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중앙시조백일장 당선작] 주연 외
■ 중앙시조백일장 1월 당선작
장원
날고 싶은 잠자리 / 주연
요양원 창틀 안에 말라붙은 잠자리가
마주 선 치매 할머니 발길 잡고 속삭인다
날개를 주고 싶다고, 같이 날고 싶다고
출구를 찾지 못해 버둥대며 말라갔을
혼자서는 열 수 없는 문 앞을 서성이다
퀭하게 빠져나간 기억 혼자 담을 넘나들고
꽃 시절 무용담에 시소 타는 퍼즐 조각
꼭 붙든 이름 석 자 어둠 헤칠 단초 될까
허공에 길 잃은 메아리 기우뚱 날고 있다
◆주연_1970년 충남 광천 출생. 제9회 문경새재 전국 시조 공모전 참방, 제2회 방촌 황희문화제 청백리백일장 시조 대상.
차상
목젖이 붉다 / 이종현
요양원 침대에서
기억을 그러안고
허공을 색칠하던,
아줌마 또 왔어!
노을을
움켜잡은 딸
목젖 붉게 덧칠하다
차하
희망자원 앞에서 / 박숙경
흘러내리는 하품을 간신히 달래놓고
막다른 골목까지 몇 바퀴 훑고 나면
무시로 되돌아나간 희망 한 줌 되찾을까
빠진 앞니 움푹이 새어든 파란만장
손가락 마디마디 수없이 박힌 옹이
늑막과 늑막 사이에 압축된 저, 빗금들
굽신거려 발굴한 누군가의 과거를
곱잖은 시선 등지고 손수레에 싣는다
경적과 시시한 연민은 잠시 접어두고서
불법과 합법 사이 아슬아슬한 편견들
최후진술 즐비한 문밖에서 듣는다
당신의 오래된 희망 아직도 유효한가요?
<이달의 심사평>
■ 중앙시조백일장 2월 당선작
장원
빈집 / 강병국
적막이 무서운가
직박구리
섧게 운다
기억의 뒷모습 잔잔히 걸어 나와
댓돌에
침묵으로 앉아
시간 속을 더듬는다
바람에 출렁이는
주인 잃은
해바라기
삭아 내린 철제 대문 하염없이 바라본다
어스름
그렁한 눈빛
고요 속에 잠들고
◆강병국_경상대학교 대학원 이학박사. (사)푸른우포사람들 부회장. 저서로 과학도서 『우포늪』 『순천만』 『한국의 늪』 등.
차상
너머를 본다 / 황혜리
안경을 맞추는데 퍽이나 근시라니
멀리 봐야 하는 일도 동동대고 맘 졸이고
코앞에 닥쳐야지만 그제야 눈치 채는
그 너머의 너머에는 무엇이 기다릴까
안경을 고쳐 쓰며 먼 곳을 바라본다
우리가 약속한 것들 기다리고 있을까
차하
콘센트 / 정상미
오목한 몸에선
결핍의 냄새가 나요
바람은 서늘한 내 몸을 읽어내고
깊어진 구멍 속에서 살결을 갉아 먹어요
젖은 몸으로 성급하게
다가오지 마세요
목마른 우리는 녹아내리고 말 거에요
천천히 들어오세요 놓지 않을 거에요
하루에 몇 번이나
우리가 될 수 있는지
파트너를 바꿔가며 타보는 구름 기차
이제는 빼도 좋아요 전기밥솥 플러그
<이달의 심사평>
새해를 시작한 기운이 충만해서인지 이달의 응모 작품들은 내용이 풍성했다. 응모 편수도 많고 질적 수준도 높았다. 응모자들은 각자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어르고 달래가며 시조의 독창적인 맛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돋보였다. 이번 달에는 대체로 일상적 삶의 다양한 시선을 통해 얻어지는 깊은 사유가 깃들어 있는 작품에 주목했다. 이들의 작품은 우리 삶의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현상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 사색을 보여주고 있다.
장원으로 뽑힌 강병국의 ‘빈집’은 주인이 떠난 빈집의 적막하고 스산한 풍경이 손에 잡힐 듯하다. 한때 따듯하고 정겹게 살았을 가족들의 애환이 얽혀있는 “댓돌”이나 “삭은 철제 대문”이 아직 남아 있긴 하지만, 진한 여운이 맴도는 빈집의 “시간 속을 더듬어”서 “직박구리의 설운 울음”을 짚어내는 솜씨가 비범하다.
