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점령당한 후 손들목 돈대와 조선국 시체들(1871.6.11). 신미양요 기간 동안 조선군과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은 광성보 였다. 특히 손들목 돈대는 조선군 사령관인 중군 어재연 장군이 직접 지휘하여 격렬하게 반격을 가하던 요새로서 미군 측에서는 맥키 해군 중위와 두 명의 수병이 전사하고, 조선측에서는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대부분의 조선군이 장렬히 전사한 곳이다. 흰옷 차림의 조선군 전사자 시체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고 전립이 나뒹굴고 있는 모습이 처참하기 그지없다. ⓒ 미국 국립문서 보관소
"강화는 멀리 국조 단군성조의 개국과 그 역사를 함께 하면서 도서 특유의 지정학적 숙명으로 고금을 통해 왕실의 흥망성쇠가 곧 강화의 역사를 이루었다. 국가의 변란이 있을 때마다 제2의 수도로서의 임무가 주어졌으며, 외적이 침입할 때마다 나라를 지키는 군사 요충지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특히 근세에는 수도 서울을 지키는 관문으로서 1866년 프랑스 군함이 침입한 병인양요, 1871년 미국 군함이 침입한 신미양요, 1875년 일분 군함 운양호 사건으로 야기되는 강화도조약 체결 등이 바로 강화도에서 있었던 사건이었다."
▲ 모노카시 호의 미군 장병들. 모노카시 호는 팔로스 호처럼 수심이 얕은 항해용으로 설계된 1370톤급의 포함인데, 탑승 인원 160명에 함재대포는 8미리 곡사포 6문이었다. 팔로스 호와 아울러 6월 1일의 탐측 항해에 참여하였고, 6월 10~12일의 전투에서는 상륙 병력 수송과 해상 포격의 임무를 맡았다. ⓒ 미국 국립문서 보관소
장엄한 나레이션이 광성보 전투의 재현을 알린다. 이어 광성보를 맡고 있는 어재연 장군에게 급보가 전해진다. 1200여명에 이르는 미군이 군함 5척과 함께 강화도에 닻을 내렸다는 소식이다. 조선군 병력은 단지 320여명.
장군은 말한다. "나라를 위해 은혜를 갚을 때가 주어졌다. 이 땅을 위해 목숨을 다 바치라. 적의 대포에 두려워말라." 대포를 갖춘 함대의 공격에 맞서기에 우리의 힘은 너무 빈약했다. 무기라고 해야 창과 조총뿐. 전투에 참여했던 조선군 320여명은 모두 전사하고 만다.
▲미군에 맞서 홀로 대항하고 있는 어재연 장군. 장군이 131년만에 강화군과 덕신고 학생 110여명에 의해 되살아났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홀로 남은 어재연 장군은 뜻을 굽히지 않고 미군에 당당히 말한다.
"그대들의 총구는 나를 향해 있구나. 날 죽여라! 뭐가 두려운가."
결국 48시간만에 광성보에는 '성조기'가 꽂힌다. 당시 전투에 참여했던 한 미군 병사의 회고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조선군은 비상한 용기를 가지고 응전하면서 성벽에 올라와 미군에게 돌을 던졌다. 그들은 창과 칼로 미군을 상대하는데, 그것도 없는 병사들은 맨손으로 흙을 쥐어 미군의 눈에 뿌렸다. 오로지 죽기를 다하여 싸웠다."
광성보 전투란?
▲ 콜로라도 함상의 수자기(帥字旗). 수자기를 최초로 끌어내린 퍼비스 일병(왼쪽)과 그를 도운 브라운 상병(오른쪽)이 총을 짚고 서 있다. ⓒ 미국 국립문서 보관소
1866년 우리나라에 지속적인 통상개방압력을 가하던 미국이 제너럴 셔먼호를 앞세워 대동강을 침입, 마을을 약탈하자 평양군민들이 이에 저항하다 배를 태운다. 이에 앙심을 품은 미국이 군함 5척을 이끌고 다시 강화도를 습격하는데 이것이 바로 신미양요. 신미양요의 최적전이 바로 광성보 전투. 1871년 음력 4월 24일의 일이다.
미군은 대포 등의 무기를 지녔음에도 광성보에서 힘겨운 전투를 치러야 했다. 어재연 장군이 이끌던 조선군의 만만치 않은 저항때문이었다. 조선군은 총과 칼이 떨어지고 나서도 흙과 돌로 맞서는 등 굽히지 않은 자랑스런 전투를 펼쳤으나 326명의 조선군은 결국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역사 현장의 보존과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당시 선조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강화군과 어씨종친회에서는 쌍문비각(어재연 장군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에서 해마다 광성제를 지내고 있다. 더불어 광성보 전투 130년을 기념해 지난해 부터는 강화군 주최로 광성제 봉행 후 '광성보 전투 재현' 행사를 벌이고 있다.
