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옥천
- 향토기행
차마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향수'의 고을
고향! 산업화시대에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난 우리는 늘 고향을 그린다. 고향쪽에 머리를 두고 죽는다는 여우(首丘初心)나, 북풍에 몸을 의지한다는 호(胡)나라 말, 남쪽 가지에 깃든다는 월(越)나라 새 이야기(胡馬依北風 越鳥巢南枝)를 꺼내기 않더라도 고향은 그리움의 대상이다. 특히 온갖 곡식과 과일이 익어가는 이 가을은 누구라도 고향쪽을 향해 목을 쭈욱, 빼는 계절이 아닌가. 가을날 고향을 그리는 여행지로는 옥천만한 고을도 없다. 정지용(鄭芝溶·1902-1950) 시인의 ‘향수’란 시 덕분에 옥천은 어느덧 ‘만인의 고향’이 되었기 때문이다.
▲ 둔주봉에서 내려다본 조망. 금강 물줄기와 산줄기가 만나 한반도 지형을 이뤘다.
▲ ①안내면 향토자료전시관 앞에 있는 청석교. 원래 군북면 증약리에 있었으나 경부선 철도공사로 인해 지금의 자리로 옮겨오게 되었다. ②청산 덕우리 산골의 풍경. 마을 입구에 있는 천년 묵었다는 소나무가 농촌 풍경을 소박하게 빚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 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 얼룩배기 황소가 /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 (중략) // 하늘에는 성근 별 /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 옥천의 중심을 굽이돌아 흐르는 금강. 옥천의 자연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금강 강변도로를 따라 한 바퀴 돌아봐야 한다.
평론가들은 ‘금빛 게으른 울음’이나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구절에서 시인의 천재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찬탄한다. 시인이 이 시를 발표한 게 우리 나이로 스물여섯이요, 또 1927년 당시로서는 매우 보기 드문 시적 표현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노래에서 일관되게 뿜어져 나오는 이미지는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갖고 있는 정서인 고향의 이미지다. 정지용 시인의 생가를 찾아들어선 옥천 읍내. 아담한 옥천읍은 크게 두 군데로 권역이 나뉘어져 있다. 옥천역과 옥천 나들목을 중심으로 형성된 ‘신신가지’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옥천을 다스리던 중심지였던 ‘구읍’이다.
따라서 구읍엔 유서 깊은 문화재가 많이 남아 있다. 옥천향교와 옥주사마소라는 문화유산과 일제강점기 초등교육 시설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죽향초등학교 구교사가 보존되어 있다. 어느 골목은 소박하고, 어느 골목은 으리으리한 대궐 같은 기와집들이 들어서 있다. 그 옛날 대감이 살았다는 이런 큰 집들은 대부분 고급 한정식집이나 민박집 등으로 바뀌었으나, 그 주변을 기웃거리다보면 당시 옥천 고을을 호령하던 큰 기침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 ①옥천 구읍엔 으리으리한 전통 가옥이 많지만, 대부분 한정식집이나 민박집으로 바뀌었다. ②구읍의 춘추민속관을 찾은 아이가 전통 가옥을 둘러보고 있다. ③아담한 초가로 복원된 정지용 시인의 생가. 1927년 발표된 ‘향수’란 시는 우리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애송시로 꼽힌다. ④정지용 시인 생가 바로 옆에 자리한 정지용 문학관. 시인의 시문학 세계에 관해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이중에서도 정지용 생가와 정지용 문학관은 옥천을 찾는 방문객들이 시간을 가장 많이 할애하는 곳이다. 방문객들은 정지용 생가를 둘러보면서 시에 등장하는 ‘실개천’을 가장 먼저 찾는다. 세월이 흐르며 시궁창이 된 실개천은 최근 보존하려는 노력 덕분에 송사리떼가 몰려다니지만, 시인이 노래한 그 실개천은 이미 아니다. 콘크리트 덮인 실개천 둑길을 걷노라면 시에서 얻은 감흥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21세기의 구읍에서 100년 전 옥천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 아닐까. 시인 생가 앞의 실개천에 놓여있던 청석이다. 이 청석은 일제강점기 때엔 ‘황국신민서사’라는 글귀가 새겨진 채 신사 앞에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그후 실개천에 묻혀있던 것을 발굴해 생가와 문학관을 잇는 다리로 쓰고 있는 것이다. 문학전시실 입구엔 방문객이 기념촬영을 할 수 있도록 정지용의 밀랍인형 소품을 마련해 놓았다. 문학전시실에서 시인의 육필원고와 향수 초간본을 구경하고, 영상 위로 흐르는 시를 보며 시낭송도 해본 뒤, 자리를 옮겨 공설운동장 근처의 관성회관으로 향한다. ▲ ①죽향초등학교 구교사. 구읍에 있는 이 초등학교는 정지용 시인과 육영수 여사 등이 졸업한 사연 깊은 곳이다. ②옥천 이원면은 묘목으로 유명한 고을이다. 전국에서 최초로 묘목산업 특구로 지정됐다고 자랑하는 글귀가 선명하다. ③구읍에 있는 우편 취급국. 이렇듯 구읍엔 아직도 옛 읍내의 풍광이 비교적 잘 남아있다. ④배롱나무 붉은 꽃과 잘 어울리는 양신정. 1545년 전팽령이란 분이 낙향하여 지은 정자다. ⑤옥천 장룡산 기슭에 자리 잡은 용암사. 옥천의 유일한 보물인 쌍 삼층석탑과 어우러진 경내 풍광이 돋보인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 산꿩이 알을 품고 /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 (중략) //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이 두 편의 시는 10년이라는 세월을 두고 그리움과 상실감 사이를 오가고 있다. 외지를 떠돌다 고향으로 돌아온 시인에게 고향은 이미 옛 고향이 아니었던 것이다. 시와 고향을 이야기 하며 감상에 젖었던 마음은 이즈음에서 잠시 접어두자. 정지용 시인의 고향 옥천은 삼국 시대엔 삼국이 쟁패를 겨루던 요충지였다. 이 고을에서 발굴된 고성(古城)만 해도 무려 40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옥천읍 서쪽의 관산성은 한반도의 패권을 바꾼 관산성 전투의 현장이다.
