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노무
조선인 중 창씨개명을 거부할 경우 해당자를 이유불문하고 즉시 해고한다. 다만 창씨개명에 참여하면 복직할 수 있다.
각 직장 및 노무사(社)들은 창씨개명을 거부한 조선인의 고용 및 입사 등을 절대 금하며 이를 어길 경우 총독부령에 따라 엄벌에 처한다.
창씨개명 거부자 또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자에게는 봉급 급여를 불허하거나 삭감해야 하며 이를 어길 경우 총독부령에 따라 엄벌에 처함과 동시에 해당 직장을 강제 폐쇄 조치한다.
학교/교육
조선인 학생 중 창씨개명을 거부한 학생의 경우 해당 학교 교장 및 교사는 해당 학생들에게 창씨개명을 할 것을 권고해야 하며 마찬가지로 교직원들도 창씨개명을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 이를 어긴 교장 및 교직원은 즉시 학교에서 제명 및 해고 처리를 당하며 학생의 경우 즉시 정학 및 제적 또는 퇴학 조치를 한다. 학교 집단에서 거부할 경우 해당 학교를 폐교 조치한다.
창씨개명 거부자는 입학을 불허하며 교육 대상에서도 전면 제외한다. 학교 중 조선 성명을 쓰는 학생의 입학을 무단으로 허가했을 경우 해당자는 엄벌에 처하며 해당 학교도 폐교 조치한다.
학생들은 물론 해당 학생들의 부모나 직계 가족 등도 모두 창씨개명을 해야 하며 이를 어기거나 따르지 않을 경우 가족 전원을 처벌 대상으로 올린다.
교통/수송
창씨개명을 거부한 조선인 승객은 모든 교통편 이용을 불허한다. 또한 1등석 등 객차 이용도 절대 불허한다.
철도 수송화물에 조선인 성명이 표기된 화물 역시 수송 이용을 불허하며 해당 화물은 즉시 반송 처리한다.
의료/복지
창씨개명에 협조하지 않거나 거부한 조선인은 병원 치료 대상에서 제외하며 환자 성명 기재시 일본식 성명으로 기재한다.
신생아의 경우 반드시 일본식 성명을 우선 기재해야 한다.
의사나 간호사도 반드시 조선인들은 일본식 성명을 따라야하며 이를 거부한 병원 및 의원은 폐원 조치한다.
일본식 성명을 이행하지 않거나 거부한 자는 복지 정책에서도 제외한다.
식량 배급
배급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지인과 같은 일본 성명을 따른 자를 우선으로 한다. 그렇지 않고 이에 불응하거나 협조하지 않은 자는 배급 대상에서 제외한다.
기타
창씨개명을 거부한 조선인은 총독부에서 지원하는 물자 및 배급대상에서 제외한다.
조선인 성명을 사용하는 자는 행정기관 민원 사무에서도 불허 대상이며 민원상담의 일체를 금한다.
창씨개명을 거부하거나 일본식 성명으로 개명하지 않은 조선인은 불령선인, 비국민 및 무국적자로 처리, 간주하며 군헌병과 경찰 등을 통해서 요주의 사찰(감시) 대상으로 선행한다.
창씨개명 제정 이후 출생한 조선인 신생아는 무조건 일본 성명으로 먼저 짓거나 단독으로 지어야 하며, 조선 성명 단독으로 짓거나 일본 성명과 병행해서 짓게 될 경우 비국민 및 무국적자로 처리하고 해당 부모는 엄벌에 처한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은 내지로 도항할 수 없다.
빠스껫 볼에서는 스포츠 구단은 유니폼에 창씨개명한 이름만 적을 수 있고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선수를 구단에서 제명할 수 있다는 내용도 나왔다. 이 때문에 빠스껫 볼에서 민치호가 아사노 지코(淺野時子)라는 창씨명이 적힌 유니폼을 받은 것으로 설정된 것이다. 이외에 빠스껫 볼에서 몇몇 한국인 선수가 다나카 준페이, 요시다 다케시, 하세 료 등으로 창씨를 하기는 했다.
1946년 10월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을 제정해 창씨 개명 이전의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으며 일부 제적등본(구 호적등본)에서도 해당 법령의 제정에 의거해서 수정한 흔적[19]을 찾아볼 수도 있다.[20] 모든 호적에 일괄로 정정한 사항이기 때문에 수기 호적인 시절에도 조선성명복구령에 의한 정정은 그냥 도장으로 다 찍어놓은 점이 이채로운 부분.
한때 한국 국적이나 조선적을 가진 재일동포나 중화인민공화국 또는 중화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재일 화교들은 일본 국적으로 귀화를 신청할 때 "당신과 같은 성씨는 일본에 없다"는 이유로 여전히 일본식의 창씨개명을 강요받았다. 그래서 성을 갈기 싫은 사람들은 가네다(金田), 아키야마(秋山) 등 자신의 성과 같은 한자가 들어간 성을 썼다. 내국인이 아니어서 생기는 불이익이 많으니 귀화를 결심하는 것이다. 특히 조선적을 가진 사람의 경우는 조선적 문서 참고.
다만 손정의는 일본 국적으로 귀화하면서 같은 이유로 거부당하자 '역창씨개명'을 시도했는데 일본에선 결혼하게 되면 보통 아내가 남편의 (데릴사위로 들어가면 그 반대) 성씨로 바뀌는 것에 착안해 일본인인 자기 아내를 손씨로 바꾸어서 일본인 중에 손씨가 있음을 증명하여 성명 한자를 그대로 두되 이름의 독음만 훈독으로 읽어서 '손 마사요시'가 되었다. 현재는 강희자전에 등록된 한자 + 인명용 한자 + 상용 한자 + 가타카나 + 히라가나라면 얼마든지 마음대로 창씨개명할 수 있다. 단, 이름은 상용 한자 + 인명용 한자 + 가타카나 + 히라가나만 쓸 수 있다. 하지만 읽기는 마음대로 신청할 수 있다.
그리하여 현재 한국인 중에 일본식 성씨, 예를 들어 山田, 金田, 松山 등을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미나미 지로는 창씨개명을 선포하면서 '조선은 이제 식민지가 아니라 내지다!' 라고 호기롭게 선언하면서 창씨개명을 실시하는 사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중국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조선 고유의 문화를 확립하기 위해서.
조선인들이 원해서.
조선의 성씨는 250여 종밖에 안 되는데 이는 10만여 종에 이르는 성씨를 가진 일본과 대조된다. 일본처럼 성씨가 다양해지면 선진화와 문명화를 이룩할 수 있다.
