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미의 분석론
취미판단의 제 1계기: 성질의 범주에 따른 고찰
1. 취미의 판단은 감성적이다.
칸트는 가장 먼저 취미판단이 무엇인지 정의 내려요.
취미판단이란 “미를 판단하는 능력”이에요. 하지만 이성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떠오른 표상을 통해 쾌와 불쾌를 느끼고, 쾌를 느낄 때 그걸 ‘미’라고 판단하죠. 그러므로 취미판단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이에요. 이를 칸트는 ‘취미판단은 감성적이다’라고 규정해요.
2. 취미판단을 규정하는 만족은 일체의 관심과 무관하다.
그런데 이런 취미판단은 일체의 “관심”이 없는 상태에서 내리는 판단이어야 해요. 배고파 죽기 직전에 음식의 맛을 제대로 느낄 리가 없잖아요? 전혀 배고프지 않은데도 그때도 만족을 주는 것이야말로 맛이듯, “아름답다”라는 판단은 그 어떤 관심과 무관한 상태에서 내려야 하는 거죠.
그런데 여기에서 관심의 정의는 “현존의 표상과 결합되어 있는 만족”이에요. 그렇다면 무관심이라는 ‘현존의 표상’이 없다는 뜻이죠. 즉, 아름다움이란, 대상의 현존과는 아무 상관없죠. 미는 어디까지나 나 자신의 내부에 있는 표상이랑 상관있어요.
‘미란 무관심한 만족이다.’
칸트는 이걸 ‘극히 중요한 명제’라고 불러요. 사실 바로 이 명제에서 이후 논증들이 진행됩니다.
3. 쾌적에 관한 만족은 관심과 결합되어 있다.
칸트는 ‘쾌락’과 ‘만족’을 분명하게 나눠요. 감각의 자극으로 얻어지는 만족은 ‘쾌락’이에요. 이런건 대상이 현존해야만 하죠. 그렇기에 아름다움이 아니에요. 그는 미가 주는 ‘만족’이란 이런 쾌락과는 엄연히 다르다고 논증해요. 미는 2절에서 말했듯이, 대상의 현존과 무관해야 하기 때문이죠.
4. 선에 관한 만족은 관심과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곧바로, 칸트는 이번에는 ‘선의 만족’과 ‘미의 만족’을 구분해요. 근거는 같아요. 선의 만족 역시 대상의 현존과 관련이 있으니까요. 다만 여기선 결론보다 논증이 재밌어요.
칸트는 “쾌적한 것과 선한 것이 동일하다”는 주장에 반박해요. 이건 공리주의을 전면으로 반박하는 거죠. 공리주의의 원리는 “더 많은 이의 행복이 선”이거든요. 여기서는 행복=선이죠. 하지만 칸트는 그게 말도 안 된다는 거에요. 맛있는 음식이라고 그게 좋은 음식이겠어? 라고 반문하며, 그는 아무리 행복(쾌적)해도, 그것이 선일 순 없다고 합니다. 그 행복(쾌적)한 존재는 그 것만으로는 아무 가치도 없다고 말이죠. 만족(행복)은 선이 아니에요.
이렇게, 그는 미와 선을 날카롭게 분리해요.
5. 상이한 세 종류의 만족에 대한 비교
5절은 이제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는 부분이에요. 해제 132p를 보면 그래프도 있어요. 그 표를 참조하는 게 더 좋지만, 그래도 간단하게 설명하겠습니다.
그는 만족을 3개로 나눠요.
감각에서 오는 만족, ‘쾌락’
아름다움에서 오는 만족, ‘만족’
선에서 오는 만족, ‘존중’
그리고 이 셋 중, ‘만족’이야 말로 자유로운 만족이래요. 쾌락은 경향성에 휘둘리고, 존중은 선의 의무에 매이는데, 만족이야 말로 그런 건 없이 감각에 따르는 경향성에 휘둘리지도 않고, 선이 주는 의무에도 매이지 않고 말이에요.
그는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하죠.
“취미란 대상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족하거나 불만족하는 능력이다. 이때, 만족의 대상이 바로 아름답다고 일컬어진다.”
취미판단의 제 2계기: 분량의 범주에 따른 고찰
6. 미란 개념 없이 보편적 만족의 대상으로 표상되는 것이다.
미는 아무 관심도 없는 만족이에요. 칸트는 여기에서 흥미로운 결론을 끌어내요. 어떤 게 아름답다. 그런데 그 대상은 나와 상관없는 것이었다. 내 취향과도 무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아름답다는 만족감을 줬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만족감을 줄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만족은 내 개인적인 특징으로 인한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보편성의 요구’에요.
