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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6일
서울 번화가 명동은 어둠이 내리자 밝게 눈을 떠 초저녁의 활 기 띤 시
간을 맞는다. 상점과 술집에서 넘쳐나온 전등 불빛 아래 좁장한 거리를 메
워 떠들썩하게 지나다니는 얾은이들은 그 차림 이 남방 셔츠이거나 소매
짧은 원피스여서 초여름밤에 어울리는 복장이다. 색색의 꼬마전구를 출입
문 앞에 장식한 카바레 바 와, 다방과 라디오 점포에는 빠른 곡조와 느린
곡조의 유행 음악 이 섞갈려 거리에 넘친다 동서로 빠지는 명동 중심 거리
과자점 태극당은 환한 유리 진 열대에 여러 종류의 고급 빵이 건을 보이고
흰 제복 입은 종업원 이 양과자 와플을 구워낸다. 홀에는 잼과 크림을 사
이에 넣고 둘 로 접은 와플을 맛있게 먹는 손님들로 붐빈다. 그 과자점 건
너 양품점 옆에 그릴 금강산이 있다. 명동에서 몇 되지 않는 양식점 중에
가장 잘 꾸며진 그릴이다. 그릴 안 좌석은 손님들로 알맞게 찼다. 구석 자
리에 노란 꽃이 촘촘히 무의진 와사한 감색 원피스 차림의 한정화와 군복
정장을 입은 에드워드 대위가 마주앉아 저녁 식사를 한다, 갓을 씌운 반투
명한 베이지빛 전등불 아래 실 내에는 감미로운 바이을린 선율이 흐른다.
한정화로선 해방 전 이 되겠지만 이화여전에 다닐 때 자주 듣던 귀에 익은
곡인데 그 쪽 음악과는 한동안 담을 쌓고 생활한 탓인지 곡목이 걸른 짚이
지 않는다. -아메리카합중국이야말로 자유로 충만한 개방된 사회입니 다 정
치 경제 ,학문 예술, 모든 방면에 무한대의 개인적인 자유가 보장되지요.
모든 의사와 행위를 자기 결정에 맡길 뿐. 부모는 물론 어느 누구도 간섭
할 수 없습니다. 나의 말은 남녀 연애나 결혼만을 강조한 표현이 아니니
미스 한의 오해가 없기 카랍니다. 한정화는 이마를 조금 숙인 채 접시의
고깃덩이를 칼로 도막 내며 에드워드의 줄기찬 입심을 듣는다. 그가 남녀
관계와 결부 된 성-딴)의 문제를 기름진 목소리로 은근히 비추는 이유 속
에 도사린 딴 뜻을 짐작하다보니 그가 강조하는 '프리덤' 이나 '오 픈 소사
이어티' 가 그럴싸한 구실로밖에 들리지가 않는다 전통 없는 제뚝주의적
권위와 물질적 풍요로움이 창출해낸 부도덕한 자본주의 사회가 바로 미국
이라고 한마디 면박주고 싶으나 그녀 는 그 말을 논리 정연하게 피력할 만
큼 회화 실력이 없고, 그런 말로써 자신이 '위태로운 좌파주의자' 로 의심
받고 싶지 않기도 하다. -미국이 세계 자본주의 국가를 이끌어가는 지도력
은 나도 알고 있습니다 패방적인 사회, 아니 캡틴 에드워드의 표현대로, 개
인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인 줄도. 그런데 그 개인적인 자유가 무엇을 뜻합
니까? 한정화가 무릎에 놓인 냅킨으로 입술을 훔치곤 서툰 영어 실 력으로
묻는다. 포도주잔을 들던 에드워드의 웃음 띤 얼굴에 순 간적으로 당혹감
이 스친다. 지나치게 섹스를 혐오한다는 것이 바로 신체꺽 자유의 억압이
라는 말 끝에, 미국의 개방된 사회 풍 속으로 옳아간 대화가 결과적으로
엉뚱하게 상대방의 그런 질문을 유발한 셈이다. 사람이 무엇이냐란 따위의
너무 본질적인 물 음에 맞닥뜨릴 때처럼, 에드워드가 굳은 표정이 된 채
잠시 뜸을 들인다. -개인적인 자유란 단독으로 결정하여 무엇이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자유비요, 아니, 정정하겠습니다. 내 표현이 단순했습니 다.
좀더 체계적으로 말하자면 개인의 존엄성을 존중해주는 사 회를 말합니다
개인이 다른 개인의 동일한 자유를 침해하지 않 는 한 각자가 원하는 대로
자기 능력과 기회를 최대한 이용할 수 있는 자유가 바로 자본주의 본질이
고, 이를 모범적으로 실현하 는 사회가 아메리카합중국입니다 시장 경제를
말씀드리자면, 정부가 경쟁적인 시장 경제를 보호 육성하는 후원자지 정치
권 력의 간섭은 철저히 배제하지요. 공산주의, 즉 소련의 국가 통제 경제와
다른 점이 바로 미국은 자유로운 개인 기업을 통해서 교 환 경제가 이루어
진다는 점입니다 한정화는 에드워드의 말을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고, 어
떤 부 운은 그 뜻이 모호하게 전달된다. 그가 말한 요점만은 그런대로 머
릿속에 정리되는 셈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때, 미국 정부 가 평화 산
업체 개인 기업을 군수품 생산 전쟁 기업으로 전환시 킨 것도 정부 권력의
개입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를 한정화 는 묻고 싶다. 그러나 그런 질
문쯤 에드워드는 충분한 발뺌 구실 이 있을 것이카. 국가가 전쟁 와중에
휘말릴 때 생필품 중심의 시장 경제는 그 유통이 급격하게 축소되므로 개
인 기업은 새로 운 시장을 찾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윤 추구가 바로 군수
품 생산 체제의 전환을 뜻하므로, 정부 권력의 개입이라고는 말할 수 없
