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824. 묵상글 들 (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 진골에서 성골로. 등 )
----------------------------------------------------
21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진골에서 성골로
오늘 축일을 지내는 바르톨로메오가 요한 복음에서는 나타나엘인데
이 나타나엘을 오늘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진골이라고 칭찬하십니다.
신라시대에 진골과 성골 제도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저도 한 번 불러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를 그렇게 즉시 알아보는데
그는 주님께 대단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이렇게 편견을 가진 나타나엘이지만 주님께서는 정확히 알아보십니다.
잘 아시다시피 편견이란 선입견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잘못 보게 하고,
욕심이나 교만과 함께 잘못 보게 하는 것의 대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편견을 가진 사람을
거짓이 없는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까?
주님께서는 어째서 그를 거짓이 없는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시는 걸까요?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그의 편견은 개인적인 편견이 아닙니다.
우리의 편견은 보통 개인의 인격적인 결함에 의한 편견이지만
나자렛에서 좋은 것이 나올 수 없고 메시아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은
개인적인 편견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공통된 편견이었지요.
요한 복음 7장을 보면 예수님에 대해 일부의 사람들이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라고 얘기하고 있고
지도자들이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라고 단언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이런 편견의 소유자가 그런데 주님을 찾아 가서 만나뵙고는
편견이 깨지고 올바른 시각을 갖게 되고 마침내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제 생각에 이로써 나타나엘은 이스라엘의 진골에서 성골이 된 것입니다.
진짜 이스라엘 사람에서 이제 거룩한 이스라엘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거룩함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느님을 알아뵙는 것이요,
거룩하신 하느님을 알아보는 것은 거룩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며,
거룩하신 하느님을 알아보는 능력은
인간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이지요.
사도 베드로가 주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아보았을 때 주님께서
그것은 인간의 머리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알려주셔야 알 수 있는 거라고 하신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진골에서 성골이 된 바르톨로메오 축일을 지내며
우리도 하느님 나라의 진골에서 성골이 되라는 초대와 도전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런 초대와 도전 앞에서 우리는
진실한 사람이 되는 것도 어려운데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고 우리와 너무 동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요.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만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나타나엘처럼 주님을 찾아 가서 뵙고 나면 바뀔 수 있습니다.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가서 보라고 안내하고,
주님께서는 와서 보라고 초대하시듯 우리도
오늘 가서 보라고 서로 안내하는 자가 되고
와서 보라는 주님의 초대에 응하여 가기만 하면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오늘 나타나엘처럼 비록 편견이 있을지라도
와서 보라는 초대와 도전에 응답하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
21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가 보았다
‘百聞(백문)이 不如一見(불여일견)’이라 합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뜻입니다. 좋은 것을 보면 그것을 다른 이에게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필립보는 예수님을 보았고 그래서 나타나엘에게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하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필립보는 다시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하고 거듭 말했습니다. 결국 나타나엘은 필립보의 권고에 따라 발길을 옮겼고,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타나엘은 예수님께 하느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필립보의 거듭된 권고는 우리에게 주님을 전하는 데 있어서 인내를 가지고 전해야 한다는 깨우침을 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먼저 나타나엘을 알아보았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모든 것을 꿰뚫으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주님의 은총은 우리의 이웃을 통해서도 전해집니다. 그러므로 나의 은혜로움을 혼자 누리지 말고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의 삶의 모범을 통해 주님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변화된 나의 모습을 이웃이 보게 될 때 주님을 더욱더 갈망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가능한 한 논쟁을 피하고 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맺도록 인도해야 하겠습니다. '내 변화된 모습을 와서 보시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는 말에서 우리는 고정관념, 선입견이 얼마나 큰 장애를 가져오는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자렛이라는 별 볼 일 없는 동네에서 위대한 인물이 나온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생각, 메시아는 유다 땅 베들레헴 출신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주님을 알아보는 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개천에서 용이 나면 안 되나요?’우리 신앙생활 안에서도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편견은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고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열린 마음으로 상황과 사람,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1,51).하고 하느님의 현존을 보게 되리라는 약속을 해 주셨는데 이 말씀은 야곱의 사다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성조 야곱이 꿈에서 땅과 하늘을 잇는 층계를 보았는데, 그 위로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내용입니다(창세28,12-13). 그런데 여기서는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은 층계가 아니라 사람의 아들, 곧 예수님이십니다. 본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냥 스쳐보는 것과, 살펴보는 것, 꿰뚫어 보는 것은 의미가 달라집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나타나엘을 보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사람이나 사건, 삶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영적인 성숙을 이뤘으면 좋겠습니다. 나태주 시인은 ‘들꽃’이라는 시에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 보는 것도 좋지만 꿰뚫어 보아야 하느님의 섭리를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예수님 위에서 오르내린다는 말은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끊임없는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것과 예수님은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재자는 곧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매 미사 안에서 주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통해 기쁨과 평화를 누리고 구원을 체험하며‘와서 보시오’할 수 있기를 청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에게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라고 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것은 라삐 전통에서 “메시아를 갈망하며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한다는 뜻입니다.”메시아를 갈망하던 사람들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을 읽고 토론을 하였습니다. 바로 그런 나타나엘의 모습을 주님께서 인정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나타나엘처럼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나만의 고요한 자리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우리의 삶은 진실해지고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으며 마침내 그 삶을 주님께서 인정해 줄 것입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거짓이 없는 참된 신앙인이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21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오늘 우리는 바르톨로메오라고 여겨지는 나타나엘의 신앙고백과 증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증언하지 않고는 못 베기게 만들었을까?
오늘 <복음>은 바로 그 ‘만남의 신비’ 안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나타나엘은 필립보로부터 예수님께 대한 증언을 들었을 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라고 하며, 핀잔을 하며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와서 보시오”(요한 1,46)라는 필립보의 확신에 찬 초대에, 의혹과 편견을 지닌 채 마지못해 따라나섭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예수님과 두렵고 떨리는 ‘만남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그의 됨됨이와 그가 품고 있는 생각과 소원을 낱낱이 아시고,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신적인 전지함에 압도당한 나타나엘은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요한 1,48)하고, 당혹할 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요한 1,48)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나타나엘의 내면에는 예수님께 대한 모든 의혹과 편견이 일순간에 사라져 내리고, 마침내 믿음과 감격이 솟아났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그분께서 단순히 예지적임 측면에서 자신을 보기도 전에 “알았다”는 사실에서가 아니라, 의지적인 측면에서 이미 자신을 ‘주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데서 울려나오는 감격이었습니다. 이미 바라보고 계셨다는 사실,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나타나엘은 비로소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자신을 바라보고 계신 그분의 눈동자 안에서, 자신을 보았습니다. 동시에, 나타나엘은 그분 앞에서 자신이 온전히 드러나면서, 바로 그 분이 나를 온전히 아시는 나의 구원자요, 주님이심을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신앙을 고백하고 증언합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요한 1,49)
그야말로, ‘대전환’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것은 만남의 신비가 가져온 결과입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고 빈정거리던 그에게, 이제 ‘대역전’이 생긴 것입니다. 마침내 예수님과의 만남이 그를 전복시켰던 것입니다. 이 ‘거룩한 만남의 신비’가 바로 그로 하여금 믿음을 고백하고 증언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도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그분을 뵙는다면, 그분의 눈동자 안에서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바라봄입니다. 사랑하면 자꾸 바라보게 되는 거죠. 눈을 뗄 수가 없게 되는 거죠. 바로 지금 우리의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바라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스런 바라봄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우리에게도 그렇게 지금 이 순간 모든 의혹과 편견이 사라지고, 믿음과 감격이 샘솟을 것입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당신과의 이 거룩한 만남의 신비를 통하여, 당신 사랑을 퍼부으십니다. 그 사랑은 고백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고, 증언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듭니다. 이처럼, 우리들 사이의 만남 안에서도, 이러한 예수님과의 거룩한 만남의 신비를 담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1)
주님,
땅에서 열리는 하늘을 보게 하소서.
우리 안에 계신 당신을 보게 하소서.
우리의 마음이, 하늘이 열리는 자리가 되고
우리 일상의 삶이, 하늘이 열리는 장소가 되게 하소서.
우리가 만나는 이들과 우리가 하는 일 안에서
하늘을 열고 주님의 사랑을 만나게 하소서. 아멘.
----------------------------------------------------
21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돕는 일, 사도직
오늘은 나타나엘이라고도 불리었던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동지들과 함께 더운 햇볕을 피하여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로마제국의 불의한 식민통치를 성토하는 시국토론을 하던 모습을 보시고, 그의 정의감을 알아 보셨습니다. 당시 평균적인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응당 지녀야 할 시대정신의 소유자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눈여겨보신 그에게 이런 말씀으로 제자로 부르시겠다는 권유를 하셨습니다. “너는 앞으로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인데,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내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되리라”. 즉, 정의로운 사회의식만으로 해결할 수 없으니, 당신에게로 와서 하느님께서 인도하시고 천사들이 도와주는 그런 일을 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이를 거룩한 사도직이라 합니다.
