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장. 형제지교(兄弟至交)
아운과 편일학이 십벽진에 돌아왔을 땐 이미 해가 기울고 있었으며,
을목진과 진성현 그리고 흑룡당의 형제들은 이미 한 시진 이전에 도착해
있었다.
묵소정과 묵천악 남매도 돌아와 있었다.
둘은 많은 고생을 한 듯 온 몸이 피투성이였고, 땀에 찌들어 있었다.
아운과 편일학이 나타나자 제일 먼저 소설과 소산이 달려 왔다.
그녀들은 아운의 허벅지에 난 상처와 편일학의 가슴에 난 상처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저씨, 괜찮으세요? 할아버지도 괜찮으세요?"
"많이 다치신 건가요?"
"난 괜찮다. 나보다도 선배님 상처가 좀 큰 편이다."
아운의 말에 편일학이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괜찮네. 이 늙은이. 뼈대가 그래도 튼튼한 편일세."
두 사람이 상처에 비해서 의연한 모습이자,
소설과 소산도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돌아오셨습니까, 형님."
황룡 일행이 다가와서 일제히 아운에게 인사를 하자 표두들과 표사들이
놀라서 바라보았다.
소섥과 소산도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들이 아운의 동생이란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단체로 다가와서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모습은 보는 사람들을 위압하는
힘이 있었다.
"황룡."
"예, 형님."
"혈랑대의 본거지에 대해서 말해 보게?"
"쌍지호(雙地湖) 말입니까?"
"그곳이 쌍지호인가?"
"그렇습니다. 그곳은 두 개의 호수가 있는 사막의 녹주입니다. 그 중
하나는 세상에 찾아보기 힘든 중수(重水)가 고여 있는 호수입니다.
우리는 그 호수를 청중호(靑重湖)라고 부릅니다."
"중수란 말이지…"
아운이 중얼거리며 말했다.
중수라면 보통 물보다 훨씬 무거운 물을 말한다.
사람이 먹을 수 없는 물.
만약 중수로 된 물 속에 들어가면 보통의 물 속보다 훨씬 더 강한 물의
압려과 밀도로 인해 보통 사람은 칠공에서 피를 흘리고 죽는다고 했다.
수영을 하려고 앴도 그 밀도로 인해 보통의 물 속보다 몇 배는 더 힘이
들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중수에는 고기가 살지 못한다.
아운은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책으로만 읽었던 중수가 고여 있는 호수라니.
"여기선 뭔가?"
"말로 달려서 열흘 거리에 있습니다."
열흘 거리면 아운이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먼 거리였다.
"내일, 우리는 막내를 구하러 간다. 오늘은 푹 쉬고 준비하도록."
"알겠습니다, 형님."
열일곱 명의 흑룡당 형제들이 일제히 인사를 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들의 절도 있는 행동은 나름대로 멋과 기품이 있었다.
그들이 물러간 후 아운과 편일학은 을목진 형제와 진경화 조손에게
다가와 간단한 인사를 나누었다.
을국진은 아운에게 두 남매가 납치 되었다가 겨우 도망쳐서 돌아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또한 두 남매를 찾으러 갔던 정운이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는 사실도 말해
주었다.
아운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많은 부분이 추측되어 간다.
아운은 인사를 마치고 묵가 남매에게 천천히 다가섰다.
묵소정과 묵천악의 얼굴에 긴장한 빛이 어린다.
그나마 묵소정은 침착한 편이었다.
"고생했다고 들었다."
아운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운이 좋아 겨우 도망쳤습니다. 우리가 잡혀서 거의 죽음 직전에 이르렀을
때, 정 아저씨가 구하러 나타났습니다. 정 아저씨의 도움으로 우리는 겨우
도망쳤는데, 뒤에 남은 아저씨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초조한 표정으로 말하는 묵소정을 보면서 아운은 그 자리에서 죽이고
싶은 살인 충동을 겨우 억눌렀다.
