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옛 호밀국(胡蜜國)의 색가심성(塞迦審城), 이스카심((Iskashim)1)
‘마침내’ 필자는 현장법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구법승들의 체취가 진하게 배어있
는 와칸주랑의 입구인 이스카심에 입성하였다. 여기서 ‘마침내’라는 어조사를 강조함은 물론 그간의 몸과 마음의 고달픔을 내비치는 것이리라…
그 다음 제일 먼저 달려가고 싶었던 곳은 그들이 건너 다녔을 그 강가였다. 그리고는 그 강물로 세수를 하고 싶었다. 아니 파미르천, 즉 판지강(Panji,噴赤河)을 바짓가랑이를 걷어 부치고 정강이 바람으로 건녀 편의 아프간 땅으로 건너가고 싶었지만, 그러나 강가에 가까이 갈수록 강 건너의 국경참호 속에서 차가운 총구들이 나를 겨냥하는 것 같아서 뒤돌아 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마을을 가로 질러, 본류인 판지강과 합류하는 작은 지류위에 놓여 있는 다리 위에 퍼질러 앉아서 강 건너 아프간령 이스카심 마을을 한 없이 건너다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이 들어 우선 유일한 가이드북인 론리풀레닛(L.P)에서 미리 검색해둔 숙소[Hani G.T]라는 곳에다 배낭을 풀고 마을구경을 나섰다. 타지크령 이스카심은 명색은 와칸주랑 최대의 마을이라고 하지만, 내가 오랫동안 상상했던 호밀국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 호밀국, 이스카심의 인근 지도
▼ 커다란 가로수가 늘어서 있는 이스카심 마을을 가로 지르며 올라가는 와칸주랑의 도로
▼ 북안 이스카심 둔치 위에서는 남의 아프간 땅이 한 눈에 바라다 보인다.
▼ 이스카심의 중심되는 지점의 다리
이스카심의 시가지를 대충 둘러보고 난 느낌은 아주 ‘거시기’ 했다. 내 머릿속에서 생각하던 것보다는 너무 작고 초라했기 때문이었다. 혜초사문을 비롯한 대개의 구법승들의 기록에서는 “와칸주랑에서 가장 번성한 호밀국의 도읍지인 색가심성” 이라고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그런 선입관이 자리 잡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내 머릿속의 색가심성은 사실은 현 타지크령의 이스카심이 아니라 강 건너 아프간령 이스카심이고 또한 이미 ‘실크로드’란 동서양의 최대 소통로라도 시간의 수례바퀴가 벌써 몇 세기를 돌아갔으니, 중세기 번성기의 호밀국의 모습을 현재, 여기서 찾는다는 것 자체가 ‘부질없구나!’ 라고 위안을 삼을 수밖에…
판지강을 따라 형성된 둔치에 계단식으로 형성된 마을은 동서로 뻗어 있는 큰 길을 따라 길 양편에는 커다란 가로수가 줄지어 서 있고 그 사이로 삼색깃발의 타지크 국기가 게양되어 있는 관공서 같은 건물들 몇 채와 작은 일용품 가게들이 몇 개 띄엄띄엄 늘어서 있을 뿐이고 민가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지정된 버스터미널이 없는 탓인지, 그나마 대낮에는 길 양편으로 크고 작은 각종 차량들이 주차해 있다가 손님을 태우려고 흥정을 하느라고 인파가 제법 있었지만, 오후가 되자 강변 쪽으로 나있는 골목길에 있다는 바자르까지 문을 닫은 탓인지, 거리에는 인적마저 뜸했고 대신 개들만이 활보를 하고 다닐 뿐이었다.
그런 썰렁한 거리를 할 일없이 어슬렁거리던 해동의 나그네는 다시 거리의 중심쯤에 있는 다리위에 섰다. 그리고는 강 건너로 눈길을 돌려 바라다보니 어스름한 어둠이 밀려오는 넓은 들판에 삼삼오오 자리 잡은 집집마디 피어오르는 저녁연기가 평화롭다.