사도직에서는 정의로운 사회의식을 기본으로 하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자신의 삶이 거룩하게 변화되는 체험을 목표로 합니다. 십자가로 부활하는 삶에서 이룩되는 이 사도직 활동은 매사에 현세적 이익을 도모하고자 하고 또는 기껏해야 사람들 사이의 옳고 그름을 다투는 현세적 정의의 사회의식에서라면 손해보는 인생이요 가시밭길 인생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소통하는 역동적인 사도직 인생은 현세에서 출세하거나 성공하는 삶을 목표로 하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영원히 사는 삶을 목표로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현세 안에서 십자가를 짊어질지라도 사도직을 행하는 당사자들은 부활의 은총이 가져다 주는 은총을 미리 누리고자 하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습니다. 사도직으로 말미암은 신적인 역동성으로 충분히 그 걱정을 보상받고도 남기 때문입니다.
사도직을 행한 이들의 삶에 대해 요한 사도가 예언자의 안목으로 묵시문학 표현으로 남긴 바를 현대적으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의롭고도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혼탁한 세상에 세워진 하느님 도성의 성문과도 같고, 삭막한 현대 물질문명을 인간다운 윤택함과 여유로움으로 떠받치는 주춧돌과도 같습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이익과 처지 그리고 지위 때문에 다투는 일은 세상 끝날까지 그치지 않고 일어날 터이지만, 그러한 갈등을 정의로움의 잣대만으로는 온전하게 해소하기 어렵습니다. 목표를 하느님과 영원한 생명에 둘 수 있는 거룩한 안목이 그래서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직의 존재 이유입니다.
----------------------------------------------------
21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조명언 마태오 신부님.
지난 8월 20일(금) 저녁에 아버님께서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급하게 병원에 가서 병자성사를 드렸습니다. 힘들게 눈을 뜨시고 저와 눈을 마주쳐주셨고, 성호를 긋고 싶으신지 손을 움직이시기도했습니다. 이렇게 좋아보이는 모습에 좀더 오래 우리 곁에 계실 줄 알았지만, 다음날 저녁 8시 47분에 주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작년 어머님께서 하늘나라에 가시고, 16개월만에 아버님께서도 하늘나라에 가시니 서운함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버님 상에 조문해주셔서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보내주셨고, 많은 기도를 해주셨기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늘 기억하면서 더 열심히 잘 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오늘 새벽 묵상 글을 시작힙니다.
진시황제의 분서갱유를 아실 것입니다. 사상을 탄압한 사건으로 실용 서적 외의 모든 책을 태우고, 유생을 구덩이에 산 채로 파묻었지요. 왜 진시황제는 책을 태우고 공부하는 유생을 죽였을까요?
사람들이 독자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찌 히틀러 역시 책을 태웠고, 우리나라 군사독재 시절에도 금서가 있어서 독자적이고 자유로운 생각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책을 읽고 공부하는 사람이 강하다는 것은 인류 역사 안에 분명히 드러납니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공감과 이해의 폭이 넓어지면서 더 나은 세상과 삶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꿈이 인간을 행동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했던 지배자는 그래서 책을 태우고 읽지 못하게 했으며, 꿈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을 제거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다고 해서 책이 완전히 없어질 수 있을까요? 또 사람들 모두를 자기 뜻대로 할 수 있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비극적인 종말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힘으로 누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를 통해서 함께 성장할 기회를 찾았어야 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했던 지도자들은 역사 안에서 이름을 날렸습니다.
나타나엘이 예수님을 소개하는 필립보를 향해 말합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이런 부정적인 생각으로 인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완전히 부정적인 사람은 아니었나 봅니다.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
예수님과 대화를 통해 마음이 열렸고, 그 열린 마음을 통해 주님의 사랑과 권능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과 권능은 우리 삶 안에서도 쉽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필립보의 말, “와서 보시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나타나엘이 예수님을 보러 갔기 때문에 신앙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열린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 볼 때 비로소 주님의 사랑과 권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힘으로 누르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그 반대로 사랑으로 감싸 안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함께 할 때 주님의 사랑과 권능을 내 일상에서 쉽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
스스로 만들어 내는 기회는 새 인생으로 향하는 첫걸음이다(메리 엘리노어 윌킨스 프리먼).
----------------------
독이 되는 부모
독이 되는 부모의 모습이 있다고 합니다. 그 모습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신처럼 군림하는 부모.
2. 의무를 다하지 않는 무능한 부모.
3. 아이를 조정하는 부모.
4. 잔인한 말로 상처를 주는 부모.
5. 폭력을 휘두르는 부모.
6. 술에 중독된 부모.
이러한 부모 밑에서 성장한 자녀들은 성인이 되어 반복적으로 잘못된 연애에 얽히거나 대인관계에서 심각한 문제를 겪게 된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이 과연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스스로를 성찰하면서 변화될 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로 자녀에게 힘이 되어주고 올바르게 성장시킬 수 있는 부모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훌륭하게 성장하는 자녀들이 많아지는 세상이 바로 올바른 사회가 될 수 있는 기틀이 되지 않을까요?
----------------------------------------------------
21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요즘은 ‘검색의 시대’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읽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읽기 전에 검색하고, 생각하기 전에 검색하고, 판단하는 대신에 검색합니다. 검색이 쉽고, 빠르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정보가 모여 있습니다. 저도 책을 읽으면서 관련된 궁금한 것이 있으면 ‘검색’을 하곤 합니다. ‘근대의 탄생’이라는 책이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라는 책을 이야기하면 인터넷을 통해서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를 검색합니다. 전 세계 코로나 현황도 실시간을 검색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백신 접종 현황도 실시간으로 검색할 수 있습니다. 여행가서 머물 장소도 검색을 통해서 알아 볼 수 있고, 예약도 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시대를 살면서 많은 사람들이 검색을 통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저는 검색의 시대에는 아직 초보자의 수준입니다.
신앙생활에도 검색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서울대교구는 98년부터 ‘굿뉴스’를 통하여 다양한 신앙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비대면이 일상이 되고 있는 요즘, 굿뉴스는 신앙에 목마른 분들에게, 영성의 갈증을 느끼는 이들에게 소중한 샘물이 되고 있습니다. 가톨릭정보, 자료실, 갤러리, 게시판 등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분당 요한 성당의 홈페이지를 방문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본당의 다양한 모습과 본당에 설치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가톨릭평화방송은 팬데믹 시대에 주교님과 신부님들의 미사를 방송과 유트브를 통해서 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록 성체를 모시지는 못하지만 방송미사를 통해서 말씀을 듣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미주가톨릭평화신문도 홈페이지를 통해서 지면을 검색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의 인사이동에도 검색은 함께 합니다. 신자 분들은 검색을 통해서 아직 오지 않은 신부님에 대해서 이미 알기 시작합니다.
검색의 시대가 장점이 있다면 단점도 있습니다. 정치인, 연예인, 유명인들은 본의 아니게 정보가 노출되기 마련입니다. 지금은 잊어버린 일들도 검색의 장소에는 남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젊은 시절에 했던 실수와 허물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 검증이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영상이 공개되기도 합니다. 수입의 수단이 되기 때문에 비방과 원색적인 내용을 검색의 공간에 올리기도 합니다. 잘못된 정보, 왜곡된 정보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그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확증 편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믿는 것만 검색하려 합니다. 자기가 검색하는 것만 믿으려 합니다. 이런 경우 검색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검색이라는 동굴에 갇혀서 밝은 세상을 외면하거나 보지 못하기도 합니다. 검색을 통해서 옥석(玉石)을 구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도 ‘검색’을 이야기합니다.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사도들은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주님을 위해서 받는 박해를 견디어냈고,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그런 사도들의 뜨거운 신앙의 열정과 삶이 하느님의 도성에 기록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이 기록한 것은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바로 그 예수님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나의 행위와 삶이 하느님의 도성에 기록되고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신 분이시기에 회개하고, 뉘우치는 이들의 허물은 묻지 않으십니다.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시는 아버지처럼 하느님께서는 진심으로 뉘우치는 우리를 받아 주시며, 하느님의 도성에 그 이름을 기록하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
21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와서 보시오.”
- 늘 새로운 주님과의 만남, 형제들과의 만남 -
새벽에야 어제 받은 친필 편지를 개봉했습니다. 이렇게 친필 편지를 받기는 올해 들어 처음입니다. 반가운 자매님을, 주님을 새롭게 만나는 감동이었습니다. 소박한 글씨체에 내용도 참 짧고 아름답고 담백했습니다. 당분간 게시판에 붙여 놓고 감상하려 합니다.
-“찬미 예수님.