때는 고구려·백제·신라가 한반도에서 패권을 다투던 삼국시대. 한강 유역에서 고구려에 패하면서 개로왕이 목숨을 잃자, 어쩔 수 없이 피난길에 올라 임시 도읍을 삼았던 웅진(공주)시대의 백제는 초기엔 국운의 침체기에 들었지만, 무령왕이 즉위한 후엔 다시 중흥을 이루었다. 하지만 553년, 백제가 병합하려는 한강 유역을 신라의 배신으로 빼앗기자 신라 공격에 나서게 된다. ▲ ①옥천읍 서쪽에 솟은 삼성산. 정상에 있는 삼성산성 주변이 바로 관산성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②올 봄, 관산성 아래의 국궁장에서 열린 백제 성왕 추모제. ③백제 성왕이 포로로 잡혀 목숨을 잃은 관산성 전투의 현장인 구천. 주민들은 이 일대를 ‘구진베루’라고 부른다.
554년, 백제와 신라의 운명을 건 관산성 전투가 시작되었다. 관산성이 양군의 결전장이 된 까닭은 이 지역이 신라가 새로 점령한 한강 하류 지역을 연결시켜주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백제군은 가야와 왜국으로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신라를 공격했다. 즉 관산성 전투는 4개국이 맞붙은 국제전이었다. 백제연합군은 전투에서 승리한 후 다시 왜국에 원군의 증파를 요청했다. 이참에 확실히 승기를 잡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백제의 편이 아니었다. ‘32년(554년) 가을 7월,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이라 하였다.’ ‘진흥왕 15년(554년) 가을 7월, 백제 왕 명농이 가량(加良)과 함께 관산성에 쳐들어왔다. 군주인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아 싸웠으나 불리하자,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군사를 데리고 달려왔다. 이에 여러 부대들이 승세를 몰아 크게 이기고, 좌평 4명과 사졸 29,600명을 베었으며, 말 한 필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금관가야는 관산성 전투 22년 전인 532년에 이미 신라에 멸망했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의 셋째 아들이며, 삼국통일의 일등공신인 김유신의 조부다. 그렇다면 영명하기로 소문나고, 야전에서 잔뼈가 굵은
성왕이 위험을 무릅쓰고 관산성으로 간 까닭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도 겨우 기병 50명만 데리고. 백제의 망명자들이 주축이 되어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 일본서기는 당시 전투 상황을 자세히 적고 있다. 흠명(欽明) 15년조의 기록이다. 신라는 명왕이 친히 온다는 말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병력을 동원해 길을 끊고 쳐 격파하였다. 이에 고도(苦都)가 명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청컨대 왕의 머리를 베게 해주십시오’ 하니 명왕이 대답하기를 ‘왕의 머리를 노비의 손에 맡기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말하기를 ‘과인은 매양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참고 살아왔지만, 구차하게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목을 늘여 베임을 당했다. 고도는 머리를 베어 죽인 후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신라왕이 명왕의 머리를 북청(北廳)의 계단 밑에 묻었다. 이 북청을 도당(都堂)이라고도 한다.’ 아들 여창은 단기필마로 겨우 전장에서 도망쳐 살아나왔다. 여창은 패전의 책임과 참수당한 부왕에 대한 애도 때문에 스님이 되려 했지만, 신하들의 권유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가 바로 위덕왕(威德王)이다. 위덕왕은 관산성 전투 이후 혼란에 빠졌던 백제의 민심을 추스르고 다시 국력을 모아 나간다. 하지만, 신라의 극적인 역전승으로 끝난 관산성 전투는 한반도의 세력 판도를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삼국 중에서 한반도 남동쪽에 치우쳐 있어 가장 뒤쳐져 있던 신라가 최후의 승자가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후 고구려와 백제에게 협공을 받으면서도 한강 유역을 빼앗기지 않은 신라는 100여 년 뒤 당나라와의 연합으로 삼국통일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 ①'투망어업'이라 쓰인 조끼를 입고 투망질을 하는 옥천 주민. 만약 투망어업 허가를 받지 않고 투망을 던지면 수백만 원의 벌금을 문다. ②놀림낚시 채비를 한 강태공이 은어 낚시에 열중하고 있다. 몇 년 전 옥천군에서 대청호에 은어 치어를 방류한 뒤부터 금강과 보청천에 은어떼가 몰리고 있다. ③강가에 대놓은 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④금강변 마을인 동이면 청마리의 제신탑. 삼한시대부터 존재했다는 이 탑은 마을의 풍년과 평안을 기원하던 신당 유적이다.
