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기전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지요.) <67> 리목 앞산으로부터 비를 몰고오기 시작하였다.계곡과 계곡사이로 내려앉는 비구름과 안개들이 휘감고 돌 고 돈다. 하늘이 깜깜해졌다. 오전까지만해도 햇살이 내리쬐더니 이제 오후에는 하늘이 어두워 지면서 바 람까지 동반 하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삽자루를 들고 인삼밭 두렁을 둘러 보고 있었다, 비가 올 대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비옷을 챙겨 입고 집에서 나왔다.새로 생긴 인삼밭도 둘러 보았다.그러나 아직은 논둑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인삼밭에 자라나는 인삼잎들이 더욱 건강해 보였다. "아버지! 비가 오려나봐요." 인삼밭을 둘러 보고 나니까 조금후에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비는 예고라도 했듯이 쏟 아진다. < 후두둑!~> "아버지 비가오네요," 나는 아버지랑 나는 삽을 챙기고 인삼 밭에서 나와 마을 어귀로 들어가고 있었다. 한참후에 비가 콩볷듯 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비옷을 입고 아버지의 삽과 나의 삽을 챙긴 채로 집으로 뛰어 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랑 같이 집으로 돌아오던 도중에 잠시 주막집에 들리시는 모양이었다. <쏴아아아!~~> "병수야." 아버지는 주막안으로 들어가시고 나는 곧장 집으로 향하였다. 신작로를 벗어나 개울물 다리를 건너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조금전 보다 비가 많이 쏟아진다. 얼마후 수미가 우산을 받고 나온다. 그리고 수미는 나 에게 우산을 건네주더니 우산을 받쳐 주었다.비는 그칠줄을 몰랐다. "아버지는?" 나와 막내는 대문을 열면서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삽을 두지에 걸어놓고 뜨락으로 올라섰다. 누나는 큰방에 들어가시더니 수건을 가지고 나왔고 비옷을 벗어서 마루에 겉터 놓았다, "비 많이 온다." 어머니도 밭에서 오시었는지 비에 흠뻑 맞으시었다, 머리도 젖고 옷도 젖어 있었다. 빗물은 고여서 수채 구멍으로 빠져 나가고 있었다. 우리집 마당은 배수로가 잘 되어 있어 빗물이 잘 빠져 나가고 있었다. 수채 (시골의 논두렁 밭두렁의 모습) 구멍에는 언제나 앵두나무가 심겨져 있었고 깨죽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어머니는 젖은 옷을 갈아 입으려 고 큰 방으로 들어가시었다. "오빠!인삼밭에는 아무런 이상은 없구." 나는 어머니가 새옷으로 갈아입고 나오시고 다음에는 나였다. 비옷을 입었어도 습기가 차기 때문에 더웁 게 느껴지었다. "어서 옷이나 갈아 입어라." 마루에 올라서고 큰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 입었다. 얼마후에 아버지는 돌아오시었다. 주막에 들리시 더니만 막걸리를 많이 마신 모양이어서 술기운에 취하시었다. 술 기운이 확 풍겨지고 있었다. "이 양반이 또 술 마시었네." 어머니는 잔소리가 많으시었다, 아버지가 술을 많이 드시고 오시면 어머니는 잔 소리를 늘어 놓으시면서 언성이 잦으시었다. 어머니는 그래서 술을 많이드시고 돌아오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늘걱정이 앞서기 시작 하였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무리 술에 취하시어도 집에 잘찾아 오시었다. 