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통제불능상태의 북괴군
통제불능상태에 빠져
"계획적 퇴각"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평양을 탈출한 김일성이
차음 머물렀던 곳은
묘향산맥 기슭의 험준한 산악지대인 평안남도 덕천으로 최고사령부와 함께 숨어들어 이곳에서 며칠 머물며 전쟁을
지휘하게 된다.
김일성은 먼저 UN군의
배후를 공격하여
진격을 차단할 수 있도록
"제2전선"을 형성하라고 긴급 지시하고,
후방 총사령관에
최현을 임명하게 된다.
그는 또 군사지휘관들을
북한 북부와 만주로 파견하여 예비부대와
새로운 사단을 편성하도록 명령하고
다시 10월 19일 어둠을 틈타 정유령산맥의 험준한 산악지대에
일제 때 유명한 금광지역인
평안북도 동창군 대유동으로 들어가
이곳의 한 농가에서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를
극비리에 만나게 된다.
팽덕회가 국경을 넘은 것은 김일성이 이곳에 도착하기 하루 전인
10월18일 밤이었다.
김일성.팽덕회 회담은
10월20일
09:00시~12:00까지
3시간 진행된 것으로 알려저 있고,
팽덕회는 이자리에서
중공군이 이미
10월19일 밤
중국지역 3방면에서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하여 북한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김일성:감사합니다.
정세가 매우 긴박합니다.
중고 중앙의 결정과 계획을 먼저 이야기 하십시요.
팽덕회:우리 부대는
10월19일 밤
안동.장전.하구.즙안 등지에서 진격하고 있습니다.
....중략.....
팽덕회와의 회담에서
사실상 작전권을 넘겨준
김일성은 10월25일까지
대유동에 머물으며
작전회의를 주제하다가
10월25알 밤,
평안북도 창성으로.
11월3일까지
창성과 유평을 오가다가
11월4일부터
압록강을 따라 북상을 시작하여
11월8일,
최장의 은산처요 마지막
근거지 였던 고산진 등지로 이동하면서
주로 터널 갱도나
농가에 은신하였다.
102.우리의 점령지 정책(1)
10월1일,
38도선을 넘어
양양-간성에 돌입하자
손에 손에 태극기와
술다루를 든 환영 군중들이 모여들었고
군중들의 빛나는 눈과
상기된 얼굴로 보아
아마도 공산주의의 질곡에서 해방시켜줄
구체적인 정책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원산에서는 한차례의 전투가 있었으나
그 이후는 보안대나
패잔병과 조우했을 뿐이었고
길주와 청진을 탈취할
떼에 있었어도 조직적인 저항은 없었다.
함흥을 점령했을 때는
1천여 명이 집단투항 해
왔으며
점령하는 지역에서는
치안도 양호해서
군단 참모들은 헌병을 동승한 짚차 1대로
자유로이 전선을 왕복할 수 있었다.
10월 18일,
북괴군의 대부분은
한국군에 쫓기어
북한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 내에는 지역방위대나
자경단과 같은 부류들만
산재해 있었다.
국군 입성을 환영하는
함흥시민들은 사대사상이 강한
이지방의 특색이기도 하겠지만
권위에 맹종하는 것만
숙달된 북한의 민중은
자유라거나 민주주이를
동경해서가 아니라
진입해온 권력에 복종하여 작전은 어렵지 않았다 한다.
103.우리의 점령지 정책(2)
어느 날,
내무장관 조병옥 박사가
함흥 순시를 앞두고
시민을 집합시켜 놓으라는 명령이 있어
도청에 전했더니
2~3시간 내에
3만 도민이 모였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김종갑 참모장은
사실여부를 확인코자
현장을 나가 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때는 영하 10도나 되는
혹한인데도 3만 이상으로 보이는 남녀노소의 군중이 여러가지 모양의 두건과 외투를 입고
사열 받는 군대와 같이 정렬하여 쉬어 자세로
움직이지도 않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공산주의자들은
단 4년만에 정렬하는 것이 습관화 된 만큼 민중을 훈련시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다.