차상에 오른 황혜리의 ‘너머를 본다’는 안경이 상징하는 생의 탐구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누구라도 “멀리 봐야 하는 일도 동동대고 맘 졸이”지만 “안경을 고쳐 쓰”고 그 너머를 상상해 보는 일은 독자들의 공감과 사유의 폭을 확대시켜 주고 있다. 차하로는 정상미의 ‘콘센트’를 선한다. 현실적 삶에서 얻어진 지혜와 쉬운 입말을 통해 시상을 유머러스하게 전개하는 솜씨에 눈길이 갔다. 다만, 대체로 작품이 다소 늘어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으므로 내용을 좀 더 다져보면 좋겠다.
끝까지 남아 좀 더 깊이 논의한 작품 중에는 조우리, 유영희, 조긍, 황남희, 강하나, 최종천 등의 작품이 있었다.
심사위원: 염창권·김삼환(대표집필 김삼환)
■ 중앙시조백일장 3월 당선작
장원
개기일식 / 김수형
접시가 깨지자 소리들이 쏟아진다
접시를 단단하게 감싸던 소리가
쨍그랑
부서진 자리
부르르 떠는 꿈
그릇을 꽉 물고 버티는 작은 그릇
등 뒤에서 껴안는 외사랑이 캄캄하다
허공에
푸른 울음을
그물처럼 던지는 새떼
◆김수형_2016년 목포문학상, 2018년 중앙일보 시조백일장 8월 장원, 현대문학 박사 수료. 인문학 강사, 전남 도립도서관 상주작가 역임.
차상
소리를 훔치다 / 허경심
느티나무 잔가지에
젖니 가려운 소리
햄스터 톱밥사이
햇살 틔우는 소리
막내딸, 휘파람을 부네
싹이 또 트려나 보다
차하
소금새 / 류용곤
염전 밭 저린 바다 건너가는 붉은 저녁
깃털하나 낡은 숲에 떨궈내고 날아가는
숨죽인 적막의 어둠 울음 울던 둥지 속
해풍이 불 때마다 큰 파도가 일어서면
몸을 가누지도 못할 멀미에 쓰러져도
다시 또 오뚝 오뚝이 일어서던 저 발자국
누구도 알려준 적 없는 바다 깊은 섬에
여린 발바닥 젖은 채로 그물을 던지며
소금에 절여진 날개 물빛 닦는 새가 있다
<이달의 심사평>
이번 달에도 응모자들의 창작 열기가 뜨거웠다. 이번 달에는 서로 다른 시어들이 부딪치며 내는 신선한 파장을 갖는 작품에 주목했다.
장원으로 뽑힌 김수형의 ‘개기일식’은 일시적으로 어그러진 태양계의 현상을 접시가 깨지는 소리로 치환한다. 이는 곧바로 삶의 현상에 접속되어 ‘등 뒤에서 껴안는 외사랑’으로 심화된다. 둘째 수 종장에서 전체의 의미를 ‘허공에/ 푸른 울음을/ 그물처럼 던지는 새떼’로 공간화시키면서, 내면에서 일렁이는 또 다른 일식현상으로 새롭게 해석해낸다. 시각과 청각의 절묘한 조합을 통해 감각의 파장을 떨게 하는 수작이다.
차상에 오른 허경심의 ‘소리를 훔치다’는 구석구석에 자리하는 미세한 소리를 놓치지 않고 찾아내서 삶의 구체성을 환기한다. 봄날 생명이 돋아나는 느낌을 종장의 ‘막내딸, 휘파람을 부네’에 은근슬쩍 겹쳐 보이는 솜씨가 일품이고 시상의 전개도 자연스럽고 깔끔하다. 차하로는 류용곤의 ‘소금새’를 뽑는다. 염전의 고달픈 삶이 깊숙이 스며있다. ‘소금에 절여진 날개 물빛 닦는 새가 있다’ 같은 표현이 이 작품을 살려내고 있다. 다만 군데군데 다소 상투적 표현이 보이는 것은 좀 더 숙고해 보아야 할 일이다.
끝까지 논의됐던 작품에는 황남희, 박덕은, 권선애, 류홍, 강하나 등이 있었다.
