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執着)
송 정 연
12월 초순, 거실 창 앞에서 싸락눈 내리는 풍경을 본다.
영하의 일기에 눈이 얼마나 더 오려는지 오전인데도 하늘은 잿빛으로 어둡다. 평소 내가 아끼던 화초의 개수를 열흘 전쯤부터 줄이기 시작했다.
우리 집 거실은 남서향이라 정오에 든 햇볕이 해가 질 때까지 있어 화초 키우기에 괜찮은 편이다. 동쪽 부엌 창가에 아침 햇살이 한두 시간 머물기에 장식장 위에 다육경의 화분 20여 개를 놓았다. 집 평수가 작아서 세탁실 베란다도 크지 않다. 그곳에 둔 사쓰기 철쭉 분재는 환경이 별로 좋지 않아 더러는 고사하고, 지금은 80여 분(盆) 정도 남았다.
거실 큰 창문 앞에는 이사 온 후 2년 동안 사다놓은 40여 종류의 꽃나무가 있다. 라이락· 만데렐라· 배롱나무 등, 몇 분(盆)은 집안에서 맞지 않아 아파트의 정원으로 보냈다. 봄부터 여름까지 온 집안을 향기로 채워준 치자· 별자스민· 석류는 빨간 열매를 앙증맞게 달고 있다. 해피블루와 꽃기린은 지금도 꽃을 피워 나를 기쁘게 해준다. 석화와 자트로바는 뿌리 식물(植物)이라 한층 멋을 더한다. 남천은 바람결에 잎사귀 간들거리는 모습이 예쁘다며 딸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다. 이외에도 사철 푸른 잎의 애기벤자민이며 홍콩야자 등이 있다.
하루하루 기온이 내려가니 나는 고민에 빠졌다. 그간 창문 블라인더만 내리던 창에 커튼을 치려면 벽에 바짝 붙은 분이 안쪽으로 들어와야 하고 거실은 더 좁아진다. 좁은 집에 화초가 많다. ‘정말 많다!’ 라는 느낌이 들자 불현듯 이것이 집착(執着)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정신이 번쩍 났다.
가족도 화초에 유난히 애착이 많은 나를 보고 집착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단 한 번도 불평이 없어 나는 내 취미에 만족하여 거실이 자꾸 좁아진다는 생각도 미처 못 했다. 집착도 물론이지만 나의 이기심(利己心) 때문이라 생각하니 자식에게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어떤 날은 사위와 딸이 퇴근해 오는 자정까지 온 마루에 화초를 늘어놓아도 “엄마, 오늘도 화초 만졌어?” 라는 말이 고작이다. 불만스럽거나 귀찮은 내색조차 한 번 하지 않는 딸이다.
나는 그날 이후 화초를 줄이기 시작했다. 집에 오는 지인과 이웃에게 한두 개의 화분을 들려 보냈다. 아파트 복지관에 갖다 놓으니 분위기가 좋다며 여러 사람이 좋아한다. 어느 날은 분을 들고 꽃집으로 가는데 길가 집 앞에 올망졸망 화분이 몇 있었다. 그 옆에 분을 슬그머니 놓고 “잘 자라라” 며 돌아서기도 했다.
나는 ‘양성기립성현훈’이라는 병명을 가진 어지럼증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가끔 밤잠을 자다 어지러운 느낌으로 눈을 뜨면 천장이 뱅뱅 돌았다. 옆방의 딸에게 알리려 해도 핸드폰의 숫자가 안 보여 애를 먹는다. 그래도 시간이 좀 지나면 괜찮아지곤 했다. 그 후 몇 번 그런 증세가 있어도 견딜만하여 병원에 가지 않았다.
2004년 어느 날에는 병의 증세가 심하여 눈앞이 흐려지고 어지러워 종일 누워있었다. 이튿날 이비인후과에 갔더니 큰 병원으로 가보란다.
S병원 신경정신과 의사는 병명이 ‘양성기립성현운’이란다. 이 증세는 극도로 신경을 쓰면 발병한다는데 그런 일이 있으면 환경을 바꾸란다. 그즈음 나는 우울한 심정이었는데, 처방해 준 약을 먹고 효과를 보아 흐리던 눈도 차츰 밝아졌다.
지난 2010년부터 우리는 서울 아파트가 다 지어질 때까지 천안에서 임시 살았다. 1월경, 집이 얼마나 되었는지 보고 커튼도 맞추려 서울 집으로 올라 왔다가 일을 다 본 후 저녁식사 중에 사위가 “장모님, 집이 좁아 화초를 다 가지고 오실 수 있겠어요?” 라고 한다. 나는 갑자기 표정이 굳어지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심 걱정하고 있었기에 좋아하는 화초를 마음대로 키울 수 없는 내 처지에 속이 상했다.
나는 속으로 화가 나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천안으로 내려 와버렸다.
다음 날 새벽 잠 속에서 어지럽다는 느낌에 눈을 뜨니 방 천장이 뱅뱅 돌고 있었다. 어지럼증세 같았다. 조금 괜찮았다가 또 반복적으로 나타나기에 병원 갈 준비를 했다. 식구들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시각이다. 여섯 시면 사위가 일어날 터, 나는 그 전에 겨우 밥을 하고 빨래를 걷어 정리했다. 사위가 일어날 때쯤 증세가 많이 진전되어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딸이 놀라서 내게 달려왔을 때 나는 축 늘어지고 구토를 심하게 했다. 딸은 병원 응급실로 나를 옮겼다. 이번에도 옛날과 유사한 병명이었는데 ‘양성발작성현기증’이라고 한다. 딸이 나를 보니 몸은 가만히 있는데 눈알이 제 맘대로 돌더라고 말했다. 나는 병원에서 안정을 취한 뒤 며칠 뒤 퇴원하였다.
딸은 “엄마! 무슨 신경 쓴 일이 있었어요?” 라고 묻는다. 나는 화초 때문에 속상한 일밖에 없노라고 말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 후부터 딸과 사위가 화초에 대해서는 함구(緘口)하였던 것 같다. 내가 응급실에 간 일이 그들에게 마음의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꽃에 집착하는 나를 말없이 보아주고 비위를 맞추며 지켜주었을 자식을 생각하니 엄마보다 마음이 넓다는 생각이 든다. 가을이 깊어 커튼 칠 계절이 오자 비로소 나는 자식의 입장에서 나를 보았다. 함께 사는 가족의 마음조차도 헤아리지 못하는 집착이 무섭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꽃에 대한 집착을 ‘꽃을 사랑하는 마음’이라 여겼다. 이제 거실 화분 20여 개와 동쪽 창가에 다육이 다소 있다. 나는 봄부터 꽃을 보며 행복했다. 집착을 놓으며 사위와 딸에게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무엇이든 과하면 집착이라는 것을 깨닫고, 앞으로의 삶에서도 이 점을 항상 유념하리라 다짐한다.
약력 : 2010년 [한국수필] 신인상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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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늘 화초로 인해 행복 하시길 바라오며
옥고를 보내 주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좋은 작품으로 동인지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