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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718
4월2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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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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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인간의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신비의 십자가 앞에 그저 조용히 무릎을 꿇습니다!>
성목요일 저녁 예수님께서는 세족례를 통해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과 겸손을 보여주셨습니다.
성금요일 예수님께서는 완벽한 순명과 십자가 죽음으로 모든 것을 완수하시고, 모든 것을 획득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높이 매달려계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처절한 고통 한 가운데서도 마무리 사목활동을 전개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정말이지 용서 못할 상황에서 용서하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 34)
늘 흔들거려서 걱정거리였던 제자 공동체와 성모님 사이에 자매결연을 맺어주십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장 26-27)
갈 데까지 간 우도, 그래서 모든 사람이 다 포기한 우도에게 천국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 43)
예수님의 죽음은 실패가 결코 아닙니다. 새로운 왕권의 첫출발을 울리는 깃발입니다. 구원의 서막입니다. 하느님의 인류구원사업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완벽하게 마무리됩니다.
십자가상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과제를 던져주고 계십니다. 우리의 거짓된 자아를 당신 십자가에 함께 못박아버리라는 과제입니다. 우리 역시 당신 십자가상 죽음과 더불어 죽으라는 과제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라는 과제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예수님 한 분의 십자가 죽음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과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는 죄송스런 말씀이지만 예수님 한 분의 수난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누릴 기쁨과 환희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한 분의 희생으로 우리 모두가 희망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우리의 고통이 누군가에게 기쁨의 원천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십자가가 그 누군가에게 행복의 씨앗이 되면 좋겠습니다.
십자가형, 인간이 만들어낸 여러 가지 처형방법 가운데 가장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로마제국에서는 탈영병, 살인자, 폭동가, 혁명가, 강도 등 죄질이 가장 악한 사람들에게 내려지던 최고형이었습니다.
본격적인 십자가 형벌이 시작되기 전, 보통 병사들은 죄수를 낮은 기둥에 묶습니다. 사형집행에 앞서 채찍질을 시작합니다.
가죽채찍이나 끝에 작은 납 구슬을 단 채찍이 주로 사용되었는데, 채찍은 사형수들의 등, 가슴, 머리, 배를 향해 내리쳤습니다. 단 한 번의 채찍질로도 피부는 터지고 파열되었습니다. 몇 차례의 채찍질만으로도 온 몸은 피투성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죄수는 먼저 가로로 된 나무에 어깨와 양손을 고정시킵니다. 그리고 빌라도의 총독관저에서 갈바리아 언덕까지 약 600미터 가량 되는 거리를 걸어 올라가야 했습니다. 채찍을 든 병사들은 죄수가 딴 짓 하지 못하도록 눈에 불을 켜고 따라갔으며, 군중들은 길가에 나와 구경을 하곤 했습니다.
사형 집행장에 도착한 죄수는 미리 세어져있는 세로 기둥에 끌어올려져 양손과 발이 끈으로 묶입니다.
그리고는 양손과 발에 긴 못을 박아 단단히 박습니다. 손과 발은 예민한 부위인 만큼 못 박힘으로 인한
사형수의 고통은 상상할 수조차 없을 만큼 극심한 것이었습니다. 손과 발에 못이 들어와 박히는 순간, 얼마나 통증이 심했던지 사형수들이 내지르는 비명은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육체적인 통증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지만,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정신적 고통은 더 큰 것이었습니다.
십자가형을 집행한 병사들은 예수님께서 걸치셨던 통으로 짠 속옷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심지를 뽑았습니다.
오늘 주님 수난 성금요일을 맞아 수난복음을 읽고 또 읽어보았습니다. 정녕 통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께서 다른 누구도 아닌 그토록 애지중지하셨던 동족들로부터 인정사정없는 뭇매를 맞고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자신이 빚어 만드신 피조물인 한 인간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고 있습니다.
참으로 큰 신비이며 큰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복종하시다니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이토록 무능하시다니요. 이토록 맥없이, 이토록 무력하게 고개를 떨어트리시다니요. 인간의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신비의 십자가 앞에 그저 조용히 무릎을 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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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X8HKkrF7hd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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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남기신 겉옷과 속옷의 의미: 은총의 풍부함과 진리의 단일성>
오늘은 성 금요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제6시’에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십니다. 제6시는 에덴동산의 6번째 날을 상징합니다.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인을 만나 당신이 주시는 ‘생명의 물’에 관한 말씀을 하신 시각도 ‘제6시’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은 예수님께서 잡히신 곳도 ‘동산’이고 묻히신 곳도 ‘동산’임을 강조합니다. 이는 구약의 에덴동산을 염두에 두고 읽으라는 뜻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았다는 말을 함으로써 탈출기에서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그 고기를 집에서 먹었던 파스카 예식도 함께 고려하며 읽으라고 우리를 이끌어주고 있습니다.
요한에게 있어서 여섯 번째 날은 ‘창조’, 곧 ‘세례’의 날입니다. 이 창조를 위해 예수님은 ‘은총과 진리’를 품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은총’은 우리에게 하느님 자녀라는 정체성을 심어줍니다. 어머니가 자녀에게 주는 음식이 은총입니다. 자녀들은 이 음식을 먹고 부모의 자녀임을 믿습니다. ‘진리’는 자녀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모범’입니다. 하느님 자녀의 모범은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입니다. 십자가의 모범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녀가 아버지를 보고 배우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자녀는 동물적인 본성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참 인간이 되어 세상에서 살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은총과 진리를 내어주는 상징적인 모습은 그리스도의 ‘겉옷과 속옷’으로 표현됩니다. 경비병들은 겉옷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가집니다.
겉옷은 어느 나라나 ‘신분’을 나타내는데 예수님 당시에는 더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신분, 즉 하느님 자녀로서의 천상 왕의 신분을 우리에게 물려주는 것입니다. 이 은총은 마치 에덴동산의 물줄기가 4줄기로 갈라지듯 온 세상으로 퍼져나갑니다. 이는 은총의 충만함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속옷은 통으로 된 것이기에 경비병들은 제비를 뽑아 나누어 가집니다. 속옷은 겉옷의 본질을 말합니다. 아무리 은총이 다양하고 풍부하더라도 그 본질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음입니다. 진리는 하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빌라도는 진리를 앞에 두고 진리가 무엇이냐고 어리석은 질문을 합니다. 진리는 하나이기에 한 교회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골고타 위에 여러 여인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오직 성모 마리아를 어머니로 우리에게 주시고 요한은 성모 마리아를 자신의 집에 모십니다. 각자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다양하게 주장하지만 우리는 가톨릭교회만이 그리스도의 참 진리를 품고 있다고 믿습니다.
