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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니의 저서 『거대한 변환』은 19세기 전 기간과 20세기 전반부에 걸쳐 세계를 지배한 영국 중심의 서구 문명이 ‘형성-발전-붕괴’되는 역사의 궤적을 정치경제학적으로 추적한다. 저자는 이 책의 목적이 ‘자기 조정적 시장 체제’에 기반을 둔 19세기 서구 문명의 제도적 기원과 그 전개 과정,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형성된 서구 민주국가의 발흥과 붕괴 요인을 분석하는 데 있다고 밝힌다. 이를 통해 그는 20세기 초두부터 인류 문명이 당면하게 된 ‘거대한 변환’의 정치적·경제적 실체가 무엇인지를 밝혀내고자 한다.
내용은 3부로 나누어지는데, 제1부는 “국제 체계”란 제하(題下)에 19세기 서구 문명을 역사적 제도주의 시각에서 분석한다. 제2부는 ‘시장경제의 흥망’ 과정을 ‘악마의 맷돌’과 ‘사회의 자기방어’로 나누어 고찰한다. 전자에서는 19세기 문명의 제도적 원동력으로 ‘자기 조정적 시장’의 성립과 전개 과정을 분석하고, 후자에서는 시장 체제 확산과 그로 인한 정치사회적 격변, 부작용과 폐해에 대응하여 정치·사회 안에서 일어났던 사회적 자기방어 운동을 고찰한다. 제3부에서는 “변환의 진행”이란 제목으로 새로운 세계를 향한 변환의 진행과 전망에 대한 저자의 관점과 희망적 예측을 담는다. 이 글의 목적이 명저의 소개에 있으므로 폴라니에 대한 비판적 읽기에 치중하기보다는 우선 주제별로 주요 내용을 요약하고 정리하는 데 주력하기로 한다.
서구 문명은 1815년 비엔나 회의부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에 이르기까지 100년간의 평화를 구가한다. ‘유럽 협조(Concert of Europe)’ 체제라 불리는 이 기간 동안 영국, 프랑스,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러시아 등 당시 유럽 열강 간에 전쟁이 있던 기간은 통틀어 18개월에 불과하다. 17세기와 18세기에는 100년 사이에 60-70년 동안이나 큰 전쟁이 벌어진다. 이전 역사와 비교해 볼 때 19세기 문명이 누린 백 년간의 평화는 역사상 유례가 없던 일이다.
유럽의 강대국은 안으로는 자유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 등 사상 대립과 권력투쟁으로 인한 내전, 혁명, 반혁명 등 때로 심각한 무장 충돌과 폭력 사태를 숱하게 겪는다. 그렇지만 이러한 내부 갈등과 분쟁은 국지적 수준에서 관리되거나 격리 가능했기 때문에 유럽 열강 상호 간에 전면전 상태로 확산되는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19세기에 서구 문명이 백 년 평화의 뒤꼍에서 물질적 경제적 산업화로 풍요를 누리며 안으로 정치적 자유주의를 구가하고 밖에서는 식민지 획책의 전열을 정비하여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여기에 19세기 문명, 즉 유럽 중심의 근대 질서가 확립된 원인과 배경,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 붕괴 과정까지 읽어낼 수 있는 열쇠가 숨어 있다는 주제를 내걸고 폴라니는 이 책의 논지를 전개한다.
폴라니에 의하면 19세기 유럽 문명권은 네 가지 제도적 메커니즘에 의해 지탱된다. 첫째는 세력 균형 체제로 이 덕분에 백 년 동안 열강 사이의 전쟁이 효과적으로 억제된다. 둘째는 국제 금본위제로 이는 영국과 유럽 중심의 ‘세계경제’란 독특한 조직망을 황금의 실로 엮어내는 특이한 국제 경제 제도를 통해 전쟁 없는 유럽 협조 체제를 가능하게 한다. 셋째는 자기 조정적 시장으로 이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 주어 ‘유럽 협조’ 체제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 준다. 넷째는 자유주의 국가 체제로 시장경제를 원활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보호·보장)해 줌으로써 물질적 풍요와 평화를 지탱한다. 뿐만 아니라 유럽의 근대 (자유주의) 국가 이념은 나머지 세 기제의 작동을 정치적으로 보완한다.
이상 네 제도 중 국제 금본위제와 시장 체제는 경제 제도이고 세력 균형 체제와 자유주의 국가 기제는 정치 제도이다. 그리고 시장과 국가는 국가 내부적 제도이고 세력 균형과 금본위제는 국제 차원의 제도이다. 이들 네 가지 제도적 메커니즘이 한데 어울려 19세기 유럽 문명의 독특한 특징과 동학(動學)을 이루어 냈다는 것이 제1부의 논지다.
이 중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 ‘자기 조정적 시장’이다. 세력 균형 체제는 국제 금본위제에 기반을 둔 정치적 상부 구조였고 국제 금본위제는 자기 조정적 시장이 국제적으로 확장된 것에 불과했다. 자유주의 국가는 자기 조정적 시장이 만들어 낸 피조물이자 때로는 그 보호장치로 활용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19세기 서구 문명의 원천과 기반은 자기 조정적 시장이었다는 것이 이 저서의 핵심 명제이다. 자기 조정적 시장을 기반으로 자유주의 국가가 성립되고 자기 조정적 시장이 국제적으로 확장되어 국제 금본위제가 수립된다. 그 결과 국제 정치에서 세력 균형 체제가 작동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19세기 서구 문명을 구성하는 주요 제도는 모두 단일 모체(母體)인 자기 조정적 시장 체제에서 비롯된 셈이다. 폴라니는 이를 가리켜 “19세기라는 근대 문명의 제도 체제의 비밀을 푸는 열쇠는 시장경제의 생성과 발전을 지배하는 법칙”에 있었고 “19세기 유럽 문명이야말로 인류 역사의 특정 시점에 등장한 특정 제도의 메커니즘을 중심”으로 지탱되어 왔다는 점에서 문명사에 유례를 발견하기 힘든 “독특한” 역사라고 간명하게 규정한다.
