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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스투아르다(Maria Stuarda)
도니제티의 3막 오페라로 안나 볼레나, 로베르토 데브뢰와 더불어 '여왕 3부작' 중 두 번째 시리즈이다.
1834년 나폴리 산 카를로 극장에서 초연되었다가 실패를 거둔 후 도니제티가 몇 부분 고쳐서 1835년 12월 30일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 재공연 했을때는 성공을 거두게 되지만,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와 사랑의 묘약, 안나 볼레나, 돈 파스콸레에 비하면 여전히 인지도는 덜하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아직 공연되지 않은 도니제티의 오페라 중 하나이다.
아마도, 엘리자베스 1세역을 잘 부를 수 있는 메조 소프라노와 메리 스튜어트를 소화할 수 있는 소프라노가 아직은 없어서 공연을 못한다는 얘기가 상당수.
거기다, 무대 세트를 바꿔야하는 제작비 문제도 포함된다고 한다.
참말로 아쉬운 부분이나 2015년 11월에 안나 볼레나 한국초연을 계기로 여왕 3부작이 한국에 공연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으며, 2019년 11월 22일~24일 드디어 한국의 예술의 전당에서 국내 성악가와 연주자들에 의해 초연되었다.
초연의 흥행실패
마리아 스투아르다는 도니제티의 오페라 중에서 초연부터 처참한 실패를 맛본 작품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선, 전작 안나 볼레나와 사랑의 묘약의 흥행성공으로 도니제티는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을 위한 작품을 무엇으로 준비할까 고민하다가 돈 카를로스로 유명한 프리드리히 실러의 운문 사극 "마리아 슈투아르트(Maria Stuart)"를 보게되었다.
이 사극을 본 도니제티는 감명을 받았고 곧바로 작곡에 착수했지만, 악보 집필 당시 도니제티가 우울증 초기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시점이어서 성공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많이 느꼈다고 전해진다.
다행히도 실러의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도니제티의 오페라는 마리아 스투아르다라는 제목으로 완성 되었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 것 이었다.
도니제티가 1834년 나폴리 산 카를로 극장에서 오페라를 초연하려 했을 때, 오페라 내용이 검열에 들어간 것이었다.
이유인 즉슨, 당시 나폴리를 지배하던 양시칠리아 왕국의 왕비가 스튜어트 왕조 혈통이었는데, 오페라의 내용이 당시 나폴리 왕비의 조상 중에 한명인 메리 스튜어트의 이야기였고, 오페라에서 표현되는 언행이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도니제티는 이미 오페라를 완성했고, 오케스트라와 의상 모두 준비한 상태라 포기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검열당국은 도니제티가 곧 무대에 올릴 작품에 계속 딴지를 걸었고, 결국 도니제티는 그 말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오페라의 배경은 스코틀랜드에서 실제 역사와 상관없는 13세기 피렌체로 바뀌고, 제목도 '마리아 스투아르다'가 아닌 '보온텔몬테'로 바꾸어야 했다. 대본 역시 급하게 수정해야 했다.
오페라를 수정하고 있던 당시 도니제티는 초조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 작품을 이렇게 수정하다간 반드시 그 결과가 실패가 될 것이라고 믿었고, 결국 도니제티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1834년 나폴리 산 카를로 극장에서 올려진 '보온텔몬테'는 참담한 실패를 맛봐야 했는데, 당시 마리아 스투아르다를 보러온 관객들은 하나같이 불쾌해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도니제티는 한 동안 이 오페라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를 작곡하는 것에만 신경쓰게 된다.
다행히도 1835년 나폴리 산 카를로 극장에 올려진 루치아 초연은 완전 대박을 거두게되고, 도니제티는 마리아 스투아르다 초연에서 맛보았던 실패를 완전히 잊고, 의욕도 되찾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도니제티는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마리아 스투아르다를 다시 올릴 기회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에 도니제티는 기뻐하며 마리아 스투아르다를 재작업하게 된다.
나폴리 왕국 검열에 들어갔던 부분을 자신의 처음 의도대로 모두 고쳐나갔다. 검열 들어가기 전에 사용했던 주세페 바르다니의 대본도 되찾아 '보온텔몬테'에서 다시 '마리아 스투아르다'라는 제목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배경도 가상의 피렌체가 아닌 실제 영국 역사로 바꿀 수 있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도니제티가 처음부터 의도했던대로 작업이 이뤄진 것이다.
도니제티가 마리아 스투아르다 재작업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밀라노가 나폴리 왕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1835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열린 제대로된 마리아 스투아르다는 1년 전의 실패를 성공으로 뒤바꿔 놓았다.