쾌락은 그럴 수 없어요. 왜냐하면 ‘나에게 즐거워서’ 쾌락이거든요. 그래서 쾌락이 모든 사람에게 공통될거라고 주장할 순 없죠. 그런데 아름다움의 만족은 그렇지 않아요. 사람들이 “아름답다”라고 판단할 때, 그것은 “나에게만 아름답다”라는 등의 겸손한 주장이 결코 아니에요. 그건 ‘객관적으로 아름답다.’ 라는 의미죠.
이건 정말 이상한 일이에요. 그리고 공감할 수 있는 일이지요. 우린 이런 말을 하곤 해요.
“이건 완전 내 취향이지만 쓰레기다.”
“이건 완전 내 취향 아니지만 좋은 작품이긴 하다.”
이건 아주 이상한 발언이죠. 마치 아름다움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어떤 성질인 것처럼 말해요.
아름답다는 건 주관적인 감각에 불과해요. 그런데 그게 어떻게 보편적일 수 있나요? 칸트는 그래서 이걸 ‘주관적인 보편성’이라는 역설적인 단어로 설명해요. 그는 아름답다는 판단은 ‘주관적인 보편성’을 타인에게도 요구하고, 이 요구는 그 판단 자체에 결합되어 있어서 분리할 수 없다고 단언하죠.
7. 상술한 특징에 의한 미, 쾌적, 선의 비교
7절은 6절과 거의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미를 설명하죠. 다만 이번엔 ‘쾌적’과 ‘선’을 비교대상으로 삼고 있을 뿐입니다.
ㄱ. 쾌적과 미의 차이
쾌적은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못해요. 하지만 미는 강요하죠. 이걸 ‘보편성의 요구’라고 불러요. 이것이 쾌적과 미의 가장 큰 차이에요.
ㄴ. 선과 미의 차이
선도 미처럼 보편성의 요구가 있어요. 다만 차이점은, 선은 ‘개념’을 통하지만, 미는 ‘개념’ 없이 판단한다는 거죠.
8. 취미판단에서 표상되는 만족의 보편성은 단지 주관적인 것이다.
위에서 봤듯, 칸트는 “아름답다”란 판단에는 본질적으로 보편타당성이 섞여 있음을 캐치해요. 실제로 그렇지 않나요? 그래서 그는 쾌적에는 ‘감관의 취미’라고 부르고, 미적 만족에는 ‘반성의 취미’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이 반성의 취미는 위에서 말한 ‘주관적 보편성’을 요구해요. 개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논리가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런데도 요구하죠. 맨날 거부당하면서도 말이에요. 대체 왜? 그래서 칸트는 이게 ‘특수’하다고 표현해요.
“이 꽃이 아름답다”라는 판단을 살펴보죠. 어디가 보편타당한 걸까요? 저 꽃은 개별자에요. 이 판단은 ‘꽃 전체’로 확대되는 게 아니에요. 도리어, ‘모든 판단자’로 확대되는거죠. “저 꽃을 보는 자는 모두 아름답다고 판단 내려야만 한다.” 라는 강력한 요구이지요. 그것은 찬성의 요구에요. 결국, 아름답다는 판단은 모든 사람에 대해 타당하다고 간주할 수 있는 판단의 ‘가능성’을 요청하는 셈이죠. 아름답다는 타인의 찬성은, 한 규칙의 사례를 확증하는 것뿐이에요. 보편적 일치란 하나의 이념에 지나지 않아요.
칸트는 그 판단자에게는 ‘권리’가 있다고 해요. 만약 그 판단이 관심에서 벗어나 있고, 스스로 이를 확신할 수 있다면 말이에요. 좀 더 구체적인 이유는 뒤에 나옵니다.
9. 취미판단에 있어서 쾌의 감정이 대상의 판정에 선행하는지, 아니면 반대인가?
가장 어려운 챕터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꽃을 보았을 때, 꽃을 보고 만족을 느끼는 게 먼저일까요, 꽃이 아름답다는 판단을 하는 게 먼저일까요? 칸트 논리에 따르면 만족을 먼저 느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아름답다는 판단이 개인적인 판단이 될테니까요. 그렇다면 판단이 먼저라는 건데요.
이 경우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위에서 살폈듯, 아름답다는 판단은 언제나 보편성의 요구를 내포합니다. 하지만 그럴려면 어떤게 보편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할텐데, 그게 뭘까요? 칸트는 그걸 ‘인식’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인식되어야 전달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계속 말했듯이, 미의 판단에는 ‘개념’이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개념 없는 인식이 대체 뭘까요?