“아! 그리 넓지도 않은 저 강을 왜 건너지 못하는 것일까? 현장법사도, 손오공도, 저팔계도, 사오정도 그리고 우리의 혜초사문도 건너다녔을 저 강을 왜 나만 건너지 못하는 것일까?”
아, 아프간!
혜초사문의 궤적을 따라 벌써 20여 년을 헤매고 다니던 필자에게는 의미가 깊은 곳이다. 아프간은 동서양의 분수령 역할을 하면서 헬레니즘을 받아들여 간다라문화를 이룩한 곳이고 쿠샨왕조를 중심으로 대승불교 만개시켰던 중앙아시아의 우담발화 꽃이었다.
그러나 실크로드가 수명을 다하고 이슬람국가로 변해 버린 뒤, 더구나 근대에는 영국의 식민지에 이어 구 러시아와의 전쟁 그리고 극우파 탈레반의 정권수립 등 혼돈의 역사 속에 휩싸여 ‘금단의 땅’이 되어 버렸다.
그러다가 뉴욕 무역센타 폭파에 이은 탈레반정권의 몰락으로 2002년 초봄 굳게 닫혀있던 대문의 빗장이 잠시 열렸다. 그 때 필자는 몇 번의 시도 끝에 카이버(Kyber)고개를 넘어 아프간의 수도 카불에 입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바미얀 대석불이 있던 곳으로 달려가 텅 빈 석굴을 향해 삼배를 올렸다.
그리고는 발길을 북쪽으로 돌려 유서 깊은 엣 토화라국 도읍지인 발흐(Balkh)와 초대 시아파2)의 창시자인 알리(600?~661)3)의 또 하나의 무덤이라고 전하는, 알리모스크가 있는 마자-이-샤리프를 거처 아프간 령 바닥샨주의 쿤두즈(Kunduz)까지는 접근했다. 그러나 당시 뉴욕무역센터의 폭파범이라고 주목을 받고 있던, 빈라덴이 숨어 있다고 알려진 와칸주랑에는 도저히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미리 한국에서 우즈벡비자를 받아 왔기에, 처음 계획된 루트인 하이다탈4) 국경선에 걸쳐 있는 우정의 다리를 건너 우즈벡으로 넘어가려고 하였다. 그래서 당당하게 아프간 출국도장을 받은 다음 다리를 건너려고 하였으나 뜻밖에도 다리 중간에서 우즈벡 입국을 거절당했다. 외국인은 육로입국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카불로 되돌아가 비행기로 몇 만리를 돌고 돌아 우즈벡의 타슈켄트공항에 내려 육로로 다시 ‘우정의 다리’까지 내려왔던 적이 있었다. 말하자면 다리 하나 때문에 몇 만리를 돌아야만 했던 것이다. 정보 미확인으로 인한 그 통한의 실수담(?)과 통한의 강이 바로 필자가 눈앞에서 흐르고 있는 판지강의 하류인, 아무다리아(Amu-Darya)강5)인 것이다.
▼ 마자-이-샤리프(Mazar-I-Sharif)의 유명한 모스크의 비둘기 떼들
▼ 아프간과 우즈백의 국경선인, 하이디탈 국경의 우정의 다리
▼ 카불의 탈레반의 정부청사였던 궁전
▼ 탈레반 민병대들
▼ 파괴되기 전의 바미얀 대석불
각설하고, 다시 이스카심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신당서』를 비롯한 중국 쪽 자료들에서 색가심성이라는 지명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혜초는 구체적인 이름을 적지 않고 다만 “또 토화라국으로부터 동쪽으로 7일을 가면 호밀국(胡蜜國)의 왕이 사는 성에 이른다.” 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혜초사문이 이렇게 원음을 한문으로 음사(音寫)하지 않은 경우는 뒤에 혜초가 파미르를 넘어 도착한 현 중국령 신장지방의 소륵국(疎勒國)을 현지인들의 발음대로 가사기이(伽師祇離)라고 적고 있는 것과 대조를 이루는 대목인데, 이 가사기이’는 원음 ‘카슈가르(Kashgar)'에 최대한 가깝게 음사하려고 하였지만, ’카‘발음은 적기가 어려웠던 게6) 아닌가로 추정된다.