신부님의 강론집을 읽으니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언제 어느때 오셔도
신부님은 “예”하고 준비되어 있는 것 같아요.
하나의 망설임 없이---
신부님, 저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셔요.
고맙습니다.-
(예수의 병란 젬마 작은 자매 올림. 2021.8.17.)
꼭 그렇게 됐으면 소원이겠습니다. 편지를 통해 자매님을, 주님을 새롭게 만나는 감동이었습니다. 어제는 병원에 다녀오다가 내내 망설이던 중, 며칠전 선종하신 사촌 형님이 계신 장례식장에 조문을 다녀왔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조심스럽고 상황이 불편하여 주저했습니다만 마음이 편치 않아 즉시 결행했습니다. 사촌이 너무 많고 곳곳에 흩어져 살기에 아마 아주 오래 전 평생 한 번 만났을 사촌 형님이요, 마지막 형님을 만나는 마음으로 조문했습니다. 세례명도 기막힌 “그리스도”였습니다.
새삼 같은 형제들과 매일 만나는 수도공동생활이 얼마나 특별한 주님의 배려인지 깨닫게 됩니다. 문제는 어떻게 언제나 ‘늘 새로운 만남’이 되게 하느냐에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 써놨던 시도 생각납니다. 매해 거기 그 자리에 어김없이 폈다지는 야생화 꽃들을 보며 쓴 시입니다.
-“꽃같은 만남보다
더 좋은 만남이 있으랴
꼬박 일년 기다려 피어난 꽃들이다
꼭 일 년만의 만남이구나
메꽃, 달맞이꽃, 달개비꽃---
모든 꽃이 그렇다
꽃같은 반가운 만남이 되려면
일 년은 기다려야 하는구나!”-2001.8
그러고 보니 성인들과의 만남이 그러합니다. 오늘 8월24일은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에 의해 주님께 인도된 나타나엘과 동일 인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아르메니아에서 순교했고 성 유대 다태오와 함께 아르메니아 교회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는 사도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성령강림후 동쪽으로 메소포타미아, 이란을 거쳐 인도까지 복음을 전했다 합니다.
열두 사도중 필립보와 늘 함께 언급되는 사도가 바르톨로메오입니다. 일년 만에 오늘 미사전례를 통해 바로톨로메오 사도를 만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인공 나타나엘과 주님과의 만남이 늘 새로운 영감을 줍니다. 나타나엘의 이름 뜻은 ‘하느님의 선물’이라하니 우리 또한 하느님의 선물인 나타나엘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나타나엘을 주님께 인도하는 필립보 또한 우연이 아닌 하느님께서 안배하신 섭리의 인물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성소 역시 우연이 아니 하느님 섭리의 배려로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대화 모두가 상징적 의미가 참 깊습니다. 나타나엘은 필립보의 영적 도반이었던 듯 싶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분명 신선한 충격적 만남이었던 듯 싶습니다. 이런 주님과의 아름다운 만남을 나누고 싶음은 누구나의 영적 본능입니다. 필립보의 소개에도 불구하고 나타나엘은 여전히 편견의 무지에 눈이 가린 모습이요 이 또한 우리의 보편적 모습입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나자렛 이웃 마을 갈릴래아 카나 출신 나타나엘이기에 당연한 대답일 것입니다. 이어지는 필립보의 널리 회자되는 말마디입니다.
“와서 보시오.”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보고 배우는 효과 이상인 것은 없습니다. 눈으로 보고 배우며 살고자 참 스승을 찾았던 무수한 구도자들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와서 보시오.”라는 주님의 무언의 침묵의 초대에 응답하여 미사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이런 살아 계신 주님과의 새롭고 놀라운 기쁨과 축복의 만남이 없다면 이 삭막한 광야인생 얼마나 고단하고 고달프겠는지요. 주님을 만나지 못해 세상 것들에 중독이 되어 자기를 잃고 괴물이 되고 폐인이 되어 사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연한 만남은 없습니다. 간절히, 항구히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을 만납니다. 필시 나타나엘은 끊임없이 내적으로 주님과의 만남을 갈망하며 공부했을 것입니다. 주님과 나타나엘의 만남은 늘 새로운 감동입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찬사도 없을 것입니다. 바로 주님을 통해 참 나를 만난 나타나엘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참 나를 발견하는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거짓이 없는 진실과 순수의 참 이스라엘 사람인 나타나엘은 바로 우리 수도자는 물론 신자들의 롤모델입니다.
이미 전부터 한결같은 진리의 수행자 나타나엘을 눈여겨 보신 주님이심이 분명합니다. 누구보다 우리를 잘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전광석화, 편견의 무지에 눈이 가렸던 나타나엘은 마음의 눈이 활짝 열려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니 이 또한 주님의 은총입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말그대로 참사람과 참사람, 마음과 마음의 만남입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내가 누구인지 압니다. 예수님을 알아가면서 참 나를 알아가니 예수님 탐구와 참나의 탐구는 함께 갑니다. 그러니 주님과의 만남은 한 두 번의 만남이 아니라 평생 만남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과 늘 새롭게 만나야 형제들과도 늘 새롭게 만날 수 있습니다. 이래야 웅덩이에 고인 썩은 물의 안주가 아닌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내적 여정의 정주생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매일 바치는 공동전례의 궁극 목적도 주님은 물론 형제들과의 새로운 살아 있는 만남에 있음을 봅니다.
영성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부익부 빈익빈의 진리입니다. 주님은 한결같은 진리의 탐구자 나타나엘에게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다음 말씀은 역시 나타나엘뿐 아니라 항구히 주님을 찾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볼 것이다.”
바로 예수님 자신이 우리 모두의 유일한 하늘문이자 하늘길이요 하늘에 이르는 사다리라는 고백입니다. 바로 이런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아마 세상 어디에도 이런 전례은총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내 안에 있고 답도 내안에 있습니다. 참으로 답은 하늘문이자 하늘길이신 주님을 향한 끊임없는 자아초월自我超越, 즉 역설적으로 ‘내려감으로 올라가는’ 겸손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제1독서 요한 묵시록 역시 주님과 요한의 살아 있는 만남을 보여줍니다. 주님과 살아 있는 만남을 통해 영의 눈이 활짝 열려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 오는,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는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을 체험하는 사도 요한입니다. 천상 예루살렘을 향해 순례 여정중에 있는 우리 교회의 심오한 비밀을 보여줍니다.
바로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새 예루살렘을 앞당겨 살게 합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과의 만남, 형제들과의 만남을 통해 주님과의 우정, 형제들과의 우정을 날로 새롭게, 깊게 해주시는 성체성사의 주님이십니다. 아멘.
----------------------------------------------------
21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행복이 넘치는 어느 만남을 보여 주십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47)
필립보의 권유로 당신을 만나러 오는 나타나엘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당신께 나아오는 피조물을 보고 기뻐하시는 창조주의 탄성이라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나타나엘에게서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전형을 보십니다.
"거짓이 없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당신의 소유로 삼으시고 하느님 백성이 되어기기 위해 지켜야 할 지침들을 내려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머니 배 속에서 지음 받을 때부터 존재의 뼛속까지 하느님 앞에 활짝 펼쳐져 있는 존재입니다. 그분께는 숨겨진 것도 감추인 것도 하나 없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백성이 무엇보다 앞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당신의 뜻을 찾는 충실한 자녀이기를 바라십니다. 나타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는 것은 일상의 중요한 순간을 떼어 하느님 앞에 머무르며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지요.
삶의 많은 부분을 일로 보내는 이도 있고 돈 버는 데 몰두하는 사람도 있지요. 떠들썩한 유흥과 어울릴 사람을 찾는 이도 있고요. 그 중에는 성실하게 진리를 찾고 말씀에 머무르며 사랑을 실천하는 이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타나엘에게서 그리스도의 고귀하고 맑은 신부다움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 1,49)
이에 나타나엘이 화답합니다. 그 역시 기쁨에 차서 외칩니다. 평생을 기다려 온 이스라엘의 구원자, 메시아를 만난 기쁨입니다. 그 역시 여느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구원자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나시리라는 예언에 묶여 있었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실제로 만나기 전까지는 나자렛 출신이라는 점이 못내 미심쩍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을 만나 대화를 나눈 후 확신에 차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1)
메시아를 고대하며 영적 스승을 찾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예수님의 존재와 말씀과 행동은 새로운 충격과 각성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닙니다. 시작도 못 했지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실 하늘 나라의 실체는 그들의 기대나 바람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차원의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어린양의 아내가 될 신부를 보여 주십니다.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광채는 매우 값진 보석 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았습니다."(묵시 21,10-11)
천사가 묵시록 저자에게 보여 주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신부는 천상 예루살렘입니다. 성도 예루살렘은 이제 지역이나 공간적 개념을 넘어 하느님께서 친히 머무르시는 영원한 거처, 바로 교회인 우리 자신입니다.
