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캄보디아 이야기 43. 프놈펜 밥퍼 유감
내가 프놈펜 밥퍼와 인연 갖게 된지 어언 7년이 되어간다.
2003년에 웰 인터내셔날에서 단기 팀으로 들어 온 것이 처음 인연(당시 “이종현” 선교사)을 갖게 되었지만, 그 동안 크게 물질로 후원을 하였다든지, 아니면 밥퍼를 위하여 직접 사역을 한 것은 아니지만 “최정규” 선교사 시절에는 같이 진료를 하면서 얼마간은 밥퍼 일도 많이 도왔었다. 밥도 퍼고 현지 사역자들과 같이 동고동락을 했었다.
밥퍼 사역자들 중 나를 아버지라 부르며 따르는 아이(“짠타”-전에 언청이 수술 환자 통역을 위하여 한국을 방문하였고, 얼마 후면 인천의 중장비 회사에 일하러 가게 되어있다.)도 있어서 지금은 양 아들로 인연을 맺고 여러 가지로 도움도 받고, 또한 도움도 주고 있다. 같이 합자해서 대지도 미래를 위하여 마련하기도 했다.
(참조: 캄보디아 이야기 34. 캄보디아의 수양딸들과 아들 이야기)
처음에 본 “바삭” 빈민촌에 있는 밥퍼는 매우 고무적이었고, 특히 빈민촌에 거주하며 밥을 얻어먹는 그들을 보며 많은 생각을 갖고 있던 중 이곳에서 나의 할 일들이 마련되고 있었다. 나의 의지가 아니라 상황이 그렇게 되어갔다.
2005년에 캄보디아 프놈펜에 입국하여, 나우 병원에서 진료를 하면서, 당시 밥퍼 담당 사역자인 “이기원‘ 선교사가 거의 매일 집으로 빈민촌 주민 중 아픈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 언어 공부 중이었는데 진료로 인하여 언어 공부를 하기에 무리가 있어서 개인교습으로 돌리고 공부를 하다가 시간이 맞지 않아 집어 치우고 치료에 나섰다.
이로 인하여 파송 받은 웰 인터내셔날에서는 나의 사역에 회의를 갖고-지금은 인정을 하지만(?)- 많은 우려를 갖게 되었고 지금도 언어 공부를 하지 않고 진료 사역을 먼저 했다고 가끔씩 꾸지람을 듣는다.
어찌하던 당시에는 한국 의사가 나 혼자라서 많은 한국 교민과 현지 선교사 사역자들과 특히 “바삭” 밥퍼 빈민촌 환자의 진료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에 파송 받은 통합 측 충북 노회 세계 선교부 목사 3분이 와서 저의 사역을 보고 3개월 만에 이렇게 많은 사역을 하는지 몰랐다고 놀라워하기도 했다. 당시는 상시로 나우 병원과 싸앙 교회[“정병대” 선교사], 밥퍼, 그리고 NPIC 대학교, 장로회 신학교, 봉제공장, 그리고 두 곳의 보건소에 정기적으로 진료 사역을 하였다.
특히 캄보디아에서 처음으로 본 환자가 빈민촌 환자 이었다.(후에 알게 되었지만 에이즈 환자이다. -그 후로 수차례 나의 진료를 받아야 했고, 지금은 아이도 1명 더 생겼고 또한 지금은 임신 중이다. 아마도 4~5년 후에는 죽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녀의 남편은 지금은 프놈펜 밥퍼를 현지인으로 책임을 맡고 있지만 그이 또한 나의 진단(캄보디아 의사가 맹장염을 장티푸스로 오진)에 의하여 복막염 직전에 밥퍼의 배려로 응급 수술을 받아 생명을 건졌다. 밥퍼에 일하지 않았다면 벌써 죽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바삭” 빈민촌 환자 중 노인이 다리가 썩어 들어가는 것을 여러 차례 병원에서 “절단해야 한다.”고 권유했으나 돈이 없어 못 간다고 하여, 있던 항생제중 세파 3세대를 여러 번 정맥 주사 후 깨끗이 나아서 빈민촌에서 알려지게 되었고, 지금도 이주 지역인 “크라이와 추바” 이곳에서도 거의 나를 알아보고 아는 체를 한다. 이곳의 젊은 남자 아이들은 모토독을 많이 하는데(그래서 모토독 들은 도적이 많다.) 시내에서 알아보고는 자기 집 부모와 형제자매를 치료 해주었다고 고마워하고, 친구 모토독 들에게 말해서 꽤 알려지게 되었다. 더구나 할렐루야 축구단이 이곳 대표 팀과 축구 경기를 할 때에 텔레비전에 비쳐져서 시내에서는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졌다..