칸트가 여기서 말하는 인식능력은 ‘상상력’과 ‘지성’입니다. 감각은 이 두 힘이 자유롭고 조화를 이루며 유희하도록 고무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아름답다’라는 판단의 근거가 됩니다. 이는 보편적인 인식이기에, 우리가 전달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아름답다는 판단을 하며 동시에 보편성의 요구까지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칸트는 9절까지를 이렇게 축약합니다.
“미란 개념 없이 보편적으로 만족을 주는 것이다.”
취미판단의 제 3계기: 취미판단에서 고찰되는 목적의 관계
10. 합목적성 일반에 관하여.
이 부분은 합목적성을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죠. 일단, ‘목적’과 ‘합목적성’을 분리해서 인식하는 게 중요해요. 칸트 말에 따르면, 목적이란 “어떤 개념의 대상”을 말해요. 단, 개념이 원인이고, 대상이 결과인 경우에만 그래요. 인과성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이때, 그 인과성이 바로 ‘합목적성’이에요. 즉, 합목적성은 ‘형식’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묘한 문장이 나와요. “결과라는 표상은 그 결과의 원인을 규정하는 근거이며, 원인에 선행한다.” 전 이 문장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이 짧은 논증은 몇 번이나 봐도 이해가 안 됐어요. 흐릿하게 말하자면, 딱히 그 목적을 인식할 수 없는 대상이 있다고 칩시다. 그렇지만, 분명히 어떤 의지를 가정해야만 그 대상이 존재할 수 있다면, 오직 그 이유만으로 그 대상은 합목적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거에요.
논증은 난해하지만 결론은 뚜렷해요.
“어떤 합목적성이 목적에 근거하지 않아도, 그 형식에 있어서 합목적성을 관찰할 수 있다”
이것은 그의 미학에서 중심이 되는 “목적 없는 합목적성”에 대한 설명이에요.
11. 취미판단은 대상의 합목적성의 형식에만 근거한다.
목적이란 건, 언제나 인식 판단이죠. 그런데 취미판단이란 건 인식이 아니라 감성적인 판단이잖아요. 그런, 취미판단은 대상의 ‘목적’과는 무관하죠. 결국 취미판단은 대상의 성질, 내적, 외적 가능성 등과는 무관해요. 취미판단은 도리어 “(자신의) 표상 능력들의 상호 관계만을 포함할 뿐”이에요. 이것이 ‘주관적 합목적성’이에요. 이 챕터의 마지막 문장을 좀 쉽게 자르면 이렇게 돼요.
“어떤 표상이 우리에게 대상을 준다. 그 대상에서 합목적성의 순수한 형식이 나타난다. 그 형식이 우리에게 만족을 준다. 우리는 이 만족이 보편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이 만족이 취미판단의 근거가 된다.”
내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칸트는, “저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라는 상식적인 생각과는 전혀 반대로, 아름다움의 본질적인 속성을 인간 내부에 있는 ‘표상능력’들간의 관계로 파악하고 있어요.
12. 취미판단은 선험적 근거에 기초하고 있다.
‘쾌’란, 형식적인 합목적성에 대한 ‘의식’이에요. 이 의식은 주관의 인식능력이 유희함으로써 성립하죠. 이 쾌는 도덕적인 것도, 지성적인 것도, 감각적인 것도 아니에요. 인과성(합목적성의 형식)은, 어떤 표상에 대한 마음과 인식능력을 자유롭게 유지시키는데, 이때 일어나는 ‘쾌’만이 취미판단의 근거가 돼요. 칸트는 그래서 우리가 아름다운 것을 관조할 때 ‘몰두’하게 된다고 주장해요. 관조가 관조를 강화시키고 재생시키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 근거는 전혀 경험적인 것이 아니에요. 아주 선험적인,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떤 유희와 조화에서 비롯되죠. 그렇기 때문에 칸트는 ‘취미판단은 선험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라는 과감한 주장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13. 순수한 취미 판단은 자극이나 감동과는 무관하다.
이 챕터에서도 칸트는 취미판단의 순수성(?)을 지키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움이란 자극이나 감동이라고 말하지만 그건 아니라는 거에요. 심지어 그는 그런 걸 ‘야만적이다’라고 표현해요. 자극과 감동 따위에 영향을 받지 않는, 형식의 합목적성만을 규정 근거로 갖는 취미판단만이 순수한 취미판단이라는거에요. 그는 이 부분이 꼭 말하고 싶었던 건지, 실례를 통해 설명하겠다고 해요.
