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울역사문화포럼 심포지엄 〔2017. 6. 26(월), 위동 페리 크루즈 선상〕
청일전쟁과 한반도 주변
이민원(본회 이사 / 동아역사연구소 소장)
1. 청일전쟁과 동아시아
청일전쟁은 1894년 7월 25일(양) 한반도 서해에서 일본 전함이 청국 전함에 기습공격을 가함으로서 시작되었다. 청일전쟁은 1894년 7월 25일~1895년 4월 17일 사이, 약 9개월의 전쟁이었다. 이 9개월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전투가 풍도(豊島)해전, 성환(成歡)전투이며, 이어진 해상과 육상의 전투가 평양전투, 황해해전, 압록강전투, 요동반도 전투, 산동반도의 웨이하이웨이(위해위) 점령, 전장태(田庄台) 전투 등이다.
청일전쟁은 조선, 청국, 일본 등 동북아 3국에 격변을 가져왔다. 전쟁은 동학농민군의 살육과 조선 주민들의 막대한 물적 인적 피해와 함께 조선의 붕괴를 가져왔다. 청국은 패전을 계기로 급속한 쇠퇴의 길로 들어서 1911년 신해혁명 발발과 함께 중화민국 탄생의 배경을 이루었다. 반면 일본은 아시아의 유일한 제국주의국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청일전쟁으로부터 10년 뒤 서해의 인천과 여순 앞바다에서 일본군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러일전쟁은 동북아는 물론 세계사에 큰 변화를 몰고 온 전쟁이었다. 그 결과 제정 러시아는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가는 가운데 1917년 레닌의 소비에트 정권이 탄생하게 되었고, 1차대전까지 참전하여 승승장구하던 일본은 1945년 원폭 세례를 받고서야 폭주를 멈추었다.
이렇게 볼 때 청일전쟁은 러일전쟁의 오프닝게임이자, 동아시아의 격동은 물론 동서 세계에 격변을 유발한 신호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청일전쟁에는 조선에 대한 청국의 종주권 유지 욕구, 명치유신 이래 일본의 조선 침략 욕구, 동학농민 봉기와 조선 내정의 혼란,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착공으로 소급되는 영국과 러시아의 갈등 등 다양한 요소가 얽혀 있었다.
2. 청일전쟁에 이르는 길
1885년 3월 1일(음) 영국의 동양함대사령관 도웰(William M. Dowell)이 이끄는 3척의 군함이 한반도 남해상의 거문도(巨文島)를 전격 점령하였다. 열흘쯤 지나 오코너(Nicholas R. O'conor:청국주재 영국공사)는 러시아의 불법점령에 대비한 조치로서 잠시 거문도에 정박한다는 것을 조선정부에 통고해 왔다.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한 이유는 무엇일까? 조로밀약설에 원인이 있다는 주장과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싼 분쟁이 주요인이라는 주장이 있다. 조로밀약설은 조선이 러시아에게 군사 재정 지원을 받고, 러시아가 조선의 영흥만을 조차하려 하자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에 대한 공세로서 거문도를 점령했다는 주장이다. 아프가니스탄 분쟁설은 1885년 2월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의 국경 요지 메르브(Merv), 펜제(Pendjdeh)를 점령하여 인도양으로 진출할 길을 뚫으려 하자, 영국이 러시아의 극동지역 군항인 블라디보스톡을 공격하기 위한 전초 기지로 사용하기 위해 거문도를 점령했다는 주장이다. 어느 주장이 진실에 가깝든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영국의 거문도 점령 소식은 청국을 통해 조선에 전해졌다. 조선 조정은 경악하였다. 공법에 투철한 나라가 남의 나라 영토를 점령할 수 있느냐고 영국총영사에게 항의하기도 하고, 서울의 각국 대표에게 협력을 청하였지만 아무 도움을 줄 수 없다는 반응들이었다.
이때 이홍장이 북경의 러시아공사 라디겐스키를 만나 러시아가 향후 거문도를 점령하지 않겠다고 보증한다면, 영국 측에 거문도 철퇴를 요구할 용의가 있다는 제안을 하였다. 러시아 측은 거문도는 물론, 조선의 어떤 지역도 점령할 의사가 없음을 보증한다 하였다. 영국은 청국이 러시아의 약속을 보증할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고, 합의에 이르자 영국군은 1887년 2월 27일 철수하였다.