또한 후에 내가 마약 재활을 시작하였을 때에 상담한 많은 아이들 중 이곳 젊은 여자 아이들이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기원”선교사의 추천으로 장학생(쓰라이 몸) 후원을 최초로 시작하였는데 지금도 계속 후원을 하고 있다. 이후로 12명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역도 하게 되었고, “정병대” 선교사와 함께 학사 사역의 물질 보조를 하게 되었으나 후원이 끊기는 바람에 중도에 그만 두게 되었다.
시내 근처였던 전의 “바삭” 빈민촌은 지금의 “크라이와 추바”로 이주하는데 많은 우여 곡절을 겪고 거의 강제로 이주하게 되었다. (참조: 캄보디아 이야기 01. 빈민촌 사역 이야기)
1차 이주자들은 집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로 비교적 넓고 생활이 안정되어 있었고, 수중에 돈이 있는 사람들과 전에 “바삭” 빈민촌에 땅과 집이 있던 자들은 국가에서 비록 시내에서 먼 거리이지만 꽤 넓은 땅을 불하받아서 집을 짓고, 또한 일부는 되팔아 차익을 남겨 시내로 되돌아가는 부류도 생겼다.
2차 이주자들은 전세를 살았거나 월세를 살던 자들 이었고 가진 것도 전무하여, 이주 후에는 물과 양식 그리고 기타 생활용품들을 각국의 NGO에서 원조하는 것으로 생명을 유지 하고 있었고, 거의 매일 몇 명씩 죽어갔으며, 단지 햇빛을 가리는 천막과 4개의 막대기로 집을 만들어 사는 형편이었다. 월드 비전에서 우물을 파 주었으나 쓸모없게 되었고, UNICEF에서는 매일 물을 날라다가 공급하였다. 여러 차례 식량 배급을 하였고, 옷가지, 신발을 주었으나 다 팔아먹고 항상 헐벗고 다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내가 진료 후 주는 약마저도 다른 사람에게 팔아먹고 자기는 치료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화장실이 없어서 간이로 만들어 주었으나 금방 차서 다른 곳에 다시 구덩이를 파서 만들어 주었다.
당시에는 약물 중독 환자가 거의 90%, 에이즈 환자가 70~80%, 4~10세 정도의 400~500명의 밥을 타 먹는 아이들 중 70%가 본드를 흡입하고 있었다.
2008년도에 대전 혜천대학교회 팀이 와서 에이즈 검사를 하였는데 약 10~20%로 떨어졌다.
지금은 약물 중독 환자도 헤로인(아편) 중독보다는 각성제(베타암페타민-ICE)중독 환자가 많아졌고, 생활수준도 매우 좋아져서 죽는 사람도 별로 없다. 그러나 가끔씩 보이지만 기형아가 발생하기도하고 죽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열심히 사역을 해서인지(?) 처음에는 환자수가 200~300명 가까이 왔었는데 지금은 50명~150명 정도의 아이들이 주로 온다. 어른 단골 환자도 많이 있다.
그러나 많은 젊은 여자 아이들이 시내 외국인 전용 바에서 몸을 팔아 생계를 꾸려 나가는 것이 많다. 일찍 아기를 낳기 때문에 아기는 할머니에게 맡기고 생활전선에 나가는 것이다. 공장에서 일하는 것보다 수입이 많고 또한 외국인의 약물 중독자들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약물을 공급 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가장 가슴 아픈 것은 밥퍼에서 보조로 일을 도와주면서 밥을 먹던 한 여자 아이(나이 16세로 결혼 하여 10개월 된 남자 아기가 있다.)가 생계의 어려움으로 밤에 일을 하러 나온 것을 목격하고(친구가 그녀의 아기가 아파서 집으로 데려와서 알게 되었다.)구제비와 생활 용품을 주고 사정을 들어보니 남자는 능력이 없이 놀고 있고, 그래서 할 수 없이 아기 우유 값을 벌기 위하여 나와서 일을 한다고 하였다.
공장의 월급으로는 생계를 꾸려나가기가 힘들고 또한 일이 힘들어서 싫다고 하면서 약물 구입하는데 많은 돈을 소모한다고 하였다.