아운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마침 그곳을 들러서 오는 길이다. 너희들이 기다리시는 분은 돌아가셨다.
이런 말을 전해줘서 미안하다. 하지만 내가 약속하지. 그를 죽인 자가
누구이던, 반드시 복수해 줄 것이다."
묵소정과 묵천악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파랗게 질렸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정 아저씨도 운 공자님의 말을 들었다면 편히 눈을 감으셨으
리라 생각합니다."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사라신교로 가는 것은 조금 늦어질 것이다. 내
형제가 혈랑대의 본거지에 잡혀 있다. 그들을 구하고 난 후 형제들이
자립할 수 있게 만들어 다음에 출발할 테니 그리 알아라."
통고였다.
묵소정이나 묵천악은 감히 대꾸도 하지 못했다.
묵천악은 다시 한번 좌절감에 몸을 떨었다.
힘이 생기고 나서 내심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아운도 두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아운의 앞에서 어떻게 표정 관리를 해야 할까 고민했었다.
그러나 막상 아운을 만나고 나자 감히 그의 시선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이미 마음 깊은 곳까지 차지한 아운에 대한 두려움은 자신이 아무리
강해져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불치의 병.
묵천악은 자신의 아운에 대한 두려움과 열등감이 불치의 병과 같다고
생각했다.
결국 아운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기 전에는 나을 수 없는 병을 얻은
셈이었다.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이겠다.'
묵천악은 이를 악물었다.
묵소정 역시 가슴이 떨리는 것을 겨우 참고 있었다.
설마 아운이 정운을 죽인 것이 자신과 묵천악인 것을 알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아운의 말이 목구멍에 가시처럼 걸려서 넘어가지 않는다.
아운은 을목진과 진경화에게 다가왔다.
"내일이면 헤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이미 사정을 아는지라 짐작하고 있던 바였다.
그러나 서운하다.
진경화나 을목진은 이 기회에 아운과 더욱 친해지고 싶었다.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아운이 심어준 인상은 너무도 깊었다.
특히 진성현의 경우는 아운이 하는 행동마다 모두 멋있어 보였다.
다른 의미로 남자가 남자에게 반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지금의 자신처럼.
"참으로 섭섭합니다."
을목진이 섭섭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진경화나 을국진도 얼굴에 섭섭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때 머뭇거리던 진성현이 앞으로 나서며 포권을 하고 아운을 보면서
말했다.
"부탁이 있습니다."
아운을 비롯한 을목진 형제와 진경화의 시선이 진성현에게 모아졌다.
아운은 조금 궁금한 표정으로 말했다.
"말해보게."
"제가 형님으로 모실 수 있게 해주십오."
모두 놀란 시선으로 진성현을 바라본다.
의형제란 특별한 의미가 있게 마련이었다.
특히 칼 밥을 먹고 사는 무림 강호에서의 의형제는 진짜 형제 이상이었다.
그들의 의리와 우정은 강호 무림에서 가장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하기고
한다.
아운은 진성현의 눈을 보았다.
진실했다.
아운 역시 이 순박한 부잣집 도련님이 싫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과 일행으로 인해 피해를 본 것이 적지 않은 용진회이고 보면
무엇인가 해주고 싶은 참이기도 했다.
"너는 지금부터 흑룡당의 열아홉 번째다. 나를 포함함녀 스무 번째의
막내다."
아운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안 진성현이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려 절을
했다.
"막내, 진성현이 대형님을 뵙습니다."
아운은 웃으면서 진성현을 바라본 후 황룡을 돌아보았다.
"황룡."
"예, 형님."
"오늘부터 막내가 된 진성현이다. 네가 책임지고 모든 형제들에게 소개를
시키거라. 막내는 여러 가지 사정상 몸은 우리와 함께 움직이지 못한다
해도, 마음만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예, 형님."
인사를 한 황룡이 진성현을 보며 말했다.
"나를 따라 오거라."
"예, 형님."
처음부터 제법 따라 하는 귀염성을 보이자 황룡이 슬며시 웃었다.
