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속, 그리스도의 빛" -지학순 주교 16주기를 기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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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속, 그리스도의 빛" -지학순 주교 16주기를 기념하며

libera추천 0조회 12209.03.12 11:39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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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2일, 지학순 주교(전 천주교 원주교구장)의 16주기가 되는 날이다. 지학순 주교는 김수환 추기경과 윤공희 대주교와 더불어 한국교회의 성직자 가운데 사회정의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도로 선택된 몇 안 되는 주교 가운데 하나로 기억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교구, 그리고 주교
교황 바오로 6세는 1965년 3월 22일 춘천교구에서 원주시, 원성군, 영월군, 삼척군, 정선군, 울진군을 분리시켜 원주교구를 설정하는 칙서를 발표하고 부산 초장동 성당에서 일하던 지학순 신부를 주교로 임명하였다. 원주교구는 이른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낳은 한국의 첫번째 교구였으며, 지 주교는 그 초대 교구장이다.농촌과 광산촌, 어촌이 대부분이 가난한 지역에서 주교좌성당인 원동성당 근처의 낙원여관을 매입하여 주교관 겸 교구청으로 사용하다, 2년 만에 인근 언덕바지에 주교관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는 주교가 되면서 문장의 표어를 "빛이 되라(Fiat Lux)"라고 지었는데, 이런 사목지침을 내렸다.
▲사회전반적인 면에서 적극 참여하여 정신적인 지도적 위치를 갖자. ▲ 대중의 편에 서서 그들을 이해하고 협조해 줄 수 있는 그들의 어버이가 되자. ▲ 옳고 바른 것을 솔선수범하여 다른 사람들이 추앙하는 목표가 되자. ▲이렇게 선의의 사람들을 하느님께 인도하자. ▲하느님의 새 생명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맑고 아름다운 마음과 생활로 세상에 빛을 주게 하자.

지학순 주교는 처음부터 자신의 사명을 신자들의 신심생활과 교회활동에 제한하지 않았다. 교회는 세상 안에 존재하며, 세상의 문제를 끌어안고 고민해야 한다는 공의회 정신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는 교회 구조를 평신도 중심으로 재편하고, 교구민들과 지역민들의 생활상 도움이 되고자 했다. 그래서 신용협동조합도 만들고, 학교도 세웠다. 필요하다면 천주교 신자가 아닌 사람도 기용했다. 당시 교구 기획실장이었던 김영주씨의 경우엔 신자가 아니었으나, 행정업무의 전문가로서 교구에 발탁되었다.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자

1970년 봄, 서울 YMCA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나와서 버스차장들의 '삥땅'은 "죄가 아니다"라는 요지의 발표를 해서 가난한 이들의 생존권을 변호했던 지학순 주교는, 급기야 1971년 원주문화방송 설립과정을 둘러싸고 박정희 대통령과 관련있는 5.16장학회의 비리에 경험하고, 이를 비호하는 정부에 대한 부정부패 규탄대회를 교구 차원에서 벌이게 되었다. 이는 원주에서 처음 일어난 대규모 시위였다. 그해 성탄절에 발표된 사목교서에서는 "나는 오늘의 한국사회가 바야흐로 극도에 달한 불평등과 부자유, 억압과 빈곤으로 말미암아 전 민중이 무서운 절망 속에 빠져 있으며 소수 특권층의 끝 모를 부정과 부패, 대중 억압이 인간의 양심과 도덕을 송두리째 앗아가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이러한 위기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어 분연히 일어나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이 교서를 발표한다"고 했다.


한편 1972년에 때마침 닥쳐온 장마로 대규모 수해가 발생하자, 미제레올 등 국제원조단체를 방문하여 도움을 청하고, 한편으론 원주교구 사목위원회에서 강사를 일하던 장일순을 내세워 평신도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73년에는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자>라는 사목교서를 통해 사제들은 사회교리를 탐구하고,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신학과 민중적 사목경험을 배우도록 촉구했으며, "본당과 공소를 모든 교우, 모든 민중의 협동생활의 기지로, 공동체화의 터전으로 발전시키도록" 개방하였다. 이 당시 교구에 1만 부 이상 보급한 것이 사회정의와 인간해방에 초점을 맞춘 <현실에 도전하는 성서>라는 책자다.