서화천 일대가 비극의 현장인 구천(狗川)이다. 옥천 읍내 4번 국도와 37번 국도가 만나는 삼양 사거리에서 37번 국도를 타고 금산 방면으로 2km 정도 가면 서화천에 걸린 나지막한 다리가 보이고, 그 다리 건너편 물가에 바위벼랑이 보인다. 주민들은 이 일대를 ‘구진베루’라고 부르는데, 이 둘레엔 진터벌, 말무덤, 군전리 등 옛 전장터임을 알려주는 지명이 아직도 남아 있다. 많은 학자들은 관산성을 옥천 서쪽의 삼성산성과 그 주위에 이어진 용봉·마성산·장용산 등의 방어시설을 통틀어 부르던 이름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대동여지도에도 삼성산 위치에 고성이 있었음을 표시하고 있다. 관산성의 중심을 이루는 삼성산은 높이 300m 정도의 나지막한 산이다. 그러나 망대 위에서 동쪽을 내려다보면 옥천 읍내와 그 너머로 굽돌아 흐르는 금강 물줄기가 펼쳐진다. 삼성산은 덩치로 보면 관산성 전투의 현장으로서는 협소하다. 전쟁사 전문가들은 당시 백제·가야·왜 연합군의 전사자 수가 무려 29,600명이라는 사서의 기록을 근거로 신라의 병력은 적게 잡아도 연합군과 비슷했거나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신라와 백제연합군의 병력을 합치면 최소 6만 명 이상이 이 부근에서 혈전을 벌였던 것이다.
▲ 안남면 도농리에 위치한 중봉 조헌 선생의 묘소. 임진왜란 당시 금산에서 칠백의병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렇지만 요즘엔 향토사를 하는 이와 동행하지 않으면 보통 사람들은 그 흔적을 되짚기 어렵다. 이정표는 물론이요, 흔한 추모비도 하나 없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동안 성왕의 죽음은 안타까움만 더한 채 이렇게 묻혀있었다. 그렇지만 얼마 전부터 이를 아쉬워한 옥천 주민들은 성왕을 위해 관산성 근처의 국궁장에서 국궁대회를 열고 있다. 또 지난 봄엔 국궁장에서 성왕 추모제도 지냈다. 옥천군이나 옥천문화원에도 예산이 책정되어 있지 않아 내년 행사가 열릴지도 알 수 없는 일이라 덧붙였다. 아직 패자인 성왕을 위로할 준비가 덜 된 것일까. 또 관산성 전투는 상승하던 국운도 순간의 실수로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신라의 배신에선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는 국제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깨닫게 하는 표본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연을 적은 ‘백제 성왕 사절지’라는 비석 하나 세우는 게 뭐 어렵겠는가. 옥천군의 관심을 기대한다.
자, 살벌한 전투 이야기에 마음이 무거워졌다면
금강으로 가보자. 정지용 시인이 복권되기 전인 1980년대까지만 해도 옥천은 그다지 내세울 것 없는 고을이었으나 그나마 금강 덕에 체면치레를 할 수 있었다.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는 그래서 큰 인기를 끌었다. 서울서 내려가다 보면 꼭 쉬어야할 지점에 있기도 했지만, 금강 덕분에 당시만 해도 전국에서 가장 풍치 좋은 휴게소로 꼽혔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옥천’이라고 하면 어딜까, 고개를 갸웃하다가도 ‘금강휴게소’라 하면 아, 그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옥천의 9개 읍면 가운데 2/3인 이원·동이·청성·안남·안내·군북의 6개면을 적시고 흐르는 금강은 옥천 자연의 상징이다. 고당리엔 ‘높은벌’이 있고, 합금리엔 정겨운 강마을이 오순도순 펼쳐지고, 청마리엔 삼한시대의 제신탑·솟대·장승이 남아있다. 또 비포장을 지나 지수리에 이르면 독락정(獨樂亭)이라는 정자가 반기고, 그 뒤로 솟은 둔주봉(384m) 정상으로 발품을 팔면 한반도 지형도 감상할 수 있다.