진성현이 아운과 형제의 의를 맺자 정작 기뻐한 것은 그의 할아버지인
진경화였다.
그는 장사를 하는 사람답게 사람을 볼 줄 안다.
'이번 여행은 정말 엄청난 이윤을 남겼구나. 성현이가 저런 영웅과 형제의
의를 맺었으니 앞으로 많은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진경화가 뿌듯하게 생각할 때, 을목진이 다가와 속닥거렸다.
"축하하네. 그냥 넘어가진 않겠지?"
진경화가 웃으면서 한 발 앞으로 나서서 포권을 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 성현이가 무려 열아홉 명이나 되는 형을 맞이한 날인데 이 할아비
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오늘은 크게 잔치를 베풀까 합니다. 비록 대사막
을 여행 중이라 좋은 술과 안주는 없지만, 있는 것만이라도 마음껏 먹고
마시기 바랍니다. 뭐 하느냐? 빨리 술과 음식을 준비하거라! 오늘은 누구
라도 취하지 않은 자는 벌을 받을 것이다."
우와아!
함성 소리가 하늘로 울려 퍼졌다.
다시 을목진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하하하. 늙은이, 오늘 같은 날 몰래 숨겨온 백설주를 아끼진 않겠지?"
백설주라면 용진회에서 팔고 있는 최고 특산품의 명주였다.
"이 나쁜 놈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구나. 마침 그것도 풀 생각이지만,
그 말을 들으니 별로…"
"헉! 이거 왜 이러나. 내가 무조건 잘못했네."
을목진이 어울리지 않게 아양을 떨자 폭소가 울려 퍼진다.
한창 잔치 준비를 하는 짐꾼들과 쟁자수, 그리고 서로 인사하느라 정신
없는 흑룡당 형제들을 뒤로 하고 아운이 을목진과 진경화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금룡표국에 정식으로 표물 하나를 부탁합니다."
아운의 말에 을목진이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엇이든 말만 하십시오. 권왕의 부탁이라면 뭐든지 최우선으로 처리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표물은 두 장의 서신입니다. 한 장은 북경의 하씨 문중으로,
그리고 또 한 장은 북궁세가의 북궁연에게 전했으면 합니다."
두 사람이 놀라서 아운을 본다.
하씨 문중의 장남과 북궁연이 약혼한 사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
중 하나였다.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두 가문의 사람들뿐이었다.
물론 북궁연에게 태중 혼약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있었다.
단지 그 상대가 누구인지 모를 뿐이었다.
을목진과 진경화가 놀란 것은 아운이 북궁연이란 이름을 너무 쉽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북경의 하씨 문중은 학사들에게 있어선 무가의 북궁 가문 만큼이나
유명한 가문이었다.
당연히 두 사라도 하씨 문중을 잘 안다.
아운이 문과 무의 대표적인 두 가문에 서신을 전한다고 하자 놀란 것이다.
정말로 아운이 이 두 가문과 연관이 있다면 아운은 실력뿐만 아니라
신분 또한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 된다.
"이 두 가문과는 어떤 관계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을목진의 물음에 긴장한 것은 진경화였다.
그만큼 이 두 가문의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북경 하씨는 저의 본가이고, 북궁연은 제 약혼녀입니다."
아운의 말에 진경화와 을목진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호, 혹시…"
을목진은 아운의 말을 듣고 무엇인가 생각난 듯 했다.
"그러니까 십 몇 년 전 하씨 문중의 장남이 집을 나갔다고 들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한동안 북경이 떠들썩했었습니다."
진경화의 기억 속에도 있던 사건이었다.
표국이나 상단이나 세상의 정보에 밝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니만큼 이들은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시선이 아운을 향했다.
굳이 숨길 일도 아니다.
"제가 바로 하영운입니다."
"꿀꺽."
아운의 말을 들은 을목진은 그만 마른 침을 삼키고 말았다.
저 실력에 북궁연의 약혼자.