그리고 기존의 성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기존의 성은 그대로 남고 새로운 씨를 부여할 뿐이니 오해하지 말라는[21] 설명서까지 전국에 배포했다.[22] 그리고 이광수를 비롯한 지식인들을 대거 내세워서 창씨개명을 홍보했다.
한반도를 "외지가 아닌 일본의 일부로 완전히 합병하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그래야 장기적으로 조선의 인력과 자원을 전쟁 등에 본격적으로 투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일전쟁으로 한창 군사력이 필요하던 시절에도 일제는 조선인을 믿지 못해 군인으로 써먹는다는 선택지를 피하려고 했고 징병 대신 특별지원병제도라고 하여 철저히 검증된 조선인들만 전장에 투입했다. 조선인들을 대규모로 군대에 보내서 병사로 삼았다가는 혹시 조선인들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23] 조선인 징병과 징용을 하자 일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드디어 우리도 황국신민으로서 맡은 바 의무를 다할 수 있게 됐다.'고 한 데는 이런 배경도 있었다. 그러다가 사정이 급하니까 '이제 차별하지 않는다.'는 떡밥을 교묘하게 끼워서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하고자 한 것이다.
또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희석시켜 독립의지를 꺾기 위한 계획이었다. 표면상으로는 '일본식으로 개명한 조선인이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고 하였지만 일본은 끝끝내 '조선 거주 조선인과 조선 거주 일본인은 병역을 지지 않는다'며 내지인과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았다. 반면 일본 거주 조선인은 병역 차원에서는 내지인으로 간주하였다. 해방 직전인 1945년에야 겨우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에게만 제국의회 투표권이 주어졌다.
창씨개명은 조선식 이름을 아예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본식 이름을 새로 만드는 것이었다. 창씨개명을 해도 원래 이름과 창씨개명한 이름이 나란히 호적에 오른다.[24] 또 현재 일본에서 재일교포들이 신상을 숨기고 활동하는 것이나, 부락지명총람사건을 통해 부라쿠민의 출신지를 죽어라 캐내는 현대 넷 우익들의 모습이나, 류큐인이나 아이누 같이 일본의 정복전쟁을 통해 일본화된 지역의 토착민족이 야마토 민족계 이주민들과 갈등하거나, 생물학적으로는 아이누의 후예지만[25] 이미 문화적으로 야마토 민족에 동화될 대로 동화된 도호쿠인들이 일본 극우 세력에게 에미시 취급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 실제로 창씨개명을 전면적으로 했어도 조선인 차별이 없어졌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가끔 일본 극우들이 '창씨개명은 조선인을 위한 정책'이라거나 '조선인에게 일본인과 같은 권리를 주기 위한 관대한 조치'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같은 권리를 부여한다는 말은 같은 동원의 의무를 짊어지게 만들기 위해서 가져다붙인 것이다. 당시 조선인들 중 진성 친일파들을 제외한 대다수는 일본인이 되기를 혐오했다.당시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일본인'이라는 말보다 비하 단어인 왜놈이란 말이 더 통용될 정도였다.
친일파들마저도 일부는 정작 자신이 일본인이 되기를 싫어했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친일파들 중에는 진짜 일본이 좋거나 동경해서가 아니라 일본이 대세라서 일본 편에 선 기회주의자들도 굉장히 많았다. 또 그런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도 일반 조선인들처럼 일본인을 마치 일본인들이 조선인 보듯이 바라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그렇게 바라본 일본인이 자신이 되라니 일부 기회주의적 친일파들에게도 창씨개명으로 일본인이 되라는 말이 그리 달갑진 않았다.
식민지 조선에서 포교활동을 하여 유의미한 정도로 조선인 신자를 확보하는 데 유일하게 성공한 일본 종교가 바로 천리교였다. 그런데 천리교에 입교한 조선인 신자들은 가족이나 지인들로부터 '왜무당(일본 무당)이 되었다.'는 비난이나 욕설을 들었다는 증언이 많다. 조선인이란 정체성을 버리는 것도 아니고 단지 종교를 받아들이는 데만도 이 정도 반발을 감수해야 할 정도였다.
창씨개명을 할 것인가, 아니면 조선식 이름을 그대로 고수할 것인가? 이 문제가 조선인들, 그 중에서도 특히 지체 높은 양반층에게 걱정거리다. 미나미 총독은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할 생각이 없다고 공식적으로 천명했다. 그래놓고는 똑같은 성명서에서, 만약에 조선인들이 일본식 이름을 채택하면 기쁘겠다고 분명히 시사하는 바람에 골치만 더 아파졌다. 나는 이처럼 열광적으로 조선의 모든 것을 일본 것에 맞추어 순응하도록 강요하는 처사가 아주 부질없고 지혜롭지 못한 정책이라고 본다. 다양성이야말로 삶에서 양념 같은 것이다. 일본이 열망하는 대제국은 반드시 다민족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다민족 구성원들에게 모든 면에서 정확히 똑같아지라고 강제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정책이 아닐 수 없다.[26]
유학의 영향이 아직 강하게 남아서 조상과 가문이 절대적이었던 시절이고 직관적으로 '성을 갈아버리는 행위'니 창씨개명은 '민족의 정체성'에 앞서 '가문의 정체성'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유교적 관점으로도 '충(忠)'의 대상인 왕조가 사라져버린 아노미 상태였지만, 그의 반대급부로 족보와 가문에 대한 집착 및 자부심이 굉장한 시대였다.
전북 고창의 의병출신 설진영(薛鎭永, 1869~1940)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경우 아이를 퇴학시키겠다는 학교의 통보를 받았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울자 설진영은 할 수 없이 창씨개명한 뒤 자신은 조상을 볼 면목이 없다면서 돌을 안고 우물로 뛰어들어 자살했는데 이 설진영의 이야기를 일본인 소설가 카지야마 토시유키가 <족보(族譜)>라는 소설로 발표했고, 1978년에는 임권택 감독이 이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 족보를 만들었다.
