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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의 화가) 최홍원 화백 추모전
2021. 11. 27(토) - 12. 27(월) 원주 복합문화교육센터 개관 이후 첫 기획전시(1월까지 한달 연장된답니다)
원주문화재단은 故최홍원 작가의 작고 10주기를 기념하기 위한 추모전시를 11월 27일부터 12월 27일까지(31일간) 원주 복합문화교육센터(구. 원주여고)에서 개최한다. 작가는 그의 그림 7,800여점을 원주시에 기증하였으며, 앞으로 원주에서는 최홍원 미술관이 만들어질 계획이다.
https://me2.do/GMeblwzq 원주문화재단 보도자료
(you tube) https://youtu.be/UHdIYX8BCr8 강원미술의 선구자 최홍원을 추억하는 사람들
▲ 최홍원 화백의 아뜨리에를 전시관에 그대로 옮겨 재현한 모습
<작품 감상및 이해>
이 그림들은 참 난해합니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감상하여야 할까요??
감상은 독자가 자기 수준에서 보고 느끼는 감정 그 자체입니다. 물론 그 이상의 미술사적 이해를 하면 더욱 재미있어 지는데, 가령 소설이나 詩는 일반인도 읽어서 감흥이 일고, 음악은 가락의 선율의 아름다움에 전율을 느낄 수 있지만, 미술은 예쁘지도 않고 이해할 수가 없어 난해하기 짝이 없습니다,
위에 그림중에 하얀 곡선 위로 알록달록하게 색감의 선으로 그려진 그림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러기에 이러한 그림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하여야 하는가 하는 점이 감상의 관건입니다.
우선 최홍원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 전제되어야 할 사항으로는 단편적이나마 그의 생애사의 이해입니다. 작가는 1929년 평안북도 정주생으로 오산중학을 거쳐 평양 국립 미술대에 진학하였습니다. 정주生으로 오산중학 출신은 백석, 소월등으로 알려진 너무나 유명한 문향의 고장 출신으로 6,25가 발발하자 작가는 9남매중 막내로 아버지, 어머니 사진 한장을 가슴에 품고 홀홀 단신으로 남하하여 학도병으로 전선에 나갔습니다(현 국립 용인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휴전이 되고 '50년대에 그는 강원도에서 교직에 몸 담으면서 다시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작가는 영월에서 교직에 몸을 담으며 '5~'60년대 강릉, 이후 속초, '70년대 초에 원주, 이후 춘천으로 전근가면서 가는 곳마다 미술협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을 역임하면서 강원에 미술역사를 개척하였습니다.
작가의 그림에서는 '95년 "작가노트"에서 밝혔듯이 초기의 그림에서는 단테의 신곡을 소재로 하여 많은 펜화를 그리는 점은 6,25 전쟁당시 북에 두고 온 고향의 그리움과 전쟁의 상흔이 그의 가슴을 누르게 되었던 듯 합니다. 특히 가치없는 죽음에 대한 충격이 말년까지 그의 작품속으로 흐르고 있슴을 볼 수 있습니다.
작가는 6,25때 월남하여 학도병으로 종군하여 전쟁을 겪으며 이념의 대립과 전쟁의 폐허속에 삶과 죽음에 대한 번뇌와 대하여 단테의 신곡으로 해석하는 수 많은 펜화를 그렸다고 밝히는 바 아마도 이러한 전쟁의 상흔과 치유되지 않는 죽음의 문제가 인간의 본질인 내면세계에 강하게 어필되고 있었던듯 합니다.
또한, 음악을 무척이나 좋아하셨는데 출근길에 한적한 산 허리를 돌아가기에 음악을 틀어놓고 들으면서 출근하셨다 하는데 음악은 내면세계의 깊은 상흔을 치유해 주는 카타르시스(정화)의 힘은 아니었슬까요?? 이런 치유된 내면의 원래의 상태를 그림으로 나타내는 것이 음악을 들으며 그리는 추상그림은 아니었슬까 합니다.
필자의 시골집엔 저의 초교 이전에 '60년대초에 이모부님이 선물하신 그림 한점이 거실에 걸려 있었는데, 그림은 유리 액자속에 수채화로 베토벤의 운명을 들으면서 음악을 그림으로 그리셨다고 하는데, 음악을 그림으로 나타내는 그림이었으며 지금 생각하면, 몬드리안의 추상미술과도 같은 그림인듯 합니다.
