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헌 시인>>
<<주영헌 시인의 양력>>
* 1973년 충북 보은 출생.
* 학력 : 명지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 석사
* 2009년 《시인시각(‘시인동네’의 전신)》으로 등단.
* 2019년《불교문예》평론 등단
* 시집 : 『아이의 손톱을 깎아 줄 때가 되었다』, 『당신이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 『당신 잘살아야 합니다』
<<주영헌 시인의 시>>
힘은 어디에서 오나요/주영헌
뒤돌아서는 당신의 그림자는 왜 짙은 그늘로만 기울어지나요
안 그래도 휘어진 등 힘들어 보여서
힘내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힘은 어디서 오나요
벽에 못 하나 박는 일이나
시장바구니에 저녁거리를 담는 일
사무실에 홀로 남아 야근하는 일이나
과장님의 주말 카톡까지도
생각해보면, 모두
심(心) 써야 하는 일입니다
그 마음 때문에
울컥하는 또 다른 마음도 있습니다
말로는 내 마음 다 담아낼 수 없어
당신에게 짧은 문자를 보냈습니다
심(心)내요
힘내요
가묘(假墓)에 몸 대신 울음을 눕히고/주영헌
충북 보은군 수한면 발산리 보은태생 新安朱氏 선산, 이곳에 내 몫의 묫자리[假墓]가 있습니다.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은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속 빈 강정처럼 빈, 그 속이 출출해 보여 몸 대신 뚝뚝 떨어지는 울음을 채워 넣었습니다. 울음을
꼭꼭 즈려밟고 봉분 위에 섭니다. 저쪽 계곡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야숙(野宿)하듯 눕기에 편안한
명당입니다.
나무 그림자가 다리를 슬쩍 걸칩니다. 작은 잎사귀 하나 살랑 바람 곁에 몸을 걸칩니다. 할미꽃도
민들레도 짝을 맞춰 피었습니다. 바람도 나무도 꽃도 이 자리가 참 좋은 모양입니다.
비석도 없는 墓라니 여간 허망한 것이 아닙니다. 내 이름 석 자 적어 비석을 세웁니다. 아직 죽은
것은 아니니 學生府君神位라고 적지 않고 生者神位라고 적었습니다. 묘비에 生者라니 허망한
망자의 욕심처럼 보입니다. 生者를 지우려다 바로 墓속에 누워야 할 것 같아 그냥 놔두었습니다.
사람은 한세상 욕심으로 산다지요. 누군가 본다면 속으로 욕하더라도 망자의 마지막 욕심이니
눈 감아 주겠지요.
저 墓, 누구의 墓입니까. 내 울음의 墓입니까. 아니면 육신의 墓입니까.
그래도 저 墓, 봄 되면 꽃 활짝 피고 초여름 떼도 무럭무럭 자라나겠지요. 그러다 붉은 잎사귀
따뜻이 떨어지고 한겨울 함박눈 흠뻑 내리면, 보기는 참 좋겠습니다.
당신에게도 모든 울음 꼭꼭 채울 수 있는 저런 집 하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대한민국人/주영헌
우리는 한국 사람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원주민이라는 주민등록증도 있습니다.
봄철이면 중국발 황사를 다 함께 호흡합니다. 우리는 함께 애국가를 부르고, 월드컵에는
붉은 옷을 입고 함께 큰 함성을 질렀습니다. 올림픽에는 ‘영미!’라고 같이 외쳤습니다.
당신과 나는 한국말을 합니다. 그런데 나는 당신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신도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까?
‘안녕’이라는 말까지 이해하겠습니다. ‘그러니까’라는 말도 이해하겠습니다. 주어와 동사
와 단어, 그 낱낱의 의미는 이해하겠는데,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당신이 목청을 높이고, 얼굴을 붉히고, 삿대질하는 모습을 보니 감정의 격함은 알겠는데,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자자, 목소리를 낮추고, 우리 천천히 이야기합시다. 이 말은 이해하시죠.
당신 말을 한국어 ‘가’라고 부르고 내 말을 한국어 ‘나’라고 부릅시다. 누군가 우리 사이에
낀다면 한국어 ‘다’라 부릅시다.
우리,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까.