2004년 9월, ‘오프라 윈프리 쇼’의 19번째 시즌을 시작하면서 오프라 윈프리는 방청객 276명 모두에게 제너럴모터스(GM)의 스포츠 세단인 폰티액 G6을 한 대씩 선물했습니다.
이날 방청객이 받은 자동차의 가격은 모두 합해 7백만 달러(약 76억 원)에 이릅니다. 선물을 받은 방청객들은 ‘내 가족과 친구들이 차를 받아야 하는 이유’를 편지로 써 보낸 사람들입니다.
쇼는 윈프리가 방청객 11명을 무대로 불러내면서 시작됐습니다. 그는 이들에게 차를 한 대씩 선물했으며, 이어 남은 방청객들에게 선물 상자를 하나씩 나눠줬습니다. 이어 윈프리는 방청객들에게 나눠 준 상자 중 하나에 12번째 차 열쇠가 들어 있다고 말했고, 방청객들이 상자를 열었을 때 모든 상자에 자동차 열쇠가 들어 있었습니다.
윈프리는 이 쇼를 위해 제네럴모터스에 차 협찬을 의뢰했습니다. 회사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렇게 엄청난 쇼가 성사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프라 윈프리가 아니면 회사가 그녀에게 76억 원 상당의 차를 제공하려 했을까요? 그렇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만한 홍보 효과가 있으니 제공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로부터 은총을 받기 위해 인정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하십니다.
차는 방청객 모두가 받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겉옷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차가 없어서 온 이들 모두가 차를 받을 자격이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옆구리에서 피와 물을 쏟아내시며 모두가 하느님 자녀가 될 자격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 자녀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마치 하느님 자녀가 아닌 것처럼 세상 것을 잃음을 아깝게 여긴다면 주님께서는 아드님을 통해 주신 자녀의 자격을 박탈하실 수도 있으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차가 오프라 윈프리이기 때문에 전해질 수 있음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여러 통로로 은총을 주시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마치 성모 마리아를 통해 카나의 혼인 잔치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예수님은 하나의 교회를 세우시고 하나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성모 마리아를 모신 교회가 참된 은총의 통로요 진리를 품고 있음을 되새길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로서 겉옷과 속옷을 입고 있습니다. 겉옷은 내가 받은 은총이고 속옷은 내가 깨우친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프라 윈프리처럼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하느님 자녀로서 당당하게 은총을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최대한 많은 이들, 원하는 모든 이에게 은총을 내어주어야 합니다. 그 은총을 내어줌은 찢어지는 아픔을 수반합니다. 하지만 이럴 줄 아는 사람이 진리를 깨우친 사람입니다. 우리는 매일 기도로서 은총을 받고 그것일 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 금요일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그 능력이 일치를 지향하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1947년, 미국 야구계에 굵직한 역사가 이뤄졌습니다. 재키 로빈슨이라는 흑인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처음으로 입성한 것입니다. 예상했던 것이지만 로빈슨은 힘든 시련에 직면합니다. 심한 말로 모욕당하는 것은 예사였고, 백인 선수들은 고의로 몸을 부딪치고 땅바닥에 떠미는 일도 수없이 잦았습니다. 수만 명의 관중도 로빈슨 편은 없어 보였습니다. 로빈슨이 경기장에 나타나면 인종차별과 관련된 욕설을 퍼부어댔습니다. 심지어 같은 팀 동료들까지도 로빈슨을 조롱했습니다.
시즌 중반쯤 지난 어느 날, 로빈슨은 더없이 힘든 게임을 하고 있었습니다. 쉬운 땅볼을 몇 개나 처리하지 못했고 타격도 형편없었습니다. 관중들은 다른 날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습니다. 그는 어느 때보다 지쳤고 실수만 연발하고 있었습니다. 대기석으로 들어온 로빈슨은 포기하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때, 팀의 주장이 슬그머니 다가와 그의 어깨를 감싸주었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순간 관중은 숨죽이듯 조용해졌습니다. 로빈슨은 힘이 다시 샘솟는 것을 느꼈습니다. 훗날 로빈슨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 간단한 몸짓이 나를 살렸지요. 주장은 내가 정말 우리 팀 선수가 된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겉옷을 내어주며 자신의 능력이 수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속옷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속옷도 아낌없이 내어주며 다양한 은총 안에서 진리는 하나일 수밖에 없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한 팀으로 만드는 힘이 더 중요합니다. 갈라지는 공동체는 은총이 많아도 그 은총이 제 역할을 발휘하게 할 수 없습니다. 은총을 청하는 이들이 그 은총을 주는 이 안에서 하나로 모이게 해야 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하나인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진리는 하나입니다. 교회가 갈라져서는 안 되고 공동체가 분열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일치된 교회를 통해 충만한 성령이 흘러나옵니다. 내가 일치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 또한 성 금요일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입니다. 은총의 충만함과 다양성은 모든 이들이 하나 됨을 지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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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8,1-19,42 : “다 이루었다”
인간은 범죄로 인해 자신의 능력으로는 하느님과 화해할 수가, 즉 구원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자기가 지은 죄를 안고 죄 중에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죄의 용서와 더불어 죄의 죽음으로부터 새로운 삶을 마련해 주셨다. 이것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님의 희생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한 순명과 아버지께 대한 사랑으로 이루어 주셨다. 즉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이 구원을 이루어 주신다. 여기에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난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크고 희생적인 사랑은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는,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다. 그러한 사랑을 하느님이시오 사람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이렇게 하느님은 모든 인간을 사랑하신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있다면 십자가 앞에 서 있을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영광을 감추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시고 30년이나 지내셨으며 이제 순명의 극치인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성부의 뜻에 따라 구원의 성업을 완성하실 시간에 가까이 이르신다.이 때 그분은 사랑하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고 겟세마니 동산으로 가시어 밤이 늦도록 땅에 엎드려 당신이 당하실 수치스러운 고통과 모욕, 죽음을 내다보시면서 피와 땀을 흘리면서 괴로워하신다. “아빠! 아버지,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14,36). 그분은 이렇게 탄식하며 기도하셨다.