풀어 말하자면, 폴라니는 『거대한 변환』에서 19세기 유럽 열강이 중심이 되어 세계를 제패한 역사 공간과 시간 단위를 연구 범위로 설정하고 이 문명사적 단계를 그 이전과 이후 어느 역사와도 뚜렷하게 구분하여, 문명사에 일대 변환을 가져온 ‘독특한 역사적 국면’으로 규정한다. 『거대한 변환』은 이처럼 세계사에서 유례없이 특별했던 유럽의 시대, 즉 근대 질서(modernity)를 창안·주도한 (서양)문명 체계의 구조, 연원 및 흥망성쇠를 거시적 관점에서 정치경제학적으로 분석하여 지난 시대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독창적 독해법을 제시한 책이다.
폴라니는 19세기의 백 년 평화는 현상적으로 세력 균형 체제 덕분이지만 그 이면에서는 복잡하게 얽힌 경제 조직의 이해관계에 크게 의존했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세력 균형은 평화가 아니라 전쟁을 통해 유지되었는데, 그 이유는 동맹국을 바꿔가며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는 가운데 강대국과 약소국이 상호 균형과 안정을 이루며 함께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세기 세력 균형이 전쟁 상태가 아닌 평화를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은 큰손 금융(haute finance)이라는 거대 금융 조직을 통해 각국 정부와 유력한 시민 그룹이 다양한 금융·경제·법률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큰손 금융이란 자기 조정적 시장에 기반을 두고 새로 생겨난 거대 경제 조직을 지칭하는데, 이 조직은 국제 금융과 결합한 국내 은행 체계를 통해 각국 정치와 경제 조직을 하나로 연결함으로써 평화 유지 기능을 수행했다.
폴라니에 의하면 1900년을 전후한 60-70년간 큰손 금융이라는 국제 제도는 유럽의 국제 정치와 경제 조직을 연결하는 역할을 통해 국제 평화 체계의 수단을 제공한 “가장 탄력 있는 항구적 매개자” 노릇을 했다(역서, pp. 25-26 참조). 유럽의 “열강 스스로는 막상 큰손 금융의 성립에도 유지에도 간여할 수 없었다.” 예를 들면 로스차일드(Rothschild, N. M).가(家)는 영국 정부와 별도의 독자 채널을 통해 외국 정부와 접촉을 유지했고, 중앙은행과도 거리를 두면서 국제 문제에 깊이 간여했다. 큰손 금융 조직의 활동은 ‘돈벌이’란 사적 이익 영역에 기초하고 있었고 전쟁에 투자하여 재산을 형성했으며 도덕적 문제에는 ‘무감각했다.’ 이들은 결코 평화주의자도 아니었고 ‘평화를 위한 수단으로 고안’된 공적 장치도 아니었다.
이 조직은 각자 위세와 지위, 권위와 충성, 화폐 자산과 단골 후원자, 그리고 사회적 활동 범위가 독특한 무수한 국내 회사 및 상인 등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사업의 성공을 위해 약소국에 폭력 행사도 불사했고 정부 유력자에 대해 뇌물 공세를 취하며 약소주권국의 정책 결정에 강력한 조정자로 행동한다. 또 식민지와 반식민지에서 이익을 취하기 위해 음흉한 수단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적 평화는 결국 국경을 초월한 사적 이익을 위해 무언(無言)의 압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이들 큰손 금융이라는 국제 경제 조직의 힘에 의존했던 것으로 풀이된다(역서, p. 29).
그러나 1900년대로 접어들면서 큰손 금융으로 불리는 경제 조직은 서서히 해체되어 간다. 더불어 유럽 열강 간의 세력 균형도, 지난 100년을 지탱해 온 평화 체제도 붕괴에 직면하게 된다. 1904-1906년 사이 유럽 협조는 두 적대 세력으로 대체되고, 세력 균형 체제도 종말을 고한다. 바야흐로 유럽 안에는 균형 메커니즘이 기능을 멈추고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동맹과 이에 대항하는 독일과 이탈리아로 갈라진 두 개의 경쟁적 세력 집단만 남게 된다(역서 pp. 34-35 참조). 이로써 백 년 평화가 종식되는 것은 시간문제였고 평화의 바탕이었던 인위적 경제 조직의 본질도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고 폴라니는 진단한다. 1914-1918년에 세계가 제1차 세계대전의 폭풍우에 휘말린 것도 백 년 평화를 가져온 19세기적 경제 조직의 해체와 맞물려 예견된 결과였다.
폴라니는 “1900년 이래 진전된 세계 경제 체제의 해체”가 1914년에 폭발한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이었다”고 단언한다(역서, p. 37). 대전 종결과 파리 강화조약의 결과, 독일의 경쟁력이 약화되고 미국의 윌슨(W. Wilson) 대통령의 제창으로 국제연맹이 수립되자 세력 균형 체제가 한동안 회복되고 긴장은 완화되는 듯 보인다. 그렇지만 강화조약은 “패전국의 일방적 무장해제를 통해 세력 균형 체계의 재건을 원천봉쇄”함으로써 긴장의 원인을 오히려 악화시켰고, 그로 인해 평화에 대한 정치적·경제적 장애는 더욱 증대된다.
시장의 자율 조정 기능이 무너지고 로스차일드가, 모르간(Morgans) 등 큰손 금융 경제 조직의 뒷받침이 사라진 국제 정치 경제 체제는 모래성처럼 무너져간다. 유럽의 평화와 번영을 이어주었던 이들 황금 실(golden thread)이 끊기자, 세계는 바야흐로 일대 혼란기를 거치며 인류 전체를 다시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미증유(未曾有)의 재앙으로 몰아간다.
