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2011년 부터 시작하였으니 금년이 2회째이다. 창원미래신용협동조합에서 조합원의 복지를 향상함과 동시에 신협의 활성화를 위하여 실시하는 일일관광 프로그램에 작년에 이어 두번째 동참을 하였다. 금융기관의 이익창출을 조합원에게 베푸는 일임과 동시에 그 반대급부의 활성화와 사기진작에 도움이 되는 행사라 생각한다. 하지만 완벽한 일이란 것이 없는 세상일이니 이보다 저 좋은 일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며 더 못한 일도 있을 수 있을 것을 가정하고 행하는 목적있는 행사이다.
일년에 딱 하루 이용하는 날이 종일 토록 비가내려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되짚어 생각하면 이 행사를 잘 치르기 위해 기획하고 준비하고 사전에 노력한 신협의 임직원님께서 무척 고생을 하였겠다는 생각에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당일 기차안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조합원들께 서비스를 하기 위해 이리저리 바쁘게 뛰고 있는 직원들이 무척 힘든 하루였을 거라는 수고로움에 고마움의 박수를 보냅니다.
프로그램은 포항의 죽도시장- POSCO-경주 양동마을 돌아보는 과정으로 되어 있었다.
아침 일찍 새로 지은 현대식 창원 기차역에 조합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오늘의 여행에 설레는 마음과 기대감을 가지며 열차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사람들의 마음은 대동소이하다. 일상에서 일탈하여 색다른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새로은 일들을 맞으며 상기된 마음으로 시각시각의 일들에 관심을 가지고 즐거운 시간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비님이 계속하여 내리고 있다.
기차는 시간이 되어 플램폼으로 들어오려는 준비를 하고 있는지 회원들을 역 안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기차여행은 단체로 정기여객객차가 아니고 따로 계약을 하여 차량 9개를 단독으로 계약하여 별도로 운행을 하여 오늘 종일 이 기차를 우리가 사용하게 되는 것으로 소지품이 차량안에 두고 다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열차객실 안은 그렇게 깨끗하고 좋다고 할 수는 없는 환경이나 하지만 버스나 KTX 보다 또 승용차 보다 넓고 편안한 좌석이 좋으며 급하게 달리지 않고 느릿느릿 달리는 것이 또 바쁜 세상에 느리게 살고 느리게 행동해 보는 느림의 미학을 즐기는 시간이 되기도 하였다. 우리는 어디 쯤이 종일 사용하게 될 좌석인지 자리를 확인하고 편안하게 폼을 잡고 앉았다. 하긴 이 프로그램에 참석을 신청 할 때 조용한 객실 조금은 시끄러운 객실 선호하는 객실을 선택하여 정하였기에 우린 조용한 객실에서 종일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여행 도중에 시끄러운 객실에 있는 손님이 참지 못하여 우리가 있는 객실로 오시는 회원도 있는가 하면 오히려 조용한 방에서 시끄러운 방으로 가서 오지 않는 회원들도 있었다.
사람은 개성에 살고 기분에 살고 죽는 일이니 내가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 수 있는 일이라면 내가 하고 싶은 행동 처신을 하며 살아야 사대육신이 편하고 마음까지 편하게 되는 것이다. 참 좋은 날이다.
