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25일 월요일 주님 성탄 대축일
제1독서 : 이사 52,7-10
제2독서 : 히브 1,1-6
복 음 : 요한 1,1-18
1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2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15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16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18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강생하신 아기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기쁘고 행복한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라디오를 듣다가 고등학생 때 즐겨듣던 팝송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당시에 이 노래가 너무 좋아서 카세트테이프 이 한 곡만 담아서
일주일 내내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계속 들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명곡이라고 생각했고, 특히 이 노래의 기타 전주가 너무 멋져서
잘 치지 못하는 기타 실력이지만 계속 연습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사랑했고 좋아했던 노래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할까요?
지금도 이 노래가 흘러나오면 기분이 좋아지지만, 예전만큼은 아닙니다.
이렇게 세상 모든 것은 유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의 젊음과 열정을 나이가 찬 지금에도 가지고 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과 이 세상 안에서 영원히 살 수 있을까요?
그토록 좋아했던 물건을 지금도 간직하면서 애지중지하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것을 다 떠나서 자기 몸만 보더라도 유한성이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고, 영원히 필요한 것처럼 착각하고,
영원히 간직할 것처럼 어리석은 말과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영원한 것은 오직 주님의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한 믿음을 키워나가야 하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하느님의 뜻인 사랑 실천에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유한성을 가진 이 세상에 영원하신 분께서 오셨습니다.
단순히 2,000년 전에 단 한 번 함께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와 늘 함께 계시려고 새롭게 태어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라고 하십니다.
유한한 세상에 영원함을 불어넣어 주신 것입니다.
그것도 순간의 사랑이 아닌, 무한한 사랑을 담아서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이 기쁨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안에서 어렵고 힘들다면서 한숨짓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영원한 기쁨을 주시기 위해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 사랑에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유한한 것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합니다.
대신 무한한 하느님 사랑에 모든 것을 걸고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지혜로운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시기에,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밤 미사-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찬바람 부는 한겨울에>
- 크리스티나 로제티, 박정은 옮김 -
"찬 바람 부는 한겨울에, 성에 낀 바람은 탄식이 되고
대지는 철갑처럼 단단하고, 물은 돌덩이 같은데,
눈은 내려, 눈 위에 또 눈, 눈 위에 또 눈,
찬 바람 부는 겨울, 오래 전에.
우리의 하느님, 하늘은 그분을 잡지 못하고, 땅도 더는 버틸 수 없어
하늘과 땅은 도망쳐 버리지, 그분이 다시 오실 때는,
찬 바람 부는 한겨울에, 마구간이면, 충분했어,
만능의 주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는.
천사들이 경배하는 그분께는,
넉넉한 젖과 포근한 목초면 충분하고,
천사들이 무릎을 꿇는 그분께는,
사랑스러운 소와 당나귀, 그리고 낙타면 충분하지.
천사들과 대천사들이 거기에 모여서
날갯짓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의 어머니만은 순결한 기쁨속에서
입맞춤으로 사랑하는 이를 경배했지.
가난한 난 그분께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
내가 목동이라면, 양을 가져다드릴 텐데
내가 동방박사 중 한 명이면, 나의 몫을 할 텐데
하지만, 내가 그분께 드릴 수 있는 것: 나의 마음을 드리지."
그러네요.
저도, 이 추운 외진 양주골에 찾아오신 아기 예수님께 드릴 것이라고는
‘고작 저의 이 작은 마음’ 뿐이네요.
이 시는 영국의 시인 크리스티나 로제티(1830-1894년)의 작품으로,
영국 교회에서 널리 불리는 성탄 성가의 가사이기도 하답니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가 양떼를 지키는 목자에게 나타나 말하였습니다.