묵시록 저자는 어린양의 신부인 예루살렘의 아름다움과 찬란함을 공들여 묘사합니다. 매우 값진 보석같은 광채는 그 고귀함과 거룩함을, 수정처럼 맑은 빛은 흠도 티도 없는 순결함을 드러냅니다. 이는 사도 바오로가 예견했듯,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모습입니다.(에페 5,27 참조)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묵시 21,14)
열두 사도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초석입니다. 초석은 기둥과 땅을 연결하는 주춧돌로, 기둥에서 전해지는 무게를 땅에 고루 전달하는 기능을 한다고 하지요. 신부인 교회의 신앙은 누구보다 예수님의 가까이에 머물며 그분에게서 배우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도들 위에 단단히 세워졌습니다. 사도들 위로 긴밀히 쌓아올려진 교회는 그래서 아름답고 진실되며 굳건합니다.
언젠가 하느님 나라에서 주님과 마주할 때, 그분께서 우리를 알아보시며 무어라 감탄하고 탄성을 올리실지요? 그분은 우리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던 걸 기억하실까요? 또 그때 우리는 이 지상 삶에서 그토록 그리던 주님께 무어라 사랑과 믿음을 고백할까요?
어쩌면 그분께 숨겨진 것 하나 없는 처지에 부끄럽고 송구하고 죄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주님은 그조차 넉넉히 받아 안아 주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수님과 나타나엘의 만남에서 사랑의 세레나데를 떠올리는 오늘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그렇게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
21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1,47)
"와서 보시오."(요한1,46)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나타나엘이 필립보의 인도를 받아 예수님께 나아가자, 예수님께서는 당신 쪽으로 오는 나타나엘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1,47)
예수님으로부터 이렇게 극찬을 들은 나타나엘은 '바르톨로메오 사도'로 알려져 있는 인물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극찬을 들은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십니다.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1,49)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을 보고 "거짓이 없다"고 칭찬하십니다. 왜 그렇게 칭찬하셨을까???
아마도 나타나엘이 말씀 안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타나엘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습니다. 당시 유다교의 지식인들은 올리브나무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서 토라(모세오경)를 공부했다고 합니다.
말씀 안에 머무는 사람!
그래서 거짓이 없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앞으로 "더 큰 일을 보게 되고,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독서는 요한 묵시록이 전하는
'거룩한 도성', '천상 예루살렘의 모습'에 관한 말씀입니다.
'천상 예루살렘'은 '우리의 희망'이며, '지금 여기에서 우리를 견디게 하는 힘'입니다.
거짓이 없는 사람!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천상 예루살렘의 삶을 앞당겨 사는 사람!
그리고 나타나엘을 예수님께로 인도한 필립보처럼, 나도 너를 주님께로 인도하는 사람!
오늘도 이런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
21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특별히 묵상하고 싶은 것은 바르톨로메오(나타나엘)가 예수님을 만나는 과정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머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랑 안에 머물렀던 안드레아는 베드로를 초대합니다. 이튿날 예수님께서는 필립보를 만나시자 “나를 따라라.”(요한 1,43) 하고 부르십니다. 필립보는 곧바로 나타나엘을 찾아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이 기록한 분”, 곧 구약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주인공인 메시아를 만났고, 그 사람이 ‘나자렛 출신 요셉의 아들 예수’라고 알려 줍니다.
그러자 작은 시골 마을 카나 출신인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며 얕잡아 보고 의심합니다. 사실 나자렛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작은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나타나엘은 “와서 보시오.”라는 필립보의 초대에 응하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자기가 가진 편견, 생각의 틀을 버리고 나설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것처럼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증거는 바로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집 구조는 방이 하나여서 사람들은 무화과나무나 올리브 나무 아래에서 묵상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오로지 하느님을 찾고, 그분을 섬기고자 날마다 기도하는 사람이었기에, 자기 생각의 틀과 편견을 뛰어넘어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랑 안에 머무름으로써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데 방해가 되는 편견, 내 생각의 틀은 무엇일까요? 나의 기도는 그렇게 만들어진 나를 뛰어넘어 예수님을 만나는 기도인가요?
----------------------------------------------------
21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요즘은 ‘검색의 시대’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읽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읽기 전에 검색하고, 생각하기 전에 검색하고, 판단하는 대신에 검색합니다. 검색이 쉽고, 빠르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정보가 모여 있습니다. 저도 책을 읽으면서 관련된 궁금한 것이 있으면 ‘검색’을 하곤 합니다. ‘근대의 탄생’이라는 책이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라는 책을 이야기하면 인터넷을 통해서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를 검색합니다. 전 세계 코로나 현황도 실시간을 검색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백신 접종 현황도 실시간으로 검색할 수 있습니다. 여행가서 머물 장소도 검색을 통해서 알아 볼 수 있고, 예약도 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시대를 살면서 많은 사람들이 검색을 통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저는 검색의 시대에는 아직 초보자의 수준입니다.
신앙생활에도 검색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서울대교구는 98년부터 ‘굿뉴스’를 통하여 다양한 신앙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비대면이 일상이 되고 있는 요즘, 굿뉴스는 신앙에 목마른 분들에게, 영성의 갈증을 느끼는 이들에게 소중한 샘물이 되고 있습니다. 가톨릭정보, 자료실, 갤러리, 게시판 등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분당 요한 성당의 홈페이지를 방문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본당의 다양한 모습과 본당에 설치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가톨릭평화방송은 팬데믹 시대에 주교님과 신부님들의 미사를 방송과 유트브를 통해서 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록 성체를 모시지는 못하지만 방송미사를 통해서 말씀을 듣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미주가톨릭평화신문도 홈페이지를 통해서 지면을 검색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의 인사이동에도 검색은 함께 합니다. 신자 분들은 검색을 통해서 아직 오지 않은 신부님에 대해서 이미 알기 시작합니다.
검색의 시대가 장점이 있다면 단점도 있습니다. 정치인, 연예인, 유명인들은 본의 아니게 정보가 노출되기 마련입니다. 지금은 잊어버린 일들도 검색의 장소에는 남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젊은 시절에 했던 실수와 허물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 검증이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영상이 공개되기도 합니다. 수입의 수단이 되기 때문에 비방과 원색적인 내용을 검색의 공간에 올리기도 합니다. 잘못된 정보, 왜곡된 정보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그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확증 편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믿는 것만 검색하려 합니다. 자기가 검색하는 것만 믿으려 합니다. 이런 경우 검색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검색이라는 동굴에 갇혀서 밝은 세상을 외면하거나 보지 못하기도 합니다. 검색을 통해서 옥석(玉石)을 구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도 ‘검색’을 이야기합니다.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사도들은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주님을 위해서 받는 박해를 견디어냈고,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그런 사도들의 뜨거운 신앙의 열정과 삶이 하느님의 도성에 기록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이 기록한 것은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바로 그 예수님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나의 행위와 삶이 하느님의 도성에 기록되고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신 분이시기에 회개하고, 뉘우치는 이들의 허물은 묻지 않으십니다.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시는 아버지처럼 하느님께서는 진심으로 뉘우치는 우리를 받아 주시며, 하느님의 도성에 그 이름을 기록하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
21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 47)
우리는 어떤
사람인지를
묻게된다.
신앙과 삶은
거짓이 없는
진실함에서
출발한다.
주님께서는
거짓이 없는
바르톨로메오를
정확하게
알아보신다.
진실한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진실한 삶이
우리의 삶을
바꾸어놓는다.
거짓이 없는
사람이 진실한
관계를 맺는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란
하느님 안에서
거짓이 없는
사람의 삶이다.
거짓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다.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을
속이지 않는
사람이다.
거짓으로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갈 수는 없다.
진실한 사랑은
언제나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진실이
무너지면
다른 가치들도
자연스레
무너진다.
거짓이 없는
참된 신앙은
참된 열매를
맺는다.
믿음은
거짓을
용기있게
내려놓는
것이다.
진실을 만나는
기쁨이다.
진실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신다.
진짜 우리
자신을
만나게하는
복음의
시작이다.
----------------------------------------------------
21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와서 보시오.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요한 1,45-46).”
나타나엘이(바르톨로메오 사도가) 필립보 사도를 따라가서 예수님을 만난 것은,
필립보 사도의 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타나엘이 필립보 사도의 말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은,
필립보 사도의 말이 ‘확신’에 가득 찬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믿음이 다른 사람의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법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내가 믿지 못하면 남을 믿게 만들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도들의 말을 토마스 사도가 믿지 못한
일을(요한 20,25)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 일은 토마스 사도의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사도들의 증언에도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도들은 자기들이 만난 예수님이 정말로 부활하신 예수님인지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마태 28,17).
자기가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하는 증언은
다른 사람을 믿게 만들지 못합니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라는
필립보 사도의 말은,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필립보 사도는 이미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제자가 되어 있었습니다(요한 1,43).
