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구속사, 이스라엘 민족에게 땅을 다시 맡기려고 한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여 땅을 다스릴 자로, 사람을 지어서 청지기로 세우셨다. 그러나 사람은 청지기로 세움을 받은 이래 금지한 선악과의 식용부터 형제 살인, 이방 족속 간의 혼음, 바벨탑의 축조, 그리고 토지주인을 떠난 우상숭배로 5회에 걸쳐서 언약을 크게 어긴다.
그래서 하나님은 연속된 청지기의 범죄에 대하여 구원 방식을 바꾸었다. 하나님은 이제 자신의 소유물인 땅과 사람을 선택하여 땅의 다스림을 맡기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선택받은 백성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다. 선택받은 땅은 가나안 땅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선택한 땅을 선택받은 백성들이 청지기 역할자로서 어떻게 그 역할을 수행하는지를 보여주며, 인류를 구원할 구속사를 인도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선택한 백성들과 선택한 땅을 통하여, 지구촌 모든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게 되는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선택 받은 이스라엘 민족과 선택 받은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인도하신 구속사에서 몇 가지 의미가 들어있다.
첫째, 토지 주인이 선택받은 백성들이 청지기의 조건(언약)대로 가나안 땅을 다스리는 데 대하여 이스라엘 민족에게 직접 개입하는 역사다. 예를 들어서 신명기 28장은 청지기가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지키면 복을 주고, 계명을 어기면 화를 당한다고 한다. 신명기 28장 전체를 통하여 순종으로 받을 복과 불순종에서 돌아오는 화에 대하여 길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계명을 어기면 너희들을 멀리 땅끝에서 치게 하며, 에워싸고, 잡혀가며, 심지어 태아와 어린 자녀까지도 징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신 28:47~57).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언약을 번번히 위반하여 그때마다 징벌을 받는다. 시대적 책임을 담당하는 왕들은 족보가 끊어지는 수모를 당하고, 나라는 앗수르와 바벨론 등의 침략으로 백성들이 잡혀간다. 백성들은 이렇게 땅을 잃고, 나라가 없어서 거의 2,000년 간을 타국에서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둘째,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괴롭힌 제국들의 역사를 보여준다. 천하를 손아귀에 넣은 제국들이지만, 그 역사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집트를 시작으로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그리고 로마가 그러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 제국들에 개입한 역사를 보여주며, 교훈을 주고 있다. 성경에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16세기 초반(1517년)부터 20세기 초반(1917년)까지는 오스만 제국이 등장하여 가나안 땅을 지배한 바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니엘과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포로기부터 지금까지 힘을 가진 주변 국가들이 이스라엘에게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끼쳐왔고, 또 끼치게 될 것을 환상을 통하여 미리 보여주고 있다.
제국들의 역사는 짧게 100년, 200년이고, 길어야 400년, 500년의 역사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왕국이 460년(주전 1050년~주전 586년), 사사시대를 포함하면 860년(주전 1446~주전 586년) 동안 독립국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사람의 힘으로 유지한 제국들보다는 약소국이지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통치 기간이 2배, 3배가 더 길었다. 그러므로 자기들 이익만을 추구하며 무력과 경제력, 그리고 종교적 힘으로 타국의 영토를 넓히는 제국(또는 강국)들은 오래가지 못하며, 그 끝은 패망한다는 교훈을 보여주고 있다.
셋째, 하나님이 이스라엘 땅과 백성을 선택하여 모든 인류를 인도하는 인간 구원의 구속사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을 백성들이 계명을 어겨서 당하는 고난은 우리가 지금 생활에서도 겪을 수 있는 각종 신앙과 생활 문제로 관련되고 있다는 뜻이다. 청지기로 선택받은 백성들이 땅에 대한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주권을 빼았기고, 땅을 잃고, 나라까지 잃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그리고 기독교는 맡겨준 토지 청지기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돌이켜보고, 살펴보아야 한다.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았다고 안일하게 생각하거나 자만하지 말고, 구원을 받고 천국 백성이 된 목적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선택받은 이스라엘의 땅과 백성들이 토지 청지기의 역할 수행에서 발생한 문제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나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선택받은 땅과 선택받은 백성들이 겪게 되는 문제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같은 문제를 겪을 수 있는 지구촌 전체의 문제인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지도자와 백성들은 죄를 범하여 땅을 다스릴 청지기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이스라엘 땅을 선택하여 지구촌에서 발생하는 세계의 역사, 하나님의 구속사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하나님의 구속사는 구약시대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지금은 청지기의 사명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넘어온 상태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기독교는 이웃 이스라엘을 보면서 하나님이 선택받은 백성에게 하신 언약이 무엇인지를 새겨 보아야 한다.