곧 쉬지 못하고 집 밖으로 나와 야근하는 노동자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이는 “구세주 그리스도 여기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암울한 이 세상에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평화를 주시러 오셨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오늘 제1독서에서 예언자 이사야의 약속이 실현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이사 9,5)
그러니 다른 표징은 필요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단지 ‘구유에 누운 아기’를 보라고 초대합니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우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2)
천사들은 목자들이 ‘구유’에서, 곧 마구간의 거주자인 짐승의 밥그릇,
‘여물통’에서 아기를 보게 되리라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교부들은 이사야서(1,3)를 읽으면서 베들레헴 ‘구유 곁’에는 ‘소’와 ‘나귀’가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울러 그 짐승들은 ‘유다인’과 ‘이방인’의 상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곧 ‘아기’가 되신 하느님을 필요로 하는 ‘온 인류’를 암시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부들은 짐승의 ‘여물통’이 ‘그리스도 자신’이고,
우리 마음의 참된 양식인 ‘빵이 놓인 제대’를 상징한다고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제대에서 당신 자신을 얼마나 ‘작게’ 하시는지,
우리는 다시 한번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보잘것없는 ‘빵 한 조각(성체)’의 모습으로 ‘작게’ 하신
당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표징입니다.
곧 우리를 위해 ‘작게 되신 아기’, 우리에게 ‘선사된 아기’가 그 표징입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작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분이 우리에게 오시는 방식이요,
우리를 사랑하는 방식이요, 우리를 다스리는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드러나게 권위를 띠고 오지 않으십니다.
그토록 전능하신 분이 ‘무능하기 짝이 없는 아기’로,
이길 자 없는 강력하신 분이 ‘연약하고 나약한 아기’로,
말씀이신 분이 ‘말 못 하는 아기 벙어리’로 오십니다.
그야말로 당신은 ‘무방비 상태’로, 오히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기’로 오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권능으로 사로잡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위대함으로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게 하지도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분은 ‘우리에게 사랑을 간청’하십니다.
그래서 ‘아기’가 되십니다.
‘사랑 외에 어떤 것도 바라지 않으신 까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통해’ 그분의 생각과 뜻에 들어가는 법을 배워가고,
그분과 함께 사랑하며 사랑의 본질인 ‘겸손’을 익혀갑니다.
그토록 하느님께서는 ‘작게’ 되시어, 우리가 당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성탄'은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아기'로 내어주신
하느님을 본받기 위한 축제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를 위하여, 양주골 우묵한 골짜기 여기 우고리에,
“구원자 아기 예수 탄생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십니다.”
다시 한번 아기 예수님의 축복이 가득한 기쁨 성탄 맞으시길 빕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오늘 밤, 우리의 아기! 구세주 나셨습니다.
왕방울의 소의 눈이 기쁨에 경악하고,
어린양의 떨리는 탄성에 잠들었던 만물이 깨어납니다.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첫울음 속에서,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는 백인대장의 고백을 듣습니다.
포대에 싸여 있듯, 뭇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다가
눕지도 않은 채 십자가에 못 박혀 세워질 연약한 아기,
내가 휘두른 채찍에 온몸이 부서질,
그러면서도 생명을 주시고자 저를 부르신 이여!
당신을 품에 안게 하소서.
안은 당신 가슴에 머리를 묻고 새로 나게 하소서!
“목마르다”라고 외치는 당신 음성을 듣게 하소서.
제 생명을 주신 이여!
당신은 남북이 철조망으로 가로막힌 우리의 마음속 투박한 담벽이 세워진 이곳에
‘평화의 왕’으로 오십니다.
여기, 다윗의 조그마한 고을 한반도, 가로막은 울타리를 걷어내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우리의 아성을 부수소서!
오, 임마누엘, 저희와 함께 계신 아기 예수여!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주님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가장 아름답게 드러난 모습이
바로 오늘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지만 가장 완벽하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 악,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셔서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성탄’으로 사행시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예’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수’ 수고하고 짐 진 자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성’ 성모님의 순명으로 오셨습니다.
‘탄’ 탄생하신 예수님께 경배드립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도 ‘예수 성탄’을 축하드리면서 저처럼 축하의 말을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성탄절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캐럴’이 있습니다.
‘징글벨, 루돌프 사슴 코, 울면 안 돼, 거룩한 밤 고요한 밤, 경사롭다.’와 같은 노래가 있습니다.