따라서 필립보 사도의 말은, 메시아를 만났다는 단순한 증언이 아니라,
“나는 메시아를 만났고, 그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분의 제자가 되었다.” 라는 증언입니다.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라는 말은,
“사람들은 그분을 나자렛 출신이며 가난한 목수 요셉의 아들로만 알고 있지만,
그분은 틀림없이 메시아이신 분이다.” 라는 증언입니다.
“와서 보시오.” 라는 필립보 사도의 말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게 되면
그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게 될 것이다.” 라는 뜻의 권고입니다.
이 말도 자신의 믿음을(확신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나타나엘은 처음에는 예수님이 나자렛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그분이 정말로 메시아인지를 의심했지만,
필립보 사도의 확신에 감화되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라는 나타나엘의 말은,
“메시아 예언과 관련해서 나자렛이 언급된 적은 한 번도 없다.” 라는 뜻입니다.
(나자렛이라는 마을을 무시하거나 폄하하는 말은 아닙니다.)
구약성경에서 메시아의 탄생과 관련해서 언급된 곳은 베들레헴입니다(미카 5,1).
우리는 그 예언 그대로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탄생지가 베들레헴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고,
나자렛에서 어린 시절을 지내셨다는 것만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 1,47-49)”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진실한 신앙인’이라고 나타나엘을 칭찬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나타나엘의 반응을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그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의 면전에서 하신 말씀이고, 따라서 이 말씀은
“너는 진실한 신앙인이구나.” 라고 칭찬하신 말씀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을 ‘위선자들’이라고 꾸짖으신 일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율법학자가 다 위선자였던 것은 아니고,
나타나엘처럼 ‘진실한 신앙인’도 있었습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라는 말씀은,
당시에 율법학자들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과 율법을 공부하던 관습에서
나온 표현인데, 뜻은 “네가 성경을 공부하면서 메시아 강생을 희망하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입니다.
(“메시아 강생을 희망하는 너의 간절한 심정을 내가 알고 있다.”입니다.)
이 말씀을 바로 앞의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라는 말씀과 연결해서,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필립보가 너를 데리고 오기 전에) 나는 이미
너를 알고 있었다.”로 생각할 수 있고, 그러면 “필립보가 너를 부른 것은
사실은 필립보를 통해서 내가 너를 부른 것이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라는
나타나엘의 말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는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보시는 예수님의 권능에 압도되어서
곧바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나타나엘의 만남은 ‘우연히’ 이루어진 만남이 아니라,
또 필립보 사도가 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 일이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나타나엘이 응답한 일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나를 따라라.” 라고 나타나엘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말씀도 없고,
나타나엘이 부르심에 응답했다는 말도 없지만, “내가 보았다.” 라는 말씀 속에
그를 제자로 부르신다는 뜻이 들어 있는 것으로,
또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라고 부른 나타나엘의 말에
응답의 뜻이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0-51)”
여기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미 당신을 믿고 제자가 된 사람들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천사들이 예수님 위에서 오르내린다는 말은,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장소’, 즉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형상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콜로 1,15; 히브 1,3).
그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하느님과 예수님이 함께 누리시는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요한 17,24).
----------------------------------------------------
21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와서 보시오.”/2020년 8월 24일
구약에서 성전에서 하느님의 영광에 대해서는 잘 표현하지만 요한 묵시록은 천상 예루살렘에 대해 세세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천사는 성령으로 사로 잡힌 저자에게 “이리 오너라. 어린양의 아내가 될 신부를 너에게 보여 주겠다.”(묵시 21,9)라고 말하며 크고 높은 산으로 데리고 올라갑니다.
그곳에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 줍니다.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는데 그 광체는 값진 보석과 같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과 같습니다.
그 도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과 열두 천사가 지키는 열두 성문이 있었습니다.
성문은 동쪽에 셋, 서쪽에 셋, 남쪽에 셋, 북쪽에 셋이 있어서 다 합해 열둘인데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성벽의 열두 초석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공관복음과는 달리 요한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대목에서 표현의 차이가 있습니다.
공관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데(마태4,18-22), 고대 그리스의 학풍처럼 요한은 제자들이 스승을 찾아나서는 모습을 전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 두 제자는 스승이 예수님을 가리키며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에게 “무엇을 찾느냐?”(1,38)라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을 당신께서 머무시는 곳으로 초대하십니다.
안드레아와 베드로가 예수님을 찾아 갔는데,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필립보 만나시자 당신을 따르라 하십니다.
필립보가 주님과 함께 지내고 나타나엘을 만나 말합니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1,45)
그러자 나타나엘이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1,46)라고 말하자 필리보가 그에게 예수님께서 하셨듯이 “와서 보시오.”(1,46)라고 말합니다.
나타나엘이 예수님께로 갑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며 그야말로 거짓이 없는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어떻게 자신을 아시는지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부르기 전에 이미 그를 무화과 나무 아래에 것을 보셨다고 하십니다.
나타나엘이 주님께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1,49)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1,50-51)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성조 야곱이 에사우를 피해서 하란으로 가는 도중, 후에 베텔이라고 불리는 벌판에서 잠을 자며 꿈을 꾸었던 이야기와 연결시켜 말씀하십니다.
유대인이라면 야곱의 꿈에 “땅에 층계가 세워져 있고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 있는데,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창세 28,12)라는 성경말씀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향해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메시아의 의미로 말을 하지만 그 제자들은 정작 예수님을 찾아 뵙고 ‘머무시는 곳’, ‘출신고향’에 관심을 둡니다.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님을 만나뵙고 함께 지내고 나서야 그분이 율법과 예언자들이 기록한 분임을 깨닫습니다.
야곱이 머나먼 하란 땅으로 향하며 낯설고 황량한 벌판에서 밤을 지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를 돌보고 계시고 구원의 역사에 주인공으로 보호하셨던 것입니다.
나타나엘은 필리보 앞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이 아닌 이름도 없는 나자렛 출신이라는 사실에 실망하는 심정이지만 정작 주님을 뵙고 그분의 말씀에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천상 예루살렘이 세상의 그 어느 곳보다도 화려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기다리며 이 지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분에게 관련되어 머무시는 곳, 태어나신 곳에 관심을 두었던 제자들처럼 우리도 사실 ‘천국’과 ‘영원한 생명’을 우리식대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둔한 제자들을 초대하셔서 당신 구원사업에 함께 하시고 천상 예루살렘 성벽 초석에 이름을 새겨 놓으시며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우리도 주님과 관련된 것에만 머무르지 말고 이제는 주님을 만나뵈어야 합니다. 그분과 함께 하고 그분과 함께 거닐어야 합니다.
이제는 그분의 사랑에 참여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21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사랑 안에 일치된 친교의 공동체, 일상적으로 회개하고 화해하는 공동체!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혹시 누군가에게 전교(傳敎)를 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결코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누군가 전교 대상자를 정해 시도를 하려고 노력하다가도, ‘혹시라도 단칼에 거절당하면 어쩌지?’
‘나도 잘 못사는 주제에 전교는 무슨?’하는 마음에 망설여집니다.
그래서 이웃 전교에는 큰 용기와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나타나엘의 완강한 거부 앞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필립보 사도의 모습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나타나엘의 반발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만났는데, 함께 가자는 필립보 사도의 초대 앞에 나타나엘이 보인 반응은 냉담함 그 자체였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복음 1장 46절)
제가 필립보 사도였다면 나타나엘의 그런 반응 앞에 즉시 위축되어 뒤로 물러났을 것입니다.
‘아 그래요? 귀찮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럼 없었던 일로 하지요!’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필립보 사도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럴 상황에 대비해서 준비한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었습니다.
“와서 보시오.”
끝까지 자신감과 당당함을 잃지 않고 나타나엘을 주님께로 안내한 필립보 사도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지혜와 은총으로 가득한 전무후무한 말씀을 직접 들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이 이루신 놀라운 행적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한 사람이었습니다.
필립보 사도의 강한 확신을 바탕으로 한 적극적인 초대 앞에 나타나엘은 마음을 바꿉니다.
예수님께로 삶의 방향을 틀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종종 마지막 카드인 ‘와서 보시오’를 사용해야겠습니다.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과감히 떨치고 사람들에게 크게 외쳐야겠습니다.
“우리 공동체로 한번 오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사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한번 보십시오.”
그러나 어렵사리 그들이 우리 공동체에 왔지만, 정작 보여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그것보다 큰 낭패는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에 앞서 단단히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으며, 문턱이 낮은 공동체, 그 누구라도 적극적으로 환대하는 공동체, 주님 사랑 안에 일치된 친교의 공동체, 일상적으로 회개하고 화해하는 공동체...
----------------------------------------------------
21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이런 사람 꼭 옆에 두세요
오늘은 성 바로톨로메오 사도 축일입니다. 나타나엘이라고도 불렸던 바르톨로메오는 메시아의 탄생을 기다리는 인물이었습니다.