창씨개명은 명목상으로는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행해진 것이었기 때문에 유명 인사 혹은 아이러니하게도 친일반민족행위자 등 '유·무형의 압박과 강요를 이겨낼 수 있었던 사람들'은 창씨개명을 거부할 수 있었다. 윤치호는 "당국이 이미 창씨개명하기로 결정한 이상, 조선인들이 창씨개명하도록 반드시 조치를 취할 것이다. 그들은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저명한 조선인들을 반일분자로 블랙리스트에 올릴 것이다."[27]라고 말하며 저명한 친일파들도 오래 못 버틸 거라고 봤고 실제 페널티도 있긴 했지만 성씨를 바꾼다는 반감으로 끝까지 버틴 사람들도 있긴 했다. 대표적으로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일본 제국 육군 중장까지 오른 홍사익 외에 경술국적 중 한 명인 윤덕영, 기업인 박흥식, 방응모 등 현재 친일인사로 분류되지만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꽤 있다.
그러나 조선의 정체성이 희미해진 1930년대 이후 출생자들은 이미 창씨개명에 익숙하여 오히려 조선 이름보다 일본 이름을 더 세련되게 느끼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박완서의 자전소설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의하면 자신의 창씨개명하지 않은 보쿠엔쇼[28]라는 이름을 부끄러워하며 하나코·하루에 같은 일본 이름이 듣기 좋아 부럽다는 내용이 나온다. 실제로 이 세대는 1945년 해방되어서도 우리 일본이 패망하였는데 왜 기뻐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세대임을[29] 생각해 보면 일제강점기가 조금만 더 길었어도 창씨개명은 이전 세대에 비해 거부감 없이 널리 퍼졌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과 필리핀의 사례가 해당 대체역사에 가까운 대표적인 사례인데 앵글로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영미권 성명을 쓰고 라틴아메리카 원주민들이나 필리핀인들이 스페인어 성명을 쓰는 게 그 예다.[30]
창씨개명의 피해자들[31] 중에는 직업 특성상 개명된 이름을 불러야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들은 80세가 다 되거나 심하면 팔순이 지나서도 서로를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이렇게 창씨개명을 하고 제2차 세계 대전에 징집, 징용, 정신대 등으로 끌려간 많은 이들이 서류상으로 조선 말 이름이 아닌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등록되어 21세기에 이르기까지 피해자들의 신원 파악부터 적잖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리고 민심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그 말씀은 옳은 말씀입니다만, 총독부의 윗사람은 이런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하급자가 지방에서 활동하며 조선인에게 압력을 가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특히 재작년인가, 그 성씨령, 즉 이름을 바꾼다고 하는 일이 있었는데, 성과가 좋아서 거의 80%까지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는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그들의 충심에서 나온 것이라면 좋겠지만, 때로는 경찰의 압박에 의해 한 것이다. 또는 학교의 학생을 이용해 학부모들에게 압력을 받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되었다는 불평도 들리는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그런 쪽은 너무 무리하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전 총독 시절에는 그런 쪽에 힘을 많이 쏟았다고 합니다만, 지금은 자연히 맡기고 있기는 하는 겁니까. 오늘은 그것은 어떠신지, 그 점을 여쭙고 싶습니다.- 미즈노 렌타로 <귀족원 속기록 1943년 2월 26일 제81회 제국의회 귀족원 예산위원 제3분과회(내무성, 문부성, 후생성) 제2호> #
다음은 창씨개명 문제, 지원병 문제 등에 관변의 강압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이것은 저희도 말씀하신 바와 같이 같은 말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저도 그런 일에 대해 책임 있는 입장에 서게 되었기 때문에, 그런 일에 대해서는 잘못된 것이 있다면 시정을 하고 싶어서 여러 가지 사실의 진상을 조사해 보았습니다만, 반드시 그런 일이 절대 없었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으며, 일부 유감스러운 사례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제대로 운영해 나가고 싶다고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다나카 다케오 당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답변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할 경우 대체로 그 집안의 문중이 모두 모여서 회의로 정했는데, 마침(?) 씨(氏)의 유래 가운데 하나가 제후의 봉토를 의미하고 이게 본관하고 의미가 비슷하므로 조금이라도 고전을 읽어 본 문중 일원들은 고전에 맞추려고 본관과 비슷하게 창씨했다. 안동 권씨(安東權氏)[32]라서 안도(安東)[33], 노(盧)씨의 시조가 용강군(龍岡郡) 출신이라 오카무라(岡村), 하동(河東) 정(鄭)씨라서 가와히가시(河東) 혹은 가와토(河東) 등으로 창씨개명한 경우가 많다. 본관을 그대로 사용한 창씨개명이 가장 흔한 편으로, 지명이니까 일본어로 읽었을 때도 그다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 안도, 오카무라, 가와히가시·가와토는 일본에도 있는 성씨이므로 위화감이 없었다. 만약 본관을 일본식 한자음으로 읽어 다소 위화감이 있다면 본관과 본래 성을 합친 이름으로 개명하기도 했다.[34] 박정희 등 고령 박씨의 다카기(高木)는 박(朴)의 목(木)자와 고령 박씨의 고(高)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 심영[35] 등의 청송 심씨는 본관인 청송(靑松)에서 글자를 따 와 아오키(靑木)로 창씨개명하였다.
이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가지는 성씨에 대한 인식을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다. 메이지 유신 때 평민들에게 일괄적으로 성씨를 부여한 일본에서는 성이 같은 것은 그저 '우연'이지만 한국은 성씨에 대한 관념 자체가 일본과 달랐기 때문에 그 심리적 반감이 만만치 않았다. 조선 후기에 우후죽순으로 생긴 성씨는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연고와 밀접한 관계인 것이 많았다.
본래의 한국식 성씨의 본관 + 성씨와 본관을 붙여 일본식 성씨로 바꾼 것 말고도 원래 한국식 성의 글자를 파자한 사례도 있다. 예를 들어 장(張)씨는 유미나가(弓長)로 창씨개명했는데, 파자한 유미나가의 한자를 합하면 弓 + 長으로 張이 된다. 박(朴)씨의 경우 마찬가지로 朴을 파자해 기노시타(木下)로 바꾸기도 했다.[36] 일부 최(崔)씨의 경우는 한자의 산 산(山)과 새 추(隹)를 분리하여 가야마(佳山)로 창씨하고 일부 정(鄭)씨도 한자를 파자하여[37] 다카무라 혹은 덴오(奠邑) 등으로 창씨하였던 사례가 있다.
혹은 성씨별 시조 설화에서 의미를 따 온 경우도 있었다. 박씨의 경우 위처럼 파자한 사례도 있지만 대체로 신라 박혁거세 신화에서 따와 '신라의 우물'(나정 참고)이라는 의미를 담아 아라이(新井)이나 마쓰이(松井)도 많이 썼다. 대표적인 인물이 재일동포 출신 중의원 의원인 아라이 쇼케이(박경재)였다. 경주 이씨는 시조 이알평이 시조설화에서 표암봉 바위에 내려온 것에서 따 와 이와모토(岩本)로 정하는 것을 고려했다고 한다.