이곳엔 구한말의 개혁가 김옥균과 그를 사모했던 기생 명월에 대한 애절한 사연이 전한다. 만약 금강변을 둘러보지 않는다면
비록 구읍에서 정지용 시인을 만났다 해도 옥천의 절반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길손은 이번 여정에서 금강변에 승용차를 세워놓고 밤을 꼬박 지새웠다. 추석을 앞둔 달은 제법 살이 올랐고, 강으로 쏟아지는 달빛은 그야말로 교교했다. 다리 위에선 밤낚시 나온 가족이 견짓대를 들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고, 강 건너 바위틈에선 사내 하나가 다슬기를 잡느라 랜턴을 들고 강물을 뒤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건 잡고기요” 하면서 강에다 도로 휙 던져버렸다. 그는 쏘가리를 노린다고 했다. 원래 전국의 어느 강이든지 투망은 불법이다. 걸리면 벌금도 수백만 원에 이른다. 이 옥천 고을에선 투망어업 허가를 받은 사람들만이 투망질을 할 수 있다. 그들은 관광객들의 착오를 막기 위해 항상 ‘투망어업’이라 쓰인 조끼를 입고 투망을 던진다. 외롭게 객지생활을 하는 사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달이 밝으면 고기가 안 나오지요.” 그러고 보니 다리 위에서 견짓대 낚싯줄을 풀었다 감았다 하던 이들의 살림망도 거의 비어있었다. 사내는 달이 너무 밝다며 또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냥 산책만 즐기는 길손에겐 이 달빛이 좋았다. 내일모레가 추석이라 해도 아직 푸른 기운이 남아있는 산기슭의 나무이파리들은 달빛을 받아 반짝거렸고, 강물은 화려한 황금비늘을 두르고 있었다. 물안개. 새벽이 가까워오며 피어오른 물안개는 서서히 달빛도, 산도, 강도 모두 감추었다. “제기랄!” 여명이 밝았을 때 사내는 투망에 묻은 물안개를 툭툭 털어 자신의 트럭 뒤에다 내던지듯 실었다. 떠나려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밤새 달빛을 받으며 도란거린 사이 아닌가. 재미 좀 봤냐고 물었다. 사내는 대답 대신 빈 살림망을 가리켰다. 사내의 푸념 같은 엔진 소리가 물결 따라 흘러가자 강변은 다시 고요 속으로 빠져들었다. 짙은 물안개 때문에 둔주봉에서의 한반도 조망은 포기하고, 중봉(衆峰) 조헌(趙憲·1544-1592) 선생 묘소로 향한다. 조헌 선생은 바로 임진왜란 때 영남의 곽재우·정인홍, 호남의 고경명·김천일 등과 함께 충청도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분이다. 조선 선조 때의 문신·학자·의병장이었던 조헌 선생은 보은현감에 재직할 때엔 당시 충청도에서 치민제일의 목민관의 모범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 듬치재에서 바라본 안내면 조망. 이 고을은 조헌 선생이 임진왜란 전에 은거하던 인연이 있다.
선생은 토정 이지함, 우계 성혼, 율곡 이이에게 수학하였으며, 특히 이이의 제자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가치실용에 중점을 둔 스승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고, 율곡의 학덕을 기리고 배운다는 뜻으로 스스로를 후율(後栗)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지부상소란 ‘제 의견이 옳지 않으면 이 도끼로 저의 목을 쳐주십시오’ 하는 뜻으로 도끼를 지니고 올리는 상소를 말한다. 절대 권력인 왕에게 목숨 걸고 바른 말을 하겠다는 의지인데, 조선시대에 지부상소를 올린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중봉 조헌 선생과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1833-1906) 선생이다. 최익현 선생은 1876년 도끼를 메고 궁궐 앞에서 일본과의 병자수호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지부소(持斧疏)를 올렸고, 1905년엔 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한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처단하라는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를 올리며 도끼로 뜻을 표현했다.
②매년 표충사에 진행되는 중봉 조헌 선생 추모제. ③조헌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안내면 도이리의 후율당. 조헌 선생은 율곡 이이의 학문을 잇는다 하여 자신의 호를 후율(後栗)이라 하였다.
옥천엔 중봉 조헌 선생의 발자취가 선명하다.
군북면 이백리 이지당(二止堂)은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서당이요, 안내면 도이리의 후율당(後栗堂)은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답양리 가산사는 선생의 영정과 영규 대사의 위패를 봉안한 절집인데, 지금은 위패만 모셔져 있다. 또 안남면엔 선생의 묘소가 있다. 선생의 고향은 경기도 김포. 그런데 어찌하여 옥천에 선생의 유적이 즐비한 것일까. 1584년(선조 17) 보은 현감으로 있던 선생은 당시 반대세력의 모함에 의해 파직 당하는데, 이때 은둔생활을 한 곳이 바로 옥천군 안읍 밤티(栗峙)의 산골이다. 이후 조헌 선생은 이곳에서 지방 선비들과 지내면서 문하생을 두고 학문을 강론(講論)하며 지냈다. 선생은 생애 마지막 7~8년을 이곳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강학에 정진하는 데 힘썼다. 그러다 이곳에서 임진왜란의 발발 소식을 접한다. 선생은 다시 옥천으로 내려와 의병 모집에 나섰다. 옥천은 선생이 은거하며 인연을 맺은 곳이라 문하생과 지인들이 많아서 이들의 도움으로 옥천에서 천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는 데 성공한다. 당시 조헌 선생이 의병을 모집할 때 쓴 격문이다. 화살이 이 원수들에게 함께하여 그들의 고향 땅에 돌아가지 못하게 하리라. 뜻을 굳게 먹는다면 귀신이 감동하고 백성들이 따라나서며, 일을 이루려고만 한다면 천지만물도 도우리라.’ (조헌 선생의 ‘의병이여 일어나라! 왜적을 쳐부수자!’ 중에서) 하지만 의주로 북상하기 전 관군의 시기와 방해로 의병대가 흩어지자 남은 700명을 이끌고 영규와 함께 8월18일 금산 공격을 강행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모두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 왜군들도 큰 타격을 입고 퇴각함으로써 당시 호남 방어의 근거지였던 금산을 회복할 수 있었다. 넓진 않아도 잘 가꿔진 선생의 묘소를 지키는 소나무는 선생의 강직했던 기상처럼 오늘도 푸르다.