작가는 펜화 그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많은 펜화를 그리셨는데. 우선 펜화에 대해서 우선 비유되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중섭은 어려운 여건속에 스케치북은 꿈도 못꾸고, 담배곽 은박지에 아이들을 스케치한 여러 그림이나 렘브란트는 궁정화가로서 대관식에 왕과 왕비의 그림을 그렸어야 하는데 자연의 전원만 있는 풍경화를 제출하여 궁정화가 자리에서 쫒겨납니다. 그리고 그도 어려운 경제여건에 휴지조각 주워서 스케치하곤 했답니다.
그런데, 램브란트의 이러한 행위는 고전주의에서 기존의 인식률을 타파하고 인물이 배제된 풍경만으로 그려진 그림으로 자연주의를 탄생시키며, 미술계의 근대적 기원을 이루며 동시에 사회에서도 이러한 인식의 편재에 대한 타파현상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사회적 변혁을 가하게 됩니다.
이렇듯 작가의 펜화는 작업노트에서 기술한 바. 6,25 전후의 어려운 국내 상황속에 종이 한장 구하여 스케치하듯 당시 6,25의 전화에 따르는 경제적 어려움속에 작가는 펜화의 장점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작가노트에서 언급한 바 펜화의 여러 오브제중에 단테의 신곡에 연유해 그림을 그리었는데, 우리는 신곡을 뮤즈인 베아트리체나 또는 피렌체 지방에서 복고풍의 르네상스의 시작을 알리는 정도로 이해하는데 선생께서는 신곡에서 삶과 죽음. 정죄편이나 새로운 미학적 가치관으로 해석하신듯 합니다.
'95년에는 펜화 개인전을 전시합니다. 펜화로 개인전을 하는것은 좀 흔치않을 사례로서 펜화는 한세기전 독일의 뒤러의 펜화 한 장만 기억될 뿐, 펜화란 그저 습작을 위한 소묘 정도로 치부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가의 펜화 개인전은 펜화가 소묘적인 느낌의 한계를 탈피하고 미술에 있어서 기법에 하나의 장르적 인식을 재확인 해주기도 하며, 펜화만의 장점을 살리는 미술적 확장을 기하셨다,
'8~'90년대에 선생은 교직에서 정년퇴임 하시면서 왕성한 활동으로 작품에 임하셔서 약 20년간에 4천여점을 그리셨고 그 사이에도 250 나한도나 여주박물관의 불화 대작등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습니다.
가령,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년을 마치면, 우선 여행좀 가고 휴식을 하지만, 선생께서는 미리 아뜨리에를 준비하시고 퇴임 다음날에는 아뜨리에로 출근하셨다고 합니다. 선생께서는 무엇을 하겠다하는 큰 구호는 내걸지 않으시고, 10년이 하루같이 매일 열심히 한 발자국씩 정진하셨는데, 일상 자체가 그림 그리는 것이었고, 그림이 선생의 생활의 전부였습니다.
명륜동 작가의 집에는 화장실까지도 유화그림을 묶어서 보관할 정도로 쌓아 놓았기에 필자도 많은 그림을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이번 전시회 소식을 카톡으로 받아볼 때 작품사진들을 보니 이모부님은 초현실주의 작가라는 그간의 생각이 깨졌습니다.
주최측의 보도자료에서부터 신문지상에서 우리나라 1세대 초현실주의 작가라 하고, 또한 10년전 작가의 그림을 프랑스에서 전시를 하겠다고, 항공료등 일체의 모든 경비를 부담하는 프랑스쪽의 전시회 제안에 작가는 중환자실에서 임종이 다가가는 시기라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합니다. 아마 이때도 초현실주의 작가로 파악하였슬지 모르지만, 분명 작가에게는 초현실 주의를 넘어서는 그 무언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초현실주의를 간략히 구슬하면, 20세기 초반 기계문명의 산업화는 인류에게 모든것을 약속하는 듯 했다. 예술사들은 과학과 이성을 찬미했으나 돌아온 것은 인간의 야수성을 드러낸 1차 대전이었다. 예술가들은 이러한 참담한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이것은 허상이다. 세상은 인간의 오감으로는 알 수 없는 새로운 세계가 있다. 무의식에 잠재된 초현실의 세계이다.
