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대 총선이 끝났다. 나와 아내도 어제 오후에 차를 몰고 투표장으로 가서 민주 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다하고 돌아왔다. 어제밤에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면서도 사이사이에 개표방송을 지켜보았다. 1시 이후에 대략적인 윤곽이 드러난 뒤에는 굳이 계속 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티브이를 끄고서는 밤 명상을 하고 잠을 청했다.
매일 아침 어머니와 전화 통화를 나누는데, 특별한 일이 없으면 주로 날씨와 어머니의 산책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어제 선거가 있었기에 오늘 오전에 통화할 때는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니는 민주당 후보를 찍으셨다고 하시면서 주변의 자기 또래의 노인들 중에 민주당을 찍은 사람은 아마도 자기밖에 없을 것이라고 하셨다. 부산은 보수 세력이 강하고, 이곳 해운대도 마찬가지여서 자신의 표가 사표가 될 것이라 짐작했지만, 정권 심판의 차원에서 야당을 택한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만 87세가 넘은 갱상도 할무이의 정치적 안목이 정말 훌륭합니더. 그것도 70대 전에는 늘 보수 쪽에만 찍다가 늙어서 진보 쪽으로 찍으시다니 굉장합니더. 젊을 때 진보를 지지하던 사람도 나이 먹으면 보수 쪽으로 기우는 게 일반적인데.."
어머니도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마, 늘 그런 거는 아니고, 그때 그때 상황을 보고 찍는다. 나는 집에서 매일 조선일보도 보고 티브이 조선도 자주 보고 하지. 그래도 투표장에 갈 때는 어느 한쪽 말에 치우치지 않고 양쪽 말을 다 들은 뒤에 신중하게 판단해서 한 표를 행사한데이."
나는 말했다. "어무이 나이 쯤 되면 치매에 걸린 사람도 많고, 치매에 걸리지 않아도 그저 지역색깔을 따르거나 노인이라는 이유로 아무 생각없이 한 표를 행사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예. 지는 어무이가 어느 당을 찍으셨는가에 상관없이 스스로의 사고력과 판단력에 따라 신중하게 한 표를 행사하신 것이 참으로 기쁩니더."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마, 그건 아마 내가 아직도 책을 내려놓지 않기 때문이겠재. 내가 티브이 연속극 보는 것도 좋아하지만, 나머지 시간에는 틈만 나면 책을 읽는데이. 아직도 책을 읽는 것이 재미가 있네. 니가 쓴 두꺼운 <인문학 동서양을 꿰뚫다>도 옛날에 읽었지만 근래에 다시 한번 읽었다. 다시 읽어보니 옛날에는 안 보이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데. 어렵기는 어려워도 그래도 잘 읽었데이."
나는 말했다. "어무이 대단하십니더. 그 책은 상당히 어려운 책인데... 지가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하고 그래서 나중에 교수가 된 것이 아마도 어무이 유전자 영향 때문인가 봅니더. 아무튼, 어머니, 건강 관리 잘 하시면서 오래 오래 독서의 기쁨을 계속 누리시기를 이 아들이 간절히 기원합니더."
전화를 끊고 생각하니, 나는 참으로 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구순이 가까운 노모가 육체적으로 건강을 잘 유지하시고 정신적으로 치매가 걸리지 않은 것도 다행인데, 저렇게 매일 독서를 하시면서 건강한 사고력을 유지하고 계시니 이 얼마나 행복한가. 더군다나 그냥 소설책이나 수필집이 아니라 아들이 쓴 꽤 어려운 인문학 책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니 읽으시다니...
내 어머니의 최종 학력은 중학교이고, 그것도 625전쟁 중에 다녔기 때문에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하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고등학교를 그렇게 가고 싶어했지만, 외할머니께서 "기집애가 공부 많이 해서 뭐하노"라 하시면서 막으셨다고 한다. 그 뒤로 집안일을 도우며 지내다가 만 21살 봄에 생면부지의 아버지와 결혼하여 그해 겨울에 나를 낳으셨고, 그뒤 세 아이를 더 낳고 키우면서 평생을 살림만 하셨다.