심사위원: 염창권·김삼환(대표집필 김삼환)
■ 중앙시조백일장 4월 당선작
장원
항해일기 / 김나경
올라가고 내려가고 쉼 없이 움직이다가
한숨 돌리느라 갑판으로 나가 본다
눈 끝을 째리고 있는 저 하늘 강한 햇빛
내 손에 들려있는 망치와 스패너가
햇살을 맞받으며 은빛을 내뿜는다
뜨겁게 반짝거린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빛이 강할수록 바다는 깊어진다는
물길의 가르침을 오늘에야 어렴풋이
두어 뼘 휴식이 주는 충전을 비축한다
파도가 헉헉대며 물꽃을 피워 물 때
그 물결 눈높이로 불러보는 서해 바다
수평선 맞닿은 거기, 꿈자리가 봉긋하다
◆김나경 1994년 서울생. 해군 부사관 복무, 현재 간호대학교 재학 중. 고등학교 재학 시절 중앙시조백일장 차상.
차상
감자 / 이주식
낮달 같은 씨감자가 눈 또릿 도사린다
춘분 밝은 햇살 아래 탱그런 몸짓으로
꿈꾸던 초록 함성을 호미 끝에 불러낸다
꽃샘 추위 고비 넘어 애지중지 피워낸 잎
종달이 노래 따라 행복의 키를 키워
이웃집 청보리처럼 내 그늘도 만든다
단오절 북소리에 까투리 홰친 고랑
가지마다 꽃 등 켜고 뿌리 매단 푸네기들
청천에 그림 같은 삶 주고 갈 어미 봄을…
차하
엘리베이터에 갇혀 / 류홍
암흑의 엘리베이터
28분 두려웠다
핸드폰 배터리는
깜박깜박 졸고 있고
막장에 정지된 시간
관棺 속에서 더듬는다
상가의 사람들은
모두들 퇴근했고
화요일은 수요일로
가지 못해 웅크리고
걸어온
계단 하나하나
다 무너져 내린다.
<이달의 심사평>
고심 끝에 김나경의 ‘항해일기’를 장원으로 뽑았다. 이 작품은 ‘망치와 스패너’로 상징되는 항해사의 역동적이고 낙관적인 삶과 튼실한 서정이 무엇보다 돋보인다. 게다가 작품 속에 구사된 언어들이 이와 같은 서정을 뒷받침하면서, 여기저기서 ‘뜨겁게 반짝’이고 있기도 하다. 같이 투고한 ‘역할’ 등의 작품들도 같은 경향을 지니고 있어, 더욱더 신뢰를 가지게 했다.
차상으로는 이주식의 ‘감자’를 뽑았다. ‘항해일기’가 패기 넘치는 역동적인 작품이라면, ‘감자’는 원숙하고도 격조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우선 가락이 안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초록 함성”을 꿈꾸던 씨감자가 “가지마다 꽃 등 켜고” 열매를 달기까지의 과정이 잘 육화된 목소리로 형상화돼 있다. ‘또릿’ ‘탱그런’ ‘홰친’ ‘푸네기’ 등 일상에서 멀어진 고유어들도 인절미에 박힌 곶감처럼 씹는 맛을 더하게 했다. 차하로 뽑은 류홍의 ‘엘리베이터에 갇혀’는 난데없이 당한 공포의 순간을 시적 구도 속에 포착한 작품인데, 좀 더 참신하고도 개성적인 표현을 할 수는 없었을까 아쉬웠다.
심사위원: 염창권, 이종문(대표집필)
■ 중앙시조백일장 5월 당선작
장원
초록 자전거
골목을 달려 나온 탱탱한 바퀴 두 개
누구와 약속한 듯 강둑길 달려간다
코끝에 와 닿는 바람 손 흔드는 물억새
더러는 과속으로 추월을 하다가도
내리막 브레이크 잡아 보면 알 수 있다
급정거 전복하는 삶 움푹 패인 덫 있다
초록의 그리움이 신호등 밝혀 든다
바큇살 반짝이는 지난 궤적 감아 대면
하늘로 치솟는 의지 직립하는 날들이다
◆최여경_1963년 경북 포항 출생. 2012년 울산시민문예대학 시조강좌 수료. 제18회 울산시조백일장 장원. 제26회 울산산업문화축제 시조부문 최우수상.