다 그렇다면 정부가 그 군수품을 독점 매입함으로써 정치와 경 제의 유착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가. 그 결과 정부와 개인 기업과의 관계란. 정부가 소
수 독점 자본가를 육성함으로써 자본가와 노동자, 그 빈익빈 부익부의 계
급 갈등은 심화될 수밖에 없을 것 이다. 한정화는 그렇게 따져보고 싶기도
하다. 그녀는 조금 전처 럼 두 가지 이유로 입을 뗄 수 없다. 에드워드는
이미 고기 , 야채 , 빵을 말끔히 먹어치워 식사를 끝냈드나 한정화는 반쯤
도 먹지 못한 음식이 접시마다 남았다. 이르쿠츠크 유학 시절에도 기름기
많은 들척지근한 그쪽 음식이 그녀의 구미에 맞지 않아 식사 때마다 곤욕
을 치렀고, 조선인 정 착촌에 방문하면 겨우 옛 입맛을 되찾곤 했다. "커피
와 티가 있습니다. 어느 쪽을 드시겠습니까? 흰 와이셔츠에 나비넥타이 맨
웨이터가 에드쿼드 쪽 빈 접시 를 거두며 한정화에게 묻는다. 한정화가 에
드워드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묻자, 그는 커피가 좋다고 말한다 -저는 홍차
를 주세요. 제 접시도 치워주시구. -딱딱한 화제는 그만두기로 합시다. 그럼
미스 한의 취업을 축하하며 , 브라보! 에드워드가 빙긋 웃으며 포도주잔을
든다 한정화도 잔을 든 다. 전등 불빛 아래 금발로 난짝이는 에드워드의
짧은 머리카락 과 깊게 들어앉은 벽안의 눈동자를 보며 그녀는 그가 게르
만계 혈통이라 생각한다. 에드워드는 포도주잔을 비워내고, 그녀는 한 모금
만 마신다. 나는 올해 팔월, 삼 년 동안 복무를 마치고 군복을 벗습니 다
본국으로 돌아가면 예일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할 작정입니 다. 동양 역사
학 전공자로더 한국 체험 일 년은 소중한 경험이었 고 앞으로도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겁니다. -한국에 대한 선입관이 체험을 통해 수정되었다는 말씀
을 듣고 기뱄습니다. 보다시피 한국은 문화적 전통이 오래인 국가 입니다.
한국의 문화가 서구의 가치관과 차이는 있습니다만 최 근세로 접어들어 일
본 지배를 받은 삼십육 년의 불행한 시기를 베외한다면. 한정화의 말에 에
드워드가 머리를 끄덕인다. 그는 일본 도쿄 의 극동 사령부(sACP)에 근무
하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야만적 인 민족이 아직도 원시적 생활을 하는
대륙 끝 조그만 땅으로 왜 근무지를 바꾸려 하느냐' 란 주위의 우려를 뿌
리치고 작년 G월 한국으로 나왔던 것이다. 때마침 삼팔선 이남을 점령하
고 있던 미군의 철우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전쟁의 위험성이 상존하고 있
는 야만국' 으로부터 동료들이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날 때, 그 는 동양 대
륙 문화를 직접 접해보고 싶은 학구적 욕망으로 인천 항에 첫발을 내디뎠
다. 일 년 근무 동안 그는 고고학에 관심을 기울여 몇 차례 경주를 돌아보
고 오래된 사찰을 찾았다. 그런 체 험을 통해 그는 일본과쓴 또 다른 전통
적 동양 문화의 한 자락과 조우했다. 그 결과, 한국에 대해서 가졌던 자신
의 무지와 주위의 편견을 수정할 수 있었다. 지난 토요일 오후에는 한정화
와 김은 미, 김은미의 애인 제임스와 함께 경복궁을 산책했는데, 에드워 드
는 한국에 대한 자신의 수정된 소감을 그녀에게 피력하기도 했다 미스 한
도 아버님이 목사고 래학에서 사 년 동안 영문학을 전공했다면 미국이나
영국으로 직접 건너가 공부를 계속하지 않 고 왜 직장을 희망하는지 모르
겠습니다 미국 쪽이라면 유학을 내가 주선해볼 수도 있습니다만. -캡틴 에
드워드도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독립과 함제 삼팔선으로 경계가 생기고 말
았습니다. 나의 고향은 삼팔선 북쪽에 있 고, 가촉은 지금 고향 땅으로 돌
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 가족은 집과 재산을 북에다 두고 내려왔어요. 그러
므로 나는 장녀로서 당분간 집안의 경제를 도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이 삼십팔 도 라인으로 분할된 것은 불행한 현실입니 다_ 삼천만 명의 국
민에게 고통을 안겨준 삼팔선 분할도 따지고 보면 몇 사람의 결정으로 이
루어졌지쑈. 국무성 육군성 , 해군 성의 파견원으로 구성된 조정위원회가
있습니다 그 회의에서 전후 처리 문제가 논의되었을 때, 미국과 소련이 코
리아 신탁 통 치를 맡을 경우 어느 지점의 분할이 합리적인가란 문제가 대
두 되자, 육군성 본스틸 대령과 러스크 소령이 벽에 걸린 코리아 지 도에
서 삼십구 도, 삼십칠 도, 그 상하를 지적하다 삼킵팔 도 라 인으로 결정을
보았습니다. 들은 바로는 삼십 분 만에 결론이 나버린 셈이지요. 추후 소련
의 동의를 얻겠다 했고, 그 결과 오 늘의 군사적 분계 라인이 생긴 거지요.
