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본향을 향해 달리는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 . . . . (영상)간증 스크랩 유태영 박사 간증
큰 바위 추천 0 조회 347 10.10.29 14: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신앙간증] 유태영 박사 간증

  • 글쓴이: Pine
  • 조회수 : 85
  • 08.09.27 00:31
출처 =http://cafe.daum.net/ofgodchrist/3Nto/46주소 복사



류태영(건국대학교 교수)

 

 



머슴의 아들로 태어난 나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았다. 가난은 나에게 있어서 한이었고, 비참을 뛰어 넘는 비극이었으며, 굶주림과 무지의 굴레로 씌워진 운명이었다. 오직 나에게 주어진 가장 큰 힘은 믿음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흙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기독교적 신앙의 힘이었다.

원래 나는 문화 류씨의 뼈대 있는 집안 출신이었으나 할아버지 대에 와서 집안이 몰락해 버리는 바람에 아버지는 남의 집 머슴으로 전락해버렸다. 그러니 하루 끼니를 때우는 일조차 예삿일이 아니었다. 어느 해는 한달이 지나도록 곡식을 입에 넣어 보지도 못하고 소나무 껍질이나 칡뿌리, 도토리로 주린 배를 채워야 했다. 심지어 어느 날은 자동차에 치어죽은 고양이를 삶아 먹기도 했다. 집이라고 해야 한 칸 방의 흙집에 여러 식구가 올망졸망 부대끼며 살았다. 거지와 다름없는 비참한 생활이었다.

‘찬물은 위아래가 있어도 끓인 물은 위아래가 없다.’는 말처럼 우리네 농촌의 처절했던 가난을 정확히 대변할 말은 달리 없는 듯하다. 우리의 미풍양속에는 어른이 먼저 음식을 손에 대야 비로소 아랫사람이 손을 댈 수가 있었다. 비록 찬물 한 그릇이라고 어른이 먼저 마신 후에야 아랫사람이 마셔도 된다는 뜻이다. 끓인 물이 위아래가 없다 함은 물이 끓을 때 아래위로 뒤섞이기 때문에 아랫사람이 먼저 마셔도 좋다는 의미다. 밥솥에 끓인 물이 바로 숭늉이다. 어른이 숭늉 밑에 가라앉은 누룽지 찌꺼기를 먹기 위해 아랫사람에게 숭늉은 먼저 먹어도 좋다는 일종의 양보(?)를 하는 예의절차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나도 숭늉 찌꺼기를 얻어먹기 위해 형편이 괜찮은 친구 집에 일부러 자주 들렀다. 한 번은 마루에 놓인 커다란 숭늉 양푼 바닥에 두어 숟가락쯤 되어 보이는 찌꺼기가 가라앉아 있는 게 보여 그 찌꺼기를 먹기 위해 숭늉 한 그릇을 다 마셔버린 적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먹는 것도 없이 지게를 지고 일을 하면서도 나에게는 유일한 낙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었다. 아무리 힘든 생활이었지만 내 주위에서 하나님이 지켜 주신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위안이 될 수가 없었다. 다른 친구들이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도 교과서 대신 지게를 짊어지고 황소처럼 일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공부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그리하여 집에서 키우던 토끼 몇 마리를 팔아 중학 강의록이라는 책을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틈만 나면 꺼내 읽었다. 때로는 초등학교에 미 진학한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는 고등 공민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그런 내가 기특하게 보였던지 마침내 나에게 첫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지역 국회의원 아들의 가정교사로 들어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또 그 국회의원의 배려로 중학교에 편입할 수가 있었다. 그때 내 나이 18살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자 다시 가슴이 답답해왔다. 하릴없이 산 속에 파묻혀 있다는 것이 참을 수가 없었다. 몇 날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가기로 굳게 마음을 결정했다. 나의 이런 결심에 어머니도 어쩔 수 없으셨는지 말리기를 포기하시고 쌀 한 가마니 정도의 돈을 빚내 주셨다. 서울에서 한 달 최저 생계비도 안 되는 돈을 들고 서울로 떠난 것이다.