필자가 지난 4월에 게시한 글 "코로라의 종식은?"이란 글에서 1차대전때엔 스페인 독감이 총알보다 더 많이 5천만을 죽였고, 당시에도 마스크 쓰는 것도 의무화 되고 지금보다 더 강력한 방역으로 종결되는데... 1차대전때는 지금의 코로라처럼 스페인 독감이 가미되어 맹위를 떨쳤으며, 이것이 1차 대전을 더욱 가증스럽게 만들었다.
이러한 초현실주의는 다다(DADA)로 부터 연유합니다. 다다란 아무런 뜻이 없다는 것으로 당시 의사인 에른교수이 임상보고서를 바탕으로 프로이트의 꿈을 통한 정신분석학이 대두되며, 초현실주의는 반 문명, 반 전통예술로 기존의 모든 가치 질서를 부정하고 파괴하고 이성, 도덕성, 미학으로부터 벗어난 내면의 세계, 무의식적 사고 즉, 무념무상의 무의식 상태에서 솟아오르는 영감의 이미지들을 그대로 기록함으로써 새로운 경지의 미를 자유롭게 추구하는 "자동기술법"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이러한 초현실주의의 수법을 차용하면서 자동기술법을 그대로 적용했는가 하는 문제에서 초현실주의를 넘어서는 이해로 그것이 무엇인가는 앞으로 규명해야할 문제인듯 합니다.
작가는 초기 펜화로 미술수업시대처럼 그림의 이해와 연구속에 그 폭을 넓혀가며, 초현실주의는 물론 색상면에서는 야수파, 추상파, 큐빅(입체파)등 20세기의 여러 미술사조를 섭렵하였기에 1세대 초현실주의 작가라 하는 점은 이해가 갑니다만, 작가는 '80년대 이후 이러한 초현실 범주를 넘어서서 인간에게 내제되어 있는 정신세계의 2차적 사유세계에서 새나 서낭단, 불교의 다각적 시리즈 작품을 통해서 집요하게 탐미합니다.
작픔들에 나타나는 내면의 세계로 지향하는 그림의 기법이나 이해할 수 없는 요소들이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라 그림의 주제인 새, 서낭단, 불교에 내제되어 있는 범위내의 오브제들로 추구하여 무엇인가 주제어에 대한 화두를 이어가고 있는 바, 작가의 그림을 자동기술적인 무의미한 구성으로만은 볼 수 없으며 확고한 주제어들은 무엇을 이야기함인가 하는 점이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고 이해하기 위한 고찰대상입니다.
이 문제는 작가가 후기시대에 주로 다룬 주제인 새와 불교, 서낭단은 그 무엇인가 하나의 공통적 요소를 가지는 것입니다. 서낭단이 무속이고 불교를 신앙으로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구성원 모두가 갈망하고 성찰과 구원을 지향하는 정신세계의 염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작가노트> 나의 작품세계"중에서
◆ 전쟁의 상흔속에서 인간의 본질과 죽음 당시 단테의 신곡을 펜화로 그리는데 (2절지 100여장) 선과 면, 흑백의 극한 대비를 통하여 삶과 죽음, 그리고 표류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 '80년대에 불교시리즈에서 민족적 미감이나 신화성에 의해서 불교나 토속신앙의 근원적 정신세계를 표현해 보고 싶었다 한다.
