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11) - 2023 .08. 18(금) |
11차 순례는 서울 대교구다. 처음 순례를 계획할 때는 지역의 원근이나 계절을 고려한 전체적인 계획이 있었으나, 상황에 따라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늘어났다. 이는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번에는 서울에 사는 친구의 도움을 받기 위해 서로 가능한 일정을 짜다보니 전체 계획과는 관계 없이 훌쩍 뛰어 서울로 가게 된 것이다. 서울 대교구에는 25곳의 성지가 있다. 비록 승용차 운전이 부담이 되어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서울에 가더라도 안내자 없이 찾아다니기란 어렵다. 친구와 맞춘 날짜가 원래는 8월 31일(목)이었는데 친구 사정으로 아직 더위가 만만찮은 8월 18일(목)로 약 2주간을 앞당기게 되었다.
참여자는 나와 베드로 형제와 안토니오 형제, 이렇게 세 명이다. 06 : 00 성당에 모여 늘 하듯이 성모님께 인사를 드린 뒤 바로 신경주역으로 출발했다. 소나기가 예보되었지만 출발할 때는 구름이 잔뜩 끼어 그렇게 무더울 것 같지가 않다. 입추, 말복이 지난 시기라 심한 더위는 없을 거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어본다.
신경주역에 도착하여 주차를 하고 시간 여유가 있어 베드로 형제가 정성껏 준비해 온 샌드위치로 아침 식사를 때웠다.
06시 57분 출발. 평일이라 승객도 한산하여 정말 편안하게 2시간 남짓 소요된 09시 09분 정시에 서울역에 도착. 고맙게도 이미 친구가 마중 나와 있었다. 신광철(모세) - 고등학교 동기로 50년도 넘는 막역지기(莫逆知己)이기도 하지만 30대 젊은 시절부터 가족 모임을 해 온 터에 아내들 끼리 더 인정을 나누는 사이이다. 일반적으로 가족 간의 모임의 잘되고 못됨은 남편들보다 아내들에게 달려있다고 하지 않는가? 친구는 매우 열성적인 천주교 신자로, 코로나 사태를 무릅쓰면서도 지난 6월에 이미 전국 성지순례를 끝낸 열정파이기도 하다.
명동 주교좌 성당(사적258호) - 한국 천주교의 심장부 |
맨 먼저 간 곳은 명동성당.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길 74번지에 있다. 생뚱맞게도 ‘명동 44번지’라는 60년대 고전영화 제목이 떠오른다. 커다란 붉은 제목 아래 주인공 신영균의 얼굴이 역시 커다랗게 부각된 영화 포스터가 생각난 것이다. 당시에 ‘명동’하면 조폭의 소굴이었기에 영화의 내용은 보지 않았어도 짐작이 간다. 성지 ‘명동성당’과는 전혀 걸맞지 않는데 기억이란 이렇게 황당한 면이 있다.
어쨌든 한국 천주교회 상징이며 최초로 탄생된 신앙공동체 터와 가까운 성지에 첫 순례를 시작하는 것이 매우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서울역에서 지하철로 두 코스를 타고 가서 명동 역에 내려서 걸었다. 이렇게 서울 시가지를 걸어본 지도 참 오랜만이다.
성당이 있는 언덕 입구에 이르니 거대한 건물이 막아선다. 가톨릭회관이다. 가톨릭회관은 원래 가톨릭중앙의료원(CMC)의 모태가 되는 명동 성모병원으로 지어진 건물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리모델링이 되어 각종 가톨릭 단체 및 업체들이 입주해 있다.
가톨릭회관 약간 오른쪽으로 언덕 계단길이 나 있는데 이것이 명동성당으로 오르는 길이다. 입구에는 서소문 순례길과 그 첫 번째 성지인 명동 대성당 안내판이 가지런히 서 있다.
명동성당은 교회 창설 초기 신앙공동체인 명례방과 가까운 곳이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가 1845년 귀국하여 활동하던 돌우물골(현 중구 소공동)과도 가까운 거리에 있다.
명동성당 들머리에는 2022년 6월에 세운 김수환 추기경 탄생 100주년 기념비가 서 있다. 정호승 시인이 쓴 시를 새긴 비로 김수환(金壽煥·1922~2009년) 추기경을 ‘바보 성자’에 비유했다. 김 추기경은 노년에 “사람들이 잘난 척을 하고 살아가지만 결국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며 스스로를 ‘바보’라 불렀다.
바보가 성자가 되는 곳 /성자가 바보가 되는 곳/이라는 구절이 인상적이다.
마치 ‘십자가의 길’을 오르듯이 언덕길을 한 발짝 한 발짝 내디디다가 다 오르기 직전 위쪽을 바라보니 장엄한 건물이 나타난다. 명동성당 대성전이다. 가까이 올라가서는 사진에 다 담기가 어려워 지나가는 순례객들에게 부탁하여 일단 기념촬영을 하였다.
성당 마당에 들어오기 전 계단 좌측에 성모 동굴이 있다. 루르드의 성모상을 안치한 감실 형태의 동굴로 1960년 8월 27일, 당시 국내외적으로 혼란한 시기에 우리나라의 평화를 지향하며 노기남 대주교에 의해 봉헌되었다고 한다.
성모 동굴을 지나 계단으로 오르다가 성당 마당으로 오르기 직전 오른쪽에 가장 먼저 나타나는 붉은색 건물 - 바로 천주교 서울대교구 역사관이다. 아무래도 성당의 역사를 미리 아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아 맨 먼저 역사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역사관 - 명동성당의 약사
서울대교구 역사관 건물은 명동성당 완공보다 8년 앞선 1890년에 주교관으로 먼저 신축한 건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벽돌 건축물의 하나이다. 처음에는 주교관 및 경리부 건물로 사용되다가 2018년 6월 25일 서울대교구 역사관으로 새로이 문을 열고 한국 천주교의 태동 시기로부터 오늘의 서울 대교구가 있기까지의 변천사를 다양한 유물과 자료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2층으로 된 벽돌 건물인데 1층 전면에는 예수성심상이 마치 허수아비 같은 모습으로 팔을 크게 벌려 방문객을 맞아준다. 이 성상은 가톨릭 신자이자 유명한 조각가인 최종태(요셉)가 제작했는데 2014년 보수 때 성당 앞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은 1779년 겨울 경기도 광주(廣州) 천진암에서 이벽,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등 젊은 남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열렸던 강학회였다. 처음에는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학문적으로 접하다가 나중에 천주교 신앙으로 승화되었다.
공식적인 한국 천주교의 역사는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온 1784년을 기점으로 잡는다. 처음에는 서울 수표교 부근 이벽의 집에서 교리 공부와 성사가 이루어지다가 나중에는 명례방에 살던 통역관 김범우의 집으로 옮겨서 본격적인 신앙공동체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명례방 공동체는 오래가지 못했다. 1785년 봄, 형조의 탄압으로 일어난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결과 김범우는 멀리 귀양을 가고 남은 명례방 공동체는 해체되었다. 그러나 민중 속에 퍼진 신앙 활동은 크고 작은 박해 속에서도 꾸준히 이어졌다. 하지만 1886년에 시작되어 수년 간 계속된 병인박해로 인해 교회조직은 송두리째 와해되고 10여 년간 절망의 겨울을 맞이했다.