-불과 삼십 분 만에 한 민족의 운명이 결정되다니! 한정화는 에드워드의
말뜻을 대충 파악하곤, 놀란 표현으로 입을 방긋 벌린다. 일본 제국주의 식
민지를 겪은 도리아로선 불행한 운명이라 생각합니다. -미국과 소련은 차라
리 전쟁 상대국 일본을 분할했어야지 요. 독일 경우처럼 . 왜 한국을 선택
했습니까? 코리아의 자립 능력을 의심한 게지요. -캡틴 에드워드, 당신이 직
접 한국에 와봤으니 대답할 수 있겠지요. 한국은 자립 능력이 불가능한 미
개국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코리아의 잠재 능력과 문화적 수준을 나는
인정합니다 -미 소 강대국은 한국민의 열망을 배반했다고 봅니다. 우 리 가
족만 아니라 전국민에게 심각한 고통을 주었습니다 한국 은 동양적 전통을
잘 보존한 예의 있는 민족입니다. 내가 조금 전에 말했지만. 미국인의 사고
방법으로는 한국의 가족 개념을 이해하기가 힘들겠죠. 동양적인 전통은 개
인주의를 허락하지 않 습니다. 뭐랄까요. 가족이란 공동체 그 자체가 한 묶
음으로 서양 식의"'개인이라 말할 수 있을 겁니다. 한정화는 힘들게, 여러
단어를 주워섬겨 그런 뜻을 말한다 -미스 한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군요. 가
족을 위해 자신의 장래를 포기하여 희생하다니, 결혼 또한 당사자가 아닌
부모가 결정해준다는 말도 이해하디 힘듭니다 나는 미스 한의 지성미 를
존중하지만 그 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런 제도는 고쳐야 할 비문명적
인 관습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나는 미스 한의 부모를 만나지 않고 당장
구혼하려는 것은 아니니깐요. 우리는 좀 더 이해가 필요합니다. 앞으로 두
달 정도밖에 여유가 없지만,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 한 사무실에서 근부하
지는 않으나 퇴근 후 시간은 함께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에드워드가 호
방하게 말을 맺을 때. 웨이터가 차를 날라온다. 한정화는 낯 뜨거운 말을
듣고 난 참이라 찻잔만 내려다본다 웨 이터가 흥차 봉지가 담긴 잔에 뜨거
운 물을 붓는다 이렇다 할 반응이 없어서인지 에드워드는 머쓱해지고, 차
를 마실 동안 둘 은 말을 하지 않는따. -미스 한, 아직까지 밤시간이 넉넉한
데 지난번 그 카바레에 들렀다 갈까요? 에드워드가 손목시계를 보며 조심
스럽게 말을 꺼낸다. 여덟시가 조금 지났다. -고맙습니다만 거절하겠습니다.
난 집으로 곧 가야겠어요. 친구가 찾아오기로 약속했고, 취직이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부 모님께 빨리 알리고 싶어요. 모두 저를 기다립띠다. 한정화
가 예의를 갖추어 정말 미안하다는 투로 말하며 웨이터 가 놓고 간 계산서
와 손가방을 들고 바쁘게 일어선다. 에드워드 가 그녀에게 미 군사 고문단
문서 처리과 타이피스트로 7월 1일 부터 일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가져왔
던 것이다. 에드워드는 그 결정을 알려주려 오늘 자리를 마련한 셈이다. -내
일은 토요일입니다. 오우 두시쯤 시간을 내어주시겠습니 까? -제가 내일 아
침 사무실로 전화를 드리지요 무엇인가 뜻대로 되지 않는 조갈증으로 초조
해하는 에드워드 를 앞서서 한정화는 출입구 계산대 앞에 선다 그녀가 손
가방을 열고 식사대를 지불하려 지갑을 꺼내자. 에드워드가 그녀의 손 을
잡는다 서로 계산하겠다며 잠시 실랑이를 벌인다 늘 채접받 기만 하다 처
음 지불을 해보게 되었다며 취업을 주선해준 보답 이라는 한정화의 강경한
말이 더 설득력이 있어 그녀가 셈을 치 른다. -신사는 숙녀에게 어떤 부담
도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번은 본의 아니게 양보를 했으니 내일은
나에게 보답할 기회 를 주어야 합니다. 에드워드의 말에 한정화는 미소만
띤다 밖으로 마오자, 에드 워드는 한정화에게 집까지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한다 그녀는 사양한다. 한정화와 함께 보낼 시간 계획이 틀어져버린 에
드워 드는 불쾌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내일 연락이 있기를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그릴 앞에서 헤어진다. 에드워드는 지프 를 주차해둔 을
지로 쪽 꺾음길로, 한정화는 명동 입구로 걷근다. 그녀는 큰길을 피해 중국
대사관 골목길을 빠져 중앙우체국 앞뜨 로 나온다. 건너편 육중한 한국은
행 건물 앞은 무궁화꽃 그림을 그려넣은 큰 아치가 세워져 있다. 며칠 전
12일에 있는 한국은행 개업식을 알리는 경축 안내판이다. 한정화는 신신백
화점 쪽으로 길을 건너며, 에드워드 대위를 두고 생각을 정리한다 자신의
어느 쑤석에 매력을 느껴 그가 그 토록 적극적인 호의를 베풀어올까에 대
해서 납득할 수 없다. 여 자 나이 스물여덟이라면 꽃다운 시절을 넘겼다.
동창들은 자녀 를 두셋씩 두었고, 법적으론 처녀라지만 자신은 숫처녀가
아니고 몸도 흠집투성이다. 41년 장현과 함께 두만강 넘어 소련 땅 하바로
프스크로 들어간 뒤 조국 광복을 맞아 귀환따기까지 네 해 동안, 그녀는
항일 빨치산 여성 전사로 풍찬노숙했고, 주림과 동상으로 사경을 헤매기도
여러 차례였다. 목욕탕에 서 벗은 몸을 보면 곳곳에 생채기가 남았고 동상
자국으로 퍼렇 게 멍든 곳도 수월찮다. 머릿속은 외골 이념의 실천만이 피
뢰침 처럼 날을 세우는데 벽안의 한 적군이 의미 띤 관심을 기 출여온다는
게 희극 같기도 하다. 김은미 말처럼 에드워드가 성 욕으로 뭉쳐진 점령군
이 아닌, 교양 있는 신사인 점은 그녀도 수 긍할 수 있다. 그 자신의 말이
긴 하지만 그는 미혼이고, 헌칠한 키에 집안도 괜찮아 보인다. 타국에서의
외로움 탓으로 자신을 보자마자 선택했다는 점은 말이 되잖는 소리다 오늘
까지 겨우 네 차례 만났뜬데, 구혼 따위를 감히 입에 담을 수 있다는 서구
식 사고 방식 역시 납득할 수 없다 사랑은 첫눈에 반한다는 말 이 있지만
아무리 미국식 사고 방법이라도 그녀는 그 점까지 이해할 수는 없다, 장충
단골과 이태원에는 그들의 성적 욕망을 해 결해줄 양공주들이 흔하다. 몇
푼 달러로 그런 여자를 하룻밤 살 수 있고, 장교는 영외 거주가 허락되므
로 계약 조건만 맞으면 부 대 밖에서 살림을 차릴 수 있다. 자신이 딴 목
적을 두고 미 군사 고문단에 취직하려 하듯. 두 달 뒤면 귀국한다는 그 역
시 감춘 목적이 있른지에 대해선 알 수 없다. 그가 번주그레하게 말한 '미
스 한의 지성미를 존중한다' 는 뜻에서 고국으로 돌아가기 전 두 달 동안
이라도 지적 고갈을 채우려든다면 듣기엔 그럴싸할 뿐 그 말엔 신빙성이
없다. 그런 목마름은 독서를 통해, 또는 부 대 안에서도 그만한 교양을 갖
춘 동료는 많을 터이다. 한정화는 그 문제에 더 신경을 쓰지 않기로 한다.
