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시중(侍中) 대유(大猷) | 김대유(金大猷, ?~?)로, 청풍 김씨의 시조이다.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고려 말에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청성(청풍)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청풍으로 하였다. | 강한집(江漢集) |
3 | 시중공(侍中公) | 김대유(金大猷)이다. 신라 56대 경순왕 김부(金傅)의 후예인 대장군 김순웅(金順雄)의 12세손으로, 고려 말에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고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다. | 운양집(雲養集) |
시중공(侍中公) : 김대유(金大猷)이다. 신라 56대 경순왕 김부(金傅)의 후예인 대장군 김순웅(金順雄)의 12세손으로, 고려 말에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고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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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고려 장군이셨던 김순웅(金順雄)님의 후손으로, 김순웅 장군님은 경주김씨 계림군파 원시조이십니다.
저희 가문의 족보는 1772년에 만들어 졌고(계림군파 임진보) 이때 최초로 고려 평장사 김인위의 부친으로 김순웅 조상님을 상계로 하는 족보가 만들어 졌습니다.
그 이전에는 김순웅장군님을 조상으로 하는 김씨 족보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1980년대 김주경이라는 사람이 족보조작을 해서 경주김씨 계림군파 족보에 들어오게 되었고,
이 사람이 족보사기를 치기 위해 사람들과 연대해서 김순웅 장군님을 대장군이라 칭하고 대장군파를 만들어 상계조상이 전무한 청풍김씨를 비롯하여 여러 김씨들을 모아 김순웅 장군님의 후손으로 족보조작을 했습니다.
또 계림군파 족보를 그대로 베껴 이번에는 경순왕의 장남으로 계대를 이어 태자파를 만들고 태자파 족보까지
만들어 족보사기를 쳐왔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전무후무한 족보사기단으로 대장군파, 태자파는 모두 김주경과 이들 세력의 치밀한 조작으로 꾸며낸 거짓내용으로 절대 사실이 아닙니다.
따라서 김대유는 청풍김씨로 남아야지, 경순왕의 후손도 아닐뿐더로 김순웅장군님의 후손도 아닙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김주경이가 태자파를 만들어서 지금은 태자파 족보에 있는데 삼국사기에 자손없이 죽었다는 마의태자 후손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게 말이 되나요? 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인정하지 않는 내용으로 국가는 철없는 자들의 족보조작을 그대로 인용해서는 안되기에 이렇게 알려드리게 되었습니다.
저희 집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김순웅 장군님께서는 대장군도 아니시고 오직 계림군파의 원시조이시기에 김대유 설명에서 빼주실것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진정 역사왜곡입니다.
참고 근거자료
https://cafe.daum.net/kinggyerim/YFAG/24?q=%ED%83%9C%EC%9E%90%ED%8C%8C+%ED%95%B4%EC%B2%B4&re=1
https://blog.naver.com/wprkffid777/222302638358
https://cafe.daum.net/gyeongok5320/k47l/39?q=%ED%83%9C%EC%9E%90%ED%8C%8C+%ED%95%B4%EC%B2%B4&r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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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 숙종실록 > 숙종 9년 계해 > 12월 28일 > 최종정보
숙종 9년 계해(1683) 12월 28일(을축)
09-12-28[02] 김석주가 왕대비의 행장을 찬진하다
