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어린이 만화 역사
- 식민지 시대의 어린이 만화
백정숙 [개똥이네집 2013.06. 제 91호]
만화를 보는 것이 요즘에는 흠이 아니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거의 금기시되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만화를 깎아내리는 사회 인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 나라 초기 만화는 시사만화로 시작했다. 1909년 <대한민보> 창간호 1면에 한국화가인 이도영이 그린 만화가 우리 나라 만화의 시작이다. 지금의 신문 시사만평이라고 보면 된다. 이도영의 만화는 1910년 한일병탄으로 강제 폐간이 될 때까지 1년여 동안 연재되었다. 이도영은 일본에 주권을 빼앗긴 풍전등화와 같은 민족의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했다. 문맹률이 높던 그때에 이 만화는 친일파와 일본의 만행에 대해 알기 쉽게 전달하였다.
그렇다면 어린이 만화는 우리 나라에 언제 등장했을까? 우리 나라 어린이 만화는 1920년대가 되어서야 나타난다. 한일병탄이 된 1910년은 <대한민보>를 비롯해 대부분의 신문과 잡지가 강제 폐간되었다. 그 뒤에는 일본총독부에서 발행하는 신문이나 잡지에서 일본이나 외국 만화들을 소개하기는 했지만 우리 나라 작가의 작품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다가 1919년 3·1만세운동으로 일본의 문화통치가 시작된 1920년대에 우리 나라 만화가 발전하였고, 마침내 어린이 만화도 활발하게 나타났다.
우리 나라 초기 어린이 만화
우리 나라 초기 어린이 만화는 방정환 선생이 만든 잡지 <어린이>에서 시작했다. 식민지 조국의 앞날에 희망을 갖기 위해서 어린이 운동을 펼친 방정환 선생이 심혈을 기울인 <어린이>에 우리 나라 작가의 어린이 만화가 처음으로 실린 것이다. 주로 잡지 기사 위쪽에 2칸에서 4칸 정도의 짤막한 만화가 가끔씩 실렸는데, 교훈과 계몽적인 내용이다. 특히 창간 2년을 축하하는 1925년 3월 호에 실린 안석주의 ‘씨동이의 말타기’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 만화는 6칸으로 콩트 형식의 만화다. 한 쪽에 두 칸씩 3쪽에 실린 것으로 만화 밑에 있는 글을 보면, ‘① 할아버지 따라서 곡마단 구경 갔다가 ② 광대 말 타는 것을 부럽게 보고 ③ 집에 돌아와서 고단히 자다가 ④ 말 타는 꿈을 꾸면서 신이 났습니다 ⑤ 한참 타다가 보니까 말이 아니고 ⑥ 할아버지를 탔던 고로 아야야 아야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에서는 말풍선과 만화 기호를 사용해서 의성어, 의태어를 표현해 훨씬 실감이 난다. 아무리 꿈속이라지만 어린 손자가 할아버지 머리채를 쥐고 배 위에 올라탄다는 만화는 그때 어린이한테는 실로 파격이었다.
방정환 선생이 돌아가신 뒤 <어린이>는 침체되었다가 다시 새 기운을 찾으면서 1933년 2월 호에는 컬러로 된 뒤표지에 ‘나의 실패’라는 만화가 실렸다.
작가는 1970년대를 풍미했던 만화가 고우영의 큰 형인 고상영이다. 모두 9칸으로 뒤표지를 다 차지한 이 만화는 ‘내가 어떤 날 ① 시계 소리에 잠이 깨어서 ② 눈을 떠 보니 자 큰일 ③ 허둥지둥 옷을 주서 깨고(주워 입고) ④ 밖으로 뛰어 나와 ⑤ 지나가는 차에 매달려 ⑥ 학교에까지 달려와 보니 ⑦ 어렵쇼, 오늘은 일요일 아닌가 ⑧ 나는 그만 부끄러워서……’ 하는 글이 달려 있다. 지금 봐도 손색이 없는 그림으로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명랑만화를 보는 듯하다.
