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반가사유
봄의 꼬리엔 몇 개의 시샘이 따라다닌다
다 부러워서 그러는 것
눈앞이 뿌연 것도
바람이 갈지자로 걷는 것도
동진강 물결이 반짝이는 영농조합법인 앞마당
색색깔 옷을 입은 몇 대의 트랙터
나란히 가부좌를 틀고 꽃과 눈을 맞추고 있다
저 덩치들을 불러낸 것도
떠받치고 있는 것도
연두가 밀어올린 노랑이려니
냉이꽃이 돌멩이를 떠받치고
유채꽃은 트랙터를 떠받치고
세상을 떠받치는 힘이 작고 여린 것에서 나온다는
아주 시적인 순간을 사적으로 지나가는 유혈목이
멈칫 물러선 걸음 위로
참새 몇 마리 포르르,
보리밭 쪽으로 날아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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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룩
절룩절룩 책 부치고 오는 길
접질렀던 왼발에 무게가 더 실려요
시든 장미 옆으로 유모차가 지나가요
쌍둥이 중 한 아이가 손가락을 빨아요
나의 절룩과 아기의 손가락 사이엔 결핍이라는 말이 있어요
소공원 벤치에 노인 몇 나란히 앉아
폭염보다 더 뜨거운 고독을 뜯어내는 중이에요
고독은 삼각형, 꼭짓점은 무엇이든 끌어당겨요
어디선가 달려온 소낙비 한줄기 넘어지고
절룩이 모여 여름을 견디는 풍경이라고나 할까요
신호등이 초록으로 바뀌면
절룩을 감추고 하나도 안 아픈 사람처럼 걸어요
아직 꺼내놓을 용기가 내겐 없는 거죠
절룩을 앓기 전엔 누구의 절룩도 보이질 않았어요
나의 절룩을 내가 읽었을 때
비로소 우리의 절룩이라는 문장이 완성된다는 걸
수많은 절룩 속에서 깨닫는 오후예요
화단의 치자꽃이 마지막 향기를 토해요
잠시 절룩을 잊고 그 옆에 쪼그려 앉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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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숲이라 말하는
고물상들이 떠나간 후 그곳이 되었다
하늘은 유월 장마를 쉽게 내려놓지 않는다
가지를 옮겨 다니는 직박구리 목청이 경쾌해지자
특별한 바람이 등 뒤로 지나간다
오솔길이 넓은 길로 바뀌고부터
길은 심심하다는 말을 잊어버린 듯했고
길 가장자리에 나란히 신발을 벗어놓는 습관이 사람들에게 생겼다
맨발로 걷는 일이 의식 같고 고해성사 같다
나도 어떤 무게인가를 벗어 저들처럼 얌전히 놓고
그늘과 햇살을 골고루 밟으며 걷는다
쥐며느리가 죽은 쥐며느리를 흘깃 보며 지나가는 일
발에 닿은 성질대로 순하기도 까칠하기도 한
이런 기분들을 신 대신 신어보는 일
사람들이 오래된 표정을 벗은 것처럼 걷는다
엉쿨장미 향기와 까치 발자국과 줄지은 개미와 떨어져 밟힌 오디는
서로 수혈을 하는 중이다
함지산 기슭에서 건너온 검은등뻐꾸기 소리와
직선으로 꽂히는 햇살이 함께 흔들어보는 나뭇가지
줄사철 아래 메꽃은 며칠에 하나씩 연분홍 식구를 늘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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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가 떨어져
하늘이 가벼워진 이유는
늙은 별을 내려놓듯 밤새
볼이 불콰한 살구 몇을 버렸기 때문
밤이 툭툭 터지는 바람에
놀란 쥐똥나무 꽃이 가득 뛰쳐나온 길을 걷다 보면
고향 집 뒤꼍으로 이어질 듯
참한 살구나무가
장독대 건반의 도, 레, 미를 손가락 끝으로 짚을 때마다
반음씩 굵어지던 살구
살구가 시큼 달콤 구르고 굴러 새끼들 입으로 들어가길 바라는
할머니의 채근은 아침으로 바뀌죠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렸어요
떨어져 애틋한 살구를 굽어보는 오월은 다정합니다
양손 가득 공손히
모셔온 살구는 할머니와 항렬이 같고요
시큰둥해지면 어디 에이드에 댈까요
잘 친 사기처럼 뺀질뺀질하게 최대한 말랑말랑하게
그러다 보면 몇 알의 달콤한 문장이 살구를 따라 발효 되고요
바람 없이도 때가 되면 살구가
나뭇가지를 건너오듯이
나를 건너온 한 편의 시가
또 다른 나를 불러 다정하더라는 것, 요즘 알아가는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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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울기 좋은 시간
와글와글, 추억을 꺼내도 되겠습니까
개구리처럼, 짝을 해도 되겠습니까 둥글게 둥글게
우기雨期가 맨발로 서성이는 새벽 세 시,
여전히 지구는 토란이 품은 잎처럼 생각을 밀어내는 시간입니다
날카로운 고양이 울음을 밀쳐내는 매미 소리
풀벌레 커지는 만큼 행복해져도 되겠습니까
도시에 살아야 사람의 무늬를 갖는다고 말하는 사람들
저마다 기대거나 비빌 언덕 하나쯤은 숨기고 있어야
숨 쉬기가 조금은 나을 듯 하다던가요
그런 언덕엔 가 닿을 수 없어요
새벽 문장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때
개구리는 개구리 소리에 기대고
사람들은 사람들의 소리에 기대어 살고
담쟁이에 담장이 기대어 살아도 될 텐데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를 들으며 슬픈 시 하나 읽어도 되겠습니까
당신의 이데아를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 영화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의 OST <A Love id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