이번 옥천 여정의 마지막은 청산(靑山)이다.
청산은 지금은 면 단위로 격하되었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어엿이 독립되어 있는 하나의 행정구역이었다. 금강을 제외하면 옥천의 가장 큰 젖줄은 바로 금북정맥에서 발원해 보은을 적시고 흘러내려온 보청천(報靑川)이다. 그런데, 마지막 4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동학횃불 밝히고 독립만세 외쳤던 / 정의로운 인물들이 자자손손 이어내려 / 민족혼이 깃든 곳 서로 믿고 도우며 / 한마음 한뜻으로 청산에서 살리라’ ▲ ①청산 한곡리 문바위골은 동학교도 최초의 방포령이 내려진 곳이다. 오른쪽 소나무 아래의 문바위엔 당시 주동자들의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②청산면 소재지의 버스터미널 주변 풍경. 지금은 한적하고 자그마한 면이지만, 구한말 동학농민운동 당시엔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3만 명의 동학교도들로 인해 ‘새서울’로 불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다. 청산은 동학교도 최초의 방포령(싸움을 시작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곳이며, 3만여 동학교도가 집결하여 보은의 관군과 일본군을 향해 돌진했던 역사적 사건의 고을이기도 했다. 청산면 소재지 남쪽의 19번 국도 판수리에서 널찍한 평야 펼쳐진 논길을 따라 4km 정도 들어가면 한곡리가 나오는데, 이 마을 가장 위쪽에 있는 문바위가 바로 동학혁명유적지다. 문바위는 마을 위쪽의 큰 바위 여러 개가 서로 기대있어 마치 문(門)과 같다고 해 붙은 이름이다. 또 1894년 9월18일 재방포령을 내린 곳으로 전면적인 동학농민전쟁의 시발점이 됐다. 또한 당시 동학교도들은 청산을 ‘새서울’, 문바위골을 ‘작은 장안’이라고 부를 정도로 청산 주변은 전국에서 몰려든 동학교도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지금도 마을엔 최시형 가족이 살던 옛집과 타다 남은 밤나무 등 당시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런 사연 덕에 문바위 마을의 한곡리는 물론이요, 청산 고을엔 동학교도의 후손들이 많은 편이다. 하지만 동학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뒤 이들은 쉬쉬하고 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길손은 평화로운 마을을 내려다보며 어릴 적 외할머니에게 배운 노래를 나지막이 불러봤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길손에게 이 노래를 가르쳐준 외할머니의 고향은 바로 문바위 마을과 이웃한 덕우리다. 길손도 그들을 따라 천천히 논두렁을 걸었다. 그때 길손의 귓전에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박인수와 이동원이 함께 불렀던 정지용 시인의 ‘향수’였다.
옥천, 어떤곳인가
옥천의 남쪽은 영동군, 북쪽은 보은군과 접하고, 동쪽은 경상북도 상주시, 서쪽은 대전광역시와 충청남도 금산군과 접한다. 즉 옥천군은 충청남도·충청북도·경상북도 3개 도의 도계를 형성하고 있다. 옥천은 동쪽에는 천금산(千金山·465m)·팔음산(八音山·762m), 서쪽에는 환산(環山·581m)·마성산(馬城山·497m), 남쪽에는 월이산(月伊山·551m), 북쪽에는 금적산(金積山·652m) 등이 솟아 있다. 또한 보청천(報靑川)이 군 중앙에서 금강에 합류하며, 이외에도 금강은 연주천(蓮舟川)·서화천(西華川) 등을 합류하면서 대전으로 흘러간다. 신라 초기에는 고시산군(古尸山郡)이라고 했다가 관성군(管城郡)으로 바뀌었고, 고려 때에는 경산부(京山府:경북 성주군)에 예속됐다가 현이 됐다. 1413년(조선 태종 13)에는 옥천으로 개칭됐고 관할도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변경됐다. 현재 행정기관은 옥천읍 군북·이원·동이·안남·안내·청산·청성면의 1읍 8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금강 주변과 대도시인 대전광역시를 끼고 있어 그린벨트, 수질보전특별대책지역 등의 개발규제구역이 군 전체 면적의 86.5%를 차지한다. 소·돼지·닭 등도 사육된다. 특산물은 포도·사과·배 등이며 수출전략작목은 감식초·버섯종균·영지차 등이다. 또한 전통적 농업지대였던 옥천군의 공업화를 주도하고 있는 적하리의 동이농공단지에는 20여 업체가 입주해 있다. 교통은 경부선·경부고속철도,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고, 충주∼남원, 보은∼금산, 대전∼대구 간의 국도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를 이루고 있다.
문학전시실은 테마별로 정지용의 문학을 접할 수 있도록 지용연보, 지용의 삶과 문학, 지용문학지도, 시ㆍ산문집 초간본 전시 등 다양한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이 집은 1600년대 김 정승 이후 송 정승과 민 정승이 거주해 삼정승의 집이라 불리던 가옥을 육영수 여사의 부친인 육종관씨가 민 정승의 자손 민 대감에게서 1920년 매입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상류계급의 전형적인 양식의 건축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현재 복원공사를 하는 중이다.
