거룩하다”고 평했다. 비록 대원군 때 물계서원은 무너지고 1995년에 다시 세워졌지만, 여전히 국내 유일의 문중 서원이다. 그렇다고 집안사람만 드나드는 것은 아니다. 봄, 가을 제사와 서원 행사는 지역의 타성(他姓) 유림들이 앞장서 치른다.

 

호를 ‘두문자’로 하고 불사이군 뜻 마음에 새겨

 

1809년 물계서원에서 두문동의 역사를 정리한 ‘두문동선생실기(杜門洞先生實記)’가 간행됐다. 성석주(成碩周, 1649~1695)가 그의 직계 선조이자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성사제(成思齊)의 행적을 기록한 것에 두문동 관련 자료를 덧붙여 펴낸 것이다.

성사제의 호는 두문자(杜門子)다. 고려가 망하자 조선의 세상으로 나가지 않고, 두문불출(杜門不出)하겠다는 의지를 호에 새긴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등장하는 ‘공자건두문불출(公子虔杜門不出)’에서 유래한 말로 여겨지는데, 성사제는 자신뿐 아니라 아들의 이름까지도 두문불출의 의미를 담아 두(杜)라고 고쳤다고 한다.

성사제는 신현(申賢, 1298~1377)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신현은 안향과 우탁의 도통(道統)을 이색, 원천석, 정몽주에게 연결시켜준 유학자다. 원천석 감수, 범세동 편찬, 성사제가 증보(增補) 작업에 참여한 ‘화해사전(華海師全)’은 신현의 행적을 중심으로 기술한 책이다. 조선시대 내내 잊혀졌다가 1931년 군산에서 발견된 ‘화해사전’은 비록 위서(僞書)의 논란이 있지만, 고려 말 유학의 계통과 성리학의 이해 수준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사료다.

성사제는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해 문장과 책문(策問)을 만지는 일을 주로 했고, 벼슬은 보문각 직제학(直提學·정사품)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그는 “차라리 왕씨의 귀신이 될지언정 이가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寧爲王氏鬼不作李家臣)”고 말하고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그는 부인에게 “나는 고려의 신하라 신조(新朝·조선)에 벼슬해서 조상을 욕보이지 않을 것이고, 이제 곧 죽을 것”이라며 “아들을 데리고 고향(창녕)으로 돌아가서 선영을 지키라”고 했다.

현재 물계서원에는 21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모두 창녕 성씨 사람들의 것이다. 그중에서 고려 말 충신으로 성여완(成汝完)과 성사제가 있고, 조선 개국공신으로 성석린(成石璘)이 있다. 성여완은 고려가 망하자 경기도 포천 왕방산으로 숨어들어 조선에 협력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큰아들 석린이 조선 개국공신으로 영의정을 지냈고, 둘째 석용(石瑢)과 셋째 석연(石王因)이 대제학 벼슬을 해 두문동 72현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성여완과 성사제는 당숙과 조카 사이고, 성석린과 성사제는 6촌 형제다. 성사제는 조선 왕조에 협력하라는 권유를 많이 받았을 테지만 단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내가 죽더라도 시체를 염하지 말 것이며, 봉분도 만들지 않음이 옳을 것이다”는 말을 남겼고, 결국 두문동에서 순절하고 무덤도 없이 잊혀졌다.

 

① 시조 재실 안의 시조 비와 600년 된 느티나무. ② 성사제를 기리는 망송각 안의 망제단. ③ 망송각 처마의 소박한 문양. ④ 시조 묘 동산에 자리 잡은 시조 재실.

성사제의 존재가 다시 부각된 것은 1796년(정조 20) 유생들에 의해서였다. 그의 행적을 알게 된 유생들이 개성유수에게 알리고, 유수가 임금에게 보고했다. 그 결과 1808년(순조 8) 개성 표절사에 그의 이름이 오르게 됐다. ‘두문동선생실기’가 간행된 것은 그 이듬해의 일이다.

 

정조 때 유생들에 의해 성사제의 행적 부각

 

현재 창녕에 사는 성씨의 9할은 성사제의 후손이다. 부인 성산 이씨와 아들 두는 고향에 내려와 아버지의 유지를 잘 받든 셈이다. 물계서원 건립을 주도한 이들도 물론 성사제의 후손이다.

성사제의 후손은 무덤조차 없는 것을 아쉬워해, 1812년에 창녕읍 조산리의 부인 성산 이씨 묘 옆에 망송각(望松閣)을 짓고 그 안에 망제단(望祭壇)을 마련했다. 망송각 아래쪽에는 신도비(神道碑)도 세웠는데, 신도비는 현재 창녕 성씨 시조 묘가 건너다보이는 대지면 대지초등학교 앞쪽으로 옮겨져 있다.

두문자 성사제가 끝까지 지키려 했던 것은 충(忠)이었고, 효(孝)였다. 나라를 위한 충은 자신이 지켰지만, 선조를 위한 효는 아들에게 맡겼다. 그렇게 충효를 삶의 지표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신도비가 건너다보고 있는 시조 묘의 사연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성사제는 시조 성인보(成仁輔)의 6세손이다. 성인보는 창녕 지역의 호장(戶長)이었는데, 연초에 개경에 임금을 알현하러 갔다가 병을 얻어 숨을 거두었다. 그러자 동행했던 아들 송국(松國)이 자신의 효성이 부족해 아버지가 객지에서 돌아가셨다고 자책하며, 나라에서 제공한 우마차와 장례비를 마다하고 몸소 지게에 아버지의 시신을 지고 천 리 고향 길을 내려왔다. 고향에 이르렀을 때 눈이 내려 하룻밤을 묵게 됐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시신 주변에 호랑이 발자국이 있었다. 시신엔 탈이 없어서, 호랑이 발자국을 따라가 보니 야트막한 언덕에 눈 녹은 양지가 있었다. 송국은 그곳에 아버지를 안장했는데, 호랑이가 잡아준 명당이라 하여 지금도 풍수가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시조 묘에서 가까운 곳에 물계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좋은 터에 조상을 모시고, 그 정신까지 모시고 있는 셈이다. 사육신 성삼문(成三問)과 동국 18현의 한 사람인 우계 성혼(成渾)의 위패도 모시고 있는데, 나라와 운명을 함께한 성사제의 존재가 있기에 더욱 빛나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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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06.14 13:41

    첫댓글 역사학자되셨소 대단한열정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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