차상
위미리 동백나무 / 도미솔
얼부푼 그 서러움 침묵으로 풀어냈나
붉은 밤 혓바닥이 동전처럼 떨어져도
된바람 남몰래 삼켜 아침을 궁글린다
거친 과거 품고 산 낮은 돌담 밖에서
오늘은 힘을 모아 뜨거운 힘 게워내
불면이 고인 자리에 봄 햇살 들앉히고
칠흑 같은 현기증 모두 지운 봄처럼
응달로 깊어져 간 아린 상처 어루만져
푸르게 솟구쳐 올라 하늘 속을 밝힌다
차하
그 거리 / 이갑열
염천교를 비껴 돌면 올망졸망 구둣방들
중학교 입학축하로 구두를 맞춰 신던 날
건너간 수십 년 전의 발자국이 서려있다
새 신발에 흙 묻을까 조심조심 걷던 걸음
콧등 시린 옛 시간이 꿈결인 듯 달려 나와
이곳을 지나칠 때면 내 발이 작아진다
<이달의 심사평>
장원에 오른 최여경의 ‘초록 자전거’는 신록의 움트는 기운을 “자전거”를 타는 동적인 율동감에 대유하고 있다. “움푹 패인 덫”과 같은 생의 우여곡절을 함축하면서도 속도감 있게 시상을 전개해 나간다. 이 시에 내재된 긍정의 힘은 ‘자전거 타기’라는 동적인 율동감에 의해 탄력을 받는다. 이윽고 끝에 이르러 현재의 충만한 기운은 “직립하는 날들”이라는 시적인 순간으로 분출된다.
차상으로 도미솔의 ‘위미리 동백나무’ 를 올린다. 피어 있는 꽃잎보다 한숨 뚝 진 꽃에 마음이 가는 것은 이 땅에 뿌려졌을 피의 역사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거친 과거”를 가진 역사이지만 “힘을 모아 뜨거운 힘 게워내”는 동백꽃과 같은 생명력에 의해 치유되어간다는 긍정의 헌사이다. 그러나 관찰자적 입장에서 한 서린 역사를 붉은 꽃잎에 단순하게 대입시킨 것은 상투성에 빠질 우려가 있다. 차하에는 이갑열의 ‘그 거리’를 올린다. 장소애(topophilia)를 환기시키는 “그 거리”에서 나는 “구두를 맞춰 신”으며 성장기를 거쳐 왔는데, 이로 인해 “발자국”은 기억을 환기시키는 관념이자 생애의 표상이 된다. 종결부에서 “내 발이 작아진다”는 단순한 회고적 관점이 시의 함량을 떨어뜨린다.
이밖에도 남궁증, 임다인, 김미영, 이진경 등의 작품이 끝까지 경합을 벌였다.
심사위원: 염창권·이종문(대표집필 염창권)
■ 중앙시조백일장 6월 당선작
장원
천은사, 붉은 점 모시나비 / 남궁증
몸을 치는 쇳소리가 훑고 가는 산비탈엔
구름을 등에 지고 헐벗었던 땅의 궤적
엎드려 평생을 살던 뼈만 남은 쇠가죽
호미로 써내려간 자식걱정 일대기가
꽃샘바람 애가 끓어 밤을 새워 울더니만
멍든 몸 자줏빛 한숨 종루를 흔드는데
이슬의 갈피마다 옷깃여민 범종소리
접었다 펼치는 수만 번의 날갯짓이
붉은 점 눈물방울로
댕그렁!
날아오른다
남궁증_1960년생, 현재 강원도 태백시청 근무, 중앙시조백일장 2018년 6월 장원, 제21회(2018년) 공무원문예대전 시조부문 금상(국무총리상).
차상
유채꽃 / 이기선
여인네 몇 사람이 예저기서 수군대다
이집 저집 저녁상에 반찬으로 오르더니
마침내 뻔한 소문처럼
온 밭에 파다하다
차하
찌를 던져놓고 / 여운
휘감아 내던지면
펄럭이는 하늘자락
삭여온 울분일까
닻줄도 못 내리고
따라온 푸른 집착만
찌를 던져 놓는다
반평생 넓힌 품에
꼬인 줄을 풀어준다
눈먼 길 일으켜줄
은비늘을 기다리며
바람에 흔들릴망정
낡은 뼈대 꼿꼿하다
이달의 심사평
점차 뜨거운 햇볕에 이끌리는 계절이다. 나뭇가지의 터진 틈으로 햇살을 만나듯, 새로운 이름들이 눈에 띈 것은 반가운 일이다.
장원에 오른 남궁증의 ‘천은사, 붉은 점 모시나비’는 어머니의 일대기를 쇠가죽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의 날갯짓에 겹쳐놓는다. “호미로 써내려간” 몸의 역사가 나비 문양에서 울려 나오는 쇠종 소리에 실리기까지 간곡한 몸의 헌사가 있었다. 그 겹의 의미를 “멍든 몸 자줏빛 한숨”으로 읽어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다. 마침내 끝에서 “붉은 점 눈물방울로/ 댕그렁!/ 날아오른다”고 했을 때 초월적 비전마저 느껴진다.