각설하고, 혜초가 7일 걸어 도착한 “호밀국왕이 사는 성”은 그의 일정으로 보아서 현재의 이스카심이 확실하다. 그러나 실제 거리상으로 볼 때 문제가 하나 남는데, 이는 실제로 발흐에서 이스카심까지 일주일에 주파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그래서 학계에서는 칠일(七日)을 ‘이십일(二十日)’의 오사일 것이라고 비정하고 있는 쪽으로 무게가 살리고 있다.
왜냐하면 당나라의 공식법령(公式法令)에 의하면 하루에 말은 70리, 사람은 50리, 마차는 30리를 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토화라국의 동쪽 변경까지도 1천5백리 정도이니 적어도 대략 30일 이상 걸린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 아프간 바자르로 건너가는 다리
▼ 아프간 바자르의 검문소
현 지도상으로 이스카심은 두 곳인데, 그 하나는 아프간7)에, 또 하나는 타지크 땅에 있다. 그리고 지금도 두 곳 모두 그냥 이스카심이라고 적혀 있기도 하고 아프간령은 '이스카셈'이라고 따로 구분하고 있는 자료도 있다. 그러니까 판지강[Panji, 噴赤河]을 사이에 두고 남, 북안에 걸쳐 형성되어 있었던 옛 색가심성은 강의 남안(南岸) 땅은 현재 아프간 땅이 되었고 현재 필자가 머물고 있는 북안의 마을은 타지크령으로 분리되어 주민들은 이산가족 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현 북쪽의 타지크령에 사는 주민들은 옛날부터 살아오던 원주민등이 아니고, 20세기 초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지배정책의 일환으로 건설된 ‘파미르하이웨이’의 건설공사로 인해 이곳으로 이주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두 나라의 이스카심 주민들은, 옛날 그들의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완충지대인 중간 섬에서 열리는 바자르에서 만나고 있다. 그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필생품의 조달인데, 두 마을 모두 자기 나라의 대도시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에 가장 가까운 두 마을끼리 서로 필요한 물자들을 그 옛날처럼 물물교환방식으로 조달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비록 두 나라의 국내 사정에 따라 봉쇄되었다가 열리기를 되풀이 하고는 있지만 일주일에 한 번식 열리는 바자르는 각기 다른 나라 국적을 가진 두 마을의 주민들간의 유일한 소통의 창구이다. 바자르 구경은 언제 해도 좋다. 하물며 아프간 사람들이 법석을 이루는 바자르는 두 말해 무엇 하랴…
▼ 이스카심에서 서쪽(호로그 방향)으로 3km 지점의 판지강의 섬 안에, 아프간 냄새가 물씬 풍기는 토요 국경바자르’가 매주 열리지만, 가끔 두 나라 정세에 따라 임시로 장터가 폐쇄되기도 하니 미리 정보를 확인하고 가야한다. 상인들은 대게 아프간이고 손님들은 대게 타지크 사람들이다.
파미르고원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파미르의 대부분이 타지크에 있다는 사실이라든가 파미르에는 타지크 사람보다는 키르기즈 유목민들이 더 많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파미르의 서쪽과 동쪽 원주민의 외모는 극명하게 다르다. 동쪽은 키르기스계인들이 많이 살고 있고 반면에 서쪽으로 갈수록 아프간 파슈툰 부족과 닮아있는 신비한 초록색 눈8)을 가진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띈다. 그래서 이들의 선조를 페르시아계로 구분하기도 한다. 알렉산드로스가 뿌린 박트리아 인종의 후예라는 얘기라는 것이다. 파미르의 타지크족은 외모는 서양인인데 비해 키는 생각보다 작다. 이게 영양문제 때문인지 종족 고유의 특색인지는 알지 못하겠지만 수도인 두샨베로 가면 체구가 큰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고 금발머리의 슬라브계도 눈에 많이 띈다.
