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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해변시인학교에 다녀와서
강기옥 (시인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 쓰기 전에
- 보령문인협회에서 보령시와 한국중부발전, 보령교육지원청, 보령시발전협의회의 후원을 받아 ‘누구나 시인’이라는 주제로 ‘2017년 보령머드축제와 함께 하는 보령시인학교’를 개설했다. 7월 22일(토요일) 오후 1시부터 23일(일료일)까지 1박2일로 진행하는 이 해변시인학교의 안내를 받고 주저 없이 참가신청서를 제출했다. -
그리스인들은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오 구분하여 인식한다. 우리가 통상 시간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물리적 시간이 크로노스(Chronos)다. 빈부귀천 없이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지는 시간, 병상에서 하루만이라도 편안히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나 주색잡기에 빠져 세월을 낭비하는 사람이나 공평하게 누리는 것이 크로노스다.
카이로스(Kairos)는 시간을 의식하는 자가 누리는 주관적이며 정신적인 가치의 시간을 뜻한다. 지루한 시간인데도 어찌 순간이 지나간 듯한 느낌이 들거나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긴 시간이 간 것처럼 느끼는 것이 카이로스다.
글을 매개로 만나는 인연, 문인들끼리 대화를 나누며 정보를 교환하는 것은 크로노스일 수 없다. 글을 쓰는 것이 정신잡업이기 때문에 문인들의 만남은 매 순간이 카이로스다. 힘께 있는 시간은 시간낭비일 수 없고 긴 시간도 짧게 느껴지는 유용한 카이로스의 연속이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 여름에 보령문인협회에서 카이로스의 기쁨을 나눌 수 있는 만남의 장을 열었다. 문인을 위한 잔치마당이기에 서슴없이 보령을 찾은 것이다.
“누구나 시인”
가슴이 벅차오르는 말이다. 작게 웃어주는 들꽃 한 송이에도 가슴이 설레고 노을을 닮아가는 감을 보고도 감상(感傷)에 젖던 사춘기 시절에는 누구나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시적 대상으로 살아나 꼼지락 꼼지락 감정을 흔들어대던 시절, 행여 그 감상이 달아날까봐 몇 마디 말로 중얼거려보기도 하고 그 느낌이 상처받을까 다른 생각을 차단해버리던 시절에는 주변의 모든 것들이 시였다. 그러나 막상 글로 써보려면 그렇게 좋았던 생각들이 아득히 달아나버리고 머리 속이 막막해져 시의 위대함(?)에 손들어 항복해버리곤 했었다. 그런 중에도 김소월이나 박목월처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시를 만난 사람은 문학에 함몰(陷沒)되었다. 글 몇 줄에 담긴 감상들로 인하여 환상의 나래를 펴고 나르시즘적 즐거움을 향유했다. 그러나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시를 읽은 사람은 시와의 단절을 고하는 자괴감에 빠져들어 시는 나와 상관없는 먼 나라의 일처럼 생각했다. 그렇게 사춘기 시절은 문학에 매료되어 향유하는 계층과 문학의 고고한 이상(?)에 차단되어 스스로 벽을 치는 단절의 계층으로 양분했다.
문학이 좋든 싫든 주어진 길에서 충실히 살면서 특별히 ‘시인’이라는 개념에 관심을 쏟지 않았는데 갑자기 시야에 나타난 ‘누구나 시인’은 누구에게나 새로운 도전임에 분명하다. 시인이라는 직함으로 살아온 내게도 가슴 한 구석을 자극하는 울림이 있었기에 문학과 친근하게 지내온 사람이나 거리를 두고 산 사람이나 ‘시인’이라는 단어는 무디어진 감정들을 콕콕 찔러 옛 감정을 되살려내는 자극제였으리라. 새로운 도전을 받아 사춘기적 감상을 회복하려는 의지가 샘솟아 망설임 없이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성주사지와 충청수영(오천성), 남포읍성, 최치원 유적지, 김좌진 장군과 보부상들의 묘지 등을 답사하기 위해 수차례 방문했지만 문학을 인연으로 찾는 기분은 사춘기의 설렘과 비슷했다. 나의 문학이 어느 단계에 있는지를 점검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소렌토R을 가득 채운 동료들과 함께 붐비는 여름 휴가철의 대천항을 찾았다.
* 문학의 언어 – 그 화려한 잔치
2017 보령머드축제와 함께 하는
보령해변시인학교
누 구 나 시 인 !
참가 문인들에게 배부해준 책자의 겉표지에는 위 문구로 제작한 안내 팜플렛을 9명의 보령문인협회 회원들이 붉은 티셔츠를 입고 환영하듯 환히 웃으며 서있는 모습으로 장식했다. 책자 안에는 식순과 일정표, 인사말, 환영사에 이어 도종환 문화체육부 장관의 초대시, 나태주 시인의 축시, 한국문인협회 이광복 부이사장의 격려사에 이어 보령시장 김동일, 국회의원 감태흠, 보령시의회의장 박상배, 보령교육지원청장 조민행, 충남문인협회장 겸 충남문화재단 대표 신현보님의 환영사와 축사까지 챙기는 의전적 글모음에 특별한 감회가 솟아올랐다. 지방의 작은 문인행사에 관계 기관의 모든 분을 초대하여 인사를 시킨 것은 문인의 위상을 밝히려는 의도적 행위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 작은 의전에서 형식적인 행사의 관행을 읽을 수도 있겠지만 이를 통해 문인의 위상을 확인하고 보령문인협회의 능력과 힘을 볼 수 있어 마음이 뿌듯했다. 더구나 보령문인협회에서 참가자의 편의를 위해 제공한 62쪽 분량의 국배판(A4용지크기)의 책자는 글씨도 큼직큼직한 12P로 제작하여 돋보기가 필요한 노년층을 위해 세심히 배려한 모습을 읽을 수 있어 모두가 흐뭇해했다.
