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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江寒 第18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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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통(李通)이 들어간 방에는 동료 두 사람이 있었는데, 이통이 술에 취해 벌개진 얼굴에 꼴 사나운 모습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매음굴에 가서 술을 퍼마시고 계집질을 하다 이제 들어오냐고 놀려대며 욕을 퍼부었다.
이통은 동료들의 욕지거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곧장 자기 침대로 가서 이불을 끌어안고 잠이 들었는데, 잠시 후 코고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울렸다.
시간이 흘러 경고(更鼓)가 세 번 울리자 이통은 실눈을 뜨고 같은 방의 동료 두 사람을 몰래 엿보더니, 그들이 이미 잠이 들었다는 것을 확인하곤 조용히 일어나 그들의 수혈(睡穴)을 짚고 살쾡이처럼 빠르게 방을 나갔다.
전번왕(滇藩王)은 밤이 깊었지만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고 서재에서 혼자 기밀 문서를 열람하고 있었다.
문 밖에 칼을 든 호위병 두 사람이 삼엄한 기세로 서 있었는데, 눈빛이 번개처럼 날카로워 한눈에 두 사람의 무공이 약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월동문(月洞门) 밖에서 갑자기 청의시녀(青衣侍女) 하나가 가냘픈 손에 '연와탕(燕窝汤)' 한 그릇을 들고 들어왔는데 번왕이 마시기 위한 것임이 분명했다.
청의시녀는 서재를 향해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던 중 갑자기 가슴이 울렁거리며 현기증이 나 눈앞이 어찔했다가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옴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이 피곤해서 그런 줄로만 알고 더이상 개의치 않고 곧장 서재로 들어가 연와탕을 바치고 물러났다.
그녀로서는 도중에 이통이 연와탕에 손을 썼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이통의 몸놀림이 너무 빨랐기 때문이었다.
밤이 깊어가자 호위병 두 사람은 졸음이 쏟아지며 점차 눈꺼풀이 내려앉기 시작했고, 그 틈을 이용해 서재로 미끄러지듯 들어간 이통은 번왕이 책상에 엎드려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았다.
입가로 침을 흘리며 좋은 꿈을 꾸는지 빙긋 웃는 얼굴로 잠든 번왕의 몸에 혈도 몇 군데를 찍은 다음 이통은 빠르게 물러나와 공중으로 몸을 솟구쳐 사라졌다.
쏟아지는 졸음을 못 이겨 잠시 졸다가 정신이 번쩍 든 호위병들은 서재 안에 불빛이 꺼진 것을 발견했지만, 번왕이 이미 잠든 줄 알고 별로 개의치 않았다.
전번왕(滇藩王)이 서재에서 혼자 자는 것은 이미 익숙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오경(五更)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리며 날이 밝아올 무렵, 번저(藩邸)에서 비보가 전해졌다.
번왕(藩王)이 갑자기 중풍에 걸려 입과 눈이 비뚤어지고 말도 하지 못하며 왼쪽 반신이 마비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고, 소문은 발 빠르게 퍼져나가 결국 정오도 되기 전에 이미 곤명(昆明) 전체가 알게 되었다.
아침 해가 떠오르자 곤명이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번저의 호위대 부통령 양송령(杨松龄)은 머리가 땀으로 흠뻑 젖은 채 몹시 당황하여 태순상포장(泰顺祥布庄)으로 뛰어들었다.
아침 식사를 하고 있던 당몽주(唐梦周)는 양송령이 황급히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
"양 부통령(杨副统领)의 안색이 심상치 않습니다. 무슨 큰일이라도 났습니까?"
양송령이 멍해져 물었다.
"공자께서는 아직 소식을 듣지 못한 모양이지요?"
"번왕께서 병에 걸린 것 말입니까?"
당몽주는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말을 이어갔다.
"사람이 곡식과 백초(百草)를 먹고 사는데 어찌 병이 나지 않겠습니까? 의원을 불러 치료하고 요양하면 자연히 나을 것입니다."
양송령이 말했다.
"번왕께선 장년(壯年)의 한창 나이로 신체가 강건했는데, 졸지에 이렇게 중풍으로 말을 못하고 반신불수가 되다니 참으로 이상합니다."
당몽주가 말했다.