◆ 작가의 그림에서 주제로는 새와 서낭단. 불교 시리즈에서 특히 불화(佛畵)는 조형적 이미지보다 불법(佛法)의 세계에 대한 조형적 접근을 시도해봄으로서 조형의 논리에서 상투적 표현성, 또한 그것은 형식적 이미지 배열 방식에서 벗어나 나는 앞으로 쉼없이 그릴 것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작가는 '80년대에 장모님이 타계하시자 장모님이 쓰시던 불경등을 가져와 그 시간부로 불교에 귀의하시고, 매일 불경을 암송하고 정진을 하셨는데 이는 어쩌면 펜화로 신곡을 그리던 시절에도 응어리졌던 죽음세계에 대한 갈등이 내면세계에서 흐르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새의 시리즈 작픔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 하여야 좋을까 하는 점이며 이 모든것을 한마디로 대변하면 우위 전시회 사진중에 "모짜르트 목에 걸린 염주"라는 케치 프레이즈는 평소 작가의 아뜨리에에 있는 소품의 석고상의 목에 염주를 걸어 놓은것으로 이를 작가의 작품에 대하여 상징적으로 이야기 하는 바 모짜르트와 염주는 서로 상반되는 개념의 패러독스인데 이 점에서 작가는 이중성의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던가? 아니면 모짜르트. 즉 음악과 염주(불교)는 그 인간의 내면인 정신세계의 볼때 서로 연결된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이 문제에 어떠한 이해를 하여야 하는가 하는 점도 아래 각 주제별애 대한 논고에서 이해를 합니다.
<그림에 나타나는 새의 이해>
'95년에 펜화 개인전에서 봉황등 다수의 새의 그림도 함께 전시하였습니다. 작가의 노트에서 작가는 새는 의인화된 인간모습의 표현이라 서술하였는데. 작가는 전쟁터의 삶과 무의미한 죽음에서 새를 의인화 하여 죽음을 승화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려 하였던 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상의 새, 봉황이 상서로운 새로서 인간세계로 돌아올때 세상은 태평성대를 의미하기에, 작가는 봉황, 그리고 이간에겐 천상의 세계인 히늘을 마음껏 날아 다니는 모든 새를 비유하여 이상세계로 오르고 싶은 표현은 아니었슬까요??
작가의 그림에서 새의 그림으로 삼족오도 나타나는 바, 작품에서 삼족오는 천신신앙의 대상물로서 또한 태양신을 비유하지만 작가의 작품에서는 그러한 神격의 위상을 구가하는 것은 아니다. 봉황이고 삼족오나 부엉이등 모든 새들을 대상으로 그린 점은 전화(戰禍)속에 자연적이지 않고 인위적인 주검들에 의한 고뇌의 표출로 인간사회의 질박한 땅(地)을 박차고 벗어나 승천하고자하는 즉, 이상세계로 회귀를 나타내는 점으로 이해해 봅니다.
<서낭단 시리즈 그림의 이해>
서낭단 작품도 '95년 펜화전 당시 일부 전시되었듯이 봉황(후기에는 여러 새들)의 그림과 불교, 서낭단 작품은 작가의 시대구분으로 퇴임후 후기시대로 동시에 함께 그려지는 듯 합니다.
이러한 서낭단 시리즈는 약 50여점으로, 모두 전국의 서낭단을 찾아다니며 대상체를 보고 현장에서 그린 그림으로 한번은 원주서 출발하여 전라도의 어느 서낭단을 찾아 3~4시간 운전하고 갔는데, 주차 공간이 없고 도로 한 부분이 조금 넓어 주차하면 되지만, 다른 차들이 조심히 통과해야 하는 불편을 줄까봐 망설임끝에 그냥 돌아왔으며, 다음에 다시 갔다 하는데, 정말 그림에 대한 열정인 듯 합니다.
또한, 필자의 고향인 평창에는 송어양식장 샘이 솟는 호수위에 서낭단이 있는데, 호수안으로 "ㄴ"자로 늘어진 고목나무까지 운치를 더하는 일품의 서낭단이었습니다. 작가는 평창의 서낭단은 앞에 물이 있는 전국 유일의 서낭단이라 하였는 말씀 하셨던 바, 혹시나 낭만파의 마네, 모네처럼 자연의 색상이 고유색이 아닌 물에 비치는 빛의 색으로 그려지지는 않았슬까 합니다.