7월 22일 토요일 오후 3시. 의전행사가 끝나고 문정희 시인이 “여성, 생명, 사랑”을 주제로 진행한 특강은 그날의 하이라이트였다. ‘나의 시세계를 중심으로’라는 부제로 여성의 한계를 극복하며 문인으로 살아온 날들을 실증적 사례를 들며 강의하는 것이 참가자들의 마음을 촉촉이 적셨다. 더구나 먼저 간 선배 문인들의 삶을 예로 들어 부연설명한 점은 이해를 돕는 감동이었다. 그렇게 문정희 시인에게 빠져든 시간은 강의실을 가득 메운 문인들의 열기에 바삐 흘렀다. 후텁지근하여 졸립고 지루해야 할 한여름의 오후가 어찌 그렇게 빨리 지나갔는지, 문정희 시인의 흡인력에 끌려 모두가 기나긴 터널을 한 순간에 지나온 느낌이다. 사람은 문학적 공감대가 있으면 아무리 긴 시간도 지루하지 않고, 싫증스러운 언어도 음악처럼 감미롭다. 강의 벽두에 문정희 시인이 스스로 밝힌 칠순이라는 말은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실증하는 현장이었다.
2부의 문학토론은 누구나 기대하는 시간이다. 문정희 시인의 특강이 자신의 삶을 토대로 시인의 삶과 가치를 설파하여 여성문인으로서 현실을 어떻게 극복하며 어떻게 시를 써왔는지를 밝힌 1인칭의 고백적 시간이라면, 문학토론은 문학의 전반적인 흐름과 문학의 사회적 책무, 그리고 문학인들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함께 논구(論究)하며 방향타를 찾는 공동의 시간이다. 그래서 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다투어 앞자리에 앉아 질문도 하고 자기의 의견도 반영해보려 애를 쓰는 것이다.
이날의 토론은 이재무 시인의 ‘지역문화의 활성화를 위하여’, 이승하 시인의 ‘서울과 지방의 문화적 격차를 극복하기 위하여 – 문학관·문화제·문학지를 중심으로’, 공광규 시인의 ‘지방자치단체와 문인들의 협력이 중요하다’라는 제하에 지방 문화의 활성화에 대한 공통주제로 이루어졌다.
연예인만이 팬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문인도 그에 못지않은 열성팬이 있다. 다만 밖으로 표출되지 않아서 그렇지 작가와 독자 사이에 오가는 공감대는 시공을 초월한다. 김유제 보령문인협회 회장 겸 해변시인학교 교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의 토론은 예정시간을 훨씬 초과할 만큼 열띤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시간에 쫓겨 서둘러 마감해야 하는 아쉬움은 내년을 약속하는 기대로 대신했다.
보령을 찾은 문인들의 건강을 챙기기 위해 김유제 회장은 또 하나의 특강을 마련했다. 감초당 한의원의 김영철 원장을 초빙하여 ‘아름다운 소통’이라는 제목으로 건강한 가정, 건강한 사회를 이루는 비방을 안내하게 했다. 김영철 원장은 전인상담치유 서해연구원장을 겸하고 있는 전문상담사로서 평이한 사실에서 소통의 원리를 찾아내고 가정의 평화와 개인의 건강으로 이어지는 순환적 논리로 강의를 진행했다. 누구나 쉽게 공감하고 효과를 볼 수 있는 내용들은 문학으로 편식에 기울기 쉬운 분위기를 새롭게 바꾸는 양념구실을 했다. 더구나 강의 내용의 현장 적용은 우리의 생활 속에 내재해 있는 동양의학을 실생활에도 쉽게 적용할 수 있는 지혜를 배우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마무리한 식전 공개행사는 최후의 고지를 향한 도움닫기였다. 대천 해수욕장 상동 수양관의 강의실에서 문인들이 내뿜는 열기는 아직도 백사장에 나뒹구는 밤의 열기를 능가했다. 시낭송과 장끼자랑에 이어 보령문인협회 회원들의 행위 예술(퍼포먼스)은 참가 문인들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곱게 차려 입은 한복, 순간순간에 맞는 적절한 무대복장, 언제 준비했는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무용 등 입장료를 받아도 불만하지 않을 만큼 완벽하고 철저했다. 보령의 해변시인학교가 해를 거듭할수록 발전된 모습을 보이리라는 기대감에 깊어가는 밤을 잊은 시간이었다.
그렇게 밤의 열기가 한참 오를 무렵 감자기 김유제 회장이 무대에 올랐다. 사회자의 마이크 잡고는 긴급 보고할 사항이 있어 올랐단다. 흥성거리던 분위기가 잠시 조용해지자 김유제 회장이 말문을 열었다.
“미국의 문학행사에 참여 중인 국제PEN 한국본부 손해일 이사장님과 나태주 선생님께서 내일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인천행 비행기를 타셨답니다. 행사에 안내해드린 대로 어김없이 내일 오전에 특강을 해주실 것입니다.”
내빈 소개에서 두 분이 빠져 실망했던 문인들은 ‘와~’ 하는 함성과 함께 박수를 쳤다. 문인 스스로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문단의 어른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미국에서 보령이 어디라고-, 서울도 아니고 대전도 아닌 충청도 변방까지 문인들을 만나기 위해, 문인들과 문학을 논하며 문정(文情)을 나누기 위해 택한 고행(苦行)에 머리가 수그러졌다.