"하늘에는 예측할 수 없는 풍운이 있고 사람에게는 아침저녁으로 화와 복이 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양송령이 말했다.
"공자의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만, 양모(杨某)는 명을 받들어 성 밖으로 나가 명의(名医)를 모셔 와야 하기 때문에, 어제 양모가..."
양송령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당몽주가 밝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양 부통령께서는 너무 예의에 급급하시군요. 제가 어찌 그렇게 사리도 모르는 사람이겠습니까? 형편이 그러하니 양 부통령께서는 우선 급한 일부터 처리하십시오."
양송령은 황송해 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양모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공자께서 급히 운남을 떠나시지 않는다면 다른 날 자리를 마련하여 그동안의 회포를 풀도록 하겠습니다."
당몽주가 웃으며 말했다.
"꼭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인정과 은혜가 따뜻하면 물 한 모금을 마셔도 마음이 시원해지는 법, 양 부통령의 성의에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양송령은 포권공수 후 몸을 돌려 한 걸음 내딛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양모가 방금 오면서 무서(抚署-巡抚府) 앞을 지나다가 마침 무서 방문을 마치고 나오던 대내(大內=황궁) 철위사(铁卫士)의 부관(副管)인 성추정(盛秋霆) 대인을 만났는데, 지금쯤은 아마 번저에 가 계실 것입니다. 성 대인은 공자와 경성에서 자주 왕래하며 교분이 막역하지 않습니까? 공자께서 이곳에 머물고 계시다고 알려 줬으니 반드시 찾아와 인사를 드릴 것입니다."
당몽주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성(盛) 대인도 오셨단 말입니까? 그럼 성 대인이 오시기를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는 양송령이 말을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지켜본 뒤 바삐 내실로 돌아와 엄미미(严薇薇)를 불렀다.
"미매(薇妹)!"
엄미미가 재빨리 모습을 나타냈다.
당몽주가 급히 말했다.
"수고스럽겠지만 개방(丐帮)에게 일러 양송령을 미행하라 전하시오. 내 생각엔 양송령이 명의를 초빙하는 일을 겸해 월번(粤藩=广东, 广西 지역을 다스리던 藩)으로 달려가 사태를 협의하려는 것 같소."
엄미미는 즉시 몸을 날려 지붕 위로 올라갔다.
잠시 후 하인이 들어와 아뢰었다.
"경성(京城)에서 성(盛) 대인이 오셨습니다!"
당몽주는 즉시 밖으로 나가 하늘색 비단 장삼을 걸친 얼굴이 희고 수염이 없으며 마흔 살쯤 되어 보이는 기품 있는 중년의 사내를 맞이했고, 두 사람은 서로 크게 웃고 반가워하며 내실로 함께 들어섰다.
간단한 인사말을 나눈 후 당몽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경성에서 작별한 지 어느덧 일 년이 지났는데 대인의 댁내는 평안하시지요?"
성추정이 대답했다.
"덕분에 별일 없소이다. 성모는 일년 내내 경성을 떠나 각 성(省)을 돌아다니며 황상의 눈과 귀가 되어 견마지로(犬马之劳)를 다하지 않을 수 없다 보니, 누추한 집이나마 제대로 돌볼 겨를이 없지만, 다행히 경성의 벗들이 가까이서 돌봐주는 덕분에 성모가 마음 쓸 일이 별로 없지요. 당 노제가 이번에 천남(天南)*⑴으로 유람을 온 것은 설마......."
당몽주가 눈썹을 펴고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어 받았다.
"제가 남쪽으로 내려온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 성 대인의 이목을 벗어날 수 없었겠지만, 그래도 한번 맞춰 보시겠습니까?"
성추정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문에 노제가 현령궁(玄灵宫)에 갔다던데..."
"맞습니다!"
당몽주가 말했다.
"성 대인께선 저를 가장 잘 알고 계신 분들 중 한 분이지요. 풍월(风月)을 즐기며 왕후(王侯)의 작위(爵位)를 비웃고, 이번 생에는 결코 공명현달(功名显达)을 바라지 않은 채 종일 가무와 여색에 빠져 있지만, 눈에만 색이 있고 마음에는 색이 없다 보니(目中有色, 心中无色), 오히려 미인의 은혜를 입는 게 가장 견디기 어렵습니다."