14. 실례를 통한 설명
이 챕터에는 풍부한 실례들이 있죠. 칸트는 이 실례들을 통해 계속해서 ‘순수한’ 취미 판단을 찾아갑니다. 결국 뒤로 가서, 그는 ‘순수한 취미판단의 고유한 대상은 형태의 유희에 있어서는 도안이며, 감각의 유희에 있어서는 합성이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즐겁게하는 색이나 소리는 다만 이 형식을 더 정확하고 완전하게 직관할 수 있게 하여, 표상을 더 생생하게 도와주는 역할을 할 뿐이란 거죠.
만약 이 논변은 이제까지의 정의들과 섞으면, 이런 식으로 정리할 수가 있어요.
어떤 건축물이 있다고 칩시다. 그 건축물은 아름다워요. 그렇게 느껴져요. 이건 내 개인적인 취향이 아니라, 그냥 진짜로 아름답다고 느끼는거에요. 그때 우리의 판단은, 1. 그 건축물의 형식, 즉 그 ‘도안’을 대상으로 삼아야 해요. 2. 그 도안의 ‘목적 없는 합목적성’에 대해, 우리의 인식능력들이 자유로이 유희하며 조화를 이루어요. 3. 그러므로 타인에게도 요구(주관적 보편성이 있는)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탄생하는거죠.
15. 취미판단은 완전성의 개념과는 무관하다
객관적인 합목적성이란 목적이 있는 합목적성이에요. 미랑은 상관 없는거죠. 그런데 유용성이라든가, 완전성이라든가 그런 건 객관적인 어떤 목적이 있어야 가능한 개념이에요. 완전성을 약간 설명하자면, “이것은 이러이러해야해.” 라는 어떤 목적이 있은 후에야만 “이건 갖춰야 할 꼴을 다 갖췄어.” 라는 완전성이 생겨날 수 있죠.
당연히 이런 것들은 미와 아무 상관 없어요. 완전성이든 유용성이든, 그런 것들은 순수한 취미판단이 될 수 없어요. 다만 이곳에서 흥미로운 문단은 이곳이에요.
“한 사물을 표상할 때 형식적인 것이 어떤 일자와 일치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는 객관적 합목적성을 인식하게 만들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그 사물이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목적은 사라지므로, 보는자의 마음에 표상의 주관적 합목적성만 남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지성에 대한 부분도 흥미로운데요, 취미판단도 지성이 필요하긴 해요. 하지만 이때 지성은 대상을 인식하는 능력으로 필요한 게 아니라, 판단과 대상의 표상을 이 표상이 주관과 추관의 내적 감정과 맺는 관계에 따라 규정하는 능력으로 필요할 뿐이고, 더욱이 이 취미판단이 보편적 규칙에 따라 가능한 한에서 그럴 뿐이라고 해요.
음, 여하간, 이 챕터의 목적은 뚜렷합니다. 취미판단은 개념에서 근거하는 판단이 아니기 때문에, 완전성이나 유용성 같은건 아무 상관 없다는 거에요.
16. 대상에 대해 특정한 개념의 조건에 따라 아름답다고 언명하는 취미판단은 순수하지 않다.
이 챕터는 개인적으로 매우 흥미로웠는데요. 미를 두 종류로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자유미와 종속미로요. 자유미는 정말 자유롭게, 사물 자체로 존립하는 미를 말하고, 종속미는 어떤 개념에 종속되는, 목적 개념 하에 있는 대상에 부가물로 있는 미에요. 자유미의 예는 꽃, 조류, 희랍풍 도안, 잎무늬, 주제 없는 환상곡, 가사없는 전악곡 등이고, 종속미는 인간의 미, 말의 미, 건축물 등이에요. 그는 이곳에서도 미가 있다고 인정을 하긴 하는데, 목적과 ‘결합’되는지라, 그 순수성이 깨진다고 보고 있어요.
이 종속미에 대해 순수하게 취미판단을 하는 방법은 딱 두가지에요. 그 미의 내적 목적에 아무것도 모르거나, 일부러 도외시하고 판단하거나. 하지만 그런 경우에는 다른 사람에게 비난 받을 거라고 말해요. 왜냐하면 그 올바른 취미판단자는 그 대상의 일부(미)만을 판단한 것이기 때문이죠. 칸트는 이런 구분을 엄밀히 하면 미학의 헛된 논쟁을 많이 종식시켜줄 수 있다고 믿는 모양입니다만… 글쎄요.
17. 미의 이상에 관하여
이 부분이 가장 어렵네요.