우리는 북한지역 점령지 정책에 대하여 아무런 교육을 받은 것이 없고
단지
<자유>라 거나
<민주>라는 공염불을
했을 뿐이었다.
상부로 부터는 북한지역에 대한
기본적인 정책은
하나도 시달되지 않고
<같은 동포로 취급하라>
<따뜻이 포옹하라>는 등의 심득사항 뿐으로
<행정은 어떻게 하며>
<어떠한 방침으로 민주화 한다>는 시책은 없었다.
104.우리의 점령지 정책(3)
1군단 참모장
김종갑 장군은
내무부장관
조병옥 박사는
어떠한 연설을 하며,
어떠한 시정방침을
시달하는 지 침을 삼키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만,
<국군을 신뢰하시오>
라던가,
<안심하고 생업에 정진 하시오>라는 말 이외
들을 수 없었는 데....
눈이 내리는 강추위 속에서 움직이지 않고
알맹이도 없는 조 장관의
연설을 듣고 있는 민중의
인내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는 뼈저린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앞서 상세하게 언급한 바
있거니와 북괴군은 피점령지에 즉각적으로
인민정권을 설치하고
검찰제도를 포고하는 한편,
인적,물적자원을
총 동원시켜 전력화 하는
기민함을 보였고,
토지를 무상분배하는
대신 콩 한 알까지 공출시키는 체제를 삽시간에 확립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어떠한 준비도 없었고,
그러한 필요성을
생각한 사람 마저 없었다.
북괴는 군사상의 성공을 즉시 정치적 효과로 정리하는 기술을 생각한 반면,
우리는 점령에만 바쁘고
결실을 가져올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싸움에서는
걷어 들이는 것이 있어야
진정 이기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물건을 팔았어도
대금을 회수하지 못한다면 거래는
실패한 것이다.
105.우리의 점령지 정책(4)
부대 장병 중에는
지금까지의 경위에서
북한 주민들을 적국민으로 보는
감정을 빼 놓을 수 없었고
보급이 여의롭지 않으면
현지에서 징발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공산주의자의 사슬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했던
주민들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구체적인 방책을 모르는 채
징발되었을 뿐
3개월 후에는
도로아미터불이
된 것이다.
미군 중에 군정관이 있었지만 그들은 공산주의에 대하여
두려울 만큼 무지하였고
더욱 행정에 대해서는 무능했다.
이러한 연유로
자유주의 국가들의
군인에 의한 2개월에 걸친 북한지역 작전애서
그 땅에 남겨놓고 온 값은
남쪽과 미군에 대한
증오 이외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쓰라릴 뿐이다.
따라서 추후,
공산당을 상대로
싸우는 전사는
한사람 한사람이
싸우는 전사이면서
정치전 전사이어야 하고
심리전 전사이어야 할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하지 않을가?
그렇지 못하게 되면 설사 전쟁에 이겼다 하더라도
지키기 힘들고
평정했다 하더라도
진정한 통일은 어려울 것이다.
110.밀려드는 피난행렬
UN군이 북에서
철퇴할 때 북한 주민이 대거 남으로 피난했다.
진남포에서는
군함의 갑판 위에,
흥남에서는
온갖 수송선에
입추의 여지없이
승선하여 북한 주민의
1/3에 해당하는 3백만명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이들이 선조 때부터 내려온 토지와 가재,
지위 등을 모두 버린 채 목숨 걸고 낯선 남쪽으로 피난 길에 오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특히,
흥남 해상 철수 시
민간인 10만여 명이나 피난 시켰다하여 미군은
"인도주의적 발로에서 이루어 진 것" 이라 하였지만
국군이 북진하여
2개월 동안 자유가
무엇인가를 믿고
진지하게 협력한 일로
공산당으로부터 받을 보복에 대한 공포,
중공군 지배하에 들어가는 데 대한 혐오,
공산주의에 대한 절망,
풍요한 남한에 대한
동경 등의 심리로
국군과 행동을 같이 할 것을 울면서 호소함으로
재1군단장 김백일 장군이 강력하게 요청함으로써
이루어 진 것이다.