그즈음 유럽 내 자유주의 정부는 곳곳에서 전체주의 독재 정부로 교체되었고, 자유 시장에 기초를 둔 생산은 계획과 통제를 결합한 새로운 경제 제도로 속속 바뀐다. 이로써 19세기 문명을 받쳐주던 네 개의 제도적 메커니즘은 붕괴되고 독일의 파시즘(혹은 나치즘), 러시아의 사회주의, 미국의 뉴딜 정책 등 새로운 형태의 정치 경제 제도가 도입된다. 세계가 19세기의 허물을 벗고 20세기로 진입한 순간을 폴라니는 제2장, “보수적 20년대, 혁명적 30년대”라는 제목으로 다룬다. 그는 여기서 결론 내리기를,
(유럽 중심 시대 종막의) 분수령은 영국의 금본위제 포기, 러시아의 5개년 계획, (미국의) 뉴딜 정책 개시, 독일의 국가 사회주의 혁명, 아우타르키 국가(독일·이탈리아·일본)에 밀려 국제연맹이 붕괴되는 사태로 이어졌다. 1차 세계대전의 끝 무렵과 종전 직후 한동안 19세기적 이상들이 한껏 부풀어 올라 (몰락 직전의 정점에서) 그 위세가 10여 년간을 지배했지만 1940년에 들어서는 국제 정치에서 구체제의 흔적이 말끔히 사라지고 – 몇몇 소수의 고립된 국가를 제외하고는 – 대다수 나라가 전혀 새로운 국제 환경을 마주하게 된다.(원서, p. 23/역서, p. 39)
이처럼 20세기 인류가 겪은 거대한 변환의 원인은 결국 19세기 서구 문명의 기초를 이룬 자기 조정적 시장과 이에 바탕을 둔 국제 금융 제도의 붕괴로 말미암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럽 체제의 형성과 그 붕괴를 가져온 자기 조정적 시장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 다시 폴라니의 텍스트를 따라가 보자.
폴라니는 일반적 의미의 시장과 ‘자기 조정적 시장’을 개념적으로 구분하여 사용한다. 일반적 의미의 시장(market)은 교역이나 매매를 목적으로 만나는 장소적 의미를 중심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시장은 석기 시대 이후 줄곧 인류와 함께 존재했다. 이때의 시장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독자적 경제 제도로서의 의미를 갖지 못하고 사회의 다른 부분과 영역 속에 묻혀 있었다(embedded). 인류 역사에서 오랫동안 시장 기능은 인간의 여러 경제생활 중에서도 주변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재화의 생산과 분배 활동을 규정하는 보다 중요한 방식은 시장을 통해 이루어지는 대신, 관습, 종교, 지배와 폭력 같은 비시장 원리에 따라 이루어져 왔다고 본다.
반면, 자기 조정적 시장에 기반을 둔 경제 제도, 즉 19세기적 시장경제 체제에서 이루어지는 시장은 이전 시대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의미로 규정된다. 자기 조정적 시장은 생산, 교환, 분배의 모든 활동을 – 외부 도움이나 간섭 없이 – 오직 시장가격에 따라 조절, 통제하는 인류 역사상 새로운 경제 제도로 이해된다. 이때 시장은 시장 체계 안에서 행동하는 모든 인간을 합리적이라고 가정하며, 재화의 가격은 이들의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는 점에서 자동 형성되는 것으로 상정된다. 이전 시대의 시장이 사회 속에 묻혀있거나 시장이 아닌 정치 제도에 부속되어 있었던 것과는 달리, 19세기 시장경제는 정치와 사회적 규제에서 독립하여 시장 원리가 스스로 모든 경제활동을 조절 통제하는 독자적 체계로 간주되기 시작한다.
폴라니가 ‘경제적 자유주의자’로 지칭한 19세기적 시장경제론자들에 따르면, 시장 원리는 인류 역사 전반에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현상으로 인식된다. 자유주의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A. Smith)는 사회 분업은 어떤 물건을 다른 물건과 거래 교환하려는 인간의 보편적 성향, 즉 시장의 존재에 기인한 것으로 본다. 이 견해는 훗날 ‘경제적 인간’이란 개념을 낳았고 스펜서(H. Spencer), 미제스, 리프만(W. Lippmann) 등에 의해 계승된다. 하지만 폴라니는 이들의 분석과 예측이 19세기 시장경제 체제에서는 적중했을지 모르나 그 이전 시대 경제에 대해서는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폴라니는 교역 성향이 초기 인류의 경제생활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적용되는 원리, 즉 자연적 보편적 인간 본성으로 규정하여 원시 경제 시대까지도 자기 조정적 시장론을 확대 적용하는 것은 오류라고 비판한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폴라니는 원시 경제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를 통해 오랫동안 인간의 경제생활이 19세기처럼 이윤 동기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밝혀낸다. 원시 경제 체계에서는 이윤 행위가 금지되고 흥정은 비난 받았으며 무상 제공만이 미덕으로 여겨진다. 폴라니는 교역, 거래, 교환하려는 성향은 보편적으로 나타났다기보다는 경제 체계가 사회 조직의 질서와 통합을 도와주는 보조 기능에 머물렀다고 지적한다.
한편,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은 경제행위의 안정성과 통일성은 오직 자기 조정적 시장을 통해서만 획득 가능한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폴라니는 – 고고학, 인류학, 경제사학의 연구 성과에 근거해서 – 경제 통합이 이루어지는 형태와 방식에는 교역 원리뿐 아니라 호혜, 재분배, 집안 살림 등 다양한 행위 원칙이 있어왔다는 사실을 반증으로 제시한다. 호혜(reciprocity)는 대칭 관계에 있는 개인 또는 집단 사이의 재화와 용역이 이동하는 방식인데, 이 원리에 따라 각 부족 분파는 다른 부족 분파와 짝을 이룸으로써 이윤 개념 없이도 재화와 용역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예는 남서태평양의 트로브리안드 섬의 쿨라(Kula) 교역에서 발견된다. 이들은 이웃 섬을 방문하여 붉은 조개 목걸이와 흰 조개 팔찌를 주고받는데, 이러한 선물 교환의 결과로 쿨라 교역에 참가하는 사람 간에 유대가 강화된다.
재분배(redistribution)란 중앙집권기구를 매개로 재화가 이동하는 양식(樣式)으로, 예컨대 부족 사회의 족장이나 고대 국가의 왕에 의해 재화와 용역이 징발된 후 이것이 다시 구성원에게 분배되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재분배는 지리적으로 분화된 생산자 집단을 추장이나 왕 등이 결합하도록 매개해줌으로써 효과적 분업과 경제 통합을 창출하는 방식이다. 또한 이를 통해 재분배를 담당하는 추장이나 귀족, 왕 등의 정치 권력이 증대되는 것이 보통이다.
