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간디 김성혁장로 신앙 간증 모음 한국의 간디 김성혁 장로 -
성결신문 상생 2011. 6. 27. 1:04 이웃추가본문 기타 기능
한국의 간디 김성혁 장로
① 채권 장수와 같은 경북대 교수 ⓒ 성결신문(http://www.kehcnews.co.kr) [801호] 2011년 04월 27일 (수) 17:54:42 성결신문 webmaster@kehcnews.co.kr
“그는 작달막한 키에 검정고무신을 신고, 언제나 손에는 검정색 손가방을 든 촌로의 아저씨였다.
이마는 햇빛에 그을려 반질반질하고, 양복의 소매는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해졌으나 생기에 찬 눈빛으로 앞을 응시하며,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걷는다.
얼른 외모만 보면 ‘채권 삽니다’하고 골목을 몰아대던 당시 흔한 채권 장수였다.
그러나 그는 1950년 후반부터 거의 30년 동안 대구에 있는 국립 경북대학교 문리대 영어과 김성혁 교수라니, 놀라울 뿐이다.
김 교수는 그가 살던 수성교와 경북대학교 사이 4킬로쯤 되는 길을 언제나 걸어서 정시에 출퇴근했다.
그의 옆으로 학교 교직원 버스가 지나가도 본체만체했고, 동료교수가 택시를 타고 가면서 손을 흔들어도 고개를 우로 약간 흔들고 만다.
그의 작은 가방 속에는 그날 가르칠 영문 ‘타임’지나 ‘뉴스위크’, 그리고 영문 ‘다이제스트’를 한권씩 넣고 휘파람을 불며 시골 할아버지가 오일장에 가듯 그렇게 학교에 오갔다.”
1956년부터 30년 동안 대구 경북대학교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모습의 중년의 사나이를 자주 보았을 것이다.
위의 글은 60년대 대구에서 김성혁 교수에게 6년 간 영어 과외를 공부한 오영호 교수(인천대 명예교수)가 쓴 수필 ‘구두쇠가 되자’의 글 일부로, 당시 김성혁 교수는 대구나 경상북도 일대에서 ‘괴짜 교수’, ‘구두쇠 장로’ 또는 ‘한국의 간디’라고 알려졌다.
그가 누구요,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꼼꼼히 되짚어 보자.
김성혁(金成赫)은 500년의 조선이 일본에 강제 합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16년 11월 4일에 평안남도 대동군 지족면 건지리에서 농사하는 부친 김이서의 3대 독자로 출생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영민하고 부지런해서 부모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성장하다가 8살 때에 거리가 먼 소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6년 동안 언제나 개근상과 우등상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부지런했다.
그가 평양에 있는 미션스쿨 광성중학교(6년제 중학과정)에 합격하자, 부친은 암소를 팔아 등록금과 생활비를 대주었다.
그는 선교사들이 가르치는 성경과 영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평생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결심하고 세례를 받았다.
김성혁은 학교에 선교 장학금이 있는 줄 알고 더욱 열심히 공부했다.
그는 2학년 때부터 성적이 우수해서 장학금을 받았지만 새벽에는 신문배달로 생활비를 버는 고학을 했다. 졸업이 임박하자, 선교사들이 그에게 동양 최고의 외국어대학인 동경외국어대학 영문과에 합격하면 장학금으로 유학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꿈을 안고 여비를 받아 부산에서 배를 타고 동경에 가서 시험을 쳐 10대 1이 넘는 큰 경쟁을 돌파해 합격했다.
그를 우수한 모교의 영어교사로 만들기 위한 학교의 첫 해외장학생이었다.
그의 일본 대학생활도 한국에서의 생활과 비슷했다.
그는 한국에서처럼 학비는 보내오는 장학금으로 냈고, 나머지 책값과 생활비는 고학으로 벌어서 메웠다.
중학생 때부터 고학생활이 몸에 배어 근검생활이 그의 삶의 자세가 되었다.
3년의 대학과정을 마친 그는 교사의 꿈을 안고 귀국했지만, 때는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온 국민이 일제의 전쟁수행의 노예가 되었고,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모교 광성중학교가 폐교되어 선교사들이 모두 미국으로 쫓겨 간 후였다.
