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신년특강 제2강
마음을 같이하여 모이기를 힘쓰고
말씀/행2:42-47
요절/행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김인식씨의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라는 찬양곡이 있습니다. 우리 함께 불러볼까요? “진정한 예배가 숨 쉬는 교회, 주님이 주인 되시는 교회, 믿음의 기도가 쌓이는 교회, 최고의 찬양을 드리는 교회,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교회, 성도의 사랑이 넘치는 교회, 섬김과 헌신이 기쁨이 되어 열매 맺는 아름다운 교회, 주님의 마음 닮아서 이웃을 사랑하는 교회, 주님의 영광 위해서 빛 되신 주님 전하는 교회, 사랑의 불꽃이 활짝 피어나 날마다 사랑에 빠지는 교회, 주께서 사랑하는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참으로 멋진 고백입니다. 새해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방금 고백이 이루어지는 교회를 보게 됩니다. 대표적인 초기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 교회는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위의 고백과 같은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주님이 참으로 기뻐하시는 모습입니다. 이런 교회 가운데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해주시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새해를 출발하면서 우리가 그려보고 표방하는 교회의 모습은 과연 어떤 교회입니까? 이 시간 우리가 모델 삼고 싶은 교회를 말씀 통해 배우므로 이런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삶과 신앙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도행전 2장 앞부분을 보면 불의 혀 같은 오순절 성령의 충만함이 계집종 앞에서도 무서워 벌벌 떨며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에게도 임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있는 많은 사람 앞에서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실, 성전에 모인 무리는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시고 친히 말씀하심을 듣고도 반응하지 않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죽었던 양심이 깨어나고 회개하려는 뜨거운 심정이 생겨났습니다. 그들은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어찌할꼬?” 가슴을 치며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이런 그들이 그날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거듭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날에 세례받은 신도들의 수가 몇 명이었다고 말씀합니까? 삼십 명도 아닌, 삼백 명도 아닌, 삼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당시 120여 명이던 교회가 3200여 명 정도의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놀라운 구원 역사를 경험하고 있는 초기 교회 성도들의 신앙 모습이 어떠합니까? 42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첫째,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그들은 겸손하게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권위를 존중했고 그들의 말씀의 가르침을 받음으로써 자연스럽게 영적 질서를 세워갔습니다. 이제 갓 회개하고 복음을 영접한 그들은 사도들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과 복음의 본질을 배우는 일에 영적 소원 가지고 임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여 사도들의 말씀을 듣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날마다 성전에 모일 만큼 사도들이 가르쳐주는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도 은혜롭고 파워풀했습니다. 하루는 사도 베드로가 일어서서 평소 주님이 하셨던 놀라운 일들을 말하고 전했습니다. “한 번은 우리가 산에 올라갔을 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이다. 애통해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름을 얻을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다음 날에는 사도 요한이 일어나 말씀을 전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 것이다.’” 다음 날은 또 다른 사도가 말씀을 전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속해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으로 주님을 죽음 가운데서 부활시키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승천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주님은 우리의 그리스도 주가 되셨습니다.” 성전에 모인 사람들은 사도들의 말씀에 반응하며 ‘아멘, 아멘’하며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도들이 가르쳐준 말씀에 순종하고자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너무나도 달콤하고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이상하고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경험하게 되는 놀라운 은혜와 신령한 복들을 생각할 때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가슴 절절이 사모가 되었습니다.
초기 교회가 이처럼 말씀 중심이었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 시대는 성령이 불처럼 바람처럼 뜨겁게 임하는 시대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방언을 말하고 날마다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자칫 교회는 이런 놀라운 은사와 능력과 기적들이 사역의 중심이 되기 쉬웠습니다. 지금 시대도 보면 예언의 능력을 받아 앞날에 대해 말해주는 사람이 주목받습니다. 즉석에서 병을 고치는 사람은 영웅이 됩니다. 물론 성령의 은사는 잘 사용하면 신앙의 유익이 됩니다. 교회의 성장과 성숙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인생의 불확실성에 대해 불안이나 두려움을 가지기 때문에 자칫 이런 것들을 이용해 두려움을 심고 자기 유익을 추구하는 이단자들도 생겨납니다.