이 길이 비록 멀고 험할지라도 한 번 세운 뜻은 결코 굽히지 않으리라. 후대의 자손들이 그 덕을 입을 수 있다면 성실하게 살다가 죽었다는 것에 만족하리라. 절벽 앞에 섰을 때에는 하나님을 부르며 이마로 바위를 치리라. 그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이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면 좋은 길이 열리리라. 그렇지 않다면 이마가 터져 피를 흘리며 죽어 버리리라. 굳을 결심 끝에 서울로 올라온 나는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는 결코 고향에 내려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처음에는 대방동에 있는 미군 부대에서 구두닦이를 했다. 잠자리는 영내 구석에 쳐놓은 천막이었다. 일단 고정된 수입이 생기자 고등학교에 입학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길로 무작정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을 따라 흑석동에 있는 동양공업 고등학교 서무실로 찾아가 서무과장을 만났다. 그러나 입학철이 두 주일 정도 지난 시점이라 한 마디로 거절당했다. 내친 김에 물러설 수는 없었다. 무조건 교장 선생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떼를 썼다. 결국 교장선생님을 만나 사정 얘기를 했다. 당시 교장 선생님은 김 봉주 선생님이셨는데 그렇게 인자하실 수가 없었다. 그 교장 선생님의 특별 배려로 구두닦이 하던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입학금은 면제받고 등록금은 분납토록 하는 외상 입학이었다. 학교에 입학하자 필요한 건 돈이었다. 학비를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구두닦이, 신문팔이, 신문배달, 아이스 케키 장사. 빨래비누 장사 등 이 내가 했던 그때의 직업들이다. 그래도 대학교에 들어갈 등록금까지 마련해 두어야 했기 때문에 자장면 한 그릇 먹기를 그렇게 소원하면서도 시장 바닥에서 파는 멀건 수제비로 주린 배를 채워야 했다. 그나마 수제비도 아까워 주식은 10환에 다섯 개 주는 국화빵이 대부분이었다. 신문 배달을 할 때 길거리를 지나다가 길가에 떨어진 밥덩이를 주워 흙을 털어내고 먹거나, 곰팡이가 나서 버린 빵 조각을 주워 먹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공부를 중단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다.

어려운 시절을 보내자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대학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대학 시절에도 신문 배달, 공장 청소부 등을 전전해야 했다. 그러다가 후반기에는 입주 가정교사를 하게 되었다. 대학 3학년 무렵으로 생각된다. 그때 나는 독립군 근처에서 가정교사를 했었다. 주인아주머니는 나를 잘 보았던지 속옷은 몰라도 내의 정도는 빨아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내게 내의가 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내의가 없으면 진작부터 말을 할 것이지 사람이 어찌 그리 무디나, 원 우리는 내의를 두 벌씩 입어도 추위를 견디지 못해 엄살인데, 학생은 도대체 강철로 된 인간인가.”

그렇게 혀를 내두르면서 아주머니는 내게 내의를 두 벌이나 사주었다. 실로 태어나서 26년 만에 처음 입어보는 내의였다.

등록금을 제때 마련할 수 없었던 나는 대학을 무려 7년 만에 졸업했다. 그리고는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고 비웃는 친구들을 뿌리치고 뜻이 있어 신학교 기독교 교육학과에 학사로 편입했다.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을 위해서였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고등 농민학교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잊고 있던 흙에 대한 꿈이 새롭게 일었다. 그 당시 나에게 크게 영향을 준 사람은 일본의 가가와 토요히코 선생이었다. 그는 나에게 ꡔ한 알의 밀알ꡕ이라는 책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흙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라고 끝없이 일러주었다. 바야흐로 어려서부터 막연하게 키워온 잘사는 농촌 건설에 대한 구도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지상 낙원이라는 덴마크 유학에 대한 꿈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 시절에 나는 지금의 아내이자 평생의 동반자인 이소영씨를 만났다. 그녀의 부친은 초등학교 교장이었고, 마침 내 친구가 그 학교 급사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친구를 찾아가면서 그녀 부친의 눈에 띌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녀와도 자연스러워질 수가 있었고 급기야 난 청혼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길로 그녀의 부친에 청혼서를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답신이 왔다.