그는 일본에서 배운 영어 실력으로 1942년부터 평안남도 안주공립중학교의 영어교사로 취직한 후, 어른들의 성화에 고향 처녀와 결혼을 했다.
1년 후, 일본은 적국인 미국 영국의 언어 영어교육을 중지시켰고 그는 해방될 때까지 무위도식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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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광복과 월남, 그리고 교사, 교수로 대구에 정착 [802호] 2011년 05월 04일 (수) 21:09:36 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webmaster@kehcnews.co.kr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광복의 날이 왔다.
그가 이 날을 위해 얼마나 기도했던가. 그는 해방 직후 혼란의 와중에서도 민족의 앞날은 오직 교육에 있다는 확신으로 들뜬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평양왕성중학교 영어교사로 들어가 열심히 가르쳤다.
그의 나이 29세였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은 38선이 그어져 남북으로 나눠졌고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진주하여 다스리기 시작했다.
그가 있었던 북쪽 땅에서 소련군과 함께 나타난 김일성이 소련의 힘을 업고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어 나갔고,
주일에도 국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부역시켜 신자들이 주일예배를 못 드리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는 신앙의 자유가 없는 북한에서 살 수 없음을 깨닫고 선교사들의 나라인 미국이 다스리는 남한으로 넘어갈 것을 결심했다.
하지만 늙으신 모친이 고향을 떠나지 않겠다고 우기시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아들을 모친 곁에 남겨 놓고 눈물로 떠나야 했다.
그는 곧 통일되면 부모님께 돌아 올 것을 약속하고 아내와 함께 죽음의 고비를 몇 번 넘기는 고생을 하면서 38선을 넘어 남한에 왔다.
그때가 1947년 여름이었다.
서울에 왔지만, 반기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땅이었다.
그는 허름한 방 한 칸에 세를 들어 살면서 주일에는 북한의 신자들이 모인다는 영락교회나 평안교회 등에 가서 예배를 드렸고, 그가 일본 유학생임을 안 어느 장로가 추천해서 중동중학교 영어교사로 들어갔다.
그러다 1948년 가을에 대구의과대학이 신설되면서 그를 교수로 초빙, 대구로 내려가서
1952년 봄 학기까지 영어교수를 했다.
그 덕에 그는 6.25전쟁의 직접적인 고난을 겪지 않았다.
그는 1952년 여름 고병간 박사가 국립 경북대학교 학장이 되면서 대구에서 영어를 잘 가르치기로 소문난 그를 영어교수로 초빙했다.
그는 고 박사의 부름을 기쁘게 응답하여 그가 소천할 때까지 성심을 다한 경북대학교 교수와 뛰어난 영어학원의 강사로 이름을 널리 날리게 되었다.
그는 1956년부터 뜻이 있어 낮에는 대학 교수요,
밤에는 자택 2층 다다미방에 사설학원을 차리고 시사영어를 강습했다.
그가 과외학원을 차린 것은 돈이 아니라 평소 그가 꿈꾸던 꿈을 구현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꿈은 전에 자신이 귀한 장학금 혜택을 받아 공부했던 것처럼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어 공부하게 하는 것이었다.
교수직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과외학원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그의 과외학원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오양호 교수의 글을 인용한다. “나는 이분 밑에서 근 6년 이상 공부를 했다.
당신의 집에 영어강습소를 차려 놓고 대학생들에게 과외를 하셨다.
‘타임’지와 ‘다이제스트’를 하루 3시간씩 강의했는데, 나는 학부, 대학원, 석, 박사 과정시절에 그 강습소에서 영어공부를 했다.
그때 수강료가 500원이었다.
이 수강료를 선생님이 직접 받았는데, 검은 천 신주머니 같은 전대를 앞에 놓고, 영어잡지 ‘다이제스트’ 뒷장에 어느 학교 누구, 몇 월 며칠까지라고 몽당연필로 또박또박 쓴 후, 받은 돈을 전대에 넣는다.
그 흔한 노트에 기록하지도 않고, 금고도 없다.
그때 500원이면 요즘 5만 원 이상이어서 월수입이 기백만 원은 족히 될 것이다.
해마다 여름이나 겨울방학도 없이 사시장철 그의 다다미방에는 학생들로 언제나 초만원이었으니 대학 교수치고 짭짤한 부수입이 아닌가?