마주오는 정기여객 모두 다 비켜주어야하고 뒤에서 쫒아오는 급히 달리는 객차 모두 비켜주어야 하기에 어떤 역에선 잠시 기관사를 교체한다고 또는 어떤 역에서는 물을 넣는다고 그리고 다른 기차를 비켜준다고 5-20분 기다리고 멈춰서 있기는 예사이고 그래 되는 대로 될대로 되어라하고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창원에서 포항으로 가는 철로가 동해를 바라 볼 수 남해바다와 동해 바다를 보면서 달리를 철길이라 낭만이 있고 경치를 구경하며 달리는 시간이 그리 괴로운 시간 만은 아니었다. 송정해수욕장 부근을 지날 때의 바다 풍경은 비도 내리고 안개도끼고 한폭의 동양화를 감상하는 시간이었다. 4시간 이상이 걸려 포항역에 도착하였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우린 우산을 쓰고 역전에 주차하고 있는 9대의 관광버스를 찾아 오르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포항시에서는 전국에 홍보를 하여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어 이 날도 차량 20대가 한꺼번에 역에 주차를 하고 있어 내가 타야 할 관광버스를 찾아 오르는 일도 어려웠다. 우산을 받쳐들고 빗속에서 찾아 헤메야하니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당하여 어려움을 겪었다. 약 20분 동안 이동을 하여 포항 족도시장 부근 삼일주차장에 하차를 하여 도심속에 흐르고 있는 강을 하나 건너야했다. 시내를 관통하는 강이라 아주 많이 오염되어 겅정색으로 보이는 강물위로 플라스틱으로 만든 부유시설을 이용하여 흔들거리는 다리를 건너 죽도시장에 도착하여 우선 점심을 먹었다. 워낙 사람이 많이 9대의 차량 하나에 한개의 식당 그러니까 시장번영회에서 사전에 안내를 하여 차량별로 식당을 지정하여 두었기에 우리는 승리식당이라는 곳을 찾아갔었다.
비좁을 계단을 올라 비에 젖은 몸에 신발 우산을 정리하고 제자리에 들어가 앉기까기 많이 불편하였다. 아침을 제대로 먹고 출발을 하였으나 시장한 기운이 있어 맛있게 가자미 물회라는 음식을 나는 아주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나중에 이야기를 듣고 보니 많은 사람들을 모시는 일이 어려움이 있었을까 음식이 제대로 맛나게 만들어지지도 않았고 4인 1조로 된 밥상에 찬이 길쭉한 접시 한 개에 세가지의 나물류를 담아 낸 것이 고작이라 회원들이 아주 불평 불만이 많았다. 나는 그렇게 식단이 되어 있는 것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겠지 하는 생각에 아무렇지 않게 맛있게 먹었는데 다른 회원님들은 불평과 불만이 아주 대단하였다. 그 말을 듣고 난 다음 내가 촬영한 식단의 사진을 보니 아주 볼품없는 식단이라는 사실을 문외안인 나도 알게되었다.
죽도시장 승리식당 우리 1호차 회원님들께서 점심을 함께 한 식장이다. 이층으로 오르는 게단도 비좁고 복잡하고 오늘 같이 비가 오는 날이면 식당도 걸어들어가 바로 신발을 신고 그냥 의자에 앉아 식사를 할 수 있는 조건의 식당미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였다. 식당 벽면에는 이명박 대통령 부인도 맛잇게 드시고 간 식당이라는 현수막이 붙혀져 있었다.
포항시의 재래시장 장보기를 통한 지역 활성화 아이디어가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모양이다. 포항시는 2006년 동해안 최대의 재래시장인 죽도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색다른 전략을 마련했다고 한다. 장보기에 관광 프로그램을 곁들여 소비자들이 ‘짧은 여행’을 하는 것처럼 만족도를 높히는 프로그림을 적용한 것이다. 지난 2년 동안 이 프로그램에 참가한 소비자는 5000여 명. 대부분 대구와 구미시 김천시 상주시 등 내륙지방 주민이다. 설문조사 결과 이들은 장을 보는 데 1인당 평균 10만 원가량을 썼다고 한다. 30∼40명이 신청하면 포항시는 무료로 버스를 보내주고 일정이 끝나면 데려다준다. 대구와 경북에만 적용하던 버스 서비스를 올해부터는 전국으로 확대했다.