청국은 사건의 중재를 통해 영ㆍ러 두 세력을 한반도에서 밀어냈고,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한반도 북방에서 차단할 수 있게 되었다. 가장 충격 받은 쪽은 러시아였다. 영국군의 철수로 러시아 함대는 대한해협을 자유로이 항해할 수 있게 되었지만, 한반도에 부동항을 확보할 길은 꽉 막힌 셈이었다. 결국 러시아는 동아시아진출 노선을 육로로 수정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수년 뒤 착수한 것이 시베리아횡단철도였다.(1891,5)
러시아의 시베리아횡단철도 착공 소식에 일본에 비상이 걸렸다. 이 철도가 완공된다면, 동북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일본은 만주는 물론 조선으로도 나아갈 기회가 막힐 것이라고 보았다. 일본은 매년 군비를 증액하여 병력과 무기 증강에 박차를 가하였다. 일본 군부는 영국, 독일, 프랑스 등에 군사를 파견하여 군사교범과 전략, 전술을 배워오게 하였다. 1890년대 초ㆍ중반 군비를 갖춘 일본은 먼저 청국을 상대로 일전을 모색하였다. 러시아를 상대로 한 전쟁에 앞서 먼저 청국을 상대로 한 오프닝게임이 모색되었다.
일본이 기다리던 청국과의 전쟁 도발 기회는 조선 내부에서 다가왔다. 1894년 초 지방관의 탐학에 시달리던 고부(古阜)의 농민이 탐관오리 숙청을 기치로 들고 일어섰다. 이들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조정은 청국에 원병을 청하였다. 5월 초순 아산에 상륙한 청군은 육병 2,800명, 포가 8문이었다. 청국은 갑신정변 직후 맺은 천진(天津)조약에 따라 조선에 파병한다는 사실을 일본에 통고하였다. 일본은 청군의 파병을 기다렸고, 이를 위해 공작까지 진행해 왔다. 청국과 조선 주재 일본공사는 동학농민군 세력 진압을 위해서는 청군 차병이 필요하리라는 주장을 거듭하였다. 일본의 우익 낭인들은 전봉준을 방문해 모종의 제안을 하였다. 전봉준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지만, 다음 해 농민봉기의 결과에 대해서는 크게 후회하였다.
청국의 파병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일본은 파병을 결정하였다. 명분은 ‘동학난을 계기로 조선 정부의 개조를 단행하고, 갑신정변 이후 부진한 일본세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시의 통수기관으로 대본영이 설치되고, 육해군에 동원령이 내려졌다. 5월 초순 인천에 도착한 일본공사는 해병대 420명과 대포 4문을 이끌고 서울에 입성하였다. 뒤 이어 보병 1개 대대 1,050명이 들어왔고, 2,673명의 혼성 여단도 인천에 상륙하였다.
일본의 파병을 통고 받은 조선정부에서는 강경히 항의하였다. 동학도의 봉기는 평정되어 가고 있고, 서울이 평온한 상태인데 일본정부가 돌연 파병함은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행위라 하였다. 원세개도 일본 측에 항의하였다. 일본 측은 공사관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둘러댔고, 병란이 진압되면 곧 철수할 것이라 하였다.
내외 정세가 심상치 않음을 파악한 관군과 동학군은 전주에서 화약을 맺고 해산했다. 관군과 동학군과의 화의 교섭으로 조선 주둔 명분이 더욱 궁색해진 일본은 청국에 조선의 내정을 공동으로 개혁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청국은 병란이 진압되었으니 양국이 공동으로 토벌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내정개혁은 조선 내부의 문제로서 청국은 내정에 간섭할 이유가 없다, 일본은 처음부터 조선의 자주를 인정하였으니 더욱 간섭할 권한이 없다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내친 김에 밀고 나갔다. 인천에서 2개 대대의 일본군을 서울로 진입시키고, 후속부대를 인천에 증파하도록 하였다. 서울과 인천에 주둔한 일본군은 약 6,000명. 청군의 두 배에 달하는 병력이었다. 시시각각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았다.