외부 벽체는 비가 스며들지 않도록 수평으로 길게 가로로 댄 목재비늘판벽으로 마감한 편복도형 교사건물로 옛 교사의 흔적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이곳에서 시인 정지용, 고 육영수 여사 등이 교육을 받았다. 구교사 오른쪽 꿈나무동산엔 정지용 시비와 고 육영수 여사의 휘호가 놓여있다. 옥천포도 시설재배사부터 원예작물원, 화훼작물원, 사과, 배, 복숭아 등의 실험용 노지 과수원을 비롯해 필각정이 있는 테마공원을 중심으로 연못을 조성해 여름이면 연꽃 만발한 연꽃동산까지 편히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이외에도 조롱박길(330㎡), 수생식물 재배지(5,000㎡), 동산조경(8,930㎡), 원예치료실(330㎡) 등이 갖춰져 있다.
관산성 아래 북서쪽 서화천 주변 구천(궂은벼루)은 백제 성왕 사절지(死節地)로 전해져오고 있다. 관산성은 이정표는 없고, 옥천읍 양수리에서 삼성산 이정표를 따라 올라가야 한다. 정상까지는 40분 정도 걸린다.
용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 용암사라고 이름지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에 의해 용바위가 파괴되어 현재는 그 흔적만 남아 있다.
같은 모양의 석탑 2기는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다. 자연암반 위에 건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층 기단을 갖추고 있다. 동탑은 4.3m, 서탑은 4.1m.
전설에 의하면 마의태자를 추모했던 신라 도공의 후손이 염불하는 태자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미륵불을 조각했다고 한다. 이 마애불은 영험이 있어 기도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고 전한다. 현재 이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목조불상은 이전의 연혁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이 불상이 1651년에 만들어진 것임이 밝혀졌다. 다라니경에 인쇄된 내용으로 보아 경상도 문경의 오정사에서 만들어 이곳으로 옮긴 것이라 한다. 몸길이는 20∼30cm이며, 몸 표면에 검은 점이 7∼8줄로 가로 놓여있는 것이 특징이다. 하천 중상류의 물이 맑고 자갈이 있는 곳에서 서식하며, 물속에 사는 곤충이나 갑각류, 작은 동물 등을 먹고 산다. 어름치가 한강과 금강에서 서식한다는 것은 두 강이 과거에 연결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금강은 한반도 고유종인 어름치가 살 수 있는 남쪽 한계선이 되므로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해 천연기념물 제238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처음에는 각신 마을 앞에 있어서 각신서당(覺新書堂)이라고 했다. 그 후 우암 송시열(1607-1689)이 고장의 영재를 모아 교육해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대청에는 조헌이 직접 쓴 ‘각신서당’의 현판을 비롯해 ‘이지당기’, ‘이지당강학조약’ 등이 남아있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01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도문화재자료 제214호)·명륜당·동재·서재·내삼문·외삼문·고직사 등이다. 유안·청금록·선안·교안 등 조선 후기 옥천지역의 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많은 책을 보관하고 있다. ![]() 사마소(司馬所)는 조선시대 지방고을의 생원과 진사들이 모여 유학을 가르치고 정치를 논하던 곳이다. 옥천읍 상계리의 옥주 사마소(도유형문화재 제157호)는 옥천 지방에 속한 사마소로 1654년에 세워졌다. 내부에는 관성사마안(管城司馬案), 향약계안(鄕約契案), 옥천군향약계규약(沃川郡鄕約契規約) 등 조선시대 문인들의 면모를 알려주는 여러 편의 문서들이 보관되어 있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과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강당인 명륜당이다. 소장된 책들은 모두 흩어지고 잃어버려 거의 없다. 매년 봄가을로 지방 유림들이 향사(享祀)하고 있다.
그러나 충청도순찰사의 방해로 해산당해 불과 7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행진했고, 그곳에서 고바야가와의 왜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했다. 선생의 유해는 옥천군 도리동에 안장했다가 1636년(인조 14) 안남면 도농리 현재의 위치로 이장했다. 묘소 입구의 신도비는 1649년(인조 27)에 세운 것으로 선생의 생애와 최후 격전지였던 금산싸움에 대해 자세히 적혀 있다. 좌의정 김상헌이 글을 짓고, 이조판서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1588년(선조 21) 조헌이 보은현감을 사임하고 옥천에 내려와 살 때 율곡 이이를 사모해 그의 뒤를 잇는다 해 자신의 호를 ‘후율(後栗)’이라 하고, 용촌 밤티에 당(堂)을 지어 후율당(後栗堂)이라 했다 한다. 이곳에는 1621년(광해군 3) 판각한 항의신편 125매와 유림시판(儒林詩板) 10매, 선조가 내렸다는 조서 1매를 보관하고 있다.
영규 대사와 조헌 선생은 힘을 합해 청주성을 탈환하고 금산전투에서 왜군을 맞아 싸우다 순절했다. 이에 가산사에서는 영정각을 짓고 영규 대사와 조헌 선생의 영정을 봉안했는데, 영정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훼손했다 하고, 지금은 위패만 모셔져 있다.