무공만 강한 것이 아니라 한때 문의 천재로 세상을 들썩였던 인물이니,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문무겸비다.
북궁연의 배필로 모자람이 없어 보였다.
북궁연이 누구인가?
무림 여걸들 중 최고수 중 한 명이라고 알려져 있고,
무엇보다도 무림사에서 조차 찾아보기 힘든 미인으로 현 강호 무림 제일
미인이었으며, 그녀의 나이에 검후란 칭호를 받은 여자는 아직까지
무림에 없었다.
놀라움을 떠나서 참으로 부러웠다.
아운이 가진 그 자신의 실력과 능력만으로도 부러운 판에 참으로 복도
많은 남자다.
아운이 자신이 하는 말을 내공으로 막아 흑칠랑과 야한이 못 들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 말마저 들었다면 흑칠랑의 심정이 어떻겠는가?
부러움과 질투심으로 가슴이 터졌을지도 모른다.
"두 분에게 제 신분을 말한 것은 두 가문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해서입니다. 그리고 나에 대한 것은 당분간 비밀로 해 주셨으면 합니다.
특히 내가 권왕이란 사실도 비밀로 해 주십시오."
아운의 말을 들은 을목진과 진경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을목진이 말했다.
"서신을 전하는 것은 당연히 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연 소저에게도
권왕이란 사실을 비밀로 해야 합니까? 아신다면 몹시 기뻐할 텐데…"
"그 점은 좀 생각해봐야겠습니다.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 부분은 내일 떠나기 전에 말하기로 하겠습니다. 그보다는 저의
본가와 북궁세가에 대한 소식을 알았으면 합니다."
"일단 하씨 문중은 무가가 아니라서 그 소식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한 가지, 운 공자의 부모님은 모두 건강하게 살아 계십니다."
을목진의 말에 아운은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일단 그 정도면 충분했다.
"하지만, 북궁세가의 일이라면 어느 정도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황이지요."
짐작하고 있던 일이었다.
천하제일가문이었던 북궁세가가 호연세가에게 밀린 것만으로도 이미 일은
일이라고 하겠다.
그 말을 듣고부터 능히 짐작은 하고 있었다.
"아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원래 천하제일세가라고 불리던 북궁가문은, 무림맹의 맹주인 조가를
빼고는 최고의 무가였습니다. 그러나 모용세가가 호연세가로 제 이름을
찾으면서 그 판도가 완전하게 바뀌었습니다. 모용세가는 호연세가로
이름을 바꾸자마자 그 힘을 과시하기 시작했는데, 그동안 많은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직도 그들의 힘이 얼마나 되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길 현 호연세가의 힘은 또 하나의
무림맹이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특히나 금룡표국과 용진회가 알고 있는
정보에 의하면 그들은 보이는 힘보다 보이지 않는 힘이 더욱 무서울 것
같습니다. 호연세가는 이름을 바꾸자 우선 첫 번째 목표를 당시의 천하
제일세가인 북궁세가를 밀어내고 천하제일가문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정한 것 같습니다. 두 가문은 많은 곳에서 서로 충돌하였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북궁세가가 밀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떻게 했는지
무림맹의 수많은 원로들이 호연세가를 지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현재
무림맹에서 호연세가의 입지는 무림맹의 맹주인 조진양을 위협할 정도
까지 올라와 있는 상황입니다. 현 무림맹은 맹주를 지지하는 세려과
호연세가를 지지하는 세력, 그리고 자신의 입지를 노리고 눈치를 보는
세력과 북궁세가를 구심점으로 한 세력이 서로 각축을 벌이고 있는 상황
입니다. 그 틈바구니에서 여러 가지로 북궁세가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리고 그들 세력 외에 정통성을 지닌 구파 일방 중 몇몇 세력이 힘을
규합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아운은 을목진의 말을 들으며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차피 묵소정 남매를 호위하면서 무림맹 안에서의 암투를 어느 정도
눈치 못 챈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을목진의 말을 듣고서야 그 안의 암투가 생각보다 더욱 치열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북궁세가가 몰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많이 어렵습니까?"
