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고향 정다운 추억
김성한
가장 오래된 기억은 동갑내기 사촌 누나와 나물 뜯으러 다니던 때다. 고향 동네 구석진 응달에는 얼음이 남아있기도 했다. 나물은 흔치 않았고 밭둑에 듬성듬성 돋아나는 냉이와 쑥, 달래가 전부였다. 나물 종류를 묻고 배워가며 뜯자니 한참을 돌아다녀도 소쿠리 바닥에 깔리지도 않았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밭둑이 끝나는 언덕배기까지 가게 되었는데, 꽤 높은 절벽이다. 사촌 누나가 바위틈에 예쁘게 핀 진달래꽃을 보고 꺾어 달라고 했다. 첫 기억으로 이때가 떠오르는 것은 낭떠러지를 오르다 떨어졌기 때문인 듯하다. 그 무렵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학교 다녀오는 길에, 아랫동네 사는 정길이가 사촌 흉내를 내며 별명을 자꾸 불렀다. 누나 앞에 힘센 척하고 싶었는지 바로 치고받으며 싸웠다. 사촌 누나는 서울에서 행복하게 잘 사는데 정길이는 별고없이 잘 지내는지 궁금하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절골 올라가는 길모퉁이에 사는 형이 우리를 불러 모아 놓고 패싸움을 시켰다. 싫었다. 안 하고 머뭇거리면 심하게 괴롭혀서 억지로 패싸움했다. 처음에는 미뿔(봉분의 사투리) 꼭대기에 올라가 밀어내는 정도였지만, 점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서로 발로 차기도 하고 상대방 얼굴을 때리는 수준까지 진행되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 코피를 흘리는 친구, 다리를 절룩거리는 친구, 우는 친구가 생겨나기 시작하자 비로소 싸움을 말렸다. 친구를 부축하고 사과도 하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그날따라 멀게만 느껴졌다. 꼬불꼬불한 시골길을 한 시간 정도 걸어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서로 멋쩍고 쑥스러워 한동안 말도 못 붙였다. 신작로 길가에 늘어선 버드나무들만 우리를 위로하고 달래주는 듯 바람에 살랑댔다.
같은 해 여름 우리 동네에도 드디어 전깃불이 들어왔다. 호롱불 심지 돋우느라 눈섭을 까맣게 태워 먹은 일은 이제 아련한 추억이 되고 말았다. 처음에는 전깃불이 신기하여 일부러 밤에 숙제하기도 했다. 오래가지 않아 익숙해지고 전깃불의 고마움을 까먹을 즈음이니 두 번째 달부터다. 전기를 아껴야 하니 필요할 때 아니면 불을 켜지 말라는 엄마의 당부 말에 필요할 때가 언제인지 따지기도 했다. 공부하다 잠시만 졸아도 엄마는 방에 들어와 전깃불을 끄고 나가셨다. 마치 우리가 공부하나 안 하나 지켜본 것처럼 알고 들어왔다. 그런데 실제로는 숙제가 남았어도 피곤하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그냥 잤다.
이 무렵 미군 부대 다니는 동네 아저씨가 흑백 티브이를 가져와 틀자 아예 동네에 영화관이 들어온 풍경이었다. 비실이와 땅딸이, 피노키오, 수사반장은 인기 프로였는데 온 동네 사람들이 마당에 멍석을 깔고 앉아 구경했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다. 윗마을에 공사가 시작된 후 약 삼 년 만에 큰 저수지가 만들어졌다. 그해에 첫 물을 담았는데, 그렇게 넓고 큰 저수지는 처음 봤다. 억수로 넓었다. 어른이 되어 가보니 조그만 연못 급이었는데, 그때는 그렇게 커고 넓어 보일 수가 없었다.
여름 방학이 되었다. 못 둑보다 한 5미터쯤 낮은 곳에 물이 빠지는 구역이 있었는데 얕았다. 그곳에서 개구리헤엄도 치고 물놀이도 하면서 놀았다. 곧 조금 더 깊은 곳으로도 건너갈 수 있다고 자랑하는 친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나도 따라 했다. 그렇게 몇 번 왔다 갔다 하며 놀다가 그만 중간에 힘이 빠지게 되었다. 힘을 한번 비축한 다음 건너가려 멈추었으나 깊어서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계곡을 깎아 만든 저수지라서 경사가 심했다. 너무 깊어서 다시 쏟아 오를 수 없었고 허우적대다 정신을 잃고 말았다. 깨어나 보니 가물가물 주변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고 말소리도 들렸다. 같은 동네에 사는 큰 형님이 나를 발견하고 건져 올린 것이다. 못 둑에서 아이의 발목을 잡고 거꾸로 들어 올리니 입으로 물이 빠져나오면서 정신이 들었다고 했다.
삽시간에 좁은 산골에 소문이 퍼졌고 내가 다니는 초등학교는 방학이었으나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한 학년은 두 개 반이 전부여서 학생 수가 많지는 않았다.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박정화라는 여선생님이었는데 나를 보자마자 부둥켜안고 울기부터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첫 부임지로 발령받았다고 했다. 곧 저수지에 들어가 놀지 말라는 푯말이 군데군데 설치되었고 어른들은 교대로 보초를 섰다. 나를 건져 올린 성도 형님은 엄마와 아버지한테는 영웅이었다. 동네 저 멀리서 소리만 듣고도 엄마는 버선발로 뛰어나가셨고 군에 간 형님이 휴가를 얻어 나올 때마다 불러들여 후하게 챙겨 드리곤 했다. 형님이 명절 때 고향에 오면 귀한 손님이었다. 반가워서 인사하려 다가서면, 액땜 했으니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어깨를 다독여 주기도 했다.
성도 형님만 생각하면 몸이 먼저 반응하여 벌떡 일어서곤 한다. 다시 생명을 얻어 덤으로 산다는 기분이 들어 고마움에 나도 몰래 기분이 좋아지곤 한다.
사촌 누나, 나한테 두들겨 맞고 코피 흘린 친구, 성도 형님.
정다운 고향, 그리운 추억들, 그때 그 시절 그 사람들이 보고 싶다.
첫댓글 한편의 수필이 더 생겼네요..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