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흐르는 것들을 다만 지켜보는 ‘지금 이 순간’이 기쁘다
이 기쁜 고요를 당신에게 보낸다
2022년 늦가을
홍성란
충남 부여 출생. 성균관대학교 문학박사. 1989년 중앙시조백일장 장원(경복궁 근정전) 등단. 시조집 『춤』 『애인 있어요』 『소풍』 『바람의 머리카락』 등.
제1회 유심작품상, 제24회 중앙시조대상, 제40회 대한민국문화예술상(문학부문) 등 수상. 현재 유심시조아카데미 원장.
srorchid@hanmail.net
목차
시인의 말
1
설야雪夜 15
곡우穀雨 16
생일 케이크 17
나무의 마음 18
그 봄 19
유성流星 20
와이퍼 21
경칩 22
나무수류탄 23
호접몽胡蝶夢 24
캄보자 꽃처럼 25
외등外燈 26
매혹魅惑 27
에스프레소 28
2
불꽃 31
양재천 32
저녁의 마음 33
달맞이꽃 34
메아리 35
붉은머리오목눈이 36
난타 생각 37
시월 보름 38
블랙커피 39
장외 학교 40
몽블랑잉크 블루 41
길 42
긴 귀 석불 43
참회 44
화양연화花樣年華 45
3
갈잎 사원 49
생의 한가운데 50
측량의 기술 51
기억하기 좋은 날 52
달빛 53
매미와 찌르레기 54
목숨 55
이슬 56
거울 57
딸아 58
축복 59
상추쌈 60
낭만의 무늬 61
내일은 안녕 62
4
설악 공룡능선 65
사랑이라는 말 66
캄벨포도 67
인릉에서 68
가을의 기도 69
그 눈빛-용소龍沼 70
용문역 71
산의 침묵 72
그리운 크리스마스 73
조실 설악무산 74
고요한 일 75
백담百潭 나한 76
한 풍경 77
5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 가상현실 81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 설악유사雪嶽遺事 82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 집으로 간 소 83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 신사동 편액 84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 병법 85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 바람의 노래 86
6
진달래꽃 89
냉이꽃 90
시詩 91
달라이 라마 92
샌프란시스코에서 93
입동立冬 94
너 앉은 쪽으로 95
해설
인연과 사랑을 품고 넘어서는 정형의 연금술 | 유성호(문학평론가 · 한양대 교수)
후기
낯선 향기, 안온한 고독 | 홍성란(시인)
■ 추천사
외등 아래 숫눈길
숫눈길 위에 눈 그림자
어디 앉을까 하는 사이 그림자도 길이 되고
눈발은
곤한 세상을 다둑다둑 감싸네
― 「설야雪夜」 전문
이 단시조는 정말 잠잠한 풍경첩으로 다가온다. 이미 문학사에 유명한 작품으로 등재된 바로 그 제목으로 홍성란은 곤 한 세상을 감싸는 ‘눈 내리는 밤’의 소묘를 완성한다. “외등 아래”의 수직을 따라 닿는 “숫눈길 위”에는 “눈 그림자”의 실감이 전경前景으로 깔린다. 삶의 피로를 못 견뎌 어디 앉을까 하지만, 그것도 잠깐, 어느새 그림자도 길이 되어준다. 그렇게 눈발은 곤한 세상을 감싼다. ‘다둑다둑’이라는 첩어가 ‘다독다독’보다 훨씬 ‘설야雪夜’의 품과 격을 크고 높게 만들어준다. ‘아래’와 ‘내림’이라는 하강의 기운을 감싸고 있는 아득한 눈발의 이미지가 서정의 밀도를 높여주고 있는 가편佳篇이 아닐 수 없다.
