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야마 부시코 (1983) 楢山節考 | |
장르 | 드라마 |
감독 | 이마무라 쇼헤이 |
원작 | 후카자와 시치로 - 소설 《나라야마 부시코》, 《동북의 신무들》 키노시타 케이스케 -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 |
각본 | 이마무라 쇼헤이 |
제작 | 쿠사카베 고로 토모다 지로 |
출연 | 오가타 켄 사카모토 스미코 바이쇼 미츠코 |
촬영 | 도치자와 마사오 |
음악 | 이케베 신이치로 |
제작사 | 이마무라 프로덕션 |
배급사 | 토에이 |
개봉일 | 1983년 4월 29일 1984년 9월 7일 1999년 10월 30일 |
상영 시간 | 130분 |
[나무위키에서 모셔 옴]
영화제목을 상기하는 (촬하여 프레임화 한)그림을 올리기 시작하자
벌써부터 묵지근한 슬픔이 복심에서부터 우러나와 나를 삼킨다
어젯밤에 비티비로 본 일본영화
이즈음들어 일본영화를 폰에서 골라 비티비로 간혹 보게된다
그러면서 일본문화의 선진성이랄까? 장르의 다양성과 관련, 싫어도 일본을 영화선진국의 자리에 앉힐 수밖에 없구나! 싶다
우리에게도 '고려장' 이란 풍습이 있었잖은가
장면의 급박감과 선명한 색상도 이목을 끌려니와 무엇보다도 나를 사로잡는 것은 일본영화 어디에서든 나타나는 性의 끈적한 노출씬이다. 영화에서는 인간의 섹스 행위에 겹쳐져서
뱀.사마귀.개구리의 섹스씬이 자주 나오고 부엉이나 오소리 등도 등장한다
이 장에서 펴놓을 바는 아니지만
라쇼몽에서,
산길에서 지나친 사무라이의 아내가 이뻐서, 그 점잖은 선비 사무라이와 시비를 붙어서 여자를 빼앗아
그 남자 앞에서 여자를 절정에 이르게 만드는 장면은 남자로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섬뜩함과 관능이 아우른다
영화의 배경
마을의 지붕 너머로 절망같은 산맥이 가로막혀 있다
뒤늦게 얻는 재취 타마가 콩을 털고 있다. 남편인 타츠헤이가 자신의 동생(입에서 악취가 나는)과 딱 한번만 관계를 가져달라고 부탁하는 장면
그러나 타마는 한사코 반대하며 끝내 의지를 관철시킨다
속시원하게 허락할 듯 한데도 안된다고 고집을 부리는 묘한 캐릭터다
재취 타마조차도 그 부탁을 거절하자, 이번에는 리스케의 엄마인 오린이 나선다
남편이 죽기 전 젊은 아내에게 남긴 유언; 동네 총각들에게 밤마다 돌아가면서 해주면서 복덕을 지어 가문의 저주를 없애달라...고
그러나 그녀는 타츠 헤이의 동생만큼은 패스한다 왜냐고?
리스케의 입냄새가 너무 심해요~~ㅎㅎ
오린은 포기하지 않코 이번엔 자신보다 조금 어린 어떤 할머니를 살살 달랜다
할머니는 글쎄 될까 모르겠어~~ 하면서도 오린의 부탁을 들어준다
오린이 아들 타츠헤이에게 업혀서 산으로 갈 때에
볏짚 사이에서 리스케에게 몸을 대준 할머니가 말한다
"하니까 또 되네~~" 라고 중얼거린다
곧 산으로 갈 꺼면서 씨앗을 뿌리고 있는 오린
이 장면은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 는 글귀와 오버랩된다
언제 산에 들어가느냐 하면? 바로 내일
"사람들을 불러 모아!" 타마에게 이르는 오린
새벽에 마을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뒤돌아 보는 장면
강을 지나
가파른 산길 숲을 헤치며
점점 깊은 산으로 들어간다
외나무 다리를 건너다가
우회하기도 하고
길이 험하여 발톱이 빠지고 만다
물을 떠 어머니에게 드리려는 타츠 헤이
짐승과 교차하여 지나 산으로 산으로
이제 꽤 깊은 계곡까지 왔다
산신령이 사는 곳
부는 바람도 예사롭지 않다
빠진 발톱을 메만지는 잠시
나무넝쿨을 잡고 내려오다가 하마트면 어머니를 절벽에 떨어뜨릴 뻔도 하고
타츠 헤이는 젊은 날 어떤 일로 아버지를 총에 쏴서 죽였었다..