그 후 1882년 한미수호 조약의 체결로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될 희망을 예견한 조선대목구 제7대 교구장 겸 명동성당 초대 주임 블랑 주교에 의해 명동성당의 건립 계획이 차근차근 진행됐다. 곧 최초의 신앙공동체였던 명례방 부근의 이곳 높은 종현 언덕을 성당 터로 예정하고 매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블랑 주교는 이곳에다 우선 종현학당을 설립, 운영하면서 예비 신학생을 양성하는 한편 성당 건립을 추진하여 1886년 한불(韓佛)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이듬해인 1887년 5월, 대지를 구입을 완료하고 그 해 겨울부터 언덕을 깎아 내는 정지 작업을 시작했다.
이 때 신자들은 손수 팔을 걷어붙이고 정지 작업에 나섰는데 블랑 주교는 파리 외방 전교회에 보낸 보고서에서 이들의 신앙의 열성에 대해 크게 칭찬을 했다. 당시 교우들은 12월과 1월의 큰 추위를 무릅쓰고 무보수로 일을 하러 나왔는데 그 열성이 너무 뜨거워 추위로 언 손을 녹일 정도였다고 했다.
그러나 신자들의 열성으로 시작된 명동 대성당의 정지 작업은 풍수지리설을 명분으로 내세운 조정의 성당 건립 반대에 부딪쳐 좌초 위기를 맞았다. 당시 국왕 고종은 성당이 왕궁보다 더 높은 자리에, 그것도 왕궁보다 더 높은 첨탑 건물이 올라가는 것을 좋지 않게 여겼다. 더욱이 조선왕조 역대 왕들의 어진(御眞)을 모신 영희전(永禧殿)과 가까워서 성당 건립으로 인해 영희전의 풍수(風水)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구실로 성당 건립의 중단을 요구했다. 하지만 천주교 측에서는 이러한 요구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에 조정은 금교령을 발표하며 다시 천주교를 탄압했는데 이로 인해 성당 건립은 지연되었다. 밀고 당기는 가운데 결국 4년 뒤인 1892년 5월 8일에 가서야 기공식을 갖는다. 그 사이 초대 주임 블랑(Blac) 주교가 1890년 선종하고 두세(Doucet)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성당 설계와 공사의 지휘 감독은 코스트(Coste) 신부가 맡았는데 그는 현 중림동 약현 성당과 용산 신학교의 설계와 감독도 맡았었다.
그러나 1896년, 코스트 신부 또한 완공을 보지 못한 채 선종하고 그 뒤를 이은 3대 주임 프와넬 신부에 이르러서야 성당 건축이 마무리 되었다. 그리하여 1898년 5월 29일 성령강림 대축일에 8대 조선 교구장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역사적인 축성식을 가졌다. 기공 후 무려 16년 만에 완공된 것이다. 장엄하고 아름다운 명동 성당은 순수한 고딕 양식 건물로 그 건축문화적인 가치가 높이 평가되어 1977년 11월 22일 사적 제258호로 지정되었다.
1891년 11월 명동성당의 건물을 짓기 전에 이미 약현성당을 분가시키고 이어 이후 1927년 백동성당(현 혜화동성당)을 분가하고, 1939년 문화관을 신축하였으며, 1945년 광복을 맞아 성당 이름을 종현성당에서 명동성당으로 변경하였고 1949년 가회동 성당을 분가했다.
위와 같은 명동성당을 비롯한 천주교 초기 역사 자료가 보존 전시된 곳이 천주교 서울대교구 역사관(일명 사도회관)이다. 1890년 명동성당보다 먼저 건립된 이 건물은 처음엔 한국가톨릭교회의 주교관이었다. 천주교 서울 대교구는 2018년 이 건물을 새롭게 단장하여, '천주교 서울대교구 역사관'으로 새롭게 선보였다.
해설자의 안내로 약 40분간 내부를 둘러보았다. 전시관(사도회관)은 '공간의 역사(The Memory of Space)', '시간의 역사(The Memory of Time)', '사람의 역사(The Memory of Person)'로 나누어 전시되어 있었다. 곧 서울이라는 '공간적 역사' 와 서울대교구의 탄생과 변천을 아우르는 '시간의 역사', 그리고 이를 이룩한 '사람의 역사'가 함께 깃들어 있다.
전시 내용은 1890년대 이래 현재까지 성당 역사를 나타내는 패널, 초대 브뤼기에르 주교로부터, 앵베르, 페레올, 베르뇌, 다블뤼, 리델, 블랑, 뮈텔, 라라보, 노기남, 김수환, 정진석 주교까지 역대 서울대교구 교구장들의 유품, 초기 교우들의 신앙 활동 자료 등 매우 다양했다.
사실 명동성당의 역사가 바로 한국 천주교의 역사이다. 아쉬운 것은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기억에 남길 좋은 자료를 카메라에 담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 유수의 박물관에 가도 플레시를 사용만 하지 않으면 사진 쵤영이 허용된다. 신성한 성인의 유해는 그렇다 치더라고 역사를 정리한 패널이나 사진자료도 촬영을 못하게 하는 것은 지나치다. 그러다보니 관람하고 나서 문을 나서는 순간 관람 기억이 사라지고 만다.
여기서 몇 곳의 순례기념 스탬프를 찍는데 김범우의 집터, 한국천주교회 창립터(이벽의 집터, 한국천주교 순교자 124위 시복터 등이다.
명동성당 대성전
명동성당 대성전과 지하성당으로 걸음을 옮긴다. 가까이서 보는 대성당의 아우라는 저절로 고개를 숙여질 만큼 압도적이다. 성전의 평면은 라틴 십자가형이고 높이는 23m, 종탑의 높이는 46.7m. 모든 장식적 요소를 배제한 순수 고딕양식이다.
주일이 아니라서 개방되지 않아 내부를 보지 못할까 걱정을 했는데 입실해 보니 평일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미사의 끝부분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대목이라 미사가 끝날 때까지 잠시 기다려 성당 내부를 둘러보았다.
성당 외부가 장식적 요소를 배제한 순수 고딕양식이라면 성당내부는 아치형 복도, 스테인드 글라스 등으로 공간의 미를 살렸다. 또한 곳곳의 성화, 성상, 등의 종교 예술품은 명동성당의 종교적 예술적 가치를 더해 준다.
성당내부
성당 안의 정면에는 세로로 길다랗게 드리워진 스테인드 글라스 아래에 성모자상이 있고 그 밑에 14사도의 채색 입상이 곡면의 벽면에 빙 둘러 그려져 있다. 이는 12사도와 바오로 사도와 바르바나라고 한다. 마치 석굴암 주실의 둘레 불상들과 같다. 이 사도 벽화는 장면 박사의 동생이자 서울대 미대의 초대 학장을 지낸 장발 선생이 제작하였다.
사도 벽화 밑 중심에 제대가 있고 그 좌우에 청, 홍의 천사상이 있다 제대는 둘이 있는데 벽쪽의 돌 제대와 그 앞쪽의 나무 제대이다. 돌 제대는 사제가 앞벽에 붙은 제대를 향하여 드리는 트리엔트식 미사를 드릴 때 사용했던 것인데 지금은 감실로 사용되고 있고, 그 앞의 나무 제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 사제가 신자들을 보고 미사를 드리게 되어 새로 제작한 것이다. 제대 앞 제단의 경계 지점에는 난간 모습의 목조 간막이 조각이 있다.
