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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영적(靈的)성숙(成熟)의 달☜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4:15)
창50:1-26절) 위대한 족장시대
우리는 때때로 어떤 사람이 새로운 도구(道具)를 발명하거나, 혹은 새로운 리더(leader)의 등장에 따라서 그 시대가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비행기의 발명(發明)이라든지, 스마트 폰(smart phone)의 발명(發明)은 세계를 공간적(空間的)으로나, 정신적(精神的)으로 가깝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처칠이나, 루즈벨트 등 위대한 정치인(政治人)들의 등장은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신앙적(信仰的)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 여호수아, 다윗 같은 위대한 인물의 등장은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게 합니다.
요즘 코로나 재앙시대 우리 주위 나라들을 보면, 무엇인가 엄청나게 변하고 있고, 시대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인가 급격하게 변하고 있기는 한데,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변하는지, 몰라서 변화의 기회를 놓쳐버릴 때가 많습니다.
주위의 환경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을 때, 우리도 무엇인가 변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너무나도 과거에 집착(執着)하려고 하면, 변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상호 불통은 금물)
예를 들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와서 광야로 갔을 때, 한번 크게 변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의 생활에 집착(執着)하는 바람에 좋은 기회를 놓치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란에 있을 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받고, 그 즉시 떠나서 가나안으로 오는 바람에 많은 고생을 했지만, 하나님의 복(福)을 독점적(獨占的)으로 상속하는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노아는 어느 날 하나님으로부터 온 세상을 홍수(洪水)로 멸망시키겠다는 말씀을 듣고, 즉시 자신의 삶 전체를 큰 배(船)를 짓는데, 헌신함으로 결국 대 홍수 때, 인류와 생물들의 씨를 남기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새로운 기회를 주시고 계신데, 우리가 너무나도 미련해서 자꾸만 기존에 가지고 있는 생각에 집착(執着)하는 바람에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드디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야곱이 죽고,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장례(葬禮)를 치르게 됩니다. 그런데 요셉이 아무리 애굽의 총리(總理)이고, 실권(失權)이 있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장례(葬禮)를 치르는 문제는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요셉에게 애굽식으로 장례(葬禮)를 치르지 말고,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했던 것처럼 가나안 땅에 있는 그 묘지(墓地)에 자기를 장사(葬事)지내 달라고 유언하고, 맹세(盟誓)까지 시켰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입장에서는 아버지를 애굽식으로 장례(葬禮)치르면, 간단할 수 있지만, 아버지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約束)을 가진 자들이므로 세상 사람들처럼 장례(葬禮)를 치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죽고, 장례(葬禮)치르는 것을 통해서 지금까지의 위대한 족장(族長)의 시대는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서 남보다 조금 더 잘 살고, 조금 더 좋은 집(아파트)에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위대한 약속(約束)이 있고, 가야할 천국(天國)이 있습니다. 찬송가 480장 *천국에서 만나보자*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잠시 머무르는 휴게소(休憩所)이지, 우리의 영원한 목적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휴게소(休憩所)에 머무르지 않고, 정해진 그 목적지를 향해서 순례자(巡禮者)의 길을 떠나야 하는 여행객(旅行客)들입니다.