필립보는 메시아를 만났다고 알려줍니다.
하지만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는 예언자가 나올 수 없다며 그의 의견에 반대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라고 말하자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나타나엘이 무화과나무 밑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와 거짓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죄를 숨기기 위해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들의 몸을 가렸습니다.
나타나엘은 무화과나무가 거짓말의 상징임으로 자신은 모든 것에서 진실하여야 함을 되새겼을 것입니다.
이 묵상을 예수님께서 마음까지 들여다보셨던 것입니다.
그러자 바르톨로메오도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곁에서 배워 결국엔 피부가 다 벗겨지는 고문을 이기고 사도로서 위대한 성인이 되셨습니다.
만약 나타나엘이 예수님을 곁에 두지 않았다면 하느님 나라에서 그렇게 영광스러운 자리엔 앉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내 곁에 누구를 두느냐가 나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누구를 내 곁에 두어야겠습니까? ‘나를 알아주는 사람’입니다.
누가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겠습니까?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나타나엘을 거짓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며 인정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인정해주는 사람이란 누구겠습니까?
나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어주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한 독일인 부부가 서른 곳의 병원에 다니고도 절망에 빠져 벤 카슨이란 흑인 의사를 찾아옵니다.
그 부부는 요한과 슈테판이란 샴쌍둥이 분리 수술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당시까지 그 수술을 성공시킨 사람은 전 세계에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엄마는 이런 아기를 낳고 자살을 하려고 했지만 그러면 아기들도 죽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견디고 있었습니다.
남편도 두 명의 아기가 다 살기를 원했습니다.
벤 카슨은 수술 중 과다출혈이 가장 큰 문제라고 말합니다.
아기들 몸 안엔 수술 시간을 버틸 충분한 혈액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벤은 시도해보기로 합니다.
물론 확신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 흑인 아이가 멀리 독일에서 의뢰가 들어올 만큼 신경외과의 세계적 권위를 가지게 되었을까요?
그는 어렸을 때 공부를 잘했을까요? 아버지 없이 자란 벤은 공부도 아주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글도 모르는 사람으로서 자녀들을 잘 키우고 싶었지만 남의 집 청소를 하고 남의 애를 봐주면서
자녀를 잘 돌볼 충분한 시간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자신이 바보라고 말하는 벤에게 엄마는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지 않아. 넌 똑똑한 아이야. 다만 노력을 하지 않았을 뿐이야. 넌 최고야.”
엄마가 하루에도 수백 번 이렇게 말해주는 데에는 자신이 어렸을 때 그런 마음이었을 때 아무도 자신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할 수만 있다고 하지 않고 대학교수들이 사는 모습을 보며 아이들에게 일주일에 두 권 이상 책을 읽을 것을 권했습니다.
아이들은 어머니가 고생하는 것 때문에, 그리고 어머니가 믿어주는 것 때문에 어머니 말씀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벤은 전교 1등을 합니다.
하지만 당시 인종차별이 심할 때여서 상을 받는데도 선생님들은 아버지도 없고 흑인인 벤도 하는데 백인인 너희들은 왜 못하냐며 오히려 벤 앞에서 상처 주는 말을 합니다.
인턴 때도 흑인이기에 그의 의견은 무시되는 때가 많았습니다.
한 번은 의사들이 모두 콘퍼런스에 갔을 때 폐엽 절제술을 해야만 하는 응급수술 환자가 들어옵니다.
어쩔 수 없이 자격도 없는 그는 수술을 진행하고 성공적으로 마칩니다.
문제가 발생했다면 그의 의사 생활은 거기서 끝났겠지만 숙련된 전문의들도 후유증을 남기기 쉬운 어려운 수술을 인턴이 해낸 것에 모든 의사가 놀랍니다.
아내의 유산으로 그는 아이들을 살리는 의사가 되기로 합니다.
그의 실력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았고 33세에 존스 홉킨스 최연소 신경외과장이 됩니다.
그렇게 머리가 붙은 샴쌍둥이 수술을 시도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피를 멈추게 하는 방법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때도 어머니가 도움을 줍니다.
“샴쌍둥이 수술 때문에 걱정하니? 넌 할 수 있어.”
그때 설거지하는 어머니 모습에서 영감을 받습니다. 수도꼭지처럼 심장을 틀어막는 것입니다.
피가 돌지 않아도 뇌에 영향을 주지 않는 한 시간 동안 심장을 멈추고 머리를 분리하고 피가 새는 혈관들을
막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벤이 매일 기도를 한다는 한 마디에 부모도 그 수술에 동의합니다.
물론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결국 22시간이 걸린 세계 최초로 샴쌍둥이 분리 수술을 성공시킵니다.
수술을 마치고 나와 걱정하는 부모에게 “어느 애부터 보시겠어요?”라고 말할 때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 이후로도 벤 카슨은 엄청난 업적들을 이뤄내며 나이가 들어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경쟁자가 될 정도로
미국인들에게 인기가 높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화 제목은 ‘타고난 재능: 벤 카슨 스토리’(2009)이지만 과연 타고난 재능이었을까요?
그에게 자신을 믿어주는 어머니가 계시지 않았다면 그만큼 성장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나를 알아준다는 말은 나의 무한한 가능성, 곧 신의 경지에까지 오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어준다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꼭 옆에 두십시오.
벤 카슨은 10달러 지폐에 들어갈 위인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꼽았습니다.
“넌 할 수 있다.”란 말을 하루에도 수십 차례 하며 그를 믿어주고 인정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인정받는 만큼 성장합니다.
바르톨로메오에게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셨던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곁에는 헛된 꿈을 믿어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애초부터 그런 꿈은 꾸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헛된 꿈을 꾸게 만드는 사람을 곁에 두십시오.
나를 아는 사람을 옆에 두어야 하는데 우리는 물 위도 걸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못할 것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물 위를 걷다가 누군가 “그런 생각은 교만한 거야.”라고 말해버리면 멘탈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해주려면 나도 분명 그런 사람을 곁에 두었더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저 무화과나무 밑에서 생각이나 하던 한 사람을 알아주셔서 그를 위대한 성인으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누구의 기도 꺾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말할 때 그건 교만한 생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당장 멀리하십시오.
그리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어주는 사람을 가까이하십시오.
내가 옆에 두는 사람이 곧 나의 믿음입니다.
----------------------------------------------------
21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미리 준비된 사람은 근심이 없습니다.
어떤 상황이 닥쳐올지 예상한다면,
필요한 준비를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혼란스럽지 않고 마음의 중심을 잡을 수 있습니다.
신앙인에게 있어 준비란
어떤 환난이 다가와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하느님과 함께 할 때 주어지는 선물로
그만큼 하느님을 알아가며 믿는 과정
믿음을 토대로 언제든지 하느님이 도와주실 거란 희망
희망을 간직하기에 오늘 사랑할 수 있는 자세입니다.
앎이 삶이 되고
삶이 사랑이 되는 과정.
바로 하느님과 함께하는 평화로움이며
준비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바로톨로메오 사도 역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도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며
하느님의 말씀을 공부하며 수행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찾아갔을 때,
나자렛에서 좋은 것이 나올 수 없음을 바로 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타나엘은 필립보를 따라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지식의 한계를 알고 있었으며
필립보를 잘 알기 때문에 그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하느님께 대해 알아가고 배우는 가운데
삶으로 드러나는 결실을 바라보며 깨닫는 자세는
예수님을 만나 그분을 알아볼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다른 사도들과 달리
그는 첫 만남에서 예수님을
스승이자 하느님의 아드님, 이스라엘의 임금님으로 고백했습니다.
그만큼 준비된 이는 더 많은 선물을 받으며
더 많은 결실을 맺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오늘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알아가는 진리 추구를 멈추지 않기를,
동시에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는 선행을 통해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을 더 많이 받고 결실 맺을 수 있는
그런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
21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오늘 복음은 짧은 분량의 복음에서 드라마틱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나타나엘의 만남이 그렇습니다. 복음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필립보 사도가 나타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시켜줍니다. 근데 그 예수님이 이미 율법에 기록되어 있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인데 바로 그분이 지금 나자렛 마을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실제 만약 그렇다면 당연히 좋은 일일 것입니다. 만약 이런 상황을 지금 현실에 대입해서 한번 생각을 해보면 이런 상황이 될 것입니다. 옆집에 아는 지인이 와서 옆 동네에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이 계시니 한번 가보지 않겠는가 하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필립보 사도의 권고에 처음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기고 하고 회의적인 생각도 했을 겁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타나엘은 요즘으로 말하면 율법과 성경을 연구하면서 열심한 신앙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내용은 신약성서 주해서에서 이와 관련된 참조 사항을 참조하면 그렇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메시야에 대한 근거와 기록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근데 그런 분이 나자렛 같은 조그마한 시골에서 나오셔서 계실 거란 말에는 당연히 회의적이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필립보 사도가 이미 율법에 기록되어 있다고 전제하며 말을 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했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우리가 필립보 사도였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나자렛 같은 마을에서는 그럴 리가 없다고 하며 약간 빈정대는 말을 한다면 기가 한풀 꺾였을 겁니다. 하지만 필립보 사도는 달랐습니다. “와서 보시오.”하면서 다시 한 번 더 강권합니다. 복음에서는 바로 바르톨로메오가 예수님을 향해서 가는 것으로 나옵니다. 복음이니 그럴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마음을 돌렸는지 예수님께 가게 된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을 향해 오는 바르톨로메오의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 바르톨로메오를 향해서 거짓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을 하십니다.