까마귀들이 모여 있는 그곳에 도착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70살이 되면 이곳에 와서 죽었던 곳에
망설이는 아들에게 이곳에 내려놓으라고 손가락으로 지시하는 오린
메고 오느라 땀범벅이 된 아들
어머니를 산속에 놓고 와야 하는 착한 아들
이제는 작별의 시간
부모를 모시는 게 힘들어서 어떤 사람은 부모를 버리는 게 기쁘기도 하단다
타츠 헤이는 그 반대편의 효자
슬픔에 목이 메인다
이제... 영원히 어머니와 이별을 해야 한다
죽는 곳으로 가기 싫어하는 아버지..를 지게에 지고 오다가
다투던 아들의 힘겨움
결국 절벽으로 굴려버리고 절규하는 어떤 아들을 목격한다
돌아가던 타츠 헤이 앞에
눈이 한방울씩 떨어진다
타츠 헤이는 길을 되돌려 어머니에게로 달려 간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있던 오린은 손짓으로 가라고 내젓는다
버려지는 노인들에게 따뜻한 내복이나 신발 같은 자비는 없다
눈속에서 따뜻하게 잠들다가 죽는 걸 바라는 아들
계곡의 입구까지 나와서 어머니가 계신 계곡을 바라보고 서 있는 타츠 헤이
마을에 도착한 타츠 헤이
영화의 무대가 되었던 마을
나라야마 부시코(楢山節考)는 나라산의 노래를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첩첩 산중에는 나라야마제(祭)를 지내며 사는 마을이 있다. 나라야마에는 하눌님이 살고 있고 그를 위한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이 곳에서는 수확이 적어 백미는 제사 때가 아니면 여간해서는 먹기 힘들다. 마을 사람들은 이 제사에 대한 노래도 부르고 흰밥에 대한 노래도 부르고 산으로 간다는 노래도 부른다. 이 마을에서 산으로 간다는 것은 나무를 하러 산에 간다는 뜻 외에 그 하눌님이 계신다는 일곱 개 골짜기 너머의 먼 산에 간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마을에서 제(祭)노래가 들린다는 것은 나라야마에 들어가야 하는 해가 가까워 오는 것을 늙은이들에게 알리는 의미이다. 이들 마을에서는 일흔 살이 되면 산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집 앞에 그루터기가 있어 그루터기 집으로 불리는 오린네는 외아들과 손자 넷, 오린이 함께 살고 있다. 올해 예순 아홉의 오린은 나라야마에 들어 갈 날을 기다리며 부싯돌로 자신의 이를 쪼아댄다. 먹을 것이 없는 형편에 이가 튼튼한 것은 흉이 되어버렸다. 홀아비가 된 아들의 며느리가 들어오자 신이 나 돌절구 모서리에 이를 맞부딪치기까지 한다.
"겨우 두 개뿐이야."하고 실망했으나, 위 앞니 두개가 가지런히 빠졌으므로 입 안이 휑하게 비어 있어 그런대로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때론 삶이 죽음보다 더 두렵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형편에 입 하나를 덜기 위해 늙은이를 깊은 산에 버리는 것이 관례인 마을에서는 먹을 것을 훔치는 것이 가장 극악한 범죄일 정도이다. 오린은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기색없이 기꺼워하고 빨리 산에 가는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손자인 게사요시는 빠를수록 좋다며 자신의 할머니가 산에 가는 것을 부추기기까지 한다. 아들에 손자까지 아내를 얻어 식구가 늘었는데 손자 며느리는 임신까지 한 상태이다. 아이가 나오기 전에 얼른 산에 올라야겠다 싶은 오린은 점점 초조해진다.
산으로 가는 날이 정해지고 먼저 산에 다녀 온 사람들은 산으로 가는 예법을 지키라 알려준다. 산으로 가거든 아무 말도 하지 말 것, 아무도 모르게 나와야 하며 뒤를 돌아보지 말 것 등. 기어이 산에 올라 어머니를 내려 주고 산을 내려가던 길 아들 다츠헤이는 눈이 내리는 것을 본다. 자신이 산에 가는 날에 분명 눈이 올거라던 어머니의 말이 생각나 산의 예법도 잊고 뒤돌아 다시 어머니에게 가서는 "어머니, 눈이 와요." 라고 큰 소리로 말한다.
