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1-12
이스라엘을 침략한 벤하닷 / 한서노회
구약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관점은 세상의 다른 역사관들과는 전혀 다른 독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의 주인공이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전제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 역사의 흥망성쇠는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 속에서 조명되어집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할 때에 이스라엘의 힘은 강성해지고 주변 이방국들이 쇠약해져서 이스라엘의 지배를 받습니다. 반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하게 되면 주변 이방국들이 강성해져서 이스라엘을 침범하여 노략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잡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과의 언약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에 따라 영광과 수치가 갈라지는 것입니다.
아합 시대에 아람 왕 벤하닷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협박을 하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람 왕 벤하닷은 인근 도시 국가의 32명이나 되는 왕들과 함께 사마리아를 포위 공격하였습니다. 벤하닷은 아합에게 항복을 요구하며 은 금과 처와 자녀들까지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아합이 쉽게 순응하자 벤하닷은 또 다른 조건들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때 아합은 장로들과 백성들의 조언을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조언에 따라 아합은 벤하닷의 요구 조건을 단호히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벤하닷은 이제 사마리아를 완전히 멸망시키겠다고 위협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아합과 이스라엘이 당하게 된 수치와 치욕을 통하여 행악자가 당하게 되는 수치가 어떤 것인지 교훈을 받아 경계를 삼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악한 세력에게 눌림과 협박을 당함
아합 왕이 우상 숭배를 행함으로 하나님께 범죄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람 왕 벤하닷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치셨습니다.
벤하닷(Benhadad)은 일찍이 이스라엘 왕 바아사(Baasha)와 동맹을 맺은 바 있던 벤하닷 1세(B.C. 900-860)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벤하닷 1세는 지중해 무역로 확보를 위해 오므리(아합의 아버지)와도 전쟁을 벌여 이스라엘 국경의 여러 성읍을 탈취해 갔습니다. 그러나 벤하닷 2세(B.C. 860-841)가 아합을 위협하는 까닭은 이스라엘 침략에 목적이 있기보다는 실제로 앗수르와의 전투에 이스라엘을 끌어내어 연합군이되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던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Bowman). 이 무렵 앗수르의 살만에셀 3세(Sharmaneser ,B.C.859-824)는 서서히 벤하닷의 아람(시리아)을 위협해 오고 있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이스라엘의 국력이 강성하여 주변 이방 나라들이 이스라엘의 지배를 받으며 조공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함으로 이방 세력이 성장하여 이스라엘을 침공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아람 왕 벤하닷은 이방 세력들을 규합하여 왕 삼십이 인을 동행하고 연합전선을 펴 사마리아를 포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하는 틈을 타서 악한 세력들이 힘을 합하여 이스라엘을 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아합 왕이 바알을 숭배한 것은 바알이 농경신으로서 경제적인 풍성함을 주고 정치적으로도 안정을 줄 것을 기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대적에게 협박을 당하는 비참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는 인간이 스스로의 행복을 위하여 우상 숭배를 하지만 결국 고통을 자초하는 길임을 교훈하여 줍니다.
성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화하지 못하고 범죄에 빠지면 악한 세력들이 몰려와서 온갖 공격을 가합니다.
성도가 믿음으로 굳게 서 있을 때에는 감히 접근도 못하고 굴복하던 사단의 세력이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단의 세력의 압박은 정신과 육체를 괴롭힘으로 찾아오게 됩니다. 그때에 우리는 마음에 평안을 잃게 되며 육체적으로도 질병에 시달리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하는 데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2. 모든 소유를 상실하는 위기가 찾아옴
아람 왕 벤하닷은 아합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협박을 했습니다. 그 내용은 아합의 소유인 은금이 다 자신의 것이요 처들과 자녀들의 아름다운 자도 다 자신의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아합 왕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협박이었습니다. 아합 왕은 벤하닷의 협박에 굴복하여 자신의 것은 다 벤하닷의 것이라고 응답함으로써 전쟁의 위기를 넘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합이 저자세로 나가자 벤하닷은 더 많은 요구를 했습니다. 아합의 소유뿐만 아니라 그 신복들의 모든 소유도 자신이 갖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벤하닷의 자극적인 언사(言辭)는 아합의 자존심을 상처입히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 의도를 뚜렷이 내보입니다. 심지어 아합의 아내들까지 자신의 소유로 주장하는 데서 이스라엘의 왕권을 자신의 발 아래로 완전 복속시키려는 벤하닷의 탐욕이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삼하 16:21, 22;왕상 2:22). 은금의 요구는 실질적인 국력의 약화로 인해 이스라엘이 벤하닷에게 완전히 굴복하게 하려는 조처입니다.
