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0/06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09 - 광화문광장에 세종대왕동상 우뚝 섰다 서울시 설치 마쳐…한글날인 9일 공개 대한민국의 '상징 거리'인 서울 광화문광장에 우리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임금으로 평가받는 세종대왕의 동상이 6일 설치돼 오는 9일 시민에게 공개된다. 서울시는 6일 오전 5시께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앞 광화문광장에 세종대왕 동상을 설치하는 작업을 마쳤다. 세종대왕 동상은 높이 6.2m, 폭 4.3m에 무게 20t 규모로, 김영원 홍익대 교수가 "훈민정음을 온 백성에게 널리 알리고 쓰게 하라"고 장려한 세종대왕의 온화한 모습을 형상화해 제작했다. 서울시는 한글날인 9일 제막식을 열고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을 시민에게 공개할 예정이다. 앞서 시는 5일 밤 경기 이천시 설성면 수산리 조형물 제작업체인 공간미술부터 광화문광장까지 '로우베드 트레일러'라는 무진동 특수자동차를 이용해 5시간 가량에 걸친 세종대왕 동상 수송작업을 벌였다. 트레일러는 5일 밤 11시께 경찰차를 앞세우고 작업장을 출발, 경기 광주와 하남, 서울 올림픽대로, 강변북로, 한강로를 거쳐 광화문광장까지 일반국도 약 110㎞를 평균 시속 30~40㎞로 달려 운반했다. 출발후 5시간 가량만인 6일 오전 3시50분께 광화문광장에 도착한 동상은 270t짜리 초대형 크레인 두 대에 의해 이순신 장군 동상 뒤편 약 210m 지점인 세종문화회관 앞에 미리 설치된 4.2m 높이의 기단 위에 세워졌다. 시는 세종대왕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전시공간인 `세종이야기'를 동상 밑 지하에 있는 옛 세종문화회관∼KT 사옥 간 지하차도 3천200㎡에 조성해 동상 제막일에 함께 개관한다. 김인철 기자 aupfe@yna.co.kr (서울=연합뉴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80340.html
2009 - “한글은 세계의 알파벳 자격 충분” 미 언어학자 로버트 램지 ‘한글날 기념’ 특별강연 “한글보다 뛰어난 문자는 세계에 없습니다. 세계의 알파벳입니다.” 미국의 언어학자 로버트 램지(사진·메릴랜드대) 교수가 6일 워싱턴디시 주미 한국대사관 코러스하우스에서 열린 한글날 563돌 기념 특별강연에서 한글예찬론을 폈다. ‘왜 우리는 한글날을 기념하는가’란 제목의 이날 강연에서 그는 “한글은 소리와 글이 서로 체계적인 연계성을 지닌 과학적인 문자”라면서 “한글은 어느 문자에서도 찾을 수 없는 위대한 성취이자 기념비적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램지 교수는 “한글은 한국의 높은 문화수준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지만 어느 한 나라를 뛰어넘는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세계의 선물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한글의 자음인 ‘ㄱ’, ‘ㄴ’, ‘ㄷ’ 등은 실제 발성기관의 모양을 그대로 본떠 소리와 글이 연관성을 갖고 있지만 영어 알파벳에서 ‘t’와 ‘d’는 발음상 어떤 연관이 있다고 짐작할만한 단서가 없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는 “여성까지 포함해 모든 백성이 글을 깨우쳐야 한다는 세종대왕의 보편주의적 시대정신은 지금으로 보면 당연하지만 당시 지배계급의 눈에는 시대착오적이고 위험한 것이었다”며 한글의 인본주의 정신을 강조했다. 하지만 램지 교수는 한글의 국제화는 정치적인 의미가 담겨 있어 결코 단순하게 접근할 수 없는 문제라고 지적하고, “한글은 중국어를 표기하는데 가장 효율적이어서 중국인들이 쉽게 배우고 쓸 수 있지만 중국은 민족적 자존심과 같은 정치적인 이유로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메릴랜드대에서 20여년째 한국어를 가르치며 해마다 한글날에는 특별한 기념식을 열어온 그는 “한글날은 추석보다 더 큰 기념일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램지 교수는 연세대와 서울대 대학원에서 15~16세기 경상도·함경도 말을 집중연구했으며 컬럼비아대학에서도 10년간 한국어 강좌를 했었다. 연합뉴스 /한겨레 2009-10-07 오후 09:04:54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80722.html
- 1998, 부산국제영화제 기념
부산국제영화제 ‘역대최대’ 10돌 큰잔치 73개국 307편…개막작 대만 ‘쓰리타임즈’ 폐막작엔 황병국 감독 ‘나의 결혼 원정기’ 오는 10월6일부터 14일까지 열리는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역대 최대 규모인 73개국 307편의 영화가 초청됐다. 이 가운데 61편은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전세계에 처음으로 선을 보이는 월드프리미어이며, 인터내셔널프리미어(자국 아닌 다른 나라에서 첫 상영)와 아시아프리미어도 각각 28편과 87편에 이른다. http://m.hani.co.kr/arti/culture/movie/62377.html
- Bobby Fischer & Vladimir Kramnik (Left)
2002 - 인간이 컴퓨터와의 체스 시합서 승리 세계 체스 챔피언인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크람니크(27)가 지난6일 바레인에서 컴퓨터와 "세기의 대결"을 펼쳐 승리했다고 영국 BBC방송이 7일 보도. (서울=연합뉴스) /중앙일보 2002.10.08 11:36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ctg=12&Total_ID=1243008
2000 - 유고 13년 독재 붕괴 유고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5일(현지시간) 오후부터 시작된 대규모 민중시위로 13년간 지속됐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 정권이 붕괴했다.
- 서울지하철 개통기념, 1974
1999 - 인천지하철 1호선 개통 1999년 10월 6일 인천도 서울, 부산, 대구에 이어 전국에서 네 번째로 지하철 시대로 들어섰다. 1993년 7월 5일 착공한 인천 지하철 1호선이 6년 3개월간 공사를 끝내고 이날 개통한 것이다. 이날 낮 12시 개통식을 갖고 운행을 시작한 1호선은 계양구 귤현동∼연수구 동춘동간 24.6㎞에서 인천 시민들의 새로운 발 역할을 하게 됐다. 그동안 부족했던 인천의 남-북 방향 교통편을 상당히 보강해 줄 수 있는 노선이다. 1호선에는 정거장이 모두 22곳 있으며 부평역이 유일한 환승역이다. 이곳에서 기존 경인 전철과 바꿔 타 서울이나 동인천 쪽으로 오갈 수 있다. 인천 지하철의 특징은 첨단 설비와 장애인을 위한 배려가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전동차는 모두 200량으로 기관사 없이도 자동 운행할 수 있는 첨단식이다. 소음이 적고 객실 온도가 자동으로 조절되는 기능도 갖고 있다. 또 모든 역사에는 노인과 장애인들을 위한 승강기, 에스컬레이터, 휠체어 리프트가 설치돼 있다. 객실마다 인터폰이 설치돼 있어 급한 일이 있을 때 기관사와 통화할 수 있고 장애인을 위한 안전 손잡이 외에 휠체어나 유모차가 들어갈 공간도 마련해 놓았다. /조선
1994 - 와일즈,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증명 역사 속 10월 과학사엔 어떤 일이 / 과학향기 1994년 10월 6일 : 와일즈,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증명 앤들루 와일즈(Andrew John Wiles, 1953.4.11~)가 300년 넘게 난제로 남았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했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란 17세기 프랑스의 아마추어 수학자 페르마가 만든 문제인데, 20세기까지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있었다. 와일즈는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수학 각 분야를 활용하고 통합시켜 마침내 증명했다. 과학향기 출처 : KISTI의 과학향기 /한겨레 2008-10-07 오후 06:13:04 http://www.hani.co.kr/arti/science/kistiscience/314525.html
1989 - 고르바초프, 동독 방문
1989 - 미국의 배우 베티 데이비스(Davis, Bette) 사망 데이비스 [Davis, Bette, 1908.4.5~1989.10.6] [책갈피 속의 오늘]1989년 美여배우 베티 데이비스 사망 “200∼300년 먼저 태어났다면 그녀는 아마 마녀(魔女)로 지목돼 화형을 당했을 것이다. 그녀는 일반적 방법으로 방출할 수 없는 ‘파워’로 가득한 듯한 느낌을 준다.” 70030000000134/20081006/8639650/1
- AOPU 창설 제1주년 기념, 1963.4.1
아시아-태평양 우편연합 [Asian Pacific Postal Union, APPU] 아시아 및 태평양 국가의 우편업무 관계의 확장·촉진·개선을 위해 우편업무의 협력 증진을 도모하고자 설립한 국제기구. 지역연합을 구성할 수 있도록 한 만국우편조약에 의거하여 1961년 1월 23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한국을 비롯한 8개 국이 모여 창립총회를 갖고, 1962년 4월 1일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회장국은 필리핀이며 본부는 마닐라에 있다. 회원국은 한국·필리핀·타이·일본·오스트레일리아·라오스·뉴질랜드·인도·중국·인도네시아·방글라데시·파키스탄·말레이시아·파푸아뉴기니·스리랑카·싱가포르·몰디브·네팔 등이다.