지령대로 신 중한 대처가 필요하다. 하구많은 조선 여자 중에 모처럼 만난
호 감이 가는 걸 프렌드, 두 달 동안 심심풀이로 접근해보겠다는 의 중이
겠거니 하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문서 처리반 근무를 통해 미국이 남조선
에 베풀고 있는 원조의 규모와 종류, 워싱턴 펜타 곤의 지령, 미 극동 총사
령부 정보 참모부의 한반토 정세 보고, 미 군사 고문단의 역할 따위의 기
밀을 빼어내며 소기의 목적 달 성에 투신하는 명령만 수행하면 될 터이다
그러나 그것도 당분 간은 보류다. 다음 지령에 의해 7월 1일부 근무냐 포
기냐가 결정 될 것이다. 아직은 보름 동안의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 한정화
는 점포를 걷어버린 어두컴컴한 남대문시장 안으로 걷 는다. 서울띠당 부
녀부책 공현숙이 책임 맡는 군복 수리 봉제실 로 가는 길이다. 그곳은 영
진공업사 지하실, 안영달과 이중업이 아지트로 이용하는 마포 함정국 집과
함께 남로당 서울시당의 주요 연락 거점이요 아지트이다. 지난 5월 30일
로 '북로당남반 부정치위원회' 최고 책임자 성시백이 피체됨으로써 북로당
지하 조직과 선이 끊겨버린 그녀는 서울시당과 선을 대고 있다. 남로 당
서울시당과 지도부의 활동 사항도 그녀로서는 주요 관찰 대 상이다. 내정
국과의 연락은 새로이 선을 만들 때까지 안영달이 가져온 무전기와 난수표
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요 정보 보고는 보류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
다 퇴계로 쪽 후미진 골목 안 적산 가옥 판자 대문 앞에서 한정쏴 는 담벽
에 몸을 붙인다. 손을 넘겨 잡히는 줄을 세 번 잡아당긴 다. 호젓한 골목
좌우를 한동안 살피고 있자, 안에서 신발 끄는 소리가 난다 "누구세요? 앳
된 여자 목소리다. "부탁했던 김밥 가져왔어요." 암호를 대자 문이 열린다.
한정화는 단발머리 소녀에게 목례 를 하곤 현관으로 들어선다. 군복 더미
가 계단 한켠에 쌓인 이층 계단을 조른다. 계단 끝의 막아선 문 앞에서 두
번씩, 사이를 두 어 세 번을 두드리자 한참 뒤 공현숙이 문을 열어준다. 밀
실에는 박태길 곽종결 , 성주걸 민영만이 나지막한 목소 리로 토론을 벌이
다 한정화를 보자 말을 끊는다 가리개로 창문 을 덮고 검은 천으로 전등을
필게 씌운 어두운 밀실 분위기에 어 울리지 않는 산뜻한 차림의 한정화글
그들은 탐탁잖은 눈길로 훌어본다 "앉으시오." 구저분한 카키복 반소매를
입은 민영만이 한정화 에게 말하자. 공현숙이 재봉틀 의자를 권한다. "황비
서께서 무슨 연락 없었습니까? 한정화가 공현숙에게 묻 는다. 황비서는 서
울시당의 새로운 책임 비서로 남파된 안영달 의 다른 이름이다. "중요한 안
건이 있다는 말씀만 전해받았틉니다." 입구 쪽 뭉쳐 싸둔 옷꾸러미에 앉으
며 공현숙이 대답한다. "어디서든 다들 듣는 말이고 하는 소리 아냐. 결정
적 시기를 대 비하여 조직적 억량을 재정비하라 " 박태길이 시투렁히 말한
다. "덜레스가 모레 내방한다니 그때 환영식장에서 무슨 발표가 있 지 않을
까 싶은데요." 곽종결이 멈췄던 이야기를 꺼낸다 지난 10일, 여현녁에서
북측의 '평화 통일 호소문' 전달이 실 패로 끝난 밤, 평양 방송을 통해 '조
국전선' 사무국장 이름으로 구속중인 김삼룡 이주하와 북에 연금중인 조만
식을 교환하자 는 제의가 있었다. 그러나 닷새가 지난 지금까지 남조선 당
국은 그 제의에 답변이 없다. 북측의 제의 사실조차 남조선 신문에는 일체
보도가 되지 않았던 만큼, 당푹은 무엇인가 모종의 대안을 준비하고 있음
이 틀림없다는 데 그들은 의견을 모은 참이다. "국방장관의 돌연한 방문에
는 미제 음모가 숨겨져 있음이 틀림 없습니다. 어쩌면 펜타곤에서 이미 결
정을 본 전쟁 도발 카드를 들고 왔는지 모르죠. 먼저 국지전으로 북침을
개시하라, 그러면 북선측이 반격해을 것이다, 그때 이제 극동 사영부가 즉
각 지원 에 나선다 이런 각본을 지참하고 말입니다." 곽종결이 말한 뒤 한
정화를 본다 "한동지 의견은 어떻습니까? "이런 의견을 어떻게 받아들이실
는지 모르지만. 덜레스의 방문 은 남조선이 자체적으로 방위 능력이 있느
냐는 문제보다 현정권 의 천정부지의 인플레이션을 통제할 수 있는 예산
편성. 조세 제 도 개혁, 행정부 관리의 부정 추방, 정치범 석방 등, 남반부
민심 안정에 이승만이 적극적으로 나서라는 설득 작전에 더 목적이 있다고
보는데요. 경제 원조 삭감을 위협하면서 말입니다." "정치범 석방이라? 한동
지는 어떤 측면에서 미제의 남반부 내 정 간섭을 그 정도 선에서 보우? 박
태길이 묻는다.