‘과분한 청혼을 한 귀의를 당장 받아들이고 싶으나, 지금은 군이 공부에 매진할 시기인 만큼 나중에 적당한 시기를 보아 이야기하자.’

난 뛸 듯이 기뻤다. 직장도, 집안도, 장래성도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것이 없었던 나에게 신뢰를 보여준 그녀의 아버지가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약혼을 한 지 2년만이 33세 때 결혼식을 올릴 수가 있었다. 결혼식 날 생전 처음으로 처가에서 맞춰준 새 양복과 새 구두를 신었다. 그러나 신혼여행을 다녀올 돈도 나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식장에서 택시를 타고 가다가 기본요금이 오르기 전에 차에서 내려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나는 내 돈을 내고 사 먹는 음식 중에 가장 값비싼 떡만두국을 사먹었다. 그리고는 서울역에서 안양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안양에 내려 유원지 근처에 있는 한 여인숙에서 둘만의 신혼 초야를 보냈다. 물론 길가의 포장마차에서 된장국으로 식사를 했다. 아무런 불평도 없이 따라오는 아내가 그지없이 고맙기만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가슴에 담아두었던 유학의 뜻을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비쳤다.

“몇 년이 걸려도 좋으니 가서 내 걱정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해서 힘을 길러 오세요.”

그렇게 유학의 뜻은 정했으나 당장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새벽마다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이 왔다. 편지를 쓰라는 것이었다. 그길로 나는 한국의 농촌현실과 덴마크의 선진화된 농업 기술을 배우고 싶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써서 서툰 영어로나마 번역을 했다. 그러나 그 편지를 누구에게 보내야 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또 기도를 했다. 그리고는 덴마크에서 제일 높은 사람인 국왕에게 보내면 내 뜻을 들어줄 것이라고 짐작했다. 곧바로 도서관으로 달려가 백과사전을 찾았다. 덴마크 국왕은 프레드릭 9세였다. 주소는 알 필요 없었다. 덴마크 국민이면 누구라도 국왕이 사는 곳을 알 수 있으리라. ‘덴마크 코펜하겐 프레드릭 9세 국왕 귀하’ 겉봉투에 쓴 주소와 이름이었다.

40여일 만에 덴마크 왕실로부터 ‘귀하가 보내주신 서신에 국왕께선 감동을 하셔서 행정부로 이첩하면서 귀하의 소원을 가능하면 들어주라고 당부하셨다.’라는 내용의 답신을 받았다. 곧이어 덴마크 외무성으로부터 공식 초청장이 날아왔다.

‘당신이 원하는 기간, 원하는 장소, 원하는 분야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우리 정부가 지원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꿈에 그리던 유학의 길에 오를 수 있었다. 덴마크 농과대학에 입학한 후 먼저 덴마크 언어를 속성으로 배웠다. 3개월 후부터는 모든 대화를 덴마크어로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덴마크어가 유창하다는 정도로 칭찬을 받아, 9개월 후부터는 여러 덴마크 국민 고등학교에 초청을 받아 한국을 소개하는 강의를 덴마크어로 자연스럽게 하고 다녔다. 유학 온지 10개월쯤 되었을 때인가 싶다. 덴마크 주변의 여러 유럽 국가를 여행하고 싶은 욕망이 일어 외무성 국장을 찾아갔다.

“당신의 나라에서 나를 초청하여 국비로 공부시켜주어 감사합니다. 그런데 당신네 나라의 돈으로 나를 가르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국장에게 당돌한 질문을 던졌다.

“당신 개인보다는 당신 조국인 한국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국민 총생산의 2퍼센트를 개발 도상 국가에 지원하도록 결의한 바 있다. 우리는 그 결의를 준수하여 개발 도상 국가에 학교나 병원을 세워 운영하기도 하고, 청년을 초청하여 지도과 과정을 교육시켜 그 나라에 도움이 되도록 하기도 한다. 당신도 그런 차원에서 초청된 것입니다.”