집안 살림(householding)이란 가족과 같은 폐쇄적 집단 간의 자급자족을 위한 경제행위인데, 이는 이윤 동기가 아니라 구성원의 물질적 욕구 충족 필요에 기인한다. 교역(barter) 원리에서 강조되는 개념, 즉 이윤을 위한 생산, 경제적 보상을 얻기 위한 노동, 공동체 사회와 유리된 경제 체계라는 생각은 초기 인류에게는 매우 낯설었다. 폴라니에 의하면 유럽에서조차 봉건제가 종언을 고하기까지 대부분의 경제 체계는 시장 원리에 기초를 두었다기보다 호혜, 재분배, 집안 살림이라는 행위 원칙의 다양한 조합에 바탕을 두고 조직되어 왔던 경우가 허다했다.
폴라니는 『초기제국의 교역과 시장』(1957, pp. 243-270)에서 ‘형식적 의미의 경제’와 ‘실제적 의미의 경제’를 구별하고 경제를 실제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더욱 발전시킨다.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은 경제란 제한된 자원으로부터 최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양한 대안 가운데 가장 좋은 행동을 선택하는 행위로 정의한다. 이들은 널리 알려진 대로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얻으려는 것을 가장 합리적인 경제행위로 규정하고 이 가정에 따라 인간의 경제행위를 보편화하는 접근법을 취한다. 폴라니는 경제에 대한 이러한 형식적 의미의 개념 규정이 경제의 참뜻을 왜곡한다고 비판한다.
형식적 의미의 경제란, 인간이 화폐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행동한다는 가정에 근거하며 재화와 용역의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는 시장의 존재를 상정한다. 형식적 의미의 경제는 시장에 의해 ‘통제-규제-인도’되는 시장경제 체제에서는 타당성을 갖는다. 하지만 이를 역사를 초월한 보편성을 가진 개념으로 사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 폴라니의 생각이다. 그에게 ‘실제적 의미의 경제’란 인간이 자연 혹은 사회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과정, 특히 그 상호작용이 인간에게 물질적 욕구 충족 수단을 제공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따라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자연과 동료 인간에게 의존하면서 물질적 욕구를 충족하려고 벌이는 모든 활동은 경제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의 경제 개념을 사용해야만 우리는 과거와 현재의 모든 역사적·경험적 경제 현상을 편견 없이 연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장 기구와 시장 원리가 작동하기 시작한 19세기 이후에는 형식적 의미의 경제 개념을 적용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폴라니는 그 이전의 비시장 제도를 이해하는 데는 실제적 의미의 경제 개념을 분석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은 시장경제를 보편적이고 자연적이며 합리적인 사회질서로 간주하고 인류의 초창기 경제생활은 일시적이고 예외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한다. 그에 대해 폴라니는 비시장경제가 오히려 인류에겐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사회질서였고 시장경제야말로 19세기에 이루어진 예외적이고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자기 조정적 시장은 근대 서구 문명의 독특한 현상이다. 근대 이전에도 시장은 존재했다. 그러나 시장이 사회에서 분리되어 독자적인 행동 원리가 적용되는 장(場)으로 기능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이후의 일이었다면서 폴라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모두가 너무 쉽게 망각하는 사실이지만, 시장경제는 우리 자신의 시대 이외에는 이제껏 어떤 시대에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우리 시대에도 단지 부분적으로만 존재하고 있는 제도적 구조다.”
폴라니에 따르면 자기 조정적 시장은 두 가지 독특한 속성을 갖고 실제적 경제를 형식적 경제 요건에 맞도록 변형·통제하는 속성을 지닌다. 첫째로 그것은 경제를 일체의 외부 간섭 없이 오직 시장가격에 의해서만 지배되는 체제, 즉 자기 조정 체제로 만들고자 한다. 둘째로 그것은 다른 모든 사회 제도를 시장의 자기 조정적 필요에 맞게 변형 통제하려 한다. 바로 이 점이 자기 조정적 시장에 바탕을 둔 경제가 비시장경제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호혜, 재분배, 집안 살림 원리에서는 경제가 사회 속에 파묻혀 그 일부분으로 작용하며 경제행위와 경제 기능만 담당하기 위해 독자적 제도를 창출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부족장이 구성원에게 사냥감이나 수확물을 재분배하는 경제행위는 정치행위와 구분되지 않았고, 경제행위는 오히려 통치의 일부로 수행되었다. 반면 교역 원리는 사회에서 독립된 시장이라는 특수한 제도를 창출했을 뿐 아니라 사회 전체를 자신의 필요에 맞게 재조직했다. 왜냐하면 일단 자기 조정적 시장이 형성되면 사회는 경제 체계가 독자적 법칙에 따라 기능하도록 허용하는 그런 방식으로 재구성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회 전체가 – 마치 시장의 부속물처럼 – 시장이 잘 기능할 수 있도록 움직이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경제는 더 이상 사회관계 속에 묻히지 않고 오히려 사회관계가 경제 체계 속에 파묻히게 된다. 자기 조정적 시장 체제의 형성은 이전 사회를 ‘시장화’하고 이는 곧 기존 사회가 파괴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시장경제주의의 출현이다.
자기 조정적 시장은 전적으로 19세기의 산물이다. 중세 도시에서도 시장이 존재했고 그 범위가 더욱 확대되었지만 그것을 자기 조정적 시장이라고 할 수는 없다. 중세 유럽의 도시는 한편으로 시장의 산물이자 수호자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시장이 인근 농촌으로 확대 침투해 들어가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이기도 했다. 중세 도시는 인근 농촌에 대해 정치적·군사적 영향력을 발휘하여 국지 교역을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도시와의 원격지 교역은 통제하기 힘들었다. 따라서 도시는 국지 교역과 원격지 교역을 엄격히 분리 단절함으로써 유동 자본의 위협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하고자 했다. 이처럼 도시는 시장을 보호하면서도 그 확대를 가로막는 이중 기능을 가졌다.