넷째, 그런데 지구촌 인류는 이런 토지 청지기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은 지금도 지구촌 인류를 통하여 하나님의 땅(지구)을 다시 맡길 청지기를 찾고 있다. 청지기는 지은 죄가 사해지고 구원을 받아야 자격이 부여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를 범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서 지구촌 인류를 구원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여 자신이 지으신 땅과 그 땅의 다스림(창 1:26)을 다시 맡기려고 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적 또는 실무적으로 유다지파에 소속된 베들레헴 토지의 상속자이며(눅 2:4,5), 영적으로는 지구촌 모든 토지의 상속자이시다(엡 4:6).
이스라엘은 땅을 잃었고, 메시아도 보지 못했다.
북이스라엘은 주전 722년 앗수르 제국의 침략으로 패망하였다. 남유다는 주전 586년 바벨론 제국의 침략으로 패망하고 포로로 잡혀갔다. 그리고 약 70~140년이 지난 다음 포로에서 풀려났다. 주전 538년 페르시아 왕 고레스 칙령 이후 포로에서 풀려나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백성들은 스룹바벨 성전을 짓고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헬라 제국 말기는 마카비 혁명으로, 그 이후 하스몬 왕조의 자치 등으로 나라는 독립을 이루는 듯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다시 로마의 식민지가 되고 만다.
주전 409년경에는 말라기를 마지막으로 선지자 활동도 그쳤다. 이때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주전 4년, 5년까지 400여 년의 역사를 보통 “신구약 중간사(중간기)”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공생애를 시작한 주후 26년까지를 포함하면 중간사는 430(434년=409년+25년)이다.
선지자 활동이 중단된 중간사를 지나서 주전 5년경 예수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가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인 눈과 육적인 눈이 동시에 어두워져서 오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들이 가나안 땅의 토지 청지기로 선택을 받았으나 우상을 섬기며 탐욕을 품어서 땅을 보지 못하여 그 땅을 잃었다. 땅을 잃기보다 영토에 대한 주권을 먼저 잃어버렸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런 영성이 곁에 오신 메시아를 보지 못한 것이다.
이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 통치와 로마 제국에 세금을 바치며 속국으로 살았다. 나라의 독립을 갈망하던 백성들 중에서 소수는 예수님이 나라의 독립을 이루어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 독립에는 아무런 관여를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천국 복음을 전하면서(막 1:15) 이스라엘 지도자와 백성들에게 회개를 요구하고, 희년을 선포한다(눅 4:18,19). 회개의 요청과 희년 선포는 토지 청지기의 역할을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지도자와 백성들은 메시아로 온 예수 그리스도가 요구하는 회개와 희년의 선포에 대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서 십자가에서 죽게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희생 제물이 되어서 인류의 죗값을 모두 치르고, 구원의 사역을 완성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과 실체는?
철학자 김용옥 씨는 예수가 메시아라고 하면서 이스라엘의 독립도 시키지 못하고, 로마의 법정에서 죽어야 했으므로 “마구간의 거지”라고 악평한 적이 있다. 그러나 김용옥 씨의 이런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서 하는 실언이다. 하나님이 아들을 희생시켜서 인간의 죄값을 대신 치러주고, 우리를 살려주신 구원 역사를 잘 이해하지 못한 실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적어도 세 가지의 큰 의미를 가진다.
첫째는 행위의 결과인 상과 벌에 대한 인과응보와 생활에서 주고 받는 시장원리다. 사람의 인과관계나 물질관계는 공짜가 아니라 값을 치르는 거래 관계다. 그래서 사람이 죽을 죄를 지었으면, 마땅히 죽어야만 그 죗값을 치를 수가 있다(창 2:17, 수 6:21). 그런데 이것을 예수님이 자기 피로 이 죗값을 대신 치러준 것이다(마 20:28, 요 10:15).
둘째는 사랑과 은혜의 원리다. 하나님은 사람이 지은 죄에 대하여 죗값을 받거나 치르지 않아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다. 그러나 이렇게 값진 희생으로 대가를 대신 치러주어서 사람에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시켜 주신 것이다(롬 5:8). 사람과 세상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놓았다.