전주 이씨는 대체로 아사모토(朝本), 미야모토(宮本), 구니모토(國本)[38]로 바꾸었는데, 이유는 조선 왕실. 종근당을 세운 이종근이 처음 만들었던 약방 이름은 '궁본(宮本) 약방'이었다.[39]
이밖에도 본래의 성씨나 본관에 일본 성씨에 굉장히 자주 들어가는 한자인 田(다), 山(야마), 原(하라), 川(가와), 村(무라), 本(모토) 등을 합성한 예는 일제강점기에 흔히 쓰인 창씨법이다. 후술될 유명인의 창씨명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여자들의 경우 창씨개명을 할 때 이름 뒷부분에 子(코, こ)자를 붙여서 했다고 한다.[40] 남자는 원래 이름 그대로 바꾸거나 원래 이름의 한 글자에 夫(오), 郎(로), 也(야) 등을 붙여서 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南)씨·류(柳)씨·임(林)씨·계(桂)씨·오(吳)씨는 창씨개명을 안 해도 별 일 없이 넘어갔다는 듯. 일본에도 미나미(南)·야나기(柳)·하야시(林)·가쓰라(桂)·구레(吳)가 적지 않게 있어서 창씨개명이 큰 의미가 없었다. 총독부도 별 말 안 한 것 같고. # 다만 국민총력부락연맹의 이사장이었던 유대흥(柳大興)이라는 사람은 류(柳)씨이기에 창씨개명을 안 해도 되지만[41] 사람들에게 강제하는 입장이라 어쩔 수 없이 야나모토(柳本)로 창씨했는데 '나는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한 것이다. 나도 창씨개명에 반대한다'는 발언을 해 경찰에게 적발되어 잡혀갔다가 친일 경력 덕에 검찰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거꾸로 이 때문에 애먼(?) 일본인이 조선인으로 오해(?)받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당시 조선과 조선인을 옹호하는 글을 많이 썼던 미술사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그 이름을 한국식으로 음독하면 유종열이고 위화감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광화문 철거를 반대하는 등 조선의 문화를 보호하는 운동을 맹렬하게 펼쳤는데[42] 그것 때문에 그를 싫어하는 일본인들이 저놈 이름하고 글쓴 거 봐도 영락없는 조선인 아니냐면서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다른 의미로 웃기는 사례로, 7대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郎, 남차랑)가 부임하자 종씨가 보위에 오르셨다면서 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남원에서 일가족을 이끌고 상경한 어떤 남씨가 있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희성인 경우와 겹치면 이런 핑계(?)가 먹히지 않았다. 김(金)씨는 곤(金) 씨가 이미 일본에 있었지만[43] 일본에서는 희성인 데 반해 조선에서는 20%를 차지하는 아주 흔한 성이어서 조선인의 대명사로 여겨졌기 때문에 대부분은 창씨개명의 대상이 되었다. 안(安)씨와 차(車)씨 역시 일본에 야스(安) 씨와 구루마(車) 씨가 있기는 하지만 흔치 않은 성씨[44]다 보니 창씨개명을 했다. 당시 해당 씨가 그대로 일본에서도 통용된다는 증거를 행정을 집행하는 서기에게 제시하지 못하면 무조건 창씨개명의 대상이 되었고 고전이나 일본 사정에 통달하지 못한 일반적인 조선인이 이런 사례를 제시하기는 어려웠다.[45]
남궁(南宮)씨도 성이 2글자이고 일본식으로 읽으면 음독으로는 '난구'[46]가 되고 훈독으로는 '미나미야'[47] 정도가 되어 그럭저럭 일본 성씨하고 비슷하게 보여서 그대로 놔뒀는데도 이미 창씨개명을 한 줄 알고 아무 불이익도 받지 않고 그냥 넘어가기도 했다. 실제로 일본에도 이와테현에서 유래된 南宮씨가 있었으므로 이름만 그럴싸하면 창씨는 물론이고 개명도 하지 않아도 됐었다. 사실 남궁씨 뿐만 아니라 2글자로 된 성을 가진 사람들은 일본인과 큰 구분이 안 간다는 이유로[48] 창씨개명이 얼추 면제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성씨 순위 100위 이상만 기재되었다.
前 | 後 | |
1 | 김(金) | 가네우미(金海、かねうみ), 가네오카(金岡、かねおか), 가네다(金田、かねだ), 가네모토(金本、かねもと), 가네시로(金城、かねしろ), 요시카네(慶金、よしかね), 가네야마(金山、かねやま), 가나에(金江、かなえ), 가네야(金谷、かねや), 가네자와(金澤、かねざわ), 가네가와(金川、かねがわ), 가네우라(金浦、かねうら), 가네하라(金原、かねはら), 가네무라(金村、かねむら), 가네이(金井、かねい), 가네키요(金淸、かねきよ), 가네모토(金源、かねもと), 가네코(金子、かねこ), 가나시마(金島、かなしま), 가네마쓰(金松、かねまつ), 가네바야시(金林、かねばやし), 가네미쓰(金光、かねみつ), 미쓰야마(光山、みつやま), 오카다(岡田、おかだ), 미쓰모토(光本、みつもと), 게이린(鷄林、けいりん) |
2 | 이(李) | 미야모토(宮本、みやもと), 구니모토(國本、くにもと), 아사모토(朝本、あさもと),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이와무라(岩村、いわむら), 이와모토(岩本、いわもと) 마키야마(牧山、まきやま), 우시미네(牛峰、うしみね), 마시로(眞城、ましろ), 히라카와(平川、ひらかわ), 아오키(靑木、あおき), 니야마(丹山、にやま), 야마모토(山本、やまもと), 리무라(李村, りむら), 리노이에(李家, りのいえ), 나가카와(永川、ながかわ), 기고(木子、きご), 스모다(李田、すもた) |