아시아-대양주 우편연합 [The Asian and Oceanic Postal Union, AOPU] "아시아-대양주 우편연합(AOPU) 창설 제1주년을 기념하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4월 1일에 아시아, 대양주의 지도 및 AOPU를 표시한 봉투를 도안으로 하여 4원권 우표를 발행한다.
1981 -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el-Sadat, Anwar) 암살 사다트 [el-Sadat, Muhammad Anwar, 1918.12.25~1981.10.6]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 1981년 10월 6일 열린 제4차 중동전 발발기념 군퍼레이드 참관도중 암살단의 저격으로 숨졌다. 암살단은 사다트의 친미정책과 이스라엘과의 평화노력에 불만을 가진 회교정통파 신도들로 현역 사병이었다. 암살 전 사다트는 이스라엘의 이라크 원자로 폭파와 베이루트에 있는 PLO 본부 폭격으로 3년전의 캠프데이비드 합의가 무위로 돌아가면서 아랍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 국내적으로도 많은 국민들이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사다트의 배신에 반감을 갖고 있었다. 또한 민주화정책에 따른 경제적 불평등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점점 불안해지는 정세속에서 사다트는 반대파 지도자 1300명을 체포했다. 이런 와중에 암살사건이 발생했다. 사다트는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졸업한 뒤, 나세르가 이끈 1925년의 이집트 혁명에 자유장교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그는 그 뒤 국무장관, 국민회의 의장, 부통령 등을 지냈고, 1970년 나세르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대통령에 취임했다. 1977년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중동 평화의 길을 연 공로로 1978년 이스라엘 수상 메나헴 베긴과 함께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사다트 사망이후 중동 전역에 한때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감돌았으나 그를 뒤이은 무바라크 신임 대통령과 미국의 신속한 대응조치로 평온이 회복됐다. /조선
1977 - 육림의 날 제정 [1977.10.6 - 최초의 육림의 날] - 박정희 대통령, 박근혜와 경기도 시흥군 지지대고개에서 그동안 심은 나무를 검목하고 비료를 줌 - 잡목은 경제림이 되지 않는다면서 20-30년 걸리더라도 수종개량을 장기적으로 추진하라고 지시 - 육림의 날은 국민식수운동을 효과적으로 넓히고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올해 처음 제정 - 나무를 심는 성의 못지않게 가꾸는 정신도 중요 - 왕릉 주변 산에 나무를 심는 모습 /영상역사관 ehistory.korea.kr/history
육림의 날 (11월 첫째 토요일) (제1회 육림의 날 - 1977.11.5) ... 또한 朴대통령은 한 걸은 더 나아가 조림의 사후관리를 영구히 지속시키기 위하여 1977년 4월 5일 植木日 현장에서 가을에 검목과 더불어 육림일을 하루 정하여 봄에 심은 나무를 가꾸는 날로 해 보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매년 11월 첫 토요일이 育林의 날로 결정되어 조림지시비 ․ 검목 ․ 병충해방제 ․ 잡목 솎아내기 ․ 가지치기 등에 많은 국민이 참여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박정희대통령 인터넷기념관 www.516.co.kr/board /Google (1977년 10월 6일 처음 육림의 날 행사를 가진 뒤에 11월 첫째 토요일로 다시 정한 모양이네요.. ^.@)
- Mao, "Sun of the Revolution"
1976 - 중국 4인방 체포 1976년 10월 12일 영국의 유력지 `데일리 텔리그라프`지가 `모택동 미망인 체포되다`라는 기사를 북경 주재 특파원의 긴급 타전으로 전 세계에 알렸다. 데일리 텔리그라프는 "모택동 미망인 강청 여사, 왕홍문 부주석, 장춘교 부총리, 요문원 공산당 정치국원 4인의 중국 급진파 지도자가 쿠데타를 계획하다가 10월 6일 체포되었다"고 1면 머릿기사로 보도했다.
- October War against Israel, 25th Anniv.
1967년의 ‘6일전쟁’이 이스라엘의 완전한 군사적 승리와 거대한 영토 획득으로 종결되었을 때 그것이 정말 종전으로 이어지리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패배한 아랍인들은 굴욕감과 복수심에 1973년의 10월 전쟁을 준비했다. 6일전쟁으로 시리아는 골란고원을 빼앗겨 그들의 심장부를 이스라엘의 날카로운 칼날 앞에 드러내놓았고, 요르단은 이슬람 성지를 유태인 지배하에 넘겨주었으며, 이집트는 수에즈운하에서 큰 위협을 받았다. 그러던 1973년 10월 6일 오후 2시경, 시나이 반도와 골란고원 양전선에서 이집트와 시리아가 일제히 이스라엘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했다. 이날은 유대교도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국경일인 ‘정결 의식의 날’이었다. 다시말해, 이스라엘의 허를 찌른 것이었다. 바로 다음날 7일, 이스라엘은 예비역을 대동원해 반격태세를 갖췄다. 이어 9일에는 다마스카스와 레바논을 폭격, 시리아전선에서의 제공권(制空權)을 장악했고, 골란고원의 전차전(戰車戰)에서도 시리아군에 압도적인 공격을 전개했다. 이에 이집트ㆍ시리아를 지지하는 아랍 8개국까지 참전했지만, 전세는 이미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에 유리하게 전개됐다. 전투가 계속되자 16일, 아랍측이 정전을 제의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를 거부하자 아랍측이 17일 서방제국에 대한 석유전략을 발표함으로써 오일쇼크의 방아쇠가 당겨졌다. 20일에는 이스라엘 지원국에 대한 석유수출금지ㆍ산유랑 20% 감소ㆍ유가 인상 조치를 발표함으로써 ‘황금의 물’ 석유가 ‘공포의 물’로 변했다. 이에 22일, 유엔안보리에서 정전결의안이 채택되었고, 정전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전투는 계속되었다. 결국, 사실상의 정전은 정전협정이 합의에 도달한 그해 11월에나 이루어졌다. 중동전쟁으로 인해 이집트와 시리아 양국은 총2천3백대의 전차를 상실했고 이스라엘은 2백대의 전차만 상실했다. 항공기는 이집트와 시리아가 475대를 상실한 반면 이스라엘은 115대를 상실했다. 병력손실도 아랍측이 1만6천명이었던 반면, 이스라엘은 2천5백명에 그쳤다. /조선
1972 - 서울 인구 600만 돌파, 세계 6위 서울특별시의 인구는 1960년 244만 5402명(인구밀도 9,112명/㎢)의 인구가 1963년 대대적인 시역확장과 함께 325만 4630명으로 늘어나 300만 명 이상의 도시가 되었고, 1970년 543만 3198명, 1976년 725만 명, 1983년 920만 명, 그리고 1988년 1028만 6503명으로 인구 1000만 명의 거대도시로 변모하였다. 1992년말에는 1096만 9862명(인구밀도 1만 8121명/㎢)으로 광복 당시 90만 1371명(인구밀도 6,627명/㎢)에 비해 1000만 명 이상 늘었고, 1960년 이후 전국인구 증가분의 44%를 서울이 차지하였다. 전국인구에 대한 비율은 1960년 약 10% 수준에서 1970년 17.6%, 1980년 22.3%, 1990년 24.4%, 그리고 1992년 25.1%로 최고를 이루었다. 면적은 전국의 0.61%에 불과하지만 인구는 전국 인구의 25%를 차지하여 4명 중 1명이 서울사람인 셈이었다. /naver
