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옥 빌헴 프리드리히 히걸 - 철학적 학문들의 엔치클로페디 강요 : 제1부 논리의 학 3 (Enzy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m Grundrisse : Wissenschaft der Logik)
그런데 이러한 경험 지식들의 조건 지어진 것을 통찰하는 것은 이성, 즉 무조건적인 것[무조건재]의 능력이다.
여기서 이성 대상이라 불리는 것, 곧 무조건적인 것 또는 무한한 것은 다름 아닌 자기-자신과-동등한 것이며, 또는 언급된 사유에서의 자아의 근원적 동일성이다.
이성이란 이 순수한 동일성을 자기의 대상이나 목적으로 삼는 이러한 추상적 자아나 사유를 말한다.
이러한 단적으로 몰규정적인 동일성에는 경험 인식들이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경험 인식들은 일반적으로 규정된 내용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무조건적인 것이 이성의 절대적인 것과 참된 것으로(이념으로) 받아들여짐으로써 경험 지식들은 참되지 않은 것으로, 현상들로 설명된다.
칸트에 의해 비로소 지성과 이성의 구별이 규정적으로 강조되었으며, 전자는 유한한 것과 조건 지어진 것을, 그러나 후자는 무한한 것과 무조건적인 것을 대상으로 삼는 그러한 양식으로 확립되었다.
그런데 칸트 철학이 단순히 경험에만 기반하는 지성 인식의 유한성을 주장하고 그 인식의 내용을 현상이라 부른 것이 그 철학의 매우 중요한 결론으로서 인정되어야 한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부정적 결론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이성의 무조건성을 단순히 추상적이고 구별을 배제하는 자기와의 동일성으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이성이 그러한 방식으로 단순히 지성의 유한한 것과 조건 지어진 것을 넘어서는 것으로서 여겨진다는 점에서, 이리하여 그것은 사실상 그 자신이 유한하고 조건 지어진 것으로 격하된다.
왜냐하면 참으로 무한한 것은 유한한 것의 단순한 저편이 아니라 그것을 지양된 것으로서 자기 자신 안에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 경우 똑같은 것이 이념에도 적용된다.
사실 칸트는 이념을 추상적 지성 규정들이나 심지어 단순히 감성적인 표상들(일상생활에서는 그와 같은 것들도 분명 이미 이념이라고 불리곤 한다)과 구별하여 이성에게 되돌려준 한에서 이념에 다시 명예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그 이념과 관련해서도 그는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것과 단순한 당위에 머물렀다.
그다음으로 또한 경험 인식의 내용을 형성하는 우리의 직접적 의식의 대상들을 단순한 현상들로서 파악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이것은 어쨌든 칸트 철학의 매우 중요한 결론으로서 여겨질 수 있다.
보통의(다시 말하면 감성적-지성적) 의식에게는 그가 아는 대상들이 그 개별화에서 자립적이고 자기에 기반하는 것으로서 여겨지며, 그것들이 서로 관계되고 서로에 의해 조건 지어진 것으로서 입증된다는 점에서, 그것들의 서로에 대한 이러한 상호적 의존성은 무언가 대상들에 외면적인 것이자 그것들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서 여겨진다.
그러나 그에 반해 주장되어야만 하는 것은 우리가 그에 관해 직접적으로 아는 대상들이 단순한 현상들이라는 것, 다시 말하면 그것들은 자기 존재의 근거를 자기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다른 것 안에서 지닌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 관건이 되는 것은 거기서 더 나아가 이 다른 것이 어떻게 규정되는가 하는 것이다.
칸트 철학에 따르면 우리가 그에 관해 아는 사물들은 다만 우리에 대한 현상들일 뿐이며, 그것들의 그 자체에서의 것은 우리에 대해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저편으로 머문다.
우리 의식의 내용을 형성하는 바로 그것이 단지 우리의 것일 뿐인 것, 다만 우리에 의해 정립된 것일 뿐이라는 이러한 주관적 관념론에 대해 순진무구한 의식은 당연히 불쾌감을 느꼈다.
참된 관계는 실제로는 우리가 그에 관해 직접적으로 아는 사물들이 우리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 자체에서도 단순한 현상들이라고 하는 것이며, 이리하여 유한한 사물들의 고유한 규정은 자기 존재의 근거를 자기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보편적인 신적 이념 안에서 지닌다고 하는 것이다.
그 경우 사물들에 대한 이러한 파악은 마찬가지로 관념론이라 불릴 수 있지만, 비판철학의 저 주관적 관념론과는 구별되어 절대적 관념론이라 표현되어야 한다.
이 절대적 관념론은 비록 보통의 실재론적 의식을 넘어선다고 할지라도, 사태에 따라서는 단순히 철학의 소유물로서만 여겨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요컨대 모든 종교적 의식 역시 현존재 하는 모든 것의 총체, 즉 일반적으로 현존하는 세계를 신에 의해 창조되고 통치되는 것으로 간주하는 한에서, 그 종교적 의식의 기초를 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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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경험적인 것이 사상을 확증해 주어야 한다면, 사상에 대해서는 당연히 지각들에서 정확히 지시될 수 있을 것이 요구될 것이다.
영혼에 대해 실체성, 단순성, 자기와의 동일성 그리고 물질적 세계와의 공동성 속에서 유지되는 자립성이 주장될 수 없다는 것, 이것은 형이상학적 심리학에 대한 칸트의 비판에서 오로지 다음의 것 위에서만, 즉 의식이 우리에게 영혼에 대해 경험하도록 하는 규정들은 바로 사유가 여기서 산출하는 그와 같은 규정들이 아니라고 하는 것 위에서만 세워진다.
그러나 위의 서술에 따르면 칸트 역시 인식 일반을, 아니 심지어 경험마저도 지각들이 사유된다는 점에, 다시 말하면 우선은 지각에 속하는 규정들이 사유 규정들로 전환된다는 점에 존립하게끔 한다.
정신에 대한 철학함이 영혼 사물로부터, 그리고 영혼의 단순성이나 합성성, 물질성 등의 범주들로부터, 따라서 그것들에 대한 물음들로부터 해방된 것은 언제나 칸트의 비판의 훌륭한 성과로 여겨져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형식들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에 관한 참다운 관점은 일상적인 상식에 대해서 조차도 그 형식들이 사상들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사상들이 자체적이고도 대자적으로 진리를 포함하지 않는다고 하는 관점일 것이다.
만약 사상과 현상이 서로 완전히 상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선은 하나나 다른 하나를 결함이 있는 것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칸트의 관념론에서는 그것이 이성적인 것에 관계하는 한에서 결함이 사상들로 전가되며, 그리하여 이 사상들은, 그것들이 지각된 것에나 지각의 범위에 제한되는 의식에 적합하지 않은 까닭에, 즉 사상들이 그러한 의식 속에서 부딪히지 않는 까닭에, 불충분할 것이다.
여기서는 사상의 내용이 그 자체 자신으로는 언명되지 않는다.
오류추리는 일반적으로 잘못된 추론인데, 그 잘못은 좀 더 자세히 하자면 두 전제에서 하나의 같
은 단어가 서로 다른 의미로 적용된다는 데 존립한다.
칸트에 따르면 합리적 심리학에서 오랜 형이상학의 방도는, 요컨대 여기서 영혼의 단순히 경험적일 뿐인 규정들이 그 영혼에 자체적이고도 대자적으로 속하는 것으로서 여겨지는 한에서, 그러한 오류추리에 기반하는 것이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단순성, 불변성 등등과 같은 술어들이 영혼에 덧붙여져서는 안 된다는 것은 전적으로 올바르지만, 그 까닭은 칸트가 그에 대해 제시한 이유, 즉 이성이 그에 의해 자기에게 지정된 한계를 넘어서게 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같은 추상적 지성 규정들이 영혼에 대해서는 너무 열악하고, 영혼은 한갓 단순한 것, 불변적인 것 등등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영혼은 물론 자기와의 단순한 동일성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활동적인 것으로서 자기를 자기 자신 안에서 구별하고 있는 데 반해, 오직 뿐인 것, 다시 말하면 추상적으로 단순한 것은 바로 그러한 것으로서는 동시에 죽은 것이다.