I.야곱의 죽음
야곱은 자기 열두 아들들에게 위대한 유산(遺産)으로 남기고 죽습니다. 야곱은 양(羊)이나, 소(牛)나, 금(金)이나, 은(銀)이나, 양(羊)치는 기술이 아니라, 자기가 한평생 연구(硏究)하면서 깨달았던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과 자기가 체험했던 하나님의 축복(祝福)을 자손들에게 유언(遺言)으로 물려주고 죽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그리고 목회자(牧會者)가 교인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복(福)은 자신이 평생 모은 재산과 무릎 꿀어 기도하고. 연구하고. 붙들고. 체험했던 하나님의 진리의 복음을 물려주는 것이요. 각 셀(cell)공동체 정착과 정예부태로 세계 복음화를 위한 동탄에 교갱원 행정종합복부를 설립하여 다음세대에게 물려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는 두 개의 세계(世界)가 있는데, 사람들의 눈에는 하나의 세계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즉 세상(世上) 사람들의 눈에는 분주한 이 세상만 보입니다. 그래서 하루살이처럼 열심히 뜁니다. 하루살이는 수명(壽命)이 하루뿐입니다.이것이 육에 속한, 흙의 인생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또 다른 영안(靈眼)으로 보면, 이 세상 위에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가 있고, 수많은 천사(天使)들이 있으며,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祝福)의 세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차지하고, 많은 것을 누리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현재 이 세상에 있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골3:2절)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세상은 믿음의 연기(演技)를 하는 공연장(公演場)과 같습니다. 우리가 죽는 것은 믿음의 연기(演技)를 끝내고, 무대(舞臺)에서 내려오는 것이며, 영원한 본향(本鄕)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드디어 야곱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믿음의 연주(演奏)를 마치고, 하나님께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자식들에게 자기를 가나안 땅에 있는 조상의 묘실(墓室)에 장사해 달라고 유언하고 죽습니다.
49:29-33절)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
이것은 마치 성악가(聲樂家)가 마지막으로 최고로 위대한 노래를 많은 청중들 앞에서 부르고, 무대(舞臺)를 내려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노래는 한번 부르면, 그 감동(感動)으로 끝나지만,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은 믿고, 받아들이면, 바로 그 즉시 능력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야곱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묻힌 그 가나안 땅에 있는 막벨라 동굴에 자기를 묻어 달라고 유언(遺言)을 남기고 죽습니다. 그때 야곱은 정말 병(病)없이 오래 오래 살면서 기운(起運)이 다 빠져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식들에게 자기를 이. 애굽에 장례(葬禮)지내지 말고, 꼭 조상이 묻힌 가나안 땅, 그 굴(窟)에 장사(葬事)를 지내달라고 했습니다. 만일 야곱이 애굽에 묻힌다면, 거의 왕(王)에 버금가는 거대한 피라미드(pyramid)에 묻힐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굳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묻히고, 아버지 야곱이 묻힌 그 초라한 가나안의 동굴(洞窟)에 묻히기를 원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두 가지 때문입니다.
①모두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붙들고 죽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냥 죽으니까 죽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죽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붙들고 살았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붙들고 죽는데, 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죽음도 이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사망(死亡)이 없습니다. 우리는 죽는 순간 곧바로 영생(永生)으로 빨려 들어가기 때문에 죽는 순간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②하나님의 백성들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붙들 때, 그 자손들에게 너무나도 귀한 부흥(復興)의 축복(祝福)이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최고의 복(福)은 하나님의 부흥(復興)이 그의 백성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때 또 하나님은 모든 좋은 복(福)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모두 다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곧바로 복(福)을 받는 비결(秘決)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똑똑하고, 잘나서 세상에 돈 벌고, 성공(成功)했다고, 진짜 복(福)받은 것이 아닙니다.
먼저 믿는 분들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붙들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부흥(復興)의 복(福)을 주시는데, 그때 놀라운 기적(奇蹟)과 축복(祝福)을 다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죽은 후에라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붙들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Ⅱ.새로운 시대의 변화
역사적(歷史的)으로 어떤 큰 전환점(轉換點)이 생겼을 때, 담대하게 그것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변(變)했던 민족이나, 나라는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비겁하게 자기 이익(利益)이나 챙기고, 고집이나, 부리던 나라나, 민족들은 망(亡)하고 말았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죽음이 단순히 야곱 개인(個人)의 죽음이 아니라, 위대한 족장(族長)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위대한 족장(族長)시대의 특징은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 아무 것도 보장된 것이 없는 이방(異邦) 땅에서 오직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 하나 붙들고, 위대한 믿음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보통 믿음이라고 하면, 예배(禮拜)의식이나, 예배 행위(行爲)에 국한(局限)해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의 신앙은 신앙이 그들의 삶 자체였습니다.