코스는 죽도시장과 구룡포 과메기특구, 호미곶 해맞이광장, 오어사, 흥해민속박물관, 포스코, 방사광가속기 등이다. 흥해읍에 있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고향 마을도 코스에 들어갔다. 버스에는 시에서 배치한 봉사요원(여성)이 안내를 담당하여 소상하게 설명을 하여주었으며 이와 같은 표식을 관광객의 목에 걸고 시장을 돌며 쇼핑을 하게하였다. 전국적으로 대기업에서 골목 상권까지 잠식하여 소상인들이 폐업을 하는 일이 점점 늘어나 급기야는 정부에서 대형마트에서 정기적으로 쉬는 날을 만들어 강제적으로 운영을 할 만큼 소상인들을 위해 전통시장 5일장을 살리기 위해 선전도 많이하고 있음은 피부로 느끼고 있는 사실이다. 포항 죽도시장의 규모가 대단한 시장이다. 시장의 넓이가 5만평이라고 하니 짐작이 가지 않을 만큼 큰 시장이다.
포항제철소(POSCO)를 방문하였다. 전담 안내요원이 포스코에서 나와 상세하게 안내를 하였으며 사진과 동영상 촬영을 하면 공장관람이 중단이 된다는 안내에 따라 한장의 사진도 촬영 할 수 없었다.
1968년 포항종합제철(주)로 설립되어 2002년 3월 15일 지금의 사명으로 변경하였다. 국내 최초의 고로(高爐;용광로) 업체로서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 등 2개의 일관제철소를 보유하고 있다. 포항제철소는 1970년 4월 1일에, 광양제철소는 1985년 3월 5일에 착공하였다. 1973년 7월 3일 조강(粗鋼) 연산 103만t 규모의 포항제철소 1기 설비를 준공한 이래 꾸준히 설비를 늘려 2009년 현재 포항제철소는 고로 5기와 PCI(미분탄취입) 설비, 용광로공법을 대체하는 친환경 제철공법인 파이넥스(FINEX) 2기 등을 , 광양제철소는 고로 5기와 PCI 설비 등을 갖추고 있다. 2011년 포스코 광양제철소 하이밀 공장이 합리화 공사를 마치고 세계 최초의 연연속 열연공장을 갖추게 되어 기존 보다 30%가량 더 얇은 박판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양대 제철소의 연간 조강 생산능력은 포항제철소 1500만t, 광양제철소 1800만t으로 총 3300만t에 이르며, 2009년 연간 조강 생산량은 포항제철소 1434만 4000t, 광양제철소 1518만 6000t으로 총 2953만t을 기록하였다. 이는 룩셈부르크의 아르셀로미탈, 중국의 허베이강철그룹과 바오강그룹에 이어 세계 4위에 해당한다. 광양 4고로는 개수를 거쳐 2009년에 내용적 5500㎥의 초대형 고로로 재탄생하였고, 2010년 1월 13일 1만 5613t을 생산하여 세계 최초로 하루 쇳물 1만 5000t을 넘어서는 기록을 세우고 연간 500만t 생산체제를 구축하였다. 또한 광양제철소의 연간 조강 생산량은 단일 제철소로는 세계 최대 규모이다.
주요 생산 제품은 열연·선재·용융아연·전기아연·STS(스테인리스스틸)·전기강판·냉연·후판 등이다. 사업목적은 철강제조 외에 1984년 항만하역업·운수업·창고업과 전문직업 경기단체 운영을, 1994년 부동산 임대업과 유통업을, 1995년 도시가스사업과 발전사업, 2001년 지역난방사업을, 2002년 광물의 국내외 해상수송 및 가공, 판매를, 2006년 교육서비스업과 사업 관련 서비스업을, 2007년 비철금속의 제조·가공·판매와 자원개발사업을 추가하였다. 1994년 뉴욕증권시장에, 1995년 런던증권시장에, 2005년 도쿄증권시장에 각각 상장하였다. 1997년 사외이사제도를 도입하였으며, 2000년 10월 산업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지분이 전량 매각됨으로써 민영화되었다.