칸트가 오랜 형이상학에 대한 그의 논박을 통해 저 술어들을 영혼과 정신으로부터 떼어낸 것은 위대한 성과로서 여겨져야 하지만, 그에게서 그 까닭은 전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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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대상인 세계라는 무조건적인 것을 인식하고자 하는 이성의 시도에서 이성은 이율배반, 다시 말하면 같은 대상에 대해 두 개의 대립된 명제를 주장하는 데 빠지며, 게다가 이 명제들 각각 모두가 동등한 필연성을 가지고 주장되어야만 한다고 한다.
이로부터 밝혀지는 것은 그 규정들이 그러한 모순에 빠지는 세계적 내용이 그 자체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현상일 수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해결책[해소]은 모순이 자체적이고도 대자적으로 대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인식하는 이성에 속한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내용 자신, 요컨대 대자적 범주들이 모순을 초래하는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 언명된다. 이성적인 것에서 지성 규정들에 의해 정립되는 모순이 본질적이고 필연적이라고 하는 이 사상은 근래의 철학의 가장 중요하고도 가장 심오한 진보들 가운데 하나로 여겨져야 한다.
이 관점이 심오한 만큼이나 그 해결책은 진부하다.
그 해결책은 다만 세계적 사물들에 대한 애정에 존립할 뿐이다.
세계적 본질은 그것에 모순이라는 오점을 지니는 것이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모순은 다만 사유하는 이성에만, 정신의 본질에만 속해야 한다.
현상하는 세계가 고찰하는 정신에 모순들을 보여준다는 데 대해서는 분명 반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며, 현상하는 세계란 주관적 정신에 대해, 즉 감성과 지성에 대해 존재하는 바의 세계이다.
그러나 이제 세계적 본질이 정신적 본질과 비교될 때 이상하게 여겨질 수 있는 것은, 세계적 본질이 아니라 사유하는 본질, 이성이 자기 안에서 모순적인 것이라는 겸허한 주장이 어떠한 순진무구함을 가지고서 내세워지고 되풀이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성은 오직 범주들의 적용에 의해서만 모순에 빠진다는 표현이 사용되는 것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이 적용이 필연적이며 이성은 인식을 위해 범주들 이외에 다른 규정들을 지니지 않는다고 주장되기 때문이다.
인식은 실제로는 규정하고 규정되는 사유이다.
이성이 단지 공허하고 무규정적인 사유일 뿐이라면, 그것은 아무것도 사유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성이 결국 저 공허한 동일성으로 환원된다면, 그 이성도 결국 모든 내용과 내실을 가볍게 희생함으로써 다행스럽게도 모순에서 해방된다.
더 나아가 주의해둘 수 있는 것은 칸트가 이율배반을 좀 더 깊이 고찰하지 못한 까닭에 우선은 단지 네 개의 이율배반만을 제시하는 데 그쳤다는 점이다.
그는 이른바 오류추리에서와 마찬가지로 범주표를 전제함으로써 이 이율배반에 도달했으며, 그러함에 있어 그는 나중에 그토록 사랑받게 된 수법, 즉 대상의 규정들을 개념으로부터 도출하는 대신 그 대상을 단적으로 그 이전에 완결된 도식 밑에 정립하는 수법을 적용했다.
나는 이율배반에 대한 상론에서의 또 다른 곤궁한 점을 나의 『논리의 학』에서 기회가 닿을 때마다 제시한 바 있다.
주의해야 할 주요 문제는 이율배반이 단지 우주론에서 취해진 네 개의 특수한 대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종류의 모든 대상에, 즉 모든 표상과 개념 및 이념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 점을 알고 대상들을 이러한 특성에서 인식하는 것은 철학적 고찰의 본질적인 것에 속한다.
이 특성은 더 나아가 논리적인 것의 변증법적 계기로서 규정되는 바의 것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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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형이상학의 입장에서는 인식이 모순에 빠질 때 이 인식은 다만 우연한 잘못일 뿐이며 추론과 이치 추론에서의 주관적인 잘못에 기반한다고 가정되었다.
그에 반해 칸트에 따르면 사유가 무한한 것을 인식하고자 할 때 모순(이율배반)에 빠지는 것은 사유 자신의 본성에 놓여 있다.
그런데 앞 절의 주해에서 언급했듯이 이율배반의 제시야말로 그에 의해 지성 형이상학의 경직된 교조주의가 제거되고 사유의 변증법적 운동에 대한 지시가 이루어진 한에서 철학적 인식의 아주 중요한 촉진으로서 여겨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동시에 주의해야만 할 것은 칸트가 여기서도 사물들의 그 자체에서의 것에 대한 인식 불가능성이라는 한갓 부정적인 결과에 머물러 이율배반의 참되고 긍정적인 의미에 대한 인식으로 꿰뚫고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율배반의 참되고 긍정적인 의미는 일반적으로 모든 현실적인 것이 자기 안에 대립된 규정들을 포함하며, 그리하여 대상의 인식과 좀 더 자세하게는 개념 파악이란 바로 그 대상을 대립된 규정들의 구체적 통일로서 의식하게 된다는 것을 뜻할 뿐이라는 데 존립한다.
그런데 앞에서 제시되었듯이 오랜 형이상학은 바로 그것들에 대한 형이상학적 인식이 문제가 되었던 대상들의 고찰에서 추상적 지성 규정들을 그것들에 대립된 규정들을 배제한 채 적용하는 일에 착수했던 데 반해, 칸트는 어떻게 해서 그러한 방식으로 출현하는 주장들에 언제나 동등한 정당성과 동등한 필연성을 지니는 대립된 내용의 다른 주장들이 대립할 수 있게 되는지를 입증하고자 시도했다.
칸트는 이러한 이율배반들을 제시하는 데서 자기를 오랜 형이상학의 우주론에 제한했고, 그것을 논박하는 데서 범주들의 도식을 근저에 놓고서 네 개의 이율배반을 밝혀냈다.
첫 번째 이율배반은 세계가 공간과 시간에 따라 한정된 것으로서 생각될 수 있는지 아닌지의 물음에 관계된다.
두 번째 이울배반에서는 물질이 무한히 분할 가능한 것으로서 여겨질 수 있는지 아니면 원자들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여겨질 수 있는지의 딜레마가 다루어진다.
세 번째 이율배반은, 요컨대 세계 안의 모든 것이 인과 연관에 의해 조건 지어진 것으로서 여겨져야만 하는지 아니면 세계 안에서 또한 자유로운 본질, 다시 말하면 행위의 절대적인 시작점도 가정되어야 하는지가 물음으로서 제기되는 한에서, 자유와 필연성의 대립에 관계된다.
그러고 나서 여기에 마지막으로 네 번째 이율배반으로서 세계가 일반적으로 원인을 지니는지 아닌지의 딜레마가 덧붙여진다.
그런데 칸트가 이 이율배반들에 대한 논구에서 준수하는 방도는 우선은 다음과 같은 것, 즉 그가 거기에 포함된 대립된 규정들을 정립과 반정립으로서 서로 대립시켜 양자를 증명하고자 하는 것,
다시 말하면 양자를 그에 관한 추사유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서술하고자 하는 것인바, 그러함에 있어 그는 분명히 자기가 가령 변호 증명을 하기 위해 현혹하고자 했던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주의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칸트가 자신의 정립들과 반정립들을 위해 끌어들이는 증명들은 단순한 가상 증명들로서 여겨져야 한다.
왜냐하면 증명되어야 할 바로 그것이 언제나 이미 출발점을 이루는 전제들에 포함되어 있고, 단지 장황하고 간접증명적인 방도에 의해서만 매개의 가상이 산출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율 배반들을 내세운 것은, 바로 그에 의해 지성에 의해 그 분리에서 견지되는 저 규정들의 사실적인 통일이 (비록 우선은 단지 주관적이고 직접적으로 일 뿐일지라도) 언명된 한에서, 언제나 아주 중요하고 인정할 만한 가치가 있는 비판철학의 성과로 남는다.