물론 그들에게도 예배(禮拜)행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에는 예배 의식(儀式)과 생활(生活)에 구분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보장된 것이 없는 낯선 지역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 하나만 붙잡고, 위대한 승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 점에서 우리도 비슷한 경험(經驗)을 하게 됩니다. 때때로 이 세상 가운데서 믿음만 가지고는 도저히 생존(生存)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위대한 삶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족장(族長)들은 때때로 가나안 땅에서 흉년(凶年)을 만나기도 했고, 전쟁(戰爭)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기도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살던 소돔과 고모라가 하루아침에 하나님의 심판(審判)으로 불바다로 변(變)하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이삭은 어렸을 때, 하나님이 주신 시험(試驗)으로 모리아 땅에서 제물(祭物)로 바쳐질 뻔했다가 살아난 체험(體驗)도 있습니다.
야곱은 가나안 땅에 돌아오기 위하여 목숨을 건 탈출(脫出)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조상들은 결코 이 세상의 조류(潮流)에 따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놀라운 위대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족장(族長)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족장(族長)들에게 믿음은 그들의 삶 그 자체(自體)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約束)의 말씀을 붙들고, 갈 수 있는 한계 상황까지 가서 거기서 믿음으로 승리(勝利)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복(福)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붙들고 갈 데까지 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는 갑자기 이 세상에서 이방인(異邦人)처럼 되어버립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생소해지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 던져지게 됩니다. 바로 아브라함이 살았던 상황이 이런 상황이었고, 이삭이 살았던 상황도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침으로‘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약속(約束)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삭은 그 모리아 산에서 바쳐짐으로 죽음을 이기는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형(兄) 에서를 피하여 도망치다가 들판에서 자는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고, 압복강가에서는 천사와 씨름해서 이기는 바람에‘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도대체 미래를 전혀 예측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이때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에 소망(所望)을 두는 것뿐입니다. 반대로 이 세상에 소망(所望)을 두었던 소돔 사람들은 망했고, 롯은 붙들려갔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족장(族長)중 그 누구도 가나안 땅을 차지하지 못했고, 모두 막벨라 동굴(洞窟)에 자기 몸을 장사 지냄으로 인생을 마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그의 소유(所有)로 주시겠다는 약속(約束)은 야곱의 때가 끝날 때까지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가나안 땅이 하나님의 복(福)의 실체(實體)가 아니라, 그림자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붙잡는 복(福)도 하나님의 복(福)의 실체(實體)가 아니고, 모두 다 그림자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한평생 영원히 자기가 가질 수 없는 그림자를 붙잡으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 세상에서 성공(成功)하는 것은 사람들의 인기(人氣)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위대한 믿음의 결단(決斷)이나 실천(實踐)입니다.
우리가 야곱의 인생을 보면, 이기적(利己的)인 것 같았고, 영웅적(英雄的)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많이 연구(硏究)했고, 그것을 체험(體驗)했으며, 또 자기 열두 아들 중 하나도 잃지 않고, 그 모두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여러 아들들 중에 이삭만 얻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사랑한 아들이었지만, 이스마엘은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이삭은 두 쌍둥이 아들 중에서 야곱만 얻었습니다. 에서는 세상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열두 명의 아들 모두를 인내(忍耐)로 얻어서 결국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로 만들었습니다.
물론 야곱의 아들들의 죄(罪)중에는 살인(殺人)이 있었고, 간음(姦淫)이 있었으며, 인신매매(人身賣買)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하나님의 은혜(恩惠)가 강(强)했기 때문에 야곱의 열두 아들은 모두 다시 하나님께 돌아와서 구약 이스라엘의 열두 기초(基礎)가 되었습니다.
Ⅲ.야곱의 장례식
야곱의 장례식(葬禮式)은 세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우선 첫 번째는 애굽의 방식이었습니다.