비가 오는날이면 밖에 나가고 싶 어도 밖에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비가 오는 날이면 자주 경노당에 들리시었 다가 저녘 무렵이면 집으로 돌아오시었다. "여보! 부침개 부쳐드릴까유." 수미는 밀가루를 찾고 어머니와 누나는 부침개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마루에다가 신문지를 깔고 그 위 에 곤로를 놓고 곤로안에 석유기름을 넣고 심지에 불을 붙인다, 모든 재료를 다갖추어 놓고 참기름도 붓고 밀가루를 물로 반죽해서 곤로위의 솥에 올려 놓으면 열이 가하여 져셔 기름이 튀겨 지고 수저로 밀가루 반 죽된 것을 올려놓고 김치도 넣고 파도 넣기도 하여 구수하게 만든다. 불에 데워진 밀가루는 부침개로 변하 고 접시에 담아 놓은 부침개들은 각각 입으로 들어간다. "막걸리 생각나는데...." (옛날 석유 곤로입니다.) "수미야 여기에 있어,내가 막걸리를 받아 올팅게." 나는 부침개를 먹다가 마루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하였다, 찬장에서 빈주전자를 꺼내어 부엌을 나오고 수돗가에 가서 물로 빈주전자를 씻은 다음에 우산을 받고 주막집으로 향하였다. 주막집에는 당숙모가 계 시었다. "당숙모." 당숙모는 서슴없이 막걸리 통을 열으시더니 주전자에 막걸리를 하나 가득 채우시었다. 바가지로 두서너 번이나 부우니 주전자에는 술로 가득 채웠다.아버지가 건네준 용돈으로 막걸리 값을 계산하엿다. "여기 술값인데요." 당숙모는 언제나 홀로 살아오시었다. 젊었을때 남편을 잃으시고 홀로 살아오신 당숙모도 한많은 사연이 있다. 다 말씀은 하지 않아도 술도 드시면서 담배도 태우시었다. 남편은 전쟁통에 의용군에 끌려가시어서 돌아가시었다고 한다. 당숙모의 한 맺힌 사연 언제나 술과담배로 세월을 보내신 양반이었다. 나는 그럴때 마다 불쌍한 생각도 들었다. 때로는 당숙모를 우리집에 모셔와 즐겁게 해드리기도 하였다. 아버지의 생신 날이 되면 꼭 초대되어 즐겁게 해드리었다. "당숙모" 이렇게 당숙모와 약속을 해놓고 막걸리를 주전자로 담아서들고 집으로 돌아온다, 당숙모는 약속을 잘 지 키시었다. 아버지는 당숙모가 오시자 반가워하시는 모양이었고 우리가족들도 당숙모를 환영 하였다. 아버 지는 당숙모에게 형수라 불렀다. "어서 오시죠.형수." (당숙모) "내가 용돈 줄까?" 당숙모는 어린수미에게 용돈을 꺼내주면 수미는 늘고맙다고 인사를 하였다. 그럴때마다 당숙모는 수미를 예쁘다고 칭찬을 한다. 그럴때마다 수미는 수줍움을 잘 타기도 하엿다. "형수 막걸리 한잔 하실래요." 비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하루종일 비가 내릴것만 같았다. 아버지는 심심하면 큰아버지도 불러내신 다, 그러면 큰어머니도 오실 것이고 서로 술을 권하고 따뜻한 부침개를 먹는다, 생각날때면 정수형님이나 직수 형님 갑수 형님 흥수 형님을 부르기도 한다.아버지는 언제나 가족뿐만 아니라 친지까지도 무척 아끼 시고 사랑을 베푸시었다. 모든 음식은 나누어 먹는게 맛이 있다고 아버지는 늘 말씀을 하시었다. "맛있게 드세요." 이렇게 만나는 것도 집안의 유지를 위해서가 아니겠나요." 그렇다. 모든집안일도 돌아가면서 맡은것도 좋은 일이었다, 유사를 보는것 종중회의나 소중계도 늘돌아 가면서 자주 만나는것은 김씨들의 화목이요 화합이었다.집안회의가 있으면 부산에 계신 은수형님이나 희 수형님도 자주 참석하었다. 회의결과도 알아보고 집안 어른들 제사문제나 그리고 벌초작업에도 집안일이 기에 1년에 한번씩은 모정리에서 모이기로 하였다. 제각문제도 거론이되고 모든집안살림을 꾸려나가는데 도 유사가 맡아서 했었다. 종중논은 정수형님이 농사를 지으면서 집안 살림을 꾸려나갔다.모정리에 살아 계실 동안은 집안에서 논을빌려 농사를 짓게 하였다. 그러고 보면 우리 집안일은 훌륭한 일이었다.조상을 돌보고 집안가문대로 내려오는 제사는 빠짐없이 지내주었다. 제사 음식은 집안에서 다알아서 처리가 되었 다. 비는 오후 늦게 되서야 개이기 시작하엿다. 비가 내린 끝이라 하늘이 맑아 보였다. 비가개인날씨라 저 녁에는 쌀쌀하엿다. "비가 개었네." (종중회의하는 모습)
