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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횡성중학교 11회 졸업 기념사진. 맨 뒷줄 왼쪽 여섯번째가 허만봉 전 횡성교육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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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만봉 전 횡성교육장 |
“덕고산 엉킨정기 숨어내리고 화성벌 푸른 숲은 우리의 고장…중간생략”, “금강에 정기받아 남산은 높고 섬강은 흘러흘러 국토로 드네…중간 생략”
이 글귀는 꿋꿋한 횡성의 기상이 살아 숨쉬는 자랑스러운 모교인 횡성 초·중·고의 교가 가사의 일부다. 해발 110m 평야지에서 700m의 고랭지까지 다양한 특성의 지형으로 예부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전통적인 농경마을로 그리 높지 않으면서도 산이 없었으면 오히려 어울림이 없을 법 했던 이곳 횡성! 산세가 완만하며 아름답고 좋기에 그로부터 받는 정기는 우리 고향 사람들께 힘과 용기를 주었고, 좌우로는 꿋꿋하게 흐르는 섬강의 온후한 기운은 후한 인심과 불굴의 단합력을 키우게 하는 복받은 땅이다. 여기가 내가 태어난 고향 횡성인 것이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횡성현은 두메 속에 터가 활짝 열려서 환하게 밝고 넓으며 물이 푸르고 산이 평평하여 형용하기 어려운 별스런 맑은 기운이 있으며, 이 지경 안에는 여러대를 살아 온 사대부가 많다”고 했다.
이런 곳이라 그런지 역사적으로는 1919년 3·1운동후 무력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도내에서는 처음으로 그 해 4·1만세운동(횡성 장날임: 지금도 전국 제일의 5일장이 섬)이 일어나게 된 전국 제일의 애국의 고장이기도하다. 아무튼 내 고향 횡성은 자랑스럽고 애국혼의 숨결이 면면이 남아있는 흙냄새 나는 곳은 분명하다.
이러한 역사를 빛낸 조상의 얼과 전통이 생활 속에 깃들여 있는 고장에서 1945년 해방되고 두 달 열흘만에 6남매 장남으로 세상을 구경하게 됐다. 출생지는 횡성읍의 변두리인 모평리(속칭 떼뜰)116번지. 하루 한 끼니도 못 먹는 세월이라 우리 집 없이 친척집의 사랑채, 그 사랑채가 내가 태어난 곳이라고 할머님께서 들려 주셨고, 부모님께서는 그토록 가난했던 기억을 되뇌이기 싫으신지 돌아가신 어머님이나 아직도 건강을 지키시며 횡성에서 농사를 짓고 계신 아버님도 지금껏 말씀이 없으시다.
6·25전쟁 몇 년 전 우리는 태어난 곳에서 약 2㎞ 떨어진 속칭 질골이라는 5가구밖에 없는 곳에 집 한 채 마련해 화전 밭 일구며 입에 풀칠할 정도로 살기도 했다. 아버님께서 군생활을 마치고 횡성으로 오셔서 지금 살고 계시는 읍상4리 속칭 배웅구댕이에 자리잡고 장사를 하시며 6남매를 키워내셨던 것이다. 워낙 가난한터라 학교에 가고 싶어도 교과서대금, 학용품값 부담으로 열 살이 넘어서야 당시 국민학교에 입학을 했고 나이관계로 1학년 수료와 함께 3학년에 월반을 하기도 했다. 며칠전에 어렸을적 마을 친구들 모임에서 한 친구가 어릴 때 보리밥마저도 못먹고 감자만 삼시세끼 줄창 먹다보니 물려서 감자를 아직까지 안먹는다는 말을 건넸다. 나 역시도 지금까지 감자, 고구마가 혹 밥에 섞여 있으면 골라내어 안먹는 습관이 있다.
중·고등학교 학창시절 역시,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해 3년 동안에 동·하복 한 벌, 제일 싸다고 하는 검은색 운동화도 1년에 한 켤레, 2~3년간 입은 동·하복 작고, 빛바래고 몸을 옷에 맞출려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1년 신은 운동화 해어짐은 물론, 앞창에 구멍이 나면 비닐로 발을 감아 신고 다녔으며, 제일 걱정스러운 것이 비오는 날, 눈오는 날이었다. 돈 없는 줄 알면서 떼를 써 봤자 부모님 가슴만 아프게 해 드릴 것 같아 사달라는 말조차도 못했고 심지어는 월사금이 밀려 정학처분 직전인데도 말 못하고 있다가 담임선생님이 딱한 사정을 알고 대신 챙겨 주시는가 하면, 농협에서 주는 장학금(당시 3000원)도 추천해 주시기도 했다.