그래서 예를 들어 앞에서 언급된 우주론적 이율배반들 가운데 첫 번째 것에는 공간과 시간이 연속적인 것으로서뿐만 아니라 또한 분리적인[비연속적인] 것으로서 고찰되어야 한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에 반해 오랜 형이상학에서는 단순한 연속성에 머물러 그에 따라서 세계가 공간과 시간에 따라 무한정한 것으로 고찰되었다.
각각의 모든 규정된 공간과 그와 마찬가지로 각각의 모든 규정된 시간이 넘어서질 수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올바르다.
하지만 공간과 시간이 오직 그 규정성에 의해서만(다시 말하면 여기와 지금으로서만) 현실적이고 이 규정성이 그것들의 개념 속에 놓여 있다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올바르다.
더 나아가 똑같은 것이 앞에서 제시된 그 밖의 이율배반들, 예를 들어 자유와 필연성의 이율배반에도 적용된다.
이 이율배반에서의 사정은 좀 더 자세히 고찰하면 다음과 같은 것, 즉 지성이 자유와 필연성에서 이해하는 바로 그것은 실제로는 다만 참된 자유와 참된 필연성의 관념적 계기들일 뿐이며, 이렇게 분리된 양자에게는 진리가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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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이성 대상은 신인데 이 신이 인식되어야, 다시 말하면 사유적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성에게 모든 규정은 다만 단순한 동일성에 대한 제한, 부정 그 자체일 뿐이다.
그리하여 모든 실재성은 오직 몰제한적으로만, 다시 말하면 무규정적으로만 받아들여져야 하며, 신은 모든 실재성의 총체로서나 가장 실재적인 본질로서 단순한 추상물로 되고, 규정을 위해서는 다만 그와 마찬가지로 단적으로 추상적인 규정성, 존재만이 남는다.
여기서 또한 개념이라고도 불리는 추상적 동일성과 존재는 그 합일이 이성에 의해 추구되는 바의 두 계기이다.
그 합일이 이성의 이상이다.
이 합일은 두 개의 길 또는 형식을 허락한다.
요컨대 존재에서 시작하여 그로부터 사유의 추상물로 이행할 수 있거나, 역으로 추상물로부터 존재로의 이행이 실행될 수도 있는 것이다.
전자의 존재에서 시작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직접적인 것으로서의 존재는 무한히 다양하게 규정된 존재, 충만한 세계로서 제시된다.
이 충만한 세계는 좀 더 자세하게는 무한히 많은 우연성 일반의 모임으로서 (우주론적 증명에서) 또는 무한히 많은 목적과 합목적적인 관계의 모임으로서(물리 신학적 증명에서) 규정될 수 있다.
이러한 충만한 존재를 사유한다는 것은 그것에게서 개별성과 우연성의 형식을 제거하고, 그것을 이러한 첫 번째의 존재와는 서로 다른 하나의 보편적이고 자체적이고도 대자적으로 필연적이며, 보편적 목적들에 따라 자기를 규정하는 활동적인 존재로서, 신으로서 파악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발걸음에 대한 비판의 주요 통찰은 그것이 하나의 추론, 하나의 이행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지각들과 그것들의 집합, 즉 세계가 그것들 그 자체에서 사유가 저 내용을 그것에로 순화시키는 보편성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하여 이 보편성이 저 경험적 세계 표상에 의해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상이 경험적 세계 표상으로부터 신에게로 상승한다는 것에는 흄의 입장이 - 즉 지각들을 사유하는 것, 다시 말하면 지각들로부터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것을 끌어내는 것을 허용될 수 없는 것으로 선언하는 입장이 대립된다
인간이 사유하고 있는 까닭에, 철학과 마찬가지로 상식도 경험적 세계관에서 출발하여 거기서 벗어나 기어이 신에게로 고양되고자 할 것이다.
이러한 고양은 그 기초로 세계에 대한 한갓 감성적이고 동물적인 고찰이 아닌 사유하는 고찰 이외에 다른 것을 지니지 않는다.
사유에 대해 그리고 오직 사유에 대해서만 세계의 본질, 실체, 보편적 위력과 목적 규정이 존재한다.
이른바 신의 현존재에 대한 증명들은 다만 사유하는 자이자 감성적인 것을 사유하는 정신의 자기 안에서의 발걸음에 관한 기술들과 분석들로서 여겨질 수 있을 뿐이다.
감성적인 것 너머로의 사유의 고양, 유한한 것을 넘어서 무한한 것으로 향하는 사유의 밖으로 나감, 감성적인 것의 계열들을 끊고 초감성적인 것을 향해 이루어지는 비약, 이 모든 것은 사유 자신이며, 이러한 이행 작용은 사유일 뿐이다.
그러한 이행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면, 이것은 사유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동물은 그러한 이행을 이루지 못한다. 그들은 감성적 감각과 직관에 머무른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종교를 갖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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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이러한 고양에 대한 비판과 관련해서는 일반적으로뿐만 아니라 또한 특수하게 두 가지 점에 주의해야 한다.
첫째, 그 고양이 추론(이른바 신의 현존재에 대한 증명들)의 형식을 취하게 된다면, 그 출발점은 당연히 그 어떤 방식으로든 우연성들이나 목적들과 합목적적 관계들의 집합으로서 규정되는 세계관이다.
이 출발점은 사유가 추론을 행하는 한에서 사유 속에서 확고한 기초로서 그리고 이 소재가 우선은 그러하듯이 전적으로 경험적인 것으로서 머물러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출발점과 거기로 전진이 이루어진 종결점의 관계는 존재하고 머무르는 하나로부터 그와 마찬가지로 역시 존재하는 다른 것에로의 추론으로서 오직 긍정적일 뿐인 것으로서 표상된다.
하지만 사유의 본성을 오직 이러한 지성 형식에서만 인식하고자 하는 것은 커다란 오류이다.
경험적 세계를 사유한다는 것은 오히려 본질적으로 그 경험적 형식을 변화시켜 그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전환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와 동시에 사유는 저 기초에 대해 부정적 활동성을 행사한다.
지각된 소재는 보편성에 의해 규정될 때 그것의 최초의 경험적 형태 속에 머무르지 않는다.
껍데기의 제거 및 부정과 더불어 지각된 것의 내적인 내실이 끌어내어진다.
신의 현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증명들이 세계로부터 신에게로 향하는 정신의 고양에 대한 결함 있는 해석들이자 기술들인 까닭은 그것들이 이 고양 가운데 포함된 부정의 계기를 표현하지 못하거나 오히려 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세계가 우연적이라는 것에는 세계가 다만 몰락하는 것, 현상하는 것, 자체적이고도 대자적으로 허무한 것일 뿐이라는 사실 자신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정신의 고양이 지니는 의미는 세계에 실로 존재가 속하기는 하지만 그 존재는 가상일 뿐 참다운 존재가 아니고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는 것, 이 절대적 진리는 오히려 저 현상의 저편에서 오직 신 안에만 있고 신만이 참다운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고양이 이행이자 매개(媒介 - 헤겔의 변증법에서 어떤 사물이 존재할 조건이 되는 일, 모든 사물이 따로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함)라는 점에서, 그것은 그와 마찬가지로 이행과 매개의 지양(止揚 - 변증법의 중요한 개념으로, 어떤 것을 그 자체로는 부정하면서 한층 더 높은 단계에서 이것을 긍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신이 그에 의해 매개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 즉 세계가 오히려 허무한 것으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오직 세계 존재의 허무함만이 고양의 유대이며, 그리하여 매개하는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사라짐으로써 이 매개 자신 안에서 매개가 지양된다.
야코비가 지성의 증명과 투쟁하는 가운데 붙잡는 것은 주로 두 존재자 사이의 관계로서 오직 긍정적인 것으로서만 파악된 저 관계이다.
그는 지성의 증명에 대해 그것이 무조건적인 것에 대한 조건들(세계)을 찾는다고, 그리고 그러한 방식으로는 무한한 것(신)이 근거 지어지고 의존적인 것으로서 표상된다고 정당하게 비난한다.
하지만 정신 속에 존재하는 바의 저 고양은 스스로 이러한 가상을 바로잡는다.
저 고양의 내실 전체는 오히려 이 가상의 바로잡음이다.