"미제 민주당 정권이 점령국에 상투적으로 사용카는 민심 안정 위주의
온건 정책이지요. 그래서 트루만 민주당이 공화당의 거 센 공격을 받고 있
는 현실이긴 하지만,,,,,," "아니, 저는 덜레스의 방문을 그런 온건론으로 해
석하고 싶지 않습니다." 공현숙이 한정화의 말에 쌍지팡이를 짚고 나선다. "
덜레스가 극동 평화를 수행하러 일본과 남선을 방문한다는 워 싱턴에서의
출발 성명이, 비승만에겐 절호의 기회를 제공한 셈 이 될 겁니다. 이승만은
덜레스 내방을 기화로, 동경 미제 극동 사령부가 지원에 나선다면 즉각 북
진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는 충동질 말입니다. 오 , 삼십 선거에
서 대패한 이승만은 고양이 앞에 몰린 쥐꼴이므로 그런 모험으로 만회 작
전을 시도 해볼 만하니깐요. 군사 무기를 대량으로 원조해달라는 조건을
부쳐서 ." "그건 그렇지가 않아요." 박태길이 담배를 꺼내물며 점잖게 머 리
를 젓는다. "미제의 군사적 지원 없이 남조선이 당장 단독으로 전쟁을 수행
할 능력은 없습니다. 이승만이 북진 통일을 외치지 만 그건 허장성세요, 미
친개 짖는 꼴이 아니고 뭡니까. 이승만은 우선 덜레스를 통해 군사 원조를
요청할 게보, 미제의 극동 방위 계획에서 제외된 '애치슨 라인' 수정안을
들고 나을 게 분명합 니다 맥아더가 이승만 대부 노릇을 하고 있으니 도쿄
에서 덜레스와 맥아더 회담에서도 맥은 남조선에 군사 원조가 필요하 다고
역설했을 겝니다 호전주의자인 맥아더로선 그 다음 목표 가 이승만을 통한
전쟁 도발 충동질이 되겠지요." "그 말쁨이 바른 판단일 겝니다. 멀잖아 극
동 지방에 반드시 전 쟁이 터지는데, 그것이 중화인민공화국의 대만 정권
공략이냐, 아니면 조선 쪽이냐, 두 가지 중에 하나겠지요. 대만으로 쫓겨와
정권 유지가 좌불안석인 장개석 입장으로선 조선 반도에서 전쟁 이 발발한
다면 숨돌릴 여유를 얻게 될 테니 대환영할 겝니다 장 개석은 외됴술이 능
한 여우라 펜타곤과 맥아더에게 끊임없이 그 런 음모를 충동질하고 있지
않겠어요? 수염 꺼칠한 성주걸이 말한다. 그 이야기는 줄기차게 이어진다
성시백이 피체됨으로써 남반 부에 밀파된 북로당계가 풍비박산이 난 경위
에 대해서도 여러 사람이 입방아를 찧는다 한정화는 그런 대화를 듣기만
하며, 안 영달이나 이궁업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니면 인편을 통해 연락 이
올는지 모른다. 그녀는 틈틈이 시계를 보는데 시간이 영 흐르 지 않는다
아홉시가 넘었을 때야 계단 쪽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공현숙과 함
께 들어온 사람은 가방을 든 와이셔츠 차림의 함정 ~ol다. '혼자 온 거요?
박태길이 함정국에게 묻는다. "네. 황비서는 급한 일로 인천에 갔습니다."
함정국이 여러 사 람을 둘러보다 한정화와 눈길이 마주친다. "한동지, 잠시
저 좀 보실까요." 함정국은 한정화를 출입구 계 단 앞으로 불러낸다. 그가
주위를 경계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한 다. "황비서 전달인데, 내일 오후 두
시 인천여자중학교 정문 앞 에 있는 '훈민정음' 이란 서점 주인을 찾으시랍
니다 "희망」 창간 호를 구할 수 있먀고 물으면 된답니다." 한정화는 그 말
이 전달하는 직감적인 느낌에 바싹 긴장한다. 북조선으로 귀환하라는 지령
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문득 조민세 가 떠오른다. "다른 말씀은? "비밀리에
전하라는 말 이외 , 없습니다 " 한정화는 밀실 사람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
고 이층을 빠져내려 온다. 전화를 한 통 썼으면 싶은데 여기 일층 전화는
초청 우려 로 쓸 수 없다. 우선 빨리 신변부터 정리하고 여장을 꾸려야 한
다. 한정화는 동대문 숙소로 가는 길목에 있는 초동인쇄소에 들른 다. 책임
자 김복명이 그때까지 퇴근하지 않고 혼자 신문을 보고 있다. "조부장 연락
없었습니까? "전화는 한차례 있었습니다. 황비서를 만날 모양이던데요." 김
복명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지난번 「소력인민」에 조주필이 직 접 쓰신
글, 그게 문제가 된 모양이지요? "누가 그럽디까? "노동부 민 전화를 받았어
요. 그 동무가 조주필에 대해 조금 비 판적이었거든요." "조부장 연락 오면.
내일 인천에 간다고 전해주십시오." 한정화는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이동
을 왜 그에게 남기려 초 조해하는지 그 심리적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녀의 떠릿 속에 늘 떠오르는 조민세의 모습은 지난 봄, 봄비 시름 없이
내 리던 날 서울 명동 수정다방에서 김용팔과 함께 본 그의 첫인상 이다.