저도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으면서 책을 읽었습니다.
‘구유와 트리’가 있습니다. 신학생 때 저는 매년 구유와 트리를 만들었습니다.
1년 동안 잘 보관했던 구유 세트를 꺼내서 장식했습니다.
청계천 시장에 가서 ‘은하수 전구’를 사왔습니다.
별도 달고, 구슬도 달고, 빤짝이도 걸고, 전구를 연결하였습니다.
저와 동창 신학생이 기본 틀을 만들면 수녀님이 예쁘게 다듬었습니다.
‘성탄카드’가 있습니다.
성당에서 주일학교 학생들이 같이 만들어서 팔기도 했고, 사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카드를 쓸 일이 많지 않습니다. 주로 카톡으로 보내기 때문입니다.
‘구세군 자선냄비’도 있습니다.
제가 살던 명동 거리에는 구세군 봉사자들이 종을 울리면서
지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탄을 축하하는 진정한 의미는
가난한 이, 헐벗은 이, 병든 이, 외로운 이를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드리며,
우리 주변의 가난한 이, 헐벗은 이, 병든 이, 외로운 이를 생각하고,
그분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성탄절에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습니다.
제가 학생 때는 성당에서 ‘성탄 예술제’를 했습니다.
초등부 학생들은 율동과 노래를 준비했고,
중고등부 학생들은 멋진 노래와 춤을 준비했습니다.
저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연극’을 준비했습니다.
연극의 제목은 ‘넷째 왕의 전설’이었습니다.
성탄절의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연극입니다.
40년이 훌쩍 지났지만 지금도 생생하게 생각납니다. 연극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동방에서 별을 보고 예수님의 탄생을 경배하기 위해서 출발한 박사들은
원래 4명이었습니다. ‘멜키올, 발타살, 가스팔. 조재형’입니다.
멜키올은 황금, 발타살은 유향, 가스팔은 몰약, 조재형은 다이아몬드를 준비했습니다.
조재형은 길을 가다가 굶주린 엄마와 아이를 만났습니다.
불쌍한 마음에 다이아몬드 하나를 주었습니다.
이번에는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는 남자를 만났습니다.
여관으로 데려갔고, 여관 주인에게 다이아몬드 하나를 주고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베들레헴 근처에 왔을 때입니다. 돈이 없어서 팔려 가는 노예를 만났습니다.
불쌍한 마음에 마지막 남은 다이아몬드를 주고 노예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예수님께 드릴 선물을 모두 써버린 조재형은 결국 경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30년이 지났고, 노인이 된 조재형은
예루살렘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드렸습니다.
30년 전에 경배를 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조재형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30년 전에 이미 너에게 선물을 받았단다.
굶주린 엄마와 아이에게 준 것이, 강도당한 남자에게 준 것이,
팔려 가던 노예에게 준 것이 바로 나에게 준 것이란다.’
조재형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넷째 왕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천국으로 갔습니다.”
연극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뿌듯해지는 기억이 있습니다.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길을 가는데 한 남자가 쓰러져있었습니다.
술이 취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집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천호동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저는 봉천동에 살았습니다.
동창 신학생과 함께 그 남자를 택시에 태워서 천호동 집까지 모셔다드렸습니다.
집에는 남자의 아내와 딸이 있었습니다.
남자의 아내는 거듭 감사의 인사를 하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하얀 눈이 내렸습니다.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제가 이렇게 사제로 32년을 지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그때 했던 작은 선행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성탄을 맞이하여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변화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이기심이나 소유욕에 지배되지 않고
고통 받는 이웃을 외면하지 않으며 어떠한 생명도 소외되거나 경시되지 않는
건강하고 바람직한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고 사랑하며, 섬기고 용서하는 삶을 살 때
바로 그곳에서 아기 예수님께서 새롭게 탄생할 것입니다.
뱀의 본성을 거스를 두 노를 젓고 있는가?
전삼용 요셉 신부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말씀은 누군가의 생각을 다른 생각과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중개자란 뜻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말은 ‘표현’되었다는 뜻입니다.