3 | 박(朴) | 아라이(新井、あらい), 아마모토(天本、あまもと), 이모토(井本、いもと), 무라이(村井、むらい), 보쿠하라(朴原、ぼくはら), 보쿠다(朴田、ぼくだ), 보쿠자와(朴澤、ぼくざわ), 보쿠야마(朴山、ぼくやま), 보쿠무라(朴村、ぼくむら), 마쓰가와(松川、まつがわ), 다케야마(竹山、たけやま), 기노시타(木下、きのした), 기모토(木本、きもと), 기야마(木山、きやま), 기무라(木村、きむら), 다카기(高木、たかぎ), 게이린(鷄林、けいりん), 미쓰야마(密山、みつやま), 마쓰이(松井、まつい) |
4 | 최(崔) | 다카야마(高山、たかやま), 야마카(山佳、やまか), 가야마(佳山、かやま), 야마모토(山本、やまもと), 야마에(山江、やまえ), 오야마(大山、おおやま), 도야마(東山、とうやま), 와야마(和山、わやま), 즈이시로(隋城、ずいしろ), 사이(佐井、さい), 사이모토(崔本、さいもと), 야마우치(山内、やまうち), 쓰야마(津山、つやま) |
5 | 정(鄭) | 지야마(智山、ちやま), 다메카와(爲川、ためかわ), 무카에다(迎田、むかえだ), 오카와(大川、おおかわ), 가와히가시(河東、かわひがし), 미쓰시로(三城、みつしろ), 미쓰야마(三山、みつやま), 덴오(奠邑、てんおう), 데이야(鄭家、でいや), 데이무라(鄭村、ていむら), 다케하시(竹橋、たけはし), 아키야마(秋山、あきやま), 요시모토(義本、よしもと), 마쓰오카(松岡、まつおか) |
6 | 강(姜) | 신노(神濃、しんのう), 가미모토(神本、かみもと), 가미구모(神雲、かみぐも), 신야마(晉山、しんやま), 오카(岡、おか), 가미야마(神山、かみやま), 간다(神田、かんだ), 도쿠오카(德岡、とくおか), 교모토(姜本、きょうもと) |
7 | 조(趙) | 도요타(豊田、とよた), 시라카와(白川、しらかわ), 조케(趙家、ちょうけ), 미나야스(咸安、みなやす), 다카모토(高本、たかもと), 도요하라(豊原、とよはら), 나카야마(中山、なかやま), 야마모토(山本、やまもと), 니시하라(西原、にしはら),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하야시가와(林川、はやしかわ) |
8 | 윤(尹) | 히라누마(平沼、ひらぬま), 이토(伊東、いとう), 이하라(伊原、いはら), 시게마쓰(茂松、しげまつ), 마쓰모토(松本、まつもと) |
9 | 장(張) | 하리모토(張本、はりもと)[흥덕], 유미나가(弓長、ゆみなが)[인동], 나가타니(長谷、ながたに), 다마야마(玉山、たまやま), 나가야마(長山、ながやま), 하세가와(長谷川、はせがわ), 하리마(張間、はりま), 하리노(張野、はりの) |
10 | 임(林) | 하야시(林、はやし)[비개명] |
11 | 한(韓) | 기요하라(淸原、きよはら), 니시하라(西原、にしはら), 미모토(箕本、みもと), 아사카와(朝川、あさかわ), 오하라(大原、おおはら), 미노하라(箕原、みのはら), 기요모토(淸本、きよもと), 기요야마(淸山、きよやま), 마쓰바라(松原、まつばら), 이노우에(井上、いのうえ) |
12 | 오(吳) | 구레(吳、くれ)[비개명], 구레야마(吳山、くれやま), 구레무라(吳村、くれむら), 도쿠야마(德山、とくやま), 구레시로(吳城、くれしろ), 미쓰이(三井、みつい) |
13 | 서(徐) | 다쓰시로(達城、たつしろ), 오시로(大城、おおしろ), 오카와(大川、おおかわ), 오야마(大山、おおやま), 오하라(大原、おおはら), 조카와(徐川、じょかわ), 다쓰가와(達川、たつかわ), 조다쓰(徐達、じょたつ), 요시모토(義本、よしもと) |
14 | 신(申) | 히라야마(平山、ひらやま), 히라타(平田、ひらた), 히라무라(平村、ひらむら), 사루모토(申本、さるもと), 다카타(高田、たかだ) |
15 | 권(權) | 안도(安東、あんどう), 겐토(權東、けんとう), 곤도(權藤、ごんどう), 곤야마(權山、ごんやま), 곤모토(權本、ごんもと), 요시모토(吉本、よしもと) |
16 | 황(黃) | 기하라(黃原、きはら), 요시무라(芳村、よしむら), 히야마(檜山、ひやま), 기타(黃田、きた), 기모토(黃本、きもと), 히로타(廣田、ひろた), 히라모토(平本、ひらもと), 히라우미(平海、ひらうみ), 나가미즈(長水、ながみず), 히로가와(廣川、ひろかわ), 마사하라(昌原, まさはら) |
17 | 안(安) | 야스다(安田、やすだ)[53], 야스모토(安本、やすもと), 안도(安藤、あんどう), 다케야스(竹安、たけやす)[54], 야스야마(安山、やすやま), 야스키(安木、やすき), 야스쿠니(安邦、やすくに), 야스하라(安原、やすはら), 아다치(安達、あだち) |
18 | 송(宋) | 노야마(野山、のやま), 무카야마(迎山、むかやま), 쓰보야마(壺山、つぼやま),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마쓰바라(松原、まつはら), 노다(野田、のだ), 오하라(大原、おおはら), 무네모토(宗本、むねもと), 소무라(宋村、そうむら), 온즈(恩津、おんづ), 야마모토(山本、やまもと), 기야마(木山、木山), 기가와(木川、きかわ), 소모토(宋本、そうもと) |
19 | 전(全) | 에하라(江原、えはら),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마쓰바라(松原、まつばら), 마쓰다(松田、まつだ), 기쿠하라(菊原、きくはら), 젠케(全家、ぜんけ), 야마다(山田、やまだ), 젠모토(全本、ぜんもと), 젠이(全井、ぜんい), 젠시로(全城、ぜんしろ) |