처(妻)의 요구는 이스라엘 왕권의 독자성과 존엄성 상실을 겨냥한 처사입니다. 자녀들의 요구는 일종의 인질, 볼모를 요구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벤하닷의 요구는 이스라엘을 자신의 완전한 식민지로 전략시키겠다는 의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합의 신하들은 이를 반대하였고 아합은 할 수 없이 벤하닷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는 회신을 보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잘 섬기던 솔로몬 시대에는 금이 풍성하여 은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할 정도였습니다(왕상10:21).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여 우상을 숭배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재물과 영광을 이방의 손에 붙이셨던 것입니다. 모든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떠난 자는 모든 것을 상실하는 위기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재물과 가족을 주셨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고 오히려 우상에게 예배하고 영광을 돌리는 자는 하나님의 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러한 원리를 깨달아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 항상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는 자는 더 풍성한 은혜의 선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소유를 우상으로 섬겨 재물을 위하여 불법을 행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모든 재물이 하나님께로서 말미암음을 믿기에 재물보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음을 말씀하시면서 재물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배신하는 죄를 범하지 말 것을 교훈하셨습니다(참조, 마6:24).
3. 평화를 빼앗기는 우상 숭배자
아합 왕이 벤하닷의 요구를 다 들어줄 수가 없다고 하자 벤하닷은 전쟁을 준비하였습니다.
아합왕의 태도로 인해 격노한 벤하닷은 고대 근동 특유의 과장적 표현을 통해 더욱 거센 위협을 가하였습니다. 아람군의 무차별 살상과 공략으로 말미암아 사마리아 성은 철저히 잿더미로 화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또한 아람군의 수효가 하도 엄청나기 때문에 초토화된 사마리아 성의 모든 부스러기들로도 아람군들의 주먹조차 채울수 없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여기에 대해 이스라엘 왕은 갑옷 입는 자가 갑옷 벗는 자 같이 자랑치 못할 것이라 합니다. '갑옷 입은 자'란 이제 막 싸움의 채비를 차리는 자를 가리킵니다. '갑옷 벗는 자'란 전쟁에서 승리하여 이제 전투복을 벗는 자를 가리킵니다. 아직 싸워 보지도 않고 결과를 장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는 한번 싸워 보지도 않고서 이미 승리를 거둔 둣이 교만방자하게 군 벤하닷을 비꼬는 풍자적 표현입니다. 이는 곧 우리 속담에 '김칫국부터 마시지 말라'는 말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Living Bible은 영어 속담을 인용하여 본절을 '알이 부화되기도 전에 병아리 수효를 세지 말라'(Dont't count your chickens before they hatch!)로 번역하였다. 아무튼 본 절과 관련해서 우리는 거추장스러운 갑옷을 벗어버린 채 돌과 물매만 갖고서 갑옷 입은 거인 골리앗을 물리친 소년 다윗을 상기할 수 있습니다(삼상 17:39-49).
벤하닷은 장막에서 이 말을 듣고 진을 베풀라 고 합니다.
장막(수코트)은 '오두막'이란 뜻으로 고대 근동의 사막에서 왕과 장수들을 위해 설치하는 병영내의 가건물을 가리킵니다.
전쟁터에 와서까지도 한가롭게 술을 마시는 벤하닷의 모습은 그가 얼마나 이스라엘군을 깔보았는지 여실히 증거해 줍니다.
진을 베풀라 는 마치 위치로하는 군대식 명령이 곧 군대로 하여금 맡은 바 위치에 포진케 하는 것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섬기는 신들의 이름으로 사마리아를 침공하여 진멸함으로써 하나도 남기지 않을 것이라는 맹세를 하면서 이스라엘을 침공하였던 것입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전쟁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은 승리하든지 패배하든지 평화를 상실한다는 점에서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전세가 불리한 상황에서 전쟁을 하는 것은 환난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바로 섬길 때에는 평화가 있었고 전쟁을 하여도 불안한 마음이 아닌 승리의 확신 가운데 기쁜 마음으로 전투에 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의 전쟁은 평화를 상실하는 저주였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 평안의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세상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모진 고난을 몸소 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의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성령이 주시는 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었을 때에는 모든 평안을 상실하게 되는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사단은 인간의 마음속에 침투하여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빼앗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순종함으로 성령으로 말미암는 승리와 평안을 누리는 복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아합 왕이 이방 왕의 침입을 받아 협박과 수치를 당하는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떠난 자의 수치가 무엇인지를 교훈받았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로서 말미암는 축복을 받아 누리고 살고 있지만 아합과 같이 범죄에 빠지면 그가 당한 수치를 당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함으로 영광과 축복과 평안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1. 위기는 누구에게나 다 찾아온다는 겁니다.
아합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위기를 맞았습니다.
아합은 그런 위기 앞에서 용기도 없었고 또 아합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으니 하나님을 바라볼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가 섬겨오던 그 모든 우상들은 막상 이런 순간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 마디로 끝이 난 셈입니다.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이게 인생입니다. 그리고 이런 인생의 위기라는 것이 사실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다 찾아옵니다. 사람들은 어떤 어려움을 겪지 않을 때는 자기가 최고인줄 압니다. 자기 힘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막상 어떤 위기를 만나면 그대로 좌절하고 맙니다.
어떤 문제를 만나서 어떻게 할까, 전전긍긍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떠합니까?
2.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할 때에도 늘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합이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그는 끝났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사람들은 아합의 죄 때문에 모두가 멸망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합을 도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요? 아무리 범죄했더라도 아합도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잘못했다고해서 무조건 잘라내 버리지 않습니다. 언제나 또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의 생애가 다 할 때 까지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3. 누가 인생의 주인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위기속에서 아합을 건져주신 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참 능력을
출처 한서노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