도니제티도 이에 기뻐했다. 하지만, 성공과는 반대로 마리아 스투아르다는 사랑의 묘약이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만큼 지속적인 인기를 끌지 못하게 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관객들의 기억속에 점차 사라져 갔으며, 19세기에 들어가서는 베리즈모 오페라 열풍으로 인해 다른 벨 칸토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잊혀지게 되었다.
벨 칸토의 부활
"화려한 기교만을 중시", "대본이 취약한 음악극", "복잡한 장식만 지나치게 많은 음악"....
이것은 베리즈모 오페라를 선호했던 19세기 사람들이 생각하는 벨 칸토 오페라의 이미지 였다.
안나 볼레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청교도, 노르마가 대표적으로 위와 같은 질타를 많이 받았으며, 이 와중에 마리아 스투아르다는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관객들의 인식과 편견을 완전히 불식시킨 소프라노가 있었으니 바로 마리아 칼라스 였다.
마리아 칼라스는 루치아, 노르마, 안나 볼레나 같은 캐릭터를 단순히 기교 과시용으로만 내세운 것이 아니라 극의 표현까지 불어넣었던 것이다.
특히, 1957년 4월 14일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열린 안나 볼레나 공연은 이 오페라를 다시 부활하게 만든 역사적인 공연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마리아 칼라스조차 관심을 주지 않은 벨칸토가 있었으니 마리아 스투아르다, 로베르토 데브뢰가 바로 그러했다.
이 두 오페라는 칼라스가 전혀 시도하지 않은 작품이었다.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했던 두 작품이었지만, 다행히도 또 다른 소프라노에 의해 극장에 부활할 수 있게 되었다. 마리아 스투아르다와 로베르토 데브뢰 부활에 공헌한 사람은 터키 출신의 소프라노이자 마리아 칼라스와 같이 엘비라 히달고에게 동문수학한 레일라 젠체르.
젠체르는 마리아 칼라스 조차 손대지 않은 영역을 많이 맡았지만, 그 중 마리아 스투아르다의 경우 젠체르의 명성을 전세계적으로 알리는 계기를 만들어준 각별한 배역이 되었다.
때는 1967년 5월 2일 피렌체 5월 음악제 공연...젠체르가 처음으로 메리 스튜어트역을 맡았을 때 였다.
미국 흑인 메조 소프라노 셜리 버렛이 엘리자베스 1세, 레일라 젠체르가 타이틀롤을 맡고, 프랑코 탈리아비니가 로버트 레스터 백작, 아고스티노 페린이 조지 탈보트, 줄리오 피오라반티가 윌리엄 세실을 맡았던 당시 공연은 레일라 젠체르의 명성을 본격적으로 알리게 해준 것도 있지만, 마리아 스투아르다를 부활시킨 역사적인 공연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역사적인 실황은 Living Stage에서 음반으로 출시되었다.
레일라 젠체르가 마리아 스투아르다를 부활시켰다면, 그것을 더욱 부각시킨 소프라노도 있었다.
바로,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소프라노 조운 서덜랜드.
마리아 스투아르다는 서덜랜드가 1970년대 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많이 맡은 배역이었다. 특히, 197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렸던 마리아 스투아르다 공연은 젠체르의 실황과 더불어 명연으로 많은 호평을 받았다.
이 날의 공연 역시 실황녹음으로 남겨져 있으며 Gala에서 출시되었다.
베벌리 실즈와 몽셰라 카바예 역시 서덜랜드와 마찬가지로 1970년대에 마리아 스투아르다를 관객들에게 더욱 부각시키는데 큰 공헌을 세웠으며, 영국권 한정이지만 메조 소프라노 자넷 베이커 역시 소프라노 배역인 메리 스튜이트 역을 많이 맡아 영국 관객들에게도 마리아 스투아르다를 널리 알리게 하였다.
현역으로 활동하는 소프라노 중에선 에디타 그루베로바와 마리엘라 데비아가 메리 스튜어트역을 자주 맡고 있는 중이다.
에디타 그루베로바는 마리아 스투아르다를 두 번이나 녹음했으며, 마리엘라 데비아는 안나 카테리나 안토나치와 함께 출연한 2008년 라 스칼라 실황이 DVD로 발매되어있다.