비가 그치자 집안 사람 모두는 각자 집으로 돌아가고 없었다. 우리 가족들만 남아있었다. 모두 다사람들 이 돌아가자 나는 큰 어머니를 모시고 큰집까지 모시고 갔었다. 어린 수미도 리어커에 타는재미로 큰어머 니랑 같이 앉아 있었다.나는 리어커를 끌면서도 큰 어머니를 모시는 것도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집안에 큰 모임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는 큰아버지와 큰 어머니를 우선적으로 모시엇다. 늘 나더러 고생이 많다고 과분한 칭찬까지 하시었다. 이제 비가 그치었으니 다음날 에는 품앗이로 일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하루 품삯 남자 일당 3만원 하루종일 벌어도 3만원이었다. 운영이가 우리집일을 도우면 나도 운영 이네 집에 가서 일을 도와주었다, 서로돕고 상부 상조하는 작업과정 그러기 때문에 서로 의지하고 돕는게 농촌마을이었다, 그 다음해에 서권희가 서울로 올라가게 되자 남은 것은 나와 운영이뿐이엇다. 젊은 세대 들은 모두가 농촌을 떠나가니 더욱 노인과 아이밖에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젊은부부들은 모두농촌에 있지 않고 공장에 나가서 돈을 벌기도 하고 남자들은 기술을 배우는게 목적이었다. 친구들은 명절때 두번 만나면 끝이었다. 서로 힘들고 바쁘기 때문에 만나기 힘들어지고 전화 연락도 되지 않았다.서로 보고싶을 때는 전화라도 해야 하는데 연락이 두 절이 되거나 전화 번호가 바뀔 때가 많았다. 이제 가까이 대하던 친 지들도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명절 제외에는 만나기가 가장 힘들어진다 바로 작업에 들어간다. 논에 도착하고 나면 묘판에 가서 어린 모들을 솎아내여 하나둘씩 묶어서낸다. 피 살이도 가려내면서 작업은시작하엿다.품꾼들을 부르려면 모내기 작업전에 구해놓아야 차질이 생기지않 는다. "내일 우리 모심으러 오세요." 모가 어느 정도로 자라나면 큰 논으로 이앙을 한다. 아침에 경운기로 어린 모를 싣어나르면 논둑에 쌓인 모를 지개에 지고 다니면서 하나 둘씩 배열 시켜 놓았다. 그래야 일꾼들이 자리를 잡고 모를 심어 나간다. 새벽에는 춥다지만 대낮에는 약간 더운 편이었다. 농촌사람들은 언제나 부지런하다. 새벽 4시나 5시되면 일어나서 논두렁을 돌아보기도 한다. 모자리가 시작되기전에는 언제나 써레질을하고 비료를 뿌려주고 거 름을 주면서 영양분을 골고루 뿌려준다. "다들 일찍 나왔구먼." 일찌감치 우리 논에도 물을 대고 경운기로 써래질 하는 모습이 뜨였다. 오늘은 종화 아저씨가 경운기로 우리 논을 로타리 치고 있었다. 아버지는 서서히 곰배질 하면서 높은 곳을 낮은 곳으로 흙을 골고루 펴주 고 있었다. 아침부터 경운기가 돌아가면서 로타리 질은 제대로 이루어져 갔다. 장화를 신고 비옷을 입고 써레질 하는동안 흙탕물이 튀겨지고 있었다. 논을 골고루 펴주어야 모를 심기가 좋았다, 아주머니들도모 를 심기 위해 다들 집에서 일찍 나오신 것 같았다. 동트기전부터 논일을 시작하니 다들 부지런하였다. 나 도 아버지의 뒤를 따라서 삽으로 사방으로 골고루 흙을 골랐다. 논에 물을 가득 채우면 그래도 모 심기가 안성맞춤 이었다. 모판에서 모를 쪄놓으면 다음단계는 어린모들을 곳곳에 옮겨심었다. 지개로 나르고 경 운기로 나르고 다들 분주한 모습이었다. 모춤을 들어 나르는 것도 무척 힘겨워 보였다. "오늘 모 심기는 날씨가 좋네요." (모를 심던 옛날) "비가 올 염려는 없구요.' 들판에는 안개가 자욱이 덮혀있어서 시야가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뿌옇다. 