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다녀온 후 잠이 달아난 시간 써내려간 글...... 초벌구이 입니다
나무 같은 사람
요란한 빗줄기 소리에 새벽 선잠을 깨어 설핏 창밖을 살폈다. 한동안 가지 못했던 시골에 손주들과 같이 가기로 약속은 했었는데 이 빗속을 뚫고 꼭 가야 할까 잠깐 생각이 스쳤다. 다행히 비는 곧 잦아들었고 서둘러 출발하였다. 한동안 보지 못했던 먼 발치의 산들은 신록이 더욱 깊어지고 밤새 휘돌아간 바람에 군데군데 꺾어진 가로수 가지들이 굴러다닌다. 문득 며칠 전 집 앞 도로변에서 가로수 가지치기를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시야 확보를 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느티나무 가지들이 요란한 전기톱 소리와 함께 사정없이 잘려 나가는 것을 보았다. 떨어지는 나뭇가지들을 피하며 걸으면서 불현듯 나무는 지금 어떤 마음일까 생각이 들었다. 영국의 글래스고 대학의 맬컴 윌킨스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나무도 목이 마르면 비명을 지르고 몸이 잘릴 때면 피처럼 수액을 흘린다. 단지 그 비명이 우리들 귀에 들리지 않고 수액이 피로 여겨지지 않을 뿐 식물도 분명히 인간과 같은 생명을 지닌다”고 했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하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지만 외력에 의한 강제가 아니라면 나무는 수 천년을 넘어 그렇게 생명을 지키고 살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무의 껍질은 거칠어지고 나무둥치는 굵어져 어느덧 세월의 이끼가 끼면서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외형을 지니지만 여전히 그 속살은 여리고 부드럽다. 생명을 유지하면서 더욱 깊어진 그 나름의 삶을 위해 줄기 가운데 체관과 물관으로 부지런히 수액을 실어 나르고 있다. 세상의 온갖 소리가 잦아들 때 팔 벌려 가만히 나무줄기를 껴안고 귀대고 들으면 그들의 살아내는 소리가 들릴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아름드리 고목으로 살아가면서 온갖 욕심과 욕망으로 오랜 세월 부침을 겪어온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는 것이다.
햇수로는 어느덧 25년째 고향의 강변, 적벽을 마주하고 선 언덕 위의 한 자락 땅에서 나무처럼 살아가고 있는 한 사내가 있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아름드리 고목이 된 수령을 짐작할 수 없는 왕벚나무와 족히 백 년은 넘었을 것 같은 굽이진 소나무들과 해마다 향기로운 열매를 나눠주는 나보다도 나이가 많은 모과나무, 산비둘기와 박새, 곤줄박이가 둥지를 튼 대나무 숲이며 내 품으로도 한아름은 족히 넘는 느티나무들, 계절에 따라 피고 지는 갖가지 꽃들이며 열매 맺는 나무들이 그 사내와 함께 산다. 그는 영락없는 나무요, 풀이요, 꽃이다. 아이들이 크는 동안 온갖 소음들이 잠들지 않는 도시에서 흔들리다가 어느 날 훌쩍 적벽이 마주 보이는 강변으로 떠났다. 어느새 귀밑머리가 희끗해지고 관절마다 통증이 슬그머니 얼굴을 내밀지만 바람이 물어오고 강물이 들려주는 나무의 말을 듣고 나무처럼 뿌리 내려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없는 길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제 칠순을 넘긴 그는 6.25 전쟁의 막바지에서 6남매 맏이로 태어났다. 벼 한 포기 꽂을 땅도 없던 부모님을 따라 고향의 깊은 골짜기에서 자갈밭을 일구고 산으로 들로 다니며 나물 뜯고 약초 캐며 살았다. 어스름 저녁때까지 염소도 키우고 나무 등짐 메고 다녔던 어린 시절부터 그는 나무였다. 산길을 헤메고 들을 뛰어 다니면서 몸과 마음을 키웠다. 소월의 시집을 통째로 외우면서 아마 나무의 마음을 배웠을지도 모른다. 자연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깨우쳤을지도 모른다. 그들과 소통하는 법을 알아 자연스럽게 산과 나무들을 화폭에 담게 되었을 것도 같다. 그리 사는 동안 좋은 스승을 만나 풀이되고 꽃이 되고 나무가 되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그러나 척박한 땅이면 나무도 잘 크기가 어렵듯이 그도 살아오는 매 순간이 그리 평안하지는 않았다. 마음껏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양질의 땅이 그에게는 필요할 때마다 주어지지 않았다. 늘 갈증이 따르고 때로는 등이 휠 것 같은 무게를 감당하면서 제 자리를 찾아 뿌리를 내리고자 자신을 다그쳤다. 때로는 바람을 못 이겨 뿌리까지 흔들리다가 어찌할 수 없는 설움으로 고목처럼 속을 비워냈을지도 모른다. 경주 남산을 오르다가 만난 흙 한 줌 없을 것 같은 험한 바위 틈에 뿌리 내린 소나무처럼 더 단단해지고 강인해져서 이제 그는 꿋꿋하게 정원의 아름드리 나무와 견줄 만큼 그늘을 드리우는 큰 나무가 되었다.
크고 높아질수록 별빛과는 가까워지겠지만 고독과도 친구가 되어야 한다. 때때로 찾아오는 속절없는 외로움으로 몸부림치는 숱한 시간을 만나기도 할 것이다. 팔을 벌려 지탱해야 할 고통도 더욱 커져갈 것이다. 쉼 없이 흔들어대는 바람도 더 많이 만날 것이고 뜨거운 햇빛도 더 강하게 다가올 것이다. 예측할 수는 없지만 뜬금없이 하늘이 내리는 채찍을 제일 먼저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옛 어른들의 말처럼 그늘이 더욱 짙어지고 범위가 넓어질수록 곁뿌리에서 싹터 커지는 새끼 나무는 키울 수가 없다. 그늘을 찾아오는 사람들조차도 그들만의 셈법으로 잠시 머물다가 떠나간다. 아쉽고 외롭지만 손을 내밀어도 잡을 수가 없다.
나는 그가 더욱 고독하고도 반짝이는 나무이기를 바란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두껍고 거칠고 투박한 껍질을 가진 외로운 한 그루의 나무이지만 속으로는 한없이 부드러워 여리고 작은 새들에게 속살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그런 나무이기를 바란다. 아픔이 진물처럼 내려앉아 보석이 된 호박석처럼 몇 세기를 견뎌 후대의 사람들에게 그가 가진 이야기를 바람 소리로 들려주기를 바란다. 살이 찢기고 가지가 부러지는 견딜 수 없었던 아픔마저도 물관을 차오르는 수액이 되어 들려주기를 바란다.
다시 내가 지내고 있는 삶터로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 손주들은 잠이 들고 고요한 숨소리에 실려 내 사색은 깊어져 가고 있다. 그가 나무같이 사는 동안 나는 다만 내 삶에 허락된 시간 속에서 그런 그가 뿌리를 뻗어 살아갈 수 있는 한 줌 흙이 되고 물이 되고 싶을 뿐이다.
첫댓글 멋집니다, 잘 읽었고 오늘 감사합니다~~~
나무 같은 사람을 내조 하시느라고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좋은 날이 반드시 올 겁니다.
고독한 나무는 물과 흙으로 인해 더 반짝이는 것 같습니다. 나무 그늘에 잠시 쉬면서 나이테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명숙쌤, 큰나무를 보살피고 응원하는 내조에 박수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