그러나 야코비는 매개 속에서 매개 자신을 지양하는 본질적 사유의 이러한 참다운 본성을 인식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그가 오직 반성할 뿐인 지성에게 퍼붓는 올바른 비난을 잘못되게도 사유 일반에, 따라서 또한 이성적 사유에도 적중하는 비난으로 여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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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 계기를 간과한 것에 관해 해명하기 위해 예를 들어 스피노자 주의에 퍼부어지는 비난, 즉 스피노자주의가 범신론과 무신론이라고 하는 비난이 인용될 수 있다.
스피노자의 절대적 실체는 물론 아직은 절대적 정신이 아니며, 신이 절대적 정신으로서 규정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정당하게 요구된다.
그러나 만약 스피노자의 규정이 그가 신을 자연, 즉 유한한 세계와 뒤섞어 세계를 신으로 만든다는 식으로 표상된다면, 거기서 전제되는 것은 유한한 세계가 참다운 현실성, 긍정적 실재성을 소유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전제에서는 신과 세계의 통일과 더불어 신이 단적으로 유한하게 되고 실존의 단순한 유한하고 외면적인 다양성으로 격하된다.
스피노자가 신을 그렇듯 신과 세계의 통일이 아니라 사유와 연장(물질적 세계)의 통일이라고 정
의한다는 것을 도외시한다고 하더라도, 이 통일이 저 첫 번째의 전적으로 부적절한 방식으로 받아들여질 때조차도 이미 이 통일 속에는 스피노자의 체계에서는 오히려 세계가 그에 현실적 실재성이 속하지 않는 오직 현상으로서만 규정된다는 점이 놓여 있으며, 그리하여 이 체계는 오히려 무우주론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신이 그리고 오직 신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철학은 조금이라도 무신론으로 치부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원숭이, 암소, 대리석상, 동상 등등을 신으로서 숭배하는 민족들에게도 종교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표상의 감각에 놓여 있는 사람들에게는 세계라고 불리는 이러한 표상의 유한성 집합이 현실적 실재성을 지닌다고 하는 그들 자신의 고유한 전제를 포기하는 것이 훨씬 더 꺼림칙하다.
가령 그렇게 표현될 수 있듯이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와 같은 어떤 것을 가정하는 것을 사람들은 쉽사리 전적으로 불가능하거나 최소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생각될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한다.
사람들은 그야말로 명예롭지 못하게도 하나의 체계가 세계를 부인하는 것보다 신을 부인하는 것을 훨씬 더 쉽게 믿는다.
그들은 세계가 부인되는 것보다도 신이 부인되는 것이 훨씬 더 이해할 만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두 번째 지적되어야 할 점은 저 사유하는 고양이 우선 획득하는 내실에 대한 비판에 관련된다.
만약 이 내실이 단지 세계의 실체, 세계의 필연적 본질, 합목적적으로 정돈하고 지배하는 원인 등등과 같은 규정들에만 존립한다고 하면, 물론 그것은 신에게서 이해되거나 이해되어야 할 것에 적합하지 않다.
하지만 신에 관한 표상을 전제하고 그러한 전제에 따라 결과를 판정하는 수법을 도외시한다면, 저 규정들은 이미 커다란 가치를 지니며 신의 이념에서의 필연적 계기들이다.
이러한 도정에서 그 참다운 규정에서의 내실, 신의 참다운 이념을 사유 앞으로 가져오기 위해서는 물론 출발점이 하위의 내용으로부터 취해져서는 안 된다.
세계의 한갓 우연적일 뿐인 사물들이란 매우 추상적인 규정이다.
유기적 형성물들과 그것들의 목적 규정들은 좀 더 고차적인 영역, 생명에 속한다.
하지만 살아 있는 자연에 대한 고찰과 목적들에 대한 현존하는 사물들의 그 밖의 관계에 대한 고찰이 목적들의 사소함에 의해, 아니 심지어 목적들과 목적들의 관계들에 대한 유치하기까지한 제시들에 의해 불순하게 될 수 있다는 점 이외에, 단지 살아 있을 뿐인 자연 자신은 실제로는 아직 그로부터 신의 이념의 참다운 규정이 파악될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신은 살아 있는 것 이상인바, 신은 정신이다.
사유가 출발점을 취하되 가장 가까운 출발점을 취하고자 하는 한에서, 오로지 정신적 자연(본성)만이 절대자의 사유를 위한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참다운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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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스피노자에 대한 이 기이한 '비판적 옹호'는 솔로몬 마이몬에 의해 처음으로 제공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헤겔의 무신론 규정은 다음과 같다.
‘단적인 유한자만이 있고, 따라서 마찬가지로 우리만이 있지만,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무신론이다.
이리하여 유한자가 절대적이 되고, 그것이 실체적인 것으로 된다.
그 경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사 강의)
이러한 규정에서 보면 스피노자주의를 무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정곡을 찌르지 못한다고 헤겔은 말한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유한한 현실에는 아무것도 없고 유한한 현실은 아무런 진리성도 갖지 않으며,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신뿐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겔의 입장에서 보면 스피노자주의는 무신론이 아니라 '무우주론'이다.
따라서 이것을 무신론이라고 논란을 벌이는 신학은 사실은 그 점에서 신 안으로 지양되어버린 자신이라는 무, 자신과 세계의 몰락을 감지하고 도리어 유한한 것과 현세적인 것에 대한 욕망을 보존하고자 하는 무신론이다.
어쨌든 헤겔은 '스피노자는 근대 철학의 주안점이다. 스피노자주의자인가 그렇지 않으면 철학이 아닌가이다’ (철학사 강의)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스피노자 철학을 높이 평가한다.
예나 시대의 헤겔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체계에서는 무한실체와 유한자의 관계가 긍정과 부정, 전체와 부분의 관계로서 파악되는바, 무한실체는 부정적 존재인 유한자를 자기의 부분으로서 포함하는 절대 긍정의 전체로서 포착되고 있으며(믿음과 지식), 이러한 파악이야말로 참된 무한자로서의 절대자와 이에 대한 유한자의 관계에 관한 올바른 인식을 제시한다.
'제한된 것은 절대자 안에서, 즉 동일성으로서 정립되어 있는 한에서만 존립한다.’
(피히테와 셀링 철학 체계의 차이)
이러한 동일성의 인식을 '사변'이라고 부르는 헤겔이 스피노자의 체계에서 발견한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사변'의 관점이었다.
'사변'의 관점에서 보면, 유한한 존재들은 그것 자체로서의 실재성을 지니지 않는 절대자의 단순한 현상으로서 파악되는데, 이와 같은 파악은 유한한 존재들, 즉 세계를 표상지의 산물로서 파악하고 긍정에 대한 부정으로서 파악하는 스피노자의 견지에서 명확히 보인다.
실체성의 연관 이야말로 '사변의 참된 연관'이다(『피히테와 셸링 철학 체계의 차이』).
요컨대 헤겔은 이러한 스피노자 이해의 입장에서 스피노자의 체계를 '무우주론'으로 특징 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무한실체와 자기의 절대자를 등치시키고 이 점에서 스피노자 철학을 평가하는 견해는 헤겔의 절대지에 관한 사상의 진전에 따라 곧바로 방기된다.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명시되는 것처럼 절대자는 ‘실체'로서 파악될 뿐 아니라 나아가 '정신'으 로서 내지는 '주체'로서 파악되어야만 한다고 하는 것이 이후의 헤겔이 취하는 견지이다.
이 견지에서는 스피노자의 무한실체 사상은 이미 절대자에 대한 완전한 파악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스피노자의 입장은 절대자를 실체로서 파악하는 한에서 '모든 철학적 사유의 본질적인 시원’을 제시하는 것이지만, 아직 그것은 시원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절대적 실체는 참된 것이지만, 아직 완전히 참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기 안에 활동과 생동성을 지니는 것으로서도 생각되어야만 하며, 바로 이에 의해 정신으로서 규정되어야만 한다. (철학사 강의)
절대자를 '정신' 내지 ‘주체'로서 파악하는 것, 그것은 절대자를 '부정의 부정'의 과정을 통해 성립하는 긍정으로서 파악하는 것, 즉 단순한 무한자가 자기 자신을 부정하여 유한자로 되고, 나아가 이 유한자로서의 자기를 부정하여 자기 자신으로 복귀하는 무한자의 '자기 자신을 정립하는 운동'으로서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무한실체는 그러한 부정의 계기를 포함하지 않는 단순한 긍정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헤겔에 따르면 실체를 '주체로서 파악’하는 관점이 스피노자에게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었
던 것은 아니다.