성추정은 눈을 반짝이더니 크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노제 역시 필시 적어도 한 번쯤은 애절한 만남을 겪고 방황했을 것이오!"
당몽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한번은 명승지로 유람을 갔다가 집이 있는 노(鲁)로 돌아오는 길이 마침 동문수학한 친구가 사는 곳 가까이를 지나게 되어, 그를 찾아 가다가 우연히 맑고 깨끗한 샘이 눈에 띄어 샘물을 한 모금 떠 마셨는데, 뜻밖에도 독천(毒泉)이라 순식간에 갈증이 더해지고 머리와 눈이 어지러워져, 한바탕 미친 듯이 달린 후 결국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습니다."
당몽주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이제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하늘에서 구원의 손길을 내려 보냈는지, 얼마 뒤 눈을 뜨고 깨어나 보니 한 묘령의 소녀가 저를 구해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추정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그 소녀가 현령궁(玄灵宫) 출신이었겠군."
"맞습니다."
당몽주가 말을 계속했다.
"저는 아버님의 허락을 받아 그녀를 시첩으로 맞이하기 위해 현령궁으로 온 것입니다."
성추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재자(才子)와 가인(佳人)이 만남은 구슬이 한데 꿰이고 옥이 한데 모이는 주련벽합(珠联璧合)*⑵의 결합이나 마찬가지이니, 부디 백발이 될 때까지 해로하기를 바라오. 하지만 노제는 성모에게 한 가지 말하지 않은 게 있는 것 같은데..."
당몽주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강호란 곳이 워낙 기이하고 변화무쌍하여 저는 애당초 강호상 시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일단 맞닥뜨리게 되었으니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고, 또 현령궁이 참혹한 도륙을 당할 위기에 처한 것을 보고는 구하러 나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추정이 말했다.
"그건 성모도 알고 있고, 나 역시 그런 경우를 마주하면 도와야겠지요. 그런데 노제가 어떻게 현령궁에 자전검(紫电剑)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소."
"그건 제 시첩이 귀띔해서 알게 된 것입니다."
당몽주가 말을 이어갔다.
"지금 강호상에서 벌어지는 분란의 열에 아홉은 자전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저는 이 검을 대내(大内)에 바쳐 강호의 분쟁을 종식시키고자 하는데 뜻대로 되지 않는군요. 검은 본래 마운신조(摩云神爪) 손도원(孙道元)이 현령궁주에게 잠시 맡긴 물건으로 손 선배가 다시 가져갔습니다."
성추정이 물었다.
"노제는 손도원을 본 적이 있소?"
"없습니다!"
당몽주가 말을 계속했다.
"저는 현령성모에게 손도원과 한 번 만난 적이 있다고 말했지만, 사실 저는 그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현령궁의 일은 현재 일단락 되었고, 이후로는 상관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성추정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원래 그랬었군. 그동안 내가 만난 사람마다 말이 다르니 누가 옳은지 알 수 없었는데, 노제의 말을 들으니 이제야 명백히 이해가 되는구려. 부인은 필시 천향국색(天香国色)일 텐데, 한 번 뵐 수 있을지 모르겠소."
당몽주가 가볍게 웃으며 맥여란(麦如兰)을 불러 성추정에게 인사를 시키자, 성추정은 칭찬과 감탄을 그치지 않았고, 얼마 후 몇 마디 덕담을 더한 후 떠났다.
당몽주가 내실로 돌아와 냉소하며 말했다.
"흥, 성추정! 그는 실수를 했소."
맥여란이 놀라서 물었다.
"그가 뭘 잘못했다는 거죠?"
당몽주가 말했다.
"나를 만나러 온 게 잘못한 거란 말이오. 나는 원래 그를 의심하지 않았는데, 그는 나를 속이며 농간을 부렸소."
맥여란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아 계속 어리둥절해 했다.
당몽주는 더이상 설명하지 않고 맥여란의 귀에 몇 마디 속삭인 후 어둠 속으로 급히 사라졌다.
곤명성 동쪽 교외, 앵무산(鹦鹉山) 기슭에 있는 흑룡관(黑龙观)은 운남에서 제일 오래된 사당으로, 깊이를 모르는 한담(寒潭)인 흑룡담(黑龙潭)과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녹수(绿水) 줄기, 그리고 그 위에 놓인 활 모양의 다리가 아름다움을 더하고, 이끼 낀 푸른 돌난간 하나하나에도 옛 정취가 넘치는 명승지였다.