표현되지 않는 말은 생각일 뿐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표현될 때는 생각과 분리되어 소리로 진동합니다.
이는 큰 희생입니다. 말을 하지 않는 일은 쉽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와 소통하기 위해 말을 하려면 생각을 밖으로 내보내야 합니다.
이때 상당히 위험합니다.
말씀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무시당할 때는 그 말을 한 사람도 무시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희생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기 전에 ‘율법’이 있었습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습니다.”
율법은 목적지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러나 원죄의 영향으로 우리의 본성은 사랑과 반대로
흐르는 강물 위에 떠있는 배를 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아는 것만으로는 율법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바라보기만 할 뿐 뒤로 후퇴할 뿐입니다.
그럼, 무엇이 필요할까요? 물결을 거슬러 올라갈 노가 필요합니다.
한 개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두 개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은총과 진리입니다.
은총은 보는 것이고 진리는 듣는 것입니다.
말씀을 보고 들음으로써 우리는 동물의 본성을 거슬러 창조자의 본성으로 나아갑니다.
말씀을 들음은 말씀의 전례와 같고 말씀을 봄은 성찬의 전례와 같습니다.
윌마 루돌프의 삶은 역경을 극복한 감동적인 이야기로
어머니 블랑쉬 루돌프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1940년 6월 23일 테네시주 세인트 베들레헴에서 조산아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22남매 중 스무 번째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윌마는 4살 때 근육 약화를 일으키고
심한 경우 마비를 일으키는 질병인 소아마비에 걸렸습니다.
이 질병으로 인해 그녀의 왼쪽 다리와 발은 약해지고 기형이 되었습니다.
의사들은 그녀가 다시는 걷지 못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머니 블랑쉬는 인종적, 경제적 요인으로 인해
의료 서비스가 제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간 치료를 위해
윌마를 업고 50마일 떨어진 아프리카계 미국인 병원으로 데려갔습니다.
집에서 그녀는 또한 윌마의 약한 다리를 하루에 네 번 마사지하는 등
물리 치료 기술을 배우고 적용했습니다.
그리고 윌마에게 신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었습니다.
12세가 되자 그녀는 다리 보호대를 벗어났고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농구를 하고 육상 경기를 하며 빠른 속도로 주목받았습니다.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100, 200, 400미터 육상 경기에서 3개의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그녀는 단일 올림피아드에서 이 위업을 달성한 최초의 미국 여성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율법이라는 사랑으로 가려면 반드시 필요한 게 있습니다. ‘감사’입니다.
그런데 그 감사는 반드시 은총과 진리를 요구합니다.
블랑쉬는 딸 윌마를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 이것이 은총입니다.
그리고 말로도 믿음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윌마는 이 은총과 진리를 흘려버리지 않고 ‘감사’의 감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어머니가 없었다면 자신은 지금도 장애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불만이라는 지옥에서 빠져나올
두 노가 되어주기 위해 말씀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는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 노를 잡고 젓기만 하면 완전한 감사와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매일 단 5분씩이라도 양쪽 노를 저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계속 후퇴합니다.
은총과 진리로 감사를 만들어야 하는 것은 우리 숙제입니다. 이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우리의 두 노가 되어주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의 탄생을
우리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한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 탄생하신 주님을 찬미할 수 있습니다.
저희 성당에서 구유를 감사 일기로 꾸민 이유가 이것입니다.
사람이 되신 말씀과 볼 수 있는 영광
조욱현 토마스 신부
생명의 말씀이 인간이 되셨다. 잃어버린 생명을 다시 찾아주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은 바로 이분을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알아듣게 되었으며 참 주님으로 고백했다.
그분이야말로 생명을 가지신 분이며, 생명을 주시며,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으로 고백했다.
잠깐 밤 미사에서도 언급했지만, 부활사건을 통해 그리스도의 모든 삶을 보기 시작했으며,
이 성탄도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그 참된 의미를 보기 때문에,
지금 탄생하신 그분은 힘없는 한 아기의 모습이 아니라,
진정 주님이시며, 세상을 구원하시는 구세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하느님이신 그 말씀이, 그 아들이 우리 인간의 모습을 취하셔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신 것도 바로 당신의 생명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어 당신의 생명에 함께 하려 하심이다.