계열회사로는 포스코특수강·포스코강판·포스틸·포스코TMC·포스코AST·포스코건설·포스코플랜텍·포스코A&C·대우엔지니어링·성진지오텍·포스코파워·포스코E&E·포스코ICT·포스코켐텍·포스코터니날·포스하이메탈·삼정P&A·포스화인·SNNC·PNR·포스코경영연구소·포스메이트·포스텍기술투자·포스위드·승광·포스에코하우징·엔투비·포레카와 프로축구단 포항스틸러스와 전남드래곤즈 등이 있다. 그밖에 중국·일본·미국·캐나다·독일·오스트레일리아·인도·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베트남·미얀마·태국·필리핀·멕시코·폴란드·베네수엘라·우즈베키스탄·수단·터키·아르헨티나·칠레·에콰도르·우르과이 등지에 해외 계열회사가 있다.
다음에 들른 곳이 포항이 아닌 경주에 있는 양동마을이다. 안동의 하회마을과 같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전통 마을이다. 양동마을은 마을 입구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었으며 차에서 내려 한길로 약 500미터 이상 큰 길을 따라 양켠에 있는 마을을 관람을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마을을 조감하였을 때 골목을 중심으로 양족으로 띄엄띄엄 무리를 지어 집들이 있는데 기와집과 초가집이 섞여있었으며 큰 길을 걸어들어가면서 왼편으로 두개의 작은 골짜기가 있었다. 그 골짜기 마다 옛날에 사대부가의 지체 높으신 분들이 기거하였을 것 같은 대형 와가 들이 즐비하게 이골짜기 저골짜기에 가득하게 지어져 있었다. 초가집도 집을 이루고 있는 체목이 아주 크고 사각기둥으로 지어진 것이 아주 반듯한 집들이라 전통적으로 나무 껍질만 벗겨 말려서 비툴고 휜 기둥으로 지은 초가삼간 집들과는 차이를 보이는 모양이었다.
비는 종일 쉬지 않고 내리고 있다. 먼저 차에서 내려 양동마을 입구에 들어서 먼저 걷기 시작하였다. 바람도 불어 얇게 입은 탓으로 춥기도하여 관광보다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마을 끝나는 곳까지 올라가 다시 돌아내려오다 오른쪽으로 비탈진 곳을 올라 야트막한 능선을 따라 마을을 내려다보며 조망을 할 수 있어 마음이 전체적으로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마을 딧편 얕은 산 너머 안강평야라는 아주 넓은 들판이 있으며 곁으로 강이 흘러 농사를 짓기에도 아주 좋은 곳으로 보였다. 마을을 돌아보고 내려오니 함께 온 회원들이 마을을 앤내하여 주는 분이 있어서 설명을 들었다고 하는데 이 마을과 관련하여서는 이언적이라는 분을 알아야 하고 이분이 있어서 이 마을이 유명하다고 하여 이언적을 인터넷을 이용하여 찾아보았다.
본관 여주. 호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자 복고(復古). 이름 적. 시호 문원(文元). 원래 이름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령으로 언적(彦迪)으로 고쳤다. 경주에서 태어나 외숙인 손중돈(孫仲暾)에게 글을 배웠으며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였다. 사헌부 지평·장령·밀양부사 등을 거쳐 1530년(중종 25)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었는데, 김안로(金安老)의 재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귀향한 후 자옥산에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였다.
1537년 김안로가 죽자 다시 관직에 나아가 홍문관 부교리·응교를 거쳐 이듬해에는 직제학에 임명되었다가 전주부윤이 되었다. 이 무렵 일강십목(一綱十目)으로 된 상소를 올려 올바른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그 후 성균관대사성·사헌부대사헌·홍문관부제학을 거쳐 1542년 이조·형조·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노모 봉양을 이유로 자주 사직을 하거나 외직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여 안동부사·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544년 무렵부터 병이 생겨 거듭되는 관직 임명을 사양하였는데, 인종이 즉위한 다음해(1545)에 의정부 우찬성·좌찬성에 임명되었다. 그해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尹元衡) 등이 사림(士林)을 축출하기 위해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켰는데, 이때 의금부판사에 임명되어 사람들을 죄 주는 일에 참여했지만 자신도 곧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 을사사화의 여파인 양재역벽서(良才驛壁書) 사건이 일어나 사람들이 다시 축출될 때 그도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다.
