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만들며/靑石 전성훈
재미 고등학교 동창이 서울을 방문한다는 연락에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이 부부동반 여행 계획을 잡았다. 한 친구가 애용하는 여행사에서 거제도 저도와 부산으로 가는 1박 2일 맛집 여행에 빈자리가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왔다. 수다를 즐기는 여인네들과 술잔치를 벌리는 늙은이들의 추억여행은 젊은 시절 못지않은 뜨거운 사연을 만들어가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첫날, 오전 7시 서울역을 출발한 관광버스는 잠실과 신갈에서 손님을 태우고 신나게 달린다. 버스 안에서 김밥을 먹고 친구가 가져온 양주를 한 잔씩 마시며 늙은이다운 주책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막힘 없이 달리던 관광버스가 충청북도 화서휴게소에서 잠시 쉰다. 날씨가 상당히 싸늘하다. 친구가 알려 준, 어깨가 굳은 상태를 확인하는 동작을 해 보니 어깨가 상당히 굳어있다. 양손을 모으고 두 팔을 붙인 채 쭉 펴서 위로 올리는 동작인데 어깨가 굳어서 안 된다. 늘 어깨와 팔을 푸는 운동을 해야만 호흡이 깊어지고 건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버스가 낙동강을 지나 구미시로 들어서니 고속도로 양편으로 가을걷이를 앞둔 황금 들녘에는 누렇게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며 춤춘다. 출렁이는 들판을 바라보니 마음이 흐뭇해진다. 여름 동안 땀을 쏟았을 부지런한 농부의 손길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에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거침없이 달리는 관광버스가 어느덧 미역으로 유명한 ‘기장’을 지나, 12시 40분경 꼬막 전문 음식점에 도착하니 식탁에 차려진 밥상이 화려하다. 꼬막 비빔밥을 만들어 먹으며 곁들여 참기름을 바른 육전을 씹으니 맛이 고소하다. 낮술 한 잔씩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손님이 가득하다. 맛집으로 소문난 집 같은데 생각보다 조그마한 꼬막을 까서 먹어보니 맛이 별로다. 점심을 먹고 처음 찾은 곳은 해동용궁사이다. 마치 유원지 같은 곳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절이라고 당당하게 소개하는 현수막을 보니 기가 찰 노릇이다. 십여 년 전 평일에 왔을 때는 그다지 사람이 없어서 한가로운 느낌이었는데, 이번에는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로 제대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붐비어 비좁은 시장 골목 같다. 바다가 보이는 절 입구에는 온갖 음식점에서 사람을 불러 모은다. 장삿속처럼 보이는 선정적인 문구가 걸려있는 절의 모습이 아무래도 전통적인 관음(觀音)사찰은 아닌 것 같다. 용궁사를 떠나서 태종대로 간다. 태종대는 우리 부부가 신혼여행 갔던 곳으로 그 옛날 젊디젊은 앳된 신랑 신부의 모습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컴컴한 하늘에서는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하다. 태종대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다누리열차는 배차 간격이 8분으로 승차장에는 많은 사람이 대기하고 있다. 우리 일행이 타기 위해서는 최소한 40분을 기다려야 한다. 여행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기약 없는 기다림에 짜증도 나고 그 와중에도 수다를 떨고, 공항 대합실에서 졸음에 쫓기면서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맞이하는 게 여행의 과정인 것이리라. 태종대 등대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으며 바다를 바라보니 저 멀리 대마도가 보인다. 역사에 만일이라는 가정법은 없지만, 조선왕조 지도층에게 먼 훗날을 내다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었다면 역사의 수레바퀴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태종대를 떠나서 부산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자갈치시장을 찾아간다. 자갈치시장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귀환한 동포 및 6.25 전쟁으로 피난 온 피난민들이 자갈이 쭉 뻗어있는 자갈밭을 자갈처(處)라고 부르던, 남항 일대에서 어패류를 파는 노점상을 하여 자갈치시장이라 불렀다고 한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자갈치시장 축제 한마당이 벌어져서 수많은 사람으로 북적거린다. 예약한 횟집에서 음식 나오는 순서를 보니 회가 먼저 나온다. 게다가 술과 음료를 주문하면 반드시 먼저 돈을 내야 한다. 서울보다 음식값이 비싸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렇게 비싼 편은 아니다. 단체 손님으로 바쁜 시간이 지나가고, 개별적으로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서비스하는 모습을 보니까 음식 차림 순서가 기본 반찬부터 나온다. 우리 일행이 음식점에 들어갔을 때는 준비해 놓은 음식부터 먼저 내어놓은 것 같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자갈치 크루즈 야간 투어를 하는데 비가 약간 뿌렸다고 불꽃놀이가 취소되어 상당히 아쉽다. 배 안에서 양주 한 잔씩 나누면서 이야기꽃을 피운다. 부산항 야간 경치를 보고 부두 근처 숙소에 가서 방 배정을 받고 나니 어느새 밤 10시가 훌쩍 지난 시간이다.
둘째 날, 자갈치시장 허름한 밥집 아침상은 그야말로 잔칫상이다. 푸짐한 생선구이, 젓갈, 물미역, 숙주나물 등 반찬이 입맛에 맞아서 밥 한 그릇을 더 먹는다. 원님 덕에 나팔 분다고, 배부른 김에 건어물 파는 곳에 들러 함께한 친구들 선물용으로 기장 미역과 어묵을 회비로 산다. 마지막으로 들린 곳이 거제도 저도(猪島)이다. 섬 이름이 조금 특이한데 일제 강점기 하늘에서 본 섬의 모양이 돼지를 닮아서 저도라고 불렀다고 한다. 강 건너 마을이 아니라 바다 건너 작은 섬으로, 대통령 여름 별장으로 소개되어 유명하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칙칙한 날씨, 갈매기는 한가롭게 날고, 새우깡을 던지는 사람의 모습도 보인다. 유람선 3층에 앉은뱅이 의자를 놓고 앉아서 수다를 떠는소리가 시끄러운 시장 소음공해처럼 들린다. 간간이 빗방울이 떨어지고 바람은 옷 속을 뚫고서 가슴속으로 스며든다. 저도 일주 순례길을 1시간 정도 걸려서 걸으면서 우리나라를 통치하였던 역대 대통령을 생각해 본다. 과연 존경할 만한 인물은 누구인가. 생활 수준의 향상과 경제 발전, 민주화와 국가 안전과 부강을 위하여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을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잘못된 진영 논리를 지양해야 한다. 저도행 유람선 안내를 맡으신 분이 꼭 한번 가보라고 권유한 매미섬, 태풍 ‘매미’로 초토화되었던 섬을 혼자서 재건한 사람의 불굴의 용기와 원대한 꿈이 살아있는 ‘매미섬’을 둘러보고, 짧디짧은 1박 2일의 꿈같은 여행을 마치고 언제 올지 모르는 다음을 기약하며 서울로 향한다. (2023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