헤겔이 평가하는 것은 실체를 '자기원인’이라고 하는 스피노자의 관점이다.
‘'자기원인이란 중요한 표현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사변적인 개념이다.••••• 만약 스피노자가 자기 원인에 존재하는 것을 좀 더 상세하게 전개했더라면 그의 실체는 경직된 것이 아니게 되었을 것이다. (철학사 강의).
그러나 스피노자는 ‘자기원인'이라는 '사변적인 개념' 에 참으로 사변적인 전개를 부여할 수 없었는데, 이것은 그가 사용한 기하학적 방법에 기인한다.
절대자를 주체로서 제시하는 것, 그것은 절대자를 자기 매개 운동의 성과로서 제시하는 것이며, 이것은 학문의 처음부터 ‘직접적이고 무매개적으로 가정되는' 것과 같은 ‘정의’라는 단언의 형식에서는 본래 수행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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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그에 의해 성립되어야 할 합일의 다른 길은 사유의 추상물로부터 오직 존재만이 그것을 위해 남아 있는 규정으로 전진한다.
신의 현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이 그것이다.
여기서 출현하는 대립은 사유와 존재의 대립이다.
왜냐하면 첫 번째 길에서는 존재가 양 측면에 공통적이고 대립은 다만 개별화된 것과 보편적인 것의 구별에만 관계되기 때문이다.
지성이 이러한 다른 길에 맞세우는 것은 그 자체에서 방금 제시되었던 것과 똑같은 것, 요컨대 경험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이 발견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으로 보편적인 것에는 규정된 것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며, 여기서 규정된 것은 존재이다.
또는 존재는 개념에서 도출될 수도 없고 분석으로 끌어내어질 수도 없다.
존재론적 증명에 대한 칸트의 비판이 그토록 무조건적으로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져 수용되게 된 것은 의심할 바 없이 칸트가 사유와 존재 사이의 구별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하려고 백 탈러의 예를 사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백 탈러는 그것이 단지 가능할 뿐이든 현실적이든 개념에 따라서는 똑같이 백 탈러이다.
그러나 나의 재산 상태에 대해서는 이것은 본질적인 구별을 이룬다.
내가 생각하거나 표상하는 그와 같은 것이 그렇다고 해서 아직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즉 표상 작용이나 또한 개념마저도 존재를 위해 충분하지 않다는 사상만큼이나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백 탈러와 같은 것을 개념이라고 부르는 것이 부당하게 야만이라 불리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도외시한다고 하더라도, 철학적 이념에 반대하여 사유와 존재는 서로 다르다고 언제까지나 되풀이하는 자들은 분명 우선은 결국 철학자들에게도 그것이 마찬가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전제해야 할 것이다.
사실 이보다 더 진부한 지식으로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다음으로 고려되어야만 할 것은 신에 대해 말할 때는 이것이 백 탈러나 그 어떤 특수한 개념, 즉 표상이나 그것이 어떤 명칭을 갖고자 하는 것이든 그런 것들과는 그 종류가 다른 대상이라고 하는 점이다.
실제로 모든 유한한 것은 그것의 현존재가 그것의 개념과 상이하다고 하는 것이자 오직 그러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신은 분명히 오직 실존하는 것으로서 사유 될 수 있을 뿐인 것이어야 하는바, 거기서 개념
은 존재를 자기 안에 포함한다.
개념과 존재의 이러한 통일이야말로 신의 개념을 이루는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이것은 아직은 신의 형식적 규정이며, 그런 까닭에 이 규정은 실제로는 다만 개념 자신의 본성을 포함할 뿐이다.
그러나 개념이 이미 자기의 전적으로 추상적인 의미에서 존재를 자기 안에 포함한다는 것은 쉽게 통찰될 수 있다.
왜냐하면 개념은, 그것이 그 밖에 어떻게 규정되든지 간에, 최소한 매개의 지양을 통해 출현하는, 그리하여 그 자신이 자기 자신에 대한 직접적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는 이러한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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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분명 정신의 이러한 가장 내적인 것, 즉 개념이나 또한 자아나 신이라고 하는 완전히 구체적인 총체성도 존재와 같이 그토록 빈곤한 규정, 아니 가장 빈곤하고 가장 추상적인 규정을 자기 안에 포함하지 못할 만큼 전혀 풍부하지 못하다고 한다면 기묘한 일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상에 대해서는 그 내실에 따라 존재보다 더 적은 것은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다.
다만 다음과 같은 것, 즉 사람들이 가령 존재에서 우선 표상하는 것, 요컨대 내가 여기서 내 앞에 지니는 종이의 실존과 같은 외면적이고 감성적인 실존은 더 적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차피 제한되고 무상한 사물의 감성적 실존에 대해서는 말하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사상과 존재가 서로 다르다고 하는 비판의 진부한 논평은 인간에게서 가령 인간의 정신이 신의 사상으로부터 신이 존재한다고 하는 확신에 이르는 발걸음을 기껏해야 방해할 수 있을 뿐, 빼앗을 수는 없다.
이 이행, 즉 신의 사상과 그의 존재의 절대적 분리 불가능성은 또한 직접지나 신앙의 견지에서 그 나름의 정당성을 가지고서 다시 복구된 것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논의할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유에 대해서는 그 최고의 정점에서 규정성이 무언가 외면적인 것으로 머문다.
여기서 언제나 이성이라 불리는 것은 다만 단적으로 추상적인 사유에 머물 뿐이다.
이리하여 결론은 이성이 경험들의 단순화와 체계화를 위한 형식적 통일 이외에 아무것도 제공하지 못하며, 진리의 규준이지 기관이 아니고, 무한한 것의 교의가 아니라 단지 인식의 비판만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비판은 그 최종적 분석에서 사유란 자기 안에서 다만 무규정적 통일이자 이러한 무규정적 통일의 활동일 뿐이라는 단언에 존립한다.
칸트는 실로 이성을 무조건적인 것의 능력으로서 파악했다.
그렇지만 이성이 단순히 추상적 동일성으로 환원될 뿐이라면, 거기에는 동시에 이성의 무조건성에 대한 포기가 놓여 있으며, 그 경우 이성은 실제로는 공허한 지성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성은 오직 외부로부터 자기에게 낯선 내용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규정하고 이리하여 자기의 내용에서 자기 자신 곁에 존재함으로써만 무조건적이다.
그러나 칸트에 따르면 이성의 활동은 분명히 지각을 통해 제공된 소재를 범주들의 적용을 통해
체계화하는 것, 다시 말하면 외면적인 질서로 가져오는 것에만 존립하며, 거기서 그 활동의 원리
는 단지 무모순성의 원리일 뿐이다.
실천이성은 자기 자신을, 게다가 보편적인 방식으로 규정하는, 다시 말하면 사유하는 의지로서 파악된다.
실천이성은 자유의 명령적이고 객관적인 법칙들, 다시 말하면 무엇이 행해져야 하는지를 말하는 법칙들을 제공해야 한다
여기서 사유를 객관적으로 규정하는 활동(다시 말하면 사실상 하나의 이성)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정당성은 실천적 자유가 경험을 통해 증명될 수 있으리라는 것, 다시 말하면 자기의식의 현상 속에서 지시될 수 있으리라는 것으로 정립된다.
의식 안에서의 이러한 경험에 대해서는 결정론이 그와 마찬가지로 경험으로부터 그에 반대하여 제시하는 모든 것이, 특히 인간들 사이에서 권리와 의무로 여겨지는 것의, 다시 말하면 객관적이어야 하는 자유의 법칙들의 무한한 상이성으로 부터의 회의주의적인(또한 흄적인) 귀납이 이의를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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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적 사유가 자기의 법칙으로 삼는 것을 위해서는, 즉 실천적 사유가 자기 자신 안에서 규정하는 것의 기준을 위해서는 또다시 지성의 그와 같은 추상적 동일성, 즉 규정 작용에서 어떠한 모순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현존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실천이성은 이론이성의 최종적인 것이라고 할 형식주의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나 이 실천이성은 보편적 규정, 즉 선을 단지 자기 안에서만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이 세계적 현존재, 즉 외면적 객관성을 가져야 한다고, 다시 말하면 사상이 단순히 주관적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객관적이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데서 비로소 좀 더 본래적으로 실천적이다.
