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용 시인>>
<<정한용 시인의 양력>>
* 1958년 충북 충주 출생.
* 경희대에서 문학박사 학위 수여
*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 1985년 <시운동>에 시 발표로 작품 활동을 시작.
* 시집 : 『얼굴없는 사람과의 약속』, 『슬픈 산타 페』, 『나나 이야기』, 『흰 꽃』, 『유령들』, 『거짓말의 탄생』,
『천 년 동안 내리는 비』, 『흰꽃』 외,
* 평론집 : 『초월의 시학』, 『울림과 들림』 외.
* 영문 시선집 : 『How to Make a Mink Coat』, 『Children of Fire』 등.
* 현재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시와시학>, <웹진 시인광장>의 편집위원.
* 인터넷 문학동인회 [빈터] 대표.
* 천상병시문학상, 시와시학상 등 수상.
<<정한용 시인의 시>>
공룡알 화석/정한용
그거 있잖아요, 참을 수 없는 존재, 그거, 세 번 읽었
거든요, 첫 번째 도대체 무슨 소린지, 두 번짼 재미가 조
금, 이번 세 번짼 정말 놀라웠어요, 어쩜 그렇게 잘 짜인
그물 같은지, 촘촘하게, 인생이 다 그렇고 그런 거겠지
만, 지저분하고 고상하다가 뜬금없이, 이내 뜨물처럼 흘
러가는 거,
자꾸 말 끊지 말아요, 난 농담이 더 좋던데, 말 한마
디 툭 던진 게, 가벼운 농담, 우리도 그냥 아무 생각 없
이 한마디 툭, 가볍게 그냥 농담, 그게 한 사람 일생의
무게를 뒤집잖아요, 아니다, 쪼그라들게, 아니다, 씨를
말리게, 아니다, 삭아서 쭉정이만 남게 만드는데,
이번에 왜 가즈오 이시구로 있잖아요, 날 버리지만가,
네버렛미곤가, 하여튼, 또 다른 내가 나를 위해 산다면,
어딘가에서 내 몸을 갖고 산다면, 삶에 희망이 있는 건
지, 모두 삭아서 허공만 남기는 건 똑같은데 말이에요,
겨우 일억 년도 못 살면서, 화석도 못 되면서,
그런데, 이게 갈대예요, 아니다, 삘긴가, 어렸을 때 하
얗게 꽃이 피면 뽑아서 빨아먹었는데, 아니다, 꽃은 아
닐 거야, 그런데 알이 어디 있죠? 겨우 몇 개뿐, 죽음이
너무 단순화되었네요, 추상화라고 해야 하나, 멸종될 것
이고 어둠이 내리겠죠, 우리에게도,
있잖아요, 아무리 가벼운 것이라도 농담처럼 그냥 사
라지지 말자고, 기념으로 우리 알 한 개씩 낳아요, 복제
해요, 지금, 여기.
디지털 소녀/정한용
내가 사랑했던 소녀.
너보다 디지털이 좋아, 고백했던 소녀.
하루에 한 움큼씩 알약을 털어 넣고 디지털 음료를 마시던 소녀.
잠을 자다 꿈속에 플러그를 꽂아 디지털 영화를 보여주던 소녀.
쥐와 닭들이 오물을 뒤집어쓴 채 찍찍꽥꽥 시끄러워도 아랑곳하지 않던 소녀.
우리 늙으면 한날한시에 바다에 가서 죽어요, 웃는 듯 우는 듯 중얼거리던 소녀.
가끔은 옆구리에서 갈비뼈를 꺼내, 잘 구워졌어, 먹어, 내밀던 소녀.
택시를 탈 때마다 디지털 화폐를 내밀며 깎아 달라 조르던 소녀.
광화문에서 시청을 거쳐 청계천까지 유령처럼 떠다니며 촛불을 흔들던 소녀.
너만 있으면 백 년 동안 밥 안 먹고도 배부르다고, 그게 슬프다고, 울던 소녀.
붉은 블라우스 틈으로 흰 찐빵 같은 가슴을 보라 꽃잎처럼 살며시 열던 소녀.