국지 교역과 원격지 교역 간의 경계선을 깨고 전국 규모의 시장을 형성한 것은 중상주의 국가 체제였다. 15-16세기에 중상주의 국가는 도시의 특권과 텃세를 부수고 전국적인 국내시장을 형성한다. 도시의 각종 제한 조치는 제거되고 농촌과 도시의 구별도 없어졌으며 경쟁 원리가 도입된다. 그러나 중상주의 시기의 국내시장은 – 어느 정도까지는 그 전보다 경쟁적이었지만 – 여전히 전통적 요소가 잔존했고 국가의 강력한 통제를 받고 있었다. 중상주의 시기에 실행된 교역 자유화는 시장 기구를 도시의 인위적 통제로부터 해방시킨다. 그러나 시장에 대한 각종 규제는 오히려 그 폭이 확대되고, 여전히 통제적 시장으로 남아있었다.
18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통제적 시장에서 자기 조정적 시장으로의 이행이 시작된다. 정교한 기계 설비의 발명으로 중상주의가 쇠퇴하고 공장제가 도입된다. 이와 함께 재화뿐 아니라 노동, 토지, 화폐라는 생산요소가 상품으로 간주되고 시장에서 매매되기 시작한다. 원래 노동, 토지, 화폐는 상품이 아니었지만 이제 노동 가격은 임금으로, 토지 가격은 지대로, 그리고 화폐 가격은 이자란 이름으로 시장에서 판매되기 시작한다. 생산의 결과물인 재화만이 아니라 생산에 필요한 모든 생산요소가 시장에서 상품으로 취급됨으로써 마침내 시장은 외부 간섭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자기 스스로 조절 통제하는 자기 조정적 시장으로 전환되기에 이른다. 나아가 자기 조정적 시장은 노동, 토지, 화폐라는 허구적 상품을 통제함으로써 마침내 인간, 자연, 생산 조직이라는 모든 영역을 그 지배권에 둘 수 있게 된다.
자유주의 시장주의자들은 자기 조정적 시장이 확립되면 보편적 진보와 번영, 그리고 개인의 자유가 (자동적으로) 다가올 것으로 내다본다. 폴라니는 그와 반대로 만약 시장 사회화로 야기될 사회 해체 위험에 대응해 일어난 자구적 사회 운동과 각종 정치경제적 대응책이 없었더라면 일찍이 영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가 당면했을 법한 사회 재앙에 대해 엄중 경고한다. 시장화는 시골 사람을 슬럼 속에 가두어 인간답지 못한 생활환경 속으로 내팽개치고, 노동자를 소위 공업 도시라는 새로운 폐허 속으로 모여들게 한다. 폴라니는 영국 국토의 대부분이 ‘악마의 맷돌’1)이 토해 낸 탄가루와 쓰레기 더미로 급속히 황폐화된 현실을 개탄한다. 또 산업혁명의 결과, 국부의 총량은 증가했지만 개별 노동자의 생활은 오히려 더 어려워진 사실을 지적한다. 여태까지 공동체적 부조와 보호를 받아왔던 가족은 산업혁명의 물결에 휩쓸려 정착지를 떠나 이리저리 방랑한다.
산업혁명은 거대한 사회 혼란을 가져왔고 빈곤 문제는 이러한 혼란의 경제적 측면에 지나지 않았다. 오웬(R. Owen)이 경고한 바를 상기하면서 폴라니는 만약 시장의 사회 파괴 작용을 제어할 수 있는 보호적 반작용과 각종 구제 입법 운동이 정치·사회 안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면 자기 조정적 시장 체계는 인간 사회를 파멸시키고 말았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인간이 자연 상태로부터 타고난 보편 성향이라고 가정된 이윤 동기에 따라 작동하는 자기 조정적 시장 메커니즘은 19세기 전반 영국에서 먼저 사회 법칙으로 제도화된다. 그리고 약 20년 뒤 유럽대륙과 미국에까지 도달한다. 시장 사회는 이처럼 영국에서 탄생한다. 그러나 시장 사회의 내재적 취약성과 이중 작용, 그리고 사회 파괴의 폐해 때문에 비극적 분규의 씨앗이 싹튼 곳도 영국이 포함된 유럽대륙이었다. 19세기는 영국의 세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산업혁명은 영국의 사건이었다. 시장경제, 자유무역, 금본위제 등은 영국의 발명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는 20세기에 이르러 곳곳에서 무너져 버린다. 그래서 폴라니는 19세기 문명, 즉 근대(modernity)의 흥망성쇠를 가져온 장기 요인을 연구하자면 산업혁명의 출생지인 영국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역서, p. 47).
폴라니는 19세기 서구 사회의 정치와 경제 제도는 두 개의 상충된 조직 원리와 운동에 의해 추동되었다고 본다. 하나는 앞서 정리한 것처럼 경제적 자유주의 원리(economic liberalism)에 기초하여 자기 조정적 시장의 확립과 그 꾸준한 확대를 목적으로 추진된 운동이다. 이 운동은 상업계급의 지지를 받아 자유방임과 자유무역을 주요 정책 수단으로 내세운다. 자기 조정적 시장 원리는 재화뿐 아니라 인간, 자연, 생산 조직 등 모두를 상품화하면서 유럽에서부터 세계 전역으로 번져 나간다. 인간은 노동이란 이름으로, 자연은 토지라는 이름으로 판매 대상이 된다. 폴라니는 만약 사회가 오직 이러한 원리로만 조직되어 갔다면 인간과 자연은 시장의 사회 파괴 작용에 의해 일찌감치 파멸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내다본다.
다른 하나의 조직 원리는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시장의 무자비한 확대를 저지하고 시장 사회화에 기인하는 파괴적 결과로부터 인간의 실제적 경제생활을 보호하고 사회 안정과 통합을 수호하려는 사회 방어(social protection) 운동이다. 이제 폴라니가 이른바 이중 운동(double movement)이라 불렀던 현상 중 사회 방어 운동에 대해 살펴보자.