송곳/주영헌
빈 몸에 취기로 둥지를 튼 새벽
몸 안이 절절 끓고 있다
거미처럼 천장으로 기어 올라간 그림자가 투명한 집을 짓는
새벽이 터져 환한 아침
순서를 앞지른 아이가 내 옆에서 거꾸로 자고 있다
추위를 쫓고 덮어준 이불 사이로 손가락이 뾰족하다
검게 때가 낀 손톱
아이의 손톱을 깎아 줄 때가 되었다
겪어 나가는 모든 일은 다 깰 때가 있다
어느 지점을 봉합한 아이가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일
잠시 시들었던 아이의 몸에선
시든 꽃잎들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 같은 말들이 의사의 입에서 옮겨지고 있다
아침까지만 해도 아파트 앞 놀이터에서 놀다 온 두 손
억세게 철봉을 잡았던 손가락도 기진한 듯
아비의 손가락 마디 하나를 잡지 못하고 있다
병실이 놀이터라도 되는 듯
손톱 사이엔 놀이의 흔적이 얼룩져 있다
수액이 줄어드는 시간
그만큼 비워진 아이의 시간이 몸속에 차오르고 있다
분주함이 침대 하나씩 차지하고 누워있는 병실
침묵은 분주함의 후생 중 하나일 것,
눈을 떴으나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지난밤 가시지 않은 취기가 송곳처럼 머릿속을 쿡쿡 찌르고 있다
이제 아이는 지나온 빈 시간을 구겨 논다
정지된 것들을 터트리는 송곳이 반짝 빛났다
바다는 왜 해변을 두드릴까요/주영헌
오늘도 바다는 해변을 두드립니다
얼마나 그리워야
쉬지도 않을까요
얼마나 외로워야
하루에 몇 번이나 육지를 껴안는 것일까요
보고 있으니
나까지 쓸쓸해져서
당신이 그리워집니다
당신을 다시 안아보고 싶습니다
울기 시작하면/주영헌
까치가 아침부터 울기 시작했습니다
울기 시작하면
누군가가 찾아온다는 말에
운다는 말을 다시 생각합니다
아이가 울면
엄마가 찾아와
토닥토닥 등 두드려 줍니다
내가 울면
누가 찾아올까요
바람이 같이 웁니다
내가 가여워 나무도 손을 흔드는 것입니까
저쪽에서
당신이 오고 있습니다
눈물은 정해진 방향이 없습니다/주영헌
눈물을 참으려다가
목이 메어 오는 것은 참아 낼 수 없어서
눈을 꾹 감아버렸는데
당신도 나처럼
눈물을 참고 있었습니다
당신 쪽으로만 흐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소풍날의 비 예보처럼
짐작이 확신이 되는 날이 있습니다
당신이 먼저 울어
내 가슴의 장마가 아무 때나 찾아올 것 같습니다
회전목마/주영헌
세상은 원래 한방향으로만 움직이는 것이라고
회전목마를 탄 네가 말했다
네 얼굴을 보기 위해 거꾸로 앉았고
그때부터 세상이 거꾸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겨울과 여름은 한없이 냉정하고 뜨거워서,
봄가을은 진심으로 외로워서
나는 놀이동산에 가지 않아
아이들의 모습이 행복해 보여서 불안하지
불안은 미끄럼틀 위에서 뛰어내리는 해맑은 아이 같아
저 감정은 아이들을 집어삼키고 놀이동산까지 집어삼키겠지
너의 미소를 하얗게 삼켜버린 것처럼
까르르 웃던 네 모습 기억할 수 없어서
정말 미안해
주술呪術 / 주영헌
다래끼가 난 눈썹 하나를 뽑아
돌 사이에 끼워두면
돌을 찬 사람이 다래끼를 가져간다는
속설이 있지
발로 찬다는 것은 멀리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 가까이 두는 주술呪術
작은 돌멩이 몇 개 발에 챈다
돌멩이 속에 영혼이 깃들어져 있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은하가 존재한다면
그 안의 모든 영혼들은
나와 한 몸이 되는 것일까
작은 돌멩이는 큰 바위의 흔적,
영혼이나 우주가 저 돌멩이를 닮았다면
영혼도, 우주도
소멸할 수밖에 없겠다
소멸하는 몸뚱어리 속에 깃든 영혼들은 다시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주머니 속의 돌멩이 몇 개
쉬지 않고 달그락거린다
맹렬히 껴안을 때마다 딱딱
부딪치는 마음도 있다
졸음의 지점/주영헌
정차 없는 생(生)
정면으로 흘러가는 후경을 묵묵히 바라보며