나 사실은 술 못해, 이 술이 디지털이라 마시는 거야, 잠들기 전에 노래를 불러달라던 소녀.
달력에 ‘디지털/디지털/디지털’이라고 쓰다 ‘아, 털이 싫어’라고 고쳐 쓰던 소녀.
네 시는 왜 전철 유리벽에 안 나와, 물어보던 소녀.
내가 답이 없자, 사랑도 모두 디지털이야, 우기던 소녀.
거짓말은 육체와 떼려야 뗄 수 없어, 말도 안 되는 이론을 펴던 소녀.
세상이 지랄 같은 것도 모두 자기 탓이라며 담벼락에 머리를 찧던 소녀.
이 땅에 더 이상 봄은 오지 않을 거야, 영원히 겨울이면 좋겠다던 소녀.
피로 피를 씻든지 혁명이 일어나면 다시 올게, 안개처럼 사라졌다 백만 년 후에 다시 나타난 소녀.
지금은 디지털 세계에서 공인한 늙은 소녀.
초밥을 먹으며/정한용
소식 없이 한 계절 보낸 뒤
아들을 만나 초밥을 먹는다.
생선살로 싼 밥을 고추냉이와 간장에 찍어 먹는다.
매콤한 공기가 콧속을 흔들자
오래 묵은 눈물이 스며 나온다.
내가 갔던 독일은 너무 멀고
내가 머물다 떠난 너의 마음도 너무 멀고
내가 애써 지우려 한 사람까지의 거리도 너무 멀다.
밥알에는 적당한 온기와 물기가 섞여
끼리끼리 착 달라붙어 있다
입안에서 우물우물 잘게 흩어진다.
몸을 잃은 생선도 제 살점이 씹히는 걸 마냥 지켜보고 있다.
우리가 잠시 나눈 의례와 기록도
언젠가 이렇게 산산이 부서져 내릴 것이다.
이 시간은 엷어졌다 언제 또 무의식으로 떠오를지
모른다,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새 접시가 다 비고, 나는 나의 길로
아들은 아들의 길로
밥은 밥의 길로, 생선은 생선의 길로
각자 제 살 곳을 향해 말없이 흩어진다.
겨울 접히고 봄이 펼쳐진다.
좌우에 대한 숙고/정한용
몇 년 전부터 노안인가 싶더니, 이젠 안경이 잘 안 맞는다. 양쪽이 서로 어긋난다. 왼쪽으로 보는 세상은 흐리지만 부드럽고
따뜻한데, 오른쪽으로 보는 세상은 환하지만 모가 나고 차갑다. 둘 사이의 불화와 냉전에 속앓이가 심했는데, 알고 보니 오
래 쌓인 원한이 있었다. 수구와 진보의 싸움은 식상한 것이 되었고, 훈구와 사림의 대립도 짓물렀다. 정상과학을 두고 벌인
칼 포퍼와 토마스 쿤의 논쟁에 대해서는 논문으로 까발린 적도 있다. 새는 두 날개로 난다고 리영희 선생께서 일갈했지만,
나는 차라리 두 세상을 따로국밥처럼 몸속에 나눠놓고 살겠다. 왼쪽 눈이 쓰린 날은 막걸리에 해물파전을 먹고, 오른쪽 눈이
부신 날은 소주에 삼겹살을 먹겠다.
베끼다/정한용
엄마 해봐, 음~ 마~, 아기가 엄마를 베낄 때
엄마는 아기를 벗긴다.
우리들은 베끼고 벗기면서 서로 닮는다. 거미줄을 베껴 방탄복을 만들고, 나뭇잎을 벗겨 태양전지판을 만든다. 달팽이를 베
껴 접착제를 만들고, 나비날개를 벗겨 디스플레이 패널을 만든다. ‘자기야, 날 벗겨봐.’ 애인들은 밤마다 서로를 베낀다. 뜨겁
게 엉킨 몸 위로, 자박자박 천 년이 흘러가고, 중세에서 르네상스를 거쳐 제국의 시대로 넘어간다. 간혹 혁명이 일고, 가끔은
미래로 밀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소리 없이 감춘다.