그리고 큰 제대 왼쪽(출입구 기준)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상과 부속제대, 79위 복자화가 있고 오른쪽에는 성 베네딕토 상과 복자제대, 명례방 공동체 화가 있다.
지하성당 - 순교자 묘역
지하 성전은 대성전의 지하에 있다. 일명 지하 묘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하 묘역에는 1900년부터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치하기도 하고 옮기기도 해 왔다. 1900년에는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유해를, 1901년에는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유해를 용산 신학교로부터 받아 지하성당에 모셨고, 1909년에는 왜고개에 매장되어 있던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치했다.
세부적으로 보면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입국해 기해년(1839) 9월 12일에 순교한 제2대 조선목구장 성 앵베르 주교와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는 새남터에서 군문효수의 형을 받은 후 한강변 모래밭에 매장되었다. 순교한 지 약 20일 후 7-8명의 신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세 순교자의 유해를 거두어 지금의 서강대학교가 소재한 노고산에 4년 간 매장했다. 그 후 유해는 1843년에 삼성산으로 이장되었다가 1901년에 이곳으로 모셔졌다. 시복을 앞둔 1924년에 무덤이 다시 발굴되어 이들의 유해는 대부분 로마와 파리외방 전교회 등으로 분배되고 이곳에는 현재 그 일부만이 모셔져 있다.
이들 성인 외에도 지하 묘역에는 한국 천주교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1805-1839년), 성 김성우 안토니오(1795-1841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 그리고 이 에메렌시아(?-1839년)와 무명 순교자(?-1839년) 1명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3월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남종삼 요한과 홍봉주 토마스의 시신은 왜고개에 매장되었다가 절두산 순교 기념관 성해실로 모셔지기 전 1909년 이곳 지하 묘소에 잠시 머물러 있기도 했다.
지하 성당도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그냥 보기만 했는데 몇 군데를 베드로 형제가 찍어 휴대폰에 담았다. 그 중 하나는 엥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의 유해를 안치한 묘실인데 한복 입은 성 김대건 신부가 오른손으로 십자가를 들고 왼손으로는 ‘교우들 보아라’라는 순교 전 마지막 편지 제목이 쓰여진 종이를 들고 서 있다. 제대 앞에는 촛불이 있는데 지폐를 넣으면 불이 켜지도록 특수 제작한 것이다.
이렇게 외국인 신부를 포함한 5성인, 4순교자의 유해가 안치된 지하 성당에는 벤치가 마련되어 순교자를 위해 기도하고 묵상할 수 있다.
밖으로 나와서 지하성당 앞에 있는 성 김대건 신부 흉상과 명동성당을 안내하는 책 모양의 조형물을 본 후 성당 뒤뜰로 갔다.
성전 건물 뒤뜰 성모동산에 있는 원죄없이 잉태하신 성모님은 명동 성당의 주보 성인이시다. 이 성모상은 1948년 명동성당 성전 축성 50주년 기념으로 프랑스에서 제작하여 들여와 봉헌한 것이다. 성모상의 하단에는 ‘성모무염시태’ 아래 ‘성총을 가득이 닙으신 마리아여’하는 예스러운 구절이 그대로 있다.
이제 주요한 곳의 순례는 마쳤다. 이밖에도 영상센터, 문화관 꼬스트홀, 교구청 본관, 패밀리아 채플, 교육관, 별관 등 많은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시간이 넉넉하면 더 꼼꼼히 둘러볼 곳도 많지만 나오는 길에 몇 군데 시설을 카메라에 담으며 성당 밖을 향하였다.
영상센터는 가톨릭 학교법인 계성학교(초, 중, 여고) 터인데 지금은 폐교되거나 옮겨가고 건물만 남아서 활용되고 있다. 영상센터뿐만 아니라 상설 고해소, 문화학교, 거기다 무료급식소까지 겸하는 것을 정문에 붙은 안내문을 통해 알 수가 있다.
명동성당 문화관은 준공한지 60년이 넘는 낡은 건물인데 이를 리모델링하여 문화관으로 현재 사용하고 있다. 문화관 2층에 있는 꼬스트 홀은 476석 규모의 클래식 음악 전용 연주홀로 종교를 초월하여 일반 음악인들에게 대관한다. 홀의 명칭은 명동성당을 설계, 건축한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코스트(1842-1896) 신부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붙였다. 패밀리아 채플은 성당 오르기 전 역사관 앞쪽에 있는 프란치스코 홀에 있는 인기 있는 결혼식장이다.
명동성당을 나오면서 생각한다. 명동성당의 건립은 단지 성당 하나가 처음 생겼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명동성당의 건립으로 지난 1세기 동안 박해를 받아 온 한국 천주교가 완전히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고 이는 순교자의 고귀한 피의 대가였다. 그리고 우리의 눈에 생소하게 비친 뾰족한 종탑은 신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한국인들에게 평화의 상징으로 이해되어 왔으며, 60-70년대에는 독재에 저항하고 국민의 권리를 수호하는 민주화의 요람이었다. 따라서 한국의 민주주의 확립에 빛나는 역할을 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벌써 11시. 이제 다음 일정을 이어가야 한다. 다음 코스는 서울대교구 역사관에서 찍은 스탬프 중 한국 천주교의 시작과 관계있는 김범우의 집터와 한국 천주교의 창시자 이벽의 집터로 간다.
날씨는 소나기가 예보된 터라 습기가 많아 무덥다. 먼저 김범우의 집터를 향한다. 조금 걷다보니 동상 하나가 나타난다. 나석주 의사다. 1926년 12월 나석주 의사는 우리 경제를 예속화하기 위해 설립한 악명 높은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로 실패하고 일본경찰과 총격전 중 자결했다. 그 동양척식회사 자리가 바로 이곳 을지로의 KEB 하나은행 부근이다. 이처럼 서울은 거리마다 근대사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다.
조금 후 성지 안내 표지판이 하나 나타난다. 김범우 집터이다.
김범우의 집터 - 한국 천주교 초기의 공동체 터 |
김범우(1751-1787)는 누구인가?
1751년 역관(譯官) 김의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784년(정조 8) 이벽의 권고로 천주교에 입교, 이승훈(李承薰)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 토마스. 두 동생을 입교시키고, 자신의 집에서 천주교 집회를 자주 가지는 등 열렬한 신자가 되었다. 1785년 이벽 ·이승훈 ·정약전(丁若銓) ·정약용(丁若鏞) ·정약종(丁若鍾) ·권일신(權日身) 등 남인(南人) 학자 십여 명이 명례방 그의 집에 모여 예배를 보다가 당국에 발각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양반가문 출신이었므로 방면(放免)되었으나, 중인(中人) 신분인 그는 혹독한 고문을 받고 밀양 단장(丹場)으로 유배되었다. 유배 후 고문의 후유증으로 약 2년만인 1878년 9월만 죽었다. 이는 힌국천주교 최초의 희생자임을 뜻한다.