실천이성의 이 요청에 대해서는 나중에 논의할 것이다.
칸트는 이론이성에 대해서는 부인한 것 - 자유로운 자기 규정 - 을 실천이성에 대해서는 분명히 시인했다.
칸트 철학이 커다란 호의를, 게다가 전적으로 정당하게 얻도록 해 준 것은 주로 그 철학의 이 측면이다.
이와 관련하여 칸트에게 마땅히 돌려져야 하는 공적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가 지배적인 것으로서 발견한 바로 그 형태의 실천철학과 좀 더 자세하게는 도덕철학을 눈앞에 떠올려 보아야 한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행복주의의 체계였는데, 그 체계로부터는 인간의 사명에 대한 물음에 대해 인간은 자기의 행복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대답이 주어졌다.
그런데 행복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특수한 경향, 원망, 욕구 등등을 만족시키는 것이 이해되었다는 점에서, 이리하여 우연적이고 특수한 것이 의지와 그 활동의 원리로 되었다.
그때 칸트는 자기 안에 어떠한 확고한 발판도 결여하고 모든 자의와 기분에 문을 여는 이러한 행복주의에 실천이성을 대립시킴과 동시에 보편적이고 모두에 대해 똑같이 구속력 있는 의지의 규정에 대한 요구를 언명했다.
앞의 절들에서 주의해 두었듯이 칸트에 따르면 이론이성은 단지 무한한 것의 부정적 능력일 뿐이고, 고유한 긍정적 내용은 없이 경험 인식의 유한한 것을 통찰하는 데 제한되어 있어야 하는 데 반해, 그는 실천이성의 긍정적 무한성을 분명히 인정했으며, 게다가 의지에 보편적 방식으로, 다
시 말하면 사유하면서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능력을 돌리는 방식으로 그리했다.
그런데 의지는 실로 이러한 능력을 소유하며, 인간이 오직 그 능력을 소유하고 자기의 행위에서 그 능력을 사용하는 한에서만 자유롭다는 것을 아는 것은 대단한 중요성을 지닌다.
하지만 이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의지나 실천이성의 내용에 대한 물음이 대답되어 있는 것은 아직 아니다.
그 밖에 인간은 선을 자기 의지의 내용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해질 때는 곧바로 내용, 다시 말하면 이 내용의 규정성에 대한 물음이 다시 제기되며, 의지의 자기 자신과의 일치라는 단순한 원리를 가지고서나 의무를 위해 의무를 행하라는 요구를 가지고서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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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하는 판단력에는 직관하는 지성의 원리가 돌려지는바, 다시 말하면 거기서는 보편적인 것(추상적 동일성)에 대해 우연적이고 그것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는 특수한 것이 이 보편적인 것 자신에 의해 규정된다
이러한 것은 예술과 유기적 자연의 산물들에서 경험된다.
판단력 비판은 거기서 칸트가 이념의 표상, 아니 그 사상을 언명했다고 하는 탁월한 점을 지닌다.
직관적 지성, 내적 합목적성 등등의 표상은 동시에 그 자신에서 구체적인 것으로서 사유되는 보편적인 것이다.
따라서 오로지 이 표상들에서만 칸트 철학은 사변적으로 나타난다.
많은 사람, 특히 실러는 예술미의 이념, 즉 사상과 감성적 표상의 구체적 통일의 이념에서 분리하는 지성의 추상들로부터의 탈출구를 발견했으며, - 다른 이들은 자연적 생동성이든 지적 생동성이든 생동성 일반의 직관과 의식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 예술 산물 및 살아 있는 개별성은 실로 그 내용에서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칸트는 또한 내용에 따라서도 포괄적인 이념을 자연 내지 필연성과 자유의 목적과의 요청된 조화 속에, 즉 실현된 것으로서 생각되는 세계의 궁극 목적 속에 세워놓는다.
그러나 그렇게 불릴 수 있듯이 사상의 게으름은 이러한 최고의 이념에 있어 당위에서 궁극 목적의 현실적 실현에 맞서서 개념과 실재성의 분리되어 있음을 견지하는 너무나 손쉬운 탈출구를 지닌다.
그에 반해 살아 있는 유기적 조직들과 예술미의 현재는 또한 감수성과 직관에 대해서도 이미 이상의 현실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대상들에 대한 칸트의 반성들은 의식을 구체적 이념의 파악과 사유로 이끌어가기에 특히 적합할 것이다.
여기에는 직관의 특수한 것에 대한 지성의 보편적인 것의 관계에 대해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에 관한 학설에서 근저에 놓여 있는 것과는 다른 관계에 대한 사상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그 사상과 저 관계가 참다운 관계라는, 아니 진리 자신이라는 통찰이 결합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통일은 단지 그것이 유한한 현상들에서 실존하게 되고 경험에서 제시되는 대로만 받아들여진다.
그러한 경험은 우선은 주관에서 한편으로는 천재, 즉 미적 이념들을 산출하는 능력, 다시 말하면 이념에 이바지하고 사유할 수 있게 하되 그러한 내용이 개념에서 표현되어 있거나 거기에서 표현될 수 있게 하지는 못하는 자유로운 상상력의 표상들을 산출하는 능력을 제공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취미 판단, 즉 자유로운 직관들 또는 표상들의 합법칙적인 지성에 대한 조화의 감정을 제공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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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가 살아 있는 자연 산물들을 위한 반성하는 판단력의 원리는 목적 즉 활동적인 개념, 자기 안에서 규정되고 규정하는 보편적인 것으로서 규정된다.
동시에 목적이 그것에서 실현되는 수단과 재료에 대해 그 목적이 단지 외면적 형식일 뿐인 외면적이거나 유한한 합목적성의 표상은 제거된다.
그에 반해 살아 있는 것에서는 목적이 질료 안에 내재적인 규정이자 활동성이며, 모든 지절이 상호적으로 수단일 뿐만 아니라 또한 목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비록 그러한 이념에서 목적과 수단, 주관성과 객관성의 지성 관계가 지양되어 있다 할지라도, 이제 다시 이와 모순되게 목적이 오직 표상으로서만, 다시 말하면 주관적인 것으로서만 실존하고 활동하는 원인으로 설명되며, - 이와 더불어 또한 목적 규정도 단지 우리의 지성에 속하는 판정의 원리로 설명될 뿐이다.
이성은 단지 현상들만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 일단 비판철학의 결론이 된 이후에도, 우리는 최소한 살아 있는 자연에 대해서는 두 개의 똑같이 주관적인 사유 방식들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것이며, 칸트의 서술 자신을 따라 자연 산물들을 단지 질, 원인과 결과, 합성, 구성 요소들 등등의 범주들에 따라서만 인식하지 않아야 할 책무를 지닐 것이다.
내적 합목적성의 원리는, 그것이 학문적 적용에서 견지되고 전개되었더라면, 그 합목적성에 대한 전적으로 다른 좀 더 고차적인 고찰 방식을 가져왔을 것이다.
이 원리에 따른 전적으로 무제한적인 이념은 이성에 의해 규정된 보편성, 절대적 궁극 목적, 선이 세계 속에서 현실화할 것인바, 게다가 제3자에 의해, 즉 이러한 궁극 목적을 스스로 정립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위력, 요컨대 신에 의해 현실화하리라는 것이다.
이리하여 절대적 진리인 신에게서는 보편성과 개별성, 주관성과 객관성의 저 대립들이 해소되어 비자립적이고 참되지 않은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하지만 세계의 궁극 목적이 그에 정립되는 선은 처음부터 단지 우리의 선으로서만, 우리의 실천이성의 도덕법칙으로서만 규정되어 있다.
그리하여 통일은 세계 상태 및 세계 사건들과 우리의 도덕성의 일치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 밖에 이러한 제한을 지니고서도 궁극 목적, 선은 몰규정적인 추상물이자 또한 의무이어야 하는 바의 것이기도 하다.
