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교회 회복_돈과 차별을 버리는 교회
마태복음 19:23-24
23.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24. 거듭 말하지만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에베소서 2:14-16
14.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15. 율법 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16. 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하셨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인 지난 19일 서울 종로에 있는 조계사 앞에서 기독교인 10여 명이 소동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이들은 법회가 진행되고 있는 시간에 조계사로 몰려와 불교 행사를 부정하는 팻말을 들고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강남 봉은사에도 신원이 불확실한 여성 1명이 찾아와 "코로나 시국에 사람들이 너무 많다"며 소란을 피우기도 했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 하루 전 타종교를 배격하는 극단적인 유튜브 채널 FTNER(에프티너)는 조계사로 모이라는 공지를 하여 조계사 소동과 관련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사고 있습니다. ‘끝나지 않는 부흥을 위하여’라는 제호의 이 채널은 이단으로 보이는 ‘사랑하는 교회’ 출신 전도사가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2010년에는 찬양인도자학교라는 단체의 청년 5명이 봉은사 사찰 내부에 들어가 탑을 돌며 사찰이 무너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소동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봉은사 땅 밟기’라는 제목의 동영상으로 인터넷상에 올려져 크게 논란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기독교인 사이에서도 생소한 말이었던 '땅 밟기 기도'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땅 밟기 기도’는 국내뿐만 아니라 공격적인 국내 선교 단체들에 의해 외국에서도 벌어졌습니다. 2011년 2월에는 한국 개신교인들이 미얀마의 한 법당에서 둘러앉아 손을 잡고 찬송가를 부르며 예배하는 영상이 ‘미얀마 땅 밟기’라는 제목으로 퍼지기도 하였습니다. 2014년 7월 한국 기독교 청년 3명은 유네스코문화유산인 인도 부다가야 마하보디 사원 안에서 ‘땅 밟기 기도’를한 것이 알려져 많은 비난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 ‘땅 밟기 기도’에 적극적인 단체는 신사도 운동 단체와 예수전도단, 인터콥 등이 있습니다. 대부분이 정통교회에서는 이단시하고 있는 단체들입니다.
‘땅 밟기 기도’는 신사도 운동 대부인 피터 와그너의 <지역사회에서 마귀의 진을 헐라>, 예수전도단 죤 도우슨의 <하나님을 위하여 도시를 점령하라>, 인터콥 최바울의 <세계 영적 도해>라는 책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이런류의 사상을 영적 도해 사상이라고 총칭하는데, 영적 도해란 이 지구의 모든 지역을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역과 마귀가 주관하는 영역으로 나누고, 그 지역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복음화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특히 인터콥의 루이스 부쉬가 주창한 10/40창이라는 개념은 우리나라 최바울에 의해 백투더 이스라엘(back to the Israel)이라는 공격적 선교 개념으로 정립됩니다.
영적 도해를 주장하는 이들은 자신들을 전도 종족, 하나님의 군사라고 정의하고, 10/40창에 거주하는 주민 상당수는 미전도 종족이라고 정의합니다. 10/40창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북위 10도에서 40도 사이의 지역을 통틀어서 일컫는 개념입니다. 이곳에는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2 정도가 살고 있는데, 미전도 종족의 약 95%가 집중된 지역이어서 이곳을 복음화하는 것이 최대의 선교 목표라는 것입니다.
백투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에서 서쪽으로 출발해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를 거쳐 다시 이스라엘로 전파한다는 선교전략입니다. 지금 기독교 선교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계속 서진하고 있고, 현재는 인도에 전파되고 있다고 이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지난 5월 20일, 한국갤럽은 전국 성인 1,500명(제주 제외)을 대상으로 '한국인의 종교' 6차 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조사 결과 개신교 인구는 17%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불교 인구는 16%, 가톨릭 인구는 6%로 집계되었습니다. 무종교인은 60%로, 한국갤럽이 조사한 이래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습니다. 개신교 인구 17%는 2014년 5차 조사 21%에 비해 4% 감소한 것입니다.
교인들의 종교 활동도 2014년에 비해 눈에 띄게 감소했습니다. 코로나19 여파로 종교 행사 참석 인원 제한 등 방역 조치가 이뤄진 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 교회를 찾는다는 개신교인은 57%로, 2014년 조사 당시 80%에 비해 23% 감소했습니다. 가톨릭 교인의 종교 활동도 2014년 59%에서 올해 42%로 감소했습니다.