50:1-3절)요셉이 그의 아버지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 맞추고. 그 수종드는 의원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매. 의원이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사십 일이 걸렀으니. 향으로 처리하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여기서 몸을 향(香)으로 처리한다는 것은 시체(屍體)가 썩지 않도록 미라(mirra)를 만드는 작업을 의미합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운명(運命)하자 자기 전속 주치의(主治醫)에게 명하여 아버지 몸에 향료(香料)를 넣어서 장례(葬禮)를 하는데, 무려 40일이 소요되었고,
그리고 70일을 따로 애곡(哀哭)하는 기간으로 정해서 온 애굽 사람들이 이방인(異邦人)야곱의 죽음을 애도(哀悼)하게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본문에서 보는 야곱의 장례식(葬禮式)은 거의 애굽의 국부(國父)의 죽음에 준하는 수준입니다. 야곱의 장례식(葬禮式)이 이렇게 화려하고 거창한 것을 보면, 그동안 흉년(凶年)을 이겨내기 위하여 절약(節約)과 내핍(耐乏)을 강조하던, 요셉의 모습과는 잘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장례식(葬禮式)은 애굽에서는 무척 화려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요셉이 흉년(凶年)에서 그들을 살렸기 때문에 야곱의 장례식(葬禮式)을 거의 바로 왕의 장례식(葬禮式)에 준해서 거창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야곱의 장례식(葬禮式)을 화려하게 해서 위대한 족장(族長)시대의 영광을 보여주려고 하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한평생 청빈(淸貧)하게 사셨지만, 돌아가시기 전에 한 여인이 예수의 발에 비싼 향유(香油)를 부었을 때, 낭비(浪費)한다고 비난하는 제자들에게 ‘그 여인을 책망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 모든 인생을 살리는 위대한 죽음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무덤도 부자(富者)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葬事)가 되었고, 부활(復活)하셨을 때, 혼동(混同)없이 그 무덤을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죽음은 결코 비참(悲慘)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장례(葬禮)일행은 가나안 땅에 가서는 가나안의 방식으로 또 장례(葬禮)를 치렀습니다.
50:10절)그들이 요단 강 건너편 아닷 타작마당에 이르러 거기서 크게 울고 애통하며 요셉이 아버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애곡하였더니”
가나안의 장례(葬禮) 관습(慣習)은 타작마당에서 칠 일 동안 곡(哭)을 한다고 합니다. 지금도 시리아 사람들 사이에는 사람이 죽으면, 타작마당에서 칠 일 동안 애곡(哀哭)하는 풍습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요셉은 요단강을 건넌 후, 아닷 타작마당에서 칠 일 동안 애곡(哀哭)을 했습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에 와서 가나안 방식으로 한 번 더 장례(葬禮)를 치르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국제결혼(國際結婚)을 하는 경우, 우리나라에서 결혼식(結婚式)을 올린 후, 자기 나라에 가서 한 번 더 그 나라 방식으로 결혼식(結婚式)을 올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것을 보면, 야곱의 장례식(葬禮式)은 국제적(國際的)인 장례식(葬禮式)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야곱의 장례식(葬禮式)이 모든 나라에 평화(平和)를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그 당시 행진(行進)한 방향을 보면, 빠른 길이 아니라, 광야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요셉이 할 수 있는 대로 주위 나라에 피해(被害)를 주지 않기 위하여 광야 길을 우회(右回)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의 그 길과 같았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요셉이 아버지의 말씀대로 막벨라 동굴(洞窟)에 아버지를 장사(葬事)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장례(葬禮)를 치른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의 방식(方式)을 따라야합니다. 굳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해서 예수님 당시의 옷을 입고, 돌아다닐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사람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Ⅳ.새로운 시대의 준비
요셉은 바로에게 아버지를 장사 지낸 후, 돌아오겠다고 약속(約束)했고, 또 실제로 장사 지낸 후,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을까? 칼빈은 요셉이 애굽에 벌여놓은 일이 많았기 때문에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해석(解釋)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때는 그들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갈 때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위대한 족장(族長)들의 시대가 끝난 것이고, 이제는 새로운 시대를 준비해야 할 때였습니다.