월남전에서는
약 200만명의
북쪽 주민이
남쪽으로 피난했는 데
피난 이유는
사상적인 문제는 물론
미국과 한국 공군의 공습에서 헤어나기 위한 것이라 분석했다.
특히,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할 가능성이 있다는 소문이 절정에 달했을 때
빚어진 일로 이는 현지 특파원의 비밀보고로 알려진 사실이다.
한국전쟁에서는
11월 하순,
미제8군이 청천강 기슭에서 격파되고,
미해병사단이 장진호지역에서 포위되자
트루먼 대통령은
이른바 <원폭성명>을
발표하여 세계를 떨게 했다.
목숨만큼 소중한 것은 없기 때문에 북한주민의
피난은 트루먼 대통령의 원폭성명 파문이 상당히 작용했을 지도 모른다.
111.1950년
12월말 상황
1950.12.20,UN군은
임진강 남안-화천-양양을
잇는 방어선을 확보하고
"서"로 부터 "동"으로
#개성-문산 축선에
미제1군단(미25사-터키여단-한국1사-영29여단)
#의정부 축선에
미제9군단(미24사-1기병사-한6사-영27여단)
#금화 축선에
국국제3군단
(한제2,5,8사단)
#화천-춘천 축선에
국군 제2군단
(한제3,7사단)
#동해안 축선에
국군제1군단
(한제9,수도사단)을 배치하여
중공군과 북과군 공세에 대비하고 있었다.
피.아 병력은
#UN군은 36만 5천명이나
전투병력은
국군 14만명,
미군 10만명,
기타 1만명,
총25만명에 지나지 않았고,
#공산군은
-중공군 약30개 사단 30만명,
-북괴군12개 사단과
게릴라부대 등
16만7천여 명,
총 투입 병력은 50만명에 이르렀고,
중공군은 참전 준비를 끝낸 65만 명이 만주에서 대기중이고,
또 25만명의 부대가
중국 내륙지방에서
만주로 이동 중에 있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동천 씀
♡ 인천상륙작전/9.28수복
<한국전쟁2부/실제영상>
*한양도읍지/ 조규창
*https://m.youtube.com/watch?v=izjbIk2unXA&feature=youtu.be
113.중공군의 신정공세
중공군은
서부및 중부의
UN군 정면에 대한
주공격을 하기에 앞서
북괴군으로 하여금
중동부의 국군 정면에 대한 견제공격을 선행했다.
#12월27일,
북괴군은
현리 일대에서
전선을 돌파,
국군제2군단에
후퇴를 강요하고,
북괴제2군단 예하
제2,9사단은
중동부 산악으로
아군 후방 깊숙히
침투하는 한편
#12월31일 밤,
주공을 담당한 중공군은
개성-춘천 사이의 75km에 해당하는
광정면에서
총 공격을 개시,
주공을 의정부 회랑에 두고 서울 주변에
5개군 15개 사단을 집중함으로써
#1951년1월4일 새벽,
눈물을 머금고 또다시
수도 서울을 중공군에게 내어 주고 한강 부교 폭파와 더불어
1.4후퇴를 하게 된다.
114. 한국전쟁 영웅
<몽클라르>
<지평리>는,
Ridgway장군에게는
중공군의 우세한 병력을 끌어들여,
미군의 우세한 화력과 공군력으로 분쇄하려는
새로운 전략을 실험할 곳으로 생각했던 반면,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는
이요충지를 확보하여 남한강을 도하,
서울 남쪽으로 진출할 것을 기도하였다.
팽덕회 사령관은
제30군예하 3~5개
사단 규모로 단숨에 공략하려 들었고,
이에 맞선
미2사단 23연대장
Paul.L.Freeman대령은 프랑스 대대가 증원된 4개 대대 5,600여명 규모로 4:1의 싸움이었다
51년2월13일22:00시
부터 15일17:00시까지
치열한 전투끝에 리지웨이의 작전기도가 주효하였고,
승리를 안겨준 중심에는 프랑스군 대대장
<몽클라르>가 있었다.
한국정부가
전쟁영웅으로 선정한
프랑스군 자휘관
<몽클라르>는
어떤 인물인가?