한편 무종교 인구가 늘어나면서 비종교인들의 종교 호감도도 크게 줄었습니다. 비종교인 중 호감 가는 종교가 없다고 답한 사람은 61%로, 4차 조사인 2004년 대비 두 배 가까이 늘었습니다. 가장 호감 가는 종교로는 불교가 20%, 가톨릭이 13%로 나타났고, 개신교는 6%에 그쳤습니다. 종교 생활을 하지 않는 이유는 '관심이 없어서'(54%), '종교에 대한 불신과 실망'(19%), '정신·시간적 여유가 없어서'(17%)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한국갤럽은 종교 인구가 감소하는 원인을 청년층에서 찾았습니다. 2004년 4차 조사 당시 20대 종교 인구는 45%였는데, 2014년에는 31%, 2021년에는 22%로 나타났습니다. 15년 만에 절반이 줄어든 것입니다. 30대 역시 2004년 49%, 2014년 38%, 2021년 30%로 꾸준히 감소했습니다.
20대 30대 청년이 줄고 있다는 것은 개신교의 미래가 어둡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교에 대한 호감도 역시 개신교가 불교나 가톨릭보다 훨씬 적다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종교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고, 불신과 실망이 커져가는 사회는 미래가 위태롭습니다. 인류 역사를 살펴볼 때 종교의 타락과 그에 대한 불신이 팽배할 때 그 문명과 나라가 망하는 것을 수없이 볼 수 있었습니다.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운 작금의 기독교는 어떻게 이 땅에서 처신해야 할까요? 저는 500여 년 전에 있었던 종교개혁의 과정을 잘 살펴보고 거기서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517년 10월 31일, 던 마르틴 루터(1483~1546)는 긴 문서 한 장을 들고 로마 비텐베르크 교회로 가서 이 문서를 교회 문에 못 박았습니다. 이 문서에는 당시 가톨릭교회의 관행에 반대하는 95개 논제가 줄줄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95개 논제에서 루터는 당시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부자보다 더 부유한 교황이 왜 자신의 돈으로 거룩한 베드로 교회를 건축하지 않고, 훨씬 더 가난한 신자들의 돈으로 건축하는가?”
“평화가 없는데도 그리스도의 백성에게 ‘평화, 평화’라고 말하는 모든 예언자들은 사라져라.”
“십자가가 없는데도 그리스도의 백성에게 ‘십자가, 십자가’라고 말하는 모든 예언자들은 사라져라.”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판매가 회개가 없는 용서, 거짓 평안이라고 비판했으며, 믿음을 통해 의롭다함을 얻는(der Rechtfertigung durch den Glauben) 이신칭의(以信稱義)를 주장했습니다.
또 루터는 교회의 부패와 잘못된 교황의 권위에 항거하여 성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통한 구원을 강조했습니다. 루터의 주장은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Sola scriptura, Sola fide, Sola Gratia, Solus Christus, Soli Deo Gloria)이라는 5솔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은 서양 세계를 '근대'로 이행시켰습니다. 근대로의 이행의 특징은 '개인화' '세속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은 개인화를 촉발했는데, 신과 인간을 직접적인 관계로 설정해 개인이 교회의 통제와 지배로부터 해방될 수 있게 했습니다. 또 인간의 모든 행위가 선행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여 모든 세속적 영역, 즉 결혼, 가족, 노동, 사회 등에서의 일상적 삶과 행위에 신학적 가치를 부여하는 세속화를 야기했습니다.
한편 종교개혁은 교회 안에 남아있는 비성경적인 모든 예배의 요소를 제거하였습니다. 즉 중세 가톨릭교회의 인간적 전통과 권위를 깨뜨리고 성경 중심적 신앙과 생활을 회복한 것입니다. 예배는 보다 단순해졌습니다. 성만찬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이 맞춰졌죠. 성직자 중심의 화려한 색의 의복이 사라지고, 평신도가 이해할 수 없는 라틴어 대신 일상적 언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중세시대의 종교개혁은 단지 종교뿐 아니라 사람의 의식을 평등화하고 민주사회의 토대를 이루는데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만인제사장설’은 일반 성도와 사제 사이에 어떤 위계적이며 신분적 구분이 있을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기독교인은 동등하다는 것이죠.하나님 말씀인 성경 역시 사제들만이 보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이 보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평신도와 주교, 시민과 세속 군주 사이에 어떤 위계적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므로 유럽에서 민주사회를 이루는데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종교개혁은 개인의 자유와 평등권에 대한 의식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만인제사장설은 신앙적인 평등을 넘어 계급 타파와 평등사상의 혁명적 진전을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한계도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가장 대표적인 한계는 종교개혁 운동이 정치권력의 후원에 힘입어 진행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정치세력 간의 갈등으로 번져 가톨릭 영주들과 개신교 영주들 간의 30년 전쟁이 시작됩니다.
또 하나는 1524~1526년 발생한 농민전쟁의 유혈진압입니다. 당시 억압에 시달려온 농민들은 루터의 평등사상에 지지를 보냈고, 급진적 종교개혁자인 토마스 뮌쩌의 주도로 전쟁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루터는 자신을 보호하는 독일 제후들 편을 들어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폭동을 진압할 것을 허락합니다. 그리고 제후의 군대는 10만여 명의 농민들을 살해합니다.