일반적으로 서낭단은 무속신앙으로 작가의 작품에서는 자칫 착각할 수 있는 오방색(황, 청, 백, 적, 흑색) 아니라 마치 티벳불교의 타초르와 룽다와 같은 소망을 기원하는 5원소(백, 청, 적, 황, 녹) 으로 사머니즘적 형식적인 면의 제 규격도 중시하는 원칙주의자로 그의 작품에서 제 성격에 맞는 원리적 기초를 잘 나타내고도 있다.( 서낭단의 일반적 인식이해를 위한 역사적인 글은 아래 별지로 첨부합니다)
◆ "베토벤 목에 걸린 염주. 작가 최홍원"이란 전시장 타이틀 캐치프레이즈에서, 염주는 불교적 상징체로 사용하였기에 염주는 불교적 의미와 베토벤은 문화나 역사에 서로 상반되는 의미의 패러독스입니다. 작가가 이 두가지의 측면을 수용하기엔, 혹 작가의 취향은 이중적 구조를 드러내는 것은 아닌가 의아하게 보일 수 있는데, 그러나 작가는 이 두 단어에서 그것들의 겉모습이 아닌 내면세계에서는 같은 의미의 내용을 구사하는 점으로 해석하는 것으로볼 수 있습니다.
"모짜르트 목에 걸린 염주"라는 케치프레이즈는 평소 작가의 아뜨리에에 있는 소품의 석고상의 목에 염주를 걸어 놓은것을 이번 전시회에서 작가의 작품에 대하여 상징적으로 이야기 하는바, 모짜르트와 염주는 서로 상반되는 개념의 패러독스가 아닌 하나의 관점으로 이해하여야 최홍원 작가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번 전시장에서 실제 작품을 관람할 때 가장 특징은 모든 작품에 새의 눈들이 정밀하게 모두 포인트로 힘주어 그려져 있는 점입니다. 이러한 눈의 강조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요??
아마도 가시적 현상계를 넘어서 내면세계를 직시하기엔 사실은 추상적이고 사유적이지만 눈은 이를 들여다 보는 상징적 표현은 아닐까요??불화를 그리며 종교적으로 위상을 높이자면 신성하게 모셔야 하지만 불화아래에 난잡하듯이 눈을 왜 연속적으로 그렸슬까요??
여러 불상 아래에 연속적인 눈이 일렬로 그려진 작품을 감상할때, 석탑등에 조식되는 삼산형(三山形)의 화문(花文)이 있는 안상(眼象)처럼 띄장을 구분하는 장식처리가 아니란 점입니다. 만약 이 작품을 불상에 눈이 가미되어 이해할 수 없기에 종교화의 불화로서 볼때는 어쩌면 모욕일테지만 작가의 의도는 마치 뒤상의 "샘"에서 변기의 작품처럼 기존에 현상계의 피상적인 사물로만 인식하여서는 않되는 점으로 내제된 사유의 사고속에 알 수 없는 스토리를 이어가고 있는 이야기인듯 합니다.
이러한 바른 감상은 무엇일까요??
작가는 서낭단의 그림이나 불화를 그리면서 그 신앙체를 대상으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러한 의문에서 대부분의 작품들 즉, 새, 불교, 서낭단의 하나의 주제에 안착하지 않고 있는 점이다. 모든 작품에 눈을 이러한 생각으로 대입을 해보면 작품에 이해는 좀 더 확연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은 초현실주의의 수법을 차용한 듯 하지만 초현실주의와는 차이를 가지고 있슴을 볼 수 있습니다.
작가의 작품에서 바로 이러한 점을 풀어서 이해하여야 바른 감상을 하는 것입니다
그의 후기 작품이 초현실주의를 넘어서는 이해하기 곤혹스러운 작품들에서 새와 불교, 서낭단이 서로 조금씩 혼합되는 그림을 나타내고 있는데, 봉황이나 삼족오의 새와 불교, 서낭단의 오브제들은 모두 신앙물이지만 이에 공통점의 특징은 우리나라에 향토적 정서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즉, 작가는 이러한 봉황, 삼족오, 불교, 서낭단등의 고뇌하고 염원하고자 하는 민족적 정서를 도출하고자 새와 불화, 서낭단의 소재를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의 하나로 필자는 예전에 필자는 평창아리랑의 논고에서 가령 우리 민족의 정서는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한(恨)이라 하였습니다. 이 恨을 가장 의미있고 알맞는 단어는 아리랑입니다. 이러한 아리랑은 모든 학자들이 선율에 아름다움이 있다고 하지만 필자의 이해로서는 세계 최고의 가락이라고 하는데, 그럼 예술을 점수로 측정할 수 있습니까?? 모짜르트와 베토벤중에서도 누구의 음악이 더 아름답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렇듯이 필자로서는 이러한 표현에는 곤혹스러움을 가지고 태백산 산간지역의 메나리조 아리랑은 그 사설이 천여 수가 넘는데 이러한 가사에 모두 일인칭 화법으로 그 뜻은 자신에게만 제한된 가사의 한탄조의 노래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점은 음악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恨이라고 한다면, 모든 사람에게도 죽음음 피할 길이 없는 명제로서 작가는 전란시에 특별한 경험으로 죽음을 고뇌하는 바, 이에 수반되는 모든 상념, 즉 피상의 세계가 아니라 2차적 인식의 사유세계로서 민족적 고통과 고뇌의 恨을 응집하고 표출하고자 하는 그림으로 이해가 됩니다.