사회 방어 원리는 생산 조직을 수호하고 인간과 자연의 보호와 보존을 목적으로 내세우며, 시장 확대로 인해 직접적으로 피해를 받는 노동계급과 지주계급이 주도했다. 다양한 투쟁 방법이나 지원 수단을 구사하고, 보호 입법(protectivelegislation), 감시 및 규제 단체(restrictive associations), 그 외 각종 개입 장치 등을 방어 운동 및 정치적 자원으로 동원했다(원서, p. 132/역서, p. 168). 국가의 개입을 거부했던 자유주의 진영과 달리 사회방어론자는 국가로 하여금 각종 사회 입법 조치와 정치 규제 장치를 강구하며, 시장 파괴 작용으로부터 사회를 지키고 통합을 달성하는 데 주력하도록 압박한다.
자기 조정적 시장 파괴 작용에 대항해 일어난 최초의 조직적 운동은 영국의 스피남랜드 법(Speenhamland Act)으로 나타난다. 18세기 말 영국 사회는 산업혁명이 한창이었고 시장 제도도 급속히 발전한다. 토지와 화폐에 뒤이어 노동이 상품으로 매매되는 과정이 본격화되면서 민중의 생활양식은 급속하게 황폐화되고 사회 조직도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정주법이 정한 교구농노제가 완화됨으로써 민중은 자신의 생활 터전을 떠나 일자리를 찾아 전국을 누비며 방랑한다. 거리에는 걸인이 넘쳐나고 빈곤과 굶주림도 만연한다.
민중 생활의 파탄을 방지하기 위해 1795년 5월 6일 뉴버리 근처 스피남랜드의 펠리컨장에 모인 버크셔의 치안판사들은 임금부조금 액수를 빵 가격에 연동해 정하면서 빈민에게는 개인 수입과 관계없이 최저소득이 사회에 의해 보장되어야 한다고 결정한다(역서, p. 125). 이 결정은 곧바로 근처의 농촌과 여러 공업 지역으로 확산되어 스피남랜드 법이 된다. 이 법의 시행으로 노동자는 누구나 일정 수준의 소득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자선과 온정주의에 바탕을 둔 스피남랜드 법은 생존권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노동 시장의 파괴 작용에서 민중 생활을 보호하고자 했다. 이 법이 시행된 결과 빈곤과 굶주림은 한동안 완화되었고 경쟁적 노동 시장의 형성은 상당 기간 지연된다.
그러나 1820년대에 이르러 스피남랜드 법의 문제점은 여러 곳에서 드러난다. 노동자는 누구나 교구(敎區)에서 일정한 액수의 급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열심히 일을 하지 않았다. 고용주들은 아무리 임금을 낮게 매겨도 그 부족분을 공익 자금에서 충당해 주었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임금을 낮게 책정하려 했다. 경쟁적 노동 시장 형성이 지연된 만큼 구빈세액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재정을 압박했다. 이 비경제적 제도는 노동생산성을 떨어뜨려 국가의 조세수입을 격감시키고 결국 노동자와 그 가족에게 지급되는 임금부조금 액수도 그만큼 줄어들게 만든다.
1815년에서 1830년 사이에 스피남랜드 법의 급부금 액수는 3분의 1정도 감소한다. 1818년에 빈민 구제에 사용된 총액은 약 800만 파운드이다. 이 수치는 점차 하락하여, 1826년에는 600만 파운드 이하로 낮아진다(역서, p. 125). 이 법은 결국 노동자를 게으르고 무능하며 임금부조금에 기대는 비열한 존재로 타락시키고, 전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 계급 형성을 가로막기도 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된다.
이즈음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이 노동 시장 형성을 가로막는 스피남랜드 법 철폐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이게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타운센드(W. Townsend)는 “빈민을 자극하여 일터로 보낼 수 있는 방법은 기아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나선다(역서, p. 145). 그는 배고픔을 피하도록 사람을 노동 시장으로 내보내는 일은 혼란과 폭력을 수반하는 법이나 강제 조치와는 달리, 가장 온건하고 지속적인 방법으로 노동자를 근면하게 일하도록 독려하는 자연스럽고 탁월한 효과를 발휘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이러한 논거에 의거해서 노동은 시장에서 가격을 결정할 수 있는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되어야 하며, 실업자 구제, 최저임금, 생존권 보장 등은 철폐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입법자를 압박했다.
타운센드를 비롯한 버크(E. Burke), 벤담(J. Bentham), 맬서스(T. R. Malthus), 리카르도(D. Ricardo) 등은 방법은 달랐지만 모두 경제적 자유주의자로서 생물학적 접근을 통해 스피남랜드 법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역서, pp. 148-161). 이들은 입을 모아 “시장에 빈민에 대한 책임을 떠맡겨라, 그러면 모든 것이 스스로 조정될 것이다!”라는 구호에 동참했다.
1820년대 후반 영국의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은 한결같이 경쟁적 노동 시장, 자동적 금본위제, 국제적 자유무역이라는 세 교리를 정책으로 표방하고 나선다. 노동은 시장에서 가격이 정해질 수 있어야 하고, 화폐 창조는 자동적 메커니즘에 따라야 하며, 재화는 방해도 특혜도 받지 않고 국가 간에 자유롭게 이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1830년대에 이르러 이러한 신조는 전투적 열정처럼 분출한다. 일한 만큼만 소득이 부여되어야 하고 산업 노동의 시장화를 방해하는 모든 법률과 제도는 공격과 철폐 대상이 된다.
1832년 중산계급이 정치적 승리를 거두자 새 의회는 즉시 과거 법률을 폐기하고 새로운 법률을 제정한다.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의 교리는 수정 구빈법(1834), 필(Peel) 은행 조례(1844), 반(反)곡물 법안(1846)이라는 3대 법안에 의해 마침내 일관된 정책으로 구체화된다. 그러나 스피남랜드 법 폐지는 인간을 지켜주던 사회의 보호막을 제거하고 노동자를 약육강식의 냉혹한 법칙 속으로 내던지는 행위에 다름없다는 것이 훗날의 결과로 입증된다.