그는 “무엇이 아름다운가?”에 대한 질문에, 아주 칼같이 “미의 보편적 규준 같은 건 없다”고 단언해요. 취미판단의 근거가 어디까지나 주관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거에요.
그는 이곳에서 아주 묘한… 말을 하는데, 어떤 취미를 보여주기 위해선, 한 개인이 스스로 미의 이상을 가져야 한다는 거에요. 이 이상은 순전한 이념이고, 개인이 가지고 있지도 않지만,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거에요. 그리고 그 사람은 이 이상에 따라 모든 것을 판단하고, 심지어 타인의 취미자체도 이에 따라 판단해요. 여기에서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칸트의 입장이에요. 그는 ‘미의 이상’에 대해 쭉 말하고, 이것이 ‘미의 표준이념’과 뭐가 어떻게 다른지 쭉 설명했지만, 결국에는 ‘미의 이상’에 따른 판단이 순수한 취미판단이 아니라고 결론 내려요.
칸트의 포지션이 뭔지 여기서는 제가 잘 이해를 못하겠어요. 하지만 결론은 뚜렷하게 미의 이상에 따른 판단이 순수하지 않다는 것이긴 해요.
이로써 3계기, 미의 합목적성에 대한 논고가 끝나요. 결국 칸트는 한 문장으로 자신의 주장을 요약해요.
“미는, 대상에서 합목적성이 목적을 표상하지 않고도 지각되는 한에서, 그 대상의 합목적성의 형식이다.”
l 취미판단의 제 4계기: 대상들에 관한 만족의 양상
18. 취미판단의 양상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과 만족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이 ‘필연성’이란게 뭐냐는 거죠. 이것이 아름답다는 판단은 ‘이것은 어떤 보편적 규칙의 예시이다’라는 판단이에요.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이 판단에 동의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필연성이죠. 칸트는 이를 ‘범례적 필연성’이라 불렀어요.
19. 취미판단에 부가되는 주관적 필연성은 제약된 필연성이다.
이건 미의 분석론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이기도 한데요, 아름답다는 판단은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그렇게 인정하라고 ‘요구’한단 말이죠. 이건 사실이에요. 칸트의 핵심 질문은, ‘왜 이렇게 요구하는가?’ 에 있어요. 그는 이 챕터에서 아름답다는 판단이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요구가 발생한다고 주장해요.
그 어떤 근거가 대체 뭘까요? 두둥…
20. 취미판단이 제시하는 필연성의 조건은 공통감의 이념이다.
난폭하게 말해서, 그 근거는 인류에 보편적으로 있는 “공통감”이에요. 그럼 대체 공통감이 뭐냐? 그건 위에서 계속 말했던 것이죠. 그냥 우리가 생각하는 ‘느낌’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능력들의 자유로운 유희에서 나오는 결과”가 바로 그 공통감이에요.
인간은 이 공통감에 의거하여 아름답다는 판단을 내리기에, 그리고 이 공통감이 보편적이기에, 자신의 그 판단을 만인에게 ‘요구’하는 것이며, 또한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거에요.
신기한 주장이죠.
21. 공통감을 전제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 공통감이 정말 있는 것이냐고 물을 수 있겠죠. 칸트는 이에 대해 “그렇다” 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매우 칸트식 논증인지라 상당히 어렵습니다. 결론만 말하자면, 상상력과 조화와 균형 역시 보편적으로 전달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공통감을 전제할 수 밖에 없고, 그러므로 공통감이 존재한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논증을 아주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인식과 판단은 보편적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식과 판단은 객관적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마음의 상태 역시 전달되어야 한다. (이에 대한 근거랄 건 없음)
따라서 마음의 상태인 인식능력의 조화 역시 전달되어야 한다.
그것이 전달되기 위해서는 공통감이 존재해야 한다.
그러므로 공통감은 존재한다.
좀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일 수도 있지만, 하여튼 제가 뽑은 논증의 골자는 이랬습니다. 다만 그 외에 유심히 봐야 할 것은, 이곳에서 칸트가 “아름다운 대상을 보았을 때 우리의 판단력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생각보다 쉽게 설명해주고 있단 겁니다. 정리해보죠.
1. 어떤 대상은 상상력을 활성화시킨다.
2. 상상력은 1. 주어진 잡다한 것들을 종합하고. 2. 지성을 활성화시켜서 잡다한 것을 개념적으로 통일한다.
3. 이런 일들을 위해 필요한 것이 인식능력(상상력과 지성)의 조화와 균형이다
4. 그런데 이 조화는 개념이 아니라 감정에 의해서만 규정된다.