마리아 스투아르다는 안나 볼레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사랑의 묘약처럼 자주 올라오는 레퍼토리는 아니지만, 1970년대에 자주 공연된 이후로 지금까지도 오페라 애호가들...특히, 벨 칸토 오페라를 좋아하는 이들이 꽤 많이 찾는 작품이 되었고, 위에서 언급한 젠체르, 서덜런드, 카바예, 실즈, 데비아, 그루베로바 같은 소프라노들의 활약이 없었으면 이 오페라는 지금까지도 관객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진가는 베르디의 시몬 보카네그라와 마찬가지로 너무 늦게 알려졌지만, 그래도 공기화를 면하게 된것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유명한 음악
마리아 스투아르다는 노르마의 "정결한 여신", 안나 볼레나의 실성 장면,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의 광란 장면, 사랑의 묘약의 "남몰래 흘리는 눈물", 세빌리아의 이발사 서곡처럼 처음부터 귀에 확 들어오는 음악은 아니다.
여러번 들어봐야지 그 진가를 느낄 수 있다.
그래도 가장 유명한 곡이라면 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 스튜어트가 신경전을 벌이는 이중창을 들 수 있다. 곡 제목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왕좌에서 쫓겨난 여인(Morta al mondo)". 가사 내용은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한 여인의 모욕으로 시작해서 또 다른 여인의 모욕으로 끝난다...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장면은 프리드리히 실러의 가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실제 역사에선 엘리자베스 1세가 메리 스튜어트를 한번도 만난적이 없다. 그런데, 도니제티가 이 장면을 생략하지 않고 긴장감 팽팽한 분위기를 더해서 두 여왕의 이중창을 작곡했는데, 그게 오히려 출연진들과 관객들에게 리얼리티를 선사했고, 플러스 효과까지 보게된 것.
실제로 초연 당시 마리아 스투아르다를 맡은 주세피나 론체 데 베니스는 리허셜을 할 때부터 겁에 질렸다고 한다.
이유인즉슨, 당시 엘리자베타 여왕역을 맡은 안나 델 세레가 무대위에서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그리고, 초연이 이뤄진 날. 아무런 일 없이 잘 진행되고 있었는데, 중간에 그만 사고가 터진 것이다.
바로, 2막에 나오는 두 여왕이 대면하는 장면에서 였다.
사고의 내용은 안나 델 세레가 엘리자베타 역의 너무 몰두한 나머지 주세피나 론체 데 베니스의 머리를 휘어잡고, 마구 구타를 하더니만, 이에 데 베니스가 무대 위에서 거품 물고 그대로 쓰러졌다는 것.
그 만큼 두 여왕의 신경전 이중창이 얼마나 드라마틱한 부분인가를 제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두 여왕의 신경전 이중창도 좋지만, 메리 스튜어트가 부르는 최후의 아리아 "아, 만약 당신의 말이 저를 놓는다면(Ah! se un giorno da queste)"도 비장미가 넘친다.
찰스 오스번은 이 아리아를 두고 '단순하면서도 위엄이 느껴지고, 매우 깊은 인상을 주는 노래'라고 평하기도 했다.
등장인물
엘리자베타(엘리자베스 1세):잉글랜드 튜더 왕조의 마지막 여왕(소프라노 또는 메조 소프라노)
마리아 스투아르다(메리 스튜어트):스코틀랜드의 폐위여왕(소프라노)
로베르토 레이체스터(로버트 더들리 레스터 백작):여왕의 애인이지만 메리를 짝사랑 함(테너)
조르지오 탈보트(조지 탈보트):옥에 갇혀있는 메리를 돕고 싶어하는 인물(베이스)
굴리엘모 체칠 (윌리엄 세실):엘리자베스 여왕의 충신(바리톤)
안나 케네디(앤 케네디):메리의 유모(메조 소프라노 또는 콘트랄토)
역사 속의 메리 스튜어는 어떤 사람인가?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마리아)는 1542년에 태어나서 1587년에 45세로 세상을 떠났다.
일반적으로 메리 스튜어트 또는 스코틀랜드의 메리 1세로 알려진 그는 1548년부터 1567년까지 스코틀랜드의 군주였으며 1559년부터 1560년까지 1년 동안은 프랑스의 왕비였다.
메리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5세 국왕의 유일한 적자로서 여섯 살때에 부왕이 승하하자 국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메리는 어린 시절을 거의 모두 프랑스에서 지냈으며 스코틀랜드는 섭정이 다스렸다.