지금도 학창시절 빛바랜 성적표, 상장, 졸업장, 장학금 통지서를 보며 어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늘 긍정적이며 최선을 고집할 수 있었던 것은, 소중한 은사님들이 곁에 계셨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대학진학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던 나에게 우연히 하교 길에 마주친 선생님을 통해 교육대학 소개를 듣게 됐고, 그로부터 시작된 순간의 선택이 춘천교육대학이라는 문을 통해 나의 진로를 결정짓게 된 것이다.
가정교사로 대학생활을 보내며 어렵사리 졸업해 사도의 길을 걷게 됐다. 첫 단추를 잘 끼우기 위해 교사를 그 출발점으로 해 교감, 교장, 장학사, 교육연구사, 도교육청 장학관, 교육장 등을 두루 엮임하는 영광이 있었는데 이렇게 되기까지 이끌어 주셨던 모든 분들에게 삼가 머리 숙여 배례를 드리고 싶다.
조상님의 혼백이 계시고, 부모님의 숨결과 나의 6남매 고향, 횡성에서 10여년을 한결같이 사랑과 열정으로 군정을 보살피신 조태진 전 군수님은 한우 명품화 전략으로 전국의 횡성한우를 브랜드화 시켜 주셨고, 2006년 7월 민선4기로 새롭게 젊음의 패기와 그 누구도 추종하기 어려운 특유의 결단력과 지도력을 갖춘 역시 내 고향의 후배이신, 한규호 군수님의 군정 시작은 출발부터가 매우 경이적이었으며, 그중 군민 자율실천운동인 ‘미래청정법인 횡성’은 전국 240여개의 지자체를 놀라게 하고 있다.
이런 비전 제시의 시기를 전후해 한장수교육감님의 남다른 관심과 배려로 고향인 횡성교육장으로 임명되면서 그 간에 못 이룬 고향을 위한 교육사업에 미숙하나마 열정을 받쳤다고 생각한다. 횡성군청과 함께 한 평생학습도시 구축, 시범으로 전국의 5개 시·도 설치의 하나인 영어체험센터장 구축 운영, 전국유일의 ON-OFF LINE교육 실현, 민족사관고등학교에 횡성출신 학생유치를 위한 독지가님들의 덕고 장학회운영과 꿈나무 선수코치 특별 수당제 운영, 체육선수 육성을 위한 체육 지원금 후원 등, 이 모두가 강원도교육청, 횡성군청, 횡성군의회, 각 읍·면사무소, 각 사회단체님들의 따사로운 횡성 사랑의 손길이 넉넉하게 있었음을 숨길 수 없다.
지금은 그간의 경륜을 바탕으로 ‘교육사회 사업’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현직에 있으면서 시작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바탕으로 박사과정에 도전 중이며, 예절사 1급 자격과 보건복지부 승인 혼례지도자(주례) 명인 자격도 퇴임 후 6개월 안에 따냈는데 이것을 바탕으로 더 배우면서 시작할 것이다. 이미 사람들은 이 세상의 깊은 이해의 바탕위에 많은 것들을 서로 공유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도 고향 횡성에서 미래를, 보다 풍요로운 삶으로 충만할 것을 간절히 바라며, 살기 좋은 세상만큼이나 나에게도 할 일이 많다고 본다.
자, 다시 떠나자. ‘새로운 출발! 변화하는 내 고향 횡성’을 위하여…
● 프로필 - 1945년 횡성군 횡성읍 모평리 출생 - 횡성초·중·고, 춘천교육대학, 상지대 경영학, 중앙대 국제경영 대학원 졸업, 현재 강원대 일반대학원 박사과정 중 - 횡성·원주·삼척·정선초 교사, 원주·만종초 교감 - 영월·원주 교육청 장학사, 도 교육과학연구원 교육연구사 - 횡성초 교장, 도교육청 초등장학담당, 횡성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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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고교 재학시절 밴드부바리톤 활동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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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평생학습도시 증서와 동판을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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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횡성초교 교사 시절 수업모습. | |
첫댓글 허만봉 교육장님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건강 하시고 저희 내외 시간내어 찿아뵙고 인사 드리겠습니다.
허만봉 교육장님은 퇴임후에도 대학원에 다니고 계시며 요즘은 원주에서 거주하시면서 재원 횡성중.고등학교 동문회장으로 봉사하고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