22. 취미판단에서 사유되는 보편적 동의의 필연성은 주관적 필연성이지만, 공통감의 전제하에서는 객관적 필연성으로 표상된다.
제목이 어렵지만, 제목에 모든 걸 다 담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름답다”라는 판단은 만인에 대한 요구이죠. 그건 분명 주관적 필연성입니다. 하지만 공통감이 있다면, 그건 객관적 필연성으로 드러난다는 거죠.
그렇다면 공통감에 대한 무수한 의문들이 생겨나는데, 그것에 대해 칸트는 말을 멈춥니다. 그는 “취미능력을 공통감의 이념에서 통합해야 한다.”라는 말로 제 4계기를 마무리합니다.
l 분석론 제 1장에 관한 총주
이것은 표현 그래도 총주입니다. 하지만 가장 알기 쉽고, 어떤 면에서는 감동적인 부분도 꽤 많은 부분입니다. 4계기까지 어느 정도 이해하며 따라왔다면, 이 총주에서 나타나는 칸트의 감수성은 약간 놀랍기 까지 합니다.
그는 상상력이 자유롭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자유롭기 위해선 법칙에서 벗어나야 하죠. 그는 대상을 개념으로 인식하는 것도 모두 부정합니다. 적어도 자유로운 상상력의 유희를 위해서는 말이죠. 이때 지성 역시 그 유희에 동참하긴 합니다만, 이 순간만큼은 분명 상상력이 우위에 있음을 뚜렷하게 말합니다. 지성은 상상력을 위해 활동할 뿐이지요.
딱딱하고 합규칙적인 것은 그 자체로 반취미적인 요소가 있다… 라고 지적하며, 결국 구는 완전히 무규칙적인, 자연의 미만을 남기는 듯 보입니다. 자연은 확실히 어떤 규칙성에 따르지 않지요. 그는 그 어떤 노래도 밤꾀꼬리의 울음에 비하면 매우 무취미하다고 말합니다.
한 번 읽어보시면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2장. 숭고의 분석론
일단, 2장을 들어가기 전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두시면 편합니다.
칸트에게 있어 ‘지성’은 세계를 파악하는 능력이고, ‘이성’은 도덕의 근거가 되는 능력입니다(물론, 이건 너무 단순화시킨 부정확한 정의입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미가 ‘지성’과 관련되었다면, 숭고는 ‘이성’과 관련됩니다.
이를 사전에 알고 계시면 숭고의 분석론을 볼 때 편합니다.
23. 미의 판정 능력에서 숭고의 판정 능력으로의 이행
칸트는 미와 숭고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 개괄적으로 소개 합니다. 이 공통점과 차이점은 해제 156p에 표로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간략히 정리하자면, 미는 대상의 형식에 한정되는데, 숭고는 무한정성(무형식)인 대상에서 비롯됩니다. 미는 지성개념과 관련 있고, 숭고는 이성개념과 관련 있습니다. 미는 쾌감을 일으키고, 숭고는 부정적인 쾌감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와 달리 숭고는 정말로 마음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습니다. 숭고의 대상은 숭고한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숭고를 일깨워주는 그저 트리거일 뿐입니다.
이 개념은 무척 중요합니다. 저 거대한 폭풍우치는 장면이 숭고한 게 아닙니다. 그건 그저 트리거에 불과합니다. 숭고는 내적인 어떤 작용을 일컫는 것입니다.
이것이 숭고의 분석론에서 칸트가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24. 숭고 감정에 대한 연구의 구분에 관하여
그는 숭고의 분석론을 두 가지로 나눕니다. 1. 수학적 숭고. 2. 역학적 숭고. 이렇게 나누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1. 미는 평정한 관조상태를 전제하지만, 숭고는 동요를 전제한다.
2. 상상력은 이 동요를 ‘인식 능력’과 ‘욕구 능력’에 관련시킨다.
3. 인식 능력 부분은 수학적이고, 욕구 능력 부분은 역학적이다.
물론, 이것만 가지고는 무슨 소린지 알기 힘듭니다. 천천히 칸트의 설명을 따라가 보죠.
A. 수학적 숭고에 관하여
25. 숭고의 어의
“단적으로 큰 것을 우리는 숭고하다고 부른다.”
25절의 첫 문장입니다. 그가 엉뚱하게 수학을 운운한 것은 숭고가 무엇보다 ‘크기’이기 때문이고, 크기는 수학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숭고가 “절대적으로 큰 것”이라고 정의 내립니다. 그런데 세상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죠. 그런데 우리가 “이건 절대적으로 크다”라고 말할 때, 어떤 비교도 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이게 큰 것을 인정해!” 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쩐지 아름답다는 판단과 비슷한 구석이 있지 않나요? 이때, 우리는 무슨 근거로 이런 요구를 하는 걸까요?