작가는 불교에 심취한 모습과 봉황과 수련, 서낭당을 오브제로 하여 우리의 토속 신앙의 서낭당 속에서 태고의 시간과 불교의 겁과, 그 속에 장수의 봉황과 학, 그리고 수련처럼 맑음으로 참과 진실속에 영생과 내세에 까지의 시간을 표출한 가장 한국적 삶을 표현한듯.
가령, 우리나라 미술사에 잘 알려진 박수근 화가의 작품은 우리민족의 정서인 질박한 질감의 그림으로 그 속에는 치마, 저고리의 향토색 짙은 어머니 그림으로서 민족정서의 표현으로 걸출한 그림인데, 그것은 가시적, 피상의 세계에의 외면적 표현입니다.
그러면 민족의 공통된 생각은 무엇일까요?? 위의 아리랑에서 보는 민족적 공통사항으로 恨이 그 기조를 대변하고, 이러한 갈등과 고뇌의 정서는 무엇인가 하는 점에서 최홍원 화백의 작품세계는 이러한 사유적 관점에서 민족적 정체성으로 恨과, 恨을 염원하는 민족혼(魂)의 표출이라고 감상합니다.
(본 게시글은 여러 예문도 참조하여 일반인의 감상을 위한 이해의 글 입니다. 또한 필자 역시도 일반인으로 본 작품성격에 관해서는 혹 오류가 될 수도 있기에 어느 관점의 고형으로 규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강원의 화가 최홍원 (원주 역사박물관) ▶빈센트 반 고흐(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조금만 돌아서서 보시면 오뚝한 콧날, 이마의 외각선, 아래턱의 하악각과 그림에 대한 열정은
이미지 복사, 붙여넣기 한듯 닮은 꼴입니다.
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H
<아래 글은 본제와는 거리가 있는듯 보이지만 작가의 그림중에 서낭단등 무속을 찬양한다기에 이러한 생각은 잘못이라는 역사인식의 문제를 논함>
◆ 삼족오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삼족오는 중국과 고구려에 그림에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평창의 옛 지명으로 고구려 시대에는 욱오(郁烏)나 우오(于烏) 신라떄에는 백오(白烏)라고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평창의 고지명은 알려지지 않은 특수한 예로서 필자는 일반의 삼족오 설을 넘어서는 설로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여기에 郁, 어조사 于, 휜 白자 모두 빛을 이야기하며, 그 빛이란 태양을 의미합니다. ( 어조사 于자는 오! 태양, 또는 저! 태양이라 하는 감탄사로 저字는 지시대명사이나 그보다 더 큰 영역의 의미로는 감탄사가 된다)
욱오, 우오, 백오의 앞 글자는 날 日자의 태양을 의미하며 뒤에 까마귀 烏자는 무슨 의미가 있슬까요??
고구려시대는 지방분권화가 아닌 중앙집권화의 군현체제로서 마을의 작은 부락(洞)으로 까마귀들이 모여있는 현상인지 烏자를 쓰는 예도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태양을 말하는 于, 郁, 白자와 같이 사용되었기에 태양神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태양신으로는 이짚트 고대 상왕조 시대부터 파라오 (Pharaoh) 는 통치자 왕을 뜻하는 칭호로서 왕은 태양숭배사상의 태양신(Ra)神의 아들이라 하여 神으로 여겼다. 이러한 서양의 태양신으로 접해볼때 우오, 욱오의 예에서 나타난 삼족오도 태양신의 범주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작가의 그림에서 삼족오에 대하여 神격의 위상을 요하는 것은 아니다. 봉황이고 삼족오나 부엉이등 모든 새들을 대상으로 그린 점은 자연적이지 않고 인위적인 주검들에의한 인간사회의 질박한 땅(地)을 벗어나 승천하고자하는 즉, 이상사회로의 회귀를 나타내는 점으로 이해해 봅니다.