당나라 때 심은 매화와 송나라의 측백나무 등 오래된 나무 줄기들이 하늘을 찌르고, 곳곳의 벽면에는 오래된 석각(石刻)들이 새겨져 있어 사람들이 다투어 탁본을 뜨곤 한다.
하지만 평소에는 인기척이 드물어 고요하고 적막한 사당이었다.
갑자기 --
안쪽에서 검은 인영이 빠르게 나타나더니 음침한 얼굴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내며 엄숙한 표정으로 몸을 굽혀 말했다.
"속하가 문주님을 뵙습니다."
고목 뒤에서 백의인 한 명이 형형한 눈빛을 발하며 천천히 걸어 나오더니 음침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공(司空) 노규화(老叫化)는 아직도 그러고 있는가?"
노인이 대답했다.
"아직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고집을 부리며 굴복하지 않고 있어 속하 등이 달래기도 하고 협박도 해 보았지만 여전히 버티고 있습니다."
백의인이 냉소하며 말했다.
"그도 결국 굴복하는 날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노화자(老化子)가 너희들에게 사로잡혔다는 소문이 밖으로 새어 나갔느냐?"
노인의 안색이 굳어졌다.
"아직은 아닙니다."
백의인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이 모르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일을 하지 않는 것뿐, 소문은 이미 새어 나갔다고 봐야 할 것이다. 마운신조 손도원 노귀가 현령궁에 한 차례 출현한 이후, 다시는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는 것으로 짐작해 보면, 그가 아직 운남 땅에 숨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손도원의 무공 자체는 크게 두려워할 것이 못 되지만, 공교롭게도 자전검을 지니고 있고 개방(丐帮)과의 친분도 두터우니, 사공 노화자가 본문의 포로가 된 것을 알게 되면 찾아올까 두렵다. 하지만........."
여기까지 말하던 백의인은 갑자기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는데, 얼굴을 들어 하늘을 보며 불현듯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노인은 잠시 기다렸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문주께서는 사공 늙은 거지를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을지 지시해 주십시오."
백의인이 다시 노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공 노규화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게 좋겠다. 여기서 동쪽으로 약 7리 정도 떨어진 곳에 삼관대제(三官大帝)*⑶의 사당이 있는데, 그곳을 지키는 단 한 명의 사당지기가 본문의 제자이니, 너희들은 속히 흑룡관(黑龙观)에서 철수하고 삼관묘(三官庙)에서 다음 지시를 기다리도록 하라."
노인이 몸을 굽혔다.
"속하는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백의인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한 차례 사방을 둘러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더니 갑자기 하늘을 향해 날아올라, 몸을 뒤집고 유성처럼 빠르게 허공을 가로질러 사라졌다.
한 그루의 오래된 측백나무 위에서 남색 도포를 입고 등에 고검(古剑)을 멘 노인이 매처럼 빠르게 날아 내렸는데, 머리와 수염은 새하얗고 두 눈은 껌벅일 때마다 날카로운 빛을 뿜어내 보는 사람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이어서 중년의 거지가 내려오며 입을 열었다.
"소협,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남포노인이 말했다.
"나를 소협(少侠)이라고 부르지 마시고 손 노선배라고 부르시오!"
중년 거지는 안색이 굳어지며 말했다.
"아, 이 거지가 깜빡했습니다!"
남포노인이 말했다.
"당신은 속히 삼관묘로 달려가 사당지기를 제압한 후 그의 모습으로 변장하시오, 빨리!"
중년 거지가 나는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남포노인이 잽싸게 측백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한 줄기 백영이 비조(飞鸟)처럼 공중에서 떨어져 내렸는데, 다름 아닌 조금 전의 그 백의인으로 어딘가 다녀오는 모양이었는데, 삼엄한 눈빛으로 그 자리에 우뚝 서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흑룡관 안에서 여섯 명이 급히 달려나왔고 그중 두 명은 마대자루 하나를 함께 들고 있었는데, 자루 안에는 사공기가 들어 있음이 분명했다.