즉 우리를 당신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한 모습임을 알아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그분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올바로 가져야 한다.
그분은 바로 나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나를 구원해 주시는 그리스도
즉 하느님의 아들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큰 축일이기 때문에 참여하는 미사가 아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며, 이제 우리가 말씀으로 변화되어 가야 한다.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리라 믿으셨던 마리아,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고 믿은 목동들의 모습을 본다.
그 말씀이 이제 사람이 되셨고, 다시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 세상에 나타나시길 원하신다.
그래서 제1독서에서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이사 52,7)하는 말씀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지며, 그 말씀이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 우리를 통해 계속해서 태어나시게 해야 한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가진 우리의 모습이 그분의 모습과 같이 될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으며,
우리를 보는 이들이 “그 안에 생명을 가진 자”라고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때가 다 되었을 때, 당신 외아들을 통하여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지금은 당신 아들의 모습을 닮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말씀하고 계시다.
그 말씀이 구체적으로 태어나게 하시는 사업을
즉 구원사업을 바로 우리 자신을 통해서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이 말씀을 잉태하며, 낳아주기 위해서는
고통의 신비인 십자가의 신비를 체험하지 못하면 어렵게 된다.
자신의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체험이 바로 말씀을 낳아주는
마리아의 모습, 그리스도의 모습이 될 것이다. 여기서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을 이겨보려는 끝없는 노력이다. 우리에게 오신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께 진정한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도우심을 청하자.
이 용기로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 되도록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삶이
이 성탄의 신비를 언제나 나타낼 수 있도록 기도하자.
레오 교황님의 말씀을 듣자.
“그리스도인들이여, 여러분의 품위를 인식하고,
이제 하느님의 본성을 함께 나누어 받게 된 자들로서 부패한 행실로 말미암아
이전의 비참한 상태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머리와 어떤 몸의 지체인지 생각하고 어둠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나라와 광명으로 옮겨졌음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성세성사를 통하여 성령의 궁전이 되었습니다.
다시는 마귀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여러분의 더러운 행실로써
그 성전에 거하시는 고귀한 손님을 멀리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피의 비싼 값을 치르고 여러분의 몸을 사셨습니다.”
이 미사를 통하여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봉헌하며,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로 사는 삶을 살도록 우리의 결심을 봉헌하자.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제물은 번제물이 아니라 자선이라고 했다.
진정한 사랑의 삶이며, 사랑의 제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감사의 생활이며, 말씀을 낳아주는 삶이며 성탄의 삶이다.
봉헌 예절을 통해 이러한 결심을 함께 봉헌하도록 하며 주님께 도우심을 구하자.
“여러분 가정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우리에게
구세주로 오신 주님의 은총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성탄절
송영진 모세 신부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5.9-14)
하느님의 구원 사업의 관점에서 보면, 성경은 인간들이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야기로 시작해서(창세 3,23),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그곳으로 되돌아가는 이야기로 끝나는 책입니다(묵시 22,3).
<창세기 3장을 보면,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라는 말씀이 있는데(창세 3,17),
묵시록 22장을 보면, “그곳에는 더 이상 하느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묵시 22,3).
이것은 ‘죄’로 시작해서 ‘해방’으로 끝나는 구원 사업의 처음과 끝을 나타냅니다.>
요한복음의 머리글은, 그 과정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증언이고,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요약한 증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창세기와 요한복음이 똑같이 ‘한처음에’ 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인 것입니다.
<‘한 처음’이라는 말은, 시간이라는 것이 생기기 전의 영원함을,
즉 창조 이전의 영원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의 첫 등장을 나타내는 말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인데(창세 1,3),
요한복음서 저자는 그 ‘말씀’이 곧 예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말씀’과 ‘하느님’은 ‘한 하느님’으로서 한 처음부터 함께 계셨고,
하느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이 요한복음서 저자의 고백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분, 즉 예수님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방황하고 있는 인간들을
그곳으로 다시 데리고 들어가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사람들에게로 오신 날”이고,
종말과 재림의 날은, “인간들을 에덴동산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일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그런데 ‘죄’ 라는 것은 한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창조 후에 생긴 것입니다.