낯선 풍경의 깊숙한 곳으로 흘러가는 시간
…(중략)…
내 몸의 일정한 이 숨소리들은 지금 어디를 달려가고 있을까
짧은 순간을 향해
긴 시간을 달려가는 불편한 진동
아무리 몸을 구기며 고쳐 앉아도 불편하기만 한
난청이 몸을 흐르고 있다
위(胃)/주영헌
바람이 나무의 밑동을 치고 있다
나무는 언제 바람을 소화시킬까
반쯤 떨어져 나간 슬레이트 지붕 사이로 소화되지 않는 허공의 면(面)이 낙엽처럼 떨어졌다
나무에 胃가 있다면
胃를 가득 채우는 흔들림은 허공의 속성일 것
부유의 존재들로부터 수유하는 수천 장의 바람
뭉쳐진 그늘 밑에서 나는 나무의 연금술을 생각한다
당신이 폐라고 생각하는 몸속의 가장 가벼운 곳
그곳, 공기를 먹는 胃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당신은 나무와 같은 胃를 가졌군요
당신은 사람이란 나무였군요
부드러운 각질 속에 숨긴 무늬는 어느 산의 지도인가요
생각하는 지도
생명과 소멸이 아득히 반복되는 바람의 잎이나
마방이 달고 떠난 고원의 딸랑거리는 종소리 같은 간격
더듬어 볼 수 있을까요. 연기가 가리키는 곳도 그곳일까요. 허공의 면과 같은
마을의 적요가 힘껏 늘려 놓은 고무줄 같은 타지. 느슨해진 마을의 남자들
모두 어느 부위에 붙은 위일까요
나를 보여주듯 타다만 모닥불 속에서 나무는 잠시 빛나고 있네요
허공을 켜서 붙이는 불
불도 나무와 같은 胃를 가졌군요
반대쪽/주영헌
당신이 나의 오른쪽에 있을 때 나는 당신의 왼쪽에 있습니다.
내가 고개를 돌려 오른쪽을 바라볼 때 당신은 왼쪽을 바라봅니다.
당신은 우리가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다른 편이었습니까?
당신은 나에게 당신의 손은 차갑고
나의 손은 따뜻하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차갑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나 다른 온도로 살아가는 것
다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서로를 위해 존재합시다.
나는 당신을 당신은 나를 위해
우리는 서로의 발이 되어 먼 길 걸어가는 외발입니다.
잔상/주영헌
오랜만에 던진 농담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네 얼굴이 오래도록 시무룩해 보였다.
너는 시소를 타지도 않았는데 나는 수평을 맞추고 있지. 균형을 생각하지 말라는 너의 당부를 잊어버렸어. 세상에는 균형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너는 그네를 타고 저 멀리 떠나가려 했어. 그러나 아무리 발을 굴러도 제자리. 다행이야, 삶이라는 중력에서 탈선하지 않고 제자리를 맴도는 너를 내가
사랑할 수 있어서.
너는 목마를 좋아했지. 세상은 원래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것이라고. 네 말을 듣기 위해 거꾸로 앉았고 그때부터 세상은 거꾸로 움직이기 시작했어.
겨울과 여름은 한없이 냉정하고 뜨거워서, 봄과 가을은 진심으로 외로워서 나는 놀이터에 가지 않아. 놀이터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불안하지. 불안은 미끄럼틀 위에서 뛰어내리는 아이 같아. 저 감정은 아이들을 집어삼키고 머지않아 놀이터까지 집어삼킬 거야. 너의 미소를 하얗게 삼켜버린 것처럼.
까르르 웃던 네 모습 기억할 수 없어서, 정말 미안해
늦가을의 편지/주영헌
당신, 벌써 늦가을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찬란의 계절이 찾아왔습니다. 멀지 않아서 흰 눈이 펑펑 쏟아지는
계절도 오겠지요. 산과 들에, 창문 밖에 훨훨 타오르는 저 단풍잎의 붉은 열기도 휘날
리는 차가움에 식어 무채색으로 변해가겠지요. 여름 내내 손을 뻗어 허공을 간지럽
혔던 잔가지들도 야위어 부러져 버리겠지요. 녹음의 푸르름 속에 몸을 숨겼던 작은
동물들도 몸 숨기지 못해 추위와 두려움 속에서 떨겠지요.