이에 비해 차상으로 선한 이기선의 ‘유채꽃’은 동봉한 다른 작품과 함께 단시조의 함축미를 보여준다. 여인네의 수다와 함께 자란 유채꽃이 “온 밭에 파다”해질 때 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소문도 이미 “뻔한” 것이 되고 만다. 여기서 유채꽃은 인간사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차하에는 여운의 ‘찌를 올려놓고’를 올린다. 꼿꼿한 결기를 드러내는 이 시조는 현존의 부박함을 애써 감추면서도 대상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힘이 있다. 이 밖에도 임정봉, 황남희, 김정애, 이인환 등의 작품이 끝까지 경합을 벌였다. 분발을 당부드린다.
심사위원: 염창권·이종문(대표집필 염창권)
■ 중앙시조백일장 7월 당선작
장원
갱년기 / 황남희
돋은 닭살 간데없다 끓는점 닿는 순간
속속들이 건조해도 기름기는 남아있다
포차 속 통닭 한 마리 섣부른 숨 고른다
솟음치는 맥박과 발그레한 민낯으로
순간 포착 기다리며 지난날을 소환한다
바래진 기억 너머에 펴지 못한 두 날개
시원한 생맥주에 또 한 잔을 외치며
발효된 시간 위에 거품을 걷어낸다
종영된 반세포의 힘 후속편을 꿈꾸며
황남희_1970년 서울 출생. 2016년 수원인문학글판 우수상, 2018년 7월 중앙시조백일장 차하, 수원문학아카데미 진순분 시조교실에서 시조 공부 중.
차상
솥의 전언 / 류영자
귀 두 개 무쇠솥이 세상 얘기 들으란다
발 세 개 거북솥이 잘 버티고 살라 한다
수천 도 불구덩이도 꺾지 못한
저 고집
가마솥밥 먹으려다 찡해오는 가슴 한편
구부정한 거북 등에 여섯 식구 태우셨던
아버지
젊은 한때가 시우쇠로 일어난다
차하
바람개비 / 서기석
그 오랜 날갯짓은
비상을 꿈꾸는 일
발싸심 시심 따라
바람결에 몸 맡긴 채
반생애 밑줄 긋고서
끝내 던진 출사표
이달의 심사평
칠월은 태양의 계절이다. 사과는 사과인 줄 모르고 익는 것처럼 시인도 시인인 줄 모르고 시인이어야 한다고 했다. 장원으로 황남희의 ‘갱년기’를 올린다. 갱년기의 부정적 의미를 원숙한 절정기로 이끌고 있다. 그러므로 “후속편을 꿈꾸”는 “반세포의 힘”으로 “발효된 시간 위에 거품을 걷어낸다”고 말한다. 인생 2막을 실천하려는 건강한 메시지다. 적확한 비유와 대상의 선택, 상황의 설정도 표현 못지않게 마땅한 인과성을 요구한다. 현상의 겉과 속이 조화를 이뤄야 하고 저음에서 흔들리지 않는 형식을 운용하는 능력을 천착해야 한다. 시조는 운율의 미학이다. 3.4조의 형식을 갖춘다고 해서 율격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차상으로 류영자의 ‘솥의 전언’을 선택한다. 눈이 참 밝은 시인이다. 작품 속 인식의 깊이는 얼굴을 숙이고 들여다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어서 우리의 마음을 깊이 파고든다. 무쇠솥과 거북솥의 전언이 마주하여 현실적 공감대를 형성한다. 작위적인 경구가 아니기에 울림 또한 멀리 간다. 다만, “찡해오는 가슴”을 직접 말하지 말고 독자가 찡하도록 만드는 비유가 필요하다. 차하로 당선된 서기석의 ‘바람개비’는 “출사표”를 던지는 그의 “발싸심” 역시 대단하다. 그러나 짧을수록 좋고 좋을수록 어려운 단수의 심원을 잊지 말자.
심사위원: 이종문·최영효(대표집필 최영효)
■ 중앙시조백일장 8월 당선작
장원
사백 년 전 띄운 편지 / 김정애
“남들도 우리처럼 이런 사랑 할까요?”
*월영교 달빛 아래 편지를 읽습니다
사백 년 시공을 넘도록 다 못 부른 당신아!
그리움 올올이 엮어 머리칼로 칭칭 감아
애끓는 마음 녹여 씨 날줄 수를 놓고
마지막 가는 발걸음 자욱 자욱 적셨네
자네와 나 새긴 정 찬찬히 읽으시고
꿈 속에 꼭 오시어 여쭙건 답해주오
누구를 아기와 원이는 아버지라 부를까요?