셋째는 자기 몸을 희생시킨 속량(贖良)과 대속(代贖)의 원리로 죄 문제를 해결하듯이, 사람이 경제생활, 사회생활에서도 값을 치루어야 해결되는 문제는 서로 서로 값을 치러서 해결하라(마 6:12, 눅 11:4)는 본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곧 십자가의 도(道)는 세상의 그 누구도, 어느 신이나 이방 종교가 할 수가 없는 위대하고, 숭고하며, 지고지순의 실천 행위다. 이것은 세상에서 값을 치른 인과응보의 원칙과 자기를 먼저 희생시킨 사랑의 은혜가 중첩되어 하나로 융합된 것이다. 세상에 어느 종교에서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신이 스스로 죽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는가? 어느 신이 이런 사랑을 실천으로 베풀어 문제를 해결한 적이 있는가?
김용욕 씨는 신학과 철학을 하여서 성경을 꿰뚫어 안다는 자부심이 넘치는 분이다. 세상 사람들도 그 분을 박학다식한 사람으로 보아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구약의 제사법 하나도 제대로 이해하지를 못할 만큼 우둔한 사람이다. 성경에서 죄를 사하는 방법은 내가 스스로 하지 못하고 남이 대신해 주는 것이다. 이것을 구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세상의 논리나 종교(불교, 이슬람교)는 내가 지은 죄는 내가 담당해야만 해결이 된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인간이 만든 종교나 철학, 곧 인본주의의 한계다. 인본주의는 나의 죄를 대신하여 짐승들이 피를 흘려 죽어서 나의 죄가 속량을 받게 되는 제사의 방법과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김용옥 씨는 육의 눈도 감겨 있다. 그가 속량의 제사법을 모르듯이 생활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속량의 경제법을 모른다는 뜻이다. 나의 경제적 궁핍으로 인하여 나의 몸과 땅이 빚의 담보로 잡히면(팔리면), 그 빚은 형제나 친족, 그리고 이웃이 대신 갚아주어야 내가 자유를 회복할 수 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속량의 경제법이다. 삶에서 발생한 문제 중에 내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을 수 있는데, 이런 경우 남(친족이나 이웃)이 대신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여 줄 수가 있다. 갓난아기는 엄마가 품에 안고 젖을 주며, 보호와 양육으로 일거수일투족을 대신해 주어야 아기의 생명이 보전되고 자랄 수가 있다.
물에 빠진 자가 스스로 헤엄쳐 나오지 못한다면, 누가 건져주어야 사람이 살아날 수가 있다. 이것도 구원이다. 이것은 생명체가 가진 단순한 인과법칙이다. 성경은 이러한 구원의 원리가 생존과 자유를 얻는 방법이라고 알려주고, 이를 실제로 실현하도록 가르치는 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이런 구원의 원리에서 그 정점에 위치하며, 모든 구원의 종결 과정이고, 궁극적 완성이다.
그리고 김용욕 씨는 세상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이나 이해도 둔하다. 그의 생각처럼 만에 하나 예수 그리스도가 천사를 동원하여 로마를 힘으로 물리치고(마 26:53), 이스라엘을 독립시켜 주었다고 하자. 그러면 이스라엘의 신앙 문제와 땅 문제가 해결되었을까? 이스라엘 국가는 예수님이 이루어준 독립을 유지하면서 그 독립을 지켜낼 영성과 이성, 그리고 현실적 통치 능력을 갖추고 있었을까? 그럴 능력이 있다면, 애초에 통일된 다윗 왕국은 왜 분열하였고, 유다는 왜 패망하여 제국들의 속국이 되어야만 했는가 말이다.
그런데 김용옥 씨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몸을 희생시켜 인류를 구원한 그 값진 희생과 거룩한 사역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냥 한 시대에 앞서가는 인물(선각자)이었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위인 정도로 생각한다. 예수님에 대한 이런 인식은 이슬람 종교인들과 같다. 이것은 자신이 바다에 빠졌을 때 헤엄을 치지 못해도 스스로 살아나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깊은 물에 빠진 자는 스스로 살아 나올 수가 없다.
그는 성경을 읽고, 철학을 하여 해박한 지식을 가졌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누가 나를 구해 주거나 내 문제를 대신해 주어서 내가 자유하게 되는 대속(代贖)의 원리는 모르고 있다. 아마도 흔한 실수들처럼, 성경이 가르쳐주는 '값을 치러 문제를 해결하는 속량의 경제원리'를 잘 모르거나 알아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때문에 빚어지는 오류다. 세상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ㄱ. 스스로 하거나 ㄴ. 대신하여 해결하는 두 가지 방법 뿐이다. 그런데 십자가의 道와 성경이 말하는 속량(贖良)과 대속(代贖)은 후자의 해법을 말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스스로(ㄱ) 할 수 없을 때 해야 하는(ㄴ) 필수적이고 유일한 해법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한 분에게만 있고(행 4:12), 이것을 깊고 넓게 알려주는 책은 성경 한권 뿐이다(딤후 3:16,17).