일본은 단독으로 조선 측에 내정개혁을 요구했다. 내정개혁이 실시되지 않는 한 일본군은 철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6.15/7.17) 한걸음 나아가 청국군 철퇴와 기왕에 조선이 청국과 체결한 모든 조약을 폐기할 것을 주장하였다. 회답의 기한을 6월 20일(7.22)로 못을 박았다. 일본은 청국을 압박하고 조선 정부를 협박하면서 개전을 향하고 있었다.
3. 일본의 조선 침략과 동학농민군 살육
마침내 1894년 6월 21일(7.23) 새벽, 대원군의 가마를 앞세운 일본군 병력이 서울의 경복궁을 쳐들어갔다. 대원군의 쿠데타를 가장한 대조선 전쟁 도발이었다. 왕궁을 지키던 조선군이 무기의 열세로 순식간에 무너지고 국왕과 대신들은 궁중에 연금되었다. 조일간의 전쟁이 한 나절도 안 되어 간단히 끝나면서 조선군은 무장해제가 되었다. 전봉준과 농민군이 탐관오리의 숙청을 외치며 봉기한 지 불과 3개월 뒤였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습격한 며칠 뒤 조정에는 군국기무처가 설치되고(6.25/음), 다음 달에 제1차 김홍집내각(7.15/음)이 들어섰다. 이후 추진된 것이 이른바 갑오개혁이다.
조선의 개화파 입장에서는 이 기회에 그동안의 근대화 구상을 실천에 옮기고 동학농민군 측의 요구도 반영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 입장에서는 메이지 유신 이래의 목표였던 조선 침략의 길닦기였다. 요컨대 조선 ‘보호국화’의 기초 작업으로써, 취약한 명분을 내정개혁으로 포장하여 간섭할 구실도 만들고 조선의 내정 구조도 일본에 편리하도록 바꾸자는 것이었다.
한편, 청군과 일본군의 파병으로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감을 감지한 전봉준은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재봉기하였다. 9월 중순 전주에서 전봉준이, 광주에서 손화중이 봉기하자 각처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였다. 10월 말을 전후하여 전라도 삼례역에 모인 동학농민군의 수는 10여 만에 달했다 한다. 종교적 입장을 고수하여 무력 항쟁에 나서기를 꺼렸던 충청도의 동학교도(북접)들도 이때는 동참하였다. 손병희 휘하 1만 여 명의 북접군이 청산에 집결한 뒤, 논산에서 남접과 만나 공주로 향하였다.
남북접의 동학 농민군이 논산에 집결한 뒤 벌인 운명적 전투는 목천의 세성산과 공주의 우금치에서 벌어졌다. 충청감사(박제순)가 동학농민군이 논산에 집결했음을 보고하자 관군이 출동하였고, 일본군도 행동을 개시하였다. 11월 하순 전봉준이 이끈 군사가 공주를 향하여 북상하자 이탈자가 발생하여 북상한 수는 1만 여명. 그밖에 북접의 김복명이 거느린 동학농민군 1부대가 목천 세성산에 포진했고, 일본군이 남방해상에 상륙할 것에 대비하여 손화중 부대는 나주, 김개남 부대는 전주에 주둔했다.
이들이 관군과 처음 접전을 벌이게 된 곳은 세성산. 관군이라 했지만 일본군에게 발목이 잡혀 있었으니, 일본군과의 싸움이었다. 농민군의 숫자는 많았으나 신식 총과의 싸움이었다. 동학농민군은 수 백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주하였다.(10.21)
이후 일본군과 관군이 공주로 진격하여 진을 쳤다. 논산에서 북상하던 농민군이 이인역으로 전진하여, 우금치 고개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근 일주일간 40~50회 치러진 전투에서 일본군의 신식 무기에 밀려 수많은 농민군이 살육 당하였다. 동학군 1만 여 명 중 살아남은 자는 불과 500여 명, 이들은 전주, 태인, 금구, 원평까지 밀려가 흩어졌다.
한편 김개남군은 청주에서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을 받아 전주로, 태인으로 퇴각하던 중 김개남이 체포되었다. 손병희의 북접부대는 순창까지 몰렸다가 본거지인 충청도로 북상하였다. 도중에 일본군의 공격에 타격을 입고 충주에서 해산하였다.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은 순천에 집결하여 여수로 진격했으나 패하였다.