<어떻게 생긴 것인지는 ‘신비’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로마 5,17)
예수님은 죄 때문에 망가진 세상을
죄가 생기기 전의 상태로 복구하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어떤 사람을 고쳐 주셨을 때,
사람들이 놀라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 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 7,37)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라는 말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저분이 모든 것을 좋게 하셨다.”이고, 이 말은 창세기 1장에 반복해서 나오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라는 말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창조 때의 ‘좋은 상태’로 회복시키시는 분,
그래서 예수님은 ‘새로운 창조자’이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어떤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리셨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라고 말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루카 7,16)
이 말은, 우리 입장에서는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고백으로 삼을 수 있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고,
“그곳에서 영원한 행복과 평화와 기쁨을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힘으로는(나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고,
하느님의 힘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에게로’ 오셨습니다.
만일에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수련을 하고 수행을 해서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면,
메시아 강생은 필요 없는 일이 되어버리고, 예수님께서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수련과 수행을 통해서 어떤 경지에 도달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구원도 아니고, 영원한 생명도 아닙니다.>
죄에서 해방되는 것도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
예수님께서 도와주셔야만 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죄를 짓고 나서 자기 마음대로 용서와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24-25)라고 고백합니다.
성탄절은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려고 오신 것을 감사드리는 날이고,
‘참 해방과 구원과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예수님의 뒤를
더욱 충실하게 따르겠다고 다짐하는 날입니다.
서공석 요한 신부
성탄 축일은 예수님의 기원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날입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된 분이고,
그분이 출생하자 동방에서 세 박사가 베들레헴까지 와서 참배하였다고 말합니다.
루카 복음서는 동방에서 왔다는 세 박사의 이야기는 모르고,
우리가 밤 미사에서 들은 대로 아우구스토 황제의 호구 조사령이 있었고,
요셉이 만삭의 아내 마리아를 데리고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갔다가
외양간에서 예수를 출산하여 구유에 눕혔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 들은 요한복음서는 이런 출생의 관련된 이야기들을 모두 생략하고,
예수님의 기원이 하느님 안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듣고 배워서 실천해야 하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복음서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라는 생명으로 나타났고,
그분은 우리가 볼 수 없는 하느님을 보여주는 빛과 같은 분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복음은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고도 말합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오늘 복음의 결론입니다. 모세로부터 시작된 율법의 시대는 지나갔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알게 된 은총과 진리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선포입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우리는 은총과 진리를 배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은총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베푸심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모세가 준 율법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는 하느님이 쉽게 용서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불행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이 베풀고 용서하시는 분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복음이 지적하듯이 어둠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생각을 옳다고 믿으며 어둠 안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 어둠이 결국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종교 기득권자들이 쉽게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용서하신다는 것이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요한 20,22 참조)
그러나 교회는 13세기에 발생한 개별 고해성사를 고집하면서
그것을 통하지 않으면 죄의 용서가 없는 듯이 처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용서하시는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가르쳤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합니다.‘
인류 역사는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한 손에 쥐고 있는 막강한 하느님을 상상하였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의 권력을 하느님이 주셨다고 생각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종교 집단의 기득권자들은 그들의 권한이 하느님의 것이라고 고집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뜻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하면서
자기들에게 순종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횡포에 시달리고 짓밟혔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타이르셨습니다.
당신도 섬기는 사람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둠은 그분에 대해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성탄은 하느님이 기득권자들의 횡포 안에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작고 연약한 하나의 생명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어느 성가가 노래하듯이
예수님은 ’승리하고 다스리고 명령하기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이, 굶주리는 이, 우는 이들도 행복하라고 선언하면서 오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그분 생명이 보여주신 삶을 배웁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에게 죄의 용서를 선포하고, 고치고 살리면서 축복하였습니다.