늦가을에 도착해야 환하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내 몸 한 뼘 더 어두워지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아쉬운 것이 많아서, 저 풍경까지도
후회와 아쉬움으로 보이는 것입니까. 왜 이 감정은 이맘때쯤이면 나를 지독하게 괴롭
히는 것입니까. 내 마음 만족을 모르고 차오르는 삭월(朔月)이기 때문입니까.
찬란한 겨울은 있었습니다.
당신에게 사랑 고백을 하고, 소박한 식을 올렸을 때, 서로 가진 것이 없어, 빚을 빛처럼
얻어 생활을 시작했을 때, 세상의 바람은 삭풍(朔風)처럼 매서웠지만 우리는 참 따뜻했
지요. 둘만의 열기로도 차가운 방을 훈훈하게 데우고, 추운 겨울은 봄처럼 따뜻했습니다.
그렇게 찾아온 봄날, 푸른 씨앗이 싹을 틔웠을 때 얼마나 신기했는지요. 우리는 겨울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었지만, 마음은 봄의 축복을 받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몸속에서 긴
잠을 자던 씨앗이 깨어나 꼬물거리며 눈곱만한 이파리를 내밀었을 때, 그리고 그 작은 이
파리를 손잡았을 때, 천만년 동안 쌓였던 빙하가 녹는 듯 눈물 흘렀습니다. 몇 해 지나지
않아 다시 찾아온 매서운 추위에 뿌리까지 말라 버렸지만…
언젠가 이겨낼 수 없는 혹독한 추위가 다시 찾아올지 모르지만, 후년의 봄을 기약할 수
있는 까닭은 당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산다는 것은 눈비로 질척질척한 땅을 서로의 발이
되어 건너는 것임을 오래 살다 보니 알겠습니다. 얼마나 오래 이 길 함께 걸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당신이 나에게 고백했던 말처럼, 당신이 발이 되어 걸어가겠습니다.
계약직/주영헌
새벽 첫 버스를 탔다
버스 좌석이 깊게 눌려 있다
지난밤 마지막 승객의 고단했던 하루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늦은 시간까지 야근을 했거나,
어린 시절 딱지를 주고받듯 동료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처지를 주고받았을 것이다
새벽 버스에 몸을 실은 내 삶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빌린 둥지에서 몸을 녹이듯
깊은 잠에 빠져든다
버스가 멈췄다 달릴 때마다 잠의 채널이 돌아간다
장그래장그래장그래
지난밤 TV드라마 대사가 이명처럼 울려 퍼진다
벨을 누르고,
환승을 위해 카드를 꺼낸다
하차를 위해 졸린 눈을 여는 사람들
환승을 하듯,
생은 누구에게나
계약직이다
계약직이 아닌 사람이 없다
소면을 삶으며/주영헌
당신이 소면을 삶으면*
그 옆에 선 나는
멸치로 국물을 내고
애호박을 씻어 잘게 잘라 볶고
계란을 풀어 고명을 만듭니다
소면이 익는 동안
우리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하다가
당신에게 고백했던 순간을 얘기하며
난처하게 웃다가
냄비 가득 삶아지는 소면을 보면서
먹지도 않았는데 배부르다던 당신
소면을 담고
따뜻한 육수를 붓고
잘 볶아낸 호박 나물과 노란 고명을
소복하게 올립니다
당신과 함께 먹는 한 생의 국수
* 류시화 시인의 시 「소면」에서 빌려왔다
힘은 어디에서 오나요/주영헌
뒤돌아서는 당신의 그림자는 왜 짙은 그늘로만 기울어지나요
안 그래도 휘어진 등 힘들어 보여서
힘내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힘은 어디서 오나요
벽에 못 하나 박는 일이나
시장바구니에 저녁거리를 담는 일
사무실에 홀로 남아 야근하는 일이나
과장님의 주말 카톡까지도
생각해보면, 모두
심(心) 써야 하는 일입니다
그 마음 때문에
울컥하는 또 다른 마음도 있습니다
말로는 내 마음 다 담아낼 수 없어
당신에게 짧은 문자를 보냈습니다
심(心)내요
힘내요
처음으로 선언한 이별/주영헌
당신에게 궁금한 것이 많아요
때론 더하고
때론 뺐어요
울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만이
뺄 수 있는 일이라서
예고 없이 떨어지는 눈물만으로는
아무것도 뺄 수 없었어요
또 더 할 뻔 했어요
이미 많이 더해서
내 머릿속엔 눈물만 가득해서
계절 내내 아무 때나 폭우가 쏟아지는 것인가요
눈물을 참을 수 없으면 이번에는
아무것도 안 해보려고요
처음으로 이별을 선언해 보려고요
농담/주영헌
생각해 보니 골목은 늘 불룩한 자루모양이었다.