그런데 그 많은 돈이 다 어디로 간 것일까?”
한국의 간디 김성혁 장로
③ 암소장학금과 불법과외 고발 [803호] 2011년 05월 11일 (수) 18:07:47 성결신문 webmaster@kehcnews.co.kr
오양호 교수의 글을 이어서 소개한다.
“해마다 신학기가 되면 그는 1년 동안 과외수업으로 모은 돈을 뭉치로 싸들고 대구의 우시장으로 간다.
그는 그 돈으로 큰 암소 10마리를 산 후, 소를 판 사람들에게 암소 고삐를 각자 쥐고 줄을 지어 당시 그가 다니던 교회로 가게 한다.
그가 장로로 시무하는 교회에는 이미 그가 선발한 10명의 장학생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는 먼저 그들에게 ‘밖에 있는 암소 한 마리씩을 장학금으로 줄 터이니, 잘 길러서 새끼를 낳으면 새끼를 팔아서 계속 등록금으로 사용하라’고 간곡히 부탁의 말을 한다. 그리고 모두 교회 마당으로 나와 암소 고삐를 한사람씩 들려준다.
장학생들은 고맙다고 인사한 후, 암소 고삐를 쥐고 자기 집을 향해 간다.
이것이 소위 ‘암소 장학금’이다. 당시 대구의 시민들은 이 암소장학금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래서 가난한 학생들은 암소장학금을 타기 위해 교회를 찾아 신앙생활을 시작해서 나중에 목사나 장로가 되기도 하고,
예수 잘 믿는 교수나 공무원, 그리고 사장들이 되었다.”
김성혁 장로가 과외강습비를 제일 먼저 대학생 장학금으로 사용한 것은 이유가 있다.
그가 중학생 때부터 선교사의 장학금으로 공부했고,
일본유학도 장학금으로 해 평생 편하게 살 수 있었으니,
이제 그 빚을 갚아야 한다는 ‘부채(負債)의식’ 때문이었다.
사도 바울이 복음 전도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그 많은 영혼들을 구원했듯이 김성혁 장로의 장학에 대한 부채의식은 수많은 학생들을 위한 교육에 대한 기여로 그들을 사회에 공헌케 했다.
이렇게 암소장학금을 받은 학생은 10년 동안 120명이나 되었다.
특히 7곳의 농촌교회(하북, 중율, 태촌, 상주동부, 산상, 신안, 대성) 건축을 전적으로 도와 영남지역 성결교회 성장에 일조했다.
그가 소천하기 전까지 베푼 장학금과 가난한 자들에게 지원한 금액은 30년 동안 당시 약 25억 원 이상 될 것이라고 생전에 그가 다닌 교회의 여전도사로,
이웃 사랑을 위한 정보 제공과 심부름을 한 권영숙 전도사는 밝히고 있다.
김성혁이 1986년에 소천 했으니,
당시 이만한 금액이면 대형 빌딩도 살 수 있는 큰 부자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늘 낡은 군화 한 켤레와 낡은 양복 한 벌로 만족했으며,
식사는 보리밥에 된장국과 빈대떡 하나였다고 하니,
그는 분명 시대의 기인(奇人)이나 이웃 사랑의 전도사가 아닐까?
언젠가 그의 집 근처의 영수학원에서 그가 불법과외를 한다며 경찰서에 고발했다. 고발장을 접수한 남대구경찰서의 형사가 김 장로의 집에 와서 사실을 확인한 후, 수입지출 기록을 입수해서 살피다가 깜짝 놀랐다.
수입은 흔한 노트가 아닌 영문 다이제스트 잡지 뒷장에 볼펜도 아닌 연필로 쓴 기록인 점도 그렇지만,
지출내역을 꼼꼼히 적은 허름한 노트에 사람들의 이름과 금액, 그리고 장학금이나 구제를 한 사람들뿐이었기 때문이다.
형사가 몇 사람을 찾아가 확인한 결과 모두 사실일 뿐 아니라.
모두들 김 교수에게 감사하다며 치하를 했다.
조사를 하다 오히려 감동을 받은 경찰은 본서에 가서 서장에게 보고하기를 “김성혁 교수의 사설과외는 무인가 과외는 틀림없지만,
단속보다는 오히려 국가가 장려하고 표창해야 할 선한 사업”이라고 보고했다.