수정 구빈법은 빈민에 대한 임금부조금 제도를 폐지함으로써 스피남랜드 법이 가로막았던 경쟁적 노동 시장이 형성될 수 있도록 길을 터준다. 필 은행 조례는 화폐 창조를 자동 메커니즘에 맡김으로써 자동적 금본위제를 가능하게 했고, 반곡물 법안은 곡물에 대한 국가의 보호무역 조치를 철폐함으로써 자유무역의 길을 열어준다. 이로써 1795년 스피남랜드 법 제정을 통해 노동의 상품화를 막으려던 사회의 자기방어 운동은 경제적 자유주의의 거센 파도에 밀려나고 만다. 토지와 화폐에 이어 노동이 상품화됨으로써 마침내 1840년대에는 자기 조정적 시장 형성이 완결되어 가는 듯했다.
폴라니에 의해서 예견된 이중 운동론에 따르면 시장 사회화는 시작부터 파국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산업혁명의 결과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고 국가의 부(富)도 급속히 증가하여 경제적으로 부강해지는 시대에 어떻게 파국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폴라니는 파국의 진정한 원인이 경제적 착취 때문이 아니라 사회 제도의 기본 틀을 급격하고 격렬하게 붕괴시키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리고 경제적 부의 증가는 개인의 직업 안정과 보호, 거주생활 형태와 환경 보호, 사회 안정 등 본원적 생활 가치와 비교할 때 오히려 이차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조정적 시장 성립과 확대는 인간적 삶에 필요한 환경을 황폐화하고 사회 유대와 통합 기반을 무너뜨린다. 예를 들어 19세기 후반 인도의 랭커셔에서 민중이 대거 아사(餓死)한 것은 경제적 착취 때문이 아니라 촌락공동체가 철저하게 무너져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역서, p. 199).
유럽 시장 자본주의의 황금시대를 풍미했던 자기 조정적 시장 파괴 작용에서 사회를 지키려는 움직임은 세 방향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이 운동은 한결같이 자기 조정 시장 기제를 수정하는 결과로 귀착되는데, 노동 분야에서는 사회입법 실시 운동, 토지에서는 곡물관세 부과 운동, 화폐 영역에서는 중앙은행에 의한 통화 정책이라는 국가의 보호주의 정책으로 나타난다.
첫째, 노동 시장에서 인간을 지키려는 노력은 영국에서는 오웬주의(Owenism)와 차티스트 운동이라는 노동조합 운동으로 나타났고, 유럽대륙에서는 각종 사회입법을 탄생시킨다. 오웬주의는 노동계급을 신자로 계승한 일종의 산업 종교였고 사실상 현대 노동 운동의 효시였다. 차티스트 운동(Chartist Movement)은 합법적 정치 참여 활동을 통해 노동자가 정부 결정에 영향을 행사하려는 정치적 투쟁이었다. ‘차티스트’란 이 운동의 강령이 되었던 ‘인민헌장(Peoples’ Charter)’에서 비롯된 용어인데, 1838년 법안 형태로 의회에 제출된 이 헌장은 오웬의 추종자였던 라베트(W. Lovett)에 의해 작성된다. 노동자들은 보통선거권 제도의 실시를 요구하며 의회에 청원 운동을 벌였다. 차티스트 운동은 초기엔 실패했지만, 후일 노동자에게 점진적으로 선거권이 확대됨으로써 애초의 목적을 달성한다.
영국의 경우와는 달리 유럽대륙의 노동자들은 스피남랜드 법이나 수정 구빈법 단계를 거치지 않는다. 그들은 농노의 지위에서 공장노동자 지위로 옮겨가면서 곧바로 선거권과 노동조합권을 갖게 되었고, 이로써 영국 노동자들이 경험한 사회문화적 파국을 우회 통과할 수 있었다. 영국 노동자들이 자구 수단에 의한 보호, 즉 노동조합에 더 의존한 반면, 대륙 유럽 노동자들은 국가 개입에 의한 보호, 즉 입법 조치를 통해 시장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영국에서도 대륙에서도 노동 가격은 더 이상 자기 조정적 시장 내부에서만 결정되도록 방임되지 않았고, 파업이나 협상 같은 시장 외부 요인에 의해 조정되는 입법적 보호 체제로 옮겨간다(역서 14장 참조).
둘째, ‘악마의 맷돌’로부터 자연을 지켜내려는 노력은 곡물관세와 토지입법 형태로 구체화된다. 토지는 원래 자연의 일부로 노동과 분리되지 않았다. 경제 기능은 토지가 지니는 여러 기능 중 하나에 불과했고, 토지는 인간의 생활터전이며 거주 장소로서 육체적 안전을 위한 자연 요건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자기 조정적 시장은 토지를 인간과 분리시켜 상품화하고 토지 생산물을 빼돌려 도시로 가져갔으며 이에 더해 잉여 생산 체계를 해외 식민지로 확대해 나간다. 토지 유동화의 결과, 농촌 인구는 격감하고 도시로의 집단 이주가 이루어지면서 농촌 사회는 철저하게 낙후·파괴된다.
이에 대응해 일어난 방어 운동으로 1870년대 영국에서는 계약 자유의 영역에서 농토를 분리하고, 농촌 생활 터전을 보호하기 위한 성문법이 제정된다. 같은 목적으로 각종 행정 조치가 취해지는가 하면, 외국 농산물의 자유 수입을 규제하기 위해 곡물관세를 부과하기도 한다. 봉건지주들은 토지와 토지 생산물이 자기 조정적 시장에 편입되지 않도록 토지 유동화를 지연시키고 농촌 사회의 붕괴를 가로막는 방어적 기능을 수행하기에 이른다(역서 15장 참조).
셋째, 시장에서 생산 조직을 지켜내려는 노력은 중앙은행에 의한 통화 정책으로 구현된다. 금본위제에서는 생산과 거래의 급격한 확대에도 불구하고 화폐량이 크게 증가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생산 조직체는 만성적 화폐 부족으로 고통을 겪게 되고, 디플레이션 현상으로 전반적인 가격 수준이 하락하자 자본주의적 기업은 도산 위기에 부딪친다.