메리는 1558년, 16세 때에 프랑스의 왕세자와 결혼하였고 왕세자가 1559년에 프란시스 2세로서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프란시스 2세가 1년 후인 1560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왕비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미망인이 된 메리는 이듬해인 1561년에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4년후 메리는 사촌인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와 재혼하였다. 그러다가 1567년 2월에 메리의 저택이 반대파에 의한 폭탄으로 파괴되었고 남편인 단리는 정원에서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보스웰 경인 제임스 헵번이 단리의 죽음과 관계되었다고 믿어졌으나 증거가 부족했다. 보스웰 경은 무죄방면 되었고 1567년 4월에는 메리와 결혼하였다.
두 사람을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났고 메리는 로흐 레븐성에 감금되었다. 1567년 7월, 한살 짜리 아들인 제임스에게 양위하도록 강요되었다.
제임스는 메리와 단리경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었다. 아들 제임스에게 양위한 메리는 그후 다시 왕좌를 차지하려고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반역의 누명을 쓰게 되었다.
이에 메리는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1세를 찾아가 피난처를 구하였다. 앤 볼레인과 헨리 8세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메리의 질녀가 되는 사이였다. 그런데 메리는 지난날 성공회가 아닌 가톨릭교회의 지지를 받아 자기야 말로 영국의 적법한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한바 있었다.
메리는 심지어 엘리자베스 1세를 왕좌에서 쫓아내려는 이른바 '북부의 봉기'(The Rising of the North)에 가담한 일도 있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의 존재를 위협으로 간주하여 메리를 가까이 두지 않고 영국에 있는 여러 성에 돌아가면서 감금하였다.
메리는 영국에서 엘리자베스에 의해 18년 이상이나 감금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엘리자베트 1세는 마침내 메리에게 자기를 암살하려 앴다는 죄목을 씌어서 처형하였다.
오페라를 위한 사전지식
17-18세기에 영국을 통치했던 스튜어트 왕조의 인물 중에 헨리 8세가 있다.
헨리 8세는 6명의 왕비가 있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 중에 두 번째 왕비가 앤 볼레인(Ann Boleyn)이다. 앤왕비의 딸이 나중에 영국의 위대한 여왕이 된 엘리자베스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다. 한때는 프랑스 왕과 결혼하려는 계획도 있었다.
그런가하면 레이체스터경인 로버트 더들리를 사랑하여 결혼상대자로 생각하기도 했다.
레이체스터경 로버트는 스코틀랜드의 여왕인 메리 스튜어트와 한때 사랑하는 사이였다.
메리 스튜어트는 반역죄로 영국여왕 엘리자베스에 의해 영국에 붙잡혀와 구금되었고 그 후 엘리자베스의 질투심으로 비참한 죽음을 당하였다.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Mary, Queen of Scots)과 블라디 메리(Bloody Mary)라고 불리는 영국여왕 메리를 혼돈하는 경우가 있다.
두 사람은 사촌간으로서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았을 뿐이다.
마리아 스투아르다 역할은 벨칸토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의 전형이다. 지금까지 나온 음반중 가장 완벽하게 타이틀 롤을 맡은 소프라노는 에디타 그루베로바였다. 상대역인 엘리사베타는 아그네스 발차가 맡은 것이었다.
오페라 줄거리
제 1막
영국의 귀족들과 귀부인들이 프랑스 대사가 주선한 무술시합을 관람한 후 웨스트민스터 궁전으로 돌아온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가 들어오자 귀족들과 귀부인들이 박수로서 환영한다.
엘리자베스는 프랑스왕이 청혼해 왔다고 하면서 자못 흥분된 모습이다.
여왕의 기분이 좋은 기회를 이용하여 슈르스버리(Shrewsbury)경 탈보트(Talbot)가 여왕에게 반역죄 명목으로 훠더링게(Fotheringhay)성에 갇혀있는 메리에게 관용을 베풀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메리여왕을 제거해야 한다고 보고있는 벌리(Burleigh)경 세실(Cecil)과 일당들은 엘리자베스여왕에게 자비를 베풀면 절대로 안된다고 주장한다.
여왕은 최종 결정을 내릴 때까지 시간을 달라고 말한다. 엘리자베스는 메리가 정치적으로 라이벌일 뿐만 아니라 레이체스터(Leichester)경 로버트 더들리(Robert Dudley)를 두고서도 서로 라이벌인 점을 생각하여 메리를 두려워한다.
탈보트가 로버트(Robert)를 은밀히 만난다. 탈보트는 훠더링게성에 다녀왔다고 하면서 감금되어 있는 메리가 로버트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 한장과 증표로서 메리의 초상화가 들어있는 작은 펜단트 한 개를 전한다.