"세력에서도 힘에서도, 그리고 자금 면에서도 많이 밀리고 있습니다. 특히
호연세가는 자신들이 하는 일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지만, 북궁
세가는 전통의 정파답게 대의명분과 곧은 방법만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 차이점에서 오는 불리함도 무시할 수 없습닏다. 다행이라면 두 가문
다 싫든 좋든 무림맹의 중추 세력이라 내놓고 다투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사실 두 가문의 암투는 호연세가가 북궁세가를 계속해서 핍박하는 형태
고, 북궁세가는 될수록 그들과 충돌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선 호연세가의 일방적인 공격이라고 할 수
있죠."
"호연세가. 여러 가지로 나하고는 악연이군."
아운은 혼자말로 중얼거리면서 잠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너무 어려서 기억나지 않지만 북궁연의 얼굴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문득 그녀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이렇게 그녀의 모습을 혼자 그리곤 했었다.
지금까지 을목진의 말을 조용히 듣기만 하던 진경화가 조금 의문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도 일을 마치고 돌아가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어쩌면
운 공자님이 먼저 강호에 도착할지도 모릅니다."
아운이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시간이 좀 늦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상당 기간 힘을 기르는데
투자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힘?"
"지금 정도로는 먼 느낌입니다."
을목진과 진경호가 서로 마주보았다.
지금 아운의 실력으로도 먼 느낌이라면 대체 어느 정도의 힘을 원한단
말인가?
그리고 원하는 힘을 얻으려면 또 얼마나 걸릴 것인가?
을목진이 아운을 보며 물었다.
"대체 어느 정도의 힘을 원하시는 것입니까?"
"호연세가를 분질러 놓을 작정입니다. 그리고 무림맹의 사마무기와
호연세가에게 경고를 했었죠. 내가 다시 강호에 나선다면 무림을 내
주먹 아래 놓겠다고."
을목진과 진경화의 입이 딱 벌어졌다.
턱뼈가 빠지지 않은 것만도 다행스럽게 생각될 정도였다.
"그…"
을목진은 무엇인가 말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아 그저 아운을
보기만 했다.
호연세가를 분질러 놓겠다고 한다.
사마무기라면 무림맹의 군사인 와룡이 분명했다.
그런 인물에게 무림을 자신의 주먹 아래 놓겠다고 선포하였다니.
그 말의 크기에 비해 아운은 너무도 태연했다.
그 정도는 당연하고 곧 그렇게 될 것이 확실하다는 표정.
그런데 듣고 난 두 사람도 아운의 말에 무엇인가 믿음이 간다.
두 사람이 다시 서로 마주 보았다.
두 눈만 끔벅거리다가 다시 아운을 본다.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을목진의 물음은, 힘을 얻어 무림에 다시 돌아오는 날까지 얼마나
걸리겠느냐는 질문이었다.
"길어도 이 년을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짧으면 일 년 안입니다. 그 정도면
소성(小成)은 있을 듯 싶습니다. 모자라는 것은 그 이후에 더욱 노력해야
겠지요."
두 사람은 다시 놀랐다.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다.
아운은 두 사람의 의문을 안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내게 특별한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묻지 말아 주십시오.
그리고 또 다른 부탁이 있습니다."
아운이 다시 부탁을 하자 두 사람은 조금 더 놀란 표정이었다.
비록 아운을 본지는 오래 되지 않았지만, 누구든지 눈에 확 들어오는
개성적인 성격의 아운이었다.
그들이 아는 아운이라면 누구에게 쉽게 부탁을 할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데 벌서 두 번째 부탁을 하고 있었다.
을목진과 진경화는 내심 뿌듯한 감동을 느꼈다.
아운 정도의 인물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느낌과 함께,
무엇인가 그와 가까워질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무엇입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힘 닿는데 까지 모든 힘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특히 진경화는 비록 자신의 손주가 아운과 의형제를 맺었지만,
오히려 더욱 정중해졌다.