김범우의 묘는 현재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용전리 205-1(삼랑진읍 사기점길 50-100) 해발 670m 만어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
명례방과 명례방 공동체
명례방(明禮坊)은 조선시대 한성 5부에 속하는 남부 11방(坊) 가운데 하나로, 오늘날 남산 아래의 지역과 을지로 입구에서 명동성당 부근까지를 포함하는 행정구역의 명칭이었다. 김범우의 집은 명례방 안에서도 궁중 음악을 관장하던 관청인 장악원(掌樂院) 앞에 있었다.
명례방 공동체(明禮坊共同體)는 한국천주교회 창설 직후 명례방의 김범우의 집에 있었던 초기 신앙 공동체이다. 이곳이 한국 천주교회사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게 되는 시기는 1784년 겨울이었다. 명례방에 앞서 수표교(현 서울시 중구 수표동)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벽, 권일신, 정약용, 최인길, 지황 등이 세례를 받고 신앙 활동을 해왔다. 그러다가 이벽의 집 대신 더 넓은 곳을 찾게 되었고 그곳이 명례방 김범우의 집이었다. 이로써 명례방 공동체는 이벽의 집에 이어서 한국 천주교회의 두 번째 신앙 공동체로 탄생되었다. 당시 이곳에 모여 집회를 갖던 신자들은 이승훈과 이벽을 비롯하여 권일신, 정약용, 최인길, 지황, 최창현, 정약전, 이존창 등이었다. 또 김범우는 집주인으로서 신자들에게 《천주실의》, 《칠극》과 같은 교회 서적을 보관하고 있다가 빌려 주거나 교리를 전파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명례방 공동체'는 이듬해 1785년 봄까지 유지되었으나, 형조의 아전들에게 공동체의 집회가 발각됨으로써 중지되었다. 이 사건이 바로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다. 한국 천주교회가 얻은 최초의 시련이었다. 이 결과 김범우는 유배되어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적소(謫所)에서 죽고 말았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했다. 김범우의 죽음은 앞으로 한국 교회가 겪게 될 수많은 '피의 세례'를 예견해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로 인해 수많은 신앙의 열매를 맺게 한 계기도 되었다. 한국 교회의 주춧돌이 순교자들의 피라면 그 주춧돌은 바로 김범우와 같은 초기 희생자가 놓은 것이다. 을사년 사건 이후 명례방 공동체는 오랫동안 한국 교회사에서 잊혀지게 되었다.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어느 기록에서도 명례방이란 이름 석 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섭리는 결코 명례방을 영원한 역사의 단절로 남겨 두지 않았으니, 박해가 끝나 갈 무렵인 1882년부터 이곳은 한국 천주교회의 중심지로 다시 터전을 잡게 되었다.
당시 한국 교회 건설을 책임지고 입국한 제 7대 조선 교목구장 블랑(Blanc) 주교는 명례방 인근 언덕에 대성당의 터전을 마련하고자 1882년부터 일대의 부지를 매입하고 성당 건립에 착수하여 우여곡절 끝에 1898년, 마침내 한국천주교의 상징 명동성당이 높이 솟아나게 되었다.
현재 KEB 하나은행 본점 앞 잔디밭에는 ‘명례방 김범우의 집터’ 표지석이나 표지판은 볼 수 없고 대신 장악원 터 표지석만 있다. 앞으로 성지 표지석이 세워지길 기다린다.
다음은 이벽의 집터다. 역시 걸어서 간다.
이벽의 집터 - 한국 천주교의 창립 터 |
한국 천주교 창설자라고 부를 수 있는 광암 이벽의 집은 수표교 부근이라고 기록으로 전한다. 수표교는 청계천에 있었던 7개의 다리 중의 하나이다.
청계천(淸溪川)은 오늘날에 와서는 작은 개천처럼 여겨지고 그나마 대부분 복개가 되었지만 실제 조선 시대에는 한양을 관통하는 하천으로 해마다 홍수의 피해를 가져다 준 골치 아픈 존재였다. 따라서 역대 왕들이 청계천 치수를 위한 노력이 기록에 많이 남아 있다. 이들 중 청계천을 정비에 성공한 대표적인 지도자는 조선 21대 영조이며 오늘날의 이명박 대통령이다.
수표교는 단순히 물을 건너는 다리일 뿐 아니라 홍수에 대비해 하천의 수량(水量)을 재는 역할을 한 다리였다. 수표교(手票橋)란 이름도 수중주석표(水中柱石標)에서 따온 이름이다. 수표교의 원래의 위치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수동 20번지와 중구 수표동 40번지 사이에 있었으나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로 인해 장충단공원(중구 장충동)으로 옮겨지고 보물로 지정되었다. 원래의 자리는 수표동, 관수동 등으로 이름만 남았다.
약 10분 정도 걸으니 정비된 청계천이 나타난다. 이제는 지난날의 슬럼가의 모습이 아니라 맑은 물이 흐르고 인공 폭포가 떨어지고 왕의 행렬도가 그려져 멋진 풍광을 자아낸다.
장통교(長通橋)라는 다리를 건너 성지 표지석이 있는 현장에 도착했다.
이벽(李檗, 세례자 요한, 1754∼1785?)
한국 천주교회 공동체 성립 주역.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덕조(德操). 호는 광암(曠菴)이다.
이벽은 나주 정씨(羅州丁氏) 정약현의 자형이다. 두 집안이 인척 관계를 맺게 되자, 이벽은 자연스럽게 정약현의 아우들인 약전과 약용, 약종과도 가깝게 지내면서 학문을 교류하였다.
이벽은 1779년 권철신, 권일신, 정약전, 정약용, 이승훈 등이 천진암과 주어사에서 강학회를 연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서 합류하였다. 특히 당시 서학(西學), 또는 천학(天學)에 관심을 보여, 함께 한 학자들과 토론하면서 강학회를 학문 수준에서 더 나아가 신앙의 경지로 이끌었다.
1783년, 사신으로 가는 아버지를 따라 북경으로 동행하는 이승훈(베드로)에게 현지에서 영세를 할 것과 기도문과 천주교 관련 서적을 구해 올 것을 권유했다. 이승훈은 이벽의 말대로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이듬해 1784년 귀국했다. 그러자 이벽은 수포교 부근 자신의 집에서 정약용 권일신 등과 같이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세례명은 세례자 요한), 무리를 모아 교리를 가르쳤다. 한국 천주교의 첫 신앙공동체가 태동된 것이다. 그후 홍낙민(洪樂敏, 루가), 최창현(崔昌顯, 요한), 김범우(金範禹, 토마스) 등이 추가로 세례를 받았다. 권철신의 아우 권일신에게서 교리를 배운 충청도의 사도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 전라도의 사도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이 영세를 한 것도 이때였다.
이 신앙공동체는 나중 명례당의 김범우의 집으로 옮겨 집회를 계속했으나 1885년 을사추조사건이 일어나 공동체는 와해되고 자신은 아버지의 엄명으로 천주교 신앙을 버릴 것을 강요받고 집안에 연금 중 페스트에 걸려(일설에는 굶어 죽었다고도 함) 32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벽(李檗)의 집 터
원래 이벽은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으나 언제 한양 수표교(水標橋) 부근으로 이사를 왔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그리고 수표교 위치 또한 명확하지 않다. 다만 현재의 서울시 중구 수표동 43번지와 종로구 관수동 152번지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는 정약용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의 기록에 근거해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 105번지 건물 ‘두레시닝(주)’ 앞 현 삼일교와 수표교 사이 청계천변으로 추정되어 이곳에 성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이 표지석은 2011년 8월 28일에 세워졌으며 이어 9월 26일 정진석 추기경의 주례로 축복식을 가졌다.