프랑스 정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장교39명 포함,
1,054명으로 편성,
대대급 부대로 결정했고,
편성 인원은 자유를
지키겠다고 참전한 100% 지원병들이었다.
제1중대가 해병대
제2중대가 수도방위부대
제3중대가 공수부대와
외인부대 지원병으로
신편된 대대규모였다.
대대장 <몽클라르>는
1. 2차 세계대전시 18번이나 총탄을 맞고도
살아난 전설적인 영웅의며
그는 중장으로 예편했다가 중령계급의
대대장으로 한국전쟁에
파병 지원한 인물이다.
그는 옛부하였던 국방차관이
"잘못 알고 지원하신 것 같습니다"라고 하자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계급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곧 태어날 자식에게
내가 최초의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습니다."
이렇게 해서
58세의 <몽클라르>
중령은 대대장으로 취임했고, 관록과 카리스마로 모래알 같은
부대를 단숨에 장악했다.
<몽클라르>는
만삭의 아내를 두고
1959년10월25일,
수송선으로 마르세이유를 출발,
11월29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이 무렵,
UN군이 청천강 북쪽과
장진호에서 중공군에 포위되어 사투를 벌이며
포위망을 돌파, 후퇴하던
때였다.
우리가 기억하고
기려야 할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링컨? 처칠? 간디?......
수많은위인들이 있지만
우리는 단연코
이런 사람을
기려야 하지 않을가?
*다음에 계속됩니다.
동천 씀
115.후방
UN군의 도움으로
압록강까지 진격하여
통일이 눈앞에 펼쳐지는가 싶더니
중공군의 개입으로
또다시 수도 서울이
공산군 수중으로 들어가고 1.4후퇴의 비운을 맞아 절망하고
있는 가운데 엎친데 겹친격으로
51년1월에 국민방위군사건,
2월에 거창사건 등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발생되고,
지리산과 소백산맥,태백산맥 일대에서는 공산 게릴라의 준동으로
국민들은 불안에
떨고 있었다.
국민방위군은 전쟁 초기
국토의 대부분이
점령 당하였을 때
병력보충의 어려움을 겪은 터라 또다시 이런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중공군 및 인민군에 대항하고자
제2국민병을 50만 명으로 편성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국민방위군이다.
이 국민 방위군의
초대 사령관을
군에 대하여 일면식도 없는 씨름꾼인
대동청년단장 김윤근을
준장 계급장을 달아
사령관으로 임명하게 된다.
이렇게 편성된 국민방위군 고위관부들이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부정 처분, 착복함으로써
1.4후퇴 무렵인
59년12월~51년2월 간
아사자,동사자가
9만~12만여 명에
이르렀던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1951년 봄,
사건이 국회(부산)에서
폭로되었고,
이승만 정권이 진상규명을 방해하는 것을 지켜보던
부통령 이시영은
제1공화국 정부에
크게 실망하여
사표를 제출하였으며
조병옥, 윤보선, 김성수 등이 이승만 정권에
등을 돌리게 된다.
이 사건에 관련된
국민방위군 핵심간부인
사령관 김윤근,
부사령관 윤익헌,
보급과장 박기환 등
5명에게 사형 언도되어
51년8월12일 총살형이 집행되었지만,
한국전쟁이란 초유의
값비싼 대가를 치르면서도 부정 부폐한
국가 지도자들을 보면서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치민다.
116.후방(2)
1951년2월6일,
또하나 거창사건이 일어난다.
6.25 전쟁 후
지리산을 근거지로
출몰하는 공비 소탕을 위하여 공비의 소굴지역이었던
경남거창군 신원면 고정리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 11사단 제9연대제3대대는
군에 협력하던
청년단과 경찰대가
공비들에 의해
전멸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보복하기 위하여
3대대장 한동석 소령은
직접 지휘하여
51년2월11일,
부락민을 신원초등교에
집합하게 한 후,
군,경,공무원과 유력인사의 가족만을 가려낸 뒤,
500여 명을 박산에서
총살시키고는 ,
공비들과 내통한 자
187명 학살 했다고
축소 보고했다.