족장(族長)들은 자신의 갈 길을 다 달려갔고, 그들의 싸움을 다 싸웠습니다. 요셉은 이제 새로운 믿음의 시대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요셉과 그 형제들이 미래(未來)를 준비하는데, 큰 걸림돌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요셉이 혹 자기들에게 복수(復讐)하지 않을까? 하는 의심(疑心)이고, 두려움이었습니다. 형들에게는 과거의 죄(罪)가 아직도 청산이 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50:15절)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이 당시에는 자식 사이에 무슨 원한(怨恨)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동안에는 복수(復讐)를 하지 않고, 꾹 참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葬禮)를 마치면, 그때부터 무서운 피의 복수(復讐)가 시작되곤 했던 것입니다. 에서도 야곱을 그토록 미워했지만, 아버지 이삭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꾹 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아버지가 죽으면, 야곱에게 복수(復讐)하려고 했는데, 그 동안에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을 쳐버렸던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 요셉이 자기들에게 무서운 복수(復讐)를 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두려워하다가 결국 요셉에게 사람을 보내어 화해(和解)를 청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지난 30년 동안 여기에서 전혀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과거에 지은 죄(罪)가 용서되었다는 것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것은 마치 진흙길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진흙길을 걸어갈 때, 처음에는 발에 붙은 진흙이 얼마 되지 않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진흙이 달라붙게 됩니다.
그러면 점점 더 무거워집니다. 나중에는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서 쓰러지고 맙니다. 사람의 과거(過去)는 없어지지 않고, 모두 마음속 어디엔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중요한 결단(決斷)을 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 그 아픈 과거(過去)가 되살아나서 우리를 과거의 불행 속으로 다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들은 모두 아버지의 축복(祝福)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들은 아버지가 죽었을 때, 요셉이 복수(復讐)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셉은 이미 그 모든 과거(過去)를 다 용서하고, 그 모든 원한(怨恨)을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버렸지만, 형들은 그것이 청산(淸算)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이 말을 듣고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요셉은 이미 형들을 용서했는데, 형들은 전혀 그 용서를 누리지 못하고, 불안하고, 두려워하면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미래(未來)를 향하여 새 출발(出發)하려고 하면, 과거(過去)의 죄책감(罪責感)과 상처(傷處)가 치료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몇 번의 중요한 변곡점(變曲點)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바로 그때 결단(決斷)을 내릴 때는 내려야 하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는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의 모든 문제가 풀리면서 화려한 전성기(全盛期)를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過去)의 죄(罪)가 해결되지 않고, 마음속에 상처(傷處)가 남아 있는 사람은 결단(決斷)을 내려야 할 때, 과거(過去)에 발목이 잡혀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그만큼 병(病)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겉모습만 보면,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속사람입니다. 그런데 속이 병(病)든 사람은 중요한 시점(時點)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으면, 과거(過去)의 죄(罪)가 해결이 되지 않고, 마음속에 있는 상처가 치료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누구든지 마음속에 있는 이 상처(傷處)가 치료되지 않으면, 아무리 사랑을 받아도 그 사랑을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동안 요셉이 형들과 그의 아들을 위해서 마음을 다하여 사랑을 했습니다.