표지석에는 "1784년(정조8) 겨울, 수표교 부근 이벽(1754~1785)의 집에서 최초의 세례식이 거행되어 한국 천주교회 첫 공동체가 성립되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바로 인근에 나무로 된 다리 수표교가 실재 있는데 이는 물론 실재의 수표교위치도 아닐 뿐 아니라 임시로 가설된 다리다. 앞서 말했듯 본래의 돌로 된 다리는 장충당 공원에 옮겨져 있다.
다음 가야할 곳은 광희문 성지인데 지하철 몇 코스를 타야한다.
광희문 성지 - 지상의 카다콤바에서 피어난 순교영성 |
왜 광회문인가?
한양도성은 정문(正門)인 사대문과 간문(間門)인 사소문이 있었다. 사대문은 興仁之門(동대문), 敦義門(서대문), 肅正門(북대문), 崇禮門(남대문)이고 사소문은 惠化門(동소문), 光熙門(남소문), 昭義門(서소문), 彰義門(북소문)이 있었으나 돈의문, 창의문, 서소문은 멸실되었다. 위치는 다음과 같다.(두산백과)
정문(正門)과 간문(間門)은 통행인이나 입직(入直) 관원의 신분도 엄연히 달랐다. 예컨대 중국의 사신은 사대교린(事大交隣)의 원칙에 따라 정문을 통해 당당하게 들어오지만 일본 사신은 간문인 광희문을 통해 도성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리고 지키는 군사도 정문은 정4품인 호군(護軍)과 30인의 수문병이 근무했고, 간문은 종6품인 부장(部將) 2인과 수문병 10명이 문을 지켰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도성 내부에는 시신을 매장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장례 행렬이 통과할 수 있는 문도 사소문(四小門)중에서도 소의문과 광희문밖에 없었다. 창의문은 산에 있는데다 출입이 불편했고, 혜화문은 닫혀있는 숙정문을 대신해 북문으로 쓰인 까닭이었다. 따라서 광희문으로 시신이 통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일반 백성들뿐 아니라 후궁이나 왕실 친척도 마찬가지로 시신은 이 문을 통해서 나갔다.
광희문은 청계천의 물이 한강으로 빠져나가는 수문(水門)과 가까웠기에 수구문(水口門)으로 불렀다. 한편 이 문은 도성 안의 백성들의 시신이 성 밖으로 나가는 출구였으므로 시구문(屍軀門)이라고도 불렀다. 시신의 운구가 이루어진 문이기 때문에 자주 곡소리가 들렸으며 일반 백성들도 지나가기 꺼리는 부정문(不淨門)으로 취급되기도 했다. 때문에 '밝은 빛이 사방을 비춘다‘는 광희(光熙)라는 이름과는 달리 어둠이 짙은 '통곡문(痛哭門)' 이었던 것이다. 문 밖으로 나온 망자들을 위해 해당 유족들은 무당들을 불러 굿을 하며 넋을 위로하기도 했다. 이는 오늘날 신당동(神堂洞)이란 명칭의 유래이며 부근에 묘지가 많은 이유이기도 했다.
고종 연간에는 광희문 외곽 구릉지에는 묘지가 빽빽하게 들어섰다. 1902년에는 일본인을 위한 화장터가 생기고, 신당리 공동묘지가 조성되었다. 가난한 하층민들이 여기에 불법 건축물을 지어 거주하기도 하였다. 공동묘지 한가운데에 움막을 지어 아편을 만드는 사례도 나타났다.
1907년 8월 1일에는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항거하다 살해당한 병사들의 시신이 광희문 바깥에 버려졌다. 이 때 친척이 찾아오지 않은 시신은 모두 광희문 바깥 묘지에 묻었다고 한다.
순교자로서는 영광의 문
박해시대에는 서울, 수원, 용인 지역 천주교 신자들이 이 문을 통해 관청에 끌려왔고 배교를 강요당하며 매 맞고 고문 받고 사형을 받아 죽어서야 이문을 나갈 수가 있었다. 그것도 짐짝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수많은 시체들이 이 문밖에 버려졌다.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 재판록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대목은 당시의 이러한 사정을 잘 말해준다.
“죽은 시체를 시구문 밖에 내다 버린 후에 이간난(李干蘭) 아가다의 시체는 그 부친이 찾아 장사지내고, 우술임(禹述任) 수산나 시체는 교우들이 가서 그 근처에 장사지내고...”
“치명 후 시체를 수구문 밖에 버린 것을 교우들이 밤에 찾아가서 그 근처에 장사할 때 참례하였으나 오랜 일인 고로 산소 자리도 모르고 ....”
한 교회사학자의 연구발표(서종태, 광회문성지 학술심포지엄, 2017.11.25)에 의하면 신유박해 이후 죽어서 이 문을 통해 버려진 순교자의 시신은 794위로 확인되었다. 단일 성지로는 최다의 순교자의 이름이 밝혀진 성지인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이들 794명의 순교자들 가운데 54명은 신유박해(1801)-병오박해(1846) 시기에, 나머지 순교자 740명은 병인박해(1866)-기묘박해(1879) 시기에 각각 서울의 좌·우포도청과 형조의 전옥서 등에서 순교하였다. 대부분 병인양요(1866), 남연군묘 도굴 사건(1868), 신미양요(1872) 등으로 박해가 격화되던 때에 순교한 신자들임을 알 수 있다.
이들 794명의 순교자들 중 거주지가 확인되는 750명 가운데 서울 신자는 309명, 충청도 신자는 213명, 경기도 신자는 158명 순이었다. 이어 강원도 신자가 39명, 황해도 신자가 13명, 경상도 신자가 12명, 평안도 신자가 3명, 함경도 신자가 2명, 전라도 신자가 1명이었다. 이처럼 서울·충청도·경기도 순으로 거주자가 많은 것은 박해를 격화시킨 병인양요의 진원지가 서울이었고, 남연군묘 도굴 사건이 충청도 덕산에서 발생했으며, 병인양요가 경기도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한 영광도 따랐다. 이들 794명의 순교자들 중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이 아가다, 최경환(프란치스코), 민극가(스테파노) 등 13위와 병오박해 때 순교한 현석문(가롤로), 한이영(라우렌시오), 정철염(가타리나), 김임이(데레사), 이간난(아가다), 우술임(수산나) 등 7위, 도합 20위가 성인품에 올랐다.
이어 신유박해 때 순교한 심아기(바르바라), 김이우(바르바라) 2위와, 1867년 순교한 송 베네딕도 가족 3위, 도합 5위가 복자품에 올랐고, 황석지(베드로), 최영수(필립보), 이윤일(안토니오), 피 가타리나, 최지혁(요한), 이병교(레오) 등 1833-1879년에 순교한 25위가 ‘하느님의 종’에 올라 시복·시성될 날을 고대하고 있다.