내가 너를 은밀히 베끼는 사이
너도 나를 살포시 벗긴다, 불륜의 뜨거운 밤,
표절의 공범이 된다.
괜찮다/정한용
봄눈 뒤집어쓴 나뭇가지를 흔들자 겨울잠을 깬 작은 눈망울이 드러난다. 나도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무의 촉과 눈을 마주친다. 우리는 눈으로 하나가 된다. 눈의 세계는 무언가 반짝이는 것들로 가득하다. 외계에서 날아온 파장과 오래 충전된 텔레파시가 스파크를 일으키는 것 같다. 아니어도 괜찮다. 먼저 누가 기다렸을까, 그 송신과 수신이 사이를 떨리게 만든다. 타박타박 걸어오던 시간이 멈칫멈칫 걸음을 늦추고, 팽팽히 부푼 공간은 더 탱탱해질 것이다. 일기예보에 의하면 남수단엔 비가, 우크라이나엔 봄눈 내릴 거라고 한다. 우리 밭 대추나무도 연초록 혀를 쑥 내밀 것이다. 아니어도 정말 괜찮다. 내 의지 밖에서 지구는 돌고, 눈은 눈으로 스밀 것이다. 아프다는 말도 잘 자랄 것이다.
겹치는 세계/정한용
손 닿는 곳마다 책을 늘어놓고 동시에 여러 권을 읽곤 한다.지금 방바닥에는 베개로 써도 좋을 만큼 두꺼운 사진 이론과 한시 선집이 있고, 의자 옆에는 소설 두 권이 나란히 포개져 있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들려줄 얘깃거리 가벼운 책과, 늦은 밤 읽기 위한 좀 무거운 책도 대기 중이다. 책을 섞어 읽다 보면 새로운 책이 생겨나기도 한다. 어제 읽던 <풍아송>과 <바다의 선물>을 방금 들추니, 주인공이 바뀌어 있다. 양커가 나치 치하의 프랑스에 가서 시경을 연구하고, 베르너폰이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 침묵하고 있다. <거짓말의 탄생>과 <평범한 인생>을 펼치니, 여긴 더 꼬여 있다. 정한용이 철도역에서 깃발을 흔들다, 아, 지겨워, 무단이석하며 사고가 나고, 원래 복무하던 철도공무원은 보르헤스가 보냈다는 편지를 읽으며, 개새끼들!, 술주정하고 있다. 이해 불가라 여기시겠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원래 인생이란 뒤죽박죽 비빔밥 같아야 제맛이 날 터. 나는 조심 두 손으로 네 권의 책갈피를 넘겼다.
사랑의 무게/정한용
쾰른성당 앞 다리엔 수백만 개의 자물쇠가 매달려 있다. 그 사랑의 증표는 한번 잠기면 다시는 열리지 않는다. 검푸른 강물이 열쇠를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당신과 나 사이도 흔적을 지우고 여기에 멈춰 있다. 완벽한 알리바이였다지만, 모든 사랑은 나름의 무게를 갖는 법, 다리 난간이 점점 기울고 있다. 북한강과 강변북로를 돌아, 지구와 안드로메다까지 돌고 돌아, 잃어버린 기억을 쫓아 가끔은 다리 아래로 투신하는 사람도 있다. 잠들었다 깨어날 수 있기를 바라며, 자물쇠 대신 신발을 매단 경우도 있다. 정처 없는 사랑은 길 잃은 개처럼 송곳니를 드러내며 울거나, 낯선 곳으로 스며 세포 분열하듯 증식할 것이다. 낯선 곳에서 온전한 새 사랑을 짓기도 할 것이다. 내 몸 70kg 중에 당신이 심어놓은 한 근 정도를 뚝 끊어, 드라이플라워처럼 잘 말려도 될까. 누군가의 열쇠가 되어 난간에 걸리거나, 구멍이 안 맞으면 강물에 던져질 것이다.
달빛항아리/정한용
정월 대보름 밤이었습니다. 술이 한 순배 돌고 마음과 몸이 풀렸을 때, 우리는 집을 나서 산길을 걸었습니다. 고적치* 고갯마루까지 삼십분쯤 달빛 샤워를 했습니다. 휘영청 늘어진 빛이 길을 열자, 솔가지 사이로 빠르게 지나던 바람조차 잠시 멈췄습니다.
