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箕子)는 중국 상(商)의 군주인 문정(文丁, 太丁이라고도 함)의 아들로 주왕(紂王)의 숙부(叔父)이다. 주왕(紂王)의 폭정(暴政)에 대해 간언(諫言)을 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미친 척을 하여 유폐(幽閉)되었다. 상(商)이 멸망한 뒤 석방되었으나 유민(遺民)들을 이끌고 주(周)를 벗어나 북(北)으로 이주하였다. 비간(比干), 미자(微子)와 함께 상(商) 말기의 세 명의 어진 사람[三仁]으로 꼽힌다.
성(姓)은 자(子), 이름은 서여(胥余)이다. 기(箕, 지금의 山西 太谷)에 봉(封)해져 기자(箕子)라고 한다. 상(商)의 28대 군주인 문정(文丁, 太丁이라고도 함)의 아들로 주왕(紂王)의 숙부(叔父)이다. 농사(農事)와 상업(商業), 예법(禮法) 등에 두루 능통하였으며, 상(商)을 떠나지 않고 주왕(紂王)의 폭정(暴政)에 대해 간언(諫言)하다 유폐(幽閉)되어 비간(比干), 미자(微子)와 함께 상(商) 말기의 세 명의 어진 사람[三仁]으로 꼽힌다.
기자(箕子)가 봉(封)해진 기(箕)는 상(商)의 영토 가운데 가장 북쪽이고, 토방(土方), 귀방(鬼方) 등으로 불리는 북방(北方) 이민족(異民族)이 강성(强盛)했던 지역이다. 기자(箕子)는 이들 이민족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여 복속(服屬)시켰고, 그러한 공을 인정받아 태사(太師)로서 형인 제을(帝乙)을 보좌하며 상(商)을 융성(隆盛)케 하였다.
하지만 제을(帝乙)의 뒤를 이어 주왕(紂王)이 즉위한 뒤 상(商)은 급격히 쇠락하였다. 주왕(紂王)은 자신의 재능을 과신(過信)하여 신하의 간언(諫言)을 듣지 않았으며, 달기(妲己)를 총애하여 호화로운 궁궐을 짓고 ‘주지육림(酒池肉林)’의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기자(箕子)는 형인 비간(比干)과 함께 주왕(紂王)에게 거듭 간언(諫言)하며 정치를 바로잡으려 하였다. 주왕(紂王)이 상아젓가락[象箸]을 만들게 하자 기자(箕子)가 “상아젓가락으로 식사를 하게 되면 그 때까지 사용하던 질그릇이 성에 차지 않아 옥그릇을 만들게 하고, 옥그릇을 쓰면 요리가 성에 차지 않아 진귀한 음식을 만들게 하고, 다음에는 화려한 복장과 호화스런 궁궐을 만들게 한다”며 간언(諫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여기에서 하찮은 낭비가 망국(亡國)의 사치로 이어진다는 ‘상저옥배(象箸玉杯)’라는 말이 생겼다.
하지만 주왕(紂王)은 폭정(暴政)을 멈추지 않았으며, 간언(諫言)을 하는 숙부(叔父) 비간(比干)의 충심(忠心)을 확인한다며 몸을 갈라 심장을 끄집어내는 만행(蠻行)을 저질렀다. 사람들은 기자(箕子)에게 상(商)을 떠날 것을 권했지만, 기자(箕子)는 신하된 도리로 임금이 간언(諫言)을 듣지 않는다고 떠나는 것은 임금의 악행(惡行)을 부추키는 것으로 따를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리고 머리를 풀어 미친 척을 하며 남의 노비가 되려 하였다. 하지만 주왕(紂王)은 그를 사로잡아서 유폐(幽閉)시켰다.
주(周)의 무왕(武王)은 충신(忠臣)을 잔인하게 살해한 주왕(紂王)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제후들을 규합하여 상(商)을 공격하였으며, 기원전 1046년 상(商)을 멸망시켰다. 그는 갇혀 있던 기자(箕子)를 풀어주고, 그를 찾아가 정치(政治)에 대해 물었다. 기자(箕子)는 무왕(武王)에게 하(夏)의 우(禹) 임금이 정했다는 아홉 가지 정치의 원칙을 전했다고 한다. 이를 ‘홍범구주(洪範九疇)’ 혹은 ‘기주(箕疇)’라고 하며, <서경(書經)>의 ‘홍범편(洪範編)’에 그 내용이 전해진다.
하지만 기자(箕子)는 주(周)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며 상(商)의 유민(遺民)을 이끌고 북쪽으로 이주했다. 당시 기자(箕子)가 상(商)의 멸망을 슬퍼하며 지었다는 ‘맥수지시(麥秀之詩)’에서 ‘맥수지탄(麥秀之嘆)’이라는 성어가 비롯되었다. 일부에서는 기자(箕子)가 한반도(韓半島)로 옮겨가 그 곳에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러한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은 <사기(史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 <상서대전(尙書大傳)>의 ‘은전(殷傳)’, <삼국지(三國志)>의 ‘위지(魏志)’ 등의 중국 사서(史書)와 <삼국유사(三國遺事)>, <제왕운기(帝王韻紀)>, <동국사략(東國史略)> 등의 고려(高麗)와 조선(朝鮮) 시대의 사서(史書)들에 나타나 있다. 조선(朝鮮) 시대에는 이러한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에 근거하여 단군(檀君)과 함께 기자(箕子)의 제(祭)를 지냈으며, 그의 사당(祠堂)을 세우기도 하였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요동(遼東)과 한반도(韓半島) 지역의 청동기가 중국과 크게 다르며, 한(漢) 이전의 기록들에서는 기자(箕子)가 조선(朝鮮)으로 갔다는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하여,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이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기자[箕子]
첫댓글 조선시대 왕비를 많이 배출한 명문 청주한씨가 기자의 후손이군요.
이참에 기자에 대하여 알게 되네요^^
주위에서 사라져 가는것들이 많치요
오래된것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그래도 나름 필요한 것일텐데 말입니다.
여전히 부지런하십니다.
여기저기 나다니는 재미로 삽니다...^^
음~~그렇군요~^^*^^
옹달샘님도 한번 찾아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