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카콜라와 펩시처럼 슈퍼카 업계에서도 숙명의 라이벌이 있습니다.
바로 람보르기니와 페라리입니다.
강렬한 색상과 파워 넘치는 질주로 많은 남성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두 회사는 슈퍼카를 대표하는 대명사이며 엎치락뒤치락하는 영원한 라이벌입니다.
페라리와 람보르기니의 전쟁의 서막은 설립자인 엔초 페라리와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898년 2월 18일 이탈리아 모데나 지방의 철공소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페라리는 어렸을 때, 서킷에서 자동차 경주를 보고 자동차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됩니다.
이후 아버지는 자동차 정비소를 차리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자동차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됩니다.
하지만 1916년 아버지가 폐렴으로 생을 마감하고 이어서 전쟁으로 형을 잃어버리고 페라리도 군에 입대하면서 자동차에 집중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지만 스파뇨라는 독감에 걸리면서 수술을 통해 제대하게 됩니다.
이후 자동차 회사인 피아트에 지원했지만 탈락하고 트럭회사에 운전사로 취직하게 됩니다.
그러나 1919년 피아트 팀의 페리체 나자로라는 선수를 통해 스포츠카 제작사인 CMN에 테스트 드라이버로 취직하면서 페라리는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파르마 베르체토 경주에서 당당하게 11위를 차지한 페라리는 카레이서로 데뷔하고 명성을 쌓으면서 자신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1920년 페라리가 몸담았던 CMN이 재정상태 악화로 파산하면서 페라리는 알파 로메오라는 팀으로 이적하며 타르가 플로리오 경주에서 2위를 차지하는 영광을 거두었습니다.
1923년 어느 지방에서 작은 규모의 경주에서 경기를 펼치던 엔초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은 바라카 백작 부부는 자신의 아들이 생전에 아끼던 말이 새겨진 배지를 엔초에게 선물했는데, 이 배지는 후에 페라리를 상징하는 로고가 되었습니다.
선수로서 승승장구하던 페라리에게도 거대한 벽은 있었습니다.
바로 피아트입니다.
피아트는 당시 경주를 독식하다시피했는데, 페라리는 이를 이겨내기 위해 피아트의 기술자와 선수들은 고용하여 전력을 키웠지만 회사의 재정상태가 나빠지면서 1925년 알파 로메오는 은행에게 압류됩니다.
이후, 1929년 페라리는 알파 로메오의 판매점을 세우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스쿠데리아 페라리’라는 경주팀을 만들고 최다승을 이끌어냅니다.
하지만 1932년 아들이 태어나면서 선수 생활을 정리하고 경주용 자동차 제작에 집중하게 됩니다.
하지만 알파 로메오의 문제로 1938년 페라리는 결별을 선언하고 직접 경주차 개발에 나서지만 엔진 결함으로 완주를 실패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으로 경주차를 만들지 못하지만 군에 부속품을 납품하면서 돈을 모아 경주차를 제작하는데, 1947년 페라리의 자동차가 로마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하면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킵니다.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이탈리아에 위치에 레나초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군용차량을 정비하는 병사로 근무하는데, 이후 전쟁이 끄나고 군용트럭을 트랙터로 개조하는 사업을 하면서 돈을 벌었습니다.
람보르기니는 자동차를 좋아했지만 자동차 회사 설립에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1960년 람보르기니는 인기 슈퍼카였던 페라리250GT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클러치의 결함을 발견하여 엔초 페라리에게 알리지만 페라리는 트랙터를 만드는 사람이 뭘 알겠냐고 무시하면서 람보르기니는 이때부터 칼을 갈기 시작합니다. 람보르기니와 페라리의 본격적인 전쟁의 서막이 오른 것입니다.
람보르기니는 무조건 페라리보다 빨라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기술자들을 최고의 대우로 모집했습니다.
1964년 람보르기니는 첫 작품을 내놓지만 페라리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람보르기니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혁신적인 슈퍼카를 개발하기 위해 힘을 더 쏟아부었고 1965년 이탈리아 토리노 오토쇼에서 누치오 베르토네를 만납니다.
베르토네는 람보르기니의 디자인을 만든 천재이며 지금의 람보르기니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어 1966년 마르첼로 간디니와 베르토네의 손에서 탄생한 미우라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당시 미우라는 엄청난 성능과 진정한 슈퍼카라는 타이틀을 차지하면서 보란 듯이 성능을 입증해냈습니다.
미우라는 미드십 엔진 방식으로 엔진을 운전석 뒤쪽에 배치시켰는데, 처음 사람들의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최고 시속 295km라는 신기록을 세우면서 페라리 역시 미드십 방식을 채택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람보르기니는 페라리를 조롱하면서 묵혀있던 화를 분출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았던 람보르기니는 카운타크를 선보이면서 슈퍼카의 입지를 확실하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1974년 수요 증가에 대비하기 위해 공장을 짓던 람보르기니는 남미에서 주문이 대규모로 취소됨에 따라 재정 손실과 오일 쇼크로 위기를 맞게 됩니다.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지분을 스위스 투자사에 넘기고 은퇴를 선언합니다.
수세에 몰린 페라리는 1984년 288GTO를 선보였지만 경기 중 사고로 선수와 관중이 사망하면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합니다.
1987년 288GTO의 후속 모델인 F40을 페라리 40주년 기념 모델로 선보이며 발표하는데, 최고 시속 324km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합니다.
F40은 엔초 페라리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개발한 유작이었습니다.
한편, 페루치오 람보르기니가 은퇴하고 람보르기니는 결국 1978년 파산하게 되는데, 스위스의 밈람 형제가 람보르기니 공장을 인수해 엔진을 바꾸고 성능을 강화시켜 새롭게 람보르기니의 부활을 알리게 됩니다.
이후 밈람형제는 람보르기니를 크라이슬러에 넘기고 크라이슬러는 디아블로를 선보이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하지만 크라이슬러 역시 재정난으로 1994년 인도네시아의 토미 수하르토에 매각되지만 수하르토 가문 역시 경제적 부담으로 람보르기니를 폭스바겐에 매각하게 됩니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두 슈퍼카의 전쟁은 새로운 국면에 처했습니다.
바로 전기차 시대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자율 주행의 레벨이 빠르게 상승하고 전기차가 보급이 빨라지면서 영원한 숙명의 라이벌이라고 불리는 페라리와 람보르기니가 살아남기 위해서 협력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