그리고는 악당들에게 강도처럼 붙잡혀 갖은 조롱과 매를 맞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이렇게 제자인 유다로부터 배반을 당하고,또한 베드로 사도에게도 세 번이나 ‘그를 모른다.’는 말로 배반을 당하셨고, 온 몸은 상처로 피투성이가 된 채 머리에는 가시로 만든 관을 쓰고 어깨에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세 번이나 넘어졌고 결국, 갈바리아 언덕에 끌려가 온 몸이 벌거숭이가 되어 굵은 쇠못으로 네 수족이 못 박혀 십자가 위 허공에 달려 강도들 사이에 죽으셨다. 그러면서도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시고, 회개하는 강도를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마지막으로 당신이 숨을 거두시기 전에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제자에게 맡기심으로써, 당신의 어머니를 우리 인간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고, 교회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다. 이제 교회는 그리하여 하느님의 자녀들을 잉태하고 자녀들을 낳아주는 어머니가 되기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을 낳아주신 마리아는 교회의 모습이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당신의 사랑을 아버지께 모두 바치시고 이제는 “목마르다!”(19,28) 하신다. 지금은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기를 목말라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제 다 이루어졌다.”(19,30)고 하신다.그리고는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루가 23,46). 즉 당신의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심으로써, 이제는 더 이상 당신의 영이 당신에게만 머물러 있지 않고 모든 인간들 위에 부어질 수 있도록 아버지께 맡기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돌아가신 후에도 이제 잠든 아담의 옆구리에서 하와를 창조하셨듯이, 십자가 위에 잠드신 새로운 아담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을 쏟으심으로써 당신의 신부인 교회를 탄생시키셨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이제 예수님의 구원을 세상에 전파하고, 그 구원을 완성에로 인도하면서, 항상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천상의 예루살렘에서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면서 순례의 길을 갈 것이다.
이렇게 심장이 한 군사의 창에 찔려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흘리심으로써 하느님께서 약속하셨고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던 인류 구원의 속죄 물로 희생되신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십자가의 제물로 바치신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성부께 드리신 순명이오, 우리를 천국에 초대하시어 당신의 생명을 우리와 함께 나누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임을 우리는 깊이 묵상하며 감사하여야 하겠다. 이 하느님의 사랑을 잠시 묵상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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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다 이루어졌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요한 13,1)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이르시기까지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세례자 요한이 말한 바와 같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를 염소에게 짊어지워 광야로 내보내거나, 양을 제물로 바치면 자기들의 죄가 없어진다고 생각하였고,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많은 이의 죄를 메고 가는 ‘고통받는 주님의 종’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봅니다.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어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섬기러 오셨고, 또 많은 이의 몸값으로 당신 목숨을 바치러 오셨습니다.(마르 10,45 참조)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은 “인류의 결정적인 속량을 완성하는 파스카의 희생 제사이며, 동시에 인간을 하느님과 화해시키고 일치시키는 새로운 계약의 희생 제사”(『가톨릭 교회 교리서』, 613항)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습니다(마르 15,38 참조). 이 성전 휘장이 ‘찢어지다’라는 단어는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서 하늘이 ‘열렸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 위로 올라오시자,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그분께 하늘이 열립니다.(마르 1,10 참조)
지금까지 하느님의 얼굴은 하늘과 휘장으로 가려져 있었는데, 다만 상징적으로 일 년에 한 번 대사제가 그분 앞에 들어서 희미하게 그분을 알 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열리고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는 말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몸소 휘장을 걷어 내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분 안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랑하시는 분으로 당신 자신을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께 이르는 통로가 자유로워졌습니다.”(베네딕토 16세, 『나자렛 예수 2』, 26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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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십자가>
1)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께서는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 2,16-18) “염소와 황소의 피, 그리고 더러워진 사람들에게 뿌리는 암송아지의 재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그 몸을 깨끗하게 한다면,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히브 9,13-14)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우리의 죄를 씻어 주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이고, 우리에게 구원과 해방과 생명을 주신 일입니다. “그냥 각 개인이 자신의 죄에 대해서 스스로 속죄 제물을 바치면 되지 않은가?” 히브리서 저자는 그런 제물로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될 뿐이고, 죄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한다고 말합니다.(히브 10,1-4)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의 인류의 상황을, 죄와 죽음의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면서 살려 달라고 외치는 상황으로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으니 누군가가 구조해 주어야 하는데, 우리를 구하러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2) “하느님과 예수님은 그냥 하늘 높은 곳에 계시고, 인류에게 천사나 예언자를 보내서 구원을 받는 방법을 알려주시면 될 텐데, 하느님께서는 왜 굳이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사람으로 사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했는가?”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아지신 것”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또 구세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같아지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 사랑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9-10) (멀리 뭍에 서 있으면서,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에게 밧줄이나 구명대를 던져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은 곧바로 물에 뛰어들어서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을 직접 구해서 뭍으로 데리고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입니다. 구원을 얻는 길만 알려주고 “네가 알아서 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손을 잡고서 우리와 함께 걸으시는 분이고, 혹시라도 우리가 힘들어 하면 우리를 업고 걸으시는 분입니다.)
3)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주어지는 은총을 받는 방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로마 3,23-25)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로마 5,8-9) 안 믿는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죽음만 보지만, 신앙인은 ‘믿음의 눈’으로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와 구원과 생명을 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일, 또는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것을 보는 일입니다. ‘믿음’은 죽음 너머에 있는 생명을 보는 일이고,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믿는 일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십자가 경배’는, 십자가라는 물건에 경배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경배하는 일입니다. 그 사랑과 용서와 구원과 생명을 받는 방법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지만, 믿는 사람만 그 은총을 받게 됩니다. (안 믿는 사람은 자기가 안 받으려고 해서 못 받게 됩니다.)