1955 - 조선왕조실록 영인본 간행 착수 [책갈피 속의 오늘]1955년 조선왕조실록 영인본 간행 착수 “내가 무서워하는 바는 하늘과 사관(史官)뿐이다” 조선시대의 한 임금이 말했다던가. 조선시대 왕들에게 있어서 사관이 매일매일 작성하는 역사기록인 사초(史草)는 부단히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채찍과도 같은 기능을 했다. 그 시절에 사관이라는 제도를 두고 절대군주 아래서 수백 년간이나 그 직책의 독립성을 지켜나간 것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아마도 역사의 기록과 후세의 평가를 두려워하는 자세가 조선왕조를 500년 동안이나 이어지게 만든 요인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조선왕조가 남긴 ‘조선왕조실록’이 1997년 훈민정음 등과 함께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실록은 조선조 태조에서 철종에 이르기까지 472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왕별로 편년체(시대순으로 기록하는 것)로 기록한 역사서로 전체 수량은 2077책에 이른다. 실록의 편찬은 대개 전왕이 죽은 후 다음 왕대에 사초와 승정원일기 등을 기초로 편찬됐다. 실록은 선왕과 당시 신하들의 행적과 이들에 대한 시시비비를 기록한 것으로 사관이 일부 내용을 확인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누구의 열람도 허용되지 않았다. 특히 군주의 열람은 사관들이 목숨을 걸고 막았다. 초기에는 실록이 편찬될 때마다 금속활자로 4부를 인쇄하여 춘추관 충주 전주 성주의 사고(史庫)에 나누어 보관했다. 임진왜란 때 다른 사고들이 모두 불타 소실되고 오직 전주사고본(本)만 남게 되자 이를 다시 4부씩 만들어 마니산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 춘추관 등에 분산 보관했다. 이처럼 실록은 병화 속에서 소실될 때마다 복사본을 만들어 전국 각지에 보관하는 방식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올 수 있었다. 실록의 가치에 대해 과학저술가 이종호 씨는 한 왕조의 기록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에 걸쳐 작성된 자료라는 점을 지적한다. 내용도 풍부해 정치 외교 군사 제도 법률 경제 산업 천문 지리 민속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는 종합 역사서라는 것이다. 실록은 국사편찬위원회가 1955년 10월 6일 영인본 간행작업에 들어가 보급함으로써 일반인의 접근이 가능해졌다. 지금은 국역에 이어 키워드 검색이 가능한 CD롬으로도 제작돼 연구자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정동우 사회복지전문기자 forum@donga.com /동아닷컴 2005-10-06 03:04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51006/8235053/1
1952 - 백마고지 전투 발발 1952년 10월 6일 6·25전쟁 중 강원도 철원 서북방 395고지(일명 백마고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백마고지는 광활한 철원평야 일대와 서울로 통하는 길목에 있는 군사지정학상 요지로, 이곳을 탈환하면 국군의 주요 보급로를 장악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중국인민지원군과 국군 간에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치열한 공방이 전개되었다. 공격을 감행한 중국인민지원군은 장융후이[江擁輝]가 지휘하는 제38군단의 6개 연대에 지원부대병력을 합해 총병력 4만 4,056명이었으며, 각종 포 55문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국군은 이에 대응해 김종오 소장이 지휘하는 병력에 미군의 지원을 받아 중국인민지원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9일 동안 12차례에 걸쳐 치러진 공방전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은 약 1만 명, 국군은 3,500명의 사상자를 냈다. 국군의 승리 요인은 우수한 정보활동, 보병과 포병 간의 적절한 협동, 전투부대의 적절한 임무교대를 통한 충분한 휴식에 있었다. /브리태니커
1950 - 나비연구가 석주명(石宙明) 사망 석주명 [石宙明, 1908.11.13(30)~1950.10.6] 석주명(石宙明)은 오로지 나비밖에 몰랐던 사람이다. 한 줄의 논문을 쓰기 위해 3만마리의 나비를 만지고, 6·25 때는 15만마리의 나비를 지키기 위해 피란도 하지 않고 남산 국립과학박물관을 지켰다.
1940 - 미국의 컴퓨터 과학자 존 워녹(Warnock, John) 출생 워녹 [Warnock, John Edward, 1940.10.6~ ] John Warnock John Edward Warnock (born October 6, 1940) is an American computer scientist best known as the co-founder with Charles Geschke of Adobe Systems Inc., the graphics and publishing software company. Dr. Warnock was President of Adobe for his first two years and Chairman and CEO for his remaining sixteen years at the company. Although retired as CEO in 2001, he still co-chairs the board with Geschke. Warnock has pioneered the development of graphics, publishing, Web and electronic document technologies that have revolutionized the field of publishing and visual communications. Biography http://en.wikipedia.org/wiki/John_Warnock
프로그래머 열전 (2)_어도비시스템즈 존 워녹.척 게시크 할리우드가 초창기 실리콘밸리를 무대로 '버디 무비(Buddy Movie)'를 만든다면 제일 먼저 캐스팅 지난 78년 두 사람의 천재 엔지니어가 처음 만난 곳은 제록스 연구소(PARC). 실리콘밸리가 '테크놀로지의 정원'이라면, PARC는 마우스, 이더넷, 그래피컬 유저 인터페이스(GUI)처럼 끝없이 혁신적인 기술을 피워내는 팔로알토의 '거대한 떡갈나무'라고 할 수 있다. 명문 카네기멀론대 박사 출신의 게쉬크는 당시 그곳에서 컴퓨터과학, 그래픽, 이미지 프로세싱, 광 분야의 연구를 두루 맡았던 수석연구원이었다. 그는 영상실험실을 새로 만들면서 컴퓨터 그래픽 분야의 전문가를 물색했고, IBM과 에반스&서더랜드 등에서 컴퓨터 엔지니어로 일하면서 그래픽 부문에 특히 두드러진 연구실적을 보였던 존 워녹이 적임자임을 발견했다. 호흡이 척척 맞는 파트너가 된 두 사람은 PARC 영상실험실에서 텍스트와 이미지를 인쇄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언어인 포스트스크립트(Postscript) 개발에 착수한다. 회사 사정으로 이 프로젝트의 상업화가 무산되면서 둘은 벤처행을 결심했고, 그래서 82년 설립된 회사가 바로 어도비 시스템즈. 어도비라는 회사명은 당시 두 사람이 살았던 로스알토스 지역을 가로지르는 계곡의 이름에서 따왔다. 워녹과 게쉬크는 창업초기에 데스크톱 출판이 가능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 출판계를 공략한다는 판매전략을 세웠다. 하지만 곧 자신들이 개발해낸 '포스트스크립트'가 엄청난 황금시장을 만들어줄 것임을 감지했다. 포스트스크립트는 컴퓨터가 만든 그래픽, 사진, 문자를 정확히 묘사해 어떤 출력장치로든 전송할 수 있게 해주는 획기적인 언어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예상대로 85년 공개된 이 프린팅기술은 컴퓨터 및 출판업계의 산업표준이 됐다. 워녹은 CEO로, 게쉬크는 공동회장으로 어도비를 이끌면서 디자니어들을 매료시킨 편집제작 프로그램 일러스트레이터, '전자암실'로 불러도 좋을 만큼 편리한 그래픽 프로그램 포토숍에 이어 아크로뱃 리더 (Acrobat Reader)와 페이지메이커 (PageMaker)에 이르기까지 두 사람은 기술개발을 진두지휘했다. 한때 협공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던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를 기술우위로 물리치고 오늘날 어도비가 온라인 출판 및 그래픽디자인용 소프트웨어의 최대업체로 자리잡은 것은 두 사람의 걸출한 엔지니어가 사령탑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외모부터가 풍채 좋은 과학자 타입으로 닮은꼴인 두 사람에게 이제는 데스크탑 출판계의 혁명가라는 영예로운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워녹은 여전히 어도비의 CEO로 아크로벳을 웹의 문서표준으로 만드는 또다른 혁명을 준비하고 있고, 올 3월 은퇴한 게쉬크는 손자들과 함께 놀아주면서 어도비가 사이버세상의 도큐먼트를 위한 글로벌 스탠더드가 되는 일을 지켜보고 있다. http://kwangshin.pe.kr/bbs/zboard.php?id=java_tip&page=4&sn1=&divpage= 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 2&PHPSESSID=7f7166b1219bb8ad72bf2fb378eb8081