좀 더 자세히 하자면 이러한 조화에 반하여 이 조화의 내용에서 참되지 않은 것으로서 정립된 대립이 다시금 일깨워지고 주장되며, 그리하여 조화는 단지 주관적일 뿐인 것으로서, - 즉 단지 있어야 할 뿐인 것, 다시 말하면 동시에 실재성을 지니지 않는 그러한 것으로서 - 다만 주관적 확신이 속할 뿐 진리는 속하지 않는, 다시 말하면 이념에 상응하는 저 객관성은 속하지 않는 믿어진 것으로서 규정된다.
만약 이러한 모순이 이념의 실현이 시간 속으로, 즉 이념 역시 거기에 존재하는 미래로 옮겨짐으로써 은폐되는 것으로 보인다면, 시간과 같은 그러한 감성적 조건은 오히려 모순 해소의 반대이며, 그에 상응하는 지성 표상, 즉 무한 진행은 직접적으로 영속적으로 정립된 모순 자신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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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철학에서 인식의 본성으로 밝혀지고 시대의 선입견들, 다시 말하면 보편적 전제들의 하나로까지 고양된 결론에 대해서는 또 하나의 일반적 논평이 언급될 수 있다.
각각의 모든 이원론적 체계, 그러나 특히 칸트의 이원론적 체계에서 그 근본 결함은 바로 조금 전에 자립적인 것으로서, 따라서 합일시킬 수 없는 것으로서 설명되었던 것을 합일시키고자 하는 비일관성에 의해 나타난다.
방금 합일된 것이 참다운 것으로 설명되었던 만큼이나 곧바로 오히려 그것들의 진리로서의 합일에서 그 자체로 존립함이 부인되었던 양 계기가 오직 그렇듯 분리된 대로만 진리와 현실성을 갖는다는 것이 참다운 것으로 설명된다.
그러한 철학함에서는 이러한 갈팡질팡하는 것 자신과 더불어 이 개별적 규정들 각각 모두가 불만족스러운 것으로 설명된다고 하는 단순한 의식이 결여해 있으며, 결함은 두 사상을 - 형식에 따라서는 오직 두 가지만이 현존한다 - 통합할 수 없는 단순한 무능력에 존립한다.
그런 까닭에 한편으로는 지성이 단지 현상만을 인식한다는 것을 시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식은 더는 나아갈 수 없는바, 이러한 것이 인간적 앎의 자연적인 절대적 제한이라고 말함으로써 이 인식을 절대적인 어떤 것으로서 주장하는 것은 너무나도 커다란 비일관성이다.
자연적 사물들은 제한되어 있으며, 그것들이 단지 자연적 사물일 뿐인 것은 그것들이 자기의 보편적 제한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한에서, 그것들의 규정성이 그것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직 우리에 대해서만 제한인 한에서다.
어떤 것이 제한, 결함으로서 알려지는 것, 아니 감각되는 것은 오직 우리가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 있기 때문일 뿐이다.
살아 있는 사물들은 생명 없는 것들에 비해 고통의 특권을 지닌다.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해서조차 개별적 규정성은 부정적인 것의 감각으로 된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것으로서의 그것들은 개별적인 것을 넘어서 있는 생명성이라는 보편성을 자기들 안에 지니고, 그것들 자신의 부정적인 것에서도 여전히 자기를 유지하고 이러한 모순을 자기들 안에 실존하는 것으로서 감각하기 때문이다.
이 모순은 오직 자기의 생명감이라는 보편성과 그것에 대해 부정적인 개별성이라는 양자가 하나의 주체 안에 있는 한에서만 그들 안에 존재한다.
인식의 제한, 결함도 그와 마찬가지로 오직 보편적인 것, 즉 전체와 완성된 것의 현존하는 이념과의 비교에 의해서만 제한, 결함으로서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어떤 것을 유한한 것이나 제한된 것이라고 부르는 것이야말로 바로 무한한 것, 무제한적인 것의 현실적 현재에 대한 증명을 포함한다는 것과 한계에 대한 앎은 오직 무한정적인 것이 이편에서 의식 안에 존재하는 한에서만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통찰하지 못하는 것은 다만 몰의식성일 뿐이다.
인식에 관한 저 결론에 대해서는 또 다른 논평, 즉 칸트 철학은 학문들의 취급에 아무런 영향력도 지닐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이 덧붙여 질 수 있다.
칸트 철학은 일상적 인식의 범주들과 방법을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놔둔다.
그 당시의 학문적 저술들에서 이따금 칸트 철학의 명제들을 가지고서 논의가 시작되어 있을 때, 논구 자신이 진행되는 가운데 드러나는 것은 저 명제들이 단지 불필요한 장식품에 불과할 뿐이어서 저 처음 두서너 장이 제거되었을 때도 똑같은 경험적 내용이 나타나리라고 하는 것이다.
칸트 철학과 형이상학화하는 경험주의와의 좀 더 상세한 비교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사실 순진무구한 경험주의는 감성적 지각을 견지하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정신적 현실, 즉 초감성적 세계도, 요컨대 그 내용이 어떠한 성질의 것이건, 그것이 사상에서 유래하는 것이건 상상 등등에서 나오는 것이건 허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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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기에서의 논증으로부터 명백한 것은 ‘경험주의'가 ‘순진무구한 경험주의' 라는 점이다.
이것은 로크의 '관념들의 새로운 방식이며, 흄에게서 그 완전한 형식에 도달한다.
이 ‘순진무구한 경험주의'는 본질적으로 반-형이상학적이다.
칸트의 비판적 성취는 로크에 의해 명확하게 기획되고 흄에 의해 명확하게 정의된 유한한 경험의 한계들 내부에서 (볼프와 그의 많은 추종자의) 전통적 형이상학을 정당하게 취급한 것이었다.
물론 그 전통은 비판철학을 필요로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경험에 대한 해석에서 사유에 의해 수행되는 선험적 역할을 올바르게 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험주의자들도 다른 방식으로 전통적 형이상학에 맞섬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는 선택지를 갖는다.
그들은 외적 지각의 절대적 우위를 가정한 데 기초한 그들 자신의 형이상학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순진무구한 경험주의는 유물론과 자연적 결정론으로 타락한다.
여기서는 어쩔 수 없이 사유의 자발성과 자유의 문제가 사라진다.
이것은 로크의 수많은 프랑스 제자들(예를 들면 콩디야크, 돌바흐, 라메트리)이 걸어간 길이었다.
형이상학화하는 경험주의를 대표하는 것은 그들이다.
어쨌든 ‘순진무구한 경험주의'와 ‘비판철학'은 필연성과 자유의 이율배반에 대한 헤겔적인 해결에서의 역사적 계기들이다.
'유물론'은 단순한 일탈이자 주변적인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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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형식에 따라서 이 내용은 경험적 지식의 그 밖의 내용이 외적 지각의 권위에서 확인되듯이 정신적 권위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일관성을 자기의 원리로 삼는 반성하는 경험주의는 최종적인 최고의 내용의 그러한 이원론에 대해 투쟁하며, 사유하는 원리와 그 원리 속에서 전개되는 정신적 세계의 자립성을 부정한다.
유물론, 자연주의는 경험주의의 일관된 체계이다.
칸트 철학은 이러한 경험주의에 대해 사유와 자유의 원리를 단적으로 대립시키며, 첫 번째 경험주의에 찬동하여 그것의 일반적 원리로부터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칸트 철학의 이원론의 한 측면은 지각과 그 지각에 대해 반성하는 지성의 세계로 머문다.
이 세계는 실로 현상들의 세계로 내세워진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순한 명칭, 단지 형식적일 뿐인 규정이다.
왜냐하면 원천과 내실 및 고찰 방식은 전적으로 똑같은 것들로 머물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다른 측면은 자기를 파악하는 사유의 자립성, 자유의 원리인데, 칸트 철학은 그것을 이전의 통상적인 형이상학과 공통으로 지니지만, 모든 내용을 비워 없애 어떠한 내용도 그것에 다시 마련해줄 수 없다.