4)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누구든지 내가 주는 구원과 생명을 얻으려면,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잘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면, 우리 십자가 자체를 없애 주셨어야 하지 않은가? 왜 우리 십자가를 없애 주시지는 않고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시는가?”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이 질문은, “구세주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뒤에도 인간의 생로병사의 고통과 인생살이의 고달픔은 여전히 남아 있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예수님께서 무엇을 없애 주셨는가?”라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1,7)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즉 자기가 겪는 고난을 이해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부활과 생명을 보는 신앙인은 자신의 십자가에서도 부활과 생명을 봅니다. 신앙인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는 “많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 밀알 하나를 땅에 심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 과정이 무척 고통스러울 수도 있지만, 결과를 믿는다면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 12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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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작년에는 ‘기생충’이 미국의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4개의 상을 받았습니다. 올해는 ‘미나리’가 미국의 영화계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아직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미국으로 이민 온 소수민족의 애환을 소재로 한 영화라고 합니다. 미나리는 음식의 주된 재료는 아니지만 음식의 풍미를 더해주는 재료입니다. 미나리는 주된 음식을 빛나게 해 주는 재료입니다. 아구찜에도 들어가고, 매운탕에도 들어가고, 쌈의 재료도 됩니다. 싱싱함과 독특한 향으로 입맛을 더해 줍니다. 미나리와 더불어 개나리도 있습니다. 개나리의 꽃말은 ‘희망’이라고 합니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노랗게 피는 개나리와 함께 봄이 오기 때문입니다. 외국에서 오래 산 사람이 고향이 그리워서 개나리를 가져다 심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파란 잎은 싱싱하게 자라는데 노란 꽃이 피지 않았다고 합니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꽃이 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유는 겨울이 없는 따뜻한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개나리는 겨울을 지나야만 노랗게 꽃을 피운다고 합니다.
우리 말 중에 ‘비나리와 희나리’도 있습니다. 비나리는 간절한 소망을 담아 기도하는 것입니다. 희나리는 마르지 않은 장작이라는 뜻입니다. 두 말은 가수 심수봉과 구창모의 노래 제목이기도 합니다. 심수봉은 ‘비나리’에서 간절한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였습니다. 구창모는 희나리에서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였습니다. 비나리의 가사 중에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나 당신 사랑해도 될까요. 말도 못하고 한없이 애타는 나의 눈짓들 세상이 온통 그대 하나로 변해 버렸어. 나만을 사랑하면 안 될까요. 마음만 달아올라 오늘도 애타는 나의 몸짓들 따사로운 그대 눈빛 따라 도는 해바라기처럼 사랑이란 작은 배 하나 이미 바다로 띄워졌네. 하늘이여 저사람 영원히 사랑하게 해줘요.”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사에 깊이 들어있습니다. 희나리의 가사 중에는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나의 잘못이라면 그대를 위한 내 마음의 전부를 준 것뿐인데 죄인처럼 그대 곁에 가지 못하고 남이 아닌 남이 되어 버린 지금에 기다릴 수밖에 없는 나의 마음은 퇴색하기 싫어하는 희나리 같소. 내게 무슨 마음의 병 있는 것처럼 느낄 만큼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어 그대 외려 나를 점점 믿지 못하고 왠지 나를 그런 쪽에 가깝게 했소.” 사랑하지만 이루어지지 않는 안타까움이 가사에 담겨있습니다.
오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예수님을 기억하는 성금요일입니다.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던 예수님을 기억하는 성금요일입니다.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주셨지만 배반당하셨던 예수님을 기억하는 성금요일입니다. 세례를 받고, 주님의 사랑을 받았지만 여전히 주님을 배반하고,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들의 잘못을 뉘우치는 성금요일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은 가난한 이, 아픈 이, 소외된 이, 죄인들에게는 좌절과 절망의 수난이요, 죽음이었습니다. 기득권을 지키려 했던 대사제와 바리사이파들에게는 승리를 알리는 수난이요, 죽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은 어둠의 세력을 이기는 빛의 승리요, 죽음을 넘어 우리를 구원하는 부활의 빛임을 알고 있습니다. 문득 예전에 읽었던 글이 생각납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는 것은 예전에 보는 것과는 다르다.’ 절망의 눈으로 바라보면 주님의 수난과 죽음은 어둠의 승리요, 삶의 허무함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면 주님의 수난과 죽음은 부활과 구원의 여정입니다.
주님 수난 성금요일을 지내면서 ‘사명’이라는 생활성가의 가사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주님이 홀로 가신 그 길을
나도 따라가오.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신 그 길을 나도 가오.
험한 산도 나는 괜찮소.
바다 끝이라도 나는 괜찮소.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
아버지 나를 보내주오.
나는 달려가겠소.
목숨도 아끼지 않겠소. 나를 보내주오.
세상이 나를 미워해도 나는 사랑하겠소.
세상을 구원한 십자가 나도 따라가오.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나를 사랑한 당신
이 작은 나를 받아주오 나도 사랑하오.
오늘 주님의 수난과 십자가상의 죽음을 생각하며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주님의 얼굴을 닦아 드렸던 베로니카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인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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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다 이루어졌다”라는 마지막 말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감하시는 우리의 주님. 그러나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어머니가 걱정되어 제자 요한에게 성모님을 부탁하시는 자상한 아들이십니다.
이제 그 자상한 아들, 훌륭한 스승은 우리의 곁을 떠나가십니다. 유다 대사제와 그 일행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부추긴 것은 놀라운 일이라기보다는 어쩌면 당연한 처사인 듯 보입니다. 왜냐하면 평소에도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을 눈엣가시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길까지도 함께할 것 같았던 제자 베드로가 “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요?”라는 사람들의 추궁에, “나는 아니오”라고 세 차례나 부인하는 모습은 우리의 마음을 서글프게 합니다. 그동안 예수님이 걸어오신 사랑의 삶이 외면당하는 느낌이 들어 더욱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상대방이 알고서도 받아주지 않는 혼자만의 사랑을 ‘외사랑’이라고 했던가요? 예수님의 사랑이 가슴 아픈 ‘외사랑’이 되어감에 더욱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고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삶이 ‘외사랑’에 머물지라도, 후회 없이 기쁨으로 아버지 뜻을 따르는 가장 행복한 길을 선택하십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행복의 길을 떠나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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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김영진 바르나바 신부님]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 그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그리고 예수님을 마주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분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라고 말하였다.(마르 15,37-39) 이 성경 말씀은 예수님께서 구세주로 파견되어 부여받은 임무를 십자가위에서 완수하시고 인간에게 구원의 은총과 믿음의 축복을 주시는 마지막 장면으로 늘 대단한 감동과 놀라운 구원의 기적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시편 22,2)라는 시편기도를 숨을 거두실 때까지 큰 소리로 계속 바치셨다.