김석주(金錫胄)가 왕대비의 행장(行狀)을 찬진(撰進)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삼가 공경히 생각하건대 우리 대행 왕대비(大行王大妃)의 성은 김씨로서, 세적(世籍)은 청풍(淸風)이며, 그 선조는 대개 신라(新羅) 왕자(王者)의 후예이다. 고려(高麗) 때 현달(顯達)한 분은 시중(侍中) 김대유(金大猷)이다. 3세 뒤 김창조(金昌祚)에 이르러 다시 벼슬이 시중에 이르렀으며, 청로 장군(淸虜將軍) 김중원(金仲源)을 낳았고, 이 분은 감찰(監察) 김정(金瀞)을 낳았다. 비로소 아조(我朝)에 들어와 또 2세를 거친 뒤 김질(金耋)에 이르러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가 되었고, 집의가 성균 생원(成均生員) 김숙필(金叔弼)을 낳았으며, 생원이 김식(金湜)을 낳으니, 중종조(中宗朝)의 현량과(賢良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벼슬은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이르렀으며, 세상에서 기묘 명현(己卯名賢)이라 칭하는데, 곧 후(后)의 6대조[六世祖]이다. 고조(高祖) 김비(金棐)는 판관(判官)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고, 증조 김흥우(金興宇)는 생원으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조(祖) 김육(金堉)은 우리 인조(仁祖)ㆍ효종(孝宗) 두 조정을 섬겨 세 번 정승에 올랐는데, 졸시(卒諡)는 문정(文貞)이다. 고(考) 김우명(金佑明)은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에 봉해졌고, 졸시(卒諡)는 충익(忠翼)인데, 증(贈) 찬성(贊成) 김흥록(金興祿)과 증(贈) 영의정(領議政) 김지(金址)는 또 충익의 후사가 된 조예(祖禰) 관계가 되는 양세(兩世)이다. 충익의 배우(配偶)는 은진 송씨(恩津宋氏)로, 덕은 부부인(德恩府夫人)에 봉해졌으며, 증(贈) 좌찬성(左贊成) 송국택(宋國澤)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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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 순조실록 > 순조 21년 신사 > 8월 7일 > 최종정보
순조 21년 신사(1821) 8월 7일(갑신)
21-08-07[03] 효의 왕후의 행장
행장(行狀)에 이르기를,
“대행 왕후의 성은 김씨인데, 그 선조는 신라왕(新羅王)의 후예이다. 고려 때 시중(侍中)을 지낸 김대유(金大猷)에 이르러 비로소 드러났고 본관은 청풍(淸風)이었는데, 그 후 혁혁한 관직이 끊기지 않았다.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서 김식(金湜)이란 분이 중종조(中宗朝) 때에 현량과(賢良科)에 장원하고 대사성을 지냈는데, 찬성에 증직되었고 문의(文毅)의 시호를 받았다. 세상에서 기묘 명현(己卯名賢)이라고 일컬었다. 그의 현손 김육(金堉)은 인조ㆍ효종 양조의 명신으로서 영의정을 지내고 문정(文貞)의 시호를 받았으며, 그의 둘째 아들 김우명(金佑明)은 영돈녕부사를 지내고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에다 충익(忠翼)의 시호를 받았다. 이 분이 종숙부 김지(金址)의 뒤를 계승하였으니, 곧 우리 명성 왕후(明聖王后)의 아버지이다. 충익공은 아들 세 분을 두었는데, 장남 김만주(金萬胄)는 승지에 증직되고, 차남 김석익(金錫翼)은 좌윤을 지냈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으며, 3남 김석연(金錫衍)은 판서를 지냈고 좌찬성에 증직되었으며 정희(貞僖)의 시호를 받았다. 이 분들은 모두 효의 왕후(孝懿王后)의 고조이다. 증조 증 좌찬성 김도영(金道泳)은 정희공(貞僖公)의 둘째 아들로서 이조 판서에 증직된 김석익의 뒤를 이었다. 할아버지 김성응(金聖應)은 병조 판서를 지내고 효정(孝靖)의 시호를 받았으며, 아버지 김시묵(金時默)은 좌참찬을 지냈고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청원 부원군(淸原府院君)에 봉해지고 정익(靖翼)의 시호를 받았다. 이 분은 효정공(孝靖公)의 장남으로서 충익공(忠翼公)의 봉사손(奉祀孫)이 되었는데, 찬성에 증직된 김도제(金道濟)와 영의정에 증직된 김성집(金聖集)은 또 정익공(靖翼公)이 출계한 양가(養家)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양세(兩世)이다. 정익공의 첫째 부인은 의춘 부부인(宜春府夫人)에 증직된 의령 남씨(宜寧南氏)로서 감역(監役)을 지낸 남직관(南直寬)의 따님이며, 둘째 부인은 당성 부부인(唐城府夫人)인 남양 홍씨(南陽洪氏)로서 찬성에 증직된 홍상언(洪尙彦)의 따님이다. 이상은 효의 왕후의 세계(世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