또 하나의 단적인 예를 보면 문자가 없던 선사시대의 마지막에 중국 무씨사당 석실에 화상석(畵像石) 윗칸에서 새의 데포름한 형상을 볼 수도 있습니다. 4방위중 주작이나 삼족에 대하여 새는 전설속에 영물로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는 神적인 경지에 이르는 이러한 점에 앞으로 많은 연구가 있었으면 합니다.
◆ 일반적으로 성황단(서낭단)은 미신으로만 취급하는 인식문제를 고찰하면,,,
성황단은 고려말 중국에서 전파되었으며 조선은 유교국가로서 각 군현에서는 수령이 주재하여 사직단 제사와 지역 산천에 대한 제사, 성황사 (城隍祠) 제사, 여단(厲壇)에 올리는 제사, 해신(海神) 및 도신(島神)에 대한 제사 등을 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권근이 제안한 여제단의 제사가 유교식 의례인 것과 같이 국사(국행)성황사의 성황제는 그간 난잡하게 성행하던 민간 신앙으로서의 성황제를 정비합니다.(대관령의 국사성황당은 국사 성황제가 아니라 마을 동제를 지내는 곳으로 이름만 국사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도성 안에서, 사족의 부녀로서 친히 야제(夜祭) 및 산천· 성황사에서 제사를 행하는 자, 사노비로서 사사(寺社)와 무격에게 시납(施納)하는 자, 조부모·부모의 영혼을 무당의 집에 맞이하여 혹은 지전을 쓰거나 상인(喪人)이 무격에게 가서 음사를 행하는 자들은 금후로는 한결같이 『경국대전』에 의하여 엄하게 규찰을 가하라."고 사헌부에 전지(傳旨)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성종실록』 1478년(성종 9) 1월 27일].
세종실록이나 중종실록에서도 이와 같은 성황사에서의 무격 행위를 금하는 등의 금제(禁制) 조치들이 나온다. 조선 정부는 초기부터 기존의 제의들을 유교식으로 정비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조선 중기 시대에는 국사성황사가 마비되었다가 후기에 다시 부활하게 된다, 이런 시기에 음사등 신앙이 번지며 또한 마을에서는 동제의 서낭신을 모시게 되는 것이다.
군, 현의 수장이 행하는 국사성황제는 마을 동제와는 같은 기원제이지만 그 형식면에서 유교적 입장으로 대보름 이전에 날을 잡아 밤 자시에 신성하게 행하였으며. 내용은 "국태민안"이라는 위패를 모시고. 국가의 호국을 기원하는 바 이러한 호국의 내용엔 인류에게 언제나 그치지 않는 요즘 코로라처와 같은 전염병에 대한 무사의 기원이 중요하였다.
평창의 국사성황사에 대하여 김택용씨의 증언중에는, 어느 해엔가 초교 저학년시절에 성황제를 지내는데 뒤에 호랑이가 있었고 그래도 제사를 마쳤지만 제사장인 부친 김학수 옹이 생각해 볼때 호랑이로 인하여 부정을 탔슬듯 하여 다시 제일(祭日)을 잡고 제수(祭需)용품의 전물(奠物)을 다시 장만하여 올라가 작헌(酌獻)을 올리고 다시 치제(致祭)를 하였다 한다.