성지 복원 과정과 현재의 모습
광희문은 태조 때인 1396년에 지어졌으나 임진왜란으로 파괴되었다가 1711년(숙종37) 문루를 중건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에 일부가 훼손되고 혜화문과 함께 철거해서 문루도 사라졌다. 1976년에 와서 고증을 거쳐 복원되었는데 도로를 확장 개통하면서 원래의 자리보다 남쪽 12m 정도로 옮겨졌다. 그리고 성벽도 한쪽은 끊어져 있다.
광희문의 높이는 6m, 폭은 8.7m이다. 다른 간문들과 동일하게 단층으로 된 목조 문루가 설치되어 있다. 문루의 높이는 5.9m이며 지붕은 우진각 지붕이다. 추녀마루 사방에는 장식기와로 용머리와 잡상 7개를 두었는데, 이는 다른 단층 문루들과 일치한다. 문은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紅霓門)인데 천장에는 청룡과 황룡이 여의주를 희롱하고 있다.
축성과 관련한 기록이 새겨진 성돌을 각자성석(刻字城石)이라고 한다. 광희문 좌측 성벽의 안쪽에 있는 각자성석에는 순조11년 8월 김수함이 감독하고, 김영득이 공사를 이끌었고 석수 김성복이 성벽을 보수했다는 내용이 있다.
한양도성에 남아 있는 각자성석은 천자문의 글자로 축성구간을 표시한 것 (14세기)과 축성을 담당한 지방의 이름을 새긴 것(15세기), 축성 책임 관리와 석공의 이름을 새긴 것(18세기)으로 나눌 수 있다. 한양도성에는 이처럼 다양한 시기와 유형의 각자성석이 280개 이상 전해지고 있다.
수원 화성도 예외가 아니다. 수원화성의궤가 남아 있어 공사 담당자를 죄다 알 수가 있지만 성벽 돌에도 새겼다. 이는 오늘날의 공사실명제라고 할 수 있다. 공사실명제의 전통은 멀리 6세기 말의 경주의 남산신성비와 8세기 후반의 성덕대왕 신종 같은 데서 이미 나타난 바 있다. 특히 남산신성비는 3년 안에 무너지면 벌을 받겠다는 서약도 함께 했다. 성수대교, 삼풍백화점의 붕괴를 초래한 오늘날의 우리가 부끄럽지 않는가?
광희문 순교자 현양관
서울대교구는 광희문의 역사적 · 교회사적 가치를 지키고자 2014년 8월 광희문 앞에 순교현양관을 설치하고 성지 담당 신부를 임명하였다.
1층 안내실에 가서 물으니 사진 전시실이 4층에 있고 성당은 3층에 있다고 한다.
먼저 엘리베이터로 4층에 올랐다. 좁은 공간이 하나 있는데 정면에는 십자고상이 있고 왼쪽 벽에는 사진 몇 점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의자 몇 개가 있다. 휴게실이거나 입구 현관인 듯하여 전시실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는데 알고 보니 그곳 자체가 전시실이었다. 그야말로 초미니 전시실이다. 하지만 전시된 사진 자료는 광희문의 옛 모습과 참상을 알려주기에 충분하다.
위의 마지막 사진은 1907년 일본군과 싸우다 죽은 대한제국 군인의 시신을 광희문 밖에 내다버려 가족들이 찾고 있는 모습이다.
한양의 사대문 사소문의 그림이 붙어 있는데 이 그림을 보면 남소문이 원래 있었으나 멸실되고 광희문이 남소문을 대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오는 길에 3층 성당에 들렀는데 이 역시 4층 전시실과 같이 초미니 성당이다. 제대 뒤에는 자비의 예수성심상이 걸렸다. 자비의 예수성심상은 1934년 10월 26일 폴란드 파우스티나 수녀에게 발현하신 예수님이다. 가슴에서 두 줄기 빛을 발하는 상으로 흰색은 정화, 푸른색은 생명을 나타낸다.
독서대, 성모상, 십사처 등 그래도 꼭 있을 것은 다 있다.
이곳의 아리랑고개는 속칭 송장고개라고도 불렸는데 수많은 순교자들의 거룩한 영혼이 이 세상과 작별하고 하늘로 오르던 고개라는 뜻이 들어 있다.
이제 이곳은 더 이상 깜깜한 지하의 고통스런 울부짖음이 가득 찬 비통한 지하 무덤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따스한 은총과 축복의 햇살을 받으면서 죽은 이와 산 이가 기도하는 속에 일치하며 신자와 비신자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참된 부활의 현장이 되고 있다. 곧 광희문 성지는 더 이상 죽은 이들만의 공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우리와 천상의 순교자들이 서로 교류하고 공감하는 영적 소통의 광장인 것이다.
광희문 밖에 버려지고 묻힌 거룩한 신앙선조들의 순교 영성을 되살리는 지상의 카타콤바(catacomb)로서의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 광희문 순교자 현양관이 건립되었고 계속 순교자 영성을 현양하는 데 매진해야 할 것이다
벌써 12시. 다음에는 가톨릭대학교 성신대 교정. 지하철 두 코스를 타고 가는 경로이다.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하면 생각나는 것이 김수환 추기경이다. 김 추기경은 은퇴 후 혜화동에 위치한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주교관에 거주했기에 가톨릭 신자 사이에서는 ‘혜화동 할아버지’라고 불렸다. 이는 실제로 김 추기경이 신자들에게 편지를 쓰거나 글을 남길 때 사용한 닉네임이기도 했다.
지하철 혜화역에서 내려 걷는 도중 혜화 로터리 동성고등학교 부근 길가에 커다란 비석하나가 있다. 大韓祖國主權守護一念碑(대한조국주권수호일념비).
2차대전 말기(1943~1945) 전황이 어려워지자 일제는 우리나라의 4,300여명의 청년 대학생들에게 학도 특별지원병이라는 터무니없는 허울을 씌워서 일군(日軍)에 강제로 입대시켜 무참하게 각 전선에 총알받이로 내몰았다. 이에 학생들은 이를 반대하여 도피하거나 입대를 해서도 항쟁, 탈주, 체포 등 온갖 희생을 몸으로 겪으면서 싸웠다. 이런 투쟁 흔적들을 2,700명의 이름과 함께 새겨서 후손들에게 다시는 이러한 치욕의 과거사가 되풀이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경고의 뜻으로 이 비를 세웠다. 이 자리는 당시 학도병들이 입대 전 한때 합숙 훈련장이 있었던 동성고등학교와 가까운 곳이다. 1998년에 세웠고 2008년에 이름을 추가하였다.
동성고등학교 앞을 지났다. 이 동성고등학교의 전신은 동성상업학교였는데 이 학교에는 소신학교 과정이 있었으며, 김수환 추기경이 이 학교에 다녔다. 당시 “천황 폐하의 생신을 맞이하여 황국신민으로서 소감을 쓰라."는 시험 문제에 김수환 학생은 "나는 황국신민이 아님, 그러므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써서 제출했다. 당시 교장이던 장면 박사는 곤혹스러움에 일본인 장학사 앞에서 김수환을 크게 과장하여 꾸짖음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탄생’에 나오는 일화이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직전에 혜화동 성당이 있다.
혜화동 성당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 소재. 전신은 1927년에 설립된 백동본당(柏洞本堂)이다. 백동본당은 명동성당, 약현성당에 이어 서울 대목구의 세 번째 본당이다. 그만큼 오래된 성당이다.