김문기는 문과에 급제했고, 함길도 관찰사를 거쳐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1456년(세조 2) 단종 복위의 거사에 가담하다 붙잡혀 고문에도 굴하지 않다가 순절했다. 현재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는 비는 1804년(순조 4)에 세운 것으로, 1846년(헌종 12)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왔다.
송우암유허비
송시열은 외가인 옥천 구룡 마을에서 출생한 조선의 대유학자다. 유허비는 현재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으며 네모반듯한 받침돌 위로 직사각형 비몸을 올리고 지붕 모양의 머릿돌을 갖췄다. 비는 조선 정조가 재위하던 1776∼1800년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원면 이원리의 창주서원 묘정비(도기념물 제105호)는 옛 창주서원 자리에 서있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본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다리의 구조는 양쪽 개울가를 돌로 쌓고 개울 바닥에 널찍한 돌을 깐 다음 사각형 돌기둥을 2개씩 세워 그 위에 넓고 긴 널돌을 얹어 길바닥을 만들었다. 높이 1.75m, 너비 2.2m, 길이 9.83m. 이 다리가 있던 증약 마을은 찰방역이 있었던 곳으로 왕래가 빈번했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은 갈돌대, 돌쩌귀, 돌칼, 돌화살촉, 그물추, 구멍쪼으개, 여성을 나타낸 얼굴조각, 토기 등이다. 주로 식생활에 관련된 유물이 많아 묻힌 사람은 여자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전체적인 형태는 길쭉한 자연석 돌을 세워놓은 모습으로 가운데 부분이 볼록하게 나와 있다. 근처 고인돌 주변에서 무늬가 성긴 빗살무늬토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신석기 후기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후 몇 차례 고쳐 지었다.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목조 와즙 팔작집인 지금의 정자는 1828년(순조 28)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이 정자를 처음 지을 때의 사정을 기록한 양신정기(養神亭記)가 전한다.
막돌을 둥글게 쌓아올린 탑·장승·솟대·산신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옆의 솟대는 약 5m의 높이로, 긴 장대 끝에 나무로 깎은 새의 모습을 얹어 두었다. 장승은 통나무에 사람의 모습을 먹으로 그렸다.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 탑~솟대~장승의 순으로 제사를 올리며, 제사가 끝나면 농악대가 굿을 해 마을의 풍년과 편안함을 빈다.
주변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많은 선비들이 모여 지내던 정자의 구실을 하다가, 후대에 와서 유생들의 학문연구 장소로 이용됐다. 덕양서당 유식은 시조 유검필의 24대손으로 학력이 높았고 대학자였다. 덕양서원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충과 효를 가르쳤으며, 고종 32년(1895) 수리했다.
향토전시관·놀이시설·사계절썰매장·물놀이장·인공폭포·연못·분수대 등의 위락시설을 비롯해 야외취사장·휴게소·원두막·상가·식당·주차장 등 각종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다. 기본 입장료 어른 1,000원, 청소년 700원, 어린이 500원.
부조유물, 탑신제당, 물레방아 등 전시물이 1,500여 점 전시되어있다. 역사유물 전시실인 1층엔 선사시대 유물을 비롯해 그릇·기와·고문서·목판 등이, 생활과 민속 전시실인 2층엔 의식주, 농업, 민속과 신앙과 관련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장룡산은 계곡과 능선에 왕관바위, 포옹바위, 병풍바위 등 기암괴석이 많아 인근의 서대산에 뒤지지 않는 산세를 지니고 있다. 장룡산 휴양림 지구를 관통하는 코스로 가벼운 산행을 즐길 수도 있다. 또 휴양림 안팎으론 포도밭 과수원도 있어 시골 할머니댁에 놀러온 듯한 편한 기분이 들기도 하는 휴양림이다. 관리소·산막·어린이놀이터 등 대부분의 시설은 동쪽 자락에 포근하게 안겨있고, 서쪽엔 야영장·체육시설·산림욕장 등이 자리하고 있다. 지용제는 지용문학상, 지용신인문학상, 지용청소년문학상, 전국지용백일장, 지용문학포럼, 가족시낭송회 등 다양한 문학 행사가 펼쳐진다. 이외에도 문학관광열차 운행, 지용사이버퀴즈행사, 가훈써주기, 판화찍기 등의 특별체험 행사도 펼쳐진다. 매년 9월 안남면 표충사, 관성회관, 야외공연장, 청소년수련관 등에서 사흘간 펼쳐진다.