인간을 대변하여 바치는 기도로 내용을 보면 아버지한테 조차 버림받은 것 같은 고독감과 아울러 아버지께 의탁하는 깊은 신뢰심을 갖고 예수님께서 구세주로 인간의 죽음을 완전히 겪으시겠다는 다짐이다.
결국 예수님께서 고통받는 야훼의 종으로 오셔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인내심을 갖고 온유와 겸손의 모습으로 끝까지 십자가 위에서 당신임무를 완수하신다. 그래서 당신 십자가의 죽음이 인간구원을 위한 희생제물 봉헌이 되고 인간의 죄를 씻는 십자가 제사가 되며 인간이 십자가의 은총으로 하느님과 만나 하나되는 사랑의 파스카 잔치가 된다. 이 십자가의 신비는 인생이 죽음으로 끝장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계신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열어준 다리가 되었다.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지므로 이제 주님께서 지성소에 숨어 계시지 않고 만백성에게 하느님의 정체를 드러내는 은총을 주신 것이다.
인간은 “예수님이 과연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이시구나”하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백인대장과 또 그와 함께 예수님을 지키던 아들이(마태 27,54) 이방인이었지만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고 신앙을 고백한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구원의 은총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귀감이 되었다. 여러분은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죽으신 예수님께서 과연 인간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이심을 믿습니까? 믿습니다. 우리 모두 성주간 동안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백인대장처럼 “이 사람이야말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셨구나”고 고백하며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남김없이 온전히 바쳐주신 주님께 우리도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리는 삶을 통해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동참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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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세상은 눈에 보이는 세상과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보이는 인간의 역사와 보이는 역사 속에 숨어있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보이는 역사 안에 들어있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를 우리는 흔히 신비라고 부릅니다.
사실, 현실적으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고통이나 슬픔, 악이나 죽음 등은 심각한 도전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불가항력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우리의 무력함과 연약함, 혼란과 비참함은 우리의 존재자체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되기도 합니다. 특히, 부당한 처사나 불의의 사고나 재난 등은 참으로 우리를 참담하게 만들고 슬픔과 고통 속으로 몰아갑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형을 당한 사건 앞에 서 있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인간들의 계획된 악이 저지른 사건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죽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교종 프란치스코의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그분의 수난은 사고가 아닙니다. 그분의 죽음은, 그 죽음은 (성경에 이미)‘기록되어 있습니다.’ ~경악할 만한 신비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보이는 역사 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가 있는 신비입니다. 곧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보이는 역사 안에 감추어져 있는 신비입니다.
그것은 그 고통이 기쁨이요, 그 패배가 승리요, 그 배척이 사랑이요, 그 어둠이 빛이요, 그 죽음이 생명이요 구원이라는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신비입니다. 또한 그 무력함은 전능함 안에서, 그 비참함은 거룩함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우리는 이 신비를 ‘그리스도의 부활’과 결합되지 않고서는 결코 알아들을 길이 없습니다.
오늘은 ‘주님 십자가의 신비’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참으로 인간의 이해로는 다 알 수 없는 신비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신비가 바로 “우리를 위해서”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죽음의 길을 능동적으로 의연한 모습으로 결연하게 가십니다. 어둠 속을 걷되 빛을 향하여 나아가며, 패배 당하되 승리로 나아가며, 죽음의 길로 걷되 생명의 길로 나아가며, 고통 속에서도 기쁨으로 걸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로 제시해주십니다. 비록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본래의 당신의 사랑에로 되돌아오게 이끄십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지고한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길’은 사랑의 길이며, ‘사랑을 완성하는 길’이 됩니다. “십자가의 죽음”이야말로 사랑의 완성이요, 동시에 완성된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말한다.
“십자가의 하느님의 침묵 속에 완성되어 있는 저 함성의 신비를 들으십시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면서, 결코 비통하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경배하며, 승리와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설혹 가슴 쓰린 일이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사실은, 우리네 가슴이 심하게 쓰리고 아려올 때, 바로 그 때가 오히려 우리 안에서 사랑의 십자가를 꽃 피우시고 계시는 그분을 보아야 할 때입니다. 바로 그 고통 안에서 예수님을 관상하여 할 때입니다.
부활은 십자가의 고통이 끝난 후에 오는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십자가 안에 이미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생명은 우리의 죽음 위에서 싹을 틔웁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고통과 죽음은 그분의 현존을 드러내는 장소입니다. 그 속에서 당신의 참된 사랑을 주십니다. 우리는 죽음의 십자가 안에서, 사랑을 퍼주고 계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이토록 십자가는 당신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신비, 곧 죽음을 통한 사랑의 신비를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주님! 오늘 우리는 당신 사랑의 십자가를 입 맞추며 경배합니다. 오, 참으로 아름다운, 이토록 시린, 우리의 말문을 막는, 형언할 수조차 없이 강한, 사랑의 십자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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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들은 예수님을 그곳에 모셨다.”(요한 18,42)
주님!
가슴이 이토록 쓰리고 아픔은
당신께서 제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계신 까닭입니다.
가시관을 쓰신 채 말입니다.
이토록 제 영혼이 떨고 있음은
당신께서 제 안에 동굴을 파고 들어와 좌정하고 계신 까닭입니다.
당신의 상처에서 젖을 먹이시느라고 말입니다.
깊은 침묵의 함성으로 속삭이는 그 사랑의 숨결을 듣게 하소서.
십자가에 걸려 있는 완성된 사랑의 향기를 맡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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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23,46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해서 돌아가신
'주님 수난 성금요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시간인,
오후 3시에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칩니다.
그리고 저녁수난예식 전례는, 독서와 수난복음으로 이루어진 '말씀 전례'와 '십자가 경배'와 '영성체'로 거행됩니다.
또한 오늘 우리는 예수님 죽음에 동참하는 의미로 '금육과 단식'을 하고, 이렇게 절제한 몫을 수난예식 때 '예루살렘 성지 보존헌금'으로 봉헌합니다.
오늘 묵상 나눔은
'그리스도와 함께 가는 십자가의 길'로 대신하면서 이 묵상에 함께 합니다.
.... ....
제1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을 묵상합시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그리스도의 말씀>
이제 십자가는 내 사랑의 작별을 고하는 자리가 되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목마르다."
"이제 다 이루었다."
말을 하려면 손과 발에 힘이 들어가야 하고,
조금만 꿈틀거려도 몸, 팔, 다리에 힘이 들어가면서
새로이 깨어난 아픔이 온몸에 신경에 흘러 퍼진다.