신문사의 신문과 잡지로 다양해지는 어린이 만화
어린이 만화가 <어린이>에 실린 뒤에 1930년대 신문과 잡지에 많은 만화들이 발표되었다. 특히 1920년에 창간한 <동아일보>가 1930년대가 되면서 날마다 ‘어린이 일요(日曜)’ 면을 만들어 어린이들이 볼 수 있는 꼭지를 마련했다. 상식, 역사, 동요, 동시, 소설, 만화를 실었는데 만화는 모험을 장려하면서 선행을 하는 계몽 이야기와 교양을 담았다. <조선일보>에서도 <소년조선일보>를 만들어 무료로 나누어 주었는데 주마다 어린이 만화를 연재하였다.
어린이 잡지도 많았는데, <조선일보>가 발행한 <소년>에서 1940년 11월호부터 연재된 정현웅의 ‘홍길동’이 눈길을 끈다. ‘홍길동’은 6쪽으로 2회까지만 연재되고, 1940년 12월 호로 강제 폐간되었다. 일본이 광기 어린 전쟁을 휘몰고 있던 시기에 정현웅이 조선 의적인 ‘홍길동’을 호기롭게 연재한 것과 그것을 6쪽이나 실으면서 야심차게 기획한 편집부 모두 다 대단한 용기라 생각한다. 정현웅의 ‘홍길동’은 2회에 그쳤지만 이 작품이 세 번만 더 연재되었어도 만화 단행본 한 권 분량은 충분히 되었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 1945년에 나온 김용환의 《홍길동의 모험》보다 5년이나 빨리 어린이들이 ‘홍길동’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 힘든 고난의 시간에 어린이들한테 많은 힘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아쉬움이 크다.
식민지 시대의 어린이 만화는 아동 만화, 소년 만화 같은 이름으로 부르면서 1925년 뒤부터 쉼 없이 지면을 지켜 왔다. 작가들은 전업 만화가가 아니고 화가나 문인들이었다. 그들이 표현한 어린이 만화는 거의 2칸에서 1쪽 정도 되는 적은 분량으로 마지막 칸에서는 반전을 시키면서 웃음과 계몽과 교훈을 주는 형식이다. 내용은 탐험이나 모험으로 도전 정신을 권하면서도 약자에 대한 배려를 담고 있고, 어린아이들의 천진한 장난과 실수들을 사랑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만화 인물의 이름으로 ‘복남이’, ‘복동이’, ‘신동이’, ‘똘똘이’, ‘똑똑이’ 들이 자주 쓰이는 것으로 봐서, 어린이의 존재가 암울한 식민지 상황에서 희망의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른들이 보는 만화 속 인물들은 주로 ‘멍텅구리’, ‘머저리’, ‘벽창호’, ‘뚱딴지’, ‘얼간 선생’ 들로 표현된 것과 대조된다.
이는 어린이한테 자긍심을 심어 주자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식민지 아래에서 속박과 핍박에도 두려워하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가라는 뜻으로 어린이가 지닌 명랑함을 잃지 말기를 바랐던 것이다. 또 어린이다운 엉뚱한 호기심을 잃지 말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마음이 어린이 만화 속에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우리 나라 초기 어린이 만화는 어른들이 어린이한테 권하는 만화로 출발하였다.
.............................................................................................................................................................................
<개똥이네 집>, <개똥이네 놀이터> 신청하기
위 글은 <개똥이네 집> 2013년 06월_91호에 실릴 글입니다.
어린이 문학 운동사에 대한 이야기로 이주영 선생님이 쓰신 글입니다.
<개똥이네 놀이터>는 어린이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겠다는 보리 출판사의 철학을 고스란히 담아 펴내는 어린이 잡지입니다.
부모님 책 <개똥이네 집>에는 오랫동안 어린이를 살리는 일에 앞장서 온 분들이 어른들에게 들려주는 교육 이야기를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