1930 - 시리아의 대통령 아사드(al-Assad, Hafiz) 출생 아사드 [al-Assad, Hafiz, 1930.10.6~2000.6.10] 시리아의 군인·정치가·시리아공화국 대통령(1971∼2000). 카르다하의 빈농 집안에서 출생하여, 1955년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공군비행사로 영국·러시아에서 훈련을 받았다. 바트당(黨) 좌파이며 1966년 2월의 쿠데타 이후 1970년까지 국방장관과 공군총사령관을 지냈다. 1970년 정적(政敵) 살라하 자디드를 추방, 이듬해 3월 대통령이 되는 동시에 바트당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1970년 요르단 내전(內戰) 때에는 PLO에 육군부대를 지원한 자디드와는 대조적으로 공군의 불개입을 결정하였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에서는 동부전선의 주력을 형성하여 아랍 세계 내에서의 시리아의 발언권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전쟁의 정치적 결과는 바트당 내부에 반대세력을 대동시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출신이 인구의 15 % 미만인 소수파여서 다수 인구를 차지하는 이슬람교 수니파(派)를 장악하는 문제가 국내정치의 최대과제로 등장하였다. 1980년 9월 리비아와의 합방을 선언하였으나 이란-이라크전쟁의 발발로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1979년 이라크와 동맹을 체결했으나, 1982년 적대관계로 돌아선 후, 이란과 가까와졌으며, 그 해 하마시(市)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하기도 하였다. 2000년 6월 10일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네이버
1927 - 첫 유성영화 '재즈 싱어(Jazz Singer)' 개봉 "기다려! 기다려! 넌 아무것도 듣지 못했잖아! (Wait a minute! Wait a minute! You ain’t heard nothin’ yet!)” 1927년 10월 6일, 주인공 알 졸슨의 목소리가 뉴욕 워너 브러더스 극장에 울려퍼졌을 때 관객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 했다. “영화에서 배우의 목소리가 들리다니….” 영화사에 길이 기록될, 최초의 유성 영화 ‘재즈 싱어(Jazz Singer)’의 첫 대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관객들은 비록 두 장면에서만 배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이 사실만으로도 그들에게는 경이(驚異)였다. 사실 영화에 소리가 등장한 것은 이 영화가 처음은 아니었다. 한 해 전에 워너사가 바이터폰(vitaphone)이라는 장치를 이용, 영상에 영화음악을 합성한 ‘돈 주앙’이라는 영화를 소개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배우들의 육성까지는 담아내지 못했다. 결국 영예는 ‘재즈 싱어’로 넘어갔고, 워너사는 350만달러라는 기록적인 흥행수입을 거둬들여 파산 직전에서 기사회생, 메이저 영화사로 발돋움했다. 영상과 음악과 목소리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진정한 의미의 최초의 유성영화 자리는 이듬해 제작된 ‘뉴욕의 등불’이 차지했다. /조선
1926.10.6 - 미국에서 토키(발성)영화 성공 토키는 영화 발명 후 얼마 뒤부터 시험 제작되고 있었는데, 본격적인 토키의 등장은 라디오의 증폭기가 사용되고부터 이다. 1926년 미국의 워너 브라더즈사가 파산 직전으로 몰렸을 때 시험삼아 바이터폰(Vitaphone)을 사용한 디스크식 부분 토키 작품인 <돈 쥬앙>을 만들었고 이것의 성공으로 이듬해 거의 완벽한 토키 작품인 <재즈 싱어(1927)>를 만드는데, 이와 함께 토키 영화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1929년 이후 유럽의 여러나라 영화도 잇달아 토키영화 시대를 맞는다. http://tiny.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16a0030b037
1917 - 미국의 민권운동가 패니 루 해머(Hamer, Fannie Lou) 출생 해머 [Hamer, Fannie Lou, 1917.10.6~1977.3.14] Fannie Lou Hamer (born Fannie Lou Townsend; October 6, 1917 – March 14, 1977) was an American voting rights activist and civil rights leader. She was instrumental in organizing Mississippi Freedom Summer for the Student Nonviolent Coordinating Committee (SNCC), and later became the Vice-Chair of the Mississippi Freedom Democratic Party, attending the 1964 Democratic National Convention in Atlantic City, New Jersey, in that capacity. Her plain-spoken manner and fervent belief in the Biblical righteousness of her cause gained her a reputation as an electrifying speaker and constant activist of civil rights. Early life
1914 - 노르웨이의 민속학자, 탐험가 헤이에르달(Heyerdahl, Thor) 출생 헤이에르달 [Heyerdahl, Thor, 1914.10.6~2002.4.18] 노르웨이의 민족학자·탐험가. '콘 티키'(1947), ' 라'(1969) 등 유명한 대양항해 과학탐사를 조직했다. 이 두 탐험은 원거리의 상이한 고대 문명 간의 대양항해 접촉 가능성을 증명하기 위해 시도되었으나, 그의 이론은 보다 아카데믹한 학자들에게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7년 그와 몇몇 대원들은 원시 뗏목인 콘티키호를 타고 남아메리카의 태평양 연안에서 폴리네시아까지 항해함으로써 폴리네시아인이 남아메리카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을 증명했다. 이 항해에 얽힌 이야기는 그의 저서 〈콘 티키 Kon-Tiki〉(1950)와 동일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에 묘사되어 있다. 1969년 다양한 국적을 가진 대원들과 함께 세밀하게 제작된 고대 이집트의 갈대 보트를 타고 모로코에서 대서양을 건너 중앙 아메리카 1,000km 근처까지 항해했다. 라 탐사로 불리는 이 항해는 서반구의 고대 문화가 이집트 문명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입증하는 것으로, 그의 〈라 탐사 The Ra Expeditions〉(1971)에 기술되었으며, 다큐멘터리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1977년말 그와 대원들은 4개월간 소형 갈대뗏목을 타고 약 6,400km를 여행했다. 이 탐사는 이라크의 티그리스 강에서 페르시아 만으로 남하하여 파키스탄 남쪽 연안의 아라비아 해를 가로질러 홍해에서 끝났다. '티그리스' 탐사의 목적은 고대 수메르인들이 그들의 문화를 서남아시아와 아라비아 반도까지 전파하기 위해 헤이에르달이 쓴 방법과 비슷한 수단을 사용했을 가능성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여행은 헤이에르달의 저서 〈티그리스 탐사 The Tigris Expedition〉(1979)와 다큐멘터리 영화에 묘사되어 있다. 다른 저서로는 〈아쿠 아쿠:이스터 섬의 비밀 Aku-Aku:The Secret of Easter Island〉(1958)·〈파투 히바:자연으로의 회귀 Fatu-Hiva:Back to Nature〉(1974) 외에, 초기 탐사의 발견을 종합하고 문화전파 이론의 증거를 제시한 〈고대 인류와 대양:항해와 해상문명의 발생에 대한 연구 Early Man and the Ocean:A Search for the Beginnings of Navigation and Seaborne Civilizations〉(1979) 등이 있다. 헤이에르달은 1990년대까지 탐험을 계속했으며, 자서전인 〈아담의 발자국 In the Footsteps of Adam〉(2000)을 펴냈다. /브리태니커