부인은 박숭부(朴崇阜)의 딸로 슬하에 자식이 없어 종제(從弟) 이통(李通)의 아들인 이응인(李應仁)으로 양자를 삼았으며, 서자로는 이전인(李全仁)이 있다. 1566년 이전인은 《진수팔조(進修八條)》의 상소를 올렸는데, 이는 그가 죽기 전에 작성해 놓은 것으로서, 임금의 학문에 필요한 《진덕수업(進德修業)》의 8가지 조목을 열거한 것이다. 그는 조선의 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27세 때 영남지방의 선배학자인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 벌어진 ‘무극태극(無極太極)’ 논쟁에 참여하여, 주리적(主理的) 관점에 입각하여 이들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였다.
기(氣)보다 이(理)를 중시하는 주리적 성리설은 그 다음 세대인 이황(李滉)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중요한 성리설이 되었으며, 조선 성리학의 한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 김안로 사후 그는 재등용되어 중종의 신임을 받으며 정치일선에 복귀하는데, 이때부터 중종 말년까지 약 20년간 그는 생애 중 가장 활발한 정치활동을 펴 나갔다. 그가 올린 〈일강십목소〉는 그의 정치사상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김안로 등 훈신들의 잘못에 휘말린 중종에 대한 비판의 뜻을 담고 있는 글이다. 왕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一綱] 왕의 마음가짐이라고 주장하고, 그것을 바로하기 위한 수단으로 열 가지 조목[十目]을 열거하였다.
유배기간 동안 그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 《구인록》은 유학의 근본개념인 ‘인(仁)’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을 나타낸 것이며, 《봉선잡의(奉先雜儀)》는 제례(祭禮)에 관한 책으로서 주자가례를 중심으로 여러 학자들의 예설(禮說)을 모아 당시 실정에 맞도록 편집한 것이다.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와 《속대학혹문(續大學惑問)》은 《대학》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견해를 보여주는 책으로 주희의 《대학장구》나 《대학혹문》을 보완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특히 주희가 《대학장구》에서 제시한 체제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학설을 제시하여 이를 개편하려고 한 시도는 그 이후의 도학자(道學者)들에 비해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학문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중용구경연의》는 진덕수(眞德秀)가 《대학연의》를 저술하여 정치의 도리를 밝혔지만 제왕학(帝王學)으로서는 부족한 점이 있어 이를 중용의 구경(九經)으로 보완하려는 의도에서 쓰여졌다. 완성을 보지 못한 책이지만 그는 여기에서 정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왕의 마음이며 왕은 천도(天道)를 체득하여 배천(配天) ·경천(敬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명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1573년에는 경주의 옥산서원에 제향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종사되었다. 이언적의 주요저술 원본은 ‘이언적수필고본일괄’이라고 하여 보물 제586호로 지정되어 독락당과 옥산서원에 보관되어 있으며, 다른 글들은 문집인 《회재집》에 실려 있다.