메리에 대한 레이체스터경 로버트의 사랑의 마음은 초상화를 보는 순간 되살아난다. 이러한 마음은 로버트가 부르는 Ah, rimiro il bel sembiante(아, 다시 보는 아름다운 모습)라는 아리아로 표현된다.
로버트는 메리가 엘리자베스를 섬기고 있는 자기를 아직도 신뢰하고 있는데 대하여 감동하여 힘이 닿는데 까지 사랑하는 메리를 돕겠다고 약속한다.
탈보트가 자리를 뜨자 기다렸다는 듯이 엘리자베스여왕이 나타난다. 엘리자베스여왕은 탈보트와 로버트가 분명히 메리에 대한 비밀 얘기를 나누었다고 생각하여 의심한다.
로버트는 처음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부인하다가 여왕의 집요한 질문에 신하로서 계속 속일수가 없어 메리가 편지를 보냈다고 밝힌다.
엘리자베스가 편지를 읽는다. 피를 나눈 사촌간인 것을 생각하여 제발 만나서 얘기를 나누자는 내용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처음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 같았으나 로버트의 마음속에 아직도 메리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을 알고 매우 위협적이고 거친 소리로 메리를 만나겠다고 말한다.
메리가 훠더링게성에서 유모 안나(Anna)와 함께 옛날 프랑스에서 즐겁게 지내던 때를 회상하며 감상에 젖어있다.
메리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아리아는 콜로라투라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이다.
멀리서 왕실의 사냥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들린다. 로버트가 나타나 사냥 나팔소리는 명분이며 실은 엘리자베스가 메리를 만나기 위해 오고 있다고 전한다.
로버트는 메리에게 제발 엘리자베스를 보면 그저 머리를 숙이고 순종하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메리는 엘리자베스에 대한 감정이 북받쳐 로버트의 당부를 거절한다.
로버트는 메리를 위해 죽을 각오까지 되어있다고 하며 다시한번 간청하자 그제서야 메리는 로버트가 죽는다는데 대하여 두려움을 느끼고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한다.
엘리자베스가 도착하자 메리는 마지못해 엘리자베스 발아래 무릎을 꿇는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메리의 지난 일을 꾸짖으면서 자기의 안위만을 위해 로버트를 이용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로버트와 탈보트는 너무나 돌변한 상황에 대하여 두려움을 지나 공포심을 갖는다.
제 2막
제2막은 웨스트민스터 궁의 엘리자베스 거실이다.
엘리자베스는 비록 메리에게 심한 말을 했지만 메리를 사형에 처한다는 서류에 서명하는 것만은 주저하고 있다.
로버트가 들어와서 다시한번 여왕의 관대함을 보이라고 간청하자 엘리자베스의 결심은 돌연히 확실해 진다.
여왕은 즉시 사형장에 서명을 하고 로버트로 하여금 직접 처형장면을 지켜보도록 명령한다.
세실과 탈보트가 사형집행의 명령서를 가지고 훠더링게 성을 찾아온다. 메리에 대한 사형집행이 준비된다.
세실이 개신교 목사님을 불러 마지막 기도를 하자고 제안하자 메리는 자기의 종교(가톨릭)로서 마지막 의식을 치루겠다고하며 거절한다.
메리는 탈보트와 둘이서만 있게 되자 고해성사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탈보트가 숨겨가지고 온 신부복으로 갈아입고 메리의 고해를 받는다.
메리가 처형장에 들어선다. 검은 옷에 왕관을 썼다.
메리는 가족들과 유모 안나에게 자기를 대신하여 기도문을 외우도록 한다. 세실이 들어오고 이어 탈보트가 들어온후 마지막으로 로버트가 들어온다.
로버트의 목소리는 눈물에 젖어있다. 메리는 로버트를 용서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처형장으로 조용히 발걸음을 옮긴다. 메리가 중얼거리듯 마지막 기도를 드리는 장면은 가장 깊은 감동을 준다. 메리는 고귀한 적막 중에 죽음을 마지한다.
베스트 아리아
「우리 모두는 버려진 여인들(Da tutti abbandonata)」(S+T),
「자! 맞이하자, 세상의 죽음, 고난의 죽음을(Deh! l’accogli... Morta al mondo, e morta al trono)」(Sextet),
「또 다른 비난으로 울리라(Un’altra colpa a piangere)」(S+T),
「앤 불린의 더럽혀진 딸(Figlia impura di Bolena)」(S),
「아, 다시 보는 아름다운 모습(Ah! rimiro il bel sembiante)」
오페라 대본 원문 및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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