올해엔 9월26일(금)부터 28일(일)까지 사흘간 펼쳐진다. 전화 옥천문화원 043-733-5588
올갱이국
올갱이는 맑은 물에서 건져온 것이라야 제대로 된 국물맛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옥천의 식당들은 금강에서 잡은 것만을 주로 사용한다. 올갱이국은 올갱이 특유의 향과 구수한 된장, 그리고 부재료로 쓰이는 나물의 향이 하나로 어우러져 맛을 낸다. 또한 올갱이 무침은 술안주로도 인기가 높은데 올갱이 알맹이만을 양념과 나물들에 무쳐낸다. 올갱이국을 파는 식당은 대부분 올갱이무침도 차린다. 올갱이국을 끓이려면 올갱이를 깨끗한 물에 하루나 이틀 정도 담가서 잔모래를 빼낸 뒤 끓는 물에 20분 정도 익힌다. 그리고 올갱이는 건져내 바늘 등으로 알맹이를 빼고, 푸르스름한 국물엔 된장을 듬뿍 풀고 고추장·마늘 다진 것으로 양념을 한다. 여기에 적당하게 부추·아욱·시금치 등을 듬뿍 썰어 넣고 한소끔 더 끓인다. 나물이 어느 정도 익으면 알맹이를 넣어 잠시 더 끓이면 맛있는 올갱이국이 된다.
다른 지방의 어탕국수와 비슷하지만, 물고기의 육질을 살린다는 데 청산 생선국수의 특징이 있다. 생선국수는 민물고기의 향이 맛을 좌우한다. 또 구수한 맛이 있고, 단백질·칼슘·지방·비타민이 풍부해 성장기 어린이나 노약자에게도 좋다. 국물에 고추장을 풀어 간을 하고 소면을 넣어 삶은 다음, 파·애호박·깻잎·미나리·풋고추 등 제철에 나오는 부재료를 썰어 넣어 한소끔 더 끓여 내면 맛있는 생선국수가 된다. 일정별 길라잡이 옥천읍을 중심으로 한 군서·군북면이 이 권역에 속한다. 옥천읍에서도 구읍엔 정지용 생가와 정지용문학관, 육영수 생가, 죽향초등학교 구교사, 옥천향교, 옥주사마소 등의 볼거리가 몰려 있다. 남서쪽의 장룡산 용암사엔 옥천 유일의 보물인 쌍삼층석탑이 있다. 또 군북면의 이지당, 군서면의 관산성 성왕 사절지, 장룡산 자연휴양림 등도 이 권역에 넣을 수 있다.
옥천 지역의 금강 상류 지역에 속한다. 송시열유허비, 김문기유허비, 두암리 삼층석탑 등이 있다. 동이면의 금강유원지도 이 권역에 속한다.
보청천 물줄기 주변과 금강 중류 지역에 속한다. 합금리 금강변엔 낚시 포인트와 다슬기 잡을 곳이 많다. 보청천 상류의 청산엔 청산향교, 동학혁명 유적지 등이 자리하고 있다.
옥천 북부 지역이면서 옥천 지역 금강 하류이면서 대청호 상류 지역에 속한다. 금강 유역의 장계국민관광지엔 향토사료전시관도 있다. 이외에도 한반도 조망하기 좋은 둔주봉을 비롯해 독락정, 덕양서당 등이 있다. 의병장 조헌 묘소와 사당, 조헌과 영규 대사 위패를 모신 가산사도 이 권역에 속한다. 일정짜기 ●당일 옥천은 교통이 편리해 전국 웬만한 지역에선 2~3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으므로 당일로도 웬만큼 즐길 수 있다. 처음 방문할 때의 추천 일정은 다음과 같다. 옥천 나들목~정지용 생가~식사(올갱이국)~금강유원지~강변 드라이브~청마리 제신탑~독락정~조헌 묘소~향토사료전시관~옥천 나들목 옥천을 넉넉히 즐길 수 있는 일정이다. 당일 추천 일정에 용암사, 이지당, 성왕 사절지, 송시열·김문기 유허, 둔주봉(왕복 2~3시간), 가산사, 동학혁명유적지 등을 곁들일 수 있다. 숙박은 금강변의 민박집을 이용하는 게 여러 모로 편하다. 이 정도면 옥천을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강마을과 호수마을 구경이나 금강에서의 낚시도 곁들일 수 있다.
●고속·시외버스 대전역 앞 대한통운 길 건너에서 640번 시내버스 수시 운행. ●열차 ●현지교통 숙식(지역번호 043) 읍내에 옥천관광호텔(731-2435)을 비롯해 모텔급 숙박업소와 식당이 많다. 구읍에 있는 전통 가옥인 춘추민속관(733-4007)은 한식을 차리고 민박도 친다. 단체 손님도 숙박이 가능하다. 이외에도 마당넓은집(733-6350), 원조구읍할매묵집(732-1853) 등 맛집이 많다. 이원면에 스위트모텔(731-2990), 호수파크(733-9632), 초원파크(733-9600) 등 모텔급 숙박업소가 있다. 금강유원지 주변에 황쏘가리(733-6606), 대청팔호가든(731-0013), 동이면 적하리엔 금강나루터식당(732-3642), 토박이식당(732-3786) 등 숙식할 곳이 많다. 안내면에 숲속파크(733-3906), 뿌리깊은나무(731-0567), 배바우손두부(732-2137) 등 숙식할 곳이 흩어져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금강 드라이브길에 지나게 되는 청성면 합금리 강가에 고려민박(011-460-5911), 금강민박(733-9877), 대나무집민박(732-5988), 도림민박(010-9577-5338), 엘도라도민박(010-3422-3999), 여울목민박(731-6677), 청마민박(732-8878) 등이 숙식할 곳이 여럿 있다. |
출처: 내 마음, 머무는 그곳은.... 원문보기 글쓴이: 孤雲(고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