백의인을 보자 그들은 안색이 굳어졌고, 우두머리인 흑의노인이 몸을 굽혀 말했다.
"문주님, 또 다른 지시가 있으십니까?"
백의인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본좌는 방금 이곳 흑룡관 밖에 매복을 설치했다. 사공 늙은이가 잡혔다는 소문이 이미 퍼졌을 것이고, 얼마 안 있어 개방 제자들과 마운신조 손도원 노괴가 소문을 듣고 달려와 구하려 할 것이니, 너희들은 어서 움직이도록 하라!"
여섯 사람은 서둘러 동쪽으로 달려갔고, 백의인은 천천히 흑룡관 안으로 들어갔다.
흑룡관(黑龙观)에서 남쪽으로 약 몇 리 떨어진 키 작은 숲속에서 세 명의 흑의경장(黑衣劲装) 사내들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한 사내의 얼굴색이 갑자기 변해 다급히 속삭였다.
"누가 오고 있소."
남색 장삼을 입은 중년 사내가 빠르게 다가오는 것이 보이자, 세 명의 경장대한들은 순식간에 몸을 날려 길을 가로막고 소리쳤다.
"어디를 가시는 길이오?"
남삼중년인(蓝衫中年人)이 차갑게 웃으며 영패(令牌)를 꺼냈다.
세 명의 경장대한들은 영패(令牌)를 보고 안색이 굳어졌는데, 놀라움과 두려움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남삼중년인이 말했다.
"문주의 명령이다. 잠시 후 개방 거지들과 손도원 노괴가 올 것이니, 들어오는 것은 막지 말되 나가지는 못하게 해라. 떠나려고 하면 죽여라!"
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고 세 사내들을 한 번 훑어보더니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세 명의 사내들은 오싹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더니 다시 숲속으로 몸을 숨겼다.
곤명은 일년 내내 늘 봄과 같이 따뜻하기 때문에, 절기상 겨울로 접어드는 이 즈음도 단풍으로 물드는 나무들도 많지만 풀숲은 여전히 푸르름을 잃지 않는다.
삼관묘(三官庙) 밖 단풍에 물든 나무들은 바람이 불면 불타는 듯한 홍엽(红叶)들이 붉은 물결을 일으켜, 보는 이들의 눈을 현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갑자기 숲 밖에서 발을 끄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헝클어진 머리와 씻지 않은 얼굴에 누더기를 걸친 중년의 거지가 너덜너덜한 짚신을 끌며 모습을 나타냈는데, 그는 김이 모락모락 나며 구수한 냄새가 코를 유혹하는 진흙구이 닭(富贵鸡/叫花鸡)을 손에 들고 입으로 씹으면서 삼관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사당 안에서 갑자기 회색 옷에 키가 작고 몸이 마른 사당지기가 뛰어 나오며 소리쳤다,
"이 사당은 거지를 받지 않으니 다른 데로 가시오!"
중년 거지는 히죽 웃으며,
"이곳마저 안 된다면 이 거지를 받아 줄 곳을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고 투덜대며 몸을 돌렸는데, 그 순간 한 줄기 한망(寒芒)이 사당지기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중년 거지가 암기 수법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기 때문에 미처 방비하지 못한 사당지기는 신음을 발하며 쓰러졌다.
중년 거지는 차갑게 웃으며 재빨리 사당지기를 낚아채 사당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잠시 후 여섯 명의 흑의인이 달려와 메고 있던 마대(麻袋)를 내려 놓았고, 우두머리인 흑의노인이 큰 소리로 외쳤다.
"사당 안에 누구 없소?"
삼관묘 안에서 입가에 기름기가 번지르르한 사당지기가 불쾌한 표정으로 뛰어나왔다.
"당신들은 누구요?"
흑의노인은 손짓으로 신호를 그리며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노부 등은 문주의 명을 받아 이곳에 왔소."
그가 손으로 그린 표시는 문중의 신분과 직책을 표시한 것이었다.
사당지기가 안색이 굳어져 즉시 옆으로 공손히 비켜서며 길을 내어 주자, 여섯 명의 흑의인은 마대를 다시 메고 정전(正殿)을 지나 후전(后殿)으로 들어갔는데, 후전 안에는 흰 칠을 한 작은 탁자 위에 잘게 썬 닭고기 한 그릇과 마시다 만 술 대접이 놓여 있었고, 닭 뼈가 어지럽게 널려 있는 것을 보면 사당지기가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두머리 흑의 노인은 술을 목숨처럼 좋아하는 술꾼인지라 참지 못하고 탄성을 질렀다.