성당을 정면에서 바라볼 때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현관 위에 있는 ‘최후의 심판’ 화강석 부조이다. 이 부조(浮彫)에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로라”(요한 14,6), “천지는 변하려니와 내 말은 변치 아니하리라”(루카 21,33)라는 성경 구절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4명의 복음서 저자 상징이 좌우에 자리 잡고 있다. 마르코는 사자, 마태오는 천사, 루카는 독수리, 요한은 황소이다.
지금 건물은 1960년도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그럼에도 서울시 근대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고 한다. 그 이유로는 종래의 성당 건물하면 붉은색 고딕식이 정형이었는데 이를 탈피하여 새로운 성당 건축 양식을 제시하여 종교사적, 건축사적 가치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세중, 문학진, 등 내노라 하는 가톨릭 예술가들의 작품이 즐비한 교회 미술의 보물창고와 같다고 하나 시간 관계로 들어가 보지 못해 아쉬웠다. ‘103위 순교 성인화’ 의 원본도 이 성당에 있다고 한다.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 배론에서 시작된 사제성소의 못자리 |
정문에 도착하니 왼쪽에는 천주교 서울지역 순례길 코스와 대학 안내도가 붙어 있는 게시판이 있고 오른쪽엔 관리실이 있다.
코로나 여파인지 통과가 매우 까다롭다. 방문객 명단 작성은 물론 패찰을 배부하고 나갈 때는 반환해야 한다. 그리고 대학 방학 기간인 1,2월과 7,8월은 관람이나 순례가 허용되지만 학기 중에는 출입이 금지 된다고 한다. 멀리서 모르고 온 사람에게는 너무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성지 순례 가이드북에 그 사실을 적시했으니 읽어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다행히 지금은 방학기간이라 순례에 별 문제가 없다. 그래서 경주에서 왔다고 하니 친절하게 맞아준다. 그리고 단체일 때는 미리 공문을 통해 예약을 해야 한다고 한다.
가톨릭 대학교(신학대학)의 역사
◆ 최초의 신학 교육
한국 교회 설립 이후 한국인으로서 국외에서 최초의 가톨릭 신학교육을 받은 사람은 1836년 마카오에서 수업을 받았던 김대건(金大建, 1821-1846, 안드레아), 그리고 최양업(崔良業,1821-1861, 토마스), 최방제(崔方濟,1821~1837,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였고, 이중에서 김대건과 최양업은 신품성사를 받고 귀국하여 실제 사제로 활동하였다.
1850년 무렵부터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Ferr´eol 1808-1853, 요셉) 주교의 지시로 처음에는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신부가 용인 손골과 진천 배티에서, 후에 최양업 신부가 배티 등에서 몇몇의 신학생들에게 라틴어와 한문을 가르쳤던 일, 1855년 메스트르(Maistre, 1808-1857, 요셉) 신부가 배티(배론) 신학교의 신학생 3명을 모두 말레이반도의 페낭(Penang, 彼南) 신학교로 유학을 보낸 일 등도 모두 한국인 성직자를 양성하려는 신학 교육의 일환이었다.
◆ 최초의신학교
최초의 가톨릭 신학교는 1855년 충청도 제천의 배론(舟論)의 성 요셉 신학당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개항 이후 근대적 서구 문물과 함께 도입된 서구식 신학 교육의 출발점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1885년 강원도 원주 부엉골(현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에 설립된 예수성심 신학교에 그 기원을 둘 수 있다.
부엉골 신학교는 교명, 교수진, 학생, 설립 이념 등을 감안할 때 현재의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의 직접적인 전신이 되고 있다. 1886년 한불 조약 체결 이 후 이 신학교는 1887년 3월 서울 용산(현 서울 용산구 원효로 4가 1)으로 이전하였다.
◆ 지방 신학대학의 설립
1911년 4월 대구 대목구의 설정과 함께 1914년 10월 대구에도 성 유스티노 신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27년 베네딕도 수도회에 의해 함경도 덕원에 대신학교가 설립되어 덕원, 서울, 대구에서 각각 북부, 중부, 남부로 나누어 신학 교육을 담당하게 되었다. 1929년 서울과 대구의 신학교를 대신학교로 개칭하고 전문부 3년과 대학부 4년을 두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1942년 서울의 예수성심 신학교는 폐교되었다가, 1945년 2월 경성천주공교신학교(京城天主公敎神學校)로 개칭하고 설립 인가를 받아 교육과정을 갖추고 해방 후 혜화동에서 정식으로 개교하였다.
◆ 초기의 사제들
한국인 사제 양성은 1831년 9월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부터 본격화됐다. 1835년 12월 조선에 입국한 첫 프랑스 선교사 모방(베드로) 신부는 이듬해 초부터 교우촌을 순방하면서 인재를 탐문, 신학생으로 김대건(안드레아), 최양업(토마스),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선발, 그해 12월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중국 상해에서 1845년 8월17일과 1849년 4월15일에 각각 사제품을 받았다. 김대건 신부는 사제품을 받은 지 1년도 채 못 되어 순교하였고, 최양업 신부는 1849년 말 귀국, 1861년 6월15일 선종할 때까지 10년 6개월간 전국을 누비며 열정적으로 사목활동을 하였다.
한국인 세 번째 사제는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지 50년 만에 탄생했다. 그 첫 결실이 1896년 4월 26일 약현성당(현 중림동 성당)에서 뮈텔 주교에게서 사제품을 받은 강도영(마르코), 정규하(아우구스티노), 강성삼(라우렌시오) 신부이다. 이들은 말레이 반도 페낭에 유학을 한 후 귀국하여 용산 성심신학교를 수학, 약현성당에서 서품을 받은 것이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사제품을 받았지만 나이순에 따라 강도영(1863~1928) 신부가 세 번째, 정규하(1863~1943) 신부가 네 번째, 강성삼(1866~1903) 신부가 다섯 번째 사제로 각각 기록된다.
이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를 통해 1897년 여섯 번째 이내수(아우구스티노), 일곱 번째 한기근(바오로), 여덟 번째 김성학(알렉스) 신부를 배출한 것을 포함하여 1900년까지 12명의 사제를 배출하였다.
◆ 종합대학교로의 발전
1947년에는 교명을 성신대학으로, 1959년 2월에는 다시 가톨릭대학으로 변경하였고, 신학부와 의학부의 두 편제를 두게 되었다. 1972년부터 성직 희망자가 아니더라도 가톨릭 신학을 전공할 수 있도록 수도자와 평신도에게 입학이 허가되었고, 여학생에게도 입학이 허가되는 남녀 공학으로 학제를 개편하였다.
1992년 신학부를 신학대학으로, 의학부를 의과대학으로 재편했고, 1993년 12월 성심여자대학교와 통합을 하여 명실상부한 가톨릭계 종합대학교로 부상하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의 가톨릭대학교의 캠퍼스는 세 곳이다. 서초동의 성의 교정(의과, 간호 대학), 그리고 부천의 성심 교정(인문, 사회, 자연 대학), 그리고 이곳 성신 교정(신학 대학)이다.