1914 - 영국의 연극 연출가 조앤 리틀우드(Littlewood, Joan) 출생 리틀우드 [Littlewood, Joan Maud, 1914.10.6~2002.9.20] 영국의 영향력있는 연극 연출가. 규격화된 형식과 사회의식이 결여된 상업연극을 거부하고 당시의 사회문제를 다루는 실험적인 연극을 제작했다. 왕립극예술학교에서 공부한 뒤 야외공연을 전문으로 하는 1930년대의 '극단조합' 및 '행동극단'을 설립했다. 1945년 맨체스터에 노동자 계층 관객을 위한 연극연구회를 세웠으며, 1953년에는 런던의 동쪽 끝 스트랫퍼드에 있는 왕립 극장으로 옮겨 처음에는 주로 셰익스피어 작품과 다른 고전 작품, 그리고 민요 가수이자 정치극 작가인 남편 이완 맥콜이 쓰거나 각색한 시사적인 작품을 상연했다. 이 연구회는 점차 명확한 양식을 발전시켰고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영향을 받아 관객 참여를 유도했고 무대 위에서의 즉흥연기를 허용했으며 원문을 고치고 원래 뮤직홀에서 개발된 기법을 사용했다. 후기에는 배우들이 공연 계획에 함께 참여하는 공동연출을 했다. 1955년 야로슬라프 하셰크가 쓰고 맥콜이 각색한 〈훌륭한 군인 슈베이크 The Good Soldier Schweik〉가 성공한 뒤 리틀우드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아! 얼마나 아름다운 전쟁인가 Oh! What a Lovely War〉(1963)는 원래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주의를 환기하고 전쟁에 대한 비판을 유도하기 위한 작품으로,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하여 당대의 유행가요나 신문의 특종기사 제목, 그밖의 장치를 사용하고 있는 리틀우드의 가장 유명한 연출작이 되었다. 활기, 떠들썩함, 폭넓은 익살로 가득 차 있으면서 동시에 성격묘사가 섬세한, 뛰어난 연출작으로는 브렌던 비언의 〈이상한 친구 The Quare Fellow〉(1956)·〈인질 The Hostage〉(1958), 셸라프 델러니의 〈꿀맛 A Taste of Honey〉(1958) 등이 있다. 1964년 연극연구회가 해체된 뒤 그녀는 연극과 별 관계없는 사업에 관심을 기울였으나 1970년대초 그녀의 지도 아래 연극연구회가 재결성되었다. 또한 그녀는 스트랫퍼드 왕립극장 주변에 뮤직홀과 관련된, 어린이를 위한 '환상의 마을'(Bubble Cities)을 만드는 데도 적극 참여했다. 그뒤 그녀는 프랑스에서 일하기 위해 영국을 떠났다. /브리태니커
1903 - 미국의 법률가, 정치인 맥마흔(McMahon, Brien) 출생 맥마흔 [McMahon, Brien, 1903.10.6~1952.7.28] Brien McMahon(1903~1952) was an American lawyer and politician who served in the United States Senate (as a Democrat from Connecticut) from 1945 to 1952. McMahon was a major figure in the establishment of the Atomic Energy Commission, through his authorship of the Atomic Energy Act of 1946(the McMahon Act). McMahon served as chairman of the Special Committee on Atomic Energy, and the first chairman of the Joint Committee on Atomic Energy. McMahon was a key figure in the early years of atomic weapons development and an advocate for the civilian (rather than military) control of nuclear development in the USA. Also, in 1952, McMahon proposed proposed an "army" of young Americans to act as "missionaries of democracy", which sowed the seeds for what would later become the Peace Corps. /wikipedia
맥마흔법 [McMahon Act] 1946년 8월 1일에 성립한 미국의 원자력 국내관리에 관한 최초의 법. 공식적으로는 ‘1946년 원자력법(The Atomic Energy Act of 1946)’이다. 상원의원이자 원자력특별위원회 위원장인 B.맥마흔이 이 법안을 제출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미국의 원자력사업은 육군의 손에서 떠나 미국원자력위원회(U.S. Atomic Energy Commission:AEC)라는 문관관리(文官管理)로 옮겨져 전시체제에서 평화체제로 전환되었다. 이 법에는 원자력 평화이용에 관한 규정도 두었는데, 당시의 원자력사업은 거의 원자폭탄의 제조였다. 그리하여 AEC는 원자력에 관한 연구·개발·생산·허가 등의 여러 분야를 비롯하여 모든 원자력물질·원자력시설 등을 관리하였다. 또 이 법에서는 군사연락위원회를 두어 AEC와 군과의 긴밀한 연락을 꾀하는 한편, 국내에서나 과학정보교환에서도 엄격한 금지조항을 두었다. 그러나 맥마흔법은 원자력사업을 문관관리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하였으나 무관관리파(武官管理派)와 타협한 결과의 산물이기도 하였다. 그 후 ‘1954년 원자력법’이 맥마흔법과 대치되었다. /네이버
1892 -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시인 테니슨(Tennyson, Alfred) 사망 테니슨 [Tennyson, Alfred, 1809.8.6~1892.10.6] 영국 시인. 중부 잉글랜드, 랭카셔의 서머스비 출생.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엄격한 아버지의 교육을 받았다. 1828년 케임브리지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여, 시 《팀북투 Timbuctoo》(1829)로 총장상 메달을 받았다. 이미 형 찰스와 《두 형제 시집 Poems by Two Brothers》(1827)을 익명으로 내놓았는데, 실은 장형 프레드릭까지 포함한 3형제 시집이다. 이어 《서정시집 Poems, Chiefly Lyrical》(1830)을 발표, L.헌트에게 인정을 받았고, 1831년 아버지가 죽자 대학을 중퇴하였다. 1832년의 《시집》에는 고전을 제재로 한 《연(蓮)을 먹는 사람들 The Lotos-Eaters》《미녀들의 꿈 The Dreams of Fair Women》, 중세(中世)에서 제재를 얻은 《샬럿의 아가씨 The Lady of Shalott》, 그의 예술관을 보여 주는《예술의 궁전 The Palace of Art》등의 가작(佳作)이 들어 있다. 이 해 친구 아서 핼럼과 함께 유럽을 여행하였고, 이듬해 핼럼이 죽자 애도의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1842년의 2권본 《시집》에는 《아서왕의 죽음》《율리시스 Ulysses》《록슬리 홀 Locksley Hall》《두 목소리 Two Voices》《고다이바 Godiva》등의 명작 외에 《정원사의 딸》《도라》등의 전원시(田園詩)가 실렸다. 이것은 T.칼라일, 에머슨, E.포 등에게도 애독되었으며, 다시 1847년의 《왕녀(王女) The Princess》로 명성을 떨쳤다. 1850년에는 걸작 《인 메모리엄 In Memoriam》이 출판되었으며, W.워즈워스의 후임으로 계관시인(桂冠詩人)이 되었다. 이 해에 그는 약혼녀 에밀리 셀우드와 결혼하였다. 《인 메모리엄》은 17년간을 생각하고 그리던, 죽은 친구 핼럼에게 바치는 애가(哀歌)로, 어두운 슬픔에서 신(神)에 의한 환희의 빛에 이르는, 시인의 ‘넋의 길’을 더듬은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시이기도 하다. 그 후에도 《모드 Maud》(1855), 대작 《국왕목가(國王牧歌) Idylls of the King》(1859∼1885), 담시(譚詩) 《이녹 아든 Enoch Arden》(1864) 등을 써서 애송되었으며, 여왕으로부터 영작(榮爵)을 받고, 빅토리아 시대의 국보적 존재가 되었다. /naver
1889 - 폴란드의 작가, 문학평론가 돔브로프스카(Dąbrowska, Maria) 출생 돔브로프스카(동브로프스카) [Dąbrowska, Maria, 1889.10.6~1965.5.19] 대중적으로나 문학적으로 폴란드 산문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근대 폴란드의 장편 연대기 소설 〈밤과 낮 Noce i dnie〉(4권, 1932~34)으로 유명하다. 폴란드와 벨기에에서 교육을 받았고 스위스의 로잔 대학을 다닌 뒤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프랑스와 영국에서 살았다. 1909년 폴란드 신문들에 정치·경제 개혁 및 협동조합운동에 관한 기사를 쓰기 시작하여 평생 동안 이 주제들을 계속 다루었다. 1914년 첫 단편 〈야네크 Janek〉를 발표했으며 1920년대에 3권의 단편집을 펴냈다. 그 가운데 〈저 땅에서 온 사람들:이야기들 Ludzie stamt d:Cykl opowie ci〉(1926)은 그녀가 평생 동안 지녔던 농민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작품이다. ... /브리태니커