20 | 홍(洪) | 난요(南陽、なんよう), 도요야마(豊山、とよやま), 도쿠야마(德山、とくやま), 히로카와(洪川、ひろかわ), 히로하라(洪原、ひろはら), 도코(唐洪、とうこう), 나가야마(永山、ながやま), 미쓰이(三井、みつい) |
21 | 류(柳) | 야나기(柳、やなぎ)[비개명], 야나기사와(柳澤、やなぎさわ), 야나기가와(柳川、やなぎがわ), 야나기와라(柳原、やなぎわら), 야나모토(柳本、やなもと) |
22 | 고(高) | 다카야마(高山、たかやま), 다카시(高志、たかし), 다카시마(高島、たかしま), 다카키(高木、たかき), 다카코(高子、たかこ), 다카다(高田、たかだ), 다카하시(高橋、たかはし), 요코시로(橫城、よこしろ), 도라(度羅、とら) |
23 | 문(文) | 후미이와(文岩、ふみいわ), 후미히라(文平、ふみひら), 후미하라(文原、ふみはら), 후미아키(文明、ふみあき), 후미카와(文川、ふみかわ), 에시로(江城、えしろ), 난페이(南平、なんペい), 후미모토(文本、ふみもと), 후미야마(文山、ふみやま), 후미무라(文村、ふみむら) |
24 | 양(梁) | 야나가와(梁川、やながわ), 요시하라(良原、よしはら), 난바라(南原、なんばら), 야나하라(梁原、やなはら), 야나모토(梁本、やなもと) |
25 | 손(孫) | 오무라(大村、おおむら),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덴니치(天日、てんにち), 마고다(孫田、まごた), 시게야마(茂山、しげやま) |
26 | 배(裵) | 다케모토(武本、たけもと), 호시야마(星山、ほしやま) |
27 | 조(曺) | 마사야마(昌山、まさやま), 나쓰야마(夏山、なつやま), 다치야마(立山、たちやま) |
28 | 백(白) | 시라카와(白川、しらかわ), 시라이시(白石、しらいし), 시로하라(白原、しろはら) |
29 | 유(劉) | 다마가와(玉川、たまがわ), 가와니시(河西、かわにし), 에하라(江原、えはら), 시라카와(白川、しらかわ), 노베야스(延安、のべやす) |
30 | 허(許) | 모토시마(許島、もとしま), 모토무라(許村、もとむら), 이시와타(石渡、いしわた), 이와무라(岩村、いわむら), 이와타(岩田、いわた),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
31 | 남(南) | 미나미(南、みなみ)[비개명] |
32 | 심(沈) | 아오마쓰(靑松、あおまつ), 마쓰모토(松本、まつもと), 아오키(靑木、あおき) |
33 | 노(盧) | 오카무라(岡村、おかむら), 도요카와(豊川、とよかわ), 가미모토(神本、かみもと), 가와하라(河原、かわはら), 미즈하라(瑞原、みずはら), 우에다(上田、うえだ) |
34 | 정(丁) | 자야마(茶山、ちゃやま), 조토(丁藤、ちょうとう), 마치다(町田、まちだ), 다케시마(武島、たけしま) |
35 | 하(河) | 가와모토(河本、かわもと), 가와하라(河原、かわはら) |
36 | 곽(郭) | 쓰토야마(苞山、つとやま), 니시우라(西浦、にしうら), 마키노(牧野、まきの), 이와타니(岩谷、いわたに), 니시하라(西原、にしはら) |
37 | 성(成) | 나리모토(成本、なりもと), 나리타(成田、なりた), 나리야마(成山、なりやま) |
38 | 차(車) | 구루마다(車田、くるまだ), 나가타(永田、ながた), 다카타(高田、たかた), 도도로키(轟、とどろき) |
39 | 주(朱) | 아케모토(朱本、あけもと), 모토시로(本城、もとしろ), 네이노(寧野、ねいの) |
40 | 우(禹) | 니야마(丹山、にやま), 우모리(宇森、うもり) |
41 | 구(具) | 아야시로(綾城、あやしろ), 아야하라(綾原、あやはら), 아야베(綾部、あやべ), 아야모토(綾本、あやもと), 구하라(具原、ぐはら) |
42 | 신(辛) | 가라시마(辛島、からしま), 시게미쓰(重光、しげみつ), 미카와(三川、みかわ) |
43 | 임(任) | 도요카와(豊川、とよかわ) |
44 | 전(田) | 다무라(田村、たむら), 사와다(澤田、さわだ), 다나카(田中、たなか) |
45 | 민(閔) | 빈하라(閔原、びんはら), 모토시로(本城、もとしろ), 이와무라(岩村、いわむら), 이와모토(岩本、いわもと), 가도후미(門文、かどふみ) |
46 | 유(兪) | 유하라(兪原、ゆはら), 마쓰바라(松原、まつばら), 기젠(杞前、きぜん), 유무라(兪村、ゆむら) |
47 | 유(柳) | 야나기(柳、やなぎ)[비개명], 야나기사와(柳澤、やなぎさわ), 야나기가와(柳川、やなぎがわ), 야나기와라(柳原、やなぎわら) |
48 | 나(羅) | 도미타(富田、とみた), 우에무라(上村、うえむら), 마쓰시마(松島、まつしま) |
49 | 진(陳) | 진나이(陳內、じんない), 진카와(陳川、ちんかわ), 진다(陳田、ちんだ), 미쓰야마(三山、みつやま), 오하라(大原、おおはら) |
50 | 지(池) | 이케다(池田、いけだ) |
51 | 엄(嚴) | 이와모토(岩本、いわもと), 나시로(奈城、なしろ) |
52 | 채(蔡) | 사이하라(蔡原、さいはら), 사이카와(蔡川、さいかわ), 히라오카(平岡、ひらおか), 히라마쓰(平松、ひらまつ), 히라모토(平本、ひらもと), 사카와(佐川、さかわ) |
53 | 원(元) | 모토무라(元村、もとむら), 하라모토(原元、はらもと), 하라무라(原村、はらむら), 하라야마(原山、はらやま) |
54 | 천(千) | 지하라(千原、ちはら), 지다(千田、ちだ), 지바(千葉、ちば) |
55 | 방(方) | 가타야마(方山、かたやま) |
56 | 공(孔) | 교쿠하라(曲原、きょくはら), 고무라(孔村、こうむら), 히하라(檜原、ひはら), 마사하라(昌原、まさはら), 고베(孔部、こうべ) |
57 | 강(康) | 야스하라(康原、やすはら), 야스히로(康宏、やすひろ), 야스다(康田、やすだ), 야스나리(康成、やすなり) |
58 | 현(玄) | 겐부(玄武、げんぶ), 노베야마(延山、のべやま) |