또 다른 구분법으로 ‘파미리(Pamiri)’, 즉 파미르인이 있다. 국적이나 인종을 떠나 현재 파미르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가리키는 방법이다. 그들은 해발 2~4천m 사이의 판지강의 둔치에서 반농반목(半農半牧)을 겸하여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파미르인의 조상들은 사카족(Shaka)9)으로 알려져 있는 유목민족으로서 기원전 2천년 경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그리고 중국 서쪽에 거주하였다는 사실이 가장 유력하다. 또한 그들은 해와 불을 숭배하는 유일신적인 고대 종교인 조로아스터교를 숭배하다가 후에 무슬림화 되었지만, 아직도 도처에 불을 숭배하는 신앙의 흔적은 남아 있다.
‘파미리’들은 생김새가 아니라 언어적 분류를 통해 ‘슈그난-루숀’, ‘야즈굴롬’, ‘와칸’, ‘이스카심’ 등 ‘4개 권역’으로 나누어지는데, 그들은 자녀가 태어날 때 부모가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4개 중에 하나로 나누어진다.
▼ 파미리의 전통모자
각설하고 다시 혜초사문의 궤적으로 돌아가 보자. 때는 726년 봄으로 돌아간다. 앞에서 여러 번 이야기 한 것처럼 혜초는 파미르고원을 넘으려고 설산을 넘을 시도를 하였지만, 가는 곳마다 도둑들이 길을 안내할10) 정도로 창궐하여 혼자 몸으로 파미르를 넘기는 위험하다고 생각되어 안전한 루트를 모색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한 바 있다. 그러다가 이란에서 뒤 돌아온 뒤 와칸주랑을 통한 가장 전통적인 루트를 택하기로 하고는 아프간 발흐-쿤두즈-화이쟈바드를 거처 와칸주랑의 시발점인 이스카심에 도착하였을 것이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기록과 시 한 구절을 남겼다
또 토화라국으로부터 동쪽으로 7일을 가면 호밀국의 왕이 사는 성[필자주:색가심성]에 이르렀다. 마침 토화라국에서 [이곳에] 왔을 때 서번(西蕃)으로 가는 중국 사신을 만났다. 그래서 간략하게 4자의 운자(韻字)를 써서 오언시를 지었다.
“그대는 서번 길이 멀다고 한탄하나 나는 동쪽 길이 먼 것을 슬퍼하노라.
길은 거칠고 산마루에는 눈도 많이 쌓였는데 험한 골짜기에는 도적 떼도 많기도 하네.
새도 날아오르다 깎아지른 산에 놀라고 사람은 좁은 다리 지나가기 어렵네.
한 평생 살아가며 눈물 흘리지 않았는데 오늘 따라 눈물 천 줄기나 뿌리네“
그러니까 이곳 이스카심의 객사11)에서 서번(西蕃)12)으로 가는 당나라 사신을 만나 회포를 풀었다는 말이 된다. 아마도 오랜만에 친숙한 중국어가 오가는 가운데에서, 그의 당면 과제인 파미르를 넘는 정보도 얻는 자리였을 것이다. 이 때 시심(詩心)이 발동한 혜초는 토화라에서 지은 시도 생각났는지 그것도 기록하였다.
또한 겨울날 토하라국에 있을 때 눈을 만나서 그 감회를 오언시로 읊은 것이 있었다.
“차가운 눈은 얼음과 합쳐 얼었고 찬바람은 땅이 갈라지도록 매섭구나.
큰 바다는 얼어붙어 평평한 제단이 되고 강물이 낭떠러지를 자꾸만 깎아 먹네.
용문(龍門)에는 폭포까지 얼어 붙어 끊기고 정구(井口)에는 얼음이 뱀처럼 서렸구나.
불을 가지고 산위에 올라 노래하니 어찌 파미르 고원을 넘을 것인가?“
위의 2수의 시구(詩句)는 혜초사문이 남긴 6수 중에서 가장 백미에 속하는 구절로서, 한 겨울날 이역만리에서 귀향길이 막막한 나그네가 느꼈을 객수를 잘 묘사한 절창이라 평가 받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불을 가지고 계단 위에 올라13) 노래하니” 에 대한 해석은 글자해석은 겨우 할 수 있지만, 정확한 의미는 오리무중으로 필자에게도 풀리지 않는 화두로 남아있는 중이다.