그는 “크기 척도가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라고 운을 뗍니다. 그는 우리가 어떤 크기를 보면 “인식능력을 사용함에 있어서 주관적 합목적성의 의식을 내포하는 만족”을 수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건 아름다움에서 느끼는 만족과 거의 같은 것이죠. 그러나 차이가 있습니다. 칸트는 숭고가 “(아름다움처럼) 객관에 관한 만족”이 아니라, “상상력 자체의 확장에 관한 만족”이라고 정의 내립니다.
즉, 절대적으로 크다라는 판단에서 정말 큰 것은 “상상력 자체의 확장”을 뜻합니다. 그게 커지는 거죠. 즉, 숭고는 오직 우리의 이념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칸트가 설명하는 과정은 이렇습니다.
아주 큰 걸 봄 -> 우리 상상력이 그걸 포착하려고 무한히 노력함 -> 그러나 이성은 그걸 ‘절대적 총체성’을 가지고 파악하길 요구함 -> 그게 잘 안됨. -> 이게 안 된다는 건 우리가 초 감성적인 능력(이성)이 있다는 것임 -> 내가 초감정석 능력이 있다니!! 깨닫게 됨 -> 이것이 숭고하다는 판단력.
즉, 숭고란 어떤 표상을 통해 야기된 정신의 상태입니다.
“숭고란 그것을 단지 생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관의 모든 척도를 능가하는 어떤 마음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좀 이상한 주장이죠? 하지만 정말 이 주장 맞습니다.
26. 숭고의 기념을 위해 요구되는 자연 사물의 크기 평가에 관하여
우리가 어떤 걸 크다고 받아들이기 위해선 아무래도 수학적인 척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어떤 크기의 물건을 상상력 속에 받아들이기 위해선 일단 “포착”과 “포괄”이라는 두 능력을 필요로 하죠.
그런데 이게 물건이 한 눈에 포착할 수가 없어지면 문제가 생깁니다. 포착을 해야 포괄을 해야 하는데, 피라미드를 아래에서부터 위를 쭉 훑어보면, 위를 볼 때쯤에는 아래를 까먹거든요. 이에 따라 상상력에는 무한히 자신을 확대하려고 하지만, 결국 실패합니다. 숭고는 바로 이 ‘실패’에서 비롯됩니다. “감정은 그로 말미암아 하나의 감동적인 만족의 상태로 바뀐다.”라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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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포착할 수 없는 대상과 맞닥뜨린 상상력은, 자신을 무한히 확장하려고 발버둥칩니다. 실패해도 계속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때 이성은 “총체성”을 요구합니다. 하나의 완성된 그림을 그리길 계속 요구하는 거죠. 무한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마저도, 총체적으로 “전부 주어진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자꾸만 요구합니다. 짜증스러운 친구죠. 상상력은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데 말이죠…
여기서 칸트는 이상한 결론을 도출합니다. “무한한 것을 하나의 전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관의 모든 척도를 초월하는 어떤 심적 능력이 있다는 증거다.” 라고 말입니다. 이 능력이야 말로, 마음의 확장입니다. 감성의 모든 척도를 넘어서는 확장입니다. 이때 일어나는 것이 숭고의 감각입니다. 대상이 아니라 대상을 평가할 때 우리 마음 상태가 바로 숭고한 것으로 판정되는거죠. 자신의 초감성적인 능력(조심스럽지만… 전 이게 이성인 것 같습니다)을 느끼는 것입니다. 진정한 숭고성은 오직 판단자의 마음 속에서만 찾아지는 것입니다.
26절의 마지막 문장을 좀 쉽게, 제 멋대로 바꾼다면 이렇습니다.
“이성의 이념이 요구하는 것을 맞추기 위해선, 그 무한한 상상력이나 자연도 하찮은 것으로 표상된다. 그 이성의 이념들에 비한다면…”
27. 숭고의 판정에 있어서 만족의 성질에 관하여
우리의 상상력은 이성의 이념을 만족시켜주려고 최대한 노력하지만 실패하고 맙니다. 하지만 이건 상상력의 의무가 바로 이성을 충족시켜주는 것이라는 증명이기도 하죠. 우리는 이 의무를 존경하며, 이 존경을 자연의 객관에 표시하는데, 그게 바로 숭고입니다.