59 | 함(咸) | 나리모토(成本、なりもと), 간네(咸根、かんね), 간하라(咸原、かんはら), 에하라(江原、えはら), 가와모토(河本、かわもと), 마쓰바라(松原、まつばら) |
60 | 변(卞) | 벤다(卞田、べんだ), 구사타니(草溪、くさたに), 도쿠하라(德原、とくはら) |
61 | 염(廉) | 미즈하라(瑞原、みずはら), 우메하라(梅原、うまはら), 다치하라(立原、たちはら), 이시카와(石川、いしかわ) |
62 | 양(楊) | 야나기(楊、やなぎ)[비개명], 기요미즈(淸水、きよみず), 기요하라(淸原、きよはら), 와다(和田、わだ), 야나기하라(楊原、やなぎはら) |
63 | 변(邊) | 하라베(原邊、はらべ), 하라카와(原川、はらかわ) |
64 | 여(呂) | 미야하라(宮原、みやはら), 미야모토(宮本、みやもと), 로이(呂井、ろい) |
65 | 추(秋) | 아키야마(秋山、あきやま), 아키타(秋田、あきた), 아키히타(秋常、あきひた) |
66 | 노(魯) | 에무라(江村、えむら), 에모토(江本、えもと), 하나무라(華村、はなむら) |
67 | 도(都) | 미야코(都、みやこ)[비개명], 미야코다(都田、みやこだ), 쓰모토(都本、つもと), 미야코가와(都川、みやこがわ) |
68 | 소(蘇) | 구사카(草禾、くさか), 이소(伊蘇、いそ), 와다(和田、わだ), 아키타(秋田、あきた) |
69 | 신(愼) | 마야마(眞山、まやま), 마하라(眞原、まはら) |
70 | 석(石) | 이시하라(石原、いしはら), 이시카와(石川、いしかわ), 이시무라(石村、いしむら) |
71 | 선(宣) | 요시카와(宣川、よしかわ), 나카하라(中原、なかはら) |
72 | 설(薛) | 다마가와(玉川、たまがわ),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히로모토(弘本、ひろもと), 오야마(大山、おおやま) |
73 | 마(馬) | 기가와(木川、きがわ), 아리마(有馬、ありま), 우마노(馬野、うまの), 바바(馬場、ばば) |
74 | 길(吉) | 요시모토(吉本、よしもと), 요시다(吉田,よしだ), 데라사이(寺再、てらさい), 엔요(延陽、えんよう) |
75 | 주(周) | 슈모토(周本、しゅうもと), 도쿠하라(德原、とくはら) |
76 | 연(延) | 노부하라(延原、のぶはら), 나카야마(中山、なかやま), 나카모토(中本、なかもと), 노베야마(延山、のべやま) |
77 | 방(房) | 후사하라(房原、ふさはら) |
78 | 위(魏) | 나가모토(長本、ながもと) |
79 | 표(表) | 오모다(表田、おもだ), 야마자키(山崎、やまざき), 신카와(新川、しんかわ) |
80 | 명(明) | 아카시(明石、あかし), 아케가와(明川、あけがわ), 아카치(明地、あかち), 다치모리(日月、たちもり) |
81 | 기(奇) | 이와사키(岩崎、いわさき) |
82 | 반(潘) | 요네다(米田、よねだ), 가와무라(河村、かわむら) |
83 | 라(羅) | 도미타(富田、とみた), 우에무라(上村、うえむら), 마쓰시마(松島、まつしま) |
84 | 왕(王) | 오모토(王本、おうもと), 오지마(王島、おうじま), 마쓰다(松田、まつだ), 마쓰시로(松城、まつしろ), 오야마(王山、おうやま), 오하라(大原、おおはら) |
85 | 금(琴) | 고토가와(琴川、ことがわ), 가네다(金田、かねだ), 이마다(今田、いまだ) |
86 | 옥(玉) | 오하라(大原、おおはら) |
87 | 육(陸) | 구다시로(管城、くだしろ), 구가미(陸海、くがみ) |
88 | 인(印) | 시루시마(印島、しるしま), 다카키(高木、たかき), 다카무라(高村、たかむら) |
89 | 맹(孟) | 니하라(新原、にいはら), 마쓰오카(松岡、まつおか), 마쓰바라(松原、まつばら) |
90 | 제(諸) | 에가와(穎川、えがわ), 우루시바라(漆原、うるしばら) |
91 | 모(牟) | 무타(牟田、むた), 다니모토(谷本、たにもと) |
92 | 장(蔣) | 기바야마(牙山、きばやま),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구니모토(國元、くにもと) |
93 | 남궁(南宮) | 난구(南宮、なんぐう)[비개명] |
94 | 탁(卓) | 다카야마(卓山、たかやま), 미쓰야마(光山、みつやま) |
95 | 국(鞠) | 아오야마(靑山、あおやま), 아오타(靑田、あおた) |
96 | 여(余) | 요시카와(宜川、よしかわ), 도미모토(富本、とみもと) |
97 | 진(秦) | 하타(秦)[비개명], 난바라(南原、なんばら), 마쓰바라(松原、まつばら), 오쿠라(大倉、おおくら), 도요타(豊田、とよた) |
98 | 어(魚) | 우오카와(魚川、うおかわ), 우오니시(魚西、うおにし), 니시카와(西川、にしかわ), 우오누마(魚沼、うおぬま) |
99 | 은(殷) | 고슈(幸州、こうしゅう), 마쓰에(松江、まつえ), 에모토(江本、えもと) |
100 | 편(片) | 가타야마(片山、かたやま), 가타모토(片本、かたもと) |
한편 일부 조선인들은 창씨개명에 아주 심한 반감을 느껴서 얌전히 창씨개명을 당하는 대신 DQN 네임 저리가라 할 정도로 온갖 개드립, 비웃음, 풍자가 섞인 개명을 하면서 언어유희와 역관광을 꾀했다.
이름이 '전병하(田炳夏)'인 한 농부는 자신의 성에 농사를 의미하는 농(農)을 붙여 '전농병하(田農炳夏)'라고 신고했다가 경찰서로 끌려갔다. 평범해 보이지만 이 이름을 일본식으로 읽으면 덴노 헤이카. 즉, 한자는 다르지만 발음이 천황 폐하와 비슷해지는 것이다. 정확하게는 天皇陛下는 てんのうへいか(Tennō Heika)이고 田農炳夏는 でんのうへいか(Dennō Heika)로 청음과 탁음의 차이가 있지만 일본식 말장난인 고로아와세에서는 청탁음이 무시되므로,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는 창씨명이었다.