요셉은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채워주고, 조금도 그들이 섭섭해 하지 않도록 모든 편의(偏倚)를 다 제공해 왔습니다. 그래서 형들은 요셉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언제나 요셉의 보복(報復)을 두려워하고, 참으로 불안하게 하루하루를 지내왔던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말을 듣고 울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허물을 다 용서했고,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했지만, 형들이나 조카들은 요셉의 사랑을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닫혀 있으면, 하나님이 아무리 은혜(恩惠)를 퍼부어 주셔도 은혜(恩惠)를 받을 수 없습니다. 형들이 고작 생각한 것은 ‘이제 곧 아버지가 돌아가실 텐데, 그때는 이 모든 것이 끝장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형들은 요셉에게 그의 진심을 물어보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정말 잘한 행동이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자기들끼리만, 불안해 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두려움을 요셉에게 알리고, 용서를 빌기로 했던 것입니다.
만일 형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계속 두려워하며, 지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에게 이이야기를 전하러간 사람이 요셉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울기만 하더라고 하니까 형들은 더 놀란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형들은 요셉에게 이 원한(怨恨)은 가슴에 사무친 것이며, 공연히 아픈 상처를 더 건드렸다고 생각해서 모두 달려와서 요셉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잘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렇게 해서 요셉의 본심(本心)을 직접 들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속으로 불안한 것은 몇 번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확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50:19-20절)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요셉은 형들의 말을 듣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셨다고 대답했습니다. 요셉은 이 세상에서 자기에게 닥치는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모두 다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불행이나, 어려움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해(害)치려고 했습니다. 형들이 한 악(惡)한 짓 때문에 요셉은 너무나도 젊은 시절을 불행하게 보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의 악행(惡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을 구원(救援)하게 하셨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비록 우리나 혹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잘못해서 큰 어려움과 교통에 빠지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악(惡)을 바꾸어 놀라운 선(善)을 이루셨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선(善)으로 바꾸셨기 때문에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며, 사람 사이에 원한(怨恨)을 직접 갚거나, 복수(復讐)를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바로 여기에서 나타납니다. 인간의 가장 악(惡)한 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가장 큰 구원(救援)을 이루어내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악(惡)을 바꾸어서 선(善)을 이루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손을 쓰시지 않으면 이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사화복(生死禍福)과 국가의 흥망성쇠(興亡盛衰)의 주관자(主管者)이십니다.
요셉은 처음부터 미래(未來)를 내다보는 비전(vision)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요셉이 애굽의 그 험한 노예(奴隸)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비전(vision)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노예(奴隸)생활을 하거나, 감옥(監獄)에 있을 때, 가졌던 비전(vision)은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흉년(凶年)이 끝난 후, 요셉은 새로운 비전(vision)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50:21절)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요셉은 이제 자기가 남은 기간 동안 해야 할 것은 위대한 이스라엘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 안에 모든 미래(未來)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단지 그때그때 하나님이 쓰시는 배경(背景)에 불과한 것입니다. 위대한 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과 그 말씀으로 자신들의 삶을 만들어 나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50:25절)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요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코 애굽 땅에 안주(安住)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자기가 죽으면, 관(棺)에 넣어서 해골(骸骨)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애굽을 떠날 때, 자기 관(棺)을 들고나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에서 요셉의 관(棺)을 볼 때마다 자기들은 언젠가는 애굽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요셉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단순히 흉년(凶年)에 애굽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그 나라가 이루어지기까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데, 가장 중요한 기초(基礎)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요셉의 용서(容恕)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膳物)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容恕)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과 그의 자녀들을 생명의 말씀으로 잘 양육(養育)해서 위대한 부흥(復興)이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셀(Cell)공동체 모임은 기름 구덩이와 같습니다. 언제든지 불이 떨어지기만 하면, 위대한 부흥(復興)이 일어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것을 위해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충만(充滿)해야 합니다.아-멘
찬송가 359장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2월 19일 주일 예배
※새벽(冬)5-6시 기도하는 습관을 가집시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46:5) 순종하는 믿음으로 하늘에 보물 쌓을 교갱원 설립 創立member ▽교갱원 설립할 온라인 특별 헌금▽
농협 NH콕뱅크 302-8772-0191-01(헌금 종류)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심방(尋訪) 및 궁금한 내용 문의 ☞ 정 의 영 목사 ☎ 010-8772-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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