나는 흙으로 빚은 작은 항아리를 꺼내 달빛을 담습니다. 갯물처럼 손가락 새로 새기도 하지만, 지금은 도처에 널렸으니 아까울 것도 없겠습니다. 한 가닥 집으면 비린 향이 훅 끼칩니다. 흠향하라는 뜻이겠지요. 오랜 이치가 그러니까요.
우리가 나누는 언어들이 달빛에 은밀히 젖었으니, 길가에 얼음으로 박혀 한동안 거기 고요히 머물 것입니다. 그리고 봄날 더 가까워지면 푸르게 스미겠지요. 없어지는 건 익어가는 것, 오히려 화석이겠지요. 달의 얼굴처럼.
이대로 조금 묵혀둡시다, 우주가 한 바퀴 돌 만큼. 만약 당신이 초보시라면, 향이 닿은 자리마다, 새봄 막 눈을 뜬 솔방울을 더하시길 권합니다. 이렇게 천년 뒤 다시 이 자리에서 나는, 달빛酒 항아리를 개봉하기로 약속하겠습니다.
* 고적치 :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어성전리에 있는 고개
돈다닝께/정한용
리처드 도킨스만큼이나 유명한 과학철학자 마이클 셔머가 땀을 닦으며 강연을 끝냈다. 끝판에 그가 던진 말이 너무나 도발적이어서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음모론일지도 몰라. 일종의 가설이라고 한발 빼긴 했지만, 결론은 한 마디, 돈이 돈다는 것이었다. 이걸 누가 몰라, 좆도, 돌고 도닝께 돈이지. 허나, 그 회의주의자의 말씀은, 인식의 저 광대한 지평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돈에는 진짜 바퀴처럼 생긴 발이 달렸다는 것, 그래서 못 가는데 없이 나댕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오래 전에 꿰고 있었다. 우리 엄니가 보따리 장사로 시골마을을 누비실 때, 늦저녁 돈 대신 곡식을 한 짐 이고 돌아오실 때, 그 철길 위로 굴러가던 엄청난 바퀴를 보았다. 어두워 색깔은 구별이 되지 않았지만, 지름이 이천 미터에, 시속 삼천 킬로미터로 달리는 무시무시한 발을 보았다. 손을 들어 히치하이킹 신호를 보내도, 그것은 우리를 무시한 채 쌩 달아나곤 했다. 그러니까 가난은 우리의 슬픈 장난감이었고, 내가 보듬어야할 유일한 자산이었다.
그 시절에 비하면 요즘 신권지폐에 달린 바퀴는 아주 보잘 것 없어졌다. 셔머의 주장에 의하면, 집진드기 발보다 작다고, 맨눈으로는 안 보인다고 한다. 불확정성의 원리라고? 시방 그거이 무싄 소리여. 정말 좆같은 것 아녀? 삶이 즐겁고 배따신 양반에게 돈은 회전목마처럼 구르고 굴러 거대한 바퀴가 된다. 늘 쫓기는 놈에게 그것은 늙은 엄니 젖통처럼 쪼그라들어 덜컹거린다. 이것을 공식화한 것이 셔머의 법칙인 바, 잘 이해 안 되는 분은 페북이나 카톡으로 질문주시기 바란다.
머무는 시간/정한용
눈 내렸다는 소식을 먼 환청처럼 듣습니다.
사람 사는 곳 어디에나 소리가 있고,
그 소리에 예민해 진 귀를 갖은 자가 간혹 있습니다.
소리가 향기나 별빛처럼
시각과 후각을 두드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는 침묵이 더 좋습니다.
침묵 속에 베여있는 단단한 응집이 더 좋습니다.
이제 여행 막바지,
지금껏 어둠을 향했다면 오늘은 빛을 찾아갑니다.
곧 돌아갑니다.