자기 조정적 시장 체계가 자본주의 기업이 설 땅을 빼앗아버리는 사태가 벌어지자, 각국은 순수 금본위제 노선을 수정하여 지폐를 발행하고 통화량을 늘리는 정책으로 선회한다. 이렇게 해서 중앙은행 제도가 도입되고 할인율 인상과 통화 시장 조작 등 개입 정책을 통해 통화량을 의식적으로 조절해 나간다(역서 16장 참조). 예컨대 해외무역에서는 금본위제에 기초한 상품화폐를 적용하고 국내 거래에는 은행권에 기초하여 발행된 지폐가 사용되는데, 이 두 거래 간의 조화와 조정은 중앙은행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조치는 모두 시장의 파괴 작용으로부터 국내 생산 조직을 보호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폴라니는 19세기 후반, 구체적으로 1879-1929년 사이의 서구 사회는 – 앞서 논의한 이중 운동 원리 사이에 벌어진 모순과 긴장 때문에 – 한편으로는 ‘내면적 긴장’을 지닌 채 통합된 문명 단위를 유지해 나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각종 붕괴 징후’가 빈번한 사건으로 터져 나온 과도기 단계로 본다. 시장 자본주의 체제의 부작용이 사회 붕괴를 위협하는 한, 이에 대응한 사회의 자기 보호 운동은 시장화 성립을 봉쇄하거나 아니면 일단 성립된 시장의 자동 조절과 자유로운 기능을 제한하는 것을 의미한다(역서, p. 247). 동시에 사회 보호 운동과 각종 보호 조치의 결과는 시장의 자율 조정 기능 손상을 심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사회가 시장 메커니즘 요구에 조화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자기 조정적 시장 기능 손상은 내적 긴장을 누적시켜 나간다(역서 17장 참조).
노동과 토지의 자유로운 공급과 화폐의 무제한 공급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이 사라지자 사회 방어가 개시되었고, 노동과 토지에서의 사회 방어는 – 각각 사회입법과 곡물관세 등을 통해 – 보호주의를 강화한다. 특히 “화폐 시장의 자기 조정 기능”이 – 국가 간섭과 규제 강화 등에 의해 – 상처받으면서 정치적 간섭이 속속 등장한다(역서, p. 253). “국제적으로도 시장 기능의 긴장과 불완전성을 보완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 사용”되었고(역서, p. 254) 통화, 무역, 채무 관련 국가 간 분규에 함대를 파견하거나 포격 수단을 배치하는 등 간섭주의적 침략과 무력 수단이 빈번하게 이용되기에 이른다(역서, pp. 254-255).
같은 기간, 반세기에 걸쳐 시장 기능과 사회 방어 운동 간에 벌어진 긴장과 이중 운동에서 비롯된 각종 사건이 각국의 지역 특성과 시대 상황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발생한다. 폴라니는 이들을 주요 제도 영역별로 “붕괴에 대한 긴장”이란 제목 아래 18장에서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첫째, 국내 경제에서는 생산, 고용, 소득 감소 등과 같은 불균형 징후가 실업이라는 재앙으로 표출된다. 둘째, 국내 정치면에서는 계급 간 긴장으로 전형화된 갈등이 사회 세력 사이의 충돌과 교착 상태를 야기한다. 셋째, 국제 경제면에서는 환율에 대한 압력과 개입으로 유발된 긴장으로 인해 수출 감퇴, 교역 조건 악화, 수입 원료 부족, 해외 투자 손실 등 경제적 곤란 징후가 심화된다. 넷째, 국제 정치 영역에서는 제국주의적 대립으로 분류된 각종 국제적 사건과 긴장이 연이어 나타난다(역서, pp. 256-257). 긴장은 먼저 시장 영역에서 발생, 정치 영역으로 확산되고 사회 전체로 번지기 시작한다. 개별 국가 안에서는 세계경제가 기능을 지탱하는 동안에는 긴장이 잠재된 상태 속에서 기존 제도가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최후까지 근대 체제 존속에 버팀목 역할을 해주던 금본위제가 무너지자 궁극적으로 국내외 긴장은 폭발이 불가피했다(역서, p. 267). 앞서 지적한 세 가지 사회 방어 기제 가운데 화폐에 대한 국가 개입은 19세기 질서의 붕괴를 재촉한 결정적 요소로 작동한다. 토지와 노동에 대한 보호 조치는 그 여파가 주로 농민과 노동자라는 특정 계급에만 해당되는 사안이었다. 그러나 화폐에 대한 보호주의는 모든 기업가는 물론 여러 나라의 민중 생활 깊숙이 그 영향이 파급될 수밖에 없었다. 중앙은행 제도가 생겨나 각국 통화량을 임의 조정함으로써 자동 메커니즘에 의한 화폐 창조의 신화도 무너진다. 1931년에 영국이, 1933년 미국이 금본위제를 이탈해버리자 국제 경제 체계는 크게 흔들린다. 이리하여 20세기 초에는 과거 100년 동안의 평화를 떠받치던 네 개의 제도적 기둥 모두가 붕괴되기에 이른다.
새로운 위협 상황에 처해 각국은 한동안 전통 방식으로 세계경제 붕괴와 민주주의의 파탄을 예방하고, 국제 평화 유지를 위한 대응책을 강구하려 애썼지만 시장 체계 붕괴를 막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여 전쟁 상태로의 재돌입을 막아내는 일은 수포로 돌아간다. 시장 영역에서 발생한 긴장은 급기야 정치 충돌로 확대되고 마침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국제 사회는 붕괴가도에 돌입한다. 시장 체제라는 ‘환상(utopia)’위에 설계된 세계 질서의 마지막 보루가 무너졌을 때, 시장 문명 그 자체도 심연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 폴라니의 지적에 의하면 – “물질적 복지의 자동 증대만을 목적으로 한 무정한 제도의 맹목 작용”과 – 카(carr)가 내다보았던 것처럼 – 현실적 “권력 요소를 무시한 이상주의” 신조 위에 세워진 하나의 문명이 일어섰다가 마침내 그 기력을 다한 채 막을 내린 ‘믿기 어려운’ 역사, 즉 영국과 유럽 중심의 근대사가 끝나고(역서, pp. 267-268) 세계는 비로소 ‘거대한 변환’에 맞물린 새로운 역사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것이 제2부에서 폴라니가 끌어낸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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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거대한 변환을 논하다 (사회과학 명저 재발견 2,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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