그리고 평신도의 위상을 높여서, 본당 사목위원 뿐 아니라 방송국과 학교, 재해대책사업 등에서 평신도들에게 자율성과 책임을 부여하면서 평신도와 사제의 관계에 대한 획기적인 발언을 하였다. 1973년에 발표된 세부지침에 따르면, "사제의 맡은 바는 원칙적으로 성직 임무이며 영신적 지도다. 신도 지도자의 맡은 바는 사회적 활동이다. 그러나 사제도 사회적 활동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도 지도자의 경험과 지식을 존중하고 겸허한 자세로 그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배우는 자세가 없이 권위만을 행사하려는 태도는 어리석은 것이다. 권위란 참으로 겸허하고 헌신적으로 봉사하며 덕을 베풀 때에만 생겨나는 위엄이지 어디서 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정의의 실천은 주교들의 의무

그러나 지학순 주교가 보여준 사목자들로서의 헌신성은 <양심선언> 사건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세상을 위해 언제든지 자신을 내놓을 각오를 가져야 참된 목자가 된다는 것이다. 1974년 7월 6일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하여, 내란을 선동할 목적으로 김지하에게 자금을 주었다는 혐의로 김포공항에서 지학순 주교가 중앙정보부에 강제 연행되었다. 당시 김수환 추기경이 주교회의 상임위원회를 소집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가운데 박정희 대통령과 담판을 지으러 갔고, 7월 10일 주교회의를 마치고 다른 모든 주교가 교구로 돌아간 가운데 혼자 남은 윤공희 대주교의 주례로 이날 오후 6시에 200여 명의 사제들과 수도자 400여 명과 평신도들이 모여서 시국미사를 봉헌했다. 이어 '정의의 실천은 주교들의 의무'라는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이날 밤 8시에 중앙정보부에서 풀려난 지학순 주교는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공포심이나 잠 안 재우는 것이나 설사병이 아니었다. 갑자기 취조하던 녀석이 사진을 수백 장 획 집어던지며, 천주교회가 다 썩었는데 너 혼자 뭘 잘났어 이 새끼야, 하고 욕을 했다"는 것이라고 고백했다. 결국 지학순 주교는 명동 샤르트르 성바오로수녀원에 연금된 상태에서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1972년 10월 17일에 민주 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을 통해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며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라는 내용의 <양심선언>을 발표했다.
구속된 지학순 주교를 석방하기 위해 사제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태동된 것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다. 그해 9월 23일 원주에서 열린 성직자 세미나에 참여했던 30여명의 소장 사제들이 주교관 성당에서 감실문을 열어놓고 사제들의 나약함과 여린 마음을 없애주도록 기도하면서 정의로운 투쟁을 결의했다. 그리고 세미나에 참석한 300여 명의 사제들이 토론 끝에 사제단 결성에 합의하고 다음날 원동성당에서 기도회와 가두시위를 벌였다. 9월 26일에는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순교자 찬미 기도회'에서 처음으로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이름으로 '1차 시국선언문'이 발표되었다.
그해 10월 9일에 서울 가톨릭대학에서 열린 전국성년대회에서는 김재덕, 황민성, 나길모, 두봉, 박토마 주교가 참석하여 "주교를 석방하라" "민심은 천심이다"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5천 여명이 시위를 벌였으며, 정의구현사제단은 '제2 시국선언(11.6), '사회정의 실천선언(11.20)을 연이어 발표했다. 1975년에 발표된 우리의 결의'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은 거부되고 독재자의 말은 신성시되며 교회는 감시당하고 독재권력은 성역화되며 신앙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는 박해받고 권력자의 폭력은 난무하고 있다"고 밝혔다. 1975년 2월 17일 지학순 주교가 석방되었는데, 투옥된 지 226일 만의 출감이었다.반대편에 있던 이른바, 구국사제단
한번 점화된 사제들의 횃불은 1976년 3.1명동구국기도회 사건으로 이어지고, 원주교구의 신현봉 신부를 비롯해서 문정현, 함세웅 신부 등이 정부전복을 선동한 혐의로 다른 재야 인사들과 더불어 구속되었다.   이 때문에 김재덕 주교와 윤공희 대주교, 김수환 추기경과 지학순 주교 등이 시국미사와 강론 등을 통해 사제들의 행동을 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교회의 사회참여를 모든 성직자들이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인혁당 사건을 파헤치던 시노트 신부 등 메리놀회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사회참여에 불만을 갖고 있던 서울대교구 원로신부들 가운데 봉희만 신부와 김창석 신부 등이 공개적으로 선교사들의 반한(反韓) 활동을 반대하며 메리놀회 총장에게 자제해 줄것을 요청했다. 오원춘 사건 이후로는 전주교구의 김재덕 주교가 전주 중앙성당에서 강론을 통해 '현정권의 직무 집행 정지 가처분'을 주장하고 1만명이 이르는 신자들이 시위를 벌이자, '교회 현실을 우려하는 연장 사제'라는 명의로 사회참여를 비판하는 호소문이 주교단에 전달되었다. 이는 "거룩하고 품위 있고 고상한 교회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 다시 성당에 틀어박혀 위계질서를 세우며 영신적인 일만 돌보라는 호소의 형식을 띤 권고였다.
이른바 구국사제단의 발언은 주교단의 보수적 인사들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것이었는데, 교회쇄신과 사회참여를 둘러싸고 주교단 안에서도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던 것이다. 이때 납득할만한 이유를 대지 못하면서 자신의 의견에 일단 반대하고 나서는 주교들에게 지학순 주교는 "당신이 뭘 알아. 알아보고 다시 얘기해. 공부도 좀 하고.." 불같이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그래서 의견이 다른 주교들은 아예 지 주교를 피해 버렸고, 지 주교 역시 나름대로 속이 상했다고 후일 고백했다.
옛다 과자나 사 먹어라
그러나 이 모든 주교의 민주화투쟁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분이 가난한 이들에게 자신의 직무를 개방했다는 점이다. 주교관이 있는 학성동 언덕바지는 세상의 바닥에서 모든 아름다운 것을 길어올리고 있었다. 언젠가 주교관 이웃에 살던 김지하가 이런 시를 썼다. 제목은 '축복'이다.
    
