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칭 | 승방서원(承芳書院) | 분류 | 건축물 | ||
관련 | 인물 | 문간공(文簡公) 휘 철(哲) | ? ~ ? | ||
가문 | 문성공계 | 문성공 손자(대호군공파) | |||
요약 | 문간공을 배향한 서원. | ||||
소재지 | 전라북도 김제시 아리랑로 1832-21 (흥사동) |
1856년(철종 7) 동래정씨가 주동이 되어 세운 서원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의 사당 한 채와 강당이 있으며 동래정씨 가문에서 관리하고 있다. 김제에서 살고 있는 동래정씨 입향조 양헌공(良獻公) 정인(鄭絪)을 주벽으로, 문간공(文簡公), 풍천공(楓川公) 정수홍(鄭守弘), 복재공(復齋公) 정곤(鄭坤), 연화공(漣華公) 정임(鄭任), 벽성공(碧城公) 박문(朴雯)을 추모하기 위해 매년 정기적으로 제향이 모셔지고 있다.
양헌공은 대호군으로 1356년(공민왕 5) 동해안의 왜구와 여진족을 격파하고, 나이가 들자 벼슬을 그만두고 처가마을에 낙향하여 정착하시었다.
문간공은 문성공의 차남 대호군공 휘 용각(龍角)의 차남으로, 고려에서 대제학 등 벼슬을 하시고, 이성계(李成桂)와 친하셨으나, 조선 개국에 반대하시어 전북 완주군 동상면 대아리에 은거하시었다. 대아리에는 문간공 묘소에 관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풍천공은 태종 때 집의로 하륜을 탄핵하였고, 세종 때 좌사간으로 이방간(李芳幹)을 처형할 것을 상소하시었다. 복재공은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고, 성균관 대사성을 지내셨으며, 문성공계 4세 월당공(月塘公) 휘 담(霮)의 행적을 기록한 <제공찬시병서>를 지었다. 연화공은 성균 진사로 벼슬을 버리고 김제시 장화동에 낙향하여 은거하셨다. 벽성공은 함양박씨로 이조 참판을 지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