"술 냄새가 정말 좋구나!"
사당지기는 급히 대나무 찬장을 열어 여섯 벌의 사발과 젓가락을 꺼내더니 밥그릇에 일일이 술을 가득 따랐다.
흑의인들은 사당지기가 속이고 있는 것이라곤 의심하지 않았고, 삼관묘 안에서 다음 명령을 기다려야 하는 입장에서 술과 닭고기가 있으니 이처럼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모두들 한자리에 모여 통쾌하게 마시기 시작했는데, 술맛은 진하고 상쾌하고 입에 넣으면 향기로웠고, 포동포동한 닭고기는 연하고 고소해 저절로 흥이 일었다.
갑작스럽게--
여섯 흑의인들은 머리가 빙빙 돌고 어질거리는 것을 느끼자, 적의 술책에 빠진 것을 알고 얼굴색이 변해 분노의 눈길로 사당지기를 노려보며 몸을 일으켜 세웠지만, 곧바로 앞이 컴컴해지며 모두 땅에 쓰러졌다.
사당지기가 하하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돌연 남색 장포를 입고 얼굴이 괴이하게 생긴 마운신조 손도원이 모습을 나타냈다.
손도원은 빠르게 마대를 풀어헤쳐 사공기를 부축해 끄집어 냈는데, 사공기는 두 눈을 꼭 감은 창백한 얼굴에 몸은 곱사처럼 굽어진 채 잔뜩 움츠러져 있었다.
손도원이 냉소를 터뜨렸다.
"정말 악독한 수법이구나!"
사당지기가 크게 놀라 다급히 물었다.
"사공 장로님을 구할 수 있습니까?"
손도원이 다시 냉소를 터뜨렸다.
"백의흉사의 점혈 수법은 악독하기 그지없어, 혈도를 짚는 것에 더하여 골격을 수축시키는 금제를 가한 것 같소. 만약 해법을 알지 못한다면 사공 선배님은 평생 불구가 되며, 매일 두 차례씩 음화(阴火)에 몸을 태우는 고통을 겪을 것이오."
손도원은 말을 하며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여 사공기의 온몸을 어루만졌다.
이윽고 사공기의 전신 골격이 우두둑 소리를 내며 천천히 펴지더니, 얼핏 잠든 모습으로 회복되고 창백했던 얼굴도 홍조를 띠기 시작했다.
잠시 후 노규화 사공기(司空奇)가 목구멍에서 신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너무 괴롭구나!"
천천히 눈을 뜨고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더니 희미한 미소만 한 차례 보이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사당지기가 안색이 변해 소리쳤다.
"선배님!"
손도원이 웃으며 말했다.
"노규화는 오랫동안 혈도를 제압당했기 때문에 진기를 조절하여 우선 공력을 회복해야 하니, 그대는 너무 놀랄 필요 없소."
뜨거운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 무렵, 사공기가 갑자기 몸을 일으켜 부들부채만한 커다란 손바닥을 내밀어 손도원의 어깨에 올려놓고 하하 크게 웃어댔다.
"늙은 거지가 다시 태어나 사람으로 돌아오게 될 줄은 꿈도 꾸지 못했는데.... 노제, 이 거지는 자네에게 감복하지 않을 수 없구먼."
손도원이 말했다.
"백밀일소(百密一疏)라고, 흉사의 백 가지 치밀함 속에 한 가지 허술함이 있었던 것이지요."
사공기기 갑자기 두 눈에서 분노의 불꽃을 내뿜었다.
"노제,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노화자가 이 원수를 갚지 않으면 맹세코 사람 구실을 하지 않을 것이네! 쥐새끼들을 잡으러 어서 가세! "
손도원이 말했다.
"지금 우리는 삼관묘(三官庙)에 있습니다."
사공기는 놀라 물었다.
"흑룡관에 있는 게 아니고?"