세상 사람들이 시가 밥을 주느냐고 빈정거려도 시를 쓰는 자부심을 잃지 않는 것은 문단의 선후배와 동료들간에 켜켜이 쌓인 문정(文情)이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은 표를 좇아 하루살이 같이 연설해대지만 문인들은 이처럼 정(情)으로 맺어진 의리를 좇는다. 시 한 편이 커피 한잔 만 못해도 시 한 편에 마음을 풍부하게 채우는 여유가 문인이요 시인의 멋이지 않은가. 이 시대에도 문인들이 선비적 사유(思惟)와 낭만을 즐길 수 있는 것은 바로 문인의 자부심을 지켜주는 동료와 선후배가 있기 때문이다.
김유제 회장의 중간보고 후 그치지 않는 밤의 열기는 자정을 넘어 날짜 변경선에 이르러 겨우 마감할 수 있었다. 끝까지 자리를 지킨 보령문인협회 회원들과 집행위원, 서초문인협회 회원, 그리고 여러 곳에서 참여한 문우들이 내일의 행사를 위해, 그리고 밤바다의 정경에 취하기 위해 화려한 무대의 불을 껐다.
소렌토R의 구성원들은 잠자리를 잃었다. 특히 나는 이름이 여자이다보니 여자들과 합방을 해놓아 차마 여인들 틈에 끼어 자자고 할 수도 없었다. 김윤자 시인을 비롯한 서초문협 회원들은 문학답사를 할 때마다 ‘나는 외국에 가도 여자와 룸메이트가 된다.’는 나의 말을 농담으로만 들었는데 오늘 현장에서 벌어진 일을 보고 모두가 깔깔 대며 웃었다. 집행부에서 배정한 대로 여인의 방에서 자면 나는 깨구락지(개구리)가 되어 꼼짝도 못할 텐데, 숨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하고 지샐 밤이 두려워 밖으로 나온 것이다.
제법 센 파도가 더듬거리는 백사장 주변을 거닐다가 문명희 화백이 먼저 바닷물에 몸을 담갔다. 류시정 시인이 주변을 얼쩡거리다가 문명희 시인의 물벼락을 맞아 그대로 물귀신이 되었고 박송희 시인이 분위기에 이끌려 스스로 몸을 담그는 등 해변의 여인들이 밤바다를 어거했다. 머물 방도 없는 나는 차마 옷을 버릴 수가 없어 윗도리를 벗고 바지를 걷었다. 젊은 날 육체미 운동을 즐겼던 내 가슴은 아직도 탱탱하여 사진발이 잘 받아 자신이 있다. 김황호 시인이 카메라를 들이대며 카메라 감독처럼 지시를 해대지만 파도는 우리를 삼킬 듯 점전 거칠어졌다. 이여진 시인의 모델과 같은 몸매로 요리조리 파도를 피하다가 신발을 벗는 수준에서 머물다가 그녀도 결국엔 물가에 합류하여 소렌토R 구성원은 추억의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그 밤 해양경찰의 제지가 없었으면 모두가 물에 빠져 온 몸이 짭짤한 생선이 되었을 텐데 -
김황호 시인은 갈 곳이 없는 나를 위해 교육장의 모퉁이에 잠자리를 틀었다. 대형 선풍기가 지하 강당을 소음으로 웅웅거려도 한 밤의 정경은 고이 접혀들었다.
‘하늘의 별이 잠들지 않는데 어찌 시인이 잠잘 수 있나’
강남문인협회에서 활동하던 시절, 분위기를 이끌던 여성시인이 야외 행사 때 잠자리를 찾는 사람들을 면박하며 하는 말이다. 지금도 인사동에서 시낭송회를 이끌어가는 이 시인은 어느 별을 보고 있을지, 해변에서 잠을 청하는 시인들에게 ‘어찌 시인이 잠을 자느냐’고 호통 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7월 23일 일요일. 어젯밤의 열기에 아직 잠이 덜 깬 듯한 모습들이 그래도 새벽바다를 걷겠다고 끼리끼리 모래사장을 걷는 모습이 보인다. 다행히 썰물이라 백사장이 넓게 열려 있었다. 하루쯤 잠을 설쳐도 좋은 날은 누구에게나 있었을 것이지만 아직도 잠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문우들은 새벽바다의 비릿한 향내를 느끼지 못했으리라. 그래도 새벽바다를 걷는 사람들은 대부분 밤바다를 지킨 사람들이다. 놀 줄 아는 사람이 밤낮을 가리지 않는 법이다. 새벽바다를 걷는 저들이 오늘의 마무리도 멋지게 하리라 생각하며 내가 배정된 방을 기웃거렸다. 10명이 배정되었는데 내가 빠졌으니 한결 여유로웠다며 웃음 반 동정 반으로 위로했다. 그저 웃자고 찾아들었으니 기옥이란 이름일 남겨주신 부모님께 감사의 인사라도 올려야 할 판이었다.
김유제 회장이 약속한 두 어른이 오셨다. 상동연수원이 뒤집혔다. 이곳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도로에 깔았을까? 더불어 겹친 피로는 또 얼마나 많은 육체의 고뇌를 동반했을까? 꼭 가서 문인을 만나야 한다는 기쁨의 다짐이 있었기에 설친 잠도 이겨낼 수 있었고 온 몸을 짓누르는 피로도 떨쳐낼 수 있었으리라. 끌어안고 등을 두드리는 것이 가장 친밀(?)한 한국적 인사로 자리 잡은 지도 이미 오래, 팔팔 뛰는 정도는 예쁜 강아지를 만난 것보다 더 다정하다. 이리 찍고 저리 찍고, 사진 한 번 찍으려면 목에 깁스를 해야 할 만큼 폼을 잡아대는데 태평양을 건너 서해바다로 찾아 온 두 어른은 오히려 즐거운 표정으로 생글생글 폼을 잡아 주신다. 시인이 시인과 더불어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이어갈 수 있다면 시는 쓸 만한 작업이다. 정말 값어치 있는 노동이다.