500여 년 전 종교개혁을 보며 저는 오늘 한국의 교회가 두 가지만큼은 철저히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첫 번째는 돈을 섬기지 말고 이제는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타락과 부패는 돈 때문에 생겨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같이 섬기지 못한다고 분명히 못을 박았지만 한국 교회는 그 말씀을 싹 무시하고 있습니다.
대형 교회의 강단에서는 언제나 교회와 목사에게 충성하면 재물의 축복을 받는다는 설교가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교회와 목사에 대한 충성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는 등식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재물의 축복이라는 유혹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부자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고 가난한 사람은 신앙이 부족한 사람으로 치부됩니다. 이런 분위기가 교회를 부자 중심으로 돌아가게 만들어 가난한 이들은 교회 안에서 소외 당하게 됩니다. 물질 축복을 받지 못하면 신앙심이 없는 것으로 간주 되는 것이죠.
만일 교회의 설교가 죄의 회개, 십자가와 부활, 제자의 길, 기도와 말씀, 거룩한 성품으로의 변화 등이 아니라, 세속적인 축복, 성공 등이라면, 그 교회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돈을 섬기는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의 담임목사는 소위 번영신학의 추종자이고, 교인의 수가 목회 성공의 척도로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런 목사의 설교는 교인들의 감정을 터치하며 달콤한 말을 넣어줍니다. 그래서 설교를 들으면 기분이 좋고 은혜가 넘친다고 느껴지게 하죠. 천국은 따논 당상이고, 이 땅에서도 축복을 받아 하는일마다 성공하고 부유하게 살 거라는 기대감이 넘치게 됩니다. 왜 목사들은 이런 설교를 하게 되는 걸까요? 교인들의 헌금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개를 촉구하며, 십자가의 희생, 거룩한 성품으로 거듭나기 등 교인들이 듣기 싫어하는 설교를 절대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설교를 하면 부자 교인들이 등을 돌리고 교회를 떠나기 때문이죠. 이렇게 모은 돈은 더 크고 화려한 교회 건축과 교세 확장, 목사의 권위를 높이는데 사용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영생을 구하는 부자 청년에게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젊은이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풀이 죽어 떠나갔죠.
예수님은 그 모습을 지켜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거듭 말하지만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깜짝 놀라면서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자가 자기 재산을 나누지 못하는 세상은 절대로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이 그래도 이웃과 나눔 하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그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눅 14:33)고 경고하시는 겁니다.
두 번째는 모든 차별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직과 평신도의 차별,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별, 남자와 여자의 차별, 성 소수자와 다문화 가정에 대한 차별 등이 사라져야 합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은 이미 모든 차별을 철폐하셨습니다. 공생애 기간동안 그의 주변에는 차별의 대상이 되었던 이들이 늘 함께 하였습니다.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던 여성과 어린이, 죄인으로 간주 되었던 세리와 병자, 노예 생활을 해야 했던 가난한 사람들이 늘 주님 곁에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민족 간의 차별도 깨뜨렸습니다. 스스럼없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갔고, 중풍병에 걸려 죽게 되었던 로마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 2:14-16절에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율법 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하셨습니다”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갈라진 모든 것을 십자가로 이어주신 분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모든 차별을 교회와 우리 사회 안에서 몰아내야 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은 기독교는 어느 곳,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제도’로서가 아니라 ‘운동’으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명력 있는 교회는 딱딱하게 굳어 있는 싸늘한 ‘조직’(Organization)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부름받은 사람들의 살아있는 ‘몸 곧 생명체’(Organ)가 되어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사회 속에서 제도화의 길을 걷게 되지만 교권과 교리에 사로잡혀 점차 고착화되어 죽어가는 길을 걸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초대교회가 운동으로 출발했지만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313년)과 테오도시우스의 기독교 국교화 선언(395년) 이후 급속히 조직화, 제도화의 길로 들어서며 변질됩니다. 그래서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게 되고 중세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죠. 중세 교회를 변화시킨 것은 종교개혁입니다. 종교개혁은 서구사회를 근대로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태동시키며 또다시 사회 제도 속에 편입되며 변질되기 시작하죠. 오늘의 기독교는 자본주의 기독교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늪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바뀌지 않는 한 교회는 결국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국민의 6%만 인정하는 한국 개신교가 이 시대에 새로운 희망을 주려면 우리는 이제 예수 정신으로 돌아가야만 하겠습니다. 이 땅에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며, 모든 차별을 배격하고, 돈이 아닌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새 시대, 새 하늘 새 땅을 이루여 애쓰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은총과 돌보심이 함께 하시길 축원드립니다.
<2021. 5.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