*경북 안동에 있는 댐. 400여 년 전 무덤 속에서 머리칼로 삼은 미투리와 손편지가 발견
김정애_1968년생. 2017 제주시조지상백일장 우수상, 제주시조시인협회 회원.
차상
바람집 / 김미영
땅에서 솟아났나 하늘에서 떨어졌나
멀쩡한 내 집 마당 삭정이 두서너 개
치우면 치운 그 자리 다시 거기 놓인다.
무심히 올려보니 하늘에 집이 있다
세상에 떠밀렸나 전봇대 끝에 앉아
온몸의 침을 토하여 버무려낸 까치 한 쌍
나뭇가지 천육백 개 들어간 집이라고?
얼기설기 엮어낸 하늘아래 첫 동네
저 허공 무사하기를, 화살기도 날려본다.
차하
백세시대 / 김귀현
‘가족처럼 모신다’는 광고 걸린 요양병원
백세 꿈에 저당 잡힌 또 한 생이 기탁된다
이승의 마지막 주소 적어두는 통과의례
제 나이 헤는 것이 죄짓는 것만 같아
세상사 인연의 끈 스스로 잘라내는
허공에 붙박은 시선이 한순간 흔들린다
세월에 잘린 기억들 꽃잎처럼 흩날리고
얕은 꿈길 어디쯤에서 무너지는 생의 나이테
노을진 서녘하늘에 붉은 별이 돋는다
이달의 심사평
시인은 꿈꾸는 사람이다. 한여름 꿈을 엮은 세 편을 골라 김정애의 ‘사백 년 전 띄운 편지’를 장원으로 올린다. 예나 지금이나 망부가만큼 절절한 시편이 또 있을까만 잘 엮은 수작이다. “남들도 우리처럼 이런 사랑 할까요?”라는 반어적 첫 수부터 시공을 넘은 이승과 저승의 사랑으로 시선을 집중시키지만 애통한 감정의 이내 없이 천연하다. 그 “애끓는 마음”을 다스려 “누구를 아기와 원이는 아버지라 부를까요?”하고 맺으면서도 격한 정조에 휘둘리지 않고 차분한 가락에 담아 형상화 하는 솜씨가 더없이 미덥다. 각 장의 행간을 띄워 독자의 감성을 유인하는 기교도 돋보인다.
차상으로 김미영의 ‘바람집’을 고른다. 전봇대 끝 까치 한 쌍의 집짓기가 땅에 발 딛고 살면서도 허둥대는 인간과 대비되어 적실한 울림을 만든다. “나뭇가지 천육백 개”를 “온몸의 침을 버무려” 지은 집과 “저 허공 무사하기를” 비는 평이한 표현이 엇갈리면서도 아찔하다. 다만 시조쓰기의 묘미와 완성은 종장에 있으므로 너무 서두르지 않았으면. 차하로는 김귀현의 “백세시대”를 선한다. 오늘날 백세시대는 노인들의 역린이다. 건강이 따르지 않으면 고독시대이기 때문이다. “제 나이 헤는 것이 죄짓는 것만 같아” 한마디가 정곡을 찌른다. 우리시대의 풍속도를 여과 없이 그려낸 가작이다. 좀 더 내밀하고 숙성된 사유와 견고한 구조로 심화시켰으면 한다.
심사위원: 이종문, 최영효(대표집필 최영효)
■ 중앙시조백일장 9월 당선작
장원
분리수거
사무실
의자 하나
길 가에 버려졌다
씨름판 이긴 자의
가차 없는
내동댕이
오늘은
의자 하나가
한 남자를 밀어냈다
◆한미숙_1958년 충남 연기 출생. 제17회 향장 여성문예 시부문 우수상, 한밭 전국시조 백일장 차상.
차상
떡 / 조담우
클릭한 입 안으로 번지는 바이러스
치료 버튼 깜짝 놓친 잇몸이 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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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두콩 참깨 밭에 옥수수나무 팥밥까지
바탕화면 열려도 보이지 않는 입쌀의 밥
해킹에 성공한 적이 있는 내용이 야물다
택배로 전송해 온 모정의 압축 파일
저물녘에 불러내어 전등 아래 풀어보면
근심의 1바이트조차 버퍼링 긴 용량이다.
차하
목련, X-ray를 찍다 / 황병숙
사나흘 손 떨리던 목련이 판독됩니다
봄비가 내린 날도 황사 반점 신열 앓고
저 멀리 자식들 안부
가지에 걸렸습니다
바람 든 무릎 꿇어 수만 번 조아린 흔적
밤 새워 향기 키운 나무만 매만집니다.