1871년 미군함에 맞서 강화를 지키던 어재연 장군과 그를 따르던 병사들의 충정이 강화군 덕신고등학교 110여명의 학생들에 의해 되살아났다. 누구보다 진지한 태도로 연기하는 어린 학생들의 모습은 실제상황을 방불케 했다.
재현에 참가한 덕신고 유환웅 학생은 "국사책에서만 보던 전투를 재현해 의미 있었다"면서 "미국군의 총에 흙과 창으로 대항했으면서도 끝까지 피하지 않고 싸운 선조들이 자랑스러웠다"고 말했다.
▲광성보 전투 당시 조선군의 무기는 칼과 창. 그것도 떨어진 후엔 돌과 흙으로 대항했다.ⓒ 오마이뉴스 권우성
지난 해 광성보 전투 130주년을 기념해 강화군이 처음으로 재현행사를 치른 후, 올해로 두 번째를 맞았다. 이번에는 그 규모를 더 키웠다. 광성보 앞 바다에서 대포도 터뜨리고 바닥에 화약과 연막탄도 설치해 사실감을 더했다.
작년에는 덕신고등학교 학생 70명이 참여한 반면 올해는 1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연기했다. 앞으로는 덕신고등학교뿐 아니라 다른 학교들의 협찬도 얻어 인원을 늘일 계획이다.
행사를 주최한 강화군 류정현 부군수는 "우리 지역에서 일어났던 역사적인 전투를 재현함으로써 후손들에게 애국심을 기르게 하는 산 교육의 장이 될 수 있다"고 의의를 설명했다.
강화군 인근의 유아원과 초·중학교 학생들에게 광성보 전투는 이미 이름난 현장학습 장소가 됐다. 이날도 주민 100여명을 비롯해 유아원, 미술학원, 인근 초등학교 학생들 200여명이 찾았다.
▲지난 해에 이어 두번째로 재현한 광성보 전투. 올해엔 더욱 사실감을 더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대포가 터지고 화약이 터질 때마다 이를 지켜보던 어린이들은 연신 "와, 와" 함성을 연발하면서도 조선군이 쓰러질 때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소풍으로 이곳을 찾았다는 용현초등학교 4학년 윤이삭 어린이는 "신기하고 재밌었지만 미국군이 총을 쏴 우리 군이 죽을 때는 미국을 혼내주고 싶었다"며 소감을 말했다. 책 속에 '글자'로만 존재하던 신미양요가 아이들에게 살아 있는 느낌을 전해주는 우리의 역사로서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강화군은 광성보 전투재현을 역사의 의의를 기리는 장으로서뿐 아니라 관광상품으로 키울 예정이다. 류 부군수는 "강화는 곳곳이 문화유적이며 역사의 현장인데 그중 가장 중요한 곳이 광성보"라면서 "이를 재현하는 것은 강화를 찾는 많은 관광객들에게 강화의 참모습을 보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28년째 광성제 지내는 어재연 장군 증손 어윤원 옹
▲ 어윤원 옹. ⓒ 오마이뉴스 권우성
매년 음력 4월 24일이면 만사를 다 제끼고 강화를 찾는 이가 있다. 1871년 광성보 전투에서 우리 군을 이끌다 장렬히 전사한 어재연 장군의 증손 어윤원 옹이 바로 그다. 올해도 어김없이 여든 일곱의 몸을 이끌고 강화를 찾았다. 어재연 장군의 넋을 기리는 광성제를 지내기 위해서다.
어재연 장군과 그의 동생으로 백의종군한 어재순을 기리는 30여분의 광성제 봉행이 끝난 후 어윤원 옹과 얘기를 나눴다. 아흔이 다된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 굉장히 정정하십니다.
"다 선조의 음덕 덕분이에요."
- 해마다 광성제를 지내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세상이 많이 변해 전통제례를 지내자니 애로가 많습니다. 그래도 세상이 변하는 대로 따라가면서 이렇게 선조의 뜻을 기리는 제를 지내는 걸로 만족하고 있지요."
어윤원 옹은 제 중간중간에도 참여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몸가짐이나 제례 순서를 친히 챙길 만큼 열의를 보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엿볼 수 있는 경건한 눈빛이 기억에 남았다.
- 어떤 마음으로 제를 지내시는지요. 어재연 장군의 증손이시라구요.
"나는 이렇게 몸이 작고 하지만, 그 어른을 그림 그리듯 묘사해 놓은 시에 의하면 몸이 지척이었어요. 그런 내 조상의 은덕으로 내가 이렇게 잘 살고 있으니 나는 후손으로서 선조 잘 모시는 길이 보답할 길이지요. 그저 선조님이 너그럽게 자손 잘 돌보아주셔서 감사하다는 뜻으로 열심히 받들고 있습니다."
- 젊은이들은 광성제나 광성보 전투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부탁할 말씀은 없으십니까.
"아무리 지금 시대에 미풍양속이 변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근본정신은 잃지 말고 지켜갔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