작달막하고 여윈 중년 사내가 다리를 절며 다방으로 들어 섰다 작업복 차
림에 수염조차 깎지 않은 초췌한 얼굴이라 조금 은 가련한 모습이었는데,
깡말라 우뚝 선 콧날과 함께 깎아 빛은 듯한 얼툴에 눈이 유난히 빛났다
맞은쪽 자리에 앉자 그는 힐끔 자기를 보았다. 그때의 그 강렬한 눈빛에
감전당한 듯 자신은 순 간적으로 찌르는 아픔을 느꼈다 세상살이 하다보면
뭇사람을 만나게 마련이지만, 이성 사이에는 첫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
장현이 그랬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조민세에게 자신의 귀환을 전하지 않
카도 그만이요, 전할 어떤 이유도 없다. 둘은 각자 다 른 분야에서 비슷한
임무로 암약했고 필요에 따라 만났다 그가 새로운 임무를 받아 서울로 올
라와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옆에서 보기에 늘 안타까웠다. 한편, 자신의 귀
환 지령을 함정국으로부 터 전해받았을 때 조민세가 떠오른 건, 그 역시
그런 지령을 받 았을는지 모른다는 기추가 이유일 수 있다. 북으로 오라는
전갈 은 마찬가지일는지 모르지만 그의 경우는 귀환 지령이 아닌, 해 주지
휘부로부터 소환 명령일 가능성이 크다. 「로력인민」 기사 건을 두고 안
영달와 준엄한 힐책이 있은 점으로 미루어 조민세 의 징계성 소환은 한정
화도 대충 예견하고 있었다. 그럴 경우 그 녀는 자신의 역할을 따져보았다.
그뼈의 견해로서는 조민세의 논문에서 아무런 하자를 찾아낼 수 없었다.
그는 정직하게 남반 부 유격대의 지난한 현실을 사실 그대로, 솔직하게 기
술했을 뿐 이다. "전화 한통 쓰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김복명이 사무
용 책상이 있는 안쪽으로 안 내한다 그는 그 전화 내용을 듣지 않겠다는
건지 바깥 동태를 살피려는 건지 밖으로 라간다. 한정화는 손가방에서 수
첩을 꺼내어 전화번호를 확인하곤 김 은미 집으로 전화를 건다. 은미 남동
생이 전화를 받아, 누님이 방금 들어왔다며 전화를 바꾸어준다 "나야. 한나
라구. 오늘은 데이트 일찍 끝난 모양이지? "응. 방금 헤어졌어. 너 직장 얘
기 들었다, 얘 잘됐어. 에드워드 만났지? 김은미의 애교 띤 코맹맹이 소리
가 수화이를 통해 들려온다. -만나고 온 길이야. 그런데 내일 아침 에드워드
한테 나 대신 전 화 좀 걸어줘 , 오늘밤으로 무슨 차를 이용하든 수원으로
가야 할 일이 생겼어 그래서 내일 약속은 힘들다구. 다른 일이 아니고 같
이 월남한 고모님이 위독하시대. 이삼 일 걸릴지 몰라 엄마와 함께 가거든
" -계집애두, 넌 뭐가 늘 그렇게 바쁘니." 뽀로통히 개뱉던 김은 미가 정색
을 하며 말한다. "전하긴 전하겠다만, 한나 너 취직 말 이야, 우선 그렇게
결정은 났으나 그게 아직 낙관할 처진 못 되 던데? 제임스 말이 부처에선
결제가 났는데 시아이시 파견대 쪽 에 넘긴 신원 조회에서 조금 문제가 있
나봐." "문제라니? -학교 중퇴 후 팔 년 동안 행적 조회가 불가능하다나 증
인을 세우는 보증 문제아 까다롭다나봐." -그렇다면 공산주의가 싫어 이북
에서 피란 내려온 사람은 어디 취직이나 제대로 하겠어 피란 온 고향 사람
을 보증인으로 세우 면 될 게 아냐 하여간 알았어. 또 연락하마. 친척 집이
라 눈치가 보여 전화 더 못 하겠어. 그럼 끊어. 한정화는 전화를 끊는다
한정화가 종로 3가에서 전차를 탄 시간, 예장동 적산 가옥 널 찍한 겅원
잔디밭에는 가든 파티가 한장이다. 신랑측 조진문의 함을 지고 온 친구를
위해 신부 될 집에서 마련한 연회이다 이백 평은 됨직한 잔디밭 주위에 높
다랗게 설치해놓은 가로등아래 정원수며 잔디가 불빛 아래 윤기를 떤다.
밖에 내놓은 축음 기에선 미국 유행 음악이 잔잔하게 흘러나온다 느린 곡
조의 재 즈다. 상보를 씌운 킬다란 식탁에는 음식파 과일과 술이 진설되
어 식성대로 먹고 마실 수 있다. 조선 요리와 서양 요리가 푸짐 하고 술은
양주다 웨이터가 손님들 칵테일 시중을 든다. 함을 지고 온 신랑측 친구는
모두 여섯이다. 일정 시대부터 집 안이 유복한 자들로 사회 초년병이지만
심찬수를 제외하곤 모두 출세길이 트인 젊은이다. 여섯 중에 경떵제대 시
절 정구반 친구 는 장영권과 심찬수뿐이다. 신부 될 처녀 쪽 친구는 다섯
이다. 신부 될 처녀가 숙명여전 졸업반이므로 동급생이다. 남자측은 심찬수
만 후줄그레한 와이셔츠 차림이지 모두 정장 차림이고 여 자측은 파티에
참석하느라 화사한 양장을 차려입었다. 신부측 집안 식구로 젊은이들 네댓
이 끼였다. 상쾌한 초펴름 밤이다. 젊은이들의 재담과 웃음이 밤하늘에 폭
죽처럼 번진다. 심찬수는 등글게 원을 그리고 서서 웃고 지쩔 이는 그들과
조금 떨어져 키만큼 자란 사철나무 옆에 홀로 서 있 다. 그는 손에 들고
있는 칵테일 양주를 찔끔찔끔 마신다. 시골 에서 막걸리만 먹던 체질이라
독한 술이 금방 취기를 불러온다. "서양식이 좋긴 좋군. 함 지꼬 와서 가든
파티에 참석할 줄이 야. 이거 약혼식 두 번 하는 거 아냐? "야, 진문이 너
와 미스 권 은 원래 이런 자리 낄 수 없게 돼 있잖아." "서양식이니 아무렴
어때." "그래두 이 정도로 호락호락 넘어가진 않을걸. 함값은 따 로 두둑히
받아내겠어, 그래야 이차술을 할수 있거든" "어련 하시려구. 내무부 자문위
원장 자리가 어떤 당상인데. 진문이 번 병원 개업도 처갓집에서 도맡아주
겠군. 왕년에 중추원 의원에다 도지사까지 지내신 장인어르신이 외동딸 어
디 몸만 달랑 보내겠어 ," "노총각이 장가 가니깐 들러리로 아다라시 총각
은 찬수밖 에 없군. 나머진 다 자식 둔 애 아비들이라 신부 친구들 보기가
뭣한데 그래." "넌 벌써 마음이 싱숭생숭하나보군. 동생을 소개 시켜주면 죌
것 아냐 마누라한테 안 들키구 연앨 하든가." "사 실 남자분들한테 실망했
어요. 총각이 아니라 값조차 떨어진 판 에 입까지 저렇게 험해서야 어디
파트너가 되겠어요." "파트너, 그것 한번 듣기 좋은 말이군요. 쇠뿔은 단김
에 Ir~ill라구, 심지 뽑 아 파트너부터 정합시다." 까르르 웃음판이 터진다
심찬수는 장영권의 권유에 못 이겨 함꾼으로 이긴 했으나 처 음부터 자기
가 올 자리가 아님을 알고 있다. 마음 같아선 그들의 시시껄렁한 대화에
속까지 메스꺼워 당장 떠나버렸으면 싶은데 한 가지 목적이 마음에 스멀거
려 부화만 끓이는 참이다. "찬수, 이쪽으로 오지 그래. 누가 햄릿 아니라 할
까봐 혼자 고 독을 씹고 있냐 " 장영권이 심찬수 쪽을 돌아보며 말한다. "
괜찮아. 혼자 있고 싶어하는 사람은 그냥 두는 게 예의야. "형, 괜히 부담
갖지 말고 뭐든 먹어요. 칵테일도 더 하구 해방 전 캠퍼스 시절 프라이드
를 살리셔야지 " 조진문은 미국 유학생 출신답게 말끝마다 영어를 쓴다.
