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시인 이백의 유명한 시 중에서 하나.
장진주(將進酒)는 술을 권한다는 뜻이며, 주제는 모든 것이 한순간이니 지금 이 순간 술 마시고 마음껏 즐기자는 것이다.
<장진주(將進酒)>
君不見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군불견]
黃河之水天上來
황하의 강물이 하늘에서 내려와
[황하지수천상래]
奔流倒海不復回
힘차게 바다로 흘러가 다시 오지 못함을?
[분류도해불부회]
君不見
그대는 알지 못하였는가.
[군불견]
高堂明鏡悲白髮
높은 집 거울 앞에서 백발을 슬퍼하니
[고당명경비백발]
朝如靑絲暮成雪
아침에 검푸른 머리 저녁에 눈같이 희어진 것을?
[조여청사모성설]
人生得意須盡歡
인생이 잘 풀릴 때 즐거움 다 누리고
[인생득의수진환]
莫使金樽空對月
금 술잔 헛되이 달과 마주보게 하지 말라.
[막사금준공대월]
天生我材必有用
하늘이 내게 준 재주는 반드시 쓰일 것이며
[천생아재필유용]
千金散盡還復來
돈은 써버리더라도 다시 생겨나리라.
[천금산진환부래]
烹羊宰牛且爲樂
양은 삶고 소 잡아 또 즐기리니
[팽양재우차위락]
會須一飮三百杯
응당 한번 마시려면 삼백 잔은 마셔야지.
[회수일음삼백배]
岑夫子,丹丘生
잠부자, 그리고 단구생이여,
[잠부자, 단구생]
將進酒,君莫停
술을 권하리니, 거절하지 말게나.
[장진주,군막정]
與君歌一曲
그대들 위해 노래 한 곡 불러 주리니
[여군가일곡]
請君爲我傾耳聽
청컨대 내게 귀좀 기울여 들어주게나.
[청군위아경이청]
鐘鼓饌玉不足貴
음악과 귀한 안주 아끼지 말고
[종고찬옥부족귀]
但願長醉不用醒
부디 오래 취해 깨지 말았으면 좋겠네.
[단원장취불용성]
古來聖賢皆寂寞
옛날의 성현들은 다 잊혀지고
[고래성현개적막]
惟有飮者留其名
오직 술꾼만 이름을 남겼다네.
[유유음자류기명]
陳王昔時宴平樂
진왕은 그 옛날 평락궁 잔치 열고서
[진왕석시연평락]
斗酒十千恣歡謔
한 말에 만량이나 하는 술 마음대로 즐겼다네.
[두주십천자환학]
主人何爲言少錢
주인은 어찌 돈이 적다 말하는가?
[주인하위언소전]
徑須沽取對君酌
당장 술을 사오게나 그대와 대작하리라.
[경수고취대군작]
五花馬,千金裘
오색 말과 천금의 모피 옷을
[오화마,천금구]
呼兒將出換美酒
아이 시켜 좋은 술과 바꾸어 오리니[호아장출환미주]
與爾同銷萬古愁
그대들과 더불어 만고 시름 녹이리라.
[여이동소만고수]
★시안 흥경궁 내 이태백 시인이 누워있는 석상
*중국 산시성 시안(西安). 당 현종과 양귀비의 휴양지.
*출생-사망 701 ~ 762
*자 태백(太白)
*호 청련거사(靑蓮居士)
중국 당(唐)
문학
*출생지 중국 촉나라 장밍현(오늘날의 쓰촨성)
♥701~762
자 태백(太白). 호 청련거사(靑蓮居士).
중국 당나라시대의 시인 이백(李白)은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중국 최대의 시인이다. 두보가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한편 이백은 시선(詩仙)이라 불린다. 이 밖에 적선인(謫仙人) 또는 벼슬이름을 따서 이한림(李翰林)이라고도 한다.
701년 중앙아시아에서 한족 출신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이백은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서천(西川)으로 옮겼으나, 25세에 집을 떠나 세상을 홀로 떠다녔다. 젊어서 도교(道敎)에 심취했던 이백은 산중에서 지낸 적이 많았다.
43세경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아 장안(長安)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되었다. 이백의 임무는 포고문 초안을 마렴하거나, 임금의 향연에 불려나가 임금의 치적을 칭송하는 시를 짓는 일이 고작이었다. 어지러운 조정 분위기와 일종의 어용 문학인으로서의 처지에 답답함을 느낀 이백은 결국 장안의 한량들과 술을 마시고 노는데 몰두한다.
결국 그는 744년에 고향으로 돌아가 도교에 정식으로 귀의하기도 했다. 이후 안록산의 난이 시작된 755년까지 산동성의 집을 거점으로 북쪽과 남쪽의 여러 지방을 두루 유람했다.
안록산의 난으로 당 현종이 장안을 버리고 촉으로 피신했고 결국 그의 아들 형이 왕위에 올라 당 숙종이 되었다.
이백도 가족들과 함께 남쪽으로 피난했다. 그는 756년 안록산 잔당을 토벌하여 기세를 떨치던 영왕 린의 권유에 못이겨 그의 막하에 가담하지만, 그 세력의 확장을 경계하던 숙종에 의해 린의 거사가 역모로 간주되었고, 결국 이백 역시 연루되어 옥살이 끝에 귀양을 가다가, 중앙 관직에 남아 있던 술친구, 시친구들의 도움으로 759년에 사면되었다.
그 후 이백은 여기저기를 방랑하였으나 노쇠한 탓으로 친척 이양빙(李陽氷)에게 몸을 의지하다가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이백의 시는 <산중문답(山中問答)> 등 1100여 편의 작품이 현존하는데, 주로 낭만적인 성향의 시들이다. 시풍이 호방하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언어 사용이 명쾌했으며, 그 사상적인 기반은 도교였다.
이백의 시를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협기(俠氣)와 신선(神仙)과 술이다.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술은 생애를 통하여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두보의 시가 퇴고를 극하는 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다.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대하여, 악부(樂府)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장기로 한다.
‘성당(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 ·시대 ·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 ·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 ·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萬古)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그의 시문집은 송대(宋代)에 편집된 것이며, 주석으로는 원대(元代) 소사빈의 《분류보주 이태백시(分類補註李太白詩)》, 청대(淸代) 왕기(王琦)의 《이태백전집(李太白全集)》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