검버섯 잎새 사이로
어머니가 절뚝입니다
둥그런 그늘 한 점 속잠 든 목련 품고
딸각, X-ray 형광판 제 할 일 마칩니다
오후가 기울어 갑니다
자식들은 알지 못한
<이달의 심사평>
단시조는 시조가 지닌 미학적 특성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대적 요청인 세계화에도 가장 알맞다. 그런데도 그동안 단시조는 시조계의 대세에서 크게 소외돼 왔으며, 중앙시조백일장에서도 단시조를 장원으로 뽑은 사례가 거의 없었다. 이번 달 장원으로 한미숙의 단시조인 ‘분리수거’를 뽑았다. 작품 자체가 빼어났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상황에 대해 문제 제기도 하고 싶었다. 이 작품은 단시조의 멋과 맛을 역동적인 가락으로 군더더기 없이 보여주고 있는 가편(佳篇)이다. 무엇보다 이해하기가 쉬운 데다, 3장 6구의 작은 그릇 속에다 승자에 의해 가차 없이 내동댕이쳐진 ‘해고자의 비애’라는 매우 무거운 현실문제가 아주 날카롭게 포착돼 있다. 특히 “오늘은/ 의자 하나가/ 한 남자를 밀어냈다”는 종장에 방점을 찍게 했다.
차상으로는 조담우의 '떡'을 뽑았다. 이 작품은 ‘떡’이 지닌 이미지를 ‘떡’과는 매우 거리가 먼 최첨단 컴퓨터 용어들을 동원하여 표현하고 있는 매우 참신한 작품이다. 하지만 생소한 용어들이 지나치게 많이 구사돼 다소 가볍게 느껴지는 데다, 시조의 리듬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부분이 눈에 띄기도 한다. “해킹에 성공한 적이 있는 내용이 야물다”라는 구절은 특히 그렇다. 차하로 뽑은 황병숙의 '목련, X-ray를 찍다'는 황사 속의 목련에다 늙으신 어머니를 겹쳐놓은 참 애틋한 작품이다. 무난하긴 하지만, 제 4음보의 글자 수가 5자로 구성된 경우가 많아, 율동적 긴장감을 놓친 점은 아쉽게 느껴졌다.
심사위원: 이종문·최영효(대표집필 이종문)
■ 중앙시조백일장 10월 당선작
장원
마중 / 설경미
요구르트 두 개가 마루 끝에 놓여 있다
빈 집을 살피다가 빨랫줄에 매달고 간
코숭이, 마당에 내려 걷어내는 저 고요
사람이 그리워서 대문에 귀를 걸고
십 분도 놓칠세라 꽃잎처럼 움켜쥔 채
이레 중 단 하루만은 기린목이 되는 여든
자세를 바꿔 앉자 삐걱 우는 대문 새로
호박 넝쿨손이 앞서 나가 반긴다
무더기 은방울꽃이 피고 있는 블라우스
설경미_ 1968년 경주 출생. 경주문예대학 연구반 회원. 2018년 중앙시조백일장 5월 입상. 2018년 제21회 대구시조 전국공모전 입상
차상
검은 달 / 정두섭
은행도 참 별난 은행* 냉골에 불 들이면
골목은 짖어대고 망구는 악다구니
골백번 헤아렸지만, 딱 한 장! 모자라야
구들장 짊어지고 언덕배기 기어오른
구멍 숭숭 낮달이 꿍친 자리 메워준다
그깟 거 없어도 살지마는, 삭신이 쑤셔설랑
징하게 오래 사는 메리야 밥 묵자 밥
마냥 신난 혓바닥이 쭈그렁을 핥을 때
참말로 뜨신 눈총들, 분화구마다 활활
* 달동네 독거노인들에게 연탄을 무료로 나눠주는, 밥상공동체 연탄은행.
차하
치매 / 윤종영
주인 잃고 정신 줄
놓아 버린 몽당 빗자루
헛간 앞에 웅크린 채
햇살만 쬐고 있다
지금은 어느 기억을
쓸어내고 있는 걸까
이달의 심사평
가을의 기운을 느껴서인지 투고 작품이 많았다. 많은 작품이 노인 또는 노령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주제는 급속하게 진행되는 우리 사회의 화두임이 틀림없다. 시조가 당면한 사회의 화두에 천착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장원으로 뽑힌 설경미의 ‘마중’은 일주일에 하루 가족을 만나는 ‘기린목이 된’ 여든 노인을 그리고 있다. ‘코숭이가 걷어내’는 마당의 고요와 ‘대문에 귀를 거’는 노인의 정경이 시리고 아프지만, 마지막 수 중장과 종장에서 ‘호박 넝쿨손’과 ‘무더기 은방울꽃’의 만남으로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솜씨가 비범하다.