“그러면 덴마크 한 곳에 머물러 연구하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비교 연구를 하는 것이 좋습니까?”

“물론 비교 연구가 효과적이죠.”

“그럼 내가 유럽 각국에 문화를 시찰할 수 있도록 예산 지원을 주선해주십시오.”

“나에겐 그런 결정권이 없습니다.”

“그럼 결정권이 있는 장관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오늘은 그냥 돌아가시오, 당신편이 되어서 노력하겠습니다.”

나는 끝내 2만 달러의 특별 예산을 얻어 내 개인 돈은 한 푼도 들이지 않고 유럽의 여러 나라를 여행할 수가 있었다.

덴마크에 온 지 2년이 되어, 덴마크에서 개발 도상 국가 지원 자금을 예산에 확보해놓고 있다는 것을 알아낸 나는 당장 외무성 차관에게 달려갔다. 그동안 구상한 한국 - 덴마크 농업기술학교 설립안도 제출했다. 덴마크 정부로부터 80만 달러의 무상원조를 받아 한국에다 농업 기술요원 양성학교를 세운다는 계획이었다. 덴마크 정부의 의사는 긍정적이었다.

‘자연인 당신에게 그 돈을 줄 수가 없으니 당신 정부의 추천서나 의견서를 받아오시오.’

그러면 지원할 수 있다고 했다. 그 즉시 나는 우리 정부에 편지를 보냈다.  주 스웨덴 한국 대사관에도 정부 추천을 해달라는 요청을 하고 증빙 서류도 제출했다. 그러나 별로 진전이 없었다. 그래서 귀국하여 직접 교섭키로 마음을 먹었다. 그 길로 나는 공부를 중단하고 즉각 귀국을 서둘렀다. 귀국하는 길에 이스라엘 정부의 초청을 받아 이스라엘에 들렀다. 이스라엘 농촌 개발에 관하여 6개월간 공부를 했다. 영어로 강의하는 외국의 선생의 교육기관에서 연구하였던 것이다. 귀국하자마자 나는 당장 추천서를 받기 위해 정부 부처를 찾아다녔지만 누구 하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증빙 서류도 첨부했지만 결국 시한을 넘겨버려 그 돈은 몽땅 탄자니아에 개발 자금으로 넘어가 버렸다. 정부 측의 무성의로 계획이 무산되자 공무원들의 경직된 사고방식과 행정 자세에 분노가 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는 농촌 운동에 참여했다. 그리고 여러 대학에 시간 강사로 출강을 했다. 그러던 중, 건국대학교 설립자이신 상허 선생을 만나, 건국대학교 축산대학 교비 장학생들의 정신교육을 맡아 훈련시키는 성관 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렇게 건국대학교에 재직하면서도 틈나는 대로 농촌을 방문하고, 텔레비젼이나 라디오에도 출연하면서 농촌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와대의 부름을 받고 들어가 청와대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만들어 새마을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의 환경과 비슷한 이스라엘에 대한 유학 욕구가 나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2년간 새마을 운동에 관여하다가 마침내 1973년 봄, 나는 모든 관직을 떨쳐버리고 이스라엘 유학길에 다시 올랐다. 히브리어 한 글자 모르는 상황에서 난 이스라엘에 간지 3개월 만에 회화를 마스터하고, 7개월 만에 대학원 입학시험을 히브리어로 보아 합격했다. 어떤 상황이든 그것은 생각하기 나름인 것이다.

5년 2개월 동안의 피나는 노력으로 나는 최단 기간 만에, 최고 우수한 성적으로 박사 학위를 마칠 수가 있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이 가장 컸다는 믿음과 하고자 하는 의욕 그리고 노력에 의해 얻어낸 결과였다. 이런 나의 자세는 언젠가 세상을 다하는 순간까지 끊임이 없을 것이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