기쁨을 가슴에 담아 놓고 이어지는 손해일 이사장의 특강은 ‘현대시의 흐름과 세계화의 길’이었다. 김소월의 시가 좋은 시라고 공부하여 외워대지만 영국에 가서 외웠더니 ‘중학생이 쓴 시냐’고 반문하더란다. 이 설명이 한국 시의 현주소를 대변한다. 어떤 시를 써야 하는지, 어떤 기법으로 시를 전개해야 하는지 자신의 시를 예로 들어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더불어 오늘날의 현실을 시로 표현해내는 기법과 풍자적 시쓰기의 표본은 많은 문인들의 공감을 자아냈다.
나태주 시인의 고백은 진솔했다. 내가 ‘풀꽃’을 읽고 의문을 가졌던 내용을 그대로 설명해주어 반가웠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풀꽃’ 전문 (나태주)
대분분의 사람들이 이 시를 읽고 풀꽃처럼 예쁜 여인을 떠올린다. 그러나 나는 이 시를 읽는 순간 예쁘지 않은 사람을 보고 쓴 시라고 직감했다. 너는 예쁘지 않은데 자세히 보면 어딘가 예쁜 구석이 있다는 완곡한 표현이다. 나태주 선생님은 풀꽃의 시인답게 이 시를 설명했다. ‘사실은 예쁘지 않은 여인을 보고 쓴 시인데’라는 전제하에 그의 시세계를 설명했다. 이제 두 세상을 살고 있으니 문인이 부르면 어디든 묻지 않고 찾아간다는 문인으로서의 사명감에 또 한 번 존경의 마음이 샘솟았다. 다시 살 것 같지 않은 큰 병을 치루고 되찾은 건강으로 문학의 길을 꾸준히 가겠다는 다짐이 후학들을 숙연하게 했다.
대천항의 태양은 아직도 쨍쨍하다. 1박2일의 일정을 마친 문우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다시 서해안 고속도로가 문인들의 이야기꽃으로 가득 메워지리라. 나는 다시 소렌토R의 구성원을 이끌고 보령의 문화재를 찾았다. 상화원의 죽도, 최치원의 유적지, 성주사지를 거쳐 청라면 은행나무촌을 찾았다. 김유제 회장이 적어준 주소대로 그의 문학관을 방문하기로 했으나 시간이 맞지 않아 다음에 찾겠노라고 양해를 구했다. 여주에서 혼자 오신 진복순 시인이 우리 일행과 합류하여 같이 답사한 것은 또 하나의 보람이다.
제언
요즈음은 시낭송이 대세다. 곳곳마다 개설한 시낭송 강좌는 만원을 이룰 만큼 인기다. 그러나 시낭송의 자리에 가면 볼썽사나운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자기가 낭송할 때는 의상과 배경음악을 맞춰 한껏 분위기를 고취하는데 정작 다른 사람이 낭송할 때는 잡담하거나 자리를 뜨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낭송 시간이 길어지면 지루하다고 하품을 해댄다. 그래서 시낭송을 진행하는 기법을 다양하게 연구하고 있는데 구리문인협회(회장 한철수)에서 진행하는 시낭송은 문인단체에서 배워야 할 전범(典範)이다.
보령문인협회에서 진행한 해변시인학교에서도 눈에 보이는 지적사항이 있어 제언으로 남긴다. 모든 것을 매끄럽고 원만하게 진행한 데다 보령문협회원들의 애쓴 흔적이 보여 크게 불만을 토로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일부 논하는 분들이 있어 기록으로 남긴다. 이는 보령문인협회를 대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지켜야 할 상식이며 문인의 품위에 관한 내용이라서 두 가지로 요약 제시한다.
첫째 세 분의 시인을 단상에 모셔놓고 토론을 진행하는데 진행을 빨리 끝냈으면 하는 분위기로 이끌어가는 장면이었다. 청중은 보다 깊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 질문을 하는데, 더구나 답변할 시인을 지적하여 질문하는데 시간이 문제일 수는 없다. 시간이 부족하면 다음 진행을 위해 청중의 뜻을 존중하면서도 거부반응이 없게 시간을 절약하는 듯한 진행의 묘미를 보여야 했다.
둘째 예식장에 모인 하객과 같은 행동을 보인 참여자들이다. 첫날밤의 마지막 행사에서 역시 시낭송의 현장과 똑 같은 장면이 일어났다. 먼저 낭송하거나 장끼를 발휘한 문인들이 자리를 비우고 밤바다로 나가버린 것이다. 사회자와 집행부가 마지막 순간까지 분위기를 살리려 애를 쓰는데 솔솔 빠져나간 빈자리는 쓸쓸함이 맴돌았다. 결혼식장에서 떠들어대거나 돈봉투만 내밀고 식당으로 가버리는 하객과 똑같은 모습이다. 적어도 문인이라면 사회인과 다른 자존심으로 품위를 지켜야 한다. 나의 시낭송 순간이 소중하듯 남의 시낭송 순간도 소중한 것이다.