지금 바르톨로메오와 예수님과의 만남은 구면이 아니고 초면인 상황입니다. 초면인 상황에서 그런 말씀을 하시니 조금은 의아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저를 어떻게 아신다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하고 여쭈었을 것입니다. 이미 필립보 사도가 부르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셨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설령 그렇다고 하신다고 해도 어째서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셨다는 사실만으로 바르톨로메오를 잘 안다고 추정할 수 있을까요?
율법학자들이 흔히 올리브 나무나 무화가 나무 아래에 앉아 율법서를 공부한 데서 연유된 랍비들의 은유적인 표현(200 주년 신약성서 주석서, 446 참조)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나타나엘이 율법서를 공부하며 메시아가 도래할 것에 대해 이미 고대하고 갈망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께서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을 연구하고 한다고 해서 거짓이 없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 것은 어쩌면 약간은 논리의 비약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왜 그렇게 하셨을까를 한번 묵상해보고 싶습니다.
오늘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에 바오로 신부님의 해설에도 나오지만 이미 무화과나무에서 공부도 하고 기도도 하는 그런 사람이었을 겁니다. 예수님의 작은 칭찬이라고 하면 칭찬에 그만 바르톨로메오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고백에서 유추해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미 바르톨로메오가 율법과 예언을 공부하면서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음을 알고 계셨을 겁니다. 단순히 고대한 정도가 아니고 학수고대하고 있었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물론 예수님을 직접 만나기 전에는 회의적인 생각이었지만 직접 예수님과 대면을 한 상황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연출될 것을 당연히 예수님께서는 미리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셨을 수도 있을 겁니다. 충분히 그럴 개연성이 높습니다. 바로 바르톨로메오의 고백에서 알 수 있습니다.
바르톨로메오가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동안 자신이 공부하고 했던 것을 단순히 공부를 해서 안다고만 해서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게 바탕이 돼서 이심전심으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예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말씀을 하십니다. 단순히 지금 네가 보는 것 이상을 앞으로 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계시해 주십니다. 이게 오늘 전체 복음의 전체 스토리입니다.
큰 테두리에서 보면 평소에 기대하고 했던 예수님을 생각지도 못했던 장소에서 출현하셨고 그에 대해 반신반의했는데 결국은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결론이 나온 것입니다. 여러 가지 묵상거리가 있지만 저는 오늘 여기서 가장 주목해서 묵상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오늘 복음 내용만으로만 본다면 사실 바르톨로메오가 단순히 예수님의 그 한 말씀만을 듣고서 고백을 하였다는 사실만을 놓고 봤을 때 조금은 비약한 면이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충분히 가질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역으로 다른 관점으로 접근도 할 수가 있을 겁니다.
기존에 자기가 가진 지식만을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봤다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겁니다. 개방적인 태도와 열린 사고를 가지고 있었기에 아마도 가능했을 겁니다. 물론 이런 사실도 중요하지만 설령 이렇다고 해도 예수님과 이심전심으로 서로 뭔가 통한 것도 한몫 했을 겁니다. 이런 사실의 근저에는 예수님께서 바르톨로메오에게 하신 말씀에 중요한 대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내가 보았다”입니다.
예수님 당신께서 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건 단순히 보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닐 것입니다. 단순히 보는 의미가 아니고 지켜보고 계셨다는 의미로써의 보고 계셨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냥 단순히 봐서 어떻게 바로톨로메오의 성향을 알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런 것에는 애정과 관심으로 보셨다는 말과도 같은 의미를 담고 있을 겁니다. 바르톨로메오는 예수님의 그런 마음을 읽었으리라고 추측해봅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을 바로 즉석에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보게 되었지 않았을까요.
우리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예수님께서 바르톨로메오를 향해 그렇게 지켜보신 것처럼 그렇게 우리를 향해서 지켜보고 계신다고 해도 우리가 바르톨로메오처럼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면 예수님을 보고도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바르톨로메오는 그런 우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 말씀공부와 함께 늘 기도하는 삶을 살았기에 그게 가능했을 거라고 보여집니다.
----------------------------------------------------
210824.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김 로마노 형제님.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제1독서 (묵시21,9ㄴ-14)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광채는 매우 값진 보석 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았습니다. (11) 그 도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과 열두 성문이 있었습니다. 그 열두 성문에는 열두 천사가 지키고 있었는데, 이스라엘 자손들의 열두 지파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12)
묵시록 21장 11절부터 14절까지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 도성의 아름다운 모습과 열두 성문과 열두 초석에 대하여 묘사한다. 특히 묵시록 21장 11절은 새 예루살렘의 시각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아름답게 표현한다.
'있었습니다'로 번역된 '에쿠산'(echusan; having)은 '소유하다'라는 뜻을 지닌 '에코'(echo)의 현재분사로 묵시록 21장 10절에 언급된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과 관련된다.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영광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영광'으로 번역된 '텐 독산'(ten doksan; the glory)은 '에쿠산'(echusan)의 목적어인데, 이것의 원형 '호 독사'(ho doksa)는 '하느님의 거룩한 임재' 곧 '셰키나'(shekinah)를 뜻한다.
"그때 영이 나를 들어 올려 안뜰로 데리고 가셨는데, 주님의 집이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에제43,5).
새 성경에는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원문에는 '하느님의 영광'에 해당하는 '텐 독산 투 테우'(ten doksan tu theu) 다음에 바로 '광채'로 번역된 '호 포스테르'(ho poster)가 언급되어 있다. 여기서 광채는 하느님의 영광을 달리 표현한 것으로 양자가 동격 관계임을 암시한다(이사60,1.2.19).
한편 '광채'에 해당하는 '포스테르'(poster)는 신약 성경에서 73회 사용되어 빛 자체를 나타내는 '포스'(pos)와는 달리, 외부의 빛을 투영하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로 신약 성경에서 2회(필리2,15; 묵시21,11) 밖에 쓰이지 않았다.
말하자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은 스스로 광채를 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받아 광채를 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이 투사하는 광채는 '매우 값진 보석'과 '수정처럼 맑은 벽옥'이 발하는 광채(빛) 두 가지로 비유되고 있다.
'크고 높은 성벽이 있었습니다'
'있었습니다'로 번역된 '에쿠사'(echusa)는 '소유하다'라는 뜻을 지닌 '에코'(echo)의 현재분사로 묵시록 21장 10절에 언급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과 관련됨을 보여준다. 즉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영광을 지니고 있을(묵시21,11)뿐만 아니라 크고 높은 성벽도 가지고 있다.
'성벽'으로 번역된 '테이코스'(teichos)는 '성곽'을 지칭하는데, 이와 같이 '크고 높은 성벽'은 묵시록 21장 13-20절에서 더 자세하게 설명된다.
그런데 성벽을 수식하는 '크고 높은'(mega kai hypsellon; 메가 카이 휩셀론; great and high)이라는 형용사는 묵시록 21장 10절에서 사도 요한이 성령의 압도적인 감동 속에서 올라갔었던 '산'을 묘사하는 데 적용되었던 바로 그 표현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문자적으로 '크고 높다'는 것을 의미하겠지만, 하느님의 천주성(神性)과 관련된 묵시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실제로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의 규모가 묵시록 21장 16절과 17절에 묘사되고 있지만, 본문에 언급된 '크고 높은 성벽'은 하느님의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 얼마나 견고한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크고 높은 성벽'은 새 도성 예루살렘이 완전하고, 완결(완성)되어졌으며, 안전하고 웅장하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 위험이나 불안, 위협이나 침략, 부정하고 불순한 세력들에 의해 노출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이미 악은 두 번째 죽음 곧 불못에 던져졌다(묵시19,20; 20,10; 20,14-15).
이것은 이사야서의 예언을 연상시킨다. "다시는 너의 땅 안에서 폭력이라는 말이, 너의 영토 안에서 파멸과 파괴라는 말이 들리지 않으리라. 너는 너의 성벽을 '구원'이라, 너의 성문을 '찬미'라 부르리라." (이사60,18)
'열두 성문이 ~ 열두 천사가 지키고 있는데 ~열두 지파 이름이' (12)
'있는데'로 번역된 '에쿠사'(echusa)는 '소유하다'라는 뜻을 지닌 '에코'(echo)의 현재분사로 전체적으로는 묵시록 21장 10절에 언급된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과 연결되지만, 문맥상으로는 앞서 언급된 '성벽'(teichos; 테이코스)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의 성벽은 '열두 성문' (퓔로나스 도데카; pyllonas dodeka)을 가지고 있다.