그래서 당시 정부의 새마을 사업 성공사례로 대통령 표창상 시상을 위해 동직원이 이력서와 사례를 자세히 알아보러 그를 찾았다.
하지만 그는 핀잔을 듣고 쫓겨났다. 왜냐하면 상 받는 것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에 위배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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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진짜 꿀 판매와 아들의 결혼식 [804호] 2011년 05월 18일 (수) 18:07:52 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webmaster@kehcnews.co.kr
김성혁 장로는 평소 근검과 절약, 그리고 봉사의 삶을 무엇보다도 정직하고 성실한 삶을 최고로 여겼다.
그는 사회의 기반은 신뢰성으로 보고 ‘국민들이 정직하지 않으면 사회의 기틀이 무너진다’며 학생들에게 정직성을 자주 강조했다.
그는 음식물 중에서 꿀과 참기름에 가짜가 너무 많아서 국민들의 정직성에 대해 개탄한 적이 많았다고 한다.
하루는 그에게 안동에 사는 잘 아는 김 모 장로가 찾아왔다,
김 장로는 서울신대 출신이지만 목회를 접고 장로로 안수 받아 교회 봉사에 앞장을 서는 분이다.
김 장로는 “장로님. 제가 양봉사업에 실패했습니다.
자금을 대주시면 재기하겠습니다”하고 부탁했다.
김성혁 장로가 “장로님. 절대로 가짜 꿀을 팔지 않겠다고 저와 약속하실 수 있습니까?”라고 하자, “약속하지요.
저는 정직해서 거짓말을 못해 항상 돈을 많이 못 법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제가 사업자금을 대고, 장로님이 생산하는 꿀을 제가 팔아보겠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안동 김 장로의 양봉사업은 김 장로의 열심으로 인해 꿀을 많이 채취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해마다 가을이면 김 장로는 김 교수의 대학 연구실에 수십 통의 꿀을 배달했다.
그러면 김 교수는 자기연구실 문에 이런 글을 적어 붙인다.
‘진짜 꿀 있음-김성혁 백’. 그리고 강의가 끝나면 학생들에게 광고한다면서 “건강에 좋고 감기에 효능이 있는 꿀이 있소.
내가 잘 아는 모 장로님이 생산하는 진짜 꿀이니 필요한 학생은 내 연구실에 와서 사 가시오”라고 말했다.
평소 김 교수의 정직성을 잘 아는 학생들은 김성혁 장로에게 와서 진짜 꿀을 사기 위해 길게 줄을 섰다.
그래서 수십 통의 꿀이 금방 팔렸다. 이렇게 해마다 꿀을 판매하자, 김 장로의 꿀 사업도 잘되고 김 교수의 자금도 금방 회수되어 다른 사람들을 또 돕게 했다.
이런 김 교수의 철저한 성격이 그의 가족에 대한 태도는 어땠을까?
물론 아내나 6남매 자녀들도 근검절약이 일상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 단면을 오영호 교수의 글로 다시 엿본다.
“1960년대 말 김성혁 교수의 외동아들이 결혼식을 하게 되었다. 이북에 두고 온 장남을 늘 후회하면서도 차남을 잘 길러 어느새 경북의대를 졸업하고 가정을 갖게 되었다.
그는 결혼식을 앞두고 아들을 불러 말했다. ‘내가 좋은 며느리를 얻게 되어 기쁘다.
그런데 결혼식은 집에서 간단히 치를 테니 그리 알거라’ ‘예’ 마침내 결혼식이 김 장로의 집에서 양쪽의 가족 20여명이 모여 조촐하게 치러졌다.
주례는 김성혁 장로였다.
냉수 한 그릇을 떠 놓고, 촛불 한 쌍을 켠 후, 신랑이 신부에게 금 한 돈의 반지 하나를 예물로 전했다.
주례사가 시작되었다. ‘너는 의사로서 이제 어디 가든지 사는 걱정은 없을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만은 황금처럼 변치 말고, 모든 사람들과 둥근 반지처럼 화목하게 살아가기 바란다.