눈이 와서 참 잘됐다. 게다가 찬 산바람에 쏘이느니 눈속에 묻혀 있는 편이 춥지 않을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냥 그대로 어머니는 잠들어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근을 겪어보지 못한 시대에서 함부로 그들의 관습을 재단할 자격은 없을 것이다. 실제로 사람이 굶주림에 식인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마을의 공동체에서 그렇게 하기로 정해진 일이고 오랜시간을 그렇게 해왔다면 그들에게 당연한 절차였을 것이다.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가 하는 문제도 결국은 인식의 문제이고 시대의 방식에 좌우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따지고 보면 생매장에 가까운 방식이라 거부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오린의 모습은 마지 수행을 위해 길을 떠나는 수도자의 모습 같아 보이기도 한다. 삶은 고행이며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다 해내야만 하는 것이다
출처:https://goodfortune.tistory.com/entry/이문열-세계명작산책2죽음의-미학나라야마-부시코후카사와-시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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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야마부시코(楢山節考)
1983년 일본
감독 : 이마무라 쇼헤이(今村昌平)
출연 : 오가타 켄, 사카모토 스미코, 아키 타케시로, 구라사키 세이코
원작 : 후카자와 시치로
각본 : 이마무라 쇼헤이
이 작품은 1957년에 <東北の神武たち>라는 영화로 제작되었고 1958년에 <나라야마부시코>라는 제목으로 제작되었던 것을 1983년에 리메이크한 것이다. 칸느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나라야마는 나이든 노인들을 버리는 산을 가리킨다. 부시는 후시가 탁음화된 것으로 후시는 노래란 뜻이다. 우리 나라의 타령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나라야마부시코의 의미는 나라야마 노래에 대한 고찰이라는 뜻이다.
무대는 신슈의 산촌. 신슈는 1998년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나가노현과 니가타현 지역이다. 이 곳의 산악지역은 엄청나게 눈이 많은 곳이다. 동해를 거쳐 수증기를 잔뜩 머금은 구름이 이 험준한 산에 걸려 눈을 뿌리고 지나가는 것이다. 불과 수십년 전까지도 이 지역의 일부는 겨울 몇 개월 동안에는 외부 사회와 완전히 단절되었었다. 지금도 이 지역의 산촌에 가면 우편함이 2층 창가에 붙어 있는 곳이 있다. 눈이 많이 오는 해는 쌓이는 눈을 치우기도 전에 다시 쌓이고 그 눈이 다져져서 봄 언저리가 되면 2층 높이까지 쌓였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출입구는 2층의 창문이 되는 것이다. 지금은 제설도구들이 좋아져서,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는 눈은 쌓이는 즉시 치운다. 심지어 길바닥이나 지붕에 보일러를 설치해서 눈이 내리는 즉시 녹도록 해 놓은 곳도 있다.
이 영화의 시대 배경은 에도 시대 말기나 메이지 시대 초기가 아닐까. 정확히 언급하는 것은 아니나 사용하고 있는 도구나 머리 모양 등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다큐멘타리를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연기와 세트들이 자연스러워서 마치 과거로 카메라를 들고 들어가 찍어 온 듯한 느낌이 든다. 근대 이전의 시간은 무척이나 느리다. 시간이 느리다는 것은 변화가 더디게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200년 전과 500년 전의 광경의 차이를 금방 분간해 내는 건 무척 힘들다.
이 곳은 우바스테(우리 나라의 고려장과 같은 것)가 마을의 규칙으로 되어 있는 곳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더불어 살아남기 위해 극도의 잔혹성을 발휘하는 인간 사회의 모습이 어울어져 있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러한 혹독한 환경 속에서 인간미를 유지하는 데는 영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는 외에는 적응할 여지가 없다. 또한 영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밖에 없다.
할머니 오린, 가장인 타츠헤이, 동생 리스케, 장남 케사키치, 차남, 그리고 여자 아기 유키가 첫 장면에 등장하는 이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가족이다. 장남인 케사키치는 마을에서 평판이 좋지 않은 집의 딸인 마츠와 사귀고 있다. 그 여자에게 아이가 생기자 집으로 데려 온다. 그리고 작년에 상처를 한 타츠헤이에게도 새로운 아내 타마가 들어온다.
타마가 오기로 했다는 소식을 갖고 온 사람은 소금장수다. 소금장수가 아기를 얼르자 오린은 이 애는 안 판다고 한다. 그러자 소금장수는 아기를 사려는 게 아니라 혼담을 갖고 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소금장수가 돌아갈 때는 아이 셋을 데리고 간다. 외지로 팔려 가는 애들이다. 여자 애들이다. 먹을 것이 부족할 때 남자애가 태어나면 계곡에 버리기가 일쑤다. 여자애는 팔 수 있기 때문에 키운다. 동생 리스케도 버려졌다가 살아난 경우이다.