묵시록 21장 13절은 '동쪽에 성문이 셋, 북쪽에 성문이 셋, 남쪽에 성문이 셋, 서쪽에 성문이 셋'의 이 열두 성문이 균형적으로 분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땅의 임금들이 자기들의 보화를 가지고 이 문을 통해 들어오며(묵시21,24), 그것은 항상 닫히지 않고 열려져 있다(묵시21,25). 따라서 이 성문 역시 성벽과 같이 단순히 외적의 방어와 적대 세력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고안되고 제작된 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성문에는 열두 천사('앙겔루스 도데카'; anggellus dodeka)가 있다. 이 천사들은 열두 성문 각각을 지키고 있는 하느님의 천사이다.
"예루살렘아, 너의 성벽 위에 내가 파수꾼을 세웠다. 그들은 낮이고 밤이고 잠시도 잠잠하지 않으리라. 주님의 기억을 일깨우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마라. " (이사62,6)
이들은 악한 세력들과 싸우기 위해 성문을 지키는 천사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든 이들이 다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등장한 것이다. 거기에는 오직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이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묵시21,27참조). 이와 같은 점은 그 성문 들위에 적힌 것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열두 지파' ('도데카 필론'; dodeka pyllon)의 이름이라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언급된 '이스라엘 자손들의 열두 지파'의 의미는 이미 묵시록 7장 5-8절에서 언급된 것과 깊이 관련된다. 즉 각 지파에 속하는 일만 이천 명씩 도합 십사만 사천 명 곧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묵시7,9)만이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문'과 '천사'와 '지파'가 각각 '열둘'인 것은 명백히 이 도성 예루살렘이 승리한 하느님의 백성들만을 위한 도시임을 시사한다.
그런데 여기서 더 주목할 것은 이러한 사도 요한의 묘사가 에제키엘 예언자의 환시와 밀접하게 병행된다는 점이다(에제48,30-34). 에제키엘 예언자는 종말에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각자의 땅을 분배할 때 자신들에게 할당된 충분한 상속 재산(기업)을 취하며, 회복된 도성 예루살렘으로 출입할 수 있는 각 지파 소유의 대문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선포한다.
이것은 종말에 하느님의 백성 전체가 한 명의 예외도 없이 하느님의 임재와 현존 가운데 들어갈 동등한 권리와 축복을 누릴 것이라는 원대한 비전인 것이다.
사도 요한은 에제키엘 예언자의 이러한 종말론적 비전을, 자신이 본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 도래의 환시가 내포하고 있는 명확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자유롭게 끌어 들인다. 이로써 사도 요한은 하느님과 그의 모든 백성들이 영광스럽고 놀라운 완전한 종말론적 친교와 일치 가운데 들어갈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8월 24일 월요일 [성 바르톨로메오(나타나엘)사도 축일]
(요한1,45-51)
45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46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나타나셔서 나자렛에서 사셨다.
(미카5,1) 1 그러나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47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48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는 것은 나타나엘이 열심한 율법학자인 것이고, 당시 모든 율법학자,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로마에서 해방시켜줄 육적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사람의 영을 해방시켜주실 하느님의 뜻을 거짓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나엘은 그 거짓이 아닌 하느님의 뜻인 영적 메시아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49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 어제 베드로가 고백한 ‘그리스도’가 빠졌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은 사람의 지혜가 아닌 하느님의 영께서 알려 주셔야 깨닫고 믿을 수 있는 것이다.
50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51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예수님께서 하늘을 오르는 사다리라는 말씀 이신 것이다. 그 사다리는 나무, 곧 십자 나무를 뜻한다.
(마태27,50-52) 50 예수님께서(십자가에서)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나서 숨을 거두셨다. 51 그러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다. 52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되살아났다.
= 성전, 하늘이 열렸다는 것, 그리고 죽은이들이 살아나 하늘로 들어간다.
참조~
(에페1,7)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2코린5,21) 21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1베드1,18-19) 18 여러분도 알다시피,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 방식에서 해방되었는데, 은이나 금처럼 없어질 물건으로 그리된 것이 아니라, 19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그리된 것입니다.
(1코린6,20) 20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 그분의 사랑 곧 십자가의 대속 그 구원의 사랑이 참 진리임을 믿고 기쁨과 감사의 찬송으로 높여 드리는 것이다.
(에페1,6) 6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아멘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복음(요한1,45~51)
베델에서 꿈꾸는 야곱과 층계(사다리); 창세기 28장 12절;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세워져 있고,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 있는데,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47ㄷ)~~~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48ㄴ)
'거짓이 없다'로 번역된 '돌로스'(dolos; deceit; false)는 '미끼', '올무', '속임', '간교함', '교활함', '거짓됨' 등을 뜻한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게 하는 요소들 가운데 하나이며(마르7,22), 사탄의 속성 가운데 하나이고(마태26,4), 하느님께서 죽어 마땅하다고 경고하신 죄의 목록 중에 포함된 것인데(로마1,29), 나타나엘의 마음 속에는 대개의 사람들에게 발견되는 이것이 없다는 게 그의 훌륭한 인품에 대한 예수님의 증거이다.
특히 '없다'로 번역된 '우크 에스틴'(ouk estin; is nothing)이라는 현재 시제는 사실은 그가 계속적으로 온전한 마음을 유지했음을 시사한다.
요한 복음 1장 4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고 말씀하신다.
'I saw you under the fig tree.'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다, 포도나무 아래에 있다, 올리브나무 아래에 있다'라고 하면, 그것은 묵상기도 중에 있다, 명상 중에 있다는 말로 알아듣는다.
우리들은 이런 성경 말씀에 대한 전지식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말씀이 무슨 뜻이길래 나타나엘이 놀라운 반응을 나타내면서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1,49) 라는 신앙 고백을 할까? 하고 의아해한다.
나타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묵상기도를 하고 있을 때 그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나타나엘의 놀라움과 신앙고백의 반응은 자신의 영혼의 속,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기도 내용을 알아차리시고 다 알고 계시는 분은 인간이 아닌 하느님 밖에 더 계시는가?
바로 그것을 아시는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메시아이시다라는 말이다.
'무화과나무'에 해당하는 '쉬케'(syke; fig tree)는 이스라엘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수종이며, 유다 민족의 번영을 상징하는 표현으로도 나타난다.
더욱이 무화과나무는 잎이 무성하고 그늘이 짙어서, 그 무성한 가지 아래 앉아 율법을 배우고 기도와 묵상을 하는 것은 경건한 유다인들의 오래된 관습이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는 지적은 그가 메시야 오심을 희망하면서 경건한 생활에 힘써 왔다는 것을 알게 한다.
특히 '있는 것을'로 번역된 '온타'(onta; when you were)는 현재 분사 시제로 그가 계속해서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이 일을 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가 이같이 하는 모습을 '보았다'라고 했는데, '보았다'에 해당하는 '에이돈'(eidon; I saw)은 시각으로 감지하는 것을 나타내는데, 카나 출신 나타나엘이 경건하게 묵상에 잠긴 모습을 신적(神的) 전지(全知)로 이미 보셨던 것이다.
아마 나타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에 약속된 메시야가 과연 오셨는가?
도대체 세례자 요한은 누구이며, 예수라는 분은 누구신지를 아버지 하느님께 물으면서 묵상하고 있었을거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타나엘에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천주 성자 이신데, 같은 하느님으로서 성부 하느님 사이에 천사가 왜 필요하겠는가?
이것은 육신을 취하신 예수님의 현재 위치이신 이 세상과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은 초월적인 영적인 차원에 계시는 성부 하느님 사이의 간극을 의미하는 말이다.
동시에 성령의 도구인 천사들이 성자 하느님과 성부 하느님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은 여기 나타나엘의 묵상기도를 포함해서 지상에서의 모든 기도가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부 하느님께 봉헌되며, 성부 하느님으로부터의 기도의 응답도 반드시 예수님을 통하여 주어진다는 명명백백한 진리를 계시하시는 내용이다.
또한 성령의 도구인 천사가 날개가 있다면 단번에 성부 하느님께 오를텐데, 오르락 내리락 한다는 것은 우리도 완덕의 근원이시고 모범이신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께 가는 길이 step by step 한 단계 한 단계씩 서서히 이루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시는 완덕과 성덕에의 진보도, 은총과 은사를 받아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선익을 위해 봉사하는 일도 서서히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너무 욕심을 내거나 예수님을 앞서 가거나 서둘러서는 안되고, 한 단계 한 단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밟아 가야 한다는 사실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