이제 달려 있을 만큼 달려 있다가
한번 죽을 내 목숨은 사람의 속성 다 비우고
가물가물... 마침내 숨을 거둔다.
<드리는 말씀>
예수님, 나의 하느님!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언제 오든, 어떻게 닥치든, 언젠가 있을 저의 죽음을
그 슬픔, 그 두려움과 함께 주님께 바칩니다.
어찌 제가 살 시간을
일초라도 더 늘릴 수 있겠습니까?
제 자신의 죄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의 죄의 대가로
저의 죽음을 주님께 바칩니다.
하느님, 오, 우리 하느님!
저희가 하고 있는 일 저희가 모르고 있사오니
저희를 버리지 마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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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다!>
요한 18,1-19,4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나다!>
뒤로 물러서지 않으며
결코 움츠러들지 않으며
아무런 아쉬움 없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다만
온 삶을 담아
군더더기 없는
단 한마디
나다!
외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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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 여인이 카페에 앉아 있는 파블로 피카소에게 다가와 냅킨에 무엇이든 좋으니 아무거나 그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낙서라도 해주면 적절한 대가를 치르겠다고 말하면서 말이지요. 이에 피카소는 30초 동안 끄적이며 냅킨에 그림을 그려주고는 1만 달러를 요구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천 만원이 넘는 금액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깜짝 놀라며 항의했지요.
“겨우 30초 동안 그렸잖아요.”
그러자 피카소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이 실력을 얻기까지 40년이 걸렸습니다.”
이런 습작도 현재 몇십 억에 거래되고 있지요. 따라서 1만 달러가 비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 가치를 알고 있었다면 분명히 1만 달러를 기쁜 마음으로 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노력의 가치를 인간 세상의 눈으로 헤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치는 노력의 강도를 통해서 더 높아집니다. 비록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알아주시며 나 자신의 만족도 노력의 강도를 통해서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수난 성금요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는 날입니다. 이는 주님 사랑의 최고조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당시의 사람들이 그 사랑을 알아봤을까요?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향해서 조롱과 모욕의 말을 던지고 실제로 뺨을 때리고 발로 차는 감히 해서는 안 될 말과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최고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늘에서 이 지상에 육화되어 오셨다는 것. 그리고 인간과 똑같이 되셔서 똑같은 삶을 사셨다는 것. 인간의 구원을 위해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것. 이처럼 하느님께서 행하신 노력의 강도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삶 안에서도 하느님께서 얼마나 큰 사랑을 위한 노력을 하고 계신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노력을 우리는 전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사랑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특히 하느님 입장에서 바라보는 사랑이 아닌 나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사랑만을 계속해서 요구합니다. 이제는 하느님께서 행하신 사랑을 주의 깊게 바라봐야 합니다. 특히 그 사랑의 크기가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바라보면서, 우리 역시 그런 사랑을 세상에 실천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의 사랑 안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구원이 멀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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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창조목적에 맞게 나를 사용하기>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 천하보다 소중한 한 글자 ‘나’
- 그 어떤 것도 이길 수 있는 두 글자 ‘우리’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세 글자 ‘사랑해’
- 평화를 가져오는 네 글자 ‘내 탓이오’
- 돈 안 드는 최고 동력 다섯 글자 ‘정말 잘했어’
- 더불어 사는 세상 만드는 여섯 글자 ‘우리 함께해요’
- 뜻을 이룬 사람들의 일곱 글자 ‘처음 그 마음으로’
- 인간을 돋보이게 하는 여덟 글자 ‘그런데도 불구하고’
- 다시 한번 일어서게 하는 아홉 글자 ‘지금도 늦지 않았단다’
-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열 글자 ‘내가 항상 네 곁에 있을게’
모두가 좋은 의미의 글자입니다. 내가 쓰고 있는 글과 말이 이렇게 좋은 의미를 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것이 하느님 창조목적에 맞게 나를 세상에서 잘 사용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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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품위있는 삶과 죽음을 위하여>
-진리, 공부, 순종-
요즘 참 나라 안팎이 어지럽기 짝이 없습니다. 말 그대로 내우외환입니다. 좀처럼 악순환의 질곡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이건 비단 우리의 경우뿐 아니라 온 세상 대부분 나라들이 겪는 현상입니다. 신문이나 인터넷 뉴스도 온통 부정적 어둔 뉴스들 뿐입니다.
결국은 사람이 문제입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 첨단 문명의 시대라 해도 사람은 그대로 인 것 같습니다. 좀처럼 변하지 않는 탐욕의 무지의 사람들같습니다. 참으로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사는 일이 평범한 듯 하지만 얼마나 본질적이고 중요한 일인지 깨닫습니다.
제 좋아하는 말중 불가의 용어가 청정욕淸靜慾입니다. 맑고 깨끗한 욕망입니다. 추하고 더러운 탐욕이 아니라 잘 살다 잘 죽고 싶은 거룩한 욕망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잘 사랑하고 싶은 욕망, 기도를 잘하고 싶은 욕망,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 성인이 되고 싶은 욕망 등 끝이 없습니다.
하여 오늘 주님 수난 성 금요일 강론 제목은 ‘품위있는 삶과 죽을을 위하여’로 정했습니다. 누구나의 마음 깊이 잠재해 있는 참 좋은 욕망이 맑고 향기로운 품위있는 삶과 죽음일 것입니다. 나라에는 국격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인격이 있고, 꽃에는 향기가 있듯이 사람에게도 향기가 있습니다. 과연 내 인격의 향기는 어떠할는지요.
요즘 파스카의 봄꽃들이 한창입니다. 참으로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다. 때되면 여지없이 만발한 봄꽃들의 향기가 수도원 공기를 가득 채워 꽃향기를 숨쉬는 느낌입니다. 꼬박 일년을 기다렸다가 때가 되자 일제히 피어난 파스카의 봄꽃들, 꽃처럼 반가운 만남 되려면 인고忍苦의 기다림이 꼭 필요하다는 좋은 진리를 배웁니다.
참으로 일년중 가장 아름다운 파스카의 봄꽃들 만발한 계절에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분 파스카의 예수님의 성삼일 전례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주님이자 스승이신 주님의 삶과 죽음을 기리며 우리의 삶과 죽음을 새롭게 점검해 보는 절호의 시기입니다. 죽음은 삶의 요약입니다. 죽음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삶입니다. 바로 오늘 요한의 수난복음이나 독서의 말씀을 통해서 잘 드러나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입니다.