이후 순창에 은거하던 전봉준은 관군에 체포되어(12.30/양), 이듬해 봄 사형을 당하였다.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6일 뒤였다. 참고로 체포된 전봉준을 먼저 심문한 것은 조선의 대신이 아닌 일본공사였다. 왜놈을 몰아내자! 권귀를 쫓아내자! 는 동학농민봉기가 종말을 고하고, 조선의 운명도 내리막길을 가고 있었다.
4. 일본의 전쟁 개시와 청, 일 양군의 전투
1) 일본의 전쟁 개시
한편, 일본이 조선의 내정개혁을 요구하며, 청국군 철퇴와 조선이 청국과 체결한 모든 조약을 폐기할 것을 회답 기한(양력 7월 22일)까지 못 박아 최후통첩을 하자, 궁지에 몰린 것은‘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원세개였다. 원세개는 당소의에게 뒷일을 맡기고, 7월 19일 인천에서 군함을 타고 천진으로 탈출하였다.
일본군이 청국군을 상대로 공격을 개시한 것은 경복궁을 습격한 지 이틀 뒤인 7월 25일(6.23/음)이다. 이후 전투는 아산, 성환(成歡)을 거쳐 북한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홍장이 건설한 북양함대, 10년 동안 막대한 비용을 들여 구축한 여순의 요새가 속속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 그 사이 청국의 병사와 민간인 수 만 명이 일본군에게 참살을 당하였다.
양국 군대의 싸움은 성환과 황해에서의 싸움에서처럼 대체로 일본군의 일방적 승리였다. 무기 체계와 사기, 전략 등 각 방면에서 뒤진 청군이었다. 게다가 청국 내부에서 주전론과 주화론이 대립한 가운데 조선 현지에서는 청군이 제대로 싸움도 못해보고 패해갔다. 전장은 9월말부터 조선을 넘어서 만주와 요동반도, 산동반도로 확전되어 갔다. 그 사이 전쟁의 무대가 된 조선 각지에서는 주민의 인적, 물적 피해가 막심하였다.
2) 청일 양국군의 전투 양상
① 풍도해전과 성환전투
풍도(豊島)는 현재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풍도동에 있는 섬이다. 대부도에서 남서쪽 17㎞, 안산시에서 44.5㎞ 지점에 있다. 직선거리로 충남 당진군 석문면이 가장 가까운 육지이다. 풍도는 섬 주변에 수산자원이 풍부한 데서 지명이 유래하였다고 전한다. 청일전쟁 당시 풍도 인근 해상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니, 이를 ‘풍도해전’이라 한다.
동학농민봉기 당시 조선 조정으로부터 파병 요청을 받은 청국 조정은 순양함 제원(濟遠), 포함 광을(廣乙), 연습선 위원(威遠), 운송선 조강(操江)호 등을 파견한 바 있다. 모두 이홍장이 양성한 북양함대 소속이었다. 이중 제원호(함장: 方伯謙)는 병력 수송선인 애인(愛仁)·비경(飛鯨)·고승(高陞)호 등 청국 정부가 임대한 3척의 영국 상선을 대동하고 있었다. 이들 선박은 아산에 병력과 물자를 상륙시키고 다시 중국으로 귀환하고 있었다.
일본 대본영은 청국 병력 수송선 출항 정보를 입수하고, 7월 23일 연합함대 사령관 이토 스케유키(伊東祐亨)에게 작전명령을 내렸다. 이토는 전함 15척, 어뢰정 6척을 끌고 사세보항을 출항하여 조선의 서해 바닷길로 향하였다.
마침내 서해상을 수색 중이던 일본 연합함대의 순양함 요시노(吉野)·나니와(浪速)·아키츠시마(秋津洲) 등 3척의 전함이 7월 25일 아침 6시 풍도 앞바다에서 이동 중인 제원호와 광을호를 발견했다. 일본 전함은 이들을 향해 발포하였다. 청일전쟁의 서막이었다.
기습을 당한 제원호는 함장 방백겸의 지시로 몇 분 만에 백기를 올렸다. 그러나 투항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임기응변으로 일본군의 포격을 피한 제원호는 요시노의 추격을 따돌리고, 모항인 여순항에 가까스로 입항했다. 그러나 광을호는 아키츠시마와 나니와호의 공격을 받고 탈주하다가 조선 해안에 침몰했다.