그 후,국회조사단이
파견 되었으나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
김종원 대령은
국군 1개 소대로 하여금
공비를 가장하여 조사단에 위협 총격을
가함으로써 사건을 은폐하려 하였으나
국회 조사결과
사건의 전모가 밝혀져
내무,법무,국방 등
3부 장관이 사임하였으며
김종원,오익경,한동석,
이종배 등
사건 주모자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실형을 선고 받았으나
얼마돠지않아 모두 특사로 석방되었다.
그 후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유족 70여 명이 보복으로
당시의 면장 박영보를
끌어다 생화장하는 첨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전쟁시 민사업무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대목이다.
117.무장공비의
암약과 소탕적전 요약
1950.9.16.
낙동강선에서의
총 반격으로 전선을 돌파한 아군의 급속한
진공 속도에 퇴로를 차단당한 북괴군은
지방 적색분자와 합류,
태백산,소백산 등
산악지역으로 잠입,
공비화 하였고
이들 공비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이 남하하자 북괴로 부터 밀파된 유격대와 합류하여
1951.12월,
그 수는 2만여 명에 이르렀고 활동지역도 확대되면서 후방교란이 점점 격렬하여 안보에 심각한 위험요소가 되고 있었다.
특히,
지리산 공비는
이현상 두목이 이끄는
남부군 직속부대인
제81.92사단과
경남도당사단인 제57사단,
전북도당사단들이 주류를 이루어
그 수가 무려
7천5백여 명에 이르렀으며,
이들은
-여.순반란사건 이후의
공비
-원래의 공산당원
-북에서 파견된 부대
-문화공작대.정훈대
-낙동강전선에서 패퇴한
제2.4.6.7.9사단의 잔당
-포로중 도망자
-공산주의 공명자
-납치된 양민 등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었고
이 공비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백운산과 덕유산 등 험준한 산악지대에 거점을 두고
국군,UN군의 보급로 차단,식량 약탈,
지서 습격,
차량 기습,
통신망 절단,
살인 방화와 같은
만행을 자행하고
태백산~형제봉~속리산 일대에서 지방공비들과 야합,휴전회담을 지원하기 위하여 활동이 격화되어
전.후방 전지역까지 파급되어
민심은 극도로 동요되고 국민사기를 저하시키는 요인이되었다.
하여,
50.10.4~51.4.15까지제8.11.2사단을 투입
공비 소탕작전을 실시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여
정부는 8군사령부에 정규군에 의한 토벌을 요청하게 된다.
하여,
제1군단장 백선엽 장군을 <백야전사>사령관으로,
수도사단 송요찬 장군,
8사단 최영희 장군,
서남지구 전투사령부 김용배 장군,
경찰부대 등을 배속 받아
51.12.2~52.3.14까지
4개월간 소탕적전을
전개 하였다.
#세부적전 내용:생략
118.서울 재탈환,
다시 38선으로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아군은
오산~제천~삼척을 연하는 선에서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하고
재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차에
중공군이 지평리 전투와
원주 일대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고 물러서자
아군은 반격을 개시했다.
#서부전선의
미제1군단은
2월 10일,
인천-김포를 거쳐
예하의 국군제1사단이
3월15일, 수도 서울을
재 탈환하였고,
#중부전선의 미제9군단은
3월15일에 홍천을,
3월24일에 38선을
다시 돌파하였다.
#동부전선의
국군제1군단은
3월27일 양양으로
진출하였으며,
3월 말에 현재의 휴전선까지 회복하게 된다.
#UN군이 기세를 회복하여 다시 북진할 무렵인 4월11일,
미 정가에서는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 원수를 해임하고
-UN군 사령관에
Ridgway장군을
-8군사령관에
밴플리트 장군을 임명,
한국전의 현상 동결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19.맥아더 해임과
북진통일 단념
맥아더의 행동은
트루먼을 성나게 했다.
맥아더는
1951.3.20.