마을 초입에 들어서면서 첫 눈에 띄인 것이 단정하게 쌓아올린 담장에 솔가지를 걸쳐놓고 그 위에 흙을 올려놓은 전형적인 옛 우리 시골의 담장이 눈에 들어왔다. 저 담장위에 채송화를 심어 놓으면 담장이 화려하게 꽃을 이고 있는 모습을 보며 자란 기억이 있다. 어릴 적에 볏짚으로 나릿모리(이엉)를 엮어서 지붕을 인다고 하였는데 나릿모리(이엉)를 직접 엮어 보았고 지붕에 올라가 집을 이는 일을 거들어 보기도 하였기에 어떻게 한다는 것을 나는 다 알고 있다. 그리고 지붕을 이는 것 처럼 담장도 인다고 한다. 담장은 한해 한번씩 하는 것이 아니고 담장의 흙이 흘러 내려 비가 내릴 때 담장 벽에 비가 젖을 정도이면 새로 이는 작업을 하는데 담장위의 흙을 전부 아래로 벗겨내리거나 아이면 산에서 뽀데기(키작을 솔나무)를 베어와서 차곡차곡 담당위에 올리고 그 위에 흙을 올려서 단단하게 다져놓으면 된다. 그 흙에 치장을 하기위해 적당한 꽃을 선택한 것이 채송화를 심어면 제격이다. 이 곳에서 그 담장을 보고 옛날 내 어릴 시절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지금은 시골 고향에도 저와 같은 담장을 구경하지 못한다. 전부 새마을 운동에 힘입어 블록으로 담장을 쌓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소개한 이언적이 왕의 하사품으로 99칸의 방이 있는 집을 지어 그 위풍을 누리며 지낸 고장이 이 양동마을이라고 한다. 하긴 그렇다. 형제간에도 뛰어난 인물이 있으면 다른 형제도 등달아 잘 살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가고 한지역에 이름을 떨치를 사람 인물이 배출 되면 그 지역에 큰 영향을 미쳐 도움이 되는 일이 우리 사는 세상에 허다하게 볼 수 있다. 이 마을은 이씨와 손씨의 집성촌이라고 한다. 곳곳에 대궐 같은 와가가 즐비하게 있고 그 와가도 솟을 대문에 대문에 집의 이름을 써붙여 놓은 집이 한 두 집이 아니었다. 그러니 대단한 마을임에는 틀림이 없다. 99칸 집이 현존해있지 않고 지금은 57칸인가 형체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마을을 돌면서 이곳 저곳 비가 내려도 우산 밑에서 사진을 많이 촬영을 하였는데 대동소이한 와가들이 모양을 갖추고 있었으니 여기 촬영한 와가는 멀리서 봐도 대단한 것 같아 촬영을 하였는에 아마 이 와가가 옛날에 99칸의 집이 었던 것으로 생각을 할 수 있다. 결국 이언적의 거소였던 집이라는 것이다. 이 마을이 이렇게 번창하고 이뤄질 수 있는 자연적인 여건은 주변을 흐르는 세개의 강물이 한 곳으로 합수를 하는 곳으로 널리 이름이 난 명당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마을 뒤편에 안강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는데 아마 이마을의 대가들이 지주가 되고 초가에 사는 사람들은 소작농으로 그 대가댁의 일을 거들며 품삯으로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돌아오는 길에도 비는 여전히 내리고 관광일정을 마치고 포항역으로 돌아와 기차시간을 기다리는 조합원님들의 표정이 그렇게 밝아보이지 않았다. 날씨가 문제였다. 우리네 말에 어떤 행사에 "날씨가 한 부조를 한다"고 하였는데 기상적인 상황을 미력한 인간이 어쩌지 못하지만 다행하게도 날씨고 좋았다면 일년에 한번 갖는 행사 힘써 준비한 임원들의 노고가 백배효과를 발휘 할 수 있을 좋은 시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걱정도 하였을 것이고 실제 현장에서 발로 뛰면서 이것 저것 조합원님들 시중 아니 서비스 하느라 무척 고생을 하신 담당직원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돌아오는 시간도 쾌나 많은 시간이 걸려 창원중앙역에서 일부 조합원님들이 하차를 하고 창원역에서 하차를 하니 벌써 시내버스는 운행이 끝난 시간이었으며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하니 12시15분 전이었다. 비를 종일 생각하며 생활하기도 처음 인 것 같다. POSCO도 대단한 규모의 철 소재를 생산하는 과정을 보고 놀랐고 철 소재 생산이 국가 산업발전의 쌀이라고 할만큼 중요한 중요하며 65%정도 국내 소비를 하고 35%정도 외국에 수출을 한다고 한다. 죽도시장의 프로그램운영도 좋았으나 특히 나는 양동마을을 돌아보게 된 것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서울이 아닌 지방에 이와 같은 마을이 있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