천 년 동안 내리는 비/정한용
오늘로 꼭 천 년이군요, 주름마다 새겼던 기록도 무뎌져
나는 어디, 당신은 또 어디? 고문서 연구자들조차 고개를 갸웃거릴 만큼
지워졌지요, 이게 뭐야, 사용하지 않게 된 기호와 의미 사이, 맥락 끊기고요,
화석을 머금은 돌조각조차 남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한 땀씩 꿰맨 기억만은 선명해요,
비가 오니까, 하루도 빠짐없이, 물길도 바람길도 다 끊기고, 드러난 허공,
낡고 헐어 못쓰게 된 맥락 틈으로 붉게 부식된 쇳가루들이 떨어져요,
밤이 고요히 부서져요, 습자지처럼 울음을 머금은 어둠을 펴 말리다, 이게 뭐야
혼자 중얼거려요, 우리는 너무 멀리 왔어, 새소리도 고양이 발자국도
낡아가고, 비었다는 생각도 바싹 말라 텅 비고, 울음의 문서들이 덜그럭덜그럭
혹시 기억해요? 단 석 줄로 된 해독 불가능의 책력(冊曆),
덜그럭덜그럭, 이젠 너무 늦어 되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주해를 덧붙이고
한참 안으로만 타는 불꽃을 바라보지요, 푸르게 번지는 심연,
꼭꼭 봉인하려는 음모들, 덮이는 봉우리들, 짙은 침묵들,
우리는 둥둥 떠내려가요, 떠내려가며 인사, 오랜만이군,
더 어두워지고, 골목마다 침묵들이 분주히 오가고, 어이, 밥은 먹었어?
꼬여버린 기호가 우리 가슴을 묶을수록 어둠은 더 단단해지는데
여긴 어디, 당신은 지금 어디? 자꾸 비 내려요, 배가 고픈데
풀도 무성해 길이 끊겼는데, 자꾸 어디로, 그런데, 여기가 어디죠?
그런데 사실, 아무도 내게 질문 따위는 하지 않아요, 어디냐고, 누구냐고
밥은 먹었느냐고, 비가 오니까, 천 년 동안.
농담/정한용
무엇인가 말하고 싶지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지 잘 떠
오르지 않을 때, 그러니까 개념은 있으나 그것에 씐 언어
가 구체적인 글자나 소리로 즉각 생성되지 않을 때, 이유
는 두 가지이다.
그 모호한 이데올로기가 순간적으로 변해서 불확정적
이기에, 그것을 잡았다고 판단하는 순간 이미 그것은 과
거의 치졸한 문장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끊임없이 새로
운 공허를 내게 파도인 양 밀어내기 때문, 아니면, 그 불
가해한 반죽 덩어리는 직시하고자 하는 것과는 근본적
으로 다른 것인데, 마치 선험의 틀인 것처럼 조롱하고 조
종하며 조절하려고 들기에 거기에 무의식적으로 저항을
느끼기 때문.
쿤데라의 「농담」한 문장에 내 '농담' 한마디를 블렌딩
하자, 전에 보지 못한 새 농담이 발생하는 것을 본다. 이
건 절대 농담이 아니다.
하루살이/정한용
겨우 하루라고?
하루살이목에 속하는 곤충은 전 세계적으로 2500여 종.
민물에서 1년이나 애벌레로 지내다, 성충으로 우화한 뒤
1~2주일 정도 산다. 애벌레일 때는 작은 먹이를 잡아먹지
만, 성충이 되면 입이 퇴화되어 겨우 수분만 섭취한다. 학명
은 그리스어로 '에페메라' 즉 '그날 하루'라는 뜻이고, 한자
어로는 '부유(蜉蝣)'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하루살이는 하루를 사는 게 아니다.
하루를 열흘처럼, 혹은 열흘을 하루처럼 마음대로 늘이
고 줄이는 것,
아침 이슬과 함께 생을 시작해
햇살 펴지면 청춘의 짝을 찾고, 점심 지나기 전 초례청으
로 하객을 부르겠지.
오후 하루가 기우는 걸 느끼며 잠시 회억에 잠기기도 하
지만
사이사이
새끼도 까고 유망 종목에 투자도 하고 잘되면 정계에도
진출하고
음모와 배신에 얽혀 피눈물도 흘리고
드라마처럼 출생의 비밀이 복잡한 자식을 낳고
서로 싸우고 지지고 볶고, 그러다가
다시, 사이사이
가끔은 아프리카 난민에게 후원금도 보내고, 동냥과 적선
이랄 건 못 되지만
청계천이나 시청 광장에 금요촛불집회에도 가겠지.