차상에 오른 정두섭의 ‘검은 달’은 가난한 노인이 살아가는 구체적 현장을 붙잡고 있다. 거칠고 투박한 시어들을 밀고 나가는 힘이 있다. ‘낮달이 꿍친 자리 메워주’는 짙은 서정성과 ‘혓바닥이 쭈구렁을 핥’는 힘든 현실성을 대비시키는 치열함이 엿보인다. 함께 투고한 ‘등용문’도 풍자와 해학이 뛰어났으나 직설적 토로가 다소 걸렸다.
차하로는 윤종영의 ‘치매’를 뽑는다.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의 삶과 닳아질 대로 닳아져 뭉툭해진 ‘몽당 빗자루’의 상징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끝까지 남아서 논의됐던 작품 중에는 김미경, 김순영, 김재용 등이 있었다. 더욱 분발하여 좋은 결실을 맺기를 당부한다.
심사위원=김삼환·최영효(대표집필 김삼환)
■ 중앙시조백일장 11월 당선작
장원
느루 / 김현장
노을빛 짙은 갈대숲 지나는 바람 무리
그대 종종걸음 서둘지 마세요
갯벌 속 계절의 향기가 숨어들고 있어요
꽃구름 슈크림처럼 넌출 거리며 오고 있네요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면
강바닥 느린 유속으로 가없이 흐르기로 해요
거꾸로 매달린 종유석이 자라나고
갓 베인 시간들은 논바닥에 쓰러져
늦가을 햇살 바람을 온몸으로 즐기네요
김현장_1964년 전남 강진 출생. 전남대학교 수의학과 졸업, 강진 백제동물병원장, 경기대학교 한류문화대학원 시조창작 전공 석사 재학 중. 강진 백련 문학회원
차상
꽁치의 활극 / 최종천
칼을 거꾸로 잡고서
견디는 바다가 있다
검거나 푸른 무대
소금색은 빛난다
짠 것은 힘이 강하다
아! 살거나, 죽거나
차하
결과지結果枝 / 권선애
가지에 달린 꽃눈이 이듬해를 바라본다
겨울을 이겨내고 꽃피려다 쇠락한 몸
준비된 줄기가 없어 새봄이 아득하다
손에 잡힌 겨드랑 눈 악성으로 번질 때
늘어난 가지 사이로 파고드는 칼바람
한쪽을 잘라버려도 꽃 피울 수 있을까
반값에 사놓았던 철 지난 꽃무늬 옷
옷걸이에 매달려 웃는 계절 기다린다
아직은 개화를 위해 견뎌야 할 헛가지
이달의 심사평
가을의 끝자락에서 오래된 이름들을 만나 반가웠다. 풍성한 결실을 위해 새로운 얼굴들의 응모를 기대했던 여운이 자못 아쉽다. 다가올 겨울은 새로운 도전을 위해 예비된 계절이다.
장원으로 아픈 기억의 우리말을 느림의 미학으로 재현한 김현장의 ‘느루’를 올린다. “그대 종종걸음 서둘지 마세요”로 시작되는 청유형의 말부림으로 애달픈 생민의 삶을 노래로 승화시켰다. 평이하고 눈에 익숙한 문장도 다시 읽으면 감미롭다. “갓 베인 시간들은 논바닥에 쓰러져”와 같은 표현들의 언어적 감각과 전개로 조탁 능력이 돋보인다. 흩어진 정적인 심상을 일관성 있게 엮었으면.
차상으로는 최종천의 ‘꽁치의 활극’을 선한다. “카를 거꾸로 잡”은 초장의 도발적 문장이 비장한 세태를 은유하고 있다. 이것이 종장의 “아! 살거나, 죽거나” 맞장구쳐 절묘한 공감대를 형성한다.
차하로는 권선애의 ‘결과지(結果枝)’를 택한다. 역시 눈이 보배다. 일상에서 바라본 “꽃눈”이 자아성찰로 승화해 꽃을 피웠다. 긴 호흡은 숙성된 반전이 필요충분조건이다. 언어에도 빛깔과 질감이 있다. 빼놓을 수 없이 리듬과 춤사위를 갖춘 것이 시조다. 하나를 놓치면 자칫 미완이다.
심사위원=최영효·김삼환(대표집필 최영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