그런데 초기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성령이 강력하게 임하고 권능 있게 역사한 시대였지만 말씀을 중심으로 한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사도들의 말씀을 사모하여 모이고 말씀이 선포되고 말씀을 배우고 받는 교회였습니다. 성도들이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의 힘으로 살아가는 교회였습니다. 뒤에 보면 사도들이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을 힘써 섬겼기 때문에 빌립이나 스데반 집사 같은 사도 이상으로 말씀의 권능이 있는 제자들이 숱하게 나올 수 있었습니다. 또 그 제자들, 제자들의 제자들을 통해 성령의 역사, 말씀의 역사가 지속되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임재와 내주를 경험한 공동체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귀히 여기고 겸손히 사모하게 됩니다. 말씀이 꿀처럼 달고 말씀에 대한 목마름이 생깁니다. 다음 예배가 기다려지고 다음 말씀이 사모가 됩니다. 말씀으로 감동받고 말씀으로 힘을 얻어 살아갑니다.
우리는 초기 교회 성도들을 통해 성도는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배웁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임재와 내주를 경험했다고 해서 이후 삶은 내 맘대로 나의 본성을 따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어린아이가 계속해서 엄마의 젖을 먹어야 건강하게 자라듯 우리는 지속적으로 말씀을 듣고 배워야 합니다. 우리 인간을 가리켜 망각의 동물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말씀을 배우고 가르침을 받아야 우리 신앙이 건강하게 유지되고 성장하고 성숙해지게 됩니다. 배우지 않고 가르침을 받지 않고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배우지 않고는 바른 신앙인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건강한 신앙, 살아있는 신앙은 말씀을 겸손히 배움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는 매주 말씀 공부를 어떤 마음으로 감당하고 있습니까? 교회에서 정해져 있으니까 형식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습니까? 매년 반복되는 말씀을 공부하기 때문에 다 아는 것이고 진부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말씀 공부를 해 주면서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해 주는 것으로만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제가 무엇보다 말씀 공부를 준비하고 말씀 공부를 섬기는데 있어 은혜와 생명력이 넘치는 말씀 공부를 이루기 위해 기도하고 연구하고 심정을 다해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더욱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에서 힘을 얻고 은혜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말씀역사가 중심을 이룹니다. 우리 교회가 더욱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새롭게 연구하고 성경을 힘써 배우고 가르치는 건강한 교회가 되어가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서로 교제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새롭게 예수님을 영접하여 성령이 충만했던 그들은 서로 친밀한 유대감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사실, 그들이 서로 함께 교제하는 대상은 결코 편한 상대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초기 교회 구성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모인 자들이었습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흩어져 있던 수많은 나라에서 온 자들이었습니다. 성별과 지역, 빈부의 격차, 언어, 사회적 위치 등 여러 부분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사회적, 문화적으로 이질감이 많았을 것입니다. 대개 보면 사람들마다 얼마나 다릅니까? 개성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성격과 기질이 다릅니다. 그런데 서로 다른 이들이 서로 교제하기에 힘썼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의 관계보다 교회 성도들과의 관계가 더 좋았습니다. 세상에서의 교제보다 말씀과 신앙 안에서의 교제를 통해 힘을 얻고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그들은 서로 함께 모여 주님 안에서 받은 은혜를 나누고 기도 제목을 나누며 신앙과 삶을 나누는 교제에 힘썼습니다.
셋째, 함께 떡을 떼었습니다. 이는 그들의 모임의 성격과 중심이 무엇이었는가를 말해줍니다. 떡을 떼었다는 것은 그들이 모일 때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생각하며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새기는 성찬을 행하는 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일 때마다 함께 떡을 떼면서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몸이 찢기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마음에 새기며 그 은혜를 힘입고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과거의 사건이나 추억으로 여기지 않고 날마다 현재의 사건으로 경험하며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고자 했던 것입니다.