같은 날 오전 8시경, 영국 선적의 수송선 고승호(高升號)는 청군의 지원 병력 1,000여 명을 태우고 무기를 적재한 구식 목조 포함 조강호와 함께 아산을 향하고 있었다. 이때 나니와호가 이들을 포착하였다. 고승호의 선장(영국인)은 국제법에 따라 정선하려 하였으나 청군 지휘관이 아산으로 향하거나 청국으로 귀환을 요구하면서 맞섰다.
몇 시간 대치한 끝에 나니와호 함장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대좌는 고승호를 향해 어뢰와 함포를 발사하였다.(오후 1시) 고승호는 오후 1시 30분 격침되었고, 청국 병사들은 바다로 뛰어들었다. 나니와호는 영국인 선장을 비롯한 외국인 선원 10명(영국인 7명, 독일인 3명)만을 구조하였다. 1,116명의 청군 병사 중 245명만이 인근을 지나던 외국 선박에 구조되고, 871명은 서해 바다에 수장(水葬)되었다. 풍도해전 결과 일본군 측 피해는 전무했고, 청국은 광을호, 고승호가 격침되고, 제원함은 대파, 운송선 조강호는 나포되었다.
이어진 내륙의 전투가 성환전투이다.(7.29) 섭지초(葉志超) 제독의 지휘 하에 아산에 상륙한 청군은 성환 부근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군에 비해 병력이 열세인 그들은 지원 병력이 도착하기를 학수고대하였다. 그러나 고승호가 피격, 청국병사들이 떼죽음 당했다는 소식에 혼란에 빠졌다. 이홍장은 “일본군과 맞서지 말고 해로(海路)로 평양으로 철수하여 본국에서 보내는 증원 병력과 합류하라”는 명을 내렸다.
섭지초는 해로를 통한 철수는 위험하다고 판단, 청군을 분할하여 섭사성(葉士成)이 지휘하는 2,000여 명은 성환을 방어하고, 자신은 1천 5백 명을 지휘하여 공주를 지키기로 했다. 전투는 성환역 동북쪽 월봉산 일대에서 벌어졌다. 7월 29일 새벽 일본군이 공격을 개시하자 청군은 지형과 어둠을 이용해 일본군에 타격을 입혔다. 초전에 승리를 거둔 섭지초는 전세를 부풀려 본국에 승전보를 날렸다. 그러나 후속 지원부대가 없었다. 결국 참패하였다.
② 평양 전투와 황해해전
청국과 일본 양국은 8월 1일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했다. 풍도해전으로부터 6일 뒤, 성환전투로부터 3일 뒤였다. 성환 전투에서 참패한 청군은 공주로 후퇴하여 평양으로 향했다. 일본군이 서울을 점령한 상태이므로 충청도, 강원도를 우회하여 북상하였다. 도중에 보급이 끊긴 청군 병사들의 약탈과 부녀자 폭행 등이 이어졌다. 이때의 참상은 관아의 기록이나 개인 일기에 두루 나타나 있다. 동학농민군이 일본군에 의해 전국 도처에서 살육을 당했다면, 일반 주민들은 후퇴하던 청국군에 의해 가축, 식량, 여성 등의 피해가 자심하였다.
일본군은 청군에 비해 질서 정연히 행동했고, 주민들에게 신사적으로 비쳐졌다. 일본 대본영은 조선에 출동한 5사단을 지원하면서 3사단을 증파, 제1군을 구성하였다. 이때 1군 사령관에 임명된 자가 추밀원의장이자 일본 육군의 최고 원로, 육군참모본부 창설자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이다. 조선에 파병된 총 병력 수는 1만 6,000명, 대본영을 도쿄에서 히로시마로 옮기고, 천황이 직접 전쟁 지휘를 시작했다.
풍도해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북양(北洋)함대의 출몰을 우려하였다. 증원 병력을 서해를 통해 평양으로 수송하지 못하고, 부산과 원산을 통해 신중하게 상륙시켰다. 8월의 무더위 속에서 부산에서 서울, 평양에 이르는 먼 거리 이동에 병사들은 지쳐갔다. 무엇 보다 조선의 도로가 좁고 구불구불하여 군사와 보급물자 이동에 난관이 많았다.