원주역 바로 앞엔 해방촌
     해방촌 바로 뒤엔 법원
     법원 바로 옆엔 주교관 

     어느 그믐밤
     은발의 주교님 길을 가셨다
     '할아버지 놀다 가세요' 
     '놀 틈 없다' 
     '틈 없으면 짬을 내세요' 
     '짬도 없다' 
     '짬 없으면 새를 내세요' 
     '새도 없다' 
     '새도 없으면 탈나세요' 
     '탈 나도 할 수 없지
     옛다 과자나 사 먹어라' 실제로 주교관 언덕에는 매춘부들이 줄 지어 서서 지나가는 행인을 꼬드겨 하루의 밥을 벌었다. 그녀들은 이따금 주교관 옆 뜰이나 뒷 숲에서 노닥거리다 가곤 했기에 지학순 주교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괜한 농을 건네는 그녀들에게 손녀딸들 처럼 편안하게 응대한 지 주교의 모습이 특별하다. 그가 거처를 잃은 노동자들에게 용돈을 쥐어주고, 강단을 빼앗긴 교수들에게 말할 공간을 제공해 주고, 감옥에 갇힌 자들을 찾아봐 주었다. 그의 평생 도반이었던 김수환 추기경도 영면한 가운데, 새삼 지학순 주교의 소탈한 음성이 그립다.
한상봉/ 지금여기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