2005년에는 가톨릭대학교 개교 15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를 갖고 신학대학 본부 건물 앞에 성 김대건 신부 상을 제작 설치하였다. 2015년 5월 25일에는 개교 160주년을 기념해 미사와 국제 심포지엄을 갖고, 성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순교와 선교 정신을 본받고자 성당 안에 160주년 기념 이콘 성화를 설치하고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게시판으로 대강의 위치를 확인하고 길 왼쪽으로 난 계단길을 통해 교정에 오르는데 길가에 교가 가사를 새긴 석조물이 나타난다. 특이하게 여겨져 읽어보니 배움을 통해 겨레와 국가의 일꾼이 되자는 일반 대학의 교가와는 달리, 박해의 어둠 속을 헤치고 구원의 밝은 세상을 열망한 순교자들의 신망애(信望愛)의 함성을 느낄 수 있다.
진세를 버렸어라 이 몸마저 버렸어라
깨끗이 한 청춘을 부르심에 바쳤어라
성신의 그느르심 아득한 이 동산에
우리는 배우리라 구원의 베리따스(진리)
성신 성신 알마 마테르(모교)
알마 마테르, 알마 마테르 우리 성신이여(후렴)
반만년 어둔 밤에 고달픈 겨레로다
삼천리 너른 들에 임자 없는 양떼로다
동방 샛별에 밝아오는 땅끝까지
우리는 펼치리라 생명의 빛 까리따스(사랑)
한 옛날 새남터를 물들인 신앙의 피
푸른 강 줄기차게 이 가슴에 벅차는 듯
사탄의 지옥문이 온 세상을 흔들어도
우리는 이기리라 빛내리라 에클레시아(교회)
넓은 교정 경역에 이르니 왼쪽으로는 대학 건물이, 오른쪽에는 확 터진 운동장에 잔디가 푸르다. 정원수에 둘러싸여 아늑하게 자리한 성모동산의 성모님의 시선은 먼 곳으로 향하고 계신다.
대학 구내라서 다른 곳은 대부분 출입이 금지 되어 있다. 설령 허용이 된다 하더라도 굳이 갈 필요도 없다. 구내 성당만 가면 된다. 성당 가는 길 숲가에는 성당 연혁을 하나하나 새겨 놓은 표지석이 길 따라 여러 개가 있고 신학생을 위한 기도 비가 있다.
대성당
성신교정 대성당은 이름만 대성당이지 건물로는 그리 크지 않다. 그리고 외관으로 보아 딱히 성당이라고 할 수도 없다. 성당에 흔한 뾰족 종탑도, 십자가도 하나 없어 일반 건물과 다름이 없다. 다만 성당 오른편에 순교 성인 김대건 상이 있어 순례자의 마음을 가다듬게 한다.
하지만 성신교정 성당은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모셔 놓은 거룩한 곳이며, 또한 1984년 5월 3일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해 미사를 봉헌했던 역사적인 곳이기도 하다.
성전은 2층에 있다. 성전 문 왼쪽에는 예루살렘의 입성이라는 커다란 이콘 타일화가 벽면에 부착되어 있다. 이 성화를 제작하여 기증한 이는 ‘피조물의 노래 세라믹 조각 벽화 연구소’의 김옥수 신부이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을 그린 것이다.
성당 내부는 벽면이 짙은 나무색으로 되어 있어 경건한 느낌을 주는데 비해제대나 성구들이 소박하여 시골 성당 같은 느낌을 준다. 제대 후벽에는 장방형 흰색 바탕에 십자고상이 자리하고 있을 뿐 매우 단조롭다. 하지만 이를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성물이 안치되어 있으니 바로 제대 우측에 안치된 김대건 안드레아의 유해이다. 어쩌면 소박하고 단조로움이 오히려 성인의 유해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순교한 지 40일 만에 미리내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 후 한국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 작업이 추진되자, 1901년 5월 21일에는 무덤을 발굴하여 그 유해를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로 옮겨 안치하였고, 10월 17일 이를 다시 신학교 성당으로 옮겼다. 그리고 6·25 전쟁이 끝난 뒤인 1960년 7월 5일에 그 유해가 서울 혜화동에 있는 가톨릭대학 성신교정 성당으로 옮겨지면서 하악골은 미리내 경당으로, 치아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분리 안치되었다
이곳 김대건 유해 안치 석관은 서울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강 마티아 수녀에 의해 설계, 제작되었다. 1994년 2월 서울대교구 강우일 보좌주교의 입회 아래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개봉한 후, 영구보존을 위해 약물처리를 하고 포장작업을 하였으며, 김수환 추기경의 추인으로 납관에 밀봉을 하였고, 2월 24일에 새로 제작된 석관에 안치하였다.
석관의 위 불빛 부분은 성체를 모시는 감실이고, 가운데는 김대건 신부의 두개골(전두골, 협골, 상악골)이 안치된 부분이며, 약력이 적힌 맨 아래의 대리석 뒤에 김대건 신부의 남은 유해들이 안치되어 있다.
이 성당 내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남쪽 벽면 창문의 유리화(琉璃畵)라고 할 수 있다. 먼저 마름모 형 12가지와 사판(四辦)의 꽃잎 형 12가지 도합 24가지 기본 아이콘이 있는데 이 내용은 모두 신 구약 성경에서 인류 구원의 사건들이다.
유리창에 각각 8개씩 배치하여 인류 구원의 역사를 스토리화하였다. 각각의 경우를 살펴본다.
【첫째 창문】
▲숨을 거두신 예수 ▲엠마우스
▲.묻히시다 ▲ 8보라 이 사람을
▲잡히신 예수 ▲빛을 입은 예수
▲겟세마니 ▲ 붉은 용]
【둘째 창문】
▲불타는 떨기와 모세 ▲불한가운데서 노래하는 세 젊은이
▲노아 ▲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요나 ▲요나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올무는 끊어지고
【셋째 창문】
▲성모영보 ▲성전에서 되찾음
▲꿈꾸는 요셉 ▲세례를 받으시다
▲17.성탄 ▲광야에서 유혹 받으신 예수
▲성전에 봉헌 ▲ 가나의 혼인잔치
첫째 창문 그림의 스토리 해설(둘째, 셋째는 생략함)
성당 뒷면에는 한쪽에 가톨릭 신학대학 160주년 기념성화가 걸려 있다.
160주년 기념화 상부 중앙에는 구원의 예수님을 찬란한 빛으로 나타내었다. 왼손으로 복음서를 펼쳐 들었는데, 거기에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는 마태오 복음 28장의 말씀이 우리말과 라틴어로 제시되어 있다.
하단 중앙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인 배론의 초가집이이 있고 그 좌우에는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가 서 있다. 김대건 신부는 전통적인 사제 복식인 수단에 모관을 쓰고 순교자를 상징하는 빨마 가지와 십자가를 들고 있다. 최양업 신부는 아직 시복이 되지 않아 두광(머리 뒤의 둥근 빛)이 없고, 도포에 갓을 쓰고 지팡이를 들고 복음을 전파하러 다니시는 차림이다. 손에는 책 ‘천주성교공과’를 들고 있는데 이는 가톨릭 기도서의 전신이다.
이 그림은 이콘 연구소의 장긍선 신부와 여러 회원들이 제작 기증한 것으로 2015년 5월 25일 160주년 기념미사 전에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으로부터 축복을 받은 것이다.
벌써 오후 1시가 지났는데 아직 오전 일정은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 갈 곳은 가회동 성당이다. 걷기에는 너무 멀고 지하철을 탈 여건도 되지 않아 택시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