아무리 큰 자연도, 이성이념과 비교하면 작다고 평가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성의 법칙이며 우리의 사명입니다. 보통 너무 과도한 것은 상상력에게는 자신을 잃을까 하는 심연 같은 두려움이지만, 이런 초감성적인 것에 관한 이성의 이념에 대해서는 과도한 것이 아니라, 상상력이 바로 그렇게 너무해지게 노력하게 하는, 합법칙적인 것이기에 매력적인 것입니다.
즉, 이 숭고한 만족감은 처음에는 불쾌지만, 이어서 쾌가 되는 것입니다.
미의 판정에서는 상상력과 지성이 조화를 이루기에 쾌밖에 없지만, 숭고의 판정에서는 상상력과 이성이 충돌을 이루기에 불쾌의 쾌입니다.
다만 여기서 첨언하자면, 칸트는 미의 분석에서는 분명히 지성을 상상력의 아래에 놓았는데, 숭고에서는 아주 명백하게 이성을 상상력의 위에 놓았습니다. 흥미로운 일이죠.
B. 자연의 역학적 숭고에 관하여
28. 위력으로서의 자연에 관하여
이 장에서의 논변은 좀 흥미로운데요. 보통 숭고하다고 하는 자연물이란 게 폭풍우 치는 바다 뭐 이런 거잖습니까? 보통 무서운 게 아니죠. 우리는 보통 이 공포의 감정을 경외라고 부르며 숭고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순수한 걸 좋아하는 칸트는 “공포에 사로잡혀서는 결코 숭고를 느낄 수 없다.” 라고 합니다. 그래서 칸트는 ‘일단 안전한 곳에 있어야 한다.’ 라고 말합니다. 그제서야 또 다른 저항능력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저 자연에 우리를 견주어 볼 용기를 얻고, 저 자연을 보고 자신의 능력을 새삼 깨닫고, 우리의 인격 안에 있는 최고의 원칙이 자연보다 크다는 걸 알게 된다는거죠. 자연은 우리의 상상력을 고양시켜 그를 깨닫게 할 뿐입니다.
하지만 안전한 곳에 있다고 해서 숭고한 게 좀 덜 진지해 보이는 건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자신의 ‘사명’이기 때문이지요.
“그 능력(이성)의 발전과 숙련은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며, 의무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의 반성을 거기까지 확장시킨다면, 아무리 자기가 현재 무력하다는 것을 의식할지라도, 이 점에는 진리가 담겨 있다.”
그는 자연을 보고 공포를 느끼는 건, 신에 대한 모독이라고 거칠게 말합니다. 그건 굴복과 비굴, 무력감일 뿐이란 거죠. 정말로 숭고한 건 그런 것이 아니라, “신의 의지에 맞는 마음씨의 숭고성을 자기 자신에게서 인식하고, 자연에 대한 공포를 넘어서 고양되는 것”이라고 파악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종교는 미신과 구분됩니다. 미신은 강자에 대한 공포일 뿐입니다. 그곳에선 그저 은총의 갈구와 아첨 외엔 아무것도 나올 수 없습니다.
그는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자연보다도, 우리 밖에 있는 자연보다도 우월하다는 것을 의식하는 한, 숭고는 우리 마음 속에 있음을 지적합니다.
29. 자연의 숭고에 대한 판단의 양상에 관하여
이 파트는 칸트가 드디어 노골적으로 숭고를 도덕과 연결시키는 절입니다. 브라보!
이 파트의 질문 자체는 단순합니다. 이 숭고라는 판단이 과연 필연적인가? 답은 그렇다 입니다. 그 근거는, 이 판단이 모든 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실천이성, 즉 도덕적인 감정의 소질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위협적인 것이 매력적인 이유는, 그것이 이성의 고유한 영역(실천적 영역)에 적합하도록 감성을 확장하여 감성으로 하여금 자신에 대해서는 심연과도 같은 무한자를 전망하기 위해 이성이 감성에 행사하는 강제력이기 때문이다.”
“이 판단은 (실천적) 이념들에 대한 감정의 소질에, 다시 말해 도덕적 감정의 소질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숭고의 필연성은) 인간에게는 도덕적 감정이 있다는 전제하에서만 요구할 수 있고, 그 경우에만 필연성을 부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로써 숭고의 분석론이 끝납니다.
ps. 좀 더 부연하자면, 그는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지성’을 파악했고,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이성’을 파악했었습니다. 전자는 세계를 인지하는 원리였고, 후자는 도덕의 근거였죠. 그러나 이 두 이성 능력은 그렇게 논리적으로 매끄럽게 공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판단력 비판은 지성과 이성 사이, ‘상상력’이라는 능력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네요.
[출처] 칸트, <판단력 비판> 요약|작성자 글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