손주는 손주고 자신과의 관계는 또 다른 것이다.
만약 자신이 그 인연을 빌미로 할아버지 노릇을 하려 한다면 아운이
고개를 숙여야 하는 사람이 많아진다.
아운의 성격상 어려운 일일 것이다.
오만한 것이 아니라 자부심이 강하고,
누구에게나 함부로 고개를 숙이는 성격이 아니다.
그 점을 배려한 것이다.
대상회의 회주답게 사람의 개성을 빨리 파악할 줄 알았고, 눈치고 빠르다.
"먼저 감사드립니다."
아운이 인사를 한 후 말을 이었다.
"혹시 힘이 닿는다면 제 아내 될 여자를 도와주십시오."
두 사람은 아운을 보았다.
그저 도아 달라고만 한다.
그 대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굳이 말로서 그 대가에 대한 말을 할 필요가 없으리라.
"힘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합창을 하듯이 말한다.
아운이 포권을 하고 말했다.
"두 분을 권왕 아운의 친구로서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그 말이 끝이었다.
아운이 돌아서서 자신의 형제들에게 돌아간다.
한동안 아운의 등을 보고 있던 진경화가 말했다.
"이번 여행은 너무 많이 남는 장사를 하고 돌아가는군."
을목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게도 아주 의미 있는 여행일세. 권왕이 다시 강호에 나오는 날…
볼만하겠군. 더군다나 무림맹의 군사와 그 오만하고 도도한 호연세가를
꺾어 놓겠다니. 그 날까지 어떻게 기다릴지 벌써부터 걱정일세."
을목진의 말을 들으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진경화가 물었다.
"그 동안 호연세가의 횡포가 좀 심했지?"
"정도를 넘어선지 오래일세. 그리고 무림맹도 마찬가지지. 특히 맹을
등에 업고 제멋대로 구는 인간들이 너무 많아졌어. 지금은 맹주조차
그들의 힘을 함부로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네. 난 맹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네. 물론 그의 공로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진경화가 다시 묻는다.
"정말 가능할까?"
"난 그냥 믿고 싶네. 되던 안 되던 그건 나중 일이야! 한 가지는 확실하지
않겠나 싶군."
"그들이 아주 강적을 만났다는 사실 말이지."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또 하나라면, 북궁세가와 권왕이 하나가 된다. 이것 말인가? 하긴 그것
만으로도 경천동지지. 호연세가나 사마무기나 대체 어쩌다가 저런 자를
적으로 두었을까? 모대건을 대할 때 보아하니 원한도 이만저만한 원한이
아닌 것 같은데."
두 사람은 아운이 모대건을 혼내면서 하는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대략 어떤 일인지 알 것도 같은데, 함부로 짐작하긴 어려웠다.
을목진이나 진경화는 그렇지 않아도 호연세가를 좋게 보지 않고 있었기에
아운의 선포가 시원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리고 말일세."
진경화가 무엇인가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을목진을 본다.
을목진이 궁금한 표정으로 마주본다.
"나도 이제 해야 할 일이 생긴 듯 하네."
을목진은 더욱 궁금한 표정이 되었고, 진경화는 그저 웃기만 한다.
***
대사막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한 명의 인물이 서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의 모래 벌판은 보는 사람에게 어떤 웅심을 심어
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넓고 힘이 넘친다.
거구의 청년은 감격한 시선으로 대사막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의연한 표정에 두 주먹을 불끈 쥔다.
"왔노라! 대막제일신마 우칠이 드디어 대사막을 정복하고자 왔노라!"
그의 포효하는 목소리가 사막의 모래 바람을 떨어 울린다.
그 동안 당해온 모진 고생을 생각하며 눈물마저 글썽거린다.
이제는 그 누구에게도 당하지 않으리라 결심한다.
설마 이런 황량한 사막에도 자신을 능가하는 고수가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우칠은 그 생각을 아주 굳게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