글쎄요, 사람들은 호랑이는 영물이기에 제를 보호해 주기위해 뒤에 있었으니 상서로운 일이다 하겠지만, 군민 전체의 호국 안민을 책임진 제사라 제사장은 후일 다시 올라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이렇듯 서낭단하면 요즘 우리 상식으로는 미신이라 하는데 미신이라 하는 점은 일제의 잔제로 일제 강점시기에는 1919년 3,1 독립운동 이후 민족말살정책으로 마을 동제가 단합의 장이기에 이를 척결하기위해 침을 세번 뱉고 지나가면 신수가 밝아진다는등 또한 역사에서 고려장이라는등 ... 누가 자기 신에게 침을 밷고 누가 자기 조상에게 침을 뱉을까? 하기야 요즘은 도시 낡은 건물은 모두 효(돈) 고려장(요양원)이라 쓰여 있지만,,
또한. 해방이후 일부 크리스쳔인들이 무속신앙을 미신으로 간주하여 질타하는 일들이 벌어 집니다.
그 하나의 예로 노산의 성황사는 국사(국행)성황사로 필자는 초교 3학년때 친구들 3명과 노산에 올라 전쟁놀이를 하다가 한 친구가 여기는 노성장군의 성터이고, 저 집에(성황사) 그림이 있다하여 성황사에 문을 열고 들여다 본 생생한 기억을 가지고있습니다. 당시에 무서움에 양문으로 삐그적 거리는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들여다 보니 4절지 인물화 한장이 벽에 걸려 있었습니다.
흑백으로 된 가슴까지의 인물화에 얼굴은 사각으로 그려졌는데 무서워 얼른 돌아셨던 기억을 가지고 있는바 필자의 친 동생의 증언으로는 이후 3년정도 후에 이곳에 친구들과 올랐는데 중리의 목**란 친구가 문짝등 발로 차서 떨구어서 들고나와 미신이라고 짖밟았다고 합니다. 초교 3, 4학년 학생이 교회서 배운데로 실천했던 것입니다. 이후 김택용의 증언에서는 국태민안의 위패만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시기에는 이러한 미신의 귀신들이 얼마나 무서웠던가 예를 또 하나 든다면 원주 단구동엔 좌상의 철불이 다섯개나 공터에 딩굴고 있었는데 그 철불들은 인체의 등신상과 같은 크기 정도라 아마 고철장수가 들고갔다면 한달 수입보다 더 좋았슬텐데. 이후 춘천박물관에서 수거하여 현재는 다섯점 모두 춘천박물관 2층에 상설전시되고 있다. 당시에 우리사회는 미신을 탓하기에 고철장수도 주워가지 않았던 점으로 5~60년대 크리스쳔등 왜래문화가 들어오며 이러한 무속등은 미신으로서 박해를 받게 되는 점으로 우리 주변에 현저하게 많이 있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원주 박물관이 개원하면서 똑같은 하나의 국립박물관인데도 이 불상은 돌아오지 못하고 현재 원주박물관 메인 현관에는 이미테이션(모조품) 한점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그러면, 평창읍 하리에서 4~5년전 출토된 고조선식(평양식) 청동검은 현재 춘천박물관에 있지만 전시되지는 않는데 만약 평창박물관이 신설된다고 평창으로 귀향할 수 있슬까요??
본인이 찾아 게시하는 미탄면 기화리 쌍굴의 구석기 유물은 과학적 시굴로 현제 연대박물관에 보존되고 있지만 평창에서는 표지판 하나도 없이 까맣게 있어버린 역사로서 이 유물도 제자리러 귀향할 수 있슬까요??
그리고 평창에서는 매년 역사 세미나를 하고 예산을 쓰는데 과연 역사의 a.b..c 순을 알고 있는지요??
원주는 이제 문화도시로 태어나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하고 있습니다.
국보 101호의 법천사지의 "지광국사 현묘탑"은 2016년부터 5년간 대전 국립문화재 연구소에서 보존처리를 마치고 이제 법천사지 정비공사가 완료되는 3년내로 제자리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동 탑은 승탑으로 우리나라 탑중에는 가장 화려하게 조식이 된 탑으로 필자는 동 탑이 일본까지 팔려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를 평창경찰서 탑의 글에서 자상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원주는 그간 현묘탑의 환수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바 이제 지광국사탑비와 함께 국보 2점을 가지게 되며 문화도시로 거듭 태어나기에 최홍원 작가의 작품 7,800여점을 기증받아 앞으로 최홍원 미술관도 마련하겠다 하는바. 엯 문화의 도시로 거듭나길 기원합니다.
( ▲ 무씨사당내 단군으로 알려지는 화상석 내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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