함참본부가 정전의 실마리를 찾기 위한
제안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3월24일에,
중공군은 연합군이 항복에 가까운 모욕적인
제안을 들어 공공연한
최후통첩을 해 오므로써
자존심이 상한 맥아더는 중공이 제안하는 조건으로 회담에 응할 수 없어 계획적으로 회담을 방해했다.
하여,
1951.4.6~9 사이의
일련의 회의에서
트루먼과 합참본부는
맥아더가 해임되어야 한다는 것과
비중이 큰 군사문제에
대해서는 몇번이고
정치적 통제가 완전히
재언급되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결국 38선을 약간 넘는
선에서 유리한 교섭을 시작하려는 트루먼 대통령의 외교전략과
승리만을 추구하는
맥아더의 군사전략과
갈등을 빚게 된다.
하여,
4월11일 맥아더 원수는
예의에 어긋난 방법으로
해임되었고
그는 미 상.하 양원 합동회의장에서
<나는 52년의
군생활을 마치려한다.
군가 가사의 한 귀절인
"노병은 결코
죽지 않는다">라는
감동적인 연설을 하고는
의원들의 우뢰와 같은
박수를 뒤로 한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갔다.
120.기회 잃은 북진통일
맥아더의 해임 소식을 접한 이승만 대통령은
보기에 딱할 정도로 낙담하였다고 하며
이로써 북진통일의 꿈도
맥아더의 해임과 함께
산산히 깨어져 버리고 만다.
역사에서 만약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지만
통일의 꿈을 버리지 못하는우리가 가슴치며
후회스러운 것은
왜 그때<키신저>가 말하는 그런 혜안을 가진 전략가가 없었던가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최근 발간된 키신저
전 국무장관의 저서
<세계질서>에서 그는
"UN군이 중국 국경과
241km 가량 떨어져 있는 평양~원산을 잇는
좁은 목에서 멈췄더라면
북한군의 전쟁 수행
능력의 대부분을
파괴하고
북한 인구의 90%를 통일된 한국으로 흡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1950.8.4일
모택동이 주은래에게
"북한 지원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도 미군이
평양~원산 line에 머무른다면 중국은 즉각
공격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 그는
"역사는 모택동에게
한반도가 중국 침략의 통로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여러 차례 가르쳤다"
면서
"6.25전쟁 개입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지원군이
한반도에 진격해
평양까지 밀고 올라온 왜군을 서울까지 밀어낸
전례와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126.교착된 전선의 전투양상
1951.7.10,
휴전회담과 더불어 쌍방은 다 같이 마지막
합의에 도달할 때까지는
군사작전을 계속할 태도를 밝혔으나
내면적으로는 협상을 파국으로 몰아 넣을지도 모를 대규모의 공세작전을 자제하면서
회담의 귀추를 두고
보려고 하였다.
UN군은
이미 계획된 방어선
Kansas_Wyoming선을
점령한 다음 그곳에서
다시 북으로 나아가
충분한 진지를 확보하고
주도권을 행사하여
작전의 규모를
확대하는 대신
다만 주도권을 잃지 않는 범위내에서 국부적인
탐색공격만을 되풀이 하였다.
이것은 단기간 내에
결정적 승리를 얻어 내려는 것이 아니라
전장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적을 격멸하기 위한
전면공세는 적어도 미국의 입장에서 볼때 소득에 비해 엄청난
전투력의 손실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협상의 분위기를 저해할 우려가 있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UN 군은 이른바
적극방어의 개념을 바탕으로 하여 끊임없는
소규모의 출혈을 강요하면서 적의 공격 기도를 파쇄하려고 하였다.
#전초부대 사이에
소규모 접전이 계속되는 동안 주저항선의 방어진지는 날로 강화되었고
그 결과
이전에 비해
훨씬 더 큰 손실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상대방의 방어선을
돌파하거나 또는
어느 일각을 점령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게 되어감에 따라
큰 손실이 예상 되는
대규모 지상전투 대신
적 전투력을 끊임없이
마멸시켜 공세의 위협을
미리 제거할 수 있는 보다
간접적인 수단으로서
포병의 요란사격과
공군의 방해폭격이
날로 비중이 더해
가게 되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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