운 좋으면 중산층으로 늙어 만수를 누리다 죽기도 하겠지.
그러나 어쩌면 아침 열시쯤 청운의 꿈을 접고 요절하는
자도 있겠지.
열흘을 버티든 백년을 견디든, 그렇게 끝나는 목숨들.
많은 죽음 위에 낙엽처럼 쌓이는 더 많은 죽음들.
흔적조차 남지 않은
하루살이들.
덩굴식물/정한용
이름도 모른 채 키워온 덩굴식물이
시름시름 앓더니 겨우내 죽었다, 죽었다 단정하기 어렵지만
봄에도 싹이 오르지 않으니 내버릴 구실이 생겼다.
긴 세월의 무게가 얹혔는지
이토록 화분이 무거울 리 없는데, 내 힘으로 감당하기 힘들다.
겨우 카트에 실어 비틀비틀 뒤뚱뒤뚱 옮기는데
문을 나서다 줄기 한 마디가 툭 부러진다, 자진한 듯하다.
떠나기 싫어 흔적이라도 남겨두려는 속셈
어느 생인들 두껍게 간이 배지 않은 게 있으랴.
아파트 담장 아래 흙을 묻는다.
화분 속에는 고운 흙만 있는 게 아니었구나.
계략인지 음모인지, 흰 스티로폼 조각들이 잔뜩 뒤섰여 있다.
바싹 마른 줄 알았던 흙도 적당히 따뜻하게 젖어 있다.
더욱 놀라운 건, 아, 아직 죽은 게 아니었어.
여린 실뿌리들이 스티로폼 사이사이 미세하게 뚫고 들어가
지난 삶의 기억을 촘촘히 새기고 있다.
불규칙 프랙털 문양의 상형문자를 쓰고 있다.
감히 나를 버려, 이 잡것들이.
아버지는 그렇게 돌아가셨다.
지워지지 않을 애증의 기록을 남긴 채, 어머니 곁에 누우셨다.
한 해만 지나도 닥나무 찔레 뒤섞여 숲을 이루는 곳,
어무이, 이제 덜 심심하시겄어요.
덩굴 아래 늘 축축하게 젖어 있는 곳, 오래 묵혀둔 거기,
내 몸 마디마디 뿌리내린 흔적을 지울 수가 없으니
그곳이 내가 쉴 자리이다.
스티로폼처럼 바람구멍 숭숭 뚫린 몸이 되어, 머잖아 나도 느직이 따라 누울 것이다.
거식증/정한용
아무래도 책을 끊어야겠다. 이해가 안 가시겠지만, 책을
읽을 때마다 몸이 붓는다. 달포 새 5킬로그램쯤 늘었다면,
비정상이긴 해도, 뭐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백 근 나가
던 몸무게가 1년 만에 이백 근에 근접한다는 건,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이게 다 지난 열두 달 동안 멋모르고 먹어
치운 책들 때문이다.
짐작하시겠지만, 가장 가벼운 건 여행 서적이다. 참살이
채식 같다. 살이 안 찐다. 딱딱하고 무거운 <그라마톨로지>
를 읽었을 땐 3.2킬로그램이나 쪘다. 맛도 없는 걸 꾸역꾸역
참았다. <통섭>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땐 무려 4.5 킬로그램이
나 늘었다. 아주 질기고 팍팍했다. 다이어트용으로 가볍게
봤던 <하자르 사전>에도 0.5킬로그램이나 올랐다.
책을 끊어야겠다. 일절 곡기를 끊고 공복에 비타민과 뒷
산 약수만 삼켜야 하겠다. 내리 3년은 단식 요양에 들어야
겠다. 그러면 불쌍한 나를 가엾이 여겨, '대한거식증환우회'
에서 나를 단골 나주집으로 불러내리라. 식탁에 백과사전만
큼 두꺼운 삼겹살과 세게문학전집만큼 긴 소주병을 차려놓
고 나를 기다리리라.