평양에서 휴식을 취하며 진지 구축에 나섰던 청국군이 일본군과 마주친 것은 9월 15일. 새벽에 일본군이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일본군 부대가 모란대 요지를 점령하고, 현무문을 돌파했을 때 일본군은 탄약이 소진되어 이제는 백병전을 해야 할 판이었다. 이때 뜻밖에도 청군이 백기를 내걸고, 총지휘관 섭지초는 그 틈을 이용해 탈출했다. 의주대로를 따라 북쪽으로 달아나던 청군들은 매복한 일본군에게 몰살당하였다. 청군 사망자 2,000여명, 포로 500여명, 일본군은 사망 및 실종자 698명이었다. 일본군은 9월 18일, 평양을 점령했다.
다음날 전투는 압록강 입구로 번져갔다. 이 전투는 황해해전, 압록강해전 혹은 대동구(大東溝) 해전 등으로 불린다. 청국은 정원(定遠) 등 14척, 일본은 마츠시마(松島)와 순양함 요시노 등 총 12척이었다. 청군의 정원함과 진원함은 배수량이 7,430톤, 일본의 하시다테(橋立), 이츠쿠시마(嚴島)함은 4,277톤이었다. 일본 해군은 북양함대의 정원함, 진원함과 같은 대형 장갑함은 없었으나 쾌속선이 6척이었다. 함포 위력에서는 북양함대에 뒤졌으나, 전함의 속력과 속사포 능력이 우위였다.
9월 17일 오전, 일본 연합 함대는 대동구(大東溝) 밖에 정박 중인 북양함대를 발견했고, 양측은 전투태세에 돌입, 정오 무렵 정원함이 거포를 발사하면서 황해 해전이 시작되었다.
북양함대의 구형 순양함들이 집중포화를 맞아 초용(超勇)은 침몰했고, 양위(揚威)는 대파되어 퇴각하다 해안가에 좌초되었다. 치원(致遠)도 대파되자 정면에 있던 요시노를 향해 돌격했으나 중도에 침몰하고, 함장은 배와 함께 전사했다. 경원(經遠)도 격침됐고, 암포에 부딪친 광갑(廣甲)은 자폭하였다. 전투 후반부에 정원과 진원이 일본 함대와 맞섰다. 일본 군함들이 포위, 집중 포격했다. 두 함이 버티자 일본 함정들은 해역을 철수했고 해전도 종결되었다.
5시간 정도 진행된 황해 해전은 세계 해전 역사에서 증기 철갑선 함대 간의 첫 번째 대규모 해전이었다. 전투 결과 기동성과 속사포를 보유한 경함대가 중장갑 거포를 갖춘 함대에 승리할 수 있다는 전례를 남겼다. 기동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교훈이었다.
황해해전 결과 한반도 서해 바닷길의 제해권은 일본 해군에게 넘어갔다. 일본군은 황해 해전 이전까지 북양함대의 위협 때문에 부산, 원산 등 원거리에 병력을 상륙시켰지만, 황해해전 이후로는 요동반도 공략과 직예 평야 결전을 위해 제2군을 편성하여 발해만에 직접 병력을 상륙시켰다.
③ 압록강전투와 여순의 참상
평양에서 탈출한 청군은 북상하여 압록강을 건너 중국 쪽 대안에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한편 황해해전에서 승리 후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지휘하는 일본군 제1군은 청군을 추격하여 만주로 진격했다. 10월 24일 야음을 틈타 일본군은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설치한 뒤 감쪽같이 강을 건넜다. 놀란 청군은 보루를 버리고 일제히 후퇴했다.
일본군의 다음 목표는 청국 북양함대의 요새가 위치한 여순(旅順)이었다. 발해만에 돌출한 여순의 전략적 가치를 인식한 이홍장은 1881년 해군기지 건설에 착수하여 1890년 완성했다. 항구 주위에 포대를 설치하여 요새화 한 여순항은 북양함대의 도크와 공창이 위치한 만주 최대의 군사적 거점이었다.
10월 24일 오야마 이와오가 이끄는 일본 제2군이 요동반도 남단에 상륙하여 11월 6일 금주를 점령했다. 대련과 여순 북쪽 가까이 위치한 곳이었다. 다음날엔 대련(大連)을 점령했다. 여순 지역의 청국군 지휘관들이 겁을 먹고 도주하자, 일본군은 11월 21일 하루 만에 여순을 점령했다. 무기가 있지만 겁에 질려 도망하는 것이 서양인에게 비친 청군 모습이었다.