여기서 이성이라 불리는 이 사유는 모든 규정을 박탈당한 것으로서 모든 권위로부터 해방된다. 칸트 철학이 지녔던 주된 작용은 이러한 절대적 내면의 의식을 깨우친 것이었던바, 이 절대적 내면성은, 비록 그 추상성으로 인해 실로 자기로부터 그 무엇으로도 전개될 수 없고 인식이든 도덕법칙이든 어떠한 규정도 산출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외면성의 성격을 지니는 어떤 것을 자기 안에서 제공하여 타당화하기를 단적으로 거부한다.
이성의 독립성, 이성의 자기 안에서의 절대적 자립성 원리는 이제부터 철학의 보편적 원리로서 그리고 시대의 선입견들 가운데 하나로서 여겨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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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철학에는 지성 규정들이 유한성에 속하며 그 규정들 내부에서 움직이는 인식은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확신을 관철했다고 하는 위대한 부정적 공적이 마땅히 돌려져야 한다.
하지만 그 경우 저 지성 규정들의 유한성이란 그 규정들이 한갓 우리의 주관적인 사유에 속하되 그 사유에 대해서는 사물 자체가 절대적 저편으로 머물러야 한다는 것으로 정립된다는 점에는 이 철학의 일면성이 존립한다.
그렇지만 실제로 지성 규정들의 유한성은 그 주관성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그 자체에서 유한하며, 그 유한성은 그 규정들 자신에서 제시되어야 한다.
그에 반해 칸트에 따르면 우리가 사유하는 바로 그것이 거짓인 까닭은 바로 우리가 그것을 사유하기 때문이다.
이 철학의 더 나아간 결함으로서 여겨져야 하는 것은 그것이 단지 사유에 대한 역사학적인 기술과 의식의 계기들에 대한 단순한 열거만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러한 열거는 주요 사항에서는 물론 올바르지만, 거기서는 그렇게 경험적으로 파악된 것의 필연성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 경우 의식의 서로 다른 단계들에 대해 행해진 반성의 결론으로서 언명되는 것은 우리가 그에 관해 아는 것의 내용이 단지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에 대해서는 유한한 사유가 물론 현상들과만 관계하는 한에서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 단계로써 다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라 아직은 더 고차적인 영역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이 영역은 칸트 철학에 대해 접근 불가능한 저편으로 머문다.
칸트 철학에서는 사유가 자기를 자기 스스로 규정한다는 원리가 우선은 단지 형식적인 방식으로만 세워져 있다.
그러나 사유의 이러한 자기 규정의 어떻게와 얼마나는 칸트에 의해 아직 지시되지 못했다.
그에 반해 이러한 결함을 인식한 것이 피히테이다.
그는 범주들의 연역에 대한 요구를 언명함과 동시에 그러한 연역을 실제로도 제공하고자 했다.
피히테 철학은 자아[나]를 철학적 전개의 출발점으로 삼으며, 범주들은 자아의 활동 결과로서 생겨나야 한다.
그러나 자아는 여기서 참으로는 자유롭고 자발적인 활동으로서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아는 외부로 부터의 충격을 통해 비로소 자극받는 것으로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 경우 자아는 이 충격에 반작용해야 하며, 이 반작용에 의해 비로소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에 도달해야 한다.
충격의 본성은 여기서는 인식되지 않은 외부에 머물며, 자아는 언제나 자기에 맞선 타자를 지니는 조건 지어진 것이다.
그에 따라 피히테도 단지 유한한 것만이 인식될 수 있고, 반면에 무한한 것은 사유를 넘어선다는 칸트 철학의 결론에 머문다.
칸트에게서 '사물-자체'라고 불리는 것, 그것은 피히테에게서는 외부로부터의 충격, 자아와는 다
른 것이라는 이러한 추상물인바, 이 추상물은 부정적인 것 또는 비아(Nicht Ich)일반이라는 규정 이외에 다른 규정을 갖지 않는다.
자아는 여기서 비아와의 관계 속에 서 있는 것으로서 여겨지는데, 그 비아에 의해 비로소 자아의 자기 규정 활동이 자극되며, 게다가 자아가 다만 충격으로부터 해방되는 연속적인 활동일 뿐인 양식으로 자극된다.
그렇지만 자아는 현실적인 해방에는 도달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충격의 중단과 더불어 오직 그의 활동만이 그의 존재인 자아 자신이 존재하기를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나아가 자아의 활동이 산출하는 내용은 경험의 일상적인 내용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닌데, 다만 이 내용이 한갓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 덧붙여져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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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피히테의 이론에서 사물 자체는 칸트에게서처럼 긍정적으로가 아니라 오직 부정적으로만 ‘사유 가능’하다.
피히테의 충격은 칸트에게서처럼 이신론보다는 계몽된 유물론의 비판적 유산이다.
따라서 이에 관해 피히테가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삶과 의식의 원리, 그것의 가능성 근거는 물론 자아 안에 포함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적인 삶, 시간 안의 경험적인 삶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다른 삶은 우리에게 단적으로 사유될 수 없다.
그러한 현실적 삶이 가능해야 한다면, 이를 위해서는 아직 자아에 대한 비아의 특수한 충격이 필요하다.
/ 그에 따라 자아에 대한 모든 현실성의 최종적 근거는 학문론에 따르면 자아와 자아 밖의 무언가 어떤 것과의 근원적인 교호작용인데, 그 무언가 어떤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자아에 완전히 대립해 있어야만 한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말해질 수 없다.
이 교호작용에서는 아무것도 자아 안에 전달되지 않으며, 어떤 낯선 것도 자아 안에 도입되지 않는다.
무한성에 이르기까지 자아 안에서 전개되는 모든 것은 오로지 자아 자신으로부터 자아의 고유한 법칙에 따라 전개된다.
자아는 오직 행위하기 위해서만 저 대립한 것에 의해 운동 속으로 정립되며, 자아 밖의 그러한 최초의 운동자 없이는 자아는 결코 행위하지 않을 것이고, 자아의 실존은 오직 행위 안에서만 존립하는 까닭에, 자아는 실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저 운동자에는 그것이 운동자라는 것, 대립한 힘이라는 것 외에는 더는 아무것도 속하지 않는바, 그 대립한 힘은 단지 그러한 것으로서 느껴질 뿐이다.
/ 그에 따라 자아는 그것의 현존재에 따르면 의존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것의 현존재의 규정에서는 단적으로 독립적이다.
자아 안에는 그것의 절대적 존재로 인해 무한성에 대해 타당한 이러한 규정들의 법칙이 존재하며, 자아 안에는 그것의 경험적 현존재를 저 법칙에 따라 규정하는 매개 능력이 존재한다.
우리가 처음으로 저 자유의 매개 능력을 지니게 될 때 서게 되는 그 지점은 우리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그 지점에서부터 모든 영원성에 이르기까지 기술하게 될 계열은 그 전체 범위를
생각해보면 전적으로 우리에게 의존한다.
/ 따라서 학문론은 실재론적이다.
학문론은 우리가 유한한 본성들로부터 독립적으로 현존하는, 그것들에 전적으로 대립한 힘을 가정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유한한 본성들의 의식이 단연코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며, 그것들 자신은 그 경험적 현존재에 따라 그 힘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학문론은 유한한 본질에 의해 단지 느껴질 뿐 인식되지는 않는 그러한 대립한 힘 외에는 더는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다.
학문론은 무한성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의식 안에 출현할 수 있는 이러한 힘 또는 비아의 모든 가능한 규정들을 자아의 규정하는 능력으로부터 도출해야 할 책임을 지니며, 그것이 확실히 학문론인 만큼, 그 규정들을 현실적으로 도출할 수 있어야만 한다.
/ 유한한 정신이 필연적으로 자기 바깥에 어떤 절대적인 것(사물 자체)을 정립해야만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어떤 것이 단지 유한한 정신에 대해 존재한다는 것(필연적 가상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은 하나의 순환인데, 유한한 정신은 그 순환을 무한히 확장할 수 있을 뿐 결코 거기서 벗어날 수는 없다.
이 순환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는 체계는 교조적 관념론이다.
왜냐하면 우리를 제한하고 유한한 본질로 만드는 것은 본래적으로 다만 이러한 순환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순환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체계는 초월적인 실재론적 교조주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