- 'The English Girl from the Star' - 'Yvette Guilbert Singing'
- 'Moulin Rouge', by Toulouse-Lautrec - 'Moulin Rouge', by Toulouse-Lautrec
1889 - 물랭 루주 개장 1889년 10월 6일 프랑스 파리에서 뮤직 홀과 댄스 홀인 물랭 루주(Moulin Rouge)가 개장되었다. 물랭 루주는 '붉은 풍차'라는 뜻으로 1889년 10월 6일 파리 세계박람회가 열렸을 때 댄스 홀로 문을 열었으며, 매혹적인 프렌치 캉캉 춤으로 인기를 끌었다. 1914년 화재로 전부 타버린 것을 1918년 뮤직 홀로 개축했으며 댄스 홀은 별도로 그 옆에 세워졌다. 뮤직 홀은 한때 인기 가수가 중심이 된 황금시대를 맞았는데, 토키 영화의 발달에 따라 현재는 영화관으로 탈바꿈했다. 물랭 루주가 명성을 날리던 당시의 분위기는 툴루즈 로트레크의 작품 <물랭 루주에서 At Moulin Rouge>에 잘 나타나 있다. 파리의 대표적인 환락가에서 캉캉 춤을 추는 무희들의 화려한 의상과 번쩍 들어올린 다리 등 환락적인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현재 물랭 루주로 불리고 있는 것은 댄스 홀 '발 뒤 물랭 루주'이며, 인기 연예인의 쇼가 공연된다. /브리태니커
1889 - 중국공산당 공동 설립자, 사상가 리다자오[李大釗, 이대쇠] 출생 리다자오 [李大釗, 이대쇠, 1889.10.6~1927.4.28] [오늘<1230>(10월6일)] 李大釗 마오쩌둥은 리다자오로부터 마르크스주의를 배웠을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를 중국 현실에 맞게 실천해야 한다는 사실도 배웠다. 다시 말해, 중국혁명은 마르크스주의의 기존 공식과 달리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이 주도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마오쩌둥에게 건넨 사람이 리다자오였다. 리다자오가 요절하지 않고 반제반봉건 혁명전쟁 뒤까지 살아 남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목격했다면,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됐을지 궁금하다. 두 사람 다 지식인의 면모와 실천적 혁명가ㆍ전략가의 면모를 아울러 갖추고 있었으니 하는 말이다. 마오쩌둥이 주로 독학을 통해 지식인이 된 반면, 리다자오는 제도교육의 경로를 따라 지식인이 되었다. 톈진(天津)의 베이양(北洋)법정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서 수학한 리다자오는 귀국해 베이징의 진보적 신문 신종보(晨鐘報)의 편집자로 일하다 베이징대학에 취직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20대 초인 1911년 신해혁명 때부터 혁명운동에 뛰어들어 쑨원(孫文)의 중국동맹회, 중국공산당, (국공합작 시기의) 국민당 등을 둥지로 새로운 중국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한 전사(戰士)이기도 했다. 그의 죽음의 비극성도 어찌 보면 전사에게 어울리는 것이었다. 논설위원 aromachi@hk.co.kr /한국일보 2004/10/05 15:08 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 life/200410/h2004100515062225340.htm&ver=v002
리다자오[LI DA ZHAO, 李大釗]는 그간 '이대교', '이대조'의 두가지로 흔히 읽혀왔는데 최근에 나온 몇몇 역사교양서에서 '이대쇠'로 읽는 경향이 있는 걸 보았습니다. '교'나 '조'로 읽는 게 어떤 문제가 있어서 '쇠'로 읽는 추세가 생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차피 성姓이 아닌 이름名의 경우에는 복수의 음의를 지녔을 경우 역자가 소신대로 결정할 수 있는거고 사실 그런 경우가 속속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점 때문에 중국어 원음표기쪽으로 점차 가고 있는 것 같구요. 지나가다가 오해가 있는 것 같아 그냥 글 남깁니다. 헤이바오 l 2004-11-26
1888 - 프랑스의 조종사, 세계최초 에이스 롤랑 가로(Garros, Roland) 출생 가로 [Garros, Roland, 1888.10.6~1918.10.5] (참고) [역사 속의 인물] 프랑스 공군 최초의 영웅, 롤랑 가로 프랑스 오픈 테니스 대회는 붉은 흙으로 된 롤랑 가로 코트에서 열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코트의 이름은 프랑스 공군의 에이스이자 세계 최초의 에이스인 롤랑 가로에게서 따온 것이다. 강렬한 인상을 주는 붉은 흙처럼 짧고 굵은 롤랑 가로의 삶도 불 속에서 산화했다. 에이스는 5대의 적기를 격추한 조종사를 일컫지만, 그는 적기 4대만 격추했다. 엄밀히 따지면 잘못 붙은 호칭이지만 그는 에이스로 통했다. 1888년에 태어난 롤랑 가로는 1913년에 지중해 횡단 비행에 성공, 유명해졌다. 다음해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당시 전투기의 문제점을 고치는데 애썼다. 조종석과 프로펠러 사이에 설치된 기관총이 발사될 때 프로펠러를 멈추게 하는 동기 장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자 프로펠러를 보호하려고 그 뒤에 철판을 설치하는 데 도움을 줬다. 1915년 4월, 독일군 전투기 3대를 잇달아 격추한 그는 며칠 뒤인 그 해 오늘, 전투기가 고장을 일으켜 독일군 진영에 불시착했다. 그는 자신의 전투기를 폭파시키려 했으나 실패했고 독일군은 그의 전투기를 연구, 개선된 동기 장치를 만들어냈다. 포로가 된 그는 몇 차례 시도 끝에 2년 10개월 만인 1918년 2월에 탈출, 다시 조종간을 잡았다. 그 해 10월 적기 1대를 격추한 지 며칠 뒤 30세 생일을 하루 앞두고 격추당해 숨졌다. 김지석 논설위원 /매일신문 2013년 04월 18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19340&yy=2013
- 'Chapel of Notre Dame du Haut, Ronchamp'
- Switzerland 10 (Banknote)
코르뷔지에 [Le Corbusier, 1887.10.6~1965.8.27]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건축가. 스위스의 라쇼드퐁 출생. 본명 Charles- Edouard Jeanneret. 스위스의 미술학교에서 공부하고 펠레와 베렌스의 건축사무소에서 얼마 동안 일하였으나 20대 전반은 주로 유럽과 중근동 각지를 여행하면서 그곳의 도시건축을 연구하였다.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된 것은 1920년대 이후로, 잡지 《에스프리 누보:L’Esprit Nouveau》와 많은 저서, 도시계획과 실제 작품을 통해서 마침내 국제적인 합리주의 건축사상의 기수가 되었다. ‘집은 살기 위한 기계’라고 하는 그의 유명한 아포리즘으로 상징되는 신선한 기계미학이 이 시기의 모든 제작에 일관되어 있고, 이와 같은 건축사상은 《건축을 향하여》 《도시계획:Urbanisme》 등, 이 시기의 저서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같은 사상이 구체적인 도시의 스케일로 나타난 것이 《현대도시》(1922)와 《플랑 부아쟁》(1995) 등이다. 실제 작업은 주택 중심으로, 페사크 주택단지(1926), 슈투트가르트 주택박람회의 집(1927), 가르셰의 주택(1927), 그리고 필로티 위에 떠 있는 명확한 원초적 형태라고 하는 푸아시의 사보이관(1930) 등을 완성하였다. 1927년 제네바 국제연맹 회관의 현상설계에서 그의 응모작이 최후 단계에서 심사원단에게 거부된 것을 계기로, 근대건축가의 국제적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고 이듬해 근대건축국제회의(Congr s Internationaux d’Architecture Moderne:CIAM)를 주재하였다. 1930년대에는 파리 구세군회관, 파리의 스위스학생회관(1932), 파리교외 주말의 집(1935), 그리고 광대한 브리즈솔레유(차일)가 있는 브라질의 문교보건부(1935) 외에는 경제불황과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실제 작품은 적으며, 그래서 근대건축국제회의의 이념에 바탕을 둔 도시계획의 제안에 몰두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국제연합의 회의 사무시설을 위한 일(1946∼1947)을 맡았으나 중도에서 물러나고, 이어 마르세유의 《유니테》라는 거대한 아파트(1952)를 설계하였다. 모뒤롤에 의한 이 건축은 그의 오랫동안의 도시주거 연구의 집대성이었다. 이어 자유분방한 롱샹의 교회당(1955), 리옹 근교의 라툴레트수도원(1957), 아마다바트의 미술관, 그리고 만년에 가장 정성을 기울인 인도 찬디가르의 신도시 건설이 있으며, 그곳에 최고재판소 등의 청사건축을 남겼다. 1920년대에 시작되는 근대합리주의 건축의 국제적 양식 속에 서양건축의 기조인 고전주의 미학을 조화시켜, 철근콘크리트 건축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한 점에서 그의 위대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인 제자로 김중업(金重業)이 있다. /naver