옥의 티가 있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피서객들이 붐비는 유명해수욕장에서 이렇게 화려한 언어의 향연을 벌일 수 있다는 것은 보령문인협회가 응축된 힘을 크게 발산한 결과라서 모두가 흐뭇하게 여겼다. 타 문인협회가 부러워할 만큼 문인들에게 성찬을 마련해 준 보령문인협회 회원들과 임원, 집행위원들, 그리고 이를 지휘하느라 피부를 검게 그을린 김유제 회장께도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한 순간에 일박이일이 흘러버린 카이로스적 기쁨으로.
* 서초문인협회의 가을 문학답사
- 보령의 역사와 문화를 보고
강기옥 (시인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10월 24일 산천에 가을이 내리는 무렵 서초문인협회에서 보령을 찾았다. 강산에 물이 오르는 이른 봄과 그 물기를 거두어 곱게 화장하는 가을에 서초문인협회 회원들은 글감을 찾아 사냥에 나선다. 어김없는 떡살이 45인승의 자리를 메꾸고 다양한 간식거리를 담은 비닐주머니가 허기진 뱃살에 힘을 실어주는 비명, 그렇게 서초문협회원들은 이른 아침을 서두른다. 서울 출발이 빨라야 하나라도 더 볼 수 있다는 욕심 때문에 출발 시간을 앞당겨도 여지없이 자리가 꽉 찬다. 특별히 오늘은 보령 출신 김윤자 시인이 자기의 친정마을로 답사를 간다하여 맛있는 떡을 준비해 왔다. 더불어 입만 벙그레 벌리며 웃는 신랑 유기섭 수필가, 알고 보니 참 장가를 잘 들었다. 처가 덕분에 짭짤한 갯내음을 마음대로 맡을 수 있으니 얼마나 큰 행운인가. 이들 부부는 항상 바늘과 실처럼 함께 하기 때문에 김윤자 시인에게 작업을 걸면 곤란하다.
봄나들이 때 가을에는 보령을 가자고 이미 입도선매한 상황이라 보령행은 순조로웠다. 사이채 사무국장과 이미 현장을 조사한 상항이고 보령문인협회 김유제 회장이 마중을 하겠노라는 언약이 있었기에 한결 안내자로서의 어깨가 가벼웠다. 출발과 더불어 버스 안에서 진행되는 의전행사는 불안해도 웃음바다다. 글쟁이들의 해학과 끼를 발산할 수 있는 여유는 좌중의 어둠을 몰아내고 허기진 뱃가죽을 무겁게 한다.
그렇게 찾은 보령.
보령에서는 말조심해야 한다. 고령에서의 말조심 정도는 새발의 피다. 고령에 가면 조그만 꼬마도 고령(高齡)이라서 ‘반말로 해야 할지 존댓말을 해야 할지(민혜경의 노래 가사)’ 망설이지만 보령에 오면 아예 최상급의 극존칭을 써야 한다. 보령(寶齡)은 임금님의 나이를 이르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보령(保寧)은 안녕을 보장한다, 평화를 보장한다는 지명이다. 그렇게 평화로운 이름이니 언어의 자유는 박탈 당하지 않아도 좋다.
충청수영과 갈매못 성지
보령은 충청도의 군사적 중심지였다. 오천항에 남아 있는 충청도 수영이 보령의 군사적 위상을 말해준다. 육군은 내륙지방에 종2품의 병마절도사를 책임자로 내려 보내지만 수군(조선시대에는 해군을 수군이라 했음)은 수운(水雲)의 요충지에 수군절도사를 두어 바다를 지키게 했다. 당시의 수군은 왜구의 발호를 차단하고 세곡의 수운을 도왔다. 다만 병마절도사는 동반(東班)인 문관이 겸하므로 정2품이지만 수군절도사는 서반(西班)인 무관이 겸하므로 한 단계 낮은 정3품이다.
높지 않은 산, 바다를 마주하고 나지막이 엎드린 자라 같은 산에 성벽을 에둘려 쳤기 때문에 바다쪽은 절벽 같다. 지형이 적진을 살피고 공격과 방어에 최상의 조건을 갖춘 천혜의 장소다. 그곳에 올라 새로 복원한 영보정에서 이항복을 논하고 정약용의 시를 논하며 앞선 문인의 기상을 탐익한다. 전술한 대로 보령이 평화를 보장한다는 의미였다면 영보정(永保亭)이 있는 영보리는 그 평화를 영원히 보장한다는 뜻이니 보령의 지명은 유기적인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충청수영의 수군들이 남해안으로 출동하여 이순신 장군을 도왔고 원균이 통제사였을 때는 이곳 충청수영의 최호장군이 전사하는 수군의 전진기지이기도 했다
더불어 병자호란 때에는 강진흔 장군이 강화도로 출정하여 청군과 싸우다 중과부적으로 파하자 참수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한때 충청수영이 태안의 안흥으로 옮겨 강화도 방위를 최고의 목표로 삼은 적이 있으나 천수만과 대천 앞바다에 뜸뜸이 솟은 섬들이 성벽처럼 태풍을 막아 파도가 잔잔하고, 오천항 앞바다가 깊어 썰물 때에도 배를 댈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이라서 오천항은 충청도 바다의 중심지역할을 해냈다. 성벽은 찻길로 잘려 두 동강이 났지만 객사로 남은 장군영과 삥 둘러 복원한 성벽들이 담사객의 여운을 자극한다. 그 중 백미는 진휼청과 영보정, 보령사람들의 인심은 이 진휼청에서 비롯되었음을 자부한다. 백성을 구휼하던 기관이 최종적으로 남아 오천항 주민들을 위무했으니 그때 나라로부터 사랑을 이웃에게 전달하려는 소박한 인심이 오늘날에도 다정하게 살아 있는 것이다.