넷째, 기도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초기 교회 역사에서 기도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모이면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후,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고 있을 때 그들은 다락방에 모여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기에 힘썼습니다(행1:14).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도 성도들은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말씀 역사를 섬기고 떡을 떼고 구제하는 일로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갈 때도 기도에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와 달리 많은 새로운 일들이 생겨났지만 그들은 기도 시간을 절대적으로 확보하고 기도 시간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기도함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성령의 충만함 속에 더욱 기도에 힘썼습니다. 기도를 통해 그들은 현실의 여러 어려움을 이길 지혜와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모여서 합심하여 기도할 때 더 풍성한 은혜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모일 때마다 뜨겁게 기도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이처럼 기도하는 곳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기도할 때 사탄이 놀라 도망가버립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하는 공동체를 귀히 쓰십니다. 우리가 초기 교회처럼 기도하기에 힘쓰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같이 하는 가운데 어떤 신앙의 열매들이 나타났습니까? 44,45절을 보십시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그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말로만이 아니라 그들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 희생하며 섬겼습니다. 초기 교회의 특징은 자신의 소유를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32절은 말합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자신의 소유를 주장하기보다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누는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의 소유라기보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청지기 신앙 가운데 자신의 소유 가지고 사람들을 섬기는 데 썼습니다. 이런 신앙 자세가 있을 때 그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할 수 있었습니다. 또 그들은 한두 번 그러다 만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에 동참해 지속적으로 사랑의 수고와 희생을 감당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5-17절은 말합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존 웨슬리는 ‘당신의 지갑이 회개하기 전에는 참으로 회개한 것이 아니다’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초기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의 지갑을 털어 형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렇게 할 때 교회 안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행4:34).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초기 교회의 모습과 똑같이 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좀 더 나누고 좀 더 섬기고 좀 더 다가가고 좀 더 사랑하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나라가 다르고 상황이 다르고 법이 다르는 등의 여러 다른 환경 속에서 똑같이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 정신만큼은 배워 조금이라도 더 섬기려는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은사로 주신 물질로 형제와 이웃을 향한 섬김을 구체적으로 실천해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6절을 보십시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이 말씀은 초기 교회 성도들의 삶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는가를 잘 말해줍니다. 그들이 할 일 없어 자주 모이고 밥을 함께 먹었을까요? 우리가 친구와 만나기 싫을 때 가장 많이 하는 핑계가 있습니다. “요즘 내가 너무 바빠서 밥 먹을 시간도 없어.” 그러나 바쁜 것보다도 마음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빠서 교회에 모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바빠도 마음이 있으면 먼저 모일 수 있고 동역자들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있으면 먼저 시간을 내고 먼저 약속을 잡을 수 있고 먼저 모임을 만들 수 있습니다. 교회의 동역은 마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초기 교회는 마음을 같이 했습니다. 한 마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초기 교회를 구성하는 인물 중 대표적인 사람들이 열두 사도와 더불어 위로의 아들 바나바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 안디옥 사람 니골라 등 일곱 집사가 있었습니다(행6:5). 모두가 신앙이 훌륭하고 출중한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각기 다른 기질과 스타일의 사람들이었지만 신앙 안에서 한마음을 가졌습니다.
만약 우리 시대 교회 안에 작년에 정치적으로 유행했던 이대남과 개딸들이 만나게 된다면 그들도 마음을 같이 할 수 있을까요? 마음을 같이 하기 어려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 의견 중에서 하나의 방향을 잡아야 하는데 내 의견이 무시되는 것이 싫습니다. 내 생각이 관철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다 보면 마음을 같이 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둘만 모여도 각각의 마음이 다릅니다. 특히나 가면 갈수록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팽배합니다. 한마음을 갖는다는 것이 더 어색합니다. 각자가 가진 고유한 생각을 억누르고 한 마음으로 만들어간다는 것이 오히려 폭력처럼 느껴지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같이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신앙생활이 결코 혼자 독립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머리로 한 공동체의 지체로서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성도가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서 살아가려면 서로 연합하여 한마음 한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분쟁하고 갈라지는 것은 주님의 몸이 찢기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이, 성도들이 하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오케스트라 연주에서 웅장하고 아름다운 연주를 위해서는 각자의 악기가 소리를 잘 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다른 악기들과 조화를 잘 이루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수많은 연습을 합니다. 이처럼 교회가 하나 되기 위해서는 부단한 자기희생과 겸손이 필요합니다.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의견을 잘 듣고 이해하고 조화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자기 목소리를 낼 자유가 있지만 자기 목소리를 절제하고 성숙하게 볼륨 조절해나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가 초기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마음을 같이하여 동역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초기 교회가 마음을 같이해서 어찌했습니까?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이는 예배 중심의 공동체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은 철저히 신앙 중심이었습니다. 또 그들은 집에서 집으로 옮겨가면서 성찬도 함께 하고 기쁨과 순수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으며 식사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우리 집에서 예배하고 교제해요.” “내일은 우리 집에서 라면이라도 먹으면서 함께 하시게요.” “그러면 그 다음 날은 우리 집에서 피통.”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서로 자기 집을 오픈해서 자신들이 일상에서 먹던 것들을 나누며 같이 예배하고 성찬을 행하고 자신들의 삶을 나누었습니다. 그들의 예배와 식사 교제와 대화에는 기쁨이 넘쳤습니다. 집으로 초대하고 식사 교제를 하는데 있어 자기 과시나 자기 신앙이 우월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서로를 섬겼습니다. 그럴 때 그들은 초청받아도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 공동체는 서로 신앙과 삶을 공유하고 나누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서로를 사랑으로 보듬어주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일하신 은혜로운 역사들, 기도의 응답들을 서로 나누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들을 함께 나누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 행위입니다.