어떤 고등학생은 창씨개명 강요에 반항하는 뜻에서 쇼와 덴노의 황태자 책봉 이전 칭호와 이름을 합친 '미치노미야 히로히토'(迪宮裕仁)라고 개명을 하려 했다가 역시 경찰서에 끌려갔다. 우연치 않게도 쇼와 덴노가 황태자 책봉 전에 쓴 어칭호 미치노미야가 조선어로 미친놈이야와 비슷하여 미친놈이야 히로히토라고 하여 히로히토 천황을 비아냥거리는 뜻도 가질 수 있다.[63]
조선총독부로 '덴노조쿠 미나고로시로(天皇族 皆殺郞, 천황족개살랑)', '쇼와 보타로(昭和 亡太郞, 소화망태랑)'라는 이름으로 개명해도 좋냐는 엽서가 날아온 적도 있다고 한다. 전자는 천황 집안 다 죽인다는 뜻의 天皇族 皆殺에 인명에 쓰이는 郞(로)를 붙인 것이고 후자는 쇼와 망해라라는 뜻인 昭和亡에다가 장남의 이름에 쓰이는 太郞(타로)를 붙인 것이다.
비슷한 경우로, 어떤 사람들은 창씨개명을 실시한 총독의 이름이 '미나미 지로(南次郎)'인 것을 보고 '내가 총독보다 형님이구만'이라는 뜻으로 '미나미 다로'(南太郞)로 창씨개명했다.물론 처음엔 넘겼다가 뒤늦게 알아차린 총독부는 퇴짜를 놓는다. 일본에서 太郞(다로)와 次郞(지로)는 각각 장남과 차남에게 붙이는 이름이다.
당시 유명한 만담가인 신불출은 '구로다 규이치(玄田牛一)'라고 지었는데 이는 畜生을 파자한 것으로 세로로 써서 읽으면 딱 축생이다.[64] 한국어에서는 그냥 짐승이라는 뜻이지만, 일본어에서는 "개자식, 개 같다" 등의 욕으로 사용한다. 당시에는 세로쓰기가 더 흔했으므로 이에 맞춘 고품격 개드립이었고 이를 늦게 알아차린 총독부에선 역시 퇴짜를 놓았다.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도 신불출이 개그 소재로 창씨개명을 구로다 규이치(玄田牛一)로 이름을 정한 일화를 보여주기도 했다. (34초부터) 공연 후 미와 경부가 찾아온다.
역시 신불출의 이야기. 첫 번째 개명인 구로다 규이치가 퇴짜 맞은 후에 2번째로 이름을 江原野原(강원야원)이라고 지었는데 이를 일본식으로 읽으면 에하라 노하라. 즉 추임새인 '에헤라 놓아라'와 발음이 비슷하게 만든 것이며 이 역시 일본을 디스하는 의미다.
시인 이영철은 창씨개명의 성을 가나다(加那多)로 지었다. 일부러 한국어의 가나다 어순을 내포하여 지은 것으로 보인다.
한술 더 떠서 한 마을 전체가 짜고 마을 사람 전원이 같은 성과 같은 이름으로 통일해 버리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성과 이름을 통일시켜 버리면 조선총독부 입장에서는 조세 징수나 행정 절차상 귀찮은 일이 많아지므로 일부러 의도했다고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한 가지 한자로 통일하거나 뜻은 달라도 발음이 같은 한자로 개명하여 총독부를 조롱한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高高高高(4번이나 높은 사람) 라던지.
전술한 항일 또는 풍자의 목적으로 지은 이름 외에도 일부러 성의 없이 대충 지을 의도로 청산백수(靑山白水, 아오야마 시라미즈) 내지는 산천초목(山川草木, 야마카와 구사키)이라고 지은 사례도 있었다.
경상남도 양산군의 금융조합 직원 엄이섭(嚴珥燮)은 자신의 엄이섭(嚴珥燮)이란 이름 끝에 야(也)자만 붙여서 "엄이섭야"(嚴珥燮也)라는 이름으로[65] 개명 신고를 하여 모든 가족의 성 2글자가 "엄이"(嚴珥)[66]로 변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통해 창씨개명을 풍자·조롱하였다.
첫댓글 일제가 1930년대에 우리 국민을 대상으로 자행했던 소위 '창씨개명'에 대해서는 자료가 넘쳐나고도 넘쳐난다. 그 산증인이 아직 살아 있기도 하고, 나 같은 경우는 바로 앞 세대의 일을 들어서 알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 실체를 여기 인터넷의 '나무위키' 만 봐도 알 수 있다. 일제의 그 창씨 개명을 '이광수' '최남선' 등 지도급 인사들 몇이 자발적으로 했다고 해서 우리 민족의 거의가 그 악랄하고 간교한 일제의 책동에 손들고 환영한 것이 아니었다. 절대로 '자발적' 이런 소리는 하면 안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무서운 맹세가 '성을 갈겠다.'는 말이다. 그만큼 하늘이 무너져도 바꿀 수 없는 자신의 성이었다. 그걸 왜놈들이 새로 만들라고, 그것도 왜놈스타일로 새로 만들라고 하였으니.
제가 지금은 소주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하고싶은 것은 창씨개명은 강제였다고 말씀하고 싶은 것입니다. 저도 60년대 70년대 살 때 할머니 백부 외 많은 어른들이 계셨지만 일제때 성을 갈으라고 강요당했다는 어른 한분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무위키는 공적인 문서가 아닙을 아시기 바랍니다
즉 일반 개인이 참여해서 만드는 백과사전입니다.
박완서씨가 자기가 살아온 삶을 자서전적 소설을 쓴 것인데 소설은 다 픽션이다라고 하신다면 할 말 없는 것입니다.
笑而不答心自閑이라. 웃고 대답하지 아니하니 마음은 저절로 한가해지네. / 차라리 웃고 말죠.
저도 할머니와 백부께서 삼일 만세운동 이야기하시는 거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연세로, 즉 조선시대 유림의 권위로 압도하시려는 텐던시가 있으십니다
토론이 더 이상 의미가 없을 때는 끝내는 게 현명. 내가 무슨 권위가 있어 권위로 압도하려고 하겠나요. 좋은 시간 되시길.
아 그리고 당시 초가집이 있을 때 외할머니 집에 가면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안지 마라...
전봉준 장군 노래를 불러주시던 외할머니도 기억합니다.
근데 대학 가니까 운동권 애들이 그 노래 부르더군요. 전봉준장군의 노래였다는걸 대학가서 알앟습니다.
그런 거 보면 몇십년 전까지는 지역감정이 없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취해갑니다
넵 선생님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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똠양쿵 이런 말을 하시면 안됩니다. 우리 성씨는 창씨 개명을 않았어요.
@똠양쿵 일본아이들이 멋대로 만들어 올린 것이랍니다.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성을 바꿀 수는 없다, 이것이 당시의 우리 집 분위기 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