영보정은 누구나 별장처럼 여겨 자주 찾고 싶어하는 정자다. 툭 터진 앞바다, 동녘으로 감싸주는 나지막한 산줄기, 그곳에 누어 심회를 읊조리면 한 편의 시다. ‘그이 하고 다시 오겠나’ 아니면 ‘그놈하고 오겠나’ 하고 물으면 대부분이 그놈하고 오겠단다. 멋과 낭만은 지루한 감정보다 새로운 감정이 더 좋은 모양이다. 남자의 위상이 여성상위시대에 밀려 말이 아니다.
가까이에 있는 갈매못 성지는 오천항이 안겨주는 또 다른 맛이다. 1963년 12세에 왕위에 오른 고종이 3년이 지난 1866년에 한 살 연상의 민자영과 혼인식을 올리기로 했는데 프랑스의 신부와 조선의 천주학쟁이들이 잡혀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이들을 군문효수하기로 했는데 점쟁이가 혼사를 앞두고 한양에서 피를 흘리는 것은 좋지 않다 하여 한양 이백리 밖에서 처형하라 했다. 쇄국정책을 펴던 대원군은 서양인들도 오랑캐로 여겨 양이(洋夷)라 하던 상황이라 서양 오랑캐의 흔적은 서양 오랑캐의 피로 지워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1846년에 프랑스 군함이 원산도를 무력강점한 적이 있기에 원산도가 보이는 갈매못에서 이들을 처형하게 했다.
조선인을 복음화하기 위해 젊은 나이에 이국땅을 밟은 프랑스의 신부들, 모두 12명이 이 땅을 밟았는데 그 중 9명이 처형되자 이를 문책하기 위해 강화도를 내습하여 규장각을 태우고 도서를 빼간 것이 1866년의 병인양요다.
갈매못은 오천항에서 가까운 영보리의 작은 연못이었다. 언어를 형태소대로 분석하면 ‘갈매기+연+못’으로 나뉘는데 아무래도 이곳에 연꽃이 있을 것 같지 않아 갈매기의 ‘갈매’와 연못의 ‘못’을 취하여 이루어진 합성어로 보인다. 그러나 원래의 지명은 갈마연동(渴馬淵洞)이다. 마을 뒷산의 산세가 목마른 말이 물을 먹는 모습과 같다는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그렇게 산세를 보고 지은 이름이니 형국에 따라 연못이 있어야 한다는 상식적인 추론으로 지형을 해석한다. 그렇기에 공무를 띈 공인이든 일반 사대부든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갈증에 든 말을 쉬게 하며 물을 먹였을 것이며 다른 길짐승이나 날짐승도 갈증을 해소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갈매못이 ‘갈매기의 연못’이라는 추론을 가능케 하는 이유다. 다만 갈매기는 바닷가에서 지내는 새인데 이곳까지 날아들어 물을 마셨을까 하는 의문을 해결해야 한다.
갈매기를 비롯한 바닷새는 굳이 육지의 물을 먹지 않는다. 부리로 먹이를 낚았을 입안으로 들어오는 바닷물로 갈증을 해결한다. 부리 위쪽에 있는 염선(鹽線)이라는 기관에서 염분을 여과하여 걸러낼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배에서 뒤따라오는 갈매기를 유심히 살펴보면 부리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염분의 찌꺼기다. 갈매못은 갈매기와는 전혀 무관한 말모양에서 비롯된 것으로 형국을 이용한 풍수적 지명인 것이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한복음 7장37절
1845년 김대건 신부와 함께 입국하여 교회사를 편찬하며 교회의 성지와 같은 내포(內浦)지역에서 선교에 열중하던 프랑스 신부가 있었다. 조선 제5대 교구장이었던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다. 그들은 조선의 황석두 회장, 장주기 회장, 그리고 수많은 무명의 신자들과 함께 1866년 3월 30일의 성금요일에 이곳 갈매못에서 처형당했다. 조선인을 위해 복음을 전하다가 처절하게 순교한 것이다.
○ 다블뤼, 오매트로, 위앵 등 서양인들과 사교를 따른 황가를 모두 포도청에서 충청도 수영으로 보내 참수하고 효수해서 훈계가 되게 하라.
- 『일성록』 1866년 3월 22일의 기록
○포도청에 갇혀 있던 죄인들, 즉 다블뤼, 오매트르, 위앵, 황석두, 장주기 등 도합 다섯 명이 포졸들에게 넘겨져 충청도의 수영으로 압송되었음을 국왕께 아뢰옵니다.
- 『승정원 일기』 1866년3월 24일의 기록
당시의 상황을 볼 수 있는 『일성록』과 『승정원 일기』의 기록이다.
목마른 자는 다 내게로 오라는 성경말씀을 들고 현세에 허덕이는 영혼의 갈증을 풀어주려는 듯 순교자의 피는 이곳을 뻘겋게 물들였다. 200여 명의 군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형을 집행하여 목을 효수했으니 민중을 양이로부터 격리하는 데는 최고의 효과를 올렸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누가 감히 천주교에 접근하려 했을 것인가. 그러나 선교와 포교의 싹을 잘라버리려는 억압의 의도는 빗나갔다. 순교자들의 희생은 더 많은 영혼을 불러들여 많은 순례자와 답사객의 영혼을 위무하고 있다. 황석두 순교자는 괴산의 연풍 출신이라서 시신을 연풍성지로 옮겼고 프랑스 신부 세분의 시신은 일본의 나가사키로 옮겼다가 1894년 용산신학교로 돌아온 후 1900년에 명동성당 지하에 안치되었다.