내가 모를 줄 알고/정한용
지랄하고 자빠졌네,
내 살아 있을 때 코빼기 한번 안 뵈더니 둘째 년 서럽게 우는 것 좀 봐.
그 속을 모를 줄 알고,
반 토막 난 주식 그거라도 채가려는 속셈이지.
이년아, 그렇잖아도 내사 모질지 못해 너 주기로 했다.
어리숙허고 찌질한 아들놈도 탈이여.
병원비 빼고 겨우 남은 아파트 한 채, 그마저 대출금도 밀려 있지만
유언장에 분명히 장남 니 것으로 도장 쾅 찍어놨응께,
그거야 손 못 대겄지.
문상객이 자꾸 밀려오니 큰애가 고생이 많구먼.
저기 김사장하고 애들도 왔네.
만난 지 10년도 넘은 것 같은 디 이렇게 영정사진으로 낯짝을 뵈여주니,
미안허이, 따신 국밥이나 한 그릇 드시게.
그리고 내게 작년에 빌려간 20만 원은 꼭 돌려주시게.
왜 전화에 대고 훌쩍거리면서 꿔달라 안 혔나.
마누라 몰래 바람 피우다보면 용돈이 수월찮게 들긴 허겠지.
저쪽에 술 쳐먹고 노래 부르는 놈은 뉘여?
아니 용택이 아녀? 언제 왔더냐, 내 앞에서 절 두 번 혔어?
그놈의 술버릇 아직도 못 고쳤구먼.
코딱지만한 가구 공장 차렸다 다 말아먹었다더니,
동남아 아이들 월급 떼어먹었다고 방송에 났을 때는 나도 쪼매 맴이 아팠다.
소리 그만 지르고 그만 가든지
안 가려면 저쪽 우리 고향 친구들 고스톱 판에 낑기든지,
여기서 보니 대머리 영식이가 많이 땄구먼.
갸는 원래부터 쪼잔하고 인정머리도 없고 싸가지도 읎지.
동규 새낀 맨날 광만 팔고 좀 땄다 싶으면 조용히 사라져요, 좆같은 새끼,
여긴 뭐하러 왔냐?
나 죽은 거 보면서 속으로 잘 뒈졌다 그러려고?
내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 허시나본데,
아직 난 멀리 못 가고 이승을 떠도는 구신이다, 이거지.
느그들 무슨 맘 먹고 무슨 짓 허는지 다 보여,
김사장아 내 저승 가는데 노잣돈이 좀 필요허니 돈 좀 돌리도.
용택이 너그 아버지 죽었을 때 널 조카처럼 살핀다 했건만, 자슥아 술 작작 처먹어라.
고향 친구들아 내 먼저 가 터 잡아놓으마, 뒤따라 천천히 오구마.
아들아 너를 대견스레 생각하면서도 맨날 면박만 줬구나.
딸년아 남편한테 쫓겨나기 전에 잘 좀 해라.
내 마지막 바람이다.
날 불태워 강물에 띄우고 그 강물이 바다에 이를 즈음,
그냥 깡그리 잊어뿌리라.
기울다/정한용
‘시 잡지’라고 친다는 게 ‘시 자지’라고 쳤다.
‘낼 보자’라고 친다는 게 ‘내 보지’라고 쳤다.
자판 위에만 올라가면 내 손가락은 ‘19금’으로 기운다.
19세기를 지나고 21세기를 넘어, 광막한 시간의 경계를 가로지른다.
적나라한 욕망, 무절제한 관음, 억압된 배설의
추상과 무질서의 비빔밥을 퍼먹는다.
통제 불능이다.
여태 살아온 날들을 가만 돌아봐도 삐뚜름하다.
내가 기울어 있어 똑바른 것들도 기울었다 여겼구나, 본래 내 것이
어디 있겠는가, 세상은 본래 좆같고 씹같은 것,
이렇게 소금을 치며 간을 본다.
자지/보지 사이에서,
그 좁은 틈새에서 우리는 갈등하고 뒤집어지고 깨지다가 길을 잃고
가끔은 새 생명이란 이름으로 순수를 위장하고
또 가끔은 무심한 듯 밥을 먹기도 한다.