그냥 기억하고 기념하라 있는 성삼일 파스카의 전례가 아니라 예수님을 배우고 닮아 예수님처럼 파스카의 삶을 살라고 선물처럼 주어진 파스카 성삼일의 전례입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맑고 향기로운, 품위있는 삶을 살다가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겠는지 그 방법을 나눕니다.
첫째, 진리입니다.
진리가 사랑입니다. 사랑이 지혜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진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연인이라 명명했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이요, 진리의 협력자라 명명했던 베네딕도 교황 16세입니다. 진리를 향한 청정욕은 얼마든 좋습니다. 진리야 말로 구도자들이자 수행자들인 우리 믿는 이들의 영원한 화두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진리를 깨달아 알아 갈수록 마음의 순수요 자유로운 삶입니다. 세상것들을 소유하면 자유로울 것 같지만 점차 소유의 노예, 탐욕의 노예가 되어 자유를 잃습니다. 참으로 진리의 맛을 본 사람들은 탐욕의 맛, 세상 맛, 돈맛을 잃어 버려 무욕의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진리의 맛으로 살 때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지혜의 사람, 빛의 사람, 하느님의 자녀로서 참 나를 삽니다.
“진리가 무엇이오?”
어리석은 빌라도는 진리이신 주님을 앞에 두고 진리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진리와 하나되어 온전히 하느님의 진리를 사신 우리 파스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알아 듣는다.”
참으로 진리를 사랑할 때, 진리 말씀을 실행할 때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을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평생 사랑할 유일한 대상은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파스카의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우리 삶의 영원한 목표이자 방향이 되시는 분은, 중심이자 의미가 되시는 분은 진리이신 주 예수님뿐입니다.
둘째, 공부입니다.
평생공부가 진리이신 예수님 공부입니다. 예수님 사랑, 예수님 공부, 예수님 닮기가 우리의 평생과제입니다. 공부해야 비로소 무지에서 벗어나 참 사람이 됩니다. 공부의 모범은 예수님이십니다. 평생 진리 탐구와 공부에 전념했던 예수님이셨기에 수난의 와중에서도 마음이 지극히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광란하는 폭도들의 지옥같은 현장 속에서도 요지부동 평화를 누리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막연한 공부가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진리 공부요, 참 사람이 되는 공부입니다. 공부에 대한 좋은 글을 발견했습니다.
“요컨대 인생사에서 공부는 혼자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이다. 요즘은 생사도 의료도 도움으로 외부 개입 여지가 있지만, 공부는 그렇지 않다. 맨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단 한가지 공부다. 취업이 안되는 시대라면, 공부를 하면 된다. 여기서 말하는 공부工夫는 글자 그대로 특정 분야에 자기 몸을 훈련하여 장인匠人이 되는 것이다. 거창한 얘기가 아니다. 공부는 내 몸이 세상이라는 공방工房에서 대장장이, 쇳물, 망치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변환을 거듭해, 기技와 예藝를 몸에 새기는 것이다.”
지식공부가 아니라 이런 장인이 되는 공부가 진짜 산공부입니다.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가 되는 공부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에게는 수도원의 정주터가 공방工房이 됩니다. 이런 수도원 공방의 공부인工夫人의 모범이, 자랑이 바로 우리 수도원의 배밭과 순대방 책임을 겸한 재무 담당의 마르코 수사와 주방장과 채소밭 책임을 겸한 부원장 스테파노 수사일 것입니다.
공부는 우리 분도수도자들에게 전혀 낯선 것이 아닙니다. 바로 성규 제4장, ‘착한 일의 도구들은 무엇인가’라는 장에서는 영적 장인을 위한 구체적 공부 항목이 74개가 나오며 다음 마지막 고무적인 결론 말씀도 투철한 장인정신으로 살 것을 촉구합니다.
“보라! 이런 것들이 영적 기술의 도구들이니, 우리가 이것들을 밤낮으로 끊임없이 채워 실천하고 심판의 날에 그것을 돌려드리면, 주께서 친히 약속하신 그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부지런히 실행할 장소는 수도원의 봉쇄 구역과 수도회 안에 정주하는 것이다.”
비단 정주의 분도회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각자 제자리에 정주하면서 공부의 장인이 되고자 영적으로 육적으로 기와 예를 갈고 닦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에는 신비가神祕家가 되고 공부에는 학자學者가 되고, 일에는 전문가專門家인 수도자가 된다면 정말 영육으로 온전한 장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에게 우선적인 것은 예수님을 공부하고 닮아 ‘사랑의 장인匠人’, ‘사랑의 달인達人’이 되는 것이며 이런 청정욕은 왕성할수록 좋습니다.
셋째, 순종입니다.
진리를 사랑하고 공부를 사랑하듯 순종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우리의 수도생활을, 모든 수행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정결을 사랑하고 가난을, 고독을, 침묵을, 경청을, 겸손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수행을 사랑하면 저절로 마음은 순수해지고 삶은 자유로워집니다. 이런 자유는 마침내 섬김의 사랑에서 완성됩니다.
침묵과 경청의 겸손도 결국은 순종을 위한 것입니다. 일상의 크고 작은 일들에 순종할 때 마지막 죽음의 순종도 잘 하여 선종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순종의 모범은 예수님이십니다. 수난복음 전반의 예수님께 감지되는 사실은 진리에 순종입니다. 마지막 임종어가 순종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참 깊은 울림을 주는 두 말마디입니다.
“목마르다”
평생 늘 진리를, 하느님을 사랑했고 늘 목말라했던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다 이루어졌다.”