지금도 독서를 좋아하고 역사, 문화 등등 다양한 방면에 관심이 많으신 것은 아마도 어릴 때 채우지 못한 지적 욕구를 늦게라도 채우기 위함이리라. 사람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릴 때 충족되지 못했던 욕구들을 하나씩 채워나가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라 생각한다. 너무 늦은 나이라 외적 성취야 기대할 수 없겠지만 스스로 만족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래야 마음 깊은 곳에 미련이나 아쉬움이 줄어들 것이고, 나중에 눈을 감을 때도 좀 더 편하게 떠날 수 있지 않을까?
우손 박석
첫댓글 음악 카페에 왠 정치 이야기???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부모 자식 사이의 이야기, 우리들의 삶의 이야기입니다.^^
공감이 가는 따스한 이야기 이네요 ~
@청산유수(강우권) 감사합니다.^^
어제 어머니와 통화할 때는 이번 총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오늘은 음악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즘 읽고 계신 책이 평론가 강헌이 쓴 <전복과 반전의 순간>인데, 거기 보니 유럽의 베토벤과 모차르트, 미국의 재즈와 로컨롤, 식민지 시대의 한국 대중 가요, 70년대 통기타 음악 이야기가 나온다고 하셨다. 그리고 <사의 찬미>를 부르고 현해탄의 배에서 자살한 윤심덕에 대해 타살설도 나온다고 알려주셨다.
헐~ 윤심덕의 타살설? 그건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음악에 대해 나보다 더 많이 아시다니...^^
사실, 어머니가 보시는 책은 대부분 내 동생이 준 책이다. 내 동생은 소설가라서 이런저런 책을 많이 사서 읽는데 그중에서 재미있는 것을 어머니께 드린다. 그 책은 나도 구미가 당겨 읽어 보고 싶다.
아무튼 매일 어머니와 통화를 하는 것은 내 삶의 큰 기쁨이자 힘이다.^^
어머님과 통화를 자주 오래 하시는 박교수님은 진짜 효자!
@핏가이 효자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제가 장남이어서 당연히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데 여러 사정으로 그럴 형편이 못되어 매일 통화하는 것일 뿐입니다.
장수하시면서 아들과 통화하는 모친의 복일까요 너른 돌 님의 복일까요?부럽고 고맙습니다
어머니와 매일 통화하면서 이런 저런 재미 있는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는 것은 저의 복이지요.
이렇게 어머니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무탈하시고 또 책까지 읽으시니 그저 하늘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대한하신 어머님이십니다.
시대를 앞서가는 신식 어머님입니다.
오래 건강 하시고 장수 하시길....
감사합니다.
생로병사야 인간의 숙명이니 어머니도 언젠가는 저 하늘로 돌아가시겠지요.
그저 이 시간이 조금이라도 길어지기를 하늘에 빌 따름입니다.
어머님께서는 너른돌님과 매일 통화하시며 이런저런 재밌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실 것입니다.
또한 어머님의 건강하심 그리고 책을 읽으시며 다양한 방면에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하루하루를 잘 꾸려가시니 너른돌님 또한 즐거움이시고 복이 많으신 거 맞습니다.^^"
참으로 보기에 아름답고 부러운 일입니다. 어머님께서 오래오래 건강하시기를 바래봅니다.
너른돌님 어머님 만세!!^^"
네 맞는 말씀입니다. 어머님의 즐거움이 바로 저의 행복이지요. 저도 어머니가 오래도록 즐거움을 누리셔서 저의 행복이 조금이라도 오래 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좋은 덕담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효자 이십니다.
우리집은 부모님 모두 병원에 계시는 관계로..
투표 안했습니다. 막내 여동생이 부모님을 잘 모시니..
자기 몸도 불편한 우리 막내,
아이구 부모님이 모두 병원에 계시는군요.
막내 여동생이 정말 효녀네요. 그래도 본인의 건강도 잘 챙기시기를 기원합니다.
아직 따스한 체온을 느낄 수 있는 어머님이 계신것이 큰 복이고 부럽네요.
저는 두분 다...
효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제다이님 오랜만이네요.^^
맞습니다. 어머니의 건강이 저의 큰 행복이지요.
감사드립니다.^^
참! 다정하신 어머님 이십니다,
그 연세에 아들이 쓴 책을 두번씩이나 읽으시다요!
보통의 어머님들과는 다른 아들 사랑 이십니다,
또한 정치 철학도 뚜렸한 분이시고요,
지당님 오랫만입니다.
제가 쓴 그 책이 사실 꽤 어려운 책인데, 아들이 쓴 책이니까 어려워도 꾹 참고 두 번이나 보신 것 같습니다.^^
감사드립니다.^^