저쯤 어디에 묶인 시절이 있었고
지금쯤 다 빠져나갔다 싶은 기억도 툭툭 털면 폴폴 날아오르는 먼지
주머니 가득 스팸 메시지만 가득하고
모든 소슬바람은
비밀번호 하나쯤 갖고 있을 것 같은 저녁
우연히 옛 골목을 걷다가
누군가에게 했던 지키지 못한 약속의 지점까지 와버렸지
담장 너머여서 더 붉은 나뭇잎은
누군가의 입술을 닮아서
어느 대문 앞이 신파적으로 생각나기도 하고
물음표 같은 새순 갸웃거리던 날의 굵은 소나기처럼
소란스러운 날들이란
앞뒤가 다 흔들리는 저 잎과 같은 것
입 밖으로 물들지 못한 말들은
꿈처럼 순서 뒤바뀐 이야기 몇 개쯤 만들어 내고 있고
기다림은 무작정 담장 뒤에 숨어
애꿎은 초인종만 괴롭혔었던 그때
그 시절엔 몰랐지, 아마
잎이 반쯤 떨어져 버린 나무처럼
첫 입맞춤의 기억조차 가물거리는 나이가 된 지금
납작한 자루의 날들과 늦가을 비와
축축하게 젖어가는 옛 담(談)을
여보,
요새 매일 늦네, 애인이라도 생겼어
와이셔츠 깃에 묻은 잎사귀를 툭툭 털어내며
던지는 농담(弄談).
기생(寄生)/주영헌
마음속에 또 다른 마음을 품을 때 신열이 솟구치죠. 나, 한 몸에 두 마음을 품었나 봐요. 당신이 가르쳐 줬던 위
도와 경도는 매번 달랐죠. 그래서 세계 전도를 펴고 당신의 위치를 찾았어요. 등을 맞대고 누운 당신은 언제나
지도의 반대쪽
허락하지 않은 마음이 내 속으로 불쑥 들어온 것만 같다. 처방전에도 없는 3세대 항생제를 세 알이나 삼켰다.
몸을 비운 북은 맑은소리로 내지요. 내 몸을 두드리면 복잡한 소리가 들릴 것 같아요. 사랑을 시작도 하지 않았
는데 헤어질 생각부터 하고 있네요. 세계 전도를 조각조각 잘라 지구의(地球儀)에 붙였어요. 지구가 커다란 회전
목마처럼 돌죠. 머리가 쪼개질것만 같아요. 이 불편한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겠네요. 뱃사람이 땅 멀미를 하는 것
처럼, 사랑받을 때 멀미를 하는 사람도 있어요.
외사랑이 익숙한 사람에겐 사랑받는 것은 빙판 위를 조심스럽게 걸어가는 시린 맨발
당신을 진심으로 오해하고 있었나 봐요. 당신은 내가 누구보다 잘
살기를 원하죠. 내가 살아야 당신도 살아요. 생각해보면 우리는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었어요.
당신은 내게 감사한 기생(寄生). 내가 수십 번의 죽음을 넘길 수 있었던 까닭도 당신의 덕이었습니다.
구보다 나를 더 사랑했던 기생(寄生)
춤추는 나무/주영헌
나는 나무
흔들리는 것이 유일한 소일거리인
직립을 하였으므로
팔을 벌려 작은 그늘 만들 수 있는 나는 나무
당신 앞에선 흔들리는 것이 전부인
나는 춤추는 나무
당신이 나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아도
잎사귀 하나 없는 나신의 몸으로도 부끄럼 없이
진심으로 흔들린다
나의 전생은 누구보다 무성했으리라
당신의 고개가 밤의 뒤척임 쪽으로 떨어질 때
나는 손을 벌려 넓은 그늘을 만들고
바람의 낮은 음률을 빌려
당신의 잠을 위하여 나지막이 흥얼거렸겠지
그때도 나는 바람의 음률에 맞춰
몸을 흔들며 춤을 추었을지도 모른다
오늘도 당신은 내 옆을 스쳐갔다
당신의 시선이 나에게 머무르지 않아도
사랑한 지 오래 되었으므로
춤을 춘다
당신을 위해 춤추고 싶은 나는
당신의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