*** 아래 링크는 김용옥 씨가 신을 믿는다면 태양을 신으로 모시겠다고 하는 강의 소개다. 그는 생명이 땅(지구)이 내는 것인데(창 1:11,12) 하늘에서 태양이 내는 것이라고 큰 오해를 하고 있다. 김용욕 씨는 태양 빛이 비치는 수성과 금성이 왜 생명체를 내지 못하는지를 모른다는 뜻이다. 성경이 말하는 제국들의 침략은 거의가 김용옥 씨가 말하는 태양신(월신 포함)과 바알신을 숭배한 자들이 일으킨 것이다.
[도올김용옥] 도올주역강해 91 산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태양을 먹는 것 "이 세상에서 신으로 모신다면 나는 유일하게 태양을 모시겠어요" - 화지'진'괘 - YouTube
이스라엘과 구원의 역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이스라엘 땅, 그 땅을 실제로 얻기까지는 긴긴 세월이 걸렸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은 다윗이 여부스 족속을 물리치고 시온성(예루살렘)을 회복하기까지(삼하 5:7) 무려 1천 년이 걸렸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택 받은 백성들도 실제로 땅을 얻기까지는 이토록 많은 고통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역사를 통하여 확인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처럼 어렵게 들어간 땅도 잃지 않도록 지켜야 할 법과 제도를 촘촘하게 제정하여 주었다. 그리고 이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땅은 황폐하고 나라가 패망한다는 것을 한두 번 경고하였는가 말이다. 그러한 경고와 당부에도 이스라엘의 왕들과 백성들이 왜 이 법을 지키지 않고, 우상을 섬겼으며, 결국 나라를 잃게 하는가 말이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패망이 제국들의 침략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이스라엘 왕과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겨서 하나님이 제국들을 불러서 이스라엘을 치게 했다고 말하고 있다(렘 43:10). 이런 지적은 성경에서 한두 구절이 아니며, 선지서를 비롯한 성경 전체의 일관된 내용이다.
이스라엘의 이런 영적, 현실적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로마를 물리치고 독립시켜 준다고 그들이 그 독립을 유지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물음에 “지금은 내 나라가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 18:36)”라고 답변하였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서 천국은 공짜가 아니고, 백성들이 영적, 육적 훈련 과정을 거친 순종을 필요로 한다. 구원은 대신 값을 치러주는 속량의 은혜로 주어지지만, 땅과 천국의 진입, 그리고 그 운영은 스스로 대가를 치르는 순종으로 이루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하면 징벌을 내리신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 백성들을 회개하게 하여 다시 구원을 베푸신다. 이처럼 하나님은 공의와 긍휼을 중시하는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이 죄를 범하면 포로로 잡혀가고, 나라까지 잃게 하신다. 그래도 때가 되면 다시 이스라엘로 백성들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선택된 가나안 땅에 다시 토지 청지기로 일을 맡기려고 하신다. 하나님은 이러한 구원 계획은 일찍이 이스라엘 조상 아브라함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①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②네게 복을 주어 ③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④너는 복이 될지라 ⑤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⑥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⑦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창세기 12:2~3,7)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땅을 준다고 하면서 7가지 복을 주었다. 그 7가지 복 중에서 “②네게 복을 준다, ③네 이름을 창대하게 한다, ④너는 복이 될지라, ⑤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린다” 등의 4가지 복은 하나님이 약속의 당사자인 아브라함 개인적으로 준 사적인 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①너로 큰 민족을 이룬다, ⑥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 ⑦이 땅을 네 자손에게 준다”라는 3가지의 복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준 공적인 복이다. 그러므로 이 공적인 복은 땅의 모든 족속에게도 약속된 것이므로 인류 전체가 누려야 할 복이다. 하나님이 인류 전체에게 복을 내리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먼저 선택하여 구원을 베풀고, 토지 청지기가 받을 영원한 기업을 주려는 것이다.