다만, 혜초가 배화교(拜火敎, Zoroaster)의 성지인 이란의 야즈드(Yazd)까지 갔다가 온 것으로 추정되고 당시 배화교가 호국 전체에 성행하고 있었으니, 이 종교에 대해 혜초는 친숙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종교의 의식 중에 하나인- 산 위 제단에 올라 태양신 불을 숭배하는-의식행위를 상징하는 구절이 아닐까? 하는 정도로만 여겨질 뿐이다.
호밀국은 중국측 자료에는 흔히 보이는 곳으로,『후한서』에서는 휴밀(休密)로,『위서』에서는 발화(鉢和)로,『양서』에서는 호밀단(胡密丹)으로,『당서』와『오공행기』에서는 호밀(護密)로, 혜림의『일체경음의』에서는 호멸(胡蔑)로, 그리고 『대당서역기』에서는 확간(鑊侃) 또는 달마실철제(達摩悉鐵帝)등으로 표기되고 있다. 이런 명칭의 어원은 대게 산스크리트의 와카나(Wakhana)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마지막 부분의 ‘달마실철제’ 만은 ‘파미르의 어원’의 경우처럼, 페르시아어 다리마스티(Dar-i-masti)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여서 산스크리트어계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혜초는 이어서 호밀국의 당시 상황을 소상히 그려내고 있다.
이 호밀국왕은 병마가 미약하여 스스로 나라를 지킬 수 없기 때문에 대식국(大食國)의 통치를 받고 있어 해마다 비단 3천 필14)을 바친다.
산골짜기에 살고 있어 주거가 협소하고15) 백성들은 가난한 사람이 많다. 의복은 가죽옷과 모직 상의를 입으며 왕은 비단과 면직 옷을 입는다.
음식은 오직 빵과 보릿가루를 먹는다. 이 지방은 매우 추워서 다른 나라보다 심하다. 언어도 다른 여러 나라와 같지 않다.16) 양과 소가 나는데 아주 작고 크지 않으며 말과 노새도 있다.
승려도 있고 절도 있어서 소승이 행해진다. 왕과 수령과 백성들이 함께 불법을 섬겨서 다른 종교는 믿지 않으므로 이 나라에는 다른 종교는 없다. 남자는 수염과 머리를 깎고 여자는 머리를 기른다. 산 속에서 사는데 산에는 나무와 물도 없고 풀도 별로 없다.
여기서 해마다 비단 3천 필을 조공으로 바친다는 구절은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당대에는 말 한 마리가 비단 40필 값어치이니 3천 필이면 말 75마리에 해당된다. 현장과 혜초의 다음 행선지인 식닉국 조에서 보다시피, “약탈한 비단을 썩을 때까지 창고에 쌓아둘 망정 의복을 지어 입을 줄 모른다.”는 구절은 비단이 화폐를 대신해 결제수단으로 이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위의 혜초의 기록에서 우리는 호밀국을 비롯한 당시의 와칸주랑의 여러 크고 작은 나라들이 아랍권의 침략을 받아 통치를 받으며 조공을 바치고는 있지만, 아직 종교적으로는 완전하게 이슬람화 되지 않은 채 국왕 및 백성들이 불교를 믿는 것이 허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현장법사도 다음과 같이 호밀국의 지형을 묘사하고 있다.
호밀국(護蜜國:達摩悉鐵帝國)은 두 산 사이1에 위치하고 있으며 [역시] 토화라국의 옛 땅으로 동서로 1천5백~ 1천6백여 리이고 남북으로 넓은 곳이 4∼5리, 좁은 곳은 1리도 넘지 못한다. 판지강에 임해 있으며 구불구불 굽어져 있다. 흙더미로 이루어진 언덕이 높거나 낮게 자리하고 있고 모래와 돌이 널려있다. 찬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다.