키이스 페라지의 ‘혼자서 밥 먹지 말라’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성공은 식탁에 있다고 말하며 우주 만물이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듯 인간도 홀로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자신만의 힘만으로 성공한 사람은 없다고 단정합니다. 그는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하고 또 도와야 할 사람을 만나라고 조언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 신앙이 중요하긴 하지만 신앙생활은 혼자서만 할 수 있는 것의 성질이 아닙니다. 때로는 실족하여 넘어져 있을 때 교회 공동체가, 다른 성도가 붙잡아주고 일으켜 세워줄 수 있습니다. 힘들어할 때 들어줄 수 있고 격려해줄 수 있고 도와줄 수 있는 신앙 친구가 필요합니다. 신앙의 올바른 길로 이끌어줄 수 있는 신앙 멘토가 필요합니다. 때로는 칭찬을, 때로는 격려를, 때로는 위로를, 때로는 권면을 해 줄 수 있는 신앙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저 천성, 하나님의 나라까지 함께 가야 하는 순례자들입니다. 옆 사람을 한번 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까지 함께 가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함께 할 동역자들로 보이십니까? 이처럼 소중한 동역자들이기에 성전에서 모이기에 힘쓰고 함께 교제하고 밥을 먹으면서 함께 예배하고 함께 삶과 신앙을 나누면서 서로의 신앙을 돕고 이끌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실, 모임을 자꾸 만들면 부담이 될 수도 있습니다. 되도록 모임을 줄이고 싶은 마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부담스러운 사람과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나 천성까지 함께 갈 소중한 동역자들입니다. 성경은 신앙생활을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모이기에 힘쓰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0장 25절은 말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올 한해 우리가 마음을 같이하여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고 또 서로 교제하며 신앙과 삶을 서로 나누며 서로를 섬기기에 힘쓰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코로나 펜데믹 이후 말씀 공부나 예배에서 온라인으로 하는 경우들이 많아졌던 게 사실입니다. 물론 온라인 모임의 유익도 있었습니다. 코로나의 한계 상황 속에서도 함께 예배하고 성경 공부하고 교제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칫 교회에서 모이는 것들이 귀찮고 편한 방식만을 찾고자 하는 마음들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또 무엇보다 직접적인 만남 속에서 실제적인 섬김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올해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교회에 모이기에 힘쓰고 서로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에 힘쓰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말씀 공부, 소감 모임, 기도와 교제 가운데 역동적이고 은혜와 생명력이 충만한 모임을 이루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로써 초기 교회는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도 좋은 평판을 받고 칭찬받았습니다. 초기 교회의 아름다운 신앙 모습은 세상에 좋은 영향력을 끼치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이런 교회 가운데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도 초기 교회의 신앙 모습을 흡족하게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사모하고 본받고 싶은 초기 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초기 교회처럼 하나님이 보시기에 흡족한 교회를 이루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모이기에 힘써서 예배 중심, 말씀 중심, 기도하기에 힘쓰며 서로를 돌아보아 사랑의 교제를 힘써 이루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원하옵기는 이런 우리 교회 가운데 주께서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들을 더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