그래서 선택받은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고 계명을 어길 때마다 징계를 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러한 구원의 계획에 따라 진행되는 구속사의 흐름은 성경 전체의 일관된 맥을 가지고 있다. 선택받은 백성들의 잘못에 대한 경고와 징계, 그리고 때가 차면 긍휼과 용서를 거듭하는 하나님의 구속사는 왕정시대에 선지자의 활동에서 더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선지자들의 활동에서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등은 이런 징벌의 원인이 된 이스라엘의 범죄 행위를 알려주면서 미래의 있을 이스라엘의 구원과 일어날 사건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잡혀 간 여러 나라에서 인도하며 그 사방에서 모아서 그 고국 땅으로 돌아가게 하고(겔 37:21)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의 조상들이 거주하던 땅에 그들이 거주하되 그들과 그들의 자자 손손이 영원히 거기에 거주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왕이 되리라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하게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에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겔 37:24,25)
선지자의 예언은 구약시대는 물론 신약시대 또는 신약시대 이후 있을 이스라엘의 땅과 백성들의 회복에 대한 미래의 역사까지 알려주고 있다. 하나님이 내리신 징계가 풀리면 다시 불러서 언약을 세우시고, 자신의 땅을 맡기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하여 거듭된 징계와 교훈을 하고 있어도, 약점을 가진 인간은 그 맡겨진 토지 청지기의 역할과 사명을 스스로 감당하지를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시대에도 이스라엘 민족에게 새 언약을 세우신다(렘 31:31).
이스라엘의 회복은 예수님의 예언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마 23:37~39)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눅 21:24)
예수님은 초림에서 공생애를 통하여 많은 것을 알려주고 가르쳤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살아가야 할 생활률(규례)을 복음으로 가르치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면한 문제인 이스라엘의 독립은 말하지 않고, 그 대신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하여 일어날 일들을 예언으로 대신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한 범죄로 이방인에게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힐 것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가 우상숭배를 멈추고, 계명을 지키라는 선지자들을 죽이고, 파송자들을 돌로 치고 거역한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런 예언을 살펴보면 이런 징벌이 영원한 것은 아니다. 징벌의 끝에는 단서가 붙어있다.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할 때까지”라는 시간의 단서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징벌을 받고 있지만, 때가 차면 그 징벌이 풀리고, 백성들은 다시 회개하며 주를 영접하는 대반전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았으며 구원을 다시 베푼다고 한다(롬 11:1). 우상숭배로 타락한 시대에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에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7천명을 남겼다고 하듯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완악함으로 주를 멀리하여 구원이 이방인에게 넘겨졌지만, 이방인에게 구원의 수가 차게 되면 온 이스라엘도 마음을 돌이켜서 다시 구원을 얻게 하신다(롬 11:26). 그래서 때가 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다시 새 언약을 세우신다(히 8:8).
이것은 신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이 있게 된다는 것을 알려준 것이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서 연약한 인류를 구원하고 나라를 직접 인도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스스로 해내지 못하는 토지 청지기의 역할을 토지 상속자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를 통하여 계획된 천국을 완성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시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①~⑦의 복을 세상 만민에게 주려고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①~⑦의 복은 아브라함의 육적 후손이나 오늘날의 영적 후손인 세계 인류 전체에게 내리신 복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자기들 만이 그 복의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유대교이고, 선민사상이다. 그리고 아랍 민족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장손 이스마엘의 후손임을 앞세워서 아브라함에게 내린 복을 자기들이 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이슬람 종교이고, 무슬림의 생활 철학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⑥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유대인이들이 불순종으로(완악하므로) 인하여, 그 복이 모두 그리스도인들에게로 돌아온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민족, 아랍 민족, 그리고 지구촌 그리스도인 모두가 토지 청지기로 지음을 받았지만, 사람들이 해야할 땅의 다스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땅을 주신 하나님의 복과 은혜만을 누리며 맡겨준 토지의 경작과 휴경, 관리와 거래에 대한 청지기의 직분은 잊어버린 상태로 있다. 하나님은 땅을 창조하여서 그 땅을 맡길 청지기가 필요하여 사람을 지었는데, 사람은 그 땅에서 청지기의 직분은 관심이 없고, 받을 복만 추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미 주신 복을 더 받고 싶어서 우상을 끌어들여 섬기게 된다.
물론, 청지기의 직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부터 농사를 짓는 농삿일까지 구분이 없다. 모두가 자기가 가진 달란트로 자기 자리에서 섬기는 개인적인 직분이 청지기 역활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토지 청지기는 자기 달란트와 관련되는 개인적이고 사적인 직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가져야 할 주인의 땅을 다스림에 대한 공적인 사명을 말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사적인 하고 있는 달란트나 청지기는 모두 땅이 있어야 가능한 직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 토지 청지기 직분과 사명을 잊어버리고, 아브라함에 약속한 구원의 은혜와 누리게 될 복만 생각하며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음 글은 에스겔이 본 이스라엘의 회복과 희년 왕국에 대하여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