현장이 묘사한 지형은 아주 정확하다. 두 산맥 사이라 함은 북쪽으로는 6천m 급의 대산맥들인 와칸산맥과 남쪽으로는 힌두쿠시 산맥이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으로 동북쪽으로부터 서남쪽으로 가로놓여 있고 그 사이로 와칸천과 파미르천이 동에서 서로 흐르다가 합류하여 나중에 소그드의 젓줄인 아무다리아를 이룬다. 그리고 그 양대 하천을 따라 옛 대상로 및 구법로가 이어져 있는 것이다.
1) 자료에 따라서는 이스카쉬민(Ishkāshmin)이라고도 적혀 있다.
2) 이맘이라는 직책은 이슬람 사회의 여러 분파에 따라 달리 해석되어왔는데 이 차이는 이슬람을 수니파와 시아파로 갈라지게 한 정치적·종교적 기준이 되었다. 수니파에서 이맘은 예언자 마호메트의 계승자를 지칭하는 칼리프와 동의어로 쓰였으며 종교적 기능이 아닌 행정적·정치적 기능을 담당했다. 그러나 시아파에서 알리와 그의 계승자 이맘들은 절대적인 영적 권위를 지닌 인물로 인식되어졌다.
3)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그냥 줄여서 알리라고 부르는 인물은 예언자 마호메트의 종제로, 예언자의 딸인 과티마와 결혼하여 예언자의 유일한 핏줄을 남겼다. 제3대 칼리프가 암살된 뒤 메디나에서 제4대 정통 칼리프(재위 656∼661)로 뽑혔으나 메카의 유력자들의 반대를 받아서 자객에게 암살되었다. 그의 시신을 매장한 이라크 중부의 유프라테스 강가의 나자프와 또 다른 유해가 묻혀 있다고 알려진 아프간 북부의 마자리-이-샤리프도 중요한 시아파의 성지로 꼽힌다. 현재도 시아파는 알리를 예언자의 유일하고 진실한 계승자로 인식하고 있다.
4) 교통의 요지인 마자-이-샤리프에서 20㎞거리에 있는 국경마을이다.
5) 옛 박트리아 시대에는 옥수스(Oxus)라고 불렀고, 중국에서는 위수(僞水) 또는 오허수(烏滸水)라고 불렸던 강이다,
6) 물론 현재 중국어본 지도에는 이스카심을 ’이습카신(伊什卡辛)‘이라고 거의 원음에 가깝게 적고 있지만, 사실 이 ’카(卡)‘자란 글자는 현대에 와서 ’카드(卡,Card)’ 같은 현대어의 대두에 따른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글자이기에, 옛날에는 없던 글자이다. 그렇기에 가시기리에서도 ‘카’를 ‘가(伽)’로 표현하였을 것이다.
7) 타직과 아프간 사이의 Wakhan 계곡에는 4개의 다리가 있는데, 주로 NGO 구호물자 수송용 다리로 쓰인다. 특히 이 이스카심 다리는 섬안에서 토요일 날 바자르가 열리는데, 타직비자를 가진 외국인들도 출입할 수 있다.
8)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스티브 맥커리가 찍은 ‘공포에 질려 있는, 초록눈의 아프간 소녀’의 사진은 유명하다.
9) 인도에 사는 종족의 하나. 중앙아시아의 유목 민족인 스키타이 족 가운데 기원전 2세기 후반에 남하하여 인도에 정주한 종족으로, 서북부 인도에 여러 왕국을 건설하였다.
10) ‘험간적도창(險澗賊途倡)’은 험한 골짜기마다 도적떼가 버젓이 나타나 길을 안내할 정도라는 뜻이다.
11) 실크로드의 대상들이나 일반 나그네들이 머무는 곳을 카라반세라이(Caravanserai)라고 하는데, 중앙아시아에는 지금도 도처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 유지들이 남아 있다. 유감스럽게도, 필자가 이스카심을 떠난 뒤 얻은 자료에 의하면, 이스카심 근교 누트(Nut)라는 곳에 6-7세기의 카라반세라이의 유지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현장을 비롯한 구법승들이 머물렀던 가장 신빙성 있는 곳이 아닐 수 없다.
12) 글자 그대로의 서번은 서역제국을 가리키겠지만,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어디를 의미하는지 미상이다.