저기, 근본 없는 질문들,
혓바닥을 늘어뜨린 채 기울어져 있다.
해뜨는 집/정한용
70년대 풍기문란으로 금지됐던 곡
기타소리가 가슴을 송곳으로 훑어내다
한 맺힌 쇳소리가 되어 흐느적 흐느적 흐느끼던 곡
그 노래 생각나네
해 뜨는 집
그 제목이 뉴올리언즈 어느 소년원 이름이란 걸 안 건
세월도 한참 지나서였는데
구식 녹음기 불법 테이프 들으며 짜릿했었네
뜻도 모른 채 그리워했었네
아침 햇살로 황홀히 빛나는 황금의 궁전은 아닐까
몽상의 시학을 접었다 폈다 했네
비틀린 꿈 속에서도 나는 행복했더라네
해 뜨는 집에 살고 싶었네
스무해 세월 다시 지나
어리석은 어른이 되고 담뱃재처럼 꿈도 흩어지고
혓바닥에 90년대식 먼지만 풀풀 날리게 되었는데
해도 뜨지 않는 일요일
뜻밖에 옆집 김선생 따라나서 그 집을 찾게 되었다네
이름도 비슷한 < 태양의 집>
물왕저수지 근처, 밤나무 아카시아 후박나무가 둘러 싼 곳
그냥 손님으로 멋쩍고 어색한 객이 되어
70년대와 90년대의 틈에 끼었네
허름한 막사 속에선 막 알에서 깨어난 누에들처럼
서른 명 남짓 정박아들이 꼬물거리며 놀고 있었네
소름끼치도록 즐겁게 놀고 있었네
하늘 아래 가장 죄없는 자들의 손에서 저주의 검은 빛이
스르르 뿜어나와 벽과 지붕을
숲과 노래를 덮었네
해 뜨는 집, 맑은 눈동자 하나가 내 어둔 눈을
찔렀네
사랑도 없이/정한용
사랑 없이도
태양은 여름을 붉게 태우고
서어나무 잎사귀를 더욱 단단히 뭉친다.
사랑 없이도 개미는 풍뎅이를 잡아 집으로 끌고 가고
자동차는 속도위반으로 다린다.
사랑 없이도
잠자리는 바닷가를 날다 그늘에 쉬고
오래 끌던 파업은 중단된다.
사랑 없이도
비버는 나뭇가지로 둑을 쌓는다.
사랑 없이도
월곶에선 망둥이가 갯벌을 산책하다가
낚시꾼들을 비웃듯 폴짝 뛰어오른다.
사랑 없이도
모텔은 밤마다 환히 불을 켜고
오늘 부른 배가 내일은 부르지 않고
사랑 없이도
죽은 것들은 오래 지속된다.
사랑 없이도
도도새는 멸종된다. 그런데도
미래는 곧 과거가 된다.
먼 저곳/정한용
마케도니아 친구 이고르가 메일을 보냈다,
친구여, 이승은 아직도 안녕하신가,
다시 봄이 왔는가, 기다림도 호사였으니,
잊힌 혁명들도 페이지 속에서 부활하는가,
웹사이트에 내가 심어놓은 기호가 지금 잘 익어
싹 틔우는지, 혹은 빵처럼 부푸는지,
여긴 아날로그처럼 끈적거리고 음모의 냄새가 난다네,
말로 뱉었으나 의도하지 않은 것과
분명히 적시했으나 언어로 써지지 않은 것 사이에서
우리는 늘 엇박자로 비껴갔었지,
짧은 답신을 보낸다, 주소 없이 이름만 적는다,
미래에서 파도가 밀려와
현재와 과거를 덮을 때, 허공에 기호들이 흩어지고
우리가 안개의 집 근처를 배회할 때,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지, 마케도니아에도 봄이 왔는가,
여기처럼,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사이,
언제 그랬냐는 듯 서서히 어둠이 깔리겠지,
날과 날, 해와 해, 겁과 겁 사이,
우리도 머잖아 비활성 물질로 만나게 되겠지,
다만, 슬픈 답신이 언제 거기 닿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