심찬수는 잔을 비워 얼음덩이를 버썩 깨물곤 식탁 쪽으로 간 다 웨이터에
게 칵테일 한 잔을 더 만들어달라고 부탁한다. 술이 나 마니는 일 이외 그
가 당장 할 일이란 없다. "분위기도 좋고 블루스도 근사하잖아. 재즈는 자
유의 상징이 야, 한판 추어보자구 못 추는 사람은 빠지지 뭘," 키가 크고
몸 매가 날씬한 김흥묵이 말한다. 광산주(별노고) 아들로 국회 사무 처 무
슨 주임 자리에 있는 친구다. 처음부터 눈여겨보아둔 듯 보 라색 원피스를
입은 처녀에게 그가 손을 내딘다. "파트너란 말 나온 김에 일회용 파트너로
이 핸섬 보이를 선택하심이 어때 요? "나도 그럼 짝 맞춰볼까." 안경 낀 대
학 전임강사가 나서더니 파트너란 말을 처음 꺼낸 얼굴 오종종한 처녀에게
다가간다 춤을 잘 못 춘다느니, 남보기 흥하다느니 하며 여자들 쪽에서 짐
짓 뺀다. 서로 앞으로 밀어내며, 네가 먼저 추어보라고 권하키 만 선뜻 나
서는 처녀가 없다. "우리가 어디 애인 되어달라고 이럽니까. 찬수형 빼곤
다 모범 적 가장으로 젠틀맨입니다 사촌 큰오빠라 푸근하게 여기구 잘 못
추시면 이 기회에 리딩해두십시오. 댄스는 이제 사교의 액세 서리가 아니
고 레이디가 갖춰야 할 교양 과목입니다" 김홍묵이 너스레를 떤다. 그 말
에 전임강사 파트너가 나너자, 여자 쪽은 남자들이 내민 손을 잡고 자연스
럽게 품에 안겨든다 조진문은 약혼녀와 짝이 된다. 몸이 굵은 조진문은 검
정옷 정장 차림이고 약혼녀 권경자 는 분흥색 한복을 입었다. 조진문이 상
대를 능숙하게 잘 이끈 데 다 아랫단이 넓게 퍼진 치마의 우아함이 돋보여
두 사람 춤이 가 장 눈에 띈다. 계단 위 현관과 거실 창문에 신두 될 처녀
가족과 친척들이 그들 눈에는 요사스런 서양춤을 구경한다. 그 중 웃음 을
빼어문 권경자 부모도 섞였다. 심찬수는, 이게 바로 그놈의 댄스 파티라는
거로구나 하고 모 래 씹듯 중얼거리며 춤판을 구경한다 신문에 '도회지는
서양춤 댄스 파티 대유행' '카바레는 선남선녀로 불야성을 이루다' 란 기사
가 자주 실렸고, 광고란베는 날마다 볼 수 있는 게 '댄스 교 습 지도' 안내
였다. 해방된 지 다섯 해 사이, 미국식 유행이 빠 른 속도로 번지고 있음을
그는 한눈에 읽는다. 촌구석에 처박혀 막걸리에 젖어 사는 사이 서울 풍속
도는 그가 보냈던 일정 말기 와 판이하게 달라졌고, 서울 상류 사회의 풍
족함과 사치는 농촌 의 빈곤을 상대적으로 짓밟으며 극한대로 치닫는다. "
씹할 연놈들 잘 처먹고 잘 살아라." 혼잣말이지만 그의 입에 서 자신도 모
르는 사이에 욕설이 튀어나온다 홧홧 달아오르는 가슴과 목구멍이 더욱 술
을 청한다. 속은 부아로 끓고 입에서는 그렇게 윽지거리가 나왔으나 얼음
물에 풀어진 양주가 기분 좋게 머릿속을 흥건하게 적신다. 그는 식탁으로
다가가 다시 칵테일 한 잔쓸 청한다. 전기 곤로 위 번철에는 마늘 양념 내
음 풍기는 불고기가 먹음직스럽다. 그는 불고기를 먹지 않기로 한다. 술잔
을 식탁에 놓고 딸기 쟁반 옆 풋고추를 집는다. 그 옆엔 먹기 좋 게 껍질
을 반쯤 벗겨놓은 바나나도 있다. 그는 고추를 놓고 바나 나를 집는다. 문
득 민다나오 섬이 생각났던 것이다. 바나나는 그 때 이후 처음 본다. 춤를
추던 보라색 원피스가 발을 -끗하더니 무릎을 꿇는다 얼굴은 예랬으나 춤
이 서툴러 스텝을 잘못 밟은 모양이다. 하이 힐이 벗겨져 신을 고쳐 신느
라 허리 숙인 그녀의 동그란 엉덩이 가 무척 육감적이다 심찬수는 성기 닮
은 바나나를 움썩 베어 문 다. 어떤 경로를 거쳐 남한에까지 흘러들어왔는
지 모르지만 바 나나를 먹자 패잔병으로 밀림을 헤매던 시절이 떠오르고,
그런 경험자는 모인 친구들 중에 자기뿐이다. 음악이 두 곡 끝나자 남녀는
손을 푼다. 그들은 식탁 쪽으로 몰려간다 남자들은 술을, 여자들은 주스나
과일을 먹는다 "조귿 있다 너도 한번 춰. 이름이 영미라나. 사근사근한 게
애 가 괜찮던데. 부친이 무역 회사를 한대." 심찬수 쪽으로 다가온 장영이
춤 상대 아가씨를 두고 말한다. "짝을 맞춰서 온 모양인데 불청객인 내가
어딜 끼여. 난 잡을 손도 없고 춤도 못 춰." 심찬수가 퉁명스레 말한다. 그
는 지금이 적당한 기회라고 생각되어 장영권에게 말한다. "나 잠시 좀 볼
까." 심찬수는 장영권을 사철나무 옆으로 이끈다_ 음악이 왈츠로 바뀌자.