1887 - 멕시코의 소설가 구스만(Guzmán, Martín Luis) 출생 구스만 [Guzmán, Martín Luis, 1887.10.6~1976.12.22] 멕시코 혁명 시대의 뛰어난 소설가. 멕시코시에 있는 국립자유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한 뒤 멕시코혁명에 합류하여 판초 비야의 혁명군에서 대령으로 복무했다. 1914~34년 마드리드와 뉴욕에서 망명생활을 했는데, 뉴욕에서는 〈그라피코 El gráfico〉지의 편집인으로 일했다. 혁명의 경험을 회고록 〈독수리와 뱀 El águila y la serpiente〉(1928)으로 이름을 남겼는데, 이 회고록은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혁명을 이룩한 인물들을 그려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소설 〈지도자의 그늘 La sombra del caudillo〉(1929)로도 유명한데, 이 소설에서는 1920년대 멕시코의 정치적 부패상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이밖에 주요작품으로 〈판초 비야 회고록 Memorias de Pancho Villa〉(1940)·〈청년 미나, 나바라의 영웅 Mina el mozo, héroe de Navarra〉(1932)·〈역사적인 죽음 Muertes históricas〉(1958)·〈내 망명이야기 Crónicas de mi destierro〉(1963)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
1882 - 폴란드의 작곡가 카롤 시마노프스키(Szymanowski, Karol) 출생 시마노프스키 [Szymanowski, Karol Maciej, 1882.10.6~1937.3.29] 폴란드의 작곡가. 우크라이나 출생. 어려서부터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하고, 19세 때 바르샤바에서 Z.노스코프스키에게 사사하였다. 1906∼1908년 독일에 유학한 후 유럽 각지에서 활약하고, 1926년 바르샤바음악원장에 취임하였으나 1936년 폐결핵으로 쓰러져 스위스의 로잔에서 요양하다가 죽었다. 그의 음악은 쇼팽, R.슈트라우스, A.N.스크랴빈 등의 영향을 받은 피아노작품에서 시작되었으며, 프랑스의 인상주의 수법을 도입하고 만년에는 폴란드의 민족성에 뿌리박은 새롭고 독자적인 작풍을 확립하였다. 주요작품으로 오페라 《하기트 Hagith》(1913) 《로제왕 Le Roi Roger》(1924), 발레곡 《하르나시 Harnasie》(1926), 오라토리오 《스타바트 마테르 Stabat Mater》 등이 있다. /네이버
1869 - 스웨덴의 서정시인 베리만(Bergman, Bo Hjalmar) 출생 베리만 [Bergman, Bo Hjalmar, 1869.10.6~1967.11.17] 스웨덴의 서정시인. 초기의 염세적이고 운명론적 인생관은 당대 정치적·사회적 위기의 압력을 받아 공격적인 인도주의로 바뀌었다. 간결하고 명확한 문체는 20세기 스웨덴 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스웨덴 우체국 직원으로 있을 당시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1933년에 퇴직했다. 첫 시집 〈꼭두각시 Marionetterna〉(1903)에서는 우울한 수동성을 표현하고 있으나 이후의 시들, 특히 마지막 3권의 시집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Trots allt〉(1931)·〈옛 신들 Gamla gudar〉(1939)·〈왕국 Riket〉(1944)에서는 유럽의 정치 발전에 대한 공격이 점차 강해진다. 그밖에 산문 작품으로 5권의 단편소설, 5편의 장편소설, 5권의 모노그래프 등과, 자전적 단편(斷片)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
1866 - 캐나다 태생의 미국 무선공학자 페선던(Fessenden, Reginald Aubrey) 출생 페선던 [Fessenden, Reginald Aubrey, 1866.10.6~1932.7.22] 캐나다 태생 미국의 라디오 개척자, 무선공학자. 사상 최초로 음악·음성 방송을 원거리 송신했다. 온타리오 주 포트호프의 트리니티 학교와 퀘벡 주 레녹스빌의 비숍대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페선던은 휘트니 학교의 교장직을 맡아 버뮤다로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과학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어 결국 교장직을 사임하고 뉴욕 시로 이주했다. 토머스 에디슨 기계제작소에서 기계성능시험 연구원으로 일하던 그는 토머스 에디슨을 만나게 되었고, 1887년 뉴저지 주 오렌지에 있는 에디슨 연구소의 수석 화학연구원이 되었다. 1890년 매사추세츠 주 피츠필드의 웨스팅하우스 공장의 수석 전기기술자로 일했다. 1892년 인디애나 주 웨스트라피엣 소재 퍼듀대학교의 전기공학교수가 되어 이후 교수로 학문연구직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후 펜실베이니아의 웨스턴대학교(지금의 피츠버그대학교)의 교수로도 재직했는데 그곳에서 무선통신 분야에 대해 연구했다. 1900년 페선던은 다시 대학을 떠나 당시 무선전신을 일기예보에 응용하려 했던 미국 기상국에서 무선전신에 관련된 여러 가지 실험을 수행했다. 그는 곧 음성송신에 관심을 갖게 되어 음파의 진동에 따라 파동하는 전파를 지속적인 무선주파로 바꾸는 방법을 개발하여 전파의 주파를 음파의 진동으로 변화시킬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진폭변조, 즉 AM의 기본원리가 되었다. 또 페선던은 무선전신에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민감한 전기분해 무선검파기도 발명했다. 1902년 페선던은 2명의 투자가와 동업하여 내셔널전기신호기회사를 설립해 그의 발명품을 생산했다. 또한 제너럴일렉트릭사의 에른스트 알렉산더슨을 지도하여 5만Hz의 교류발전기를 건설함으로써 무선전신을 현실화시켰고, 그 자신은 곧 매사추세츠 브랜트록에 송신국을 건설했다. 1906년 12월 24일 멀리 버지니아 주 노퍽에 있는 곳에서도 무선기사들은 자신들의 수신기를 통해 브랜트록에서 송신한 연설과 음악을 똑똑히 청취할 수 있었다. 페선던은 같은 해에 브랜트록과 스코틀랜드 사이에 대서양 횡단 송수신 무선전신국을 세웠다. 그밖에도 1902년 고주파 무선전파를 저주파로 변화시키는 원리로 조정이 더욱 쉽고 주파수의 변조도 쉬운 주파수 변환식을 실험·증명하여 라디오 개발에 크게 기여했다. 이 원리는 무선전파의 주파수를 쉽게 맞출 수 있게 하고 상업방송의 발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초주파수 변환식의 전신이 되었다. 그는 또한 무선방향 측정기, 음향측심기, 잠수함 송신장치, 전함용 터빈 전기장치를 발명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브리태니커
1831 - 독일의 수학자 데데킨트(Dedekind, Richard) 출생 데데킨트 [Dedekind, (Julius Wilhelm) Richard, 1831.10.6~1916.2.12] 독일의 수학자. 브라운슈바이크 출생. 법학교수의 아들로 태어나 카롤린대학에서 수학하고 괴팅겐대학에 진학하여 M.A.슈테른, K.F.가우스, W.베버 등의 강의를 들었다. 또한 가우스의 후임이었던 디리클레의 영향도 받았다. 1854년 괴팅겐대학의 강사가 되었으며, 1858년 취리히공과대학 교수를 거쳐 브라운슈바이크 고등기술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수학 활동은 넓은 의미의 ‘수(數)’ 전반에 걸친 거의 모든 영역에 미쳤으며, 추상성과 일반성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군(群)을 공리계(公理系)로 정의했던 초기의 연구에서도 이 경향은 명백했지만, 가장 유명한 역작인 《연속과 무리수》(1872)에서 풍족한 결실을 보였다. 여기에서 무한집합을 고찰하였고 절단개념(切斷槪念)의 도입으로 연속성을 규정하였으며, 무리수의 개념을 명확히 함으로써 해석학의 기초 수립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 밖에 이데알이라 불리는 집합의 소분해(素分解)의 연구로 대수적 수에 관한 이론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naver