집을 사고 살림살이 하는 것도 의사라면 걱정 할 일이 아니기에 한 달 사글세 방 얻을 돈만 준다.’ 그리고 결혼식을 마친 후, 가족 기념사진을 찍고, 그 자리에 둘러 앉아 국수 한 그릇씩 먹는 게 전부였다.”
김성혁 장로는 그의 글 ‘성도의 가정과 사명’(활천 1963. 4호)에서 “어떤 성도는 11조를 실시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에 감격해서 10의 2조를 결심했다.
그래서 10의 1은 교회에 바치고, 또 10의 1은 불쌍한 학생들에게 학비를 돕는데 쓰기로 했다.
선한 일을 하다보면 힘이 생기고 신앙생활의 참 기쁨을 더욱 깨닫게 하여 다음에는 10의 3조를 하게 되고,
지금은 자기 수입의 반 이상을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에 쓴다.
그는 ‘육신을 위해 최저생활 감수하고 나머지는 하늘나라 사업에 바칠 것이며’, 이것이 그의 생활신조였다.”
한국의 간디 김성혁 장로
⑤ 문제가 된 그의 성서관 [805호] 2011년 05월 27일 (금) 16:39:40 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webmaster@kehcnews.co.kr
이웃 사랑을 철저히 실천하는 그는 이웃 사랑의 개념이 신앙적 확신이 되었다.
그래서 이웃 사랑에 관한 논설을 1963년부터 1970년까지 교단 기관지 활천에 계속 투고, 게재되었다.
‘성경해석에 주의 할 일’,
‘올바른 신앙노선’, ‘성서해석과 역사적 배경’, ‘종교 병’, ‘성서연구에 관한 견해’, ‘과학과 종교’, ‘기독교인의 경제생활’ 등 12편이 그것이다.
그는 또 재직하는 경북대학교의 학보와 대구의 ‘매일신문’에도 자신의 소신을 담은 글을 자주 게재했다.
그는 발표된 글을 모아 ‘올바른 성서관’이란 제목의 책을 1974년에 발간했다.
그런데 이 책을 본 그의 교회 모 장로에 의해 그의 성서관에 문제가 있다고 당회에 고발을 당했다.
그래서 당회는 오랫동안 갈등이 야기되었고 얼마 후 당회장 홍 목사에 의해 ‘장로 시무정지 및 수찬정지’라는 징계를 받았다.
필자는 그의 성서관을 알아보기 위해 ‘올바른 성서관’을 구했으나 구하지 못했다.
다만 활천에 게재된 그의 글 12편을 모두 찾아 읽은 결과 그의 성서관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올바른 신앙노선’을 통해 다음 3가지를 강조한다.
‘1)전통적 교리를 다 믿는다고 해서 올바른 신앙노선에 섰다고 판단할 수 없다.
2)‘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고전 13:1)는 말씀처럼 이웃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 죄다.
3)지옥에 간 사람들의 치명적 죄는 지상에서 작은 형제를 사랑하고 돌보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공궤하는 것을 몰랐다는 사실이다’라는 것이다.
또 ‘종교병’이란 글에는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사랑도 육체에서부터 시작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남을 사랑하는 것도 보이는 육체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 그런 후에 남의 영혼문제를 논할 수 있는 자격이 우리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신앙은 주님의 말씀처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된다.
이 두 가지를 힘써 지키는 자가 크리스천이다.
그런 면에서 김 장로는 크리스천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두 가지 중, 무엇이 먼저냐? 하고 주장할 때 문제가 파생된다.
주님의 말씀처럼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듯이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는 것이 정통신앙이다.
반대로 ‘먼저 이웃을 사랑하고, 다음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것이 기독교 인본주의로 문제가 될 수 있다.
이웃 사랑에 뜨거운 김성혁 장로는 이 시대의 존경의 대상이다.
하지만 ‘이웃 사랑이 그 사람의 신앙과 구원을 평가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신학적 측면에선 논란의 여지가 많다.
이는 그가 당시 자유주의적 성경주석으로 유명한 ‘The International Bible Commentary’(국제성서주석)를 영문으로 읽은 후,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1975년에 교회에 부임한 송기식 목사에 의해 해벌되어 1986년 소천할 때까지 이웃사랑을 계속하여 성결교회 신자에게 이웃사랑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 준 참 성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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