조진문이 불고기 접시를 식탁에 놓코 권경자의 손을 이 끌어 잔디밭 가운
데로 들어간다 춤이 다시 시작된다. 이제 처녀 들은 사양하지 않는다. 김홍
묵도 짝과 함께 춤을 춘다. 권경자의 열 폭 치마가 넓은 잔디밭이 좁다 하
고 크게 원을 그린다. "내가 상경한 목적 중에 하난데, 너가 좀 도와줘야겠
어." 심찬 수가 심각한 투로 말문을 연다. "노한규형이라구, 넌 잘 모를 거
야. 진둔이 의학부 선배 되지, 그 형이 지난 삼월 서울의대 남로 당 프락치
사건으로 구금됐거든. 영권이 너가 그 형 부인 면회를 주선해줬으면 해 " '
서울의대 프락치 사건? 내 소관은 아니지만 말은 들었어 . 그런 데 너가
그 사람을 어떻게 아니? "너도 알 테지만 삼학년 때 내가 잠시 그쪽 물 먹
었잖아. 그때 서클에서 만나 같이 어울렸지. 당시는 애빈이었던 부인과 더
러 만났고. 그런데 얼마 전 그 부인 편지가 고향으로 왔더군. 촌에 박혀 있
는 내게 뭐 도움 청할 거야 있겠냐만 물에 빠진 자 지푸 라기라도 붙잡는
다고, 과거 가까웠던 사람들한테 딱한 처지를 호소하는 거 같애. 상경한 김
에 부인을 만났더니 보안 사건이라 초심 판결이 나기까진 직계 가족 면회
도 안 된다잖아. 사엉이 딱 하더 군." '기소한 후에도 새로운 여죄가 드러날
땐 면회 금지 조치를 하 기도 하지." "부인이야 들어앉아 애 키우며 살림
사는 사람인데 면회 한번 한다고 무슨 일이야 있겠어? 어떻게 주선해봐.
너가 직접 입회 한다면 면회는 가능할 것 아냐? "글쎄, 하여간 내 내일 출
근해서 담당 검사를 만나 한번 알아보 마. 노한규랬지? "그래. 전화를 덜까,
아니면 내가 검찰청에 들를까? "먼저 전화 줘 ." 장영권이 춤판 쪽을 돌아
본다. "그럼 난 먼저 갈래, 술도 오르고 쉬어야겠어. 외팔이가 여기 계속 머
무적거리면 좋은 분위기 깰 것 같애, 그냥 슬쩍 빠질 테 니 너가 진문이한
테 양해 구해줘 " "그럼 진문이 결혼식엔 참석하고 내려가겠군? "십구일까
지 내가 서울에 있을는지 모르겠어. 있게 뵈면 축하 해줘 야지 ." 심찬수는
변소에 가는 척 슬그머니 정원을 빠져나온다. 노한 규 부인 면회 건은 성
주걸의 말처럼 미끼에 불과하고 꼭 알아내 어야 할 정보는 따로 있으나 우
선 시작은 그쯤에서 그치기로 한 것이다. 내일 저녁 혜화동 로터리에서 접
선할 정보원에게 그 정 도 진척 과정을 알린 뒤, 장영권을 다시 만나 서대
문형무또와 마 포형무소의 좌익 수감자 숫자를 알아봐야 할 것 같다. "노한
규형 처럼 좌익 일 하다가 갇힌 사람 수가 얼마쯤 되니? 하는 질문쯤 은
지나가는 말처럼 물을 수 있겠거니 여겨진다. 그는 그런 생각 을 엮자 자
신은 이제 빼도박도 못 할 입장에서 남로당 정보원이 되었음을 실감한다.
왜 이 지경으로 몰리게 되었는지 따지기도 싫고, 따신이 더 이상 초라할
수 없게 여겨진다. 내일 새벽 기차 편으로 당장 고향으로 내려가버릴까 하
는 생각도 든다. 남의 일 에 끌려다니는 처지가 자기로 향한 증오심을 불
러일으켜 그는 미쳐버릴 것만 같다 집에 조금 남겨둔 아편을 가져왔다면
이럴 때 여관방에서 몽롱하게 취하고 싶은 심정이다. 심찬수는 동대문을
향해 털에털레 걸어내려간다 종로 4가 동 대문시장 어귀 여인숙에는 이문
달이 무료히 기다리고 있을 터이 다 그 여인숙은 포천에서 서울로 돌아온
길에 이문달과 함께 우 선 하룻밤을 유숙하기 위해 잡아둔 숙소이다. 위치
가 그쯤이면 안골댁이 차렸다는 동문여관과 거리가 가깝고 묵정동 봉주댁
거 처와도 멀지 않다. 그는 여인숙에 도착하는 대로 이문달을 끌어 내어
술이나 퍼지르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5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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