그 생명은 절망에 우는 이들을 살렸습니다.
그 생명은 하느님의 생명을 충실히 살다가 이 세상 권력자들의 거부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둠을 더 좋아합니다.
’빛이 어둠 속에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오늘 복음은 말했습니다.
이웃을 돌보기보다는 우리 자신이 더 많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우리들 입니다.
이웃이 잘못하면 잘못한 그만큼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우리들 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용서는 우리의 빛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배풀고 용서하며 생명을 살리는 일은 우리의 관심 밖에 있습니다.
우리는 가져야 할 것이 너무 많고,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우리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의 빛을 추방해 버렸습니다.
우리 자신의 일에 골몰한 나머지 말씀이 우리의 삶을 어지럽히지 못하게
말씀을 성당 건물 안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베풀고 용서하는 일은 힘들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였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빛을 외면하고 어둠을 더 좋아하는 백성입니다.
오늘 성탄은 그 말씀이 우리 안에 강생하여 새롭게 자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이십니다.
우리가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은혜로움의 진리로 충만하시다는 말입니다.
진리는 우리의 심오한 이론 안에 있지 않습니다.
진리는 일상생활 안에, 용서하고 살리는 은혜로운 우리의 실천안에 있습니다.
진리가 있는 곳에, 진리의 원천이신 하느님이 계십니다.
강하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은 모습으로,
구유에 누운 하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우리 안에서 자라야 하는 생명으로 구유에 계십니다.
진리는 우리의 실천안에 자라야 하는 생명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의 삶이 그 진리를 실천해야 합니다.
용서하고 고치며 살리는 진리가 우리의 삶 안에 나타나고 자라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만 생각하는 어둠 안에 살고 있지만, 그 어둠을 밝히는 빛이 오늘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이제 어두운 관행을 벗어나 진리의 빛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을 영접하여 우리 안에 진리를 발생시켜야 합니다.
성탄이 우리에게 기쁨의 축일인 것은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은 없고‘
예수님이 ’하느님을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성서 욥書의 말을 빌리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집착하고 욕심내는 것은
모두 ’꽃처럼 피어났다가는 스러지고, 그림자처럼 덧없이 지나가는‘(14,1-2) 것들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것들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베들레헴 외양간의 구유에 누운 어린 예수 안에 당신 스스로를 나타내셨습니다.
우리 안에도 하느님의 은총과 진리가 충만할 것을 호소하면서
예수님은 구유에 오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을 것‘을 기대하면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이승화 시몬 신부
한 처음부터
하느님은 계셨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느님은 한 분으로 함께 하셨고
역사 안에서 우리를 다양하게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런 하느님을 보며
우리는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누구는 성부 하느님과 성자 하느님을 다른 격으로 보았고
누구는 성령 하느님은 성부와 성자에게 따라온다고 보았습니다.
또 누구는 성자 하느님을 사람이었다가 하느님이 되신 분으로 보았고
또 누구는 성자 하느님은 하느님이시기에 고통과 죽음을 겪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모두 하느님의 신비를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나오는
잘못된 생각들이었습니다.
히브리서에서 나오듯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이십니다.
성부 하느님께서는 맏아드님을 데리고 들어가실 때
천사들에게 경배하라고 할 뿐
아들을 낳았다거나 아들이 되리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부족한 인간의 눈으로 보았을 때 그렇게 보일 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언제나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처음부터 함께 계신 성자 하느님께서
어둠 속을 헤매고 있던 우리에게 다가오셨고
당신 백성을 빛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스스로 인간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나약함을 모두 받아들이시고
우리가 나아갈 길을 직접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모두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신비로운 축제를 맞이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어둠 속에 머물고자 하는 마음을 떨쳐버리고
하느님을 인간의 힘으로 온전히 이해하려는 유혹을 멀리하며
우리에게 다가오신 그분의 사랑에 집중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역시 요한처럼 빛을 증언하며
하느님의 충만함을 통해 은총에 은총을 더하는
그런 한 주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 ‘시몬 신부의 신앙 이야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