―유성호(문학평론가 · 한양대 교수)
나무의 마음
매일을 걸어도 그 길이 좋은 것은
무심無心히 그저 나를 보기 때문이다
나무가 나를 바라보듯 볼 수 있다면
어떤 옷을 입어도 어떤 신을 신어도
무슨 짓을 한다 해도 그저 무심히 보는
나무가 나를 바라보듯 볼 수 있다면
내용이 아주 쉽고 단순한 듯하다. 하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끔 유도하는 깔끔한 시조다. 간섭하지 않고 바라보아 주는 존재가 복잡다단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에게는 필요한데 나무가 바로 그렇다. 인간은 꽃을 꺾어다 팔고 나무를 분재하고 가로수 가지치기를 심하게 하는 등 나무에게 온갖 못된 짓을 서슴없이 한다. 그런데 나무는 인간에게 산소를 주고 과실을 주고 생활도구를 주고 마루를 준다.
그 길도 그렇고 그 길의 나무도 그렇고 산보하는 한 인간을 그저 무심히 바라본다. 나무가 나를 그렇게 무심히 바라보듯이 나도 사물이나 어떤 대상을, 타인을 그렇게 바라볼 수 있다면 성인이 될 것이다. 해탈할 것이다.
세속세계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면서 남을 탓하고 욕하는 것이 습관이 된 우리에게 이 시조는 단순한 듯하지만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 나무가 훌륭한 스승임을 간파한 시인의 혜안에 고개를 숙인다.
―이승하(시인),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16, 뉴스페이퍼(2019. 11.)
설야雪夜
외등 아래 숫눈길
숫눈길 위에 눈 그림자
어디 앉을까 하는 사이 그림자도 길이 되고
눈발은
곤한 세상을 다둑다둑 감싸네
제목이 같아서일까. 위 시조를 보면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김광균 시인의 「설야」가 떠오른다. 공감각적 이미지에 의한 묘사도 그렇다. 김광균의 설야가 눈 내리는 정경을 묘사해나가다 그만 마지막에 와서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라고 감상적으로 흐르고 있으나 위 시는 아니다. “곤한 세상을 다둑다둑 감싸”고 있다며 개결하게 맺고 있다.
등불에 비친 눈발과 그 그림자를 보고 있으면서도 “어디 앉을까 하는 사이 그림자도 길이 되고”라며 내리는 눈, 내려 쌓여 아무도 밟지 않은 숫눈길과 동행하고 있다. 동행을 하며 순정한 마음을 개결하게 드러내고 있다. 단시조 문법이기에 이런 극서정을 더 간명하게 드러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경철(문학평론가), 「현대시의 모범을 보이며 진화해가는 오늘의 시조 위상」, 《정형시학》(2021, 여름)
저녁의 마음
내 얼굴 편치 않은 건
내가 날 괴롭힌다는 것
헛간 데 떠다녔다고 하루가 웃는 들길에서
나 말고
날 쥐었다 폈다 누가 할 수 있겠니
달맞이꽃
은은히 지면 너 그만인 거니
바라만 보다 갈 게 거기 그냥 있어 줘
이렇게 환히 물들여 놓고 수줍어하지 마
운명은 혼자 만드는 게 아니래
몰라 그렇지 외롭지 않은 이 어디 있어
너에게 스미는 만큼 그만큼은 흔들릴게
불꽃
저 춤도 무늬
저 울음도 손짓
도대체 꿈이라니 나도 내가 아니라니
당분간 피어난 여기, 이 생생한 찰나여
갈잎 사원
늘 다니던 길에서 처음 만난 빈 집
쥐똥나무 가는 가지에 둥지를 단 뱁새는
알 낳고 새끼 키우고 어디 멀리 갔을까
긴 겨울 버리고 허공으로 드는 꽃
허술한 궤도 저 허술한 궤도여
가다가 돌아보면 한 채
손짓하는
신의 집
매미와 찌르레기
무엇을 가르치려 찌르레기는 저토록 있는 힘을 다해 파닥이는 매미를 물고 바위에 거듭 내리치시나, 잠잠해질 때까지
사랑이라는 말
안이라 할 수도 없고 밖이라 할 수도 없어
만지작거리다간 먹어버리고 싶은 말
당신은 나를 몰라도 좋아 나를 알아도 좋아
누가 물에 비친 나무그림자를 건져오라면
나뭇가지를 꺾어다 바치면 된다는데
매화는 뭐 하는지도 모르고 꽃을 피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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