마지막 순종을 통한 사명의 성취임을 보여줍니다. 히브리서 역시 예수님의 순종을 찬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 역시 그대로 죽기까지 철저히 자신을 비운 수난 복음의 예수님께 대한 묘사처럼 들립니다. 사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수난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주님의 종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바로 주님의 종으로서 예수님의 철저한 자기비움의 순종은 그대로 우리의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아침성무일도 독서후,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셨도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도다.” 라는 응송도 깊은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믿는 이들 누구나의 마음 속 깊은 갈망은 참으로 하느님 자녀다운 삶, 품위있는 삶과 죽음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에 대한 답을 주셨습니다. 진리에 대한 사랑, 공부에 대한 사랑, 순종에 대한 사랑으로, 진리의 사람, 공부의 사람, 순종의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히브리서의 우렁한 권고 말씀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이런 대사제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시며 도와 주십니다. 그러니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한 때에 도움이 되도록 합시다.”(히브4,14-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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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주님 수난 예식의 말씀에는 온 몸으로 고백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제1독서 대목인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는 예수님이 겪으신 수난의 의미와 이유를 풀어 줍니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2,5)
예언자는 온갖 수모와 고통으로 일그러진 주님의 종의 모습을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분 고난의 이유는 당신 자신의 잘못에 있지 않고 오로지 "우리" 때문입니다.
그분이 그토록 간절히 바란 것, 당신 목숨을 내놓고라도 지켜 주려 하신 것은 "우리의 평화"입니다. 평화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면서 우리 각자에게 부여하신 '자기다움'에 충만하고 온전히 머무르는 상태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 안에 보석처럼 감추어진 하느님의 모상은 죄의 상처와 악의 유혹으로 훼손되고 오염되어 평화를 잃어버렸지요. 예수님은 이를 새로이 창조하러 오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죽음에 던지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우리를 병들게 하는 모든 죄악에 대해 승리를 선포하십니다.
제2독서는 예수님의 순종과 구원의 관계를 알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히브 4,8-9)
이 순종은 사랑의 다른 표현입니다. 성자께서 아버지께 보이신 무한한 신뢰와 사랑의 표현이 그분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이지요. 이처럼 예수님도 당신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이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보증이 되어 주십니다.
이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우리의 임금은 황제뿐이오."(요한 19,15)
우리의 평화를 위해 당신을 바치시는 분 앞에서 그분 백성이 외치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주님의 백성은 예수님을 이방인 손에 넘겨 죽음으로 내몰아갑니다. 그리고는 외치지요. 우리는 하느님 백성이 아니라 이방 민족의 통치자의 백성이라고요!
이스라엘이 수세기를 걸쳐 유지해 온 하느님 백성이라는 정체성이 이토록 쉽게 부서지는 신기루였음이 마음 아픕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도 이 외침에서 자유롭지 못하지요. 우리 역시 돈이나 권력, 안전지대 같은 우상이 우리의 주인이라고 암묵적으로 외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게 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다인들이 두려워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요한 19,38)
수난복음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오늘은 특히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눈에 띕니다. 며칠 전 마르코 복음의 수난기에서는 그가 "당당히 들어가 청하였다"고 했지요.(마르 15,43 참조) 유다인들이 두려워서 숨기던 신념을 오히려 스승의 처절한 실패 앞에서 당당히 드러낼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추락과 몰락의 현실이 유다인 눈으로는 조롱거리일 뿐이지만, 신앙의 눈으로는 더할 수 없는 사랑의 증거니까요. 무죄하신 분이 스스로 희생양이 되시면서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우리를 향해 소리 없이 외치고 계십니다. "이만-------큼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정열은 저승처럼 억센 것.
그 열기는 불의 열기
더할 나의 없이 격렬한 불길이랍니다.
큰 물도 사랑을 끌 수 없고
강물도 휩쓸어가지 못한답니다."(아가 8,6-7)
이 아가의 노래처럼, 성금요일은 예수님께서 온 몸을 던져 우리에게 사랑을 고백하신 날입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결행하신 그 사랑은, 사랑이 죽음보다 강함을 증거합니다. 이 사랑을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빼앗긴 성목요일에 이어, 그분을 잃은 오늘은 참 서럽고 힘든 날입니다. 무덤에 묻히신 주님을 그리워하는 성토요일 역시 갈 곳을 잃은 공허함으로 헛헛하기만 하고요.
사랑하는 벗님! 이 진한 슬픔의 시간을 건너면서, 우리, 이것 하나만은 잊지 맙시다. 이 모든 게 "이만-------큼 너를 사랑한다"는 그분의 진심어린 고백이라는 것을요.
주님이신 분이 죽기까지 사랑하신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복된 성삼일 여정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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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부활의 힘을 믿으시오” “그대 안에 부활의 힘이 있습니다.”
죽음을 정복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내 안에 계시니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침상이라고 하는 안일과 잠에서 불구자로 머물러 있던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인생의 여정에 만나는 온갖 두려움을 껴안고 움켜잡고 담대히 맞서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으로 정복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어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시고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었으며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선포하신 주님을 모시면 만사형통할 것입니다.
-김홍언 <영성 노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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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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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kbFuc36W-JQ&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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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다 이루어졌다."(요한 19, 30)
죽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신비이다.
십자가가
사랑이다.
십자가의
여정을 통해
완성되는
사랑의 참된
여정이다.
참된 사랑은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십자가에서
기꺼이
죽는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우리의
십자가이다.
삶의 의미는
십자가의
의미이다.
하느님과
우리는
십자가로
연결되어 있는
십자가의 운명
공동체이다.
십자가를
질 때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는
십자가의 은총이다.
십자가는
누가 대신
져줄 수는 없다.
우리가
지고 가야
한다.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십자가로
구원하신다.
생명은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현존이다.
아픔과
목마름에
함께 하시는
십자가의
주님이시다.
십자가의
여정은
우리 삶의
여정이다.
인생이
십자가이다.
우리의
하느님을
십자가에서
만나는
주님 수난
성금요일이다.
사랑하기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시다.
우리의 사랑은
어떠한가.
십자가는
거짓사랑을
정화한다.
참된 사랑은
십자가를
따른다.
수난도 죽음도
십자가의
은총임을
믿는다.
죽어야
부활이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죽음은
새 생명의
시작이다.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는
시간이다.
++++++++++++++++++
"다 이루어졌다."(요한 19, 30)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모두는
죽습니다.
어떻게 살다
죽어야할지를
십자가에서
배우는 시간입니다.
십자가의 충고와
교훈을 기억하는
아픈 성금요일입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십자가 길뿐입니다.
생명의 근원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로
완성하십니다.
십자가로 우리를
안아주십니다.
십자가로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구원의 완성은 분명
십자가의 죽음임을
보여주십니다.
서로의 사랑을
완성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죽음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곳 또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마침내 우리 자신을
버리는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어도 못 잊을
십자가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늘의 생명은
모두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생명에겐
십자가가 있고
십자가에는
구원이 있음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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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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