일본의 언론은 여순의 승리가 대일본제국 팽창 역사의 첫 페이지에 특기할 사실이라고 열광하였다. 일본군으로서는 북경과 천진의 관문을 점령한 셈이었다. 일본군의 승승장구에 우려하기 시작한 것은 열강이었다. 일본이 청국을 송두리째 차지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열강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특기할 것은 조선 내륙의 전투에서는 청군에 비해 신사로 비친 일본군의 만행이다. 여순을 점령한 일본군은 인류역사에서 돌이켜 보기 힘든 만행을 보였다. 11월 21일부터 24일까지 나흘 사이에 일본군은 여순 시가와 외곽을 횡행하며 광란의 대학살을 자행하였다. 어린아이, 임산부, 노인 가리지 않고 2만여 명의 무고한 중국인들이 희생되었다. 살육을 방치한 것은 일본군 수뇌부였다. 일본 측에서는 매복한 청국군이 일본군을 기습, 살해하여 길거리에 목을 내걸은 것에 대한 보복이라고 했다.
④ 위해위(威海衛) 전투
일본이 연전연승하자 열강은 강화의 중재에 나서기 시작했다. 반면 일본은 열강에게 틈을 주지 않고 속전속결로 전쟁을 결판내고자 했다. 대본영은 산동반도의 북양해군 본거지를 겨냥하였다. 12월 14일 위해위 공격 명령을 하달하였다.
위해위는 요동반도의 여순과 마주보는 발해만 입구의 요충이다. 위해위 앞바다에 유공도(劉公島)가 있고, 유공도는 북양함대의 모항(母港)으로 북양수사제독서(北洋水師提督署)와 수사학당이 있었다. 요컨대 북양함대 사령부와 사관학교가 위치한 곳이었다.
일본 제2군은 1895년 1월 20일부터 24일까지 산동반도 동쪽의 영성만(榮成灣)에 상륙전을 감행하여 2월 2일 위해위 주변 포대들을 모두 점령했다. 유공도에 있던 정여창의 북양함대와 수비대는 완전 고립되어 육상 및 해상으로 포위되었다. 2월 4일 밤 일본 어뢰정이 유공도 항구 내로 잠입하여 북양함대를 기습했고, 다음 날 밤 정원함에 두발의 어뢰를 명중시켜 항해 불능 상태로 만들었다. 2월 6일 밤 어뢰정의 기습으로 내원(來遠)과 위원함도 격침됐다. 지휘관 왕평(王平)은 전투 중 어뢰정을 이끌고 도주하고, 다수의 병사가 포로가 되었다. 2월 11일 밤 포탄 저장고가 바닥나자 제독 정여창은 정원함을 자폭시키고 자결했다. 2월 17일 위해위가 일본군에게 함락되면서 위해위 전투는 막을 내렸다.
그해 4월 17일 시모노세키(下關)에서는 청국과 일본 사이에 강화조약이 맺어졌다. 그 내용은 일본의 전쟁 도발 목표가 무엇인지, 전쟁의 결과가 무엇인지 잘 요약되어 있다. 일본은 역사상 처음으로 동북아의 패자가 되었고, 조선과 청국은 내리막길을 가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청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단기적으로는 동양 3국 중 유일한 승리자로 보였다. 그러나 한국의 아시아 주변국의 일본에 대한 저항이 지속되는 가운데,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등의 국제정세 변동 속에 결국 원폭 세례를 맞고 일본의 폭주는 멈추었다. 그 사이 한국과 주변 아시아 국가 사람들의 수많은 희생이 따랐음은 잘 아는 바이다.(*)
이 원고는 경기문화재단과 한국사연구회에서 공동주최한 “경기지역의 교통로와 전쟁” (2015.11.20.) 학술회의에서 필자가 발표한 원고를 축약한 것이다. / 2017년, 6.12 ≪부산 강제동원역사박물관 도록≫ "4번의 전쟁"" -아물지 않은 상흔 - 수록
첫댓글 잘 배우고 갑니다
'아물지 않은 상흔' 교과서에서 배운 것이 전부였던 청일전쟁에 대해 많은 것을 새롭게 알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