어떤 선교사들은 밥퍼에는 “복음이 없다”고 말한다. 단지 밥을 타 먹을 때 “어꾼 뿌레야 예수”(예수님 감사합니다.)라고 말 할 뿐이라고 한다. 내 생각에는 이 말 한마디에 복음의 진수가 들어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일부 다른 목회자 선교사들의 생각은 다른 것 같다. 설교 같은 말씀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회자 선교사들이 많다.
밥퍼는 NGO 단체이기 때문에 종교를 나타내게 할 수 없다. 그나마 이 정도의 메시지를 아이들에게 심어 줄 수 있는 것 만 해도 상당한 것이다. 전에는 그래서 가까운 곳에 교회를 세우고 현지인 목사가 설교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주 초기에는 학교가 절에 가까운 공립학교가 있었으나 절대 부족의 학급수와 선생들로 말미암아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그냥 빈둥거리는 아이들이 많았으나 지금은 학교가 “임만호” 선교사가 세워서 빈민촌에서는 가장 좋은 건물로 확연하게 다르게 보인다.
전에 옥천교회 단기 팀이 왔을 때에 학생 가족들에게 쌀을 나누어 구제 한 적이 있다.
학교에서도 진료 해주기를 원하나 선교사 부인이 간호사 출신이고 또한 치료도 해주기 때문에 나는 밥퍼가 있는 한 진료를 밥퍼에서 하기로 하였다.
밥퍼 에서의 진료는 우여곡절이 많다. 전에도 기술하였지만 처음에는 치과와 같이 화요일과 목요일 두 차례 진료를 하였으나 호프 병원(에이즈 전문 병원)에서 이 날짜에 빈민촌 안에서 진료를 하기에 수요일로 날짜를 변경하였다. 얼마 후에 홍콩 NGO가 밥퍼 바로 앞에서 진료를 시작하기에 날짜를 협의 하였으나 물러서지를 않아서 할 수없이 금요일로 진료 날짜를 변경하였다. 그러나 “이명현” 선교사가 사역을 중도에 그만두고 돌아가고 시앤립에서 사역하는“김학용” 선교사가 시앤립과 프놈펜 밥퍼를 도맡아서 하는 바람에 매일 밥을 퍼지 못하고 토요일에만 밥을 제공하고 다른 날짜에는 빵으로 대신하고 있다. 토요일 밥을 퍼는 날에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어서 다시 할 수 없이 토요일로 진료 날짜를 변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여러 차례 토요일에 갔었으나 휴무가 많았고 또한 국경일도 겹쳐서 다시 돌아오기를 수차례나 하였다.
허탕을 치고 돌아오는 날에는 허무하기가 그지없다.(참조: 캄보디아 이야기 13 지금 캄보디아에서는)
밥퍼 가는 길은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초기에는 매우 험해서 많은 차 고장으로 고생하였고, 지금도 우기 철에는 도로가 패여서 차가 잘 망가지고, 또한 건기나 우기거나 간에 먼지와 흙탕물에 차가 범벅이 되어서 항상 차가 말썽
을 부려 여간 고생되는 것이 아니다. 시내 변두리치고는 오지 정글과 다름없는 곳이다.
밥퍼 사역자가 6차례나 바뀌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고(각자 개성이 있어서 빈민촌 안에서 사업을 벌이다가(예로 “모세” 선교사의 하수도 공사, 집짓기 운동 등) 중도에 그만 둔 경우가 많다. 시설은 좋아졌으나 내용은 별반 초창기와 다른 것이 없다.
하나 더 말하자면 나는 이곳 아이들에게 나쁜 의사(사람)로 인식을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줄서기를 강조하고 초기에는 엉망인 질서를 지금은 잘 세워 두었기 때문이다. 거의 3개월 이상을 닦달 하여서 지금처럼 줄서기를 잘하고 배식을 받고 있다. 이점은 헤브론 병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참조: 캄보디아 이야기 38. 꾸루뺏 아끄로)
나는 밥퍼 빈민촌 사역을 통하여 학생 13명에게 학비를 보조해 주는 사역을 후원자 일대일 후원을 시작하였고, 나아가 학사 사역을 중도에 그만 두었지만(후원 부족) 1년 넘게 시행하였다. 또한 약물 중독 환자의 구제와 재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많은 물질을 소모하고 130여명의 중독자를 상담하여 2명만이 재활을 하게 이르렀다. 이 모든 것이 밥퍼를 통하여 동기 부여를 받았으며 하나님께서 때에 따라 적절하게 사역을 할 수 있게 상황을 이끌어 주었다.
그러나 지금의 프놈펜 밥퍼는......
2009년 12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