성주사지와 석탄박물관
갈매못이 격변기의 근세사에 서양문물과 문화의 유입과정에서 조성된 성지라면 성주사지는 통일신라시기 골품제에 의한 정권의 혼란기에 조성된 성지다. 성주사(聖住寺)의 성주(聖住)는 성인이 머물렀다는 의미인 만큼 성주사는 성인에 준하는 훌륭한 스님이 머물렀다는 사찰을 뜻한다. 과연 누가 머물렀기에 오합사(烏合寺)라는 사찰명을 바꿀 만큼 영향력을 발휘했을까.
백제 패망 후 신라의 품으로 안긴 오합사는 통일신라 말기의 혼란한 틈을 타고 구산선문의 성주산파로 불교계는 물론 문화사적으로도 큰 족적을 남겼다. 14세기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을 비롯한 여러 가문이 경쟁적으로 문화 사업을 지원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했듯 통일신라 말기에는 골품제도에 밀린 6두품 계열의 호족들이 선종계열의 스님인 선사(禪師)를 도와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는 데 앞장섰다. 당시의 불교는 왕즉불(王卽佛) 사상으로 왕권신장을 꾀했으며 호국불교를 내세워 제27대 선덕여왕(632-647)은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우기도 했다. 불교를 이념으로 한 정치는 임금이 곧 부처님이어야 하므로 부처님을 따르듯 임금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등식의 정치가 가능했다. 그래서 누구나 성불하여 부처가 된다는 것은 곧 왕권에 도전하는 것으로 보았다.
철저히 불경을 탐구하고 교리대로 실천해야 하는 이 유파를 교종(敎宗)이라 하는데 삼국을 통일 후 백제유민과 고구려 유민의 민심이 이반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화엄종을 열었던 경우와 같다. 철저히 왕실과 국가를 보전하기 위한 이념적 종교였다. 신라와 백제 고구려는 각자가 아니라 하나요 그 하나가 곧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일즉다(一卽多)요 다즉일(多卽一)의 사상으로 무장시켰다. 교종은 깨달음보다는 가르침의 중요한 종파였다.
여기에 사상적 반전이 일어났다. 중국 유학에서 돌아온 선승(禪勝)들이 깨달음을 중시한 민중불교로의 전환을 꾀했다. 무식해서 불경을 읽지 않아도 극락에 갈 수 있고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는 종교 개혁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이로 인해 선승들이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기도처를 세우자 지방 호족들이 이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신라 말기의 5교 9산이 바로 교종과 선종의 대립을 상징한다.
성주사지는 바로 중국에 유학했던 선승 무염이 주석하던 곳이다. 이곳에 남은 국보 제8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郎彗和尙白月寶光塔碑)에는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행적이 5120자의 장문으로 새겨져 있다. 그 비문에는 진골이었던 가문이 아버지대에 이르러 6두품으로 강등된 내용이 실려 있어 당시의 신분제도 연구에 큰 도움을 준다.
비석의 높이는 4.55m로 신라의 비석 중 가장 큰데 받침대의 귀부와 지붕의 이수부분의 예술성이 뛰어나 1962년에 국보 제8호로 지정했다. 비문은 고운 최치원이 짓고 글씨는 고운의 사촌동생 최인곤이 썼다. 귀부머리의 중앙에는 뿔이 있으며 발가락과 발톱도 힘차게 새겨져 있다. 특이한 것은 대부분의 비석들이 비몸을 직사각형으로 빚어 그 위에 이수나 지붕돌을 올리는데 이 비는 비몸 윗부분의 양 어깨를 둥글게 마감하여 이수가 없어도 하나의 완성된 작품처럼 예술성이 뛰어나다.
낭혜화상 무염은 무열왕의 8세손으로 801년에 태어나 13세에 출가, 당에 유학하여 깨달음을 얻고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였다. 대부분의 선승들이 경주를 벗어난 산간에서 주석하듯 무염도 웅천(보령)의 오합사에 주석하며 선풍을 일으켰다. 무염의 명망에 2,500여명의 스님이 모여들었으니 가히 성인이라 할 만하다.
무염과 함께 선풍을 일으킨 선사로는 홍척이 남원 실상사에서 일으킨 실상산문, 도의가 장흥 보림사에서 일으킨 가지산문, 범일이 강릉 굴산사에서 일으킨 사굴산문, 혜철이 곡성 태안사에서 일으킨 동리산문, 철감이 영월 흥녕사에서 일으킨 사자산문, 도헌이 문경 봉암사에서 일으킨 희양산문, 현욱이 창원 봉림사에서 일으킨 봉림산문, 이엄이 해주 광조사에서 일으킨 수미산문 등인데 이들과 함께 구산선문(九山禪門)이라 한다.
보령의 호족 김양은 육두품으로서 신분의 한계를 느껴 사회에 대한 불만이 있었는데 마침 무염도 진골에서 육두품으로 강등되어 동류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성주사의 무염에게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더불어 세를 불리는 효과를 노렸다. 이에 많은 불자들이 모여들어 오합사를 성주사로 개칭했다. 그러므로 성주사와 성주산의 주인공은 무염이다.
황망한 바람만이 성주산을 더듬어 성주사지에 맴돌던 폐사지, 그곳에 이제는 사람의 향기가 감돈다. 제법 많은 답사객이 찾아든다. 보령시에서는 보령문인협회의 문인들을 동원하여 해설을 해주고 오가는 답사객에게 따뜻한 웃음도 선사한다. 쓸쓸한 폐사지에서 느끼는 새로운 감동이다.