또한 여기서는 가장이 될 사람(주로 장남이지만) 이외에는 결혼을 할 수가 없다. 너도나도 다 결혼을 하면 식구가 늘어나고 그러면 전원이 기아에 직면하고 심하면 굶어 죽을 수도 있다. 그래서 차남 이하는 '약코'로 남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약코들은 가장의 동생, 혹은 삼촌이면서도 하인 취급을 받으면 살아야 한다. 리스케는 어린 조카들에게 항상 모욕을 당하면서 살지만, 그런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타츠헤이는 마을의 규율을 어기고 어머니의 우바스테를 거부하고 사라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짐으로 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우바스테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영과 영에 대한 믿음 없이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몇 번에 걸친 영적인 경험은 이런 상황을 기쁘게 받아들이도록 한다. 소금장수는 마을로 들어오는 길에 이미 이 세상에 없을 타츠헤이의 아버지를 본다. 그리고 아라야시키의 주인은 집안에 남아 있는 저주를 풀어 주라고 자신이 죽은 뒤 아내가 마을의 장가 못 간 남정네들과 관계를 갖도록 유언을 남긴다.
어머니를 버리러 가는 길에 타츠헤이는 어머니의 모습이 사라진 것을 본다. 그리고 어머니를 찾아 한참을 헤맨 끝에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것을 타츠헤이는 카미카쿠시라고 여긴다. 어린애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카미카쿠시라고 하는데 사라진 어린애는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나타나기도 하고 영원히 나타나지 않기도 한다. 미야자키 하야요의 최근 애니메이션 <센 토 치히로 노 카미카쿠시>는 이런 민속 세계에서의 믿음을 반영하고 있다. 아버지도 혹시 카미카쿠시를 당했을 지도 모른다.
그 어머니는 30년 전에 먼저 떠난 남편을 만나러, 그리고 먼저 간 조상들과 사람들의 영을 빨리 만나러 간다고 하면서 아직 70세가 되기 전에 나라야마에 가겠다고 나선다. 그녀는 70을 바라보는 나이로는 너무 건강하고 그래서 70이 되는 겨울을 넘겨 한 해를 더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다. 그렇지만 자신의 입을 더는 것이 가족을 무사히 살아남게 하는 길이라는 걸 안다. 그래서 무리하게 나이 먹은 표시를 낸다. 돌로 때려도 끄덕도 하지 않는 앞니를 멧돌에 부딪혀서 부러뜨리는 장면은 그래서 보는 사람에게 실제 아픈 것보다도 더 아프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빨리 죽어 주려는 할머니의 노력을 타츠헤이 이외의 가족들은 무덤덤하게 받아들인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어머니, 자신의 할머니, 자신의 시어머니의 죽음은 딸이 아니라 아들로 잘못 태어나서 남의 논에 버려져 썩고 있는 갓난애와 별다른 느낌의 차가 없이 와 닿는다.
타츠헤이가 나라야마에 어머니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의 유품들은 이미 아내와, 새로 들여놓은 며느리 등 가족들이 나눠 가지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자신들도 같은 처지가 된다는 건 모두 납득하고 있지만 현실은 또 현실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환경이 가혹하면 인간의 마음도 가혹해진다. 그리고 가혹한 규칙을 만들고 그것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 더 많은 사람이 살아남는 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제한된 자원 내에서 식구가 늘어나는 것은 살아있는 모두에게서 조금씩 양보 받는 것을 의미하며 그래서 양보의 여지가 없을 때 가차없이 약한 생명을 버리는 것이다. 약한 존재란 어린애와 노인이다. 눈에 덮인 긴 겨울동안 다섯 식구가 빠듯하게 살만큼의 양식밖에 가지지 않았을 때 식구가 하나 늘면 모두가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 다섯 식구만이라도 살아 남으려면 누군가가 희생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가장 약한 사람의 목숨을 모두가 조금씩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이 때 희생이 되는 것은 갓난아이와 노인일 수 있다. 만약 갓난아이와 노인 중 택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노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 규칙은 어떤 사람에게는 귀찮은 노부모 부양에서 해방되는 길을 제공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고통의 길이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들도 나라야마에 널려 있는 유골들과 같은 길을 걸어갈 것이고 긴긴 세월 속에서 개체들이 안고 있던 애증들은 남은 사람들의 가슴속에서만 살아 있을 것이다. 그것들이 역사의 표면으로 등장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이들은 왜 이런 가혹한 환경을 버리지 못하고 고집스럽게 그 곳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더 좋은 환경은 여기저기 널려 있는데. 겨울이 더 짧고 땅이 비옥해서 견디기가 더 쉬운 남쪽으로 이동하면 되는 게 아닌가. 왜 이들은 이런 가혹한 환경에 뿌리를 내리고 살게 되었는가.
아마도 그들의 선조는 굶주림보다도 혹독한 관리를 피해서 산 속으로 도망을 치지 않았을까. 그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부모를 버리고 어린애를 버리는 상황이 되었어도 혹독한 관리에게 수탈 당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자손들은 자신들이 알지도 못하는 선조들이 마련해 놓은 규칙을 여전히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그대로 지켜 나가고 있는 거고.
[출처] <나라야마부시코>에 대한 감상|작성자 찬짱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