안개가 걷히려면 오전10시가 되서야 안개가 걷히었다. 아침 부터 안개가 자욱하게 끼면 대낮에는 더웁다고 하였다. 새벽에 안개가 덮히 면서 아침기온은 차가웠다. 논두렁에는 개구리들이 뛰어다니고 있었고 사람들은 모를심느라 바쁘다. 양쪽 에 사람이 서 있어서 처음부터 줄을 띠우고 품꾼들은 허리를 구푸리고 모를 심는다, "주울!" 한참 모를 심다가 갑수 형님이 한 곡조 뽑아 낸다. 노래는 음치이면서도 노래는 잘 부른다. 여기 저기서 박수소리가 터져 나오고 앵콜 소리가 덤으로 쏟아져 나온다. 갑수형님이 한곡조 부르고나면 다음에는 아 버지 차례였다 "방골 당숙 한곡조 하시죠." 아버지는 창부 타령을 늘어 놓으신다. 아버지는 민요풍이라 곡조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 신다. 나는 아버 지가 노래를 부르시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흥겨운 민요 한 수를 뽑으니 품꾼들은 또 박수를 보낸다. "자.막걸리 한 잔 받으시고요." 흥수 형님이 따라주는 막걸리를 한잔이나 마시더니 아버지는 한참 창부 타령을 부르시다가 다시 허리를 굽히고 모를 심으시었다. 여기저기서 함박 웃음이 터져 나온다.박수소리가 안개낀 들녘에 울려 퍼져 나갔 다.가끔 뜸북이도 눈에 보였다.갑수형님도 노래는 잘 부르시었다. 아마 대학시절에 노래 자랑까지 나가시 어서인지 역시 독특한 면이 있었다. 노래가 끝나고 나면 막걸리가 오고 간다. 모를 심다가 노래를 부르고 나면 모든 피로가 확풀어지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안개가 서서히 개이기 시작하였다. 안개사이로 해가 (안개낀 시골들판입니다.) 보이기 시작하였다.술에 취하면서도 모내기는 순조롭게 잘 진행 되어갔다. "취하지 않으세요," 영호 조카도 한 술 더 뜨기 시작하였고 태봉이 형님도 한 술을 더뜨시었다.참 재미있는 모내기 작업이었 다. 서로 돌아가면서 노래를부르고 술을마시면서 즐기는 모습도 역시 마음이 흐믓하였다.그러다가 보면오 전 작업이 빠르게 진행되고 점심시간이 돌아온다, 어머니와 누나는 점심시간이되자 품꾼들의 식사를위해 밥을 지어 오시었다. 따끈 따끈한 국물과 그리고 반찬거리는 진수성찬이었다.된장국이며 새로담은김치이 며 봄에 나오는 돌나물의 무침 역시 꿀맛이었다. 술을마셔가며 돼지고기이며 잘들 먹어치웠다, 들밥이 무 고봉 밥을 주면 싹싹 쓸어 먹었다. "일꾼은 밥 힘으로 사는거여." 정말로 꿀맛 그 자체였다, 누나가 주걱으로 밥을 퍼주면 나는 고봉밥을 싫어 하지는 않았다. 밥그릇에 수 북이 쌓인 흰 쌀밥 콩을 얹거나 삶거나 하면 식욕이 더욱 끌어 당기기도 하였다. 어머니의 장맛은 더욱 맛 이 있다, 두부를 넣고 미원을 넣으면 된장국의 시원한 맛 고향의 맛 그 자체였다.점심식후 에는 조금씩 휴 식을 취하였다. 서로 담배를 태우기도 하면서 시간을 조용히 보내고 있었다. 점심이 지나가면 오후작업으 로 들어간다. 오후에는 속도가 뻘라졌다, 그래도 모를 심고 나면 다들 한 숨을 내쉬기도 하였다.모를 심고 난 자리에는 언제나 모가 넘어지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써야 했다. 손모를 심을 때에는 언제나 호흡이 잘 맞아야 한다. 이렇게 모를 심고 나면 서산에 해가 기운다. 다들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품꾼들에게 아버지는 품삯을 나누어 주시기도 하였다.그리고 언제든지 품삭과 함께 담배까지도 사주시어서 늘 넉넉할만큼 주 시었다. 아버지도 때로는 품을 팔러 다니시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들에게는 늘 고마운 존재였다. 아버 지의 너그러우신 사랑은 늘 변함이 없으시었다.살아생전에는 무척 건강하시었지만 행복하게 사시었다.* (돈을 벌려면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