쓸모없는 탄광, 열량이 좋지 않는 석탄이 묻혔다 하여 일본인도 손을 대지 않은 보령의 탄광지대, 그러나 한 때 전국의 광부가 몰려드는 노다지의 현장이었다. 일반 말단 공무원보다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월급을 받던 광부들이 있었기에 대천에서는 돈 자랑을 하지 말라고 했다. 해방을 맞은 1948년에 탄광업소가 채탄을 시작한 이후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추위를 이기게 한 보령탄광이 폐광된 후 이제는 돌공장들이 대를 이었다. 그 돌공장 때문에 대천에서는 돈 자랑 하지 말라는 말은 아직도 유효하다. 웅천지역을 중심으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돌공장들은 보령의 경제를 이끌어가는 또 다른 축으로 자리 잡았다. 그곳에 보령의 벼루가 있다.
보령에서 만난 사람
보령을 전국에 알린 인물로는 보령제약의 김승호 회장이다. ‘이 소리가 아닙니다’의 용각산이 바로 보령의 인물이 만들어낸 용어다. 보령의 인물로는 고려 조선의 인문학적 비조로 여기는 이제현(1287~1367)과 조선의 문형(文衡)으로 숭앙받는 서거정(1420~1488), 소설가 이문구, 서울대학교 권영민 교수, 소설가 이문희, 시인 임영조 등이 있고 연예인으로는 이선희. 남희석, 김국환, 하지원 등이 있다. 모두가 귀한 인물이다.
그들을 찾아 잠시 이문구 선생의 생가를 찾았으나 남의 집이 되어 밖에서만 살피며 뼈가 뿌려진 소나무 숲에서 숙연한 마음으로 묵념을 올리는 것으로 만족해 했다. 더불어 점심시간에 김유제 보령문협회장과 김월석 회원이 식당으로 합류한 이후 내 발걸음은 가벼워졌다. 가는 곳마다 보령문인협회 출신의 해설사를 배치해 놓아 현장의 전문적인 설명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인들의 여행은 현장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을 아주 즐기며 만족하게 여긴다. 문단의 어른도 좋고 현지를 지킨 어른도 좋다. 그중 자기 고장을 현창하는 데 앞장선 사람을 만나면 한없는 존경의 눈빛을 보낸다. 보령에도 그런 인물이 있어 그의 사무실을 들렀다. 김유제 회장이 박물관을 차리겠다는 야망으로 자료를 모으고 있는 시비공원이다.
1996년 9월 20일자 경향신문 인터뷰 기사에서 ‘돌에서 산삼을 캤다’고 만세를 부른 장인 김유제, 그는 우연히 길에서 주운 책을 통해 보령의 석란(石蘭·石卵)광석을 발굴하고 200여년간 행적을 감춘 보령 벼루를 복원해냈다. 서울대 미대 이순석에게 배워 이론적 바탕도 쌓아 명품 장인이 되어 서울대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돌공장의 석공이 보령의 역사와 문화를 복원한 데에 대한 보답이리라.
그에게 남은 일은 보령의 도자기를 복원하는 일이다. 보령댐을 막은 후 물을 가두기 전에 실시한 지표조사에서 나온 유물과 땅 속에 묻혔던 보령의 도자기 파편들이 새로운 떨림으로 전율케 했기 때문이다. 그는 물이 찬 후에도 매일 물가를 맴돌아 물살이 밀어 주는 역사의 흔적을 주워 모았다. 그가 모은 것들 중에 굽는 과정에서 서로 엉켜 들어붙은 도자기덩이는 이곳에서나 볼 수 있는 명품이다. 버려진 역사, 묻혀버린 문화를 캐내어 오늘에 되살려낸 그는 사비로 시인들의 시비(詩碑)를 제작하여 마을을 온통 시동산으로 꾸미고 있다.
마침 서초문인협회 회원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김윤자 시인의 시비 제막을 위해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알고 보니 오늘은 김윤자 시인을 위한 날이었다. 고향에 계신 친정 어머니를 서울로 모시려 했지만 굳이 마다하고 친정집을 지킨 어머니의 애틋한 사랑을 담은 시 [들꽃]이다. 김유제 회장과 김윤자 시인은 경주 김씨 종친으로 김유제 회장이 김윤자 시인의 할아버지뻘이란다. 김윤자 시인이 연상이지만 연하의 할아버지가 연상의 손녀를 위해 시비를 세워 줬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인가. 나는 왜 저런 할아버지를 두지 못했을까? 이제부터라도 족보를 뒤져봐야겠다.
지는 해는 막을 수 없다. 하루가 왜 이리 짧은지,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여행의 격은 달라지고 누구랑 함께 시간을 보내느냐에 따라 그날의 의미가 달라진다는데 아무리 함께 해도 지루하지 않은 시간은 그렇게 아쉬움을 남기고 서울쪽으로 기울었다. 서초문인협회 회원의 보령방문을 환영하며 환대해 주신 김유제 회장, 사비로 많은 이들의 시비를 세워 마을을 시(詩)공원으로 완성하려는 웅지와 박물관을 세워 보령의 역사를 새로 쓰려는 원대한 소망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 더불어 안내에 같이 힘을 기울이며 촬영에 힘써준 김월석 회원과 문화해설사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강기옥 약력
한국문협문학유적탐사연구위원장. 국제PEN한국본부회원.
미래일보논설위원. 월간 아트앤씨 계간 가온문학 편집주간.
국문협평생교육원 서초문화대학 문화해설사과 지도교수.
칼럼니스트. 서초문인협회 감사 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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