손도원이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백의인은 사공 선배가 흑룡관에 감금되어 있다고 소문을 퍼트리고, 관 밖에는 복병을 깔아 개방 고수와 손도원을 유인하여 손도원이 지닌 자전검을 빼앗으려 했던 것입니다."
"자전검(紫电剑)!"
사공기는 깜짝 놀라며 손도원의 어깨 뒤로 시선을 던졌다.
그는 손도원의 어깨 너머로 고색창연한 장검을 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정말 자전검인가?"
손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도 거짓이 아닙니다!"
사공기가 눈빛이 번쩍이며 소리를 높였다.
"자전검이 있으니 흉사 무리를 두려워하겠는가? 속히 흑룡관(黑龙观)으로 가세!"
손도원이 고개를 저으며,
"타초경사(打草惊蛇)의 우를 범하면 안 됩니다. 흑룡관 밖은 곧 피비린내 나는 곳이 되겠지만, 개방 사람들이 아니니 선배님께서는 마음에 두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고 말한 뒤 사공기를 끌고 삼관묘 밖으로 나갔다.
사당지기로 분장한 중년 거지가 급히 뒤따르며 물었다.
"사당 안의 여섯 도적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손도원이 고개를 돌려 손을 휘젓자 한 가닥 자색 빛이 사당 안으로 떨어졌다.
갑자기 천둥소리가 크게 울리더니 삼관묘 전체가 폭발해 화약 냄새가 진동하고 먼지가 하늘로 치솟았으며, 벽돌과 돌멩이들이 비처럼 날았다.
삼관묘가 있던 자리가 순식간에 폐허로 변해 버린 것이다.
사공기가 놀란 눈으로 말했다.
"노제, 자네의 이 패도적 암기는 자모뇌주(子母雷珠) 아닌가?"
"맞습니다!"
손도원이 말했다.
"부득이 가화강동(嫁祸江东)의 계책으로 화를 전가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공기는 하하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윽고 세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날아갔다.
흑룡관(黑龙观) 밖은 물처럼 고요했지만, 먹구름이 몰려와 하늘이 어두워지며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한 기세였다.
백의인은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로 뒷짐을 진 채 대전에 서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고, 눈에는 우울한 기색마저 희미하게 감돌았다.
그가 고개를 들어 대전 밖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왜 아직 오지 않는 거지?"
갑자기--
하늘 끝 먼 곳에서 벽력이 치는 듯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백의인은 안색이 더욱 어두워지며 낮게 소리쳤다.
"상륭(常隆)!"
전각 모서리 어두운 곳에서 마른 체구의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나는 듯 달려 나왔다.
백의인이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방금 큰 소리를 들었지?"
흑의 사내가 대답했다.
"속하도 들었습니다!"
백의인이 말했다.
"속히 가서 조사하고 보고하라!"
흑의 사내는 즉시 몸을 날려 사라졌다.
(18장 마침)
[註]
*⑴ 천남(天南) :
흔히 영남(岭南)이라고도 불리며 중국의 남부 지역 중 오령(五岭) 이남 지역을 의미한다.
지리적으로 五岭은 월성령(越城岭), 도방령(都庞岭), 맹저령(萌渚岭), 기전령(骑田岭), 대유령(大庾岭) 다섯 개의 산군(山群)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광서성(广西省) 동부에서 광동성(广东省) 동부, 그리고 호남성(湖南省)과 강서성(江西省) 경계 지역까지 네 개 성(省)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岭南은 광동성(해남도, 홍콩, 마카오 포함), 광서성, 운남성 동부, 복건성 서남부 일부 지역을 포함하며, 중국의 경제 발전과 문화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참고: 여기서 岭은 고개를 의미하지 않고 산을 의미함)
*⑵珠联璧合(주련벽합) :
진주가 한데 꿰이고 옥이 한데 모이다, 출중한 인물 또는 훌륭한 물건이 한데 모이다.
*⑶삼관대제 (三官大帝) :
삼계공(三界公) 이라 불리기도 하며, 天ㆍ地ㆍ水를 관장하는 신으로 천당, 저승, 바다 삼계를 관리하며, 인간의 고통을 치유하고 기도하는 대상으로 숭배되며, 관직운도 관장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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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요해 >이용해
감사합니다
주인공의 활약상이 시원시원하고 좋기는 한데
너무 무결점이다 보니 신이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가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