- Sweden, 50 Kronor (Banknote)
1820 - 스웨덴의 소프라노 가수 린드(Lind, Jenny) 출생 린드 [Lind, Jenny(Johanna Maria), 1820.10.6~1887.11.2] '스웨덴의 나이팅게일' 제니 린드는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선생님인 어머니의 딸로 '조아나 마리아 린드'(Johanna Maria Lind)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 린드는 겨우 열 일곱 살에 스톡홀름에서 처음 오페라를 불렀습니다. 린드는 아름다운 목소리와 자연스런 가창 스타일로 미국과 유럽에서 널리 알려졌습니다. "오늘 저녁 공연의 중요한 사건은… 제니 린드의 등장과 그녀의 완벽한 승리였다. 스웨덴 - 제니 린드 /Global KOMSCO 출처:http://www.numerousmoney.com/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globalkomsco&logNo=120094458126
1769 - 영국의 군인, 캐나다의 행정관 브록(Brock,Isaac) 출생 브록 [Brock,Isaac, 1769.10.6~1812.10.13] 영국의 군인이며 캐나다의 행정관. 1812년 미·영전쟁에서 '어퍼캐나다의 영웅'으로 널리 알려졌다. 1785년 기수(旗手)로 영국군에 입대해 1797년 제49연대 중령이 되었으며 1802년 캐나다로 파견되었다. 캐나다에서 1805년 대령으로 진급했고 1811년에 소장이 되었다. 1810년 어퍼캐나다(지금의 온타리오 주) 주둔군 전체를 지휘했으며 이후 식민지 임시 부총독으로서 민정을 맡아보았다. 1812년 미·영전쟁이 일어나자 전격적으로 어퍼캐나다 방어에 나서 민병대를 조직했다. 1812년 8월 15일 영국과 인디언 연합군을 이끌고 미군을 물리쳐 디트로이트를 점령하고, 그 공로로 바스 훈장을 받았다. 10월 13일 그의 군대는 나이애가라 변경지대의 퀸스턴 고지 전투에서 다시 미국에 승리했으나 그는 이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죽었다. /브리태니커
1742 - 노르웨이 태생의 덴마크 작가, 해학가 베셀(Wessel, Johan Herman) 출생 베셀 [Wessel, Johan Herman, 1742.10.6~1785.12.29] 노르웨이 태생의 덴마크 작가, 해학가. 경구, 가벼운 운문, 신고전주의 비극의 풍자로 유명하다. 1761년 코펜하겐대학에 들어간 때부터 43세로 죽을 때까지 베셀은 항상 빚에 쪼들리는 영원한 학생 같은 보헤미안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코펜하겐대학의 노르웨이 학생들을 위한 영향력 있는 문학 및 친목 단체인 '노르웨이 협회'의 설립자(1772) 중 한 사람이자 뛰어난 재주꾼이었다. 독일로부터 전파된 낭만주의 문학의 초기 징후들에 반대해 노르웨이 학생들은 합리주의를 선택했고 '그리스인을 여러분의 모델로'라는 모토를 채택했다. 1775년부터 협회가 출판하기 시작한 문집에 즉흥시·운문·경구시 등을 기고했으며,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양 극단을 풍자적 해학의 목표로 삼았다. 그의 유일한 장편 작품은 결혼식날 견습공의 양말을 도둑질하는 이야기를 다룬 5막의 '비극' 〈양말 없는 사랑 Kioerlighed uden strømper〉(1772)이다. 이 작품은 알렉산더격으로 씌어졌고 고전적인 3일치 법칙을 글자 그대로 지킨 결과 모든 인물들이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죽는다. 그밖의 작품들로는 노래와 희극시가 있다. /브리태니커
1552 - 중국에 그리스도교를 전한 마테오 리치(Ricci, Matteo) 출생 리치 [Ricci, Matteo, 1552.10.6~1610.5.11] 이탈리아의 예수회 선교사로, 중국에 최초로 선교. 중국명은 이마두(利瑪竇). 1571년 예수회에 가입, 클레시오 로마노에서 콜라비우스에게 수학 ·천문학 등을 배우고 인도를 경유하여 1582년 마카오에 도착, 중국 내지(內地)로의 입국을 결심하고 중국어를 공부한 후, 1583년 조경(肇慶:廣東省에 있었음)에서 정주 허락을 받고 전교(傳敎)를 개시하였다. 이어 소주부(韶州府) ·남창부(南昌府) ·난징[南京]을 거쳐 1601년 베이징[北京]으로 진출하였다. 그가 명(明)나라의 만력(萬曆) 신종(神宗)에게 바친 자명종(自鳴鐘:탁상시계) ·대서양금(大西洋琴:피아노의 전신)은 황제를 크게 기쁘게 하여 베이징에서의 정주를 허락받았다. 선무문(宣武門) 내에 주택을 구입하고, 이곳을 전교의 근거지로 삼았다. 그는 중국에서 전교하기 위해서는 독서인층(讀書人層)의 신임을 얻어야 한다고 믿고, 서양의 학술을 중국어로 번역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유클리드 기하학의 역서인 《기하학 원본》과, 세계지도 위에 각종 천문학 ·지리학적 설명을 덧붙인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이다. 그 밖에 세계지도인 《산해여지전도(山海輿地全圖)》가 있다. 이러한 학문은 중국 지식인층의 관심을 끌어 서광계(徐光啓), 이지조(李之藻) 등의 유력한 관료도 개종(改宗)하여 그의 전교사업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저서에 《천주실의(天主實義)》 《교우론(交友論)》 등이 있는데, 《천주실의》는 한국의 천주교 성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naver
1536 - 영국의 신학자, 성서번역자 윌리엄 틴들(Tyndale, William) 순교 틴들 [Tyndale, William, 1494 ?~1536.10.6] [오늘의 경제소사/ 10월 6일] <1518> 윌리엄 틴들 1536년 10월6일 브뤼셀. 사형 집행관이 영국인 윌리엄 틴들(William Tyndaleㆍ42세)의 목을 졸랐다. 죽어가면서도 신에게 영국 왕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외쳤던 그의 시신은 바로 불태워졌다. 영국의 제임스 1세가 유명학자 54명을 동원해 1611년 완역, 영어판 성서의 기본으로 꼽히는 흠정역 성서 중 구약의 83.7%, 신약의 75.7%가 틴들역과 동일하다. 틴들이 영어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인물로 꼽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권홍우편집위원 /서울경제 2009/10/05 17:24:45 http://economy.hankooki.com/lpage/economy/200910/e2009100517243797490.htm
1459 - 독일의 항해가, 지리학자 베하임(Behaim, Martin) 출생 베하임 [Behaim, Martin, 1459.10.6~1507.7.29] (영)Martin Behaim. Martinho de Boémia라고도 함. 독일의 항해가·지리학자. 그가 제작한 뉘른베르크 지구의는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1480년경 플랑드르와의 교역에서 상인자격으로 포르투갈을 처음 방문했던 베하임은 뉘른베르크에서 천문학자 요한 뮐러(레기오몬타누스)의 제자로 있었던 사실 때문에 주앙 2세의 항해자문이 되었다. 그는 당시 목재로 제작, 사용되고 있던 아스트롤라베를 처음으로 놋쇠로 만들었다. 이 도구는 그당시 항해중에 시간과 위도를 추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태양·달·별 들의 고도를 측정할 때 사용했다. 그는 1485~86년 디오구 캉과 함께 아프리카의 서부 해안을 항해했다. 1490년 뉘른베르크로 돌아온 그는 화가 게오르크 글로켄돈의 도움을 받아 지구의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1492년 완성했다. 당시 포르투갈의 탐험 범위에 비추어볼 때, 그가 제작한 지구의는 매우 부정확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었다. 특히 아프리카 서해안 부문에서 더욱 그랬다. 그러나 이 지구의는 북아메리카가 발견되기 직전에, 그 존재에 대한 당시의 일반적인 추정이 표현되어 있어 관심을 끈다. 그의 지구의는 뉘른베르크의 게르만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브리태니커
671 - 신라, 당나라군 축출 문무왕 16년(671) 신라군이 당(唐)의 군대를 완전히 축출하였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02&oid=088&aid=0000010187
----------------------------------------------------------
-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