13) 이잔에는 필자도 ‘伴火上胲歌’를 ‘땅 끝에 올라 라고 번역했으나 배화교의 성지들이 대게 산 위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산위로 정정하게 되었다.
정수일의 견해는- “불을 가지고 땅 끝에 올라 노래를 부르니”라는 해석은 이해가 잘 안 된다. 다만 이 글자를 ‘해(陔)’자나 ‘해(垓)’자의 오사로 보아 이 두 글자는 ‘층계’ ‘계단’이라는 같은 뜻으로 해석하여 이 한 수를 “불을 벗 삼아 층층 오르며 노래한다마는”으로 옮겨본다- 라고 해석하고 있다.
14) 당대에는 말 한 마리가 비단 40필 값어치이니 3천 필이면 말 75마리에 해당된다. 다음 나라인 쉬그난[識匿節]에서 보다시피, “약탈한 비단을 썩을 때까지 창고에 쌓아둘 망정 의복을 지어 입을 줄 모른다.”는 구절은 비단이 화폐를 대신해 결제수단으로 이용되었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15) 처소협소(處所狹小)라는 표현은 정확하다. 또한 『대당서역기』권12에서도 “달마실철제국은 두 산 사이에 있으며 동서가 1500~1600여리이고 남북은 4~5리, 좁은 곳은 1리도 채 안 된다고 한다. 호밀국은 두 산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역시] 토화라국의 옛 땅으로 동서로 1천5백~ 1천6백여 리이고 남북으로 넓은 곳이 4∼5리, 좁은 곳은 1리도 넘지 못한다. 아무다리야 강에 임해 있으며 구불구불 굽어져 있다.
16) 호밀어는 파미르 어군에 속하는 와키(Wakhī)어로서 인근 언어들과는 구별된다. 이란 어계의 현대 방언으로 취급되는 파미르 어군에는 슈그니로샤니(Shughnī-Roshanī)어(Shughnī․Roshanī․Bartāngī․Roshorvī=Oroshorī어 포함), 야즈굴라미(Yazghulāmī)어, 이슈카스미(Ishkāshmī)어(Ishkāshmī․Zēbākī․Sanglīchī어 포함), 와키(Wakhī)어의 4대어가 있다. 이 어군은 판즈(Panj) 강과 그 지류 유역에 널리 퍼져 있는데, 아프가니스탄의 바다흐샨 주와 타지크 공화국의 고르노바다흐샨(Gorno-Badakhshān) 자치구, 중국 위구르 자치구 서남단 등지에서도 쓰이고 있다. 호밀어인 와키어는 판즈 강안의 이슈카슈민(Ishkāshmin) 상류로부터 와칸다리야(Wakhkhān Darya) 강 유역에서 유행하며, 파키스탄령 훈자(Hunza)나 치트랄, 중국령 타슈쿠르간(Tāshukurghan)에도 쓰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슈카슈민(Ishkāshmin)이들은 19세기 이곳에 이주한 사람들이다.(G. Morgenstierne, Indo-Iranian Frontier Languages, 2nd ed., Vol.Ⅱ, Iranian Pamir Languages, Oslo, 1973, 429-558 참고)
첫댓글 이사카심... 비디오로도 본 기억이 납니다.
뭐 EBS인가에서 저도 본것같습니다만...
근데 이 연재기를 일는 사람은 많은 것 같은데, 댓글 정도 다는 사람은 왜 그리 없는지 ... 이해를 못하겟네요,
특히 몰래 퍼가서 마치 자기가 쓴 것처럼 하는 몇몇 사람은 그래도 인사는 하고 가셔야하는것이 아닌지?
참으로 싸가지 없는 사람들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섭섭하게 생각마시고...
샘~화이팅~ 자여우~~
*정말 그런것 같네요ᆞ
지금 가장 힘드신 상중에도
글을 올리시는것 같은데
힘을 드려야겠지요ᆞ
스쳐지나가지 마시고
한말씀으로 힘을 드려야
될것같군요